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열차분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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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천상열차분야지도 국립고궁박물관.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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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4년(1395년) 새겨진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
숙종 복각본
목각 모사본
天象列次分野之圖[1]

1. 개요
2. 배경
3. 구성
4. 의의
5. 현대
6.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
6.1. 국보 제228호
7. 복각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
7.1. 보물 제837호
8.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8호
9. 논란: 원본 천문도는 정말 고구려 때의 것인가?
10. 한자



1. 개요[편집]


한국 천문학 최고의 자랑거리인 문화재로, 현재까지 발견된 천문도 중 관측연대 기준 세계 최초[2]로 만들어진 전천(全天) 천문도이자 고경도 석판 위에 새겨진 전천 천문도다. 현재 석각본, 모사본(석각본 탁본), 필사본이 모두 무사히 존재하며, 태조 때 만들어진 원본은 1985년 국보 제228호로 지정됐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경이로울 정도의 정밀도를 자랑하며 만들어졌던 당시는 물론이고 그 이후 300년간 만들어진 전천 천문도를 통틀어도 독보적인 수준을 자랑한다. 조선 건국 후 얼마 되지도 않아 이 정도의 천문도를 만들었다는 것은, 한민족이 이미 조선시대 이전부터 빼어난 천문 과학력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일단 유래를 보더라도 조선 이전 시기의 유물을 새로이 고쳐 새긴 것이다.[3] 이런 어마어마한 스케일과 정확성 덕분에 천상열차분야지도는 한국의 세계기록유산 등재 후보 1순위로 꼽힌다.

한글 번역본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2005년 도전 골든벨 대구능인고 편에서 골든벨 문제로 출제되었다.

2. 배경[편집]


때는 조선 태조(이성계)가 고려를 멸하고 갓 조선을 건국하고 정통성 살리기에 고심하던 차에, 평양 대동강 물에 빠져 사라졌던 천문도의 인본(영인본)을 가져온 이가 있어 서운관(書雲觀)[4]에서 그 오차를 교정하여[5] 권근, 류방택, 권중화 등 11명이 태조 4년(1395)에 만들었다.[6] 양면으로 만들었는데 기록에 따라서는 세종 때까지 해서 완성시켰다고 본다.

임진왜란 때 궁궐이 불에 타면서 잊혀졌다가 재발견 되었는데, 세월의 흐름으로 많이 닳았기에 숙종 13년(1687) 새로 돌에 새겨 둘 다 궁 안에 보존하였다. 새롭게 갈아엎은 판은 아니기에 과거의 원판[7]과 큰 차이는 없다고 봐도 좋다.


3. 구성[편집]


성도의 구성은 그 중심에 북극성이 있고, 그 북극성을 중심으로 하여 관측지의 북극성의 고도에 따른 작은 원과 더 큰 적도 및 황도권이 그려져 있다. 원의 주위에는 28수(宿, 별자리)의 명칭과 적도수도(赤度宿度)가 기록되어 있고, 각 별자리의 거성(距星)과 북극성을 연결하는 선에 의하여 개개의 별의 입수도(入宿度)가 눈으로도 매우 정밀하게 읽어갈 수 있게 그려져 있다. 관측의 글에는 28수(宿) 거극분도(去極分度), 24절기의 동틀 무렵과 저물 무렵에 자오선을 지나는 별에 대한 글, 12국 분야(分野) 및 성수분도(星宿分度), 에 대한 글, 논천설(論天說)[8], 천문도 작성 경과, 작성자들의 관직과 성명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별 1467개가 별자리 283개를 이루는데, 별자리 개수는 현대 천문학에서 정한 88개보다 많다.[9] 눈금은 365도. 12지와 황도 12궁이 있다.


4. 의의[편집]


태조 때 본은 사실 고구려 원판으로부터 보정이 잘 안 된 것으로, 태종 때 좀더 보정이 되는데 이로 추측된 시기를 보면 도리어 고구려 천문도가 중국보다 좀 더 일찍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통해 7세기 ~ 8세기 일본 기토라 고분[10]과의 연계설도 제기된다. 가장 특징적인 점은 밝기에 따라 크기를 세분한 것이 중국보다 낫다는 점.

