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금동대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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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국보 제287호
백제 금동대향로
百濟 金銅大香爐


소재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 국립부여박물관 (동남리,국립부여박물관)
분류
유물 / 불교공예 / 공양구 / 공양구
수량/면적
1점
지정연도
1996년 5월 30일
제작시기
백제시대(6~7세기)

1. 개요
2. 상세
2.1. 발견
2.2. 특징
2.3. 종교 관련 루머
3. 여담
4. 대중문화에서
5. 외부 링크
6. 국보 제287호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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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금동대향로(이하 '대향로')는 1993년 12월 12일(일)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향로이다.

대향로를 언제 제작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대략 6세기 말-7세기 초라고 추정한다.[1] 고구려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긴 이래 내정의 혼란을 거듭하던 백제가 안정을 되찾고 꽃피운 문화를 상징하는 유물이다.

연꽃은 물론 도교에서 등장하는 상상의 동물 혹은 신선이 조각되어 도교불교적 요소가 모두 있다. 무엇보다도 그 조형 솜씨가 워낙 훌륭하고 뛰어난 수준이라 백제 문화의 정수라고 손꼽을 수 있는, 능히 세계에 자랑할 만한 우리 조상들의 걸작품이다. 신라라고 하면 떠오르는 금관처럼 일반 대중들이 백제라고 하면 딱 떠올리는 멋진 상징적 유물이 없던 차에 그 자리를 차지했다.


2. 상세[편집]



2.1. 발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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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향로는 1993년 12월 12일, 능산리 고분군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을 위한 주차장 공사가 임박한 때 물웅덩이 진흙 속에서 발견되었다.

천수백여 년간 땅 속에 묻혔음에도 불구하고 진흙에 잠겨 산소가 차단된 덕에 원형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였다. 이와 더불어 바닥에서는 기와와 토기 조각 등이 함께 발견되었다. 주변에서는 섬유 조각도 발굴되었는데, 대향로를 감싼 천이 세월이 지나 삭은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후 발굴 결과 대향로가 발굴된 곳이 원래는 사찰 내에 부속된 대장간 자리였다.[2] 국보 제288호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扶餘陵山里寺址石造舍利龕)에 새겨진 명문으로 미루어 보아, 해당 사찰은 아들 위덕왕이 아버지 성왕의 명복을 빌고자 왕실 차원에서 세운 원찰인 듯하다.[3]

처음 발견되고 11일이 지난 1993년 12월 23일, 여러 주요 일간지에서 일제히 국보급 백제 유물이 발견되었음을 대서특필하였다.


2.2. 특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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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향로의 디지털복원도 (by 문화유산기술연구소) 보러 가기

충격적인 세련미의 걸작. 대향로는 전체 높이가 61.8 cm이고 크게 4개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모양 향로 받침, 연꽃이 새겨진 향로의 몸체, 산악도가 솟아오른 향로 뚜껑, 뚜껑 위 봉황 장식이다.

향로에 뚫린 구멍들은 직경 0.6 cm 정도지만, 개중 몇 개는 1 cm 정도로 조금 더 넓게 확장되어 뚫렸다. 처음 제작할 때 생각보다 향이 잘 타지 않아서 구멍 몇 개를 더 크게 만든 듯하다. 구멍은 향로 꼭대기 봉황의 가슴에 2개, 향로 뚜껑 상부에 5개, 그리고 중부에는 5개로 총 12개가 있다. 이중 중부에 있는 구멍은 향의 연기를 배출하는 용도가 아니라 바깥에서 공기가 들어오도록 하는 용도이다. 이렇게 바깥 공기가 들어옴으로써 향로 안에서 대류가 일어나 향의 연소시간이 길어지게 했다.

