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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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국보 제288호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扶餘 陵山里寺址 石造舍利龕


소재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 국립부여박물관 (동남리,국립부여박물관)
분류
유물 / 불교공예 / 사리장치 / 사리장치
수량/면적
1점
지정연도
1996년 5월 30일
제작시기
백제시대(567년)

파일:국보288호부여능산리사지석조사리감.jpg

1. 개요
2. 내용
2.1. 발견 경위
2.2. 상세 내용
3. 외부 링크
4. 국보 제288호


1. 개요[편집]


扶餘 陵山里寺址 石造舍利龕.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은 1995년에 충청남도 부여군에 위치한 능산리사지에서 학술 발굴조사를 통해 발견된, 사리를 보관하기 위한 목적의 화강암감실이다.

본 석조사리감의 표면에는 명문 20자가 새겨졌는데, 여기에 절에 석조사리감을 공양한 연대(창왕 13년)가 명확하게 명시되어 창왕 13년(567)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명문 중 '백제 창왕'이라는 글자가 있어, 이 사리감을 '백제 창왕명 석조사리감'이나 '창왕십삼년명사리감'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본 유물이 발견된 능산리사지는 능사지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사적 제434호로 지정되었다. 절터의 좌편에는 사적 제58호 나성이, 절터의 우편에는 사적 제14호로 지정된 능산리 고분군이 있다. 또한 능산리사지에서는 본 석조사리감의 발견에 앞서서 1993년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되기도 하였다.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은 1996년 국보 제288호로 지정되었고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이 소장 중이다.


2. 내용[편집]



2.1. 발견 경위[편집]


파일:부소산성과나성.jpg
사비도성과 부여나성
사진 우측의 동나성과 능산리 고분군 사이에 능사(능산리사지)가 있다.[1]
능산리사지는 부여 나성 유적과 능산리 고분군 사이 골짜기에 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이곳이 절터라는 것마저도 잊히고 1990년대 무렵에는 골짜기에 계단식 논밭들이 들어서 있었다. 물론 위치가 위치인지라 여기에 뭔가 중요한 유적이 있지 않을까 추측했으므로, 1992년 충남대 박물관 팀이 1차로 발굴조사를 실시하긴 했지만 이때는 별달리 주목할 만한 유물이 나오지 않았다.

파일:능산리 고분군 분포도.jpg
능산리 고분군 고분 분포도. 지도 좌측 중단에서 하단까지 칠해져 있는 초록색 영역이 능산리사지이다.
지도에 나온 등고선을 보면 능산리사지가 능선 사이 골짜기에 위치한다는 걸 알 수 있다.
1차 발굴조사 이후, 부여군은 이 논밭 자리에 기존의 사적지이자 관광지인 부여 능산리 고분군의 부속 주차장 확장 공사를 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공사를 시작하기 전(1993년 12월)에 실시한 2차 발굴조사[2]에서 백제금동대향로라는 초대박 유물이 나오는 잭팟이 터졌다.

파일:부여나성동나성.jpg
정비 당시 능산리사지 전경
금동대향로가 출토되자 일대의 중요성이 급상승하여 나성과 능산리 고분군 사이 골짜기 유적지(능산리사지)에 추가로 발굴조사가 이어졌고,[3] 추가 발굴조사 결과 이 유적지는 백제 왕릉들 옆에 왕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기원사찰임이 드러났다. 그리고 1995년 10월에 행해진 능산리사지 4차 발굴조사에서, 절터 가운데에 위치한 목탑 터의 심초석[4] 하부에서 발견된 유물이 바로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이다.[5]


2.2. 상세 내용[편집]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은 전체 높이 74 cm, 너비 50 cm이며, 사리감의 가운데는 높이 45 cm, 너비와 깊이는 약 25 cm인 큰 터널형 감실이 있다. 감실은 바윗돌을 두 단으로 파내려가서 조성한 것인데, 안쪽 단에는 사리 장치를 모시고 바깥쪽 단에는 작은 문을 설치했다고 추측한다. 사리감이나 감실의 윗면은 둥근 아치형이다. 석조사리감에는 발견 당시부터 사리감의 감실에 봉안되었을 사리장치와 사리장엄구가 없었다. 능산리에 있었던 이 절은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폐사된 듯한데, 폐사될 때 석조사리감도 목탑과 같이 훼손되면서 사리장엄구 일체도 사라졌다고 추측한다.

사실 본 석조사리감은 외형만 보면 별로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인다. 얼핏 보면 큰 구멍을 뚫고 적당히 모양을 다듬은 바윗돌이나 다름없는 데다 사리감 내부에 모셨던 사리장엄구도 현전하지 않는데 굳이 왜 국보로 지정되었는지 언뜻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본 석조사리감은 역사적 가치를 대단히 높게 인정받는데, 이는 바로 감실 양 옆의 사리감 표면에 새긴 명문 스무 자 때문이다. 이 명문은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지석에 새긴 글씨와 비슷하게 남북조시대의 북조계 서체(예서풍)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파일:국보288호부여능산리사지석조사리감명문탁본.jpg

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

백제창왕십삼년태세재 정해매형공주공양사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명문

해석하자면 백제 창왕 13년 정해년(567년)에 왕의 누이인 공주가 공양한 사리라는 뜻이다.[6] 여기서 창왕은 곧 백제의 위덕왕을 일컫는데, 삼국사기에 창왕은 위덕왕의 다른 호칭이고 성왕의 아들로 554년에 왕위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위덕왕이 즉위한 해를 원년으로 하여[7] 기록했기 때문에 위덕왕(창왕) 13년은 566년(병술년)으로 명문과 맞지 않는다. 하지만 임금이 즉위한 이듬해를 1년으로 헤아렸다면[8] 창왕 13년은 567년이고 간지로도 '정해년'이라 명문과 맞는다. 사리를 공양한 연도가 사리감에 기록되었으니 사리감도 당연히 같은 연도에 공양했으리라 생각할 수 있고, 따라서 본 석조사리감 역시 567년에 제작되었다고 추측한다.

