금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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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의 금산사
1.1. 역사
1.2. 가람
1.2.1. 김제 금산사 미륵전
1.2.1.1. 외부 링크
1.2.1.2. 국보 제62호
1.3. 보물
1.4. 교통편
1.5. 기타
2. 중국의 금산사


한자 : 金山寺 / 로마자 : Geumsansa


1. 한국의 금산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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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금산사.jpg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모악산 남서부 기슭에 위치한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이다.

사실 대한민국의 국민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만한 절인데, 고려시대 초반인 후삼국시대 최후반에 후백제의 왕이었던 견훤이 장남 신검에 의해 강제로 감금되었던 비운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금산사 코앞에는 후백제시대에 지어졌다고 하는 석성의 허물어진 홍예문이 남아 있었는데, 2010년대에 복원하였다. 또한, 후백제 시기에는 이곳에 행궁이 들어서기도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로 인해서, 드라마 태조 왕건 당시, 견훤의 말년 금산사 감금 생활-탈출 촬영을 이 곳에서 실제로 찍었다.[1]

2008년 금산사 일대가 사적 제496호로 지정되었다.


1.1. 역사[편집]


백제 법왕 원년(599년)에 창건되었고 8세기 때 승려 진표가 중창[2]했다. 불교를 너무나 사랑했던 고려시대에 전성기를 이루었다가 1598년 정유재란왜군이 호남 지역에서 노략질을 했던 당시 사찰을 방화하여[3] 사찰 전체가 불에 타 없어지는 바람에 그 이전의 기록은 모두 사라졌다.

조선시대에는 병자호란 발발 1년 전인 인조 13년(1635년)에 중건되었고 1934년과 해방 이후에 여러 차례에 걸쳐서 일부 법전을 재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2. 가람[편집]


주요 건물로 대표 법당인 미륵전, 대장전, 명부전, 나한전 등이 있으며, 정문 역할을 하는 거대한 일주문이 있다.

다만, 다들 착각하는 것이 금산사의 근본중당은 미륵전이 아니다. 물론 미륵전이 경내에 가장 크게 지어진 법당이고 국보로 지정되어 전국적으로 유명하기는 하나, 사실 금산사는 근처의 귀신사(국신사,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소재)와 함께 대표적인 화엄종 계열의 사찰이다. 따라서 금산사의 근본중당은 미륵전도 아니요, 일반적인 사찰처럼 석가모니를 본존불로 하는 대웅전, 대웅보전이나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본존불 대신 안치한 적멸보궁도 아닌, 화엄경에 등장하는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삼는 대적광전이다.

화엄경에서는 비로자나불을 설명할 때에 큰 고요함(大寂)과 지혜의 큰 빛(光)을 지닌 부처라 가르치는데, 이것은 비로자나불이 석가모니나 아미타여래, 약사여래 등 모든 부처의 본체이자 진리의 몸이라는 의미이다. 바로 여기에서 대적광전(大寂光殿)이라는 명칭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화엄종 계열의 사찰들은 모두 근본중당으로 '대적광전'이 들어서 있고, 금산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1.2.1. 김제 금산사 미륵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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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국보 제62호
김제 금산사 미륵전
金堤 金山寺 彌勒殿


소재지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모악15길 1, 금산사 (금산리)
분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불전
수량/면적
1동
지정연도
1962년 12월 20일
제작시기
조선 인조 13년(1636)
파일:금산사미륵전.jpg
金堤 金山寺 彌勒殿