향로의 맨 아래에는 용이 발톱으로 땅을 디디고 입으로는 향로의 본체를 문 형상으로 향로를 떠받친다. 용의 발톱은 5개인데, 다리 3개는 땅을 디디고 한 개는 하늘로 치켜올려들어 매우 역동적이다. 본체의 아랫부분에는 연꽃잎을 8개씩 3층으로 배열하여 연꽃잎과 남은 공간에 동물 25마리에 인물 2명을 섬세하게 부조했다. 본체의 아랫부분과 윗부분(뚜껑)이 서로 맞닿는 부분에는 구름 문양으로 띄를 두 겹으로 둘렀다. 본체의 윗부분(뚜껑)에는 산 봉우리들이 여럿 있다. 산과 계곡에는 동물이 42마리, 인물 17명이 부조되었는데, 묘사된 동물들 중에는 우리나라에는 살지 않는 코끼리, 원숭이, 악어도 있고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상상의 동물들도 있다. 향로의 정상 바로 아래쪽에는 신선으로 보이는 다섯 사람이 완함, 북, 거문고, 배소, 종적 등 악기를 연주하며 앉아 있다.

산 꼭대기에 해당하는 정상에는 어떤 새가 날개를 편 채로 있다. 보통 이 새를 봉황이라고 말하지만 이의를 제기하는 학문적 소견도 있다. 백제 왕실을 상징하는 천계(天鷄)라는 것이다. 불교도교의 영향을 다수 받은 것이 백제 후기 유물들인데 여타 신수와 영물에 비해 이러한 조류 조각이 많다는 점과 더불어 그중 다수의 조류 조각에서 며느리 발톱으로 추정되는 묘사가 보인다는 점 등이 주된 이유다.

우리나라의 진영아는 <동아시아불교문화> 2020년 42호에 발표한 논문 "백제 금동대향로 정상부의 새 도상 재검토- 금시조 가능성에 대한 모색 -"에서 대향로 정상에 있는 새가 봉황도 천계도 아닌 금시조(金翅鳥), 즉 인도 신화에 등장하는 가루다라고 주장했다. 가루다의 목에 구슬이 있다고 하는데, 대향로 속 새 또한 목과 부리로 구슬 하나를 붙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백제 내에 도교가 얼마나 유통되고 있었는지, 불교계에서 도교에 대해 호의적이었는지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실제 불전(佛典) 내에서는 도교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금동대향로 내에 존재한다고 간주되는 오악사 역시 여러 불교 경전에 나타난다. 논문 "백제 금동대향로 정상부의 새 도상 재검토 -금시조 가능성에 대한 모색-"의 각주 61, 63에서 제기한 것처럼, 백제에 유통되었다는 『대반열반경』 중 '신선이 기악을 연주한다[神仙呪術,作倡伎樂]'는 기록이 있고, 『묘법연화경』에도 '사람이 북, 퉁소, 거문고, 비파 등을 연주한다[若使人作樂, 擊鼓吹角貝, 簫笛琴箜篌, 琵琶鐃銅鈸]'라는 문구가 있다. 따라서 향로에 표현된 각각의 상징물 역시 불교 경전에서 근거한 것으로 본다. 향로의 도상에 대해 지나친 추정과 상상은 지양되어야 하고, 향후 구체적인 전거를 들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2.3. 종교 관련 루머[편집]


이름 그대로 향로는 향을 피우기 위한 물건으로, 뚜껑을 열고 안에 향을 재어 넣은 뒤 불을 붙여 뚜껑에 있는 12개 구멍에서 향이 피어나게 만든 물건이다. 이 물건은 그냥 전시하기보다는 향 연기가 구멍에서 피어 오르도록 할 때 가장 향로답고 아름다운 물건이다. 그래서 부여박물관에서는 복제품에 향을 피워놓고 전시하는 기획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박물관 측에 종교적인 이유로 항의가 들어와서 중단된 일이 있었다고 한다. #

셋은 백제금동대향로에 대해 작은 ‘난상토론’을 벌였다. 나는 진품은 보관해야 하니까 가장 유사한 모조품을 만들어 관람객들에게 실제로 황홀한 연기의 흐름을 보여주는게 최상이라고 제안했다. 그러자 차 선생님은 그렇잖아도 발견 직후 그런 시도를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종교적인 이유로 박물관에 강력한 항의가 들어와 중단했다고 한다. 깜짝 놀랐다. 이걸 굳이 종교의식으로 봐야 하는가 싶었다. 백제인들의 혼이 담긴 예술품이자 문화유산인데 후손들은 그 작품을 감상할 최고의 가치를 또다시 못보고 묻어둬야 하나 싶어 상실감이 너무 컸다.