또 하나의 특징은 중국에는 없는 4개의 별로 이루어진 '종대부(宗大夫)'라는 별자리다. 이는 임진왜란 직후인 17세기에 일본의 유명한 천문학자인 시부카와 하루미[11]가 제작한 천문도들[12]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그와 관련된 증거가 바로 이 '종대부' 별자리이다.


5. 현대[편집]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진가를 맨 처음 알아본 사람은 미국인이었다. 1910년대 - 1930년대 평양 숭실학교연희전문학교 수물과에서 근무했던 W. C. 루퍼스가 1936년 출간한 「한국 천문학」이란 책에서 "동양의 천문관이 집약된 섬세하고도 정확한 천문도"라 격찬한게 최초이다. 하긴 근대를 거치고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과학관련 문화재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되었겠냐만은. 루퍼스는 「한국 천문학」에서 개성부립박물관(1946년에 국립중앙박물관 개성분관으로 승격)에 고려인의 천문관이 담긴 동경(구리 거울)이 남아 있다고 했으나 현존 여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삼팔선 근처에 있던 개성분관 주변에서 계속 국지전이 일어나 개성분관의 안위를 불안하게 여긴 김재원 초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이 6.25 전쟁이 터지기 전인 1949년에 개성분관의 소장품들은 몽땅 남쪽으로 싹쓸이해왔기 때문에, 해방 전에 유실되었거나 아예 처음부터 없었고, 루퍼스가 잘못된 정보를 남긴 것일 수도 있다.[13]

이후 해방과 6.25 전쟁을 거치다가 도로 잊혔고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각석이 다시 발견되는데, 각석이 다시 발견된 곳은 경복궁 관상감(왕립 천문대)의 흠경각이 아니라 창경궁 명정전 추녀 밑이었다. 그 유명한 창경원 한복판. 거기서 평범한 돌덩어리풀밭에 내팽겨친채 발에 밟히고, 소풍시민들이 돗자리를 깔고 석각 위에서 도시락을 먹고, 아이들은 그 위에서 뛰어놀며 모래 장난을 했다고. 전상운 교수가 어이 없어 했을 만도 하다.

1985년 8월 3일 태조 본이 국보로, 8월 9일에는 숙종 본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2006년 신한은행선조 때 만들어진 일본 텐리대학의 목각본을 구입해 들여온바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재.

2007년 1월 12일부로 새로 발행된 1만원권 지폐 뒷면에 지도의 모사본이 있다. 참고로 지폐 제작 과정에서 고등 과학원 박창범 교수가 별자리 위치가 엉망으로 기재되어 있고 별의 숫자가 누락되어 있으며 별의 밝기 표시 또한 무시당해 있다는 주장을 제기했고 한국은행 발권국 관게자는 "디자인 측면에 초점을 두다보니 일부 누락되고 수정된 부분이 있으나 학계 최고의 전문가들에게 자문 받아 만든거라 별 문제가 없다." 밝혔고, 이후 그대로 제작되었다.'천상열차분야지도' 별자리가 왜 이 모양이야?(2007년, 주간 한국) 한국은행의 이런 변명은 천문학계 석학들의 지시를 받고도 제대로 된 도안을 못 만들었다는 자백이나 마찬가지라는 평가를 받는다. 비슷한 논란으로 오만원권 지폐의 월매도가 있다.

2013년 기준 초등학교 5학년 사회교육자료에 천상분야열차지도라고 나오기도 했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 공연에서 천상열차분야지도를 형상화 하였다.


6.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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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國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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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국보 제228호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
天象列次分野之圖 刻石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로 12, 국립고궁박물관 (세종로,국립고궁박물관)
분류
유물 / 과학기술 / 천문지리기구 / 천문
수량/시설
1점
지정연도
1985년 8월 9일
제작시기
조선 태조 4년(1396)

파일:국보228호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jpg

태조 4년(1395년) 새겨진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 1985년 국보 제228호로 지정됐다.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크기 가로 122.8cm, 세로 200.9cm의 거대한 오석[14]에 별자리 지도를 새겨놨다.

시간이 흐르면서 마모된 부분이 많아 판독이 불가능한 부분이 상당히 있다. 그러나 숙종본이 만들어지면서 마모된 부분을 해석할 수 있다. 숙종본이 만들어진 것도 마모 때문에 내용이 잘 안 보여서였다.