인조 13년(1635)에 지어진 금산사 미륵전은 상당히 특이한 건물로, 한국 사찰 중에서는 유일한 3층 법당이다. 단, 내부는 누각 구조가 아닌 통층이라 위로 올라갈 수는 없다. 복원물이 아닌 한국 고건축물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3층 구조이므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국보 제62호로 지정되었다. 단순히 3층 중층 건조물일 뿐만 아니라 목탑 구조와 유사한 점이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은 목탑법주사 팔상전이 유일하기 때문에 매우 귀중한 고건축이다.
파일:attachment/GMtemple02.jpg
파일:attachment/GMtemple01.jpg
미륵전 실내
미륵전 전경
미륵전의 구조도 특이한데, 조각난 나무들을 철물로 엮어 만든 희귀한 형식의 긴 기둥 4개가 1층부터 3층까지 건물 전체를 떠 받치고 있다.[4] 이는 사실상 목탑에 더 가까운 모습이고, 단지 목탑의 심주를 4개로 분산된 것이나 비슷하다. 최근에는 구조에 문제가 생겨서 철 기둥으로 보강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미륵전의 미륵보살상은 옥내 입불로서는 세계 최대의 크기라고 한다, 삼존불 중 가운데 미륵불상 높이가 11.82 m, 좌측(법화림보살) 우측(대묘상보살)의 상은 8.8 m이다. 본래 미륵전에 있던 불상이 일제강점기에 화재로 소실되자 미륵보살상을 새로 만든 것인데, 이는 조각가 김복진의 작품으로 석고로 만들어졌다. 본 미륵보살상은 김복진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며, 그 가치를 인정 받아 2014년 10월 29일 국가등록문화재 제619호로 지정됐다. 여담으로 증산 계열 종교의 교조인 증산 강일순이 생전에 중요하게 여겨 여러 번 금산사 미륵불상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증산교의 교인들이 참배하러 자주 찾아온다고 한다.[5] 증산계열 경전에서는 육장금불(六丈金佛) 등으로 부른다.[6]

1.2.1.1. 외부 링크[편집]



1.2.1.2. 국보 제62호[편집]


모악산에 자리한 금산사는 백제 법왕 원년(599)에 지은 절로 신라 혜공왕 2년(766)에 진표율사가 다시 지었다.

미륵전은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조선 인조 13년(1635)에 다시 지은 뒤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거대한 미륵존불을 모신 법당으로 용화전·산호전·장륙전이라고도 한다. 1층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는 ‘미륵전(彌勒殿)’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1층과 2층은 앞면 5칸·옆면 4칸이고, 3층은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지붕 네 모서리 끝에는 층마다 모두 얇은 기둥(활주)이 지붕 무게를 받치고 있다.

건물 안쪽은 3층 전체가 하나로 터진 통층이며, 제일 높은 기둥을 하나의 통나무가 아닌 몇 개를 이어서 사용한 것이 특이하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웅대하고 안정된 느낌을 준다.



1.3. 보물[편집]


국보로 지정된 미륵전 말고도 10개나 되는 보물이 있다. 목록은 다음과 같으며, 제22호부터 제29호까지는 1963년 1월 21일 처음 보물 지정 당시에 일괄 지정(일제강점기에 최초로 지정.)되었으며, 나머지 두 문화재는 1985년 1월 9일에 지정되었다.

이외에도 대적광전이 보물 제476호로 지정되었었으나, 1986년 원인미상의 화재로 인한 불이 나서 없어지는 바람에(...) 보물 지정이 해제되었다. 지금 남아 있는 대적광전은 화재 이후인 1990년에 복원한 건물이다. 참고로 방화로 소실된 옛 금산사 대적광전에는 벽면에 국내에 보기드문 고려시대의 탱화가 그려져 잘 보존되어 있었고, 조선중기에 만든 중형 범종도 있었는데 법당 자체가 소실되는 바람에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여담이지만 미륵전에도 불이 옮겨 붙을뻔 했으나, 근처에 있던 소화기 덕분에 구사일생 했다.

1.4. 교통편[편집]


대중교통으로 올 경우 전주역, 풍남문, 전주터미널 방향에서 전주 버스 79을 타고 오는 방법과 김제역 방향에서 김제 버스 5을 타고 오는 방법이 있다. 둘다 비교적 자주 오는 노선들이기 때문에 이용에 큰 불편은 없다. 전주에서도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기 때문에 오전일찍 전주에 도착하여 금산사를 먼저 찍은후 전주시내 관광을 해도 충분하다.