그러나 이 기사의 신뢰성에는 의문이 있다. 기사를 보면 기자가 만나 전시에 관련해 토론을 한 사람을 두고 "국립부여박물관 문화재와 20년 가까이 인연을 맺어온 차선미 선생님"이라고 설명했다.

한국 내에서 국가 공인 박물관, 미술관(국립, 공립, 사립, 대학)에서 학예사로 근무하려면 석사 학위 이상이 필요하다. (학사도 할 순 있지만 자격증을 받기 위해 소요하는 기간보다 석사과정 들어가서 학위를 받는 쪽이 더 빠르다.) 그런데 학위, 학술논문 검색 사이트에서 '차선미'라는 이름으로 검색해보면, 학위논문은커녕 학술논문에도 '역사학', '미술사학', '고고학' 하다못해 '예술관련 전공'으로도 저 이름으로 저술한 논문은 단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즉, 기자가 신뢰하는 저 '차 선생'이란 사람은 국립박물관에서의 전시, 연구와 관련해 논의조차 들어갈 수 없는 인물이다. 지금은 규모 큰 국립박물관에는 전시코디네이터라는 직업을 가진 예술관련 전공자가 전시를 시각적으로 꾸미는 일을 맡는데, 이 직업으로 채용을 시작한 지 (2020년 기준) 채 5년도 안 지났다. 따라서 대향로가 출토되고 전시를 시작하는 기간에 전시코디네이터도 없었기에 저 사람이 외부 전문가로도 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박물관 고고학팀, 발굴단, 문화재연구소 발굴팀 등등에서 유물을 발견하면 보수 작업을 완료한 후 바로 전시에 들어가지 못한다. 적어도 2년 이상 연구기간이 소요되고, 이 유물에 대한 연구가 고고학계, 미술사학계, 역사학계에서 다각도로 연구를 한 후 전시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업계의 열악한 사정 때문에 학예사가 아니더라도 민간에서 향토사학자등을 초빙하여 교류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이 경우를 가정해도 '차 선생'이 직접 그런 항의를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박물관의 누군가에게 그런 카더라를 들었다.'는 수준일 뿐이다. 기사의 내용은 1차 소스도 아니고 '차 선생'이 누군가에게 들은 것을 기자에게 말해주고 기자가 기사로 옮긴 것이다. 게다가 항의가 들어온 때는 발견 직후에 있었던 일이라고 하는데,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된 때는 1993년이고 해당 기사는 2013년 것이라 세월이 20년이나 차이난다.

정리하면 발견 직후(1993년? 94년?) 박물관에 항의가 들어왔고. 이 내용을 박물관의 모 직원이 차 선생에게 이야기했으며, 그걸 차 선생이 다시 기자에게 말해서 기자가 기사로 옮겼다는 것이다. 직접 들은 얘기를 쓰는 기사에서도 온갖 문제가 발생하는 마당에, 이렇게 오랜 기간을 거쳐 여러 번 전달된 내용이 과연 얼마나 믿을 만할까? 신뢰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상술한 신뢰성 문제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향로에 향을 피우는 전시는 하지 않고 있으며, 이전부터 종교적 이유로 각종 문화재에 대해 비슷한 어그로를 끊임없이 끌어온 특정 종교에 대한 대중들의 반감 때문인지 위 루머는 아직까지도 사람들에게 거의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대향로의 발굴과정과 전시내용 등에 대해 유명 주요 커뮤니티 사이트들을 중심으로 아직도 위 루머가 사실처럼 적힌 글들이 많이 돌아다니며 댓글에는 특정 종교에 대한 비난과 비아냥이 난무하는 상황이다.