6.1. 국보 제228호[편집]



직육면체의 돌에 천체의 형상을 새겨 놓은 것으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왕조의 권위를 드러내고자 권근, 유방택 등 11명의 천문학자들에게 명을 내려 만들도록 한 것이다.

과거의 천문도를 표본으로 삼아 그 오차를 고쳐 완성하였는데, 두 부분으로 나누어 내용을 배치하고 있다. 윗부분에는 짧은 설명과 함께 별자리그림이 새겨져 있고, 아래부분에는 천문도의 이름, 작성 배경과 과정, 만든 사람의 이름 및 만든 때가 적혀 있다.

별자리 그림에는 중심에 북극을 두고 태양이 지나는 길인 황도(黃道)와 남북극 가운데로 적도(赤道)를 나타내었다. 또한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별들이 총망라되어, 황도 부근의 하늘을 12등분한 후 1,467개의 별들을 점으로 표시하였다. 이 그림을 통해 해, 달, 5행성(수성, 금성, 토성, 화성, 목성)의 움직임을 알 수 있고, 그 위치에 따라 절기를 구분할 수도 있다.

태조 4년(1395)에 제작된 이 석각천문도는 중국 남송의 『순우천문도』[15]

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오래된 것이다. 지금은 표면이 심하게 깎여나가서 알아보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으나, 옛 천문도의 원형을 짐작케 하는 귀중한 유물이다.



7. 복각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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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본과 그 탁본들.

숙종 때 복각한 석각본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내용의 완전한 판독이 가능하다. 1985년 보물 제837호로 지정됐다. 원본과 마찬가지로 현재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크기는 가로 108.5㎝, 세로 206.5㎝이다. 비석 본체보다 탁본이 더 잘 알려져 있어 흑요석, 검은 대리석, 오석 등으로 재질에서 혼동이 많이 일어나는 듯 한데, 숙종 복각본의 재질은 백운암[16]이다.

태조 때의 각석과 두드러지는 차이는 제목의 위치가 다르다는 것이다. 태조 시기에 만들어진 원본은 '천상열차분야지도'라는 제목이 아래쪽에 있는 반면에, 숙종 때의 것은 제목이 위에 있는 것으로 서로 구분이 가능하다.


7.1. 보물 제837호[편집]



복각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複刻天象列次分野之圖 刻石)은 별자리를 돌에 새겨 놓은 천문도이다.

둥글게 그린 하늘 안에 1,467개의 별이 그려져 있고 아래에는 천문도를 만들게 된 경위와 참여자 명단이 적혀 있다. 구도상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내용은 태조 4년(1395)에 처음 만든 것과 완전히 같고, 설명문으로는 권근의 글이 실려있다. 전체의 구성이 처음 새긴 것보다 더 좋고 당당하다.

1395년 처음 새긴 것을 돌이 닳아 잘 보이지 않게 되어 숙종 13년(1687)에 다시 새겨 놓은 것으로, 천문도를 제작하게 된 이유와 과정 등은『증보문헌비고』,『상위고』와『서운관지』에 잘 나타나 있다.



8.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8호[편집]


이 작품은 1687년(숙종 13)에 석각(石刻)으로 제작된 천상열차분야지도(보물 제837호)를 기본으로 하여 하늘의 별자리를 종이에 필사한 천문도로, 하늘의 모양(별자리)을 차례대로 나눈 그림이란 뜻이다. 화면 제일 위 상단에는 구획하여 향우측에서 향좌측으로 행서체로 ‘天象列次分野地圖’라 썼으며, 그 아래로 천문도와 명문이 기록되어 있다.

이 천문도의 정확한 제작 경위는 알 수 없으나, 천문역법을 익히기 위해 음양과(陰陽科) 출신의 집안에서 교재용으로 만들었을 가능성과 관상감(觀象監, 조선시대 천문역법을 관장하던 기관) 내부에서 포폄고과(褒貶考課)를 위해 잘 알아볼 수 있게 만들었을 개연성도 있다.

여러 겹의 장지로 겹쳐 제작하여 견고하며, 구성과 내용도 빠진 부분이 없이 상세하여 민간인을 위한 천문도와는 차이를 보인다.