자가용으로 올 경우, 호남고속도로 금산사IC에서 나와서 712번 지방도를 따라 오면 도착한다. 금산사 IC에서 금산사 밑 주차장까지는 약 10~15분 정도 걸린다.

1.5. 기타[편집]


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구국삼화상(救國三和尙) 중 뇌묵 처영대사가 승군을 이끌고 거병한 곳이 바로 이곳 금산사이다.

일제강점기 때 승려 용명이 일본 광산업자들에게 맞서며 절을 지키다가 순교하였다. 지금도 절 주변에 금 광산이 남아 있으며,수학여행 온 어느 여고생이 새끼손가락만한 금을 주웠다는 얘기도 스님들에게 내려져 온다.

이 곳에서 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원평에는 매우 희귀한 '불교종립학교', 즉 불교 계통의 미션스쿨금산중학교금산고등학교가 있다. 동국대학교 재단이 운영하는 사립학교이고, 현재 금산중학교는 K리그1 전북 현대 모터스의 U-15 구단이 운영되는 학교다. 미션스쿨이므로 당연히 종교수업시간이 있고, 불교 교과서를 가지고 불교를 배운다. 반야심경 외우기는 기본이고 일부 학생은 목탁도 칠 수 있다. 당연히 금산사와의 교류도 잦으며, 소속 학교의 불교학생회 소속 학생이나 졸업생들은 원할 경우 신도증을 발급받아 금산사를 도립공원 통행료 없이 언제든 입장 가능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일반 관광객들에게는 출입금지 지역인 금산사 경내의 사무소와 스님들의 수행처이자 거처인 승방까지 출입할 수 있다.

학교 내에 법회를 여는 법당이 설치되어 있고, 중학교와 고등학교 불교학생회가 조직되어 소속 학생들은 주말(토요일)마다 법회를 연다. 과거에는 부처님오신날 즈음에는 금산사 경내에 가거나 학교에서 연등을 만들어 부처님오신날 당일 밤에 학교 운동장 가득히 연등을 설치하고 기념했으며, 일부는 룸비니 등의 타지역 불교학생회 조직들과 함께 전주 등에서 행해지는 연등행렬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 곳 주변은 각 종교의 성지도 많다. 우선 증산도의 창시자 강증산(강일순)이 금산사 근처, 제비산 자락 아래 오리알터에서 태어났으며, 그가 활동하던 동곡마을의 동곡약방이 대순진리회의 지파에 의해 중건되어 있다.이 외에 대한불교 용화종으로 개명한 용화교 역시 바로 이곳에서 탄생했으며, 금산사 바로 근처인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제비창골 안쪽에 위치한 용화사(성화대)라는 곳이 그 발원지이다.

원불교 역시 금산사 근교인 원평이 원불교 창시자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주요성지이며, 지어진 것으로 따지자면 1888년이고 현위치로 옮겨진 것을 따지면 1895년 10월이 건립연도인 천주교의 주요성지 중 하나인 천주교 수류성당 역시 이 근처(김제시 금산면 화율리)에 있다.

또한 금산사 아랫마을인 용화동에 위치한 금산교회도 수류성당 못지않은, 무려 대한제국 시절인 1905년에 미국인 선교사 테이트(Tate, L. B.)가 건축한, ㄱ자 형태의 한옥교회이기도 하다. ㄱ자 구조는 예배시 남녀의 출입구 및 예배구역을 나누어, 전통사상이었던 남녀유별을 지키기 위한 구조이다. 거기에 더해 증산도 이전의, 민족종교의 원형인 동학 신자들이 이 근방에 모여살아 원평에는 동학의 집강소가 있었고, 동학농민혁명 당시에 동학교도들이 일본군과 혈전을 벌인 '귀미란 전투'가 있었던 귀미란 마을이 원평에 있다. 또, 금산사 주차장 바로 옆 금산마을에는 최소 1980년대 이전부터 흔히 남묘 호랑계교로 일컬어지는 SGI, 즉 창가학회의 법당이 있었다.