3. 여담[편집]


  • 정말로 아름답고 가치 있는 유물이라 어느 박물관이 소장할지 신경전이 거셌다. 심지어 연구단계에서 사진 한 장도 유출되지 않도록 기를 쓰고 막았다고 한다. 결국,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다가 출토지에서 가장 가까운 국립부여박물관으로 돌아갔다. 따라서 오늘날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중인 것은 모조품,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 중인 것이 진품이다. 부여군과 국립부여박물관의 상징과도 같기에 외부 전시품으로 나가는 일은 거의 없다. 극히 드문 예외 중 하나가 2015년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열였던 '세밀가귀'전.# 역시 삼성의 빠와

  • 전문가가 구두로 대략 추정한 보험가액은 최소 300억이고#[4] 복제품 가격도 약 500만 원이나 될 정도로 고고학적, 문화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국내에서 발견된 금속 공예품 가운데 가장 가치 있고 가장 빼어난 기술로 만들었다.[5] 유물이 파손되었다면 고고학적 가치는 높으나 예술적 가치가 떨어질 수도 있는데, 대향로는 거의 온전한 형태로 발굴되었기 때문.

  • 백제금동대향로는 도교와 불교의 사상이 모두 반영된 유물이기 때문에 발굴 당시부터 발굴단에서는 신선사상을 따라 '용봉봉래산향로'라고 이름 붙이자고 하고, 불교계에서는 새겨진 연꽃무늬나 산봉우리가 수미산을 연상케 한다면서 '수미산향로'라고 부르자고 주장하는 등 의견대립을 해왔다. # 아카이브 특히나 불교계는 국립박물관이 백제금동대향로를 굳이 '도교의 유물'이라고 하면서 불교의 영향력을 애써 부인하려 한다고 주장해 왔다. 이후에도 대향로가 도교 유물로 전시되거나 소개됨을 두고 불교계 일각에서 불쾌감을 표시하는 등# 아카이브 대향로 관련으로 불교 관련단체나 인물들이 꾸준히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 해외에서도 화제가 되었는데, 일부 중국 사학자들은 '이것은 중국의 유물이다!' 하고 주장했다. 유물의 조형성이 수준 높기 때문에, 국내에서도 초기 연구단계 때는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유물으로 추측했다고 한다. # 백제는 철저한 불교 왕국이었는데, 대향로에서는 오히려 중국스러운 도교의 영향이 더 크게 나타난다. 대향로의 원형이 중국에서 유행하던 박산로(博山爐)라는 향로임은 분명하다. 중국에서는 박산로가 기원전 4세기 전국시대에 나온 초기형태로부터 훗날 중세시기 완성형에 이르기까지, 시대에 따른 박산로의 기술적 진화 모습이 모두 남아 전한다. 그런데 한국에는 과거에 박산로 계열 향로를 제작했던 흔적이 전혀 없었는데 갑작스레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완성품이 튀어나왔다. 그래서 최소한 중국인이 중국의 기술을 토대로 한국에서 만들었거나 아예 중국에서 수입했다고 본 것이다. 이후 연구에서 이를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대장간 터가 발굴된 덕에 백제가 제작한 유물이라고 판명되었다. 지금은 중국 학자 대다수도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면 모를까, 대향로가 중국의 유물이라는 소리는 어불성설이라고 이전의 중국 유물설을 일축한다. 대향로의 세련미와 조형요소의 다양성은 지금까지 출토된 중국의 모든 박산로를 압도하고, 일단 60 cm을 넘는 크기부터가 넘사벽이다.