이 천문도는 숙종복각본(보물 제837호)을 기본으로 하여 조선후기인 대체로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지는 필사본으로, 지금까지 알려져 온 여타의 천상열차분야지도 가운데 가장 세밀하고 별자리의 크기와 색깔의 차이로 식별이 쉽게 된 것이다.

1742년에 제작된 신법천문도(新法天文圖)가 보물 제848호로 지정되었음을 볼 때 이 천문도가 비록 구본(舊本)을 베낀 것이기는 하지만, 보존상태, 내용, 과학 문화재의 희소성을 감안할 때 사료적 가치가 높은 문화재이다.



9. 논란: 원본 천문도는 정말 고구려 때의 것인가?[편집]


위에서도 얘기했듯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설명 부분에 따르면 본래 석각본은 평양성에 있었으나 병란 중 대동강 물에 빠져서 잃어버렸고, 그 석각본의 탁본을 이용해서 복원했다는 문구가 나온다. 평양성이라 하였으므로 그 평양이 수도였던 고구려를 흔히 연상하게 된다. 이 천문도를 연구했던 칼 루퍼스(Carl Rufus)도 1913년천문도의 원도는 고구려 때의 것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나중에 신라 효소왕 1년(692년)에 승려 도증(道證)이 당나라에서 천문도를 가져왔듯이 그 고구려의 천문도도 당나라에서 하사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후 루퍼스의 글은 여러 학자의 논문과 동아시아 과학사 분야의 권위 있는 저술에 인용됨으로써 한동안 정설로 굳어져버렸으나 이것은 이미 틀린 학설이란 것이 증명되었다.

루퍼스 박사의 논문을 읽어보면 그 틀린 부분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루퍼스의 결론은 권별(權鼈)의 『해동잡록(海東雜錄)』에 수록된 문구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데, 그 『해동잡록』의 원문에는 “여계(麗季)의 병란으로 인하여 강에 빠졌다.”라고 되어 있다. 이 구절은 권근의 도설에는 단지 “병란으로 인하여 강에 빠졌다.”라고 되어 있으니, 권별이 자기의 상식으로 판단하여 “여계(麗季)”라는 어구를 추가한 것이다. 계(季)는 어떤 역사 시기를 말기를 뜻한다. 문제는 여(麗)이다. 여당전쟁(麗唐戰爭)과 같이 이 글자가 고구려를 뜻하는 약자일까? 조선 시대의 문헌에서 이 글자는 지극히 일반적으로 고려(高麗)를 뜻한다. 더군다나, 루퍼스와 동시대인 1934년에 출간된 『경성부사(京城府史)』에도 “이 천문도는 전 왕조인 고려의 천문도를 바탕으로 하였다.”라고 소개되어 있다.#

태조 이성계가 만든 천상열차분야지도 석각본의 원본(대동강에서 잃어버렸다는 것) 제작 시기 추정을 피휘(避諱)를 통해 접근한 논문이 있다.# 중국이나 조선과 달리, 고려는 죽은 선대 임금의 휘까지도 모조리 피휘하는 등 엄격한 피휘법을 유지하였기에, 고려 시대 문헌의 연대를 파악하는 데 피휘 여부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런데 천상열차분야지도에 표기된 별 중에 기존에 건성(建星)이라 불리는 별은 피휘되어 입성(立星)으로 이름이 바뀌어 석각본에 새겨졌는데, '입(立)'은 고려 태조 왕건의 휘인 '건(建)'을 피휘한 글자인 것.[17] 이를 통한 석각본 원본 제작 시기 연구에 따르면 4가지 가능성을 가정하고 있다.

  1. 고려 태조의 휘를 피휘했으므로 원본인 평양 석각은 고려 시대의 것이다.
  2. 원본인 평양 석각은 고려 시대의 것인데 탁본을 만든 사람이 건(建)으로 환원한 것을, 조선의 태조 석각을 만든 사람이 다시 입(立)으로 환원하였다.
  3. 탁본을 만든 사람이 고려 시대의 피휘에 맞도록 글자를 입(立)으로 수정하였다. 오래된 탁본을 변조하거나, 평양 석각이 고려 시대까지 남아 있어야 한다.
  4. 조선 태조 석각을 만든 조선 사람이 고려 태조인 왕건(王建)의 이름을 피휘하였다.