현대까지 남은 백제의 글이 지극히 드물고 그나마 있는 것도 실전된 부분이 많은데,[9] 본 명문은 내용이 온전하게 전해지는 백제의 글로는 1971년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무령왕릉 지석, 무령왕비 은팔찌에 새겨진 명문 등에 이은 두 번째 발견이라는 점과 명문에서 명확한 절대연대가 확인되어 절의 창건년을 확실하게 추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10] 절대연대가 확인되면 고질적인 기록 부족에 시달리는 고대 한반도 역사 연구에 도움이 크게 된다. 예를 들어 백제금동대향로는 석조사리감이 발견된 곳에서 약 20 m가량 떨어진 가까운 곳에서 발견되었는데, 사리감에 적힌 명문 덕분에 백제금동대향로의 제작년도도 역시 이와 비슷한 시기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사리의 공양자도 명문에서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비록 절의 본래 명칭은 여전히 모르지만, 명문 덕분에 어떤 이유로[11] 창건된 사찰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은 백제 시절의 명문이 남아 기록 부족에 시달리는 한반도 고대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되며 능산리사지가 백제의 절터들 가운데서 최초로 창건연대가 밝혀지는 데에 지대한 역할을 하는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대단히 높게 평가되는 유물이다. 그 역사적 가치와 중요성을 인정받아 유물이 발견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96년 5월 30일 국보 제288호로 지정되었다.


3. 외부 링크[편집]




4. 국보 제288호[편집]



백제 때 사리를 보관하는 용기로, 능산리 절터의 중앙부에 자리한 목탑 자리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출토 당시 이미 사리감이 훼손된 상태로 사리 용기는 없었다. 사리감은 위쪽은 원형, 아래쪽은 판판한 터널형으로 높이 74㎝, 가로·세로 50㎝이다. 감실 내부의 크기는 높이 45㎝ 정도로 파내었으며, 내부에 사리 장치를 놓고 문을 설치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턱이 마련되어 있다.

감실의 좌·우 양 쪽에 각각 중국 남북조 시대의 서체인 예서(隸書)풍의 글자가 10자씩 새겨져 있다. 명문(銘文)에 의하면 성왕(聖王)의 아들로 554년 왕위에 오른 창왕(昌王)[위덕왕(威德王)]에 의해 567년 만들어 졌으며, 성왕(聖王)의 따님이자 창왕(昌王)의 여자 형제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하였다는 내용으로 파악된다.

이 사리감은 백제 역사 연구에 새로운 금석문 자료로서 백제와 중국과의 문화교류의 일면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사리를 봉안한 연대와 공양자가 분명하고, 백제 절터로서는 절의 창건연대가 당시의 유물에 의해 최초로 밝혀진 작품으로서 그 중요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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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진 상에 나온 서나성과 남나성은 조사 결과 실존하지 않는다고 확인되었다.[2] 1차 발굴조사에서 별달리 주목할 만한 유물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추가 발굴조사 없이 그대로 주차장 확장 공사가 시작될 뻔하였지만, 천만다행으로 2차 발굴조사를 할 수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링크 참조 #[3]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된 무렵에는 발굴조사에서도 여기가 정확히 어떤 유적인지 명확하게 드러나진 않았다. 이때만 해도 금동대향로가 발견됐으니 여기가 공방 유적이 아닐까 추정하는 수준이었다. 추가 조사 후로는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된 위치가 공방 터는 터로되, 사찰 부속 공방 시설이었다고 추측한다.[4] 목탑의 주춧돌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일반적으로는 심초석 위에 중심 기둥을 세우고 심초석의 안이나 아래에 사리를 봉안한다.[5] 본 석조사리감은 발견 당시 심초석 내부에 안치되지 않고 심초석 외부 하단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6] 자형은 '口 아래 兀'로, 兄의 이체자(異體字)로 보는 경우, '매형공주(妹兄公主)'의 뜻은 여러 가지로 해석들 한다. 그 자체가 공주의 봉작명이라는 의견부터, 왕의 누이인 '형공주', '매형'과 '공주', 혹은 자매 중에서 장(長)공주, 즉 맏이 공주라는 해석 등등이 있다.봉작명이면 위덕왕의 누이가 아니고 위덕왕의 딸일 수도 있잖아[7] 이를 즉위년칭원법이라고 한다.[8] 이를 유년칭원법이라고 한다.[9] 이에 해당하는 백제의 금석문으로는 사택지적비가 있다.[10] 본 사리감은 목탑에 봉안되었는데, 일반적으로 사리는 사리감과 같은 사리장엄구와 함께 탑에 모시고 탑은 절을 건립하면서 같이 세우기 때문에 이를 통해서 절의 창건년을 추정할 수 있다.[11] 왕과 같은 지배층들의 명복을 빌기 위한 목적으로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