  • 첫 발굴 때부터 일본에서도 매우 관심을 드러내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문화교류의 일환으로 일본에서 대향로 전시를 요구했지만, 국립중앙박물관은 교환전시될 일본의 유물과 격이 맞지 않는다[6]는 이유로 거절한 적이 있다. 또 다른 반출거부 유물은 영조 어진. 일본에서도 천황 관련 유물이나 문화재는 전시 및 반출이 금지되는데 조선시대 어진 역시 같은 점을 들어 거절. 일본에선 적반하장으로 반발했다.

  • 왕실에서 제사용으로 사용되던 물건이 천에 곱게 싸인 채 땅에 묻힌 이유는 660년 사비성이 함락되어 약탈과 방화가 이루어지는 순간에 어느 백제인이 급히 숨겼기 때문이리란 견해가 있다. #

  • 발견된 이후 한동안 대향로의 윗부분이 도교에서 말하는 신선세계 봉래산(蓬萊山)이라고 보아, 도교사상의 영향을 강조하여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百濟金銅龍鳳蓬萊山香爐)', 혹은 '금동용봉봉래산향로'라고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불교미술사학계는 절터에서 발견된 데다 3단으로 장식된 연꽃 등은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이니 수미산(須彌山)[7]을 연상시킨다며 '수미산향로'라고 부르자고 주장하였고, 중국 학계는 향로 윗 부분의 새가 봉황이 아닌 천계(天鷄)이고 금마산(金馬山)에서 건국한 백제의 것이라는 의미로 '금동천계금마산향로'란 명칭을 제안하기도 했다. 결국 문화재위원회에서 최종적으로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란 두루뭉실한 이름으로 결정했다.

  • 인근에 위치한 백제시대 절터에서 출토된, 백제의 '무늬 벽돌' 과 같이 보면, 바람이나 구름, 그리고 산 등의 묘사물들을 묘사한 감각이 부드럽게, 유기적으로 일치함을 알 수 있다. 또한 한반도의 국가들은 자유로이 날아다닐 수 있는 새를 애호하여 많은 예술품들에 조류의 형태를 표현하곤 했다. 대향로와 백제의 무늬 벽돌에도 비슷하게 새의 형상을 표현하였다.

  • 이토록 조형적으로 뛰어난 유물이지만, 의외로 허술한(?) 부분이 있는데 바로 다리 부분과 향로 구멍이다. 다리 부분은 용이 승천하는 조형으로 주조했으나 균형이 맞지 않아 팔메트 문양을 따로 주조하여 붙인 것 같다. 대향로 뚜껑의 연기 구멍이 하단 4개 상단 4개, 새의 가슴에 2개까지 총 10개가 있는데, 연기가 잘 안 나왔는지 정으로 내려찍어(...) 구멍 4개를 확장했다. 일단 다리 부분에 덧붙인 팔메트 문양 덕분에 제작지가 백제라고 밝혀지긴 했다. 능산리 사지 출토 금동광배편과 팔메트 문양 구성이 같았기 때문.

  • 대향로 발굴 20주년을 맞아 문화유산기술연구소에서 향로를 정밀 3D 레이저 스캔하여 150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벗겨진 도금을 복원하여 만든 결과물을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하였다. 그 결과물 중 일부가 위에 있는 금빛으로 번쩍이는 향로를 찍은 사진이다. 전체 사진, 클릭 시 확대.

  • 국립부여박물관은 대향로에 향을 사른 모습을 담은 영상을 2020년 4월 유튜브 채널에 올렸다. 물론 진품이 아니라 복제품에서 향을 피웠는데, 하얀 향 연기가 포르르 뿜어 올라가는 모습이 상상 이상으로 아름답다. 실제로 향을 사르면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하던 사람들에게는 놓칠 수 없는 영상이다.


  • 모양이 아름답다보니 복각품을 만드는 사람들도 있다.
    • 국립박물관 문화상품 쇼핑몰에서 복각품을 판매했다. 2021년 6월 기준 판매중지되었다. [8] 사고 싶다면 일반 쇼핑몰을 찾아볼 것.
    • 복각품은 향을 피웠을 때 문제가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관련 기사
    • 어느 레갤러의 레고재현본

  • 대전 / 충남을 연고로 하는 대전 하나 시티즌의 엠블럼에도 있다.[9]

  • 충청남도의 새로운 마스코트 '충청이'의 모티브이다.


