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 월출산 마애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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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영암 월출산 마애여래좌상1.jpg

영암 월출산 마애여래좌상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국보 제144호
영암 월출산 마애여래좌상
靈巖 月出山 磨崖如來坐像


소재지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회문리 산26-8번지
분류
유물 / 불교조각 / 석조 / 불상
수량/면적
1구
지정연도
1973년 3월 2일
제작시기
통일신라시대 후기

1. 개요
2. 내용
3. 외부 링크
4. 국보 제 144호



1. 개요[편집]


靈巖 月出山 磨崖如來坐像. 전라남도 영암군 월출산 구정봉 아래 화강암 한 면을 부조로 새겨 만든 [1] 통일신라시대 마애불 좌상.

현재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회문리 산26-8번지에 소재하고 국보 제144호로 지정되었다.


2. 내용[편집]


파일:영암 월출산 마애여래좌상2.jpg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만든 높이 8.6m의 부조상(浮彫像)으로, 당시 신라인들이 거대한 화강암 면을 통째로 우묵하게 파서 다듬으며 그 안에 불상을 새겼다. 화강암은 조각의 재료로 쓰기엔 너무 가공하기 어려운 관계로 전 세계적으로 대리석제 공예품보다 수량이 훨씬 적은데, 지금으로부터 천여 년 전 신라인들이 길도 제대로 나지 않은 산 속 깊이 들어가 거대한 화강암 절벽을 통째로 조각했다는 것은 당시 신라의 석재 공예술이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한 사례라 하겠다. 월출산 600 m 고지에 있는 큰 암벽에 서해 쪽을 향하여 조각했다.

당시 신라인들이 이 불상을 새긴 이유를 두고 통일신라 시대와 고려 시대에 걸쳐 전남 영암 지역이 중국이나 인도, 동남아 등 남방으로 가는 해로의 시발지였다는 점에서 뱃길이 무사하기를 빌기 위해 새겼다는 설이 있다.문화유산채널 : 하늘아래 첫 번째 불상 영암 월출산 마애여래좌상 혹은 통일신라 내 백제 유민들의 발원으로 새겨진 백제 계통의 것이라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이 불상이 통일신라 시대가 아닌, 고려 초기에 만들어졌다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들은 마애좌상이 취한 항마촉지인이 석가모니불 고유의 수인이지만, 인간 관점에서 항마촉지인은 영원한 제압과 부동성(不動性)을 상징하고, 따라서 고려 개국 당시 서남해안 반대 세력을 제압한 이 지역 호족의 위상과 관련이 있었음을 암시한다고 여긴다.

소발(素髮)의 머리 위에는 크고 높은 육계(肉髻)를 표현했다. 약간 치켜 올라간 듯하면서 지그시 내리뜬 과 오뚝한 콧날, 꽉 다문 얼굴은 박력 있는 표현이다. 어깨까지 늘어져 길고 큰 편이며 짧은 목에 신라 특유의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또한 떡 벌어진 당당한 어깨와 풍만한 가슴은 이 불상의 위용을 한층 돋보이게 한다.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린 얇은 옷자락은 가슴과 왼팔에 음각선으로 표현되다가 무릎 아래까지 흘러내려 대좌를 덮었다. 다리는 결가부좌하였고 왼손은 배꼽 아래에 놓고 오른손으로 무릎을 감싸 항마촉지인을 취했다. 다만, 돌의 두께가 조금 모자랐는지 오른손의 표현이 조금 어색하다. 광배(光背)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따로 조각했는데, 그 안에 연꽃 무늬와 덩굴 무늬를 넣고 가장자리에는 불꽃 무늬를 새겼다.

한편 이 불상에서 200m 가량 아래쪽으로 내려오면 언제 폐사되었는지 알 수 없는 절터가 있는데 1995년에 이뤄진 학술조사때 불상 주변에서 '통화이십오년정미(統和二十五年丁未)'(1007년), '용암(龍嵒)', '암사(嵒寺)', '도솔(兜率)' 등이 쓰인 기와가 다수 발견되었고 《동국여지지》에 월출산 구정봉 아래 용암사가 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과거 이곳에 용암사(龍嵒寺)라는 절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조사 당시 용암사지에는 무너진 탑도 하나 있었는데 1996년에 복원하면서 보물 제1283호 '영암 월출산 용암사지 삼층석탑'에 지정하였다. 이밖에 절에서 다시 100m 가량 떨어진, 불상이 잘 보이는 높은 암반에 자연석을 활용한 또 하나의 삼층석탑이 있다.

월출산 높은 곳에서 웅장하고 패기 찬 불상 모습을 잘 보여주므로 당대의 걸작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이에 1972년 3월 2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3. 외부 링크[편집]




4. 국보 제 144호[편집]



전라남도 영암군 월출산 구정봉의 서북쪽 암벽을 깊게 파서 불상이 들어 앉을 자리를 만들고, 그 안에 높이 8.6m의 거대한 불상을 만들었다. 불상의 오른쪽 무릎 옆에는 부처님을 향하여 예배하는 모습을 한 높이 86㎝의 동자상을 조각하였다.

머리 위에는 크고 높은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있고, 신체에 비하여 비교적 큰 얼굴은 근엄하고 박력있는 느낌을 준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있는 옷은 얇게 표현하여 신체의 굴곡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옷주름은 가는 선으로 새겼는데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 아래까지 흘러 내리고 있다. 전체적으로 섬세한 옷주름과 양감있는 신체의 표현에서 탄력성과 박진감이 잘 나타나고 있다.

당당한 신체에 비하여 팔은 가늘게 표현하고 있으며, 손모양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아래를 향하게 하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하여 무릎 위에 올린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다. 광배(光背)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따로 조각하였으며, 그 안에 연꽃무늬와 덩굴무늬를 새겨 넣고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를 새기고 있다.

전반적으로 안정감과 장중한 인상을 주며, 섬세하고 정교한 조각기법과 더불어 박진감이 잘 나타나고 있다. 반면 신체에 비하여 비교적 커진 얼굴과 너무 작게 표현된 팔 등에서 불균형한 비례와 경직된 표현이 엿보여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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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애의 뜻이 절벽을 갈았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