이처럼 작은 시골 마을에 여러 종교가 난립해 있는 이유는 주변 마을의 이름인 '용화동'이란 이름으로 보아, 아마도 임진왜란 이후 금산사 미륵전 때문에 미륵신앙이 주변에 퍼지면서 일어난 일로 보인다. 여튼 이유가 어쨌건, 모악산 인근은 계룡산 인근에 못지않은 다수의 소수종교가 모여있는 터전이다. 그렇다 보니 해마다 불교, 개신교, 가톨릭, 천도교, 원불교 등이 모여 종교간 화합을 위한 걷기 행사를 인근에서 진행한다.

바로 옆에는 '안양동'이라는, 과거 금산사에 딸려있던 부속마을이 남아있다. 금산사 도립공원 매표소 위치보다 훨씬 안쪽에 있는 마을이다보니, 해당 마을 주민의 경우엔 당연히 도립공원 출입료가 면제된다. 아주 작은 마을이고, 도립공원 관리사무소에서 마을주민들을 모두 알고 있으니 혹시라도 금산사 방문 시 통행료 아깝다고 마을 주민을 사칭하지는 말자.

일본의 추리 소설가 마츠모토 세이초가 쓴 「백제의 풀」(원제: 百済の草)에서 작중 사건의 주요 무대로 금산사가 등장한다. 1964년에 발간된 세이초의 소설집 《현란한 유리(絢爛たる流離)》에 실려 있으며, 한국에서는 북스피어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2. 중국의 금산사[편집]


송나라시대의 설화인 백사전에 등장하는 진강(鎭江, Zhenjiang)의 금산사. 실제로 진강시에 있는 절이다. 한국의 금산사와 한자가 같다. 백사전은 아주 인기있는 설화로, 경극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엉뚱하게도 일본 최초의 애니메이션의 소재가 이 백사전이었다. 자세한 것은 백사전 항목 참고. 그리고 금산이 중국어로 샌프란시스코멜버른을 뜻하기 때문에[8] 가끔씩 샌프란시스코나 멜버른 등으로 패러디되는 경우도 있는데 채지충 고전만화시리즈 백사전편에서도 금산사 주지승이 금산사를 소개할 때 사람들이 금캐러 샌프란시스코로 몰려드는 것으로 패러디되었다.
[1] 위 전경 사진 중 금강계단 아래에서 왼쪽의 건물이다.[2] 크게 확장[3] 임진왜란 당시 유명한 승장이었던 사명대사(유정)의 스승, 서산대사(휴정)의 또다른 제자인 처영대사가 승군을 조직하여 출군한 곳이기 때문.[4] 이런 방식은 백제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일본 건축양식에 많이 남아있는데 그냥 나무 기둥을 세운 것보다 더 많은 하중을 견딜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백제시대부터 이어져 온 건축이라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5] 강일순이 생전에 "나를 보고 싶다면 금산사 미륵불을 찾아오라."라고 말했으므로 제자들이 금산사 미륵전과 미륵불상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일제강점기에 증산의 제자 김형렬이 용화교를 창시하면서 본부를 금산사 내부에 두었을 정도였다.[6] 장(丈)이라는 단위는 10척을 가리킨다. 보통 한 척을 구한말에 일본이 사용하는 곡척과 통일한 길이인 30 cm 정도로 보지만, 조선시대에는 길이가 다른 여러 척 단위를 사용하였으며, 그 중 주척은 약 20 cm이다. 그러므로 주척 기준으로 6장(60척)이라고 한다면 약 12m로 대충 맞아떨어진다.[7] 이 삼층석탑은 금산사 경내에서 멀리 떨어진 산 속에 위치한다.[8] 이게 골드러쉬 당시에 샌프란시스코로 이민온 중국인 노동자들이 꽤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중에 멜버른도 금산으로 불러졌기 때문에 멜버른과 구분하려고 구금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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