4. 대중문화에서[편집]



  • 백제의 마지막 공주 부여주가 현대 대한민국으로 넘어온 타임슬립 이야기를 다룬 판타지 SBS 드라마 《천년지애》에서는 부여주(성유리)가 현재 시간대에서 이 향로를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보고 '이딴 향로가 남부여(백제)를 상징한다니.'라며 씁쓸함을 내보인다. 현대의 우리 입장에서는 다른 왕실 보물이 지금까지 남아있지 않아서 대향로가 귀한 유물이 틀림없지만, 백제 당대의 왕족에게는 그래봤자 여러 왕실 보물 중 하나에 불과했고, 나라를 대표할 정도는 아니었으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 금동대향로 정도면 충분히 백제에서 손꼽히는 보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백제는 은제관식조차 6관등 나솔(奈率) 이상만, 금제관식과 금으로 만든 공예품은 오로지 왕과 왕족만 사용할 수 있었다. 더불어 대향로에 정섯껏 가미한 화려한 기교는 당대인들에게도 예사 물건이 아니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왕실사찰에 있었고 긴박한 순간에도 비단으로 싸서 수조 안에 숨길 정도면 당대인들 기준으로도 가히 보물급이었을 것이다. 다만 작중의 부여주는 당대의 왕족이니, 궁전이나 왕관 같이 백제 왕조를 직접적으로 상징하는 유물이라면 모를까 '사용하는 물건' 중 하나인 대향로 하나만으로 백제의 영화를 오롯이 전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 드라마 《서동요》의 마지막 화 마지막 장면에 잠시 등장한다. 선화공주가 가공 인물로 기술자이며 서동의 스승이었던 목라수에게 의뢰하여 제작한 것으로, 극중에서 박산향로가 서동이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내리는 신물인 것에 대비하여 이제 무왕에게 안식이 내렸으면 한다는 의미. 그리고 무왕이 자신이 어렸을 때 살았던 집이자 선화공주가 숨을 거둔 곳에서 향로를 피워 놓고 선화를 그리워하는 것으로 드라마가 끝난다.

  • 황산벌 전투를 다룬 영화 《황산벌》에서 배경소품으로 잠깐 등장한다. 초반부 의자왕이 계백과 만나서 술을 마실 때 대향로에 향을 피워 놓았다.





5. 외부 링크[편집]




6. 국보 제287호[편집]



백제 나성과 능산리 무덤들 사이 절터 서쪽의 한 구덩이에서 450여점의 유물과 함께 발견된 백제의 향로이다. 높이 61.8㎝, 무게 11.8㎏이나 되는 대형 향로로, 크게 몸체와 뚜껑으로 구분되며 위에 부착한 봉황과 받침대를 포함하면 4부분으로 구성된다.

뚜껑에는 23개의 산들이 4~5겹으로 첩첩산중을 이루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피리와 소비파, 현금, 북들을 연주하는 5인의 악사와 각종 무인상, 기마수렵상 등 16인의 인물상과 봉황, 용을 비롯한 상상의 날짐승, 호랑이, 사슴 등 39마리의 현실 세계 동물들이 표현되어 있다. 이 밖에 6개의 나무와 12개의 바위, 산 중턱에 있는 산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폭포, 호수 등이 변화무쌍하게 표현되어 있다.

뚜껑 꼭대기에는 별도로 부착된 봉황이 목과 부리로 여의주를 품고 날개를 편 채 힘있게 서 있는데, 길게 약간 치켜 올라간 꼬리의 부드러움은 백제적 특징이라 하겠다. 봉황 앞 가슴과 악사상 앞뒤에는 5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몸체에서 향 연기를 자연스럽게 피어오를 수 있게 하였다.