논문에서는 위 2, 3, 4의 경우의 수를 하나하나 따져 그 가능성이 희박함을 논증해 원본 석각이 고려 때의 것(1번)이라는 결론을 내고 있는데, 이중 마지막 4번에 대한 가능성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평양 석각과 탁본에 모두 건성(建星)으로 되어 있었을 경우이다. 이 경우는, 조선 태조 당시의 서운관의 천문학자들이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만들면서 탁본의 건성(建星)을 일부러 입성(立星)으로 고쳤다는 말이 된다. 조선 초기의 천문학자들은 전문성을 잃지 않기 위해 고려 시대 천문학자들이 세습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비록 고려 멸망 이후 시점이지만 아직 고려 시대의 천문학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18]

또한 조선 초기에 간행된 고려사, 고려사절요, 삼국사기 중간본(重刊本), 삼국유사 중간본 등에 고려의 국왕들의 이름에 대한 대자피휘가 복원되지 않고 그대로 남았던 것처럼 조선 초기의 분위기가 피휘를 엄격하게 따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원사료에 입성(立星)으로 되어 있는 것을 그대로 입성(立星)으로 남겨둔 것이다. 건성(建星)으로 되어 있던 것을 일부러 입성(立星)으로 고치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러한 조작은 천상열차분야지도가 갖는 정치적인 위상, 즉 왕조 교체의 정당성을 제공하고 조선의 정통성을 표상하는 역할에 정면으로 반하여, 오히려 반역에 해당하는 일이기 때문이다.[19]

안상현, “천상열차분야지도에 나오는 고려시대 피휘와 천문도의 기원”, 2011년, 고궁문화 제4호 149쪽, 국립고궁박물관



10. 한자[편집]



하늘 형상(天象)을 차(次)와 분야(分野)에 따라 나열(列)한 것의(之) 그림(圖).
'차'는 1년을 12등분(월) 차이를 둔 것, '분야'는 별자리(황도 12궁 등)와 관련 깊게 영역을 나눈 것을 의미한다.
천상 열차 분야 지도 아니다