활짝 피어난 연꽃을 연상시키는 아래의 몸체는 하나하나의 연잎의 표면마다 불사조와 물고기, 사슴, 학 등 26마리의 동물이 배치되어 있다. 받침대는 몸체의 연꽃 밑부분을 입으로 문 채 하늘로 치솟 듯 고개를 쳐들어 떠받고 있는 한 마리의 용으로 되어 있다.

이 향로는 중국 한나라에서 유행한 박산향로의 영향을 받은 듯 하지만, 중국과 달리 산들이 입체적이며 세부의 동물과 인물상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백제시대의 창의성과 뛰어난 조형성을 바탕으로 당시 도교와 불교가 혼합된 종교와 사상, 공예기술 및 미술 문화를 종합적으로 파악하게 해주는 백제 금속공예 최고의 걸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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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야미술사학자 서정록은 2001년 출판한 저서 '백제금동대향로'(학고재 출판)에서 대향로를 제작한 시기가 520-534년쯤이라고 주장했지만, 학계에서 인정받지는 못했다. 학계에서는 대체로 7세기 초쯤이라고 보는 듯?[2] 대향로가 중국제가 아닌 백제 자체 제작품이라는 결정적인 근거이다. 바로 이 대장간에서 만들었다는 것. 중국 학자들 중에는 박산향로 양식이 아예 없던 백제에서 느닷없이 대향로를 제작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면서 대향로가 중국제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남조 국가들의 무덤 벽화에서 대향로와 상당히 유사한 그림이 발견되기도 했음을 대향로가 중국제라는 주장의 근거로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향로가 하필 능산리 절에 부속된 대장간 자리에서 출토되었다는 사실은, 사찰 내에서 자체제작한 물품이라는 강력한 증거이다. 물리적 근거는 당연히 정황 근거보다 훨씬 강력하기 때문에 중국 측의 억지 주장을 쉽게 반박할 수 있다. 사실 대향로를 제작할 즈음이면 중국에서 박산향로 전통이 완전히 사라진 지 수백 년이 지난 뒤이다. 중국에서 백제의 성왕을 추모하기 위해 수백 년 전 중국의 전통을 되살려, 심지어 중국 본토에 있던 향로를 능가하는 명품을 만들어 백제에 선물했다는 주장은 개연성이 너무 떨어진다.[3] 위덕왕은 왕자 시절 대신들의 반대에도 신라 공격을 감행했고 성왕은 그런 아들의 결정을 지지해 주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554년 관산성 전투 당시 성왕은 아들(미래의 위덕왕)과 백제군을 위문하고자 현장을 방문하다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 전사했고, 위덕왕은 죄책감에 시달려 즉위를 거부하고 승려가 되려고 하는 등 정신적으로 크게 방황했다. 대향로는 그런 위덕왕이 자신 때문에 죽은 아버지 성왕을 기리며 만든 사찰에서 출토된 향로라는 것. 최상의 예술성과 미적감각뿐만 아니라 6세기 백제 성왕과 위덕왕 부자의 가슴 아픈 비하인드 스토리가 담긴 최고의 문화재.[4] 해외전시나 운송 중에 파손 우려로 보험을 드는데 시가의 10분의 1로 잡음이 보통이다.[5] 이한상(대전대 역사문화학과)[6] 무슨 유물인지는 밝히지 않았다.[7] 불교 세계관에서 우주의 중심에 있는 거대한 산[8] 높이 기준 14 cm 최소형(3만 6천 원)부터 18 cm소형(16만 원), 28 cm 중형(동 도금 35만 원, 금 도금 50만 원), 62 cm 대형(1:1 원본 사이즈, 285만 원) 등 네 가지. 중형과 대형은 원본처럼 구멍이 뚫려 실제로 향을 피울 수 있다.[9] 과거 시민구단 시절의 엠블럼에도 그려져 있었다. 다만 과거에는 대향로를 자세히 그렸지만, 기업구단이 된 이후에는 위의 봉황만 간략하게 살리고 방패 모양이 대향로를 상징하는 것으로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