[1] 하늘의 모습(천상)을 각각 12개의 차로 나누고(열차), 북극성을 중심으로 28수로 나누어(분야) 그린 그림(지도)이다. [2] 제작연대 기준으로는 2번째이며 제작연대 기준 첫 번째 천문도는 남송시대에 만들어진 순우천문도(淳祐天文圖, 1247)이다. 남송의 황상(黃裳, 1146~1194)이 남송 광종(光宗, 1147~1200) 시기(1190)에 그린 천문도를 왕치원(王致遠)이 남송 이종(理宗, 1205~1264) 순우(淳祐) 7년(1247)에 새겼기에 이와 같은 이름을 얻었다. 천문도의 별자리 그림들을 바탕으로 이 천문도가 그려졌을 당시의 관측위치와 그 시대를 역산한 결과, 관측위치는 북위로 약 35도로 북송(北宋)의 수도인 개봉부의 위도와 동일하였고, 시대적으로는 북송 원풍년간(元豊, 1078~1085)의 밤하늘을 그린 것으로 확인되었다. 현재는 중국 소주(蘇州)의 공자묘에 있다.[3] 얼마 전까지는 고구려 시대의 원본 유물을 복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원본은 고구려가 아닌 고려 시대의 것으로 비정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이 지지를 얻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목차 9. 항목을 참고. 다만, 함안군 말이산 고분군에서도 고분 덮개돌에 별자리를 새긴 것이 발견되는 등 한반도의 고대 국가들이 삼국시대부터 발달한 천문학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4] 고려, 조선 초기에 천문을 관측하던 기관으로 고려 충렬왕 34년(1308) 태사국(太史局)과 사천감(司天監)을 통합하여 만들어졌다. 이후 몇 차례의 개편을 거치다가 1372년 서운관으로 명명되었고 조선 초기까지 이 이름으로 이어져오던 중 조선 세종 7년(1425)에 관상감이란 이름으로 개칭된다.[5] 능력상의 오차도 있으나, 무엇보다 세차운동이나 평양한성위도 상의 문제가 크다. 물론 조선 초와 600년 차이나는 현대 역시 조선 때의 천상열차분야지도는 보정을 해야 실제 하늘과 비교할 수 있다.[6] 기록상으로는 태조 4년(1395) 12월이지만, 음력이기 때문에 율리우스력으로 환산하면 1396년 1월이다.[7] 전술한 바와 같이 지금까지 원판이 4~6세기 고구려의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고구려가 아닌 고려 시대의 것이라는 주장이 지지를 얻고 있으므로 이에 대해서는 아래 9.항 참조.[8] 대략 천원지방에 가깝다.[9] 현대 천문학의 88개 별자리는 총 1564개 항성이 있지만,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48개 별자리만 있었다. 현재의 88개는 1928년에 국제천문연맹 1차 총회에서 결정, 표준화한 것이다. 또한 별자리란 약속일 뿐이다. 별자리 개념이 안 잡혀 있으면 우리는 293개나 관측했는데 서양은 겨우 88개이니 우리의 관측이 우수하다 하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런 말은 절대 아니다.[10] 나라 현 아스카촌에 있는 고분으로 7세기 말 ~ 8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 천장에 천문도가 그려져 있는데 이 천문도가 고구려 천문도를 토대로 그린 것이라는 학설이 나오고 있다.[11] 澁川春海, 1639~1715. 일본 에도 막부시대 초기의 천문역법가, 지도제작자, 바둑기사, 신도(神道)방면의 인물이다. 본래 성은 야스이(安井)였다가 다시 야스이(保井)로, 마지막에는 시부카와라는 성으로 고쳤다고 알려져 있다. 고천문 분야로만 한정해서 말하자면, 이 인물은 오카노이 겐테이(岡野井玄貞)라는 인물에게서 천문역법을 배웠는데, 오카노이는 1643년 일본에 조선통신사로 왔던 조선인 나산 박안기(螺山 朴安期: 1608~1682?)에게서 조선 천문학과 역법을 배웠다. 이것은 이후 시부카와가 조선의 역법과 천문학적 인식을 배움으로써 이를 일본에 맞게 펴낸 계기가 되었는데, 그 결과물로 역법분야에서는 조선의 『칠정산(七政算) 내외편』을 일본식으로 재구축한 『정향력(貞享曆, 1685)』이 나왔고, 천문도 분야에서는 뒤에서 언급할 천상열차지도와 천문분야지도가 나왔다.[12] '천상열차지도(天象列次之圖, 1670년)'와 '천문분야지도(天文分野之圖, 1677년)'[13] 루퍼스가 말한 동경의 존재는 현재 확인할 수 없지만, 그가 이야기한 것과 비슷한 조선시대의 유물로는 경남 양산시 통도사 성보박물관에서 보관 중인 금동천문도(보물 제 1373호)가 있다.[14] 고급 비석과 벼루의 재료인 검은 점판암 오석을 흑요석이나 검은 대리암으로 많이들 착각한다. 찾아보면 재질이 두 가지 중에서 오락가락하는 경우, 실제 제질은 오석인 경우가 많다. 이런 분야에서 젬병인 국립국어원당연하다시피 착각중이라 하고, 박물관 당국도 마찬가지다.[15] 남송 이종 시절인 순우淳祐 7년(1247) 제작되어 쑤저우문묘에 설치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석각 천문도이다. '순우천문도'라는 명칭는 제작 당시의 연호인 순우(淳祐)에서 따왔는데, 소재지 쑤저우(蘇州)의 지명을 딴 '소주천문도'라는 명칭이 좀 더 널리 쓰인다.[16] 박물관 당국은 대리석이라고 설명.[17] 물론 고려 시대의 오랜 피휘 결과 '건성'이라는 명칭 자체가 '입성'으로 바뀌어 굳어졌을 가능성도 있지 않느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으나, 충렬왕 이후 조선 태종 때까지의 천문기록에는 건성을 대부분 '건성'으로 기록한 것이 압도적이다.[18] 애초에 고려와 조선 양조는 연속성을 띤다. 조선 왕조로 교체될 때 왕위는 물론이고 정부기관 또한 그대로 물려받았다.[19] 쉽게 말해서 고려시대에는 고려 국왕을 피휘하지 않는 것이 역적질이지만, 오히려 반대로 조선시대에는 고려 국왕을 피휘하는 것이 역적질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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