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정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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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동국정운.jpg

1. 개요
2. 내용
3. 동국정운식 한자음과 표기의 특징
4. 한계
5. 기타
6. 외부 링크
7. 국보 제71호
8. 국보 제142호


1. 개요[편집]


동국정운()은 조선 세종 30년(1448)[1]신숙주, 최항, 박팽년 등 학자 9명이 임금의 명을 받아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한자 음을 훈민정음으로 기록한 운서다. 초간본은 대한민국 국보 제71호, 제142호로 지정되었다.


2. 내용[편집]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 반포한 후 언어 정책의 일환으로 당대 조선의 잘못된 한자음을 바로잡아 통일된 표준음을 정하려는 목적으로 편찬, 간행한 책이다. 일종의 외래어 표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전문가들이 모여 만들었는데, 편찬자는 신숙주·최항·성삼문·박팽년·이개·강희안·이현로·조변안·김증·진양대군(훗날의 세조[2]안평대군 등 모두 11명이다.

진양대군안평대군이 책 편찬의 전반적인 분담과 감장(監掌) 임무를 맡았고, 신숙주와 성삼문은 교무를 보좌하는 주무(主務) 임무를 맡았다. 한자음 연구는 최항과 박팽년이, 중국음 연구는 조변안과 김증이 맡았고 기타 책의 교정과 정리는 강희안이 맡았다. 책에 수록된 자체(字體)는 본문과 대자 모두 진양(수양)대군의 글씨라는 것이 정설이지만, 안평대군이나 강희안이 썼다는 설도 있다.

최초로 한자음을 한국어 음운으로 표기한 책이라 그 가치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국어 연구자료로서 그 중요함은 훈민정음과 쌍벽을 이룬다고들 평가한다. 중국어 연구자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책인데, 조선 초기 학자의 관점에서 중고한어의 음운론을 고찰해 표음문자로 정리한 책이기 때문이다.

현재 1448년 만들어진 동국정운 초간본이 두 종류 전해지는데 둘 다 대한민국의 국보로 지정되었다.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권1, 권6 총 2책은 국보 제71호, 건국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한 6권 6책 완질본은 국보 제142호이다.


3. 동국정운식 한자음과 표기의 특징[편집]


  1. 원래 중국계 운서에서는 한자음을 성모+운모(+성조)의 결합으로 인식했던 것과 달리, 동국정운에서는 한자음을 초성+중성+종성(+성조)의 결합으로 인식한다.
  2. 전탁음 성모를 인정한다. 전탁음이라 하면 중국 성운학에서는 유성음을 의미한다. 원래 한국 한자음에서는 전탁음 성모가 나타나지 않았던 것을 동국정운에서는 중고음에 기반하여 따로 분리했다. 전탁음 표기에는 각자병서를 활용했다.
  3. 전청음차청음의 구별이 모호했던 것도 중고음에 기반하여 분리했다. 대표적으로 한국 한자음에는 '쾌' 이외에는 溪모(/kʰ/, ㅋ)를 성모로 가지는 한자음이 없는데, 동국정운에서는 큭(克), 킹(企), 킝(器) 등등 다양하게 나타난다.
  4. 종성을 반드시 표기한다. 한국 한자음에서 모음으로 끝나는 한자들이라도 종성을 표기했다. 구체적으로, 流섭과 效섭에 해당하는 운(즉 운미 -w를 가지는 운)은 ㅱ을 종성으로 가졌고, 나머지 운은 ㅇ을 종성으로 가졌다.
  5. 운미 -t를 가지는 한자는 한국 한자음에서 -l(ㄹ)을 종성으로 가지는데, 이를 종성 ㅭ을 이용해서 표현했다. 이를 이영보래(以影補來)[3]라고 한다.
  6. 한국 한자음에서는 중고음의 상성과 거성이 대체로 모두 상성으로 나타나는 것을 동국정운에서는 분리했다.
  7. 한국 한자음에서는 설음에서 합구호가 나타나지 않지만 동국정운에서는 설음에서도 나타난다.
  8. 중고음의 /y̯e/-가 한국 한자음에서는 'ㅠ'나 'ㅕ'로 모호하게 나타나지만 동국정운에서는 'ㆊ'로 표기한다.


4. 한계[편집]


동국정운은 분명히, 한국 한자음을 음운학(音韻學)적으로 바로잡으려 한 최초의 운서이므로 그 가치가 높다. 그러나 실용성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름이 正韻인 데서부터 알 수 있듯 중국의 표준운서에 대응되는 한국 한자음을 설정하려고 했기 때문에, 당시 조선에서 통용되던 한자음과 괴리가 컸다.

또한 동국정운은 원대 고금운회거요(古今韻會擧要) 또는 명대 홍무정운(洪武正韻)에서 정리된 중국의 운서체계보다 더 과거의 음운 형태를 추구하였기 때문에 당시 중국의 입말 기준으로도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5. 기타[편집]


학교 국어 시간에는 한자음의 특징 등을 소개하기에는 다소 번거롭기에 대체로 '종성에도 소리 없는 을 표기함' 정도로 배우고 넘어가는 편이다.

일반인에게 가장 유명한 동국정운식 한자음은 아마도 '중국'(中國)에 대응되는 '듀ᇰ귁'일 듯하다. 그 유명한 훈민정음 서문, 그 중에도 첫 구절에 등장하는 단어로 사람들에게 널리 인용되고 있기 때문이다.[4] 그 다음으로 유명하다 싶은 것은 마찬가지로 훈민정음 서문에 적힌 제목인 '솅조ᇰᅌᅥᆼ졩(世宗御製) 훈민져ᇰᅙᅳᆷ(訓民正音)'이다.

장난 삼아 옛이응이 아닌 그냥 ㅇ까지 현대의 종성 ㅇ처럼 발음하는 일도 많다.솅종엉졩훈민졍음

박대종이라는 사람은 국새를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자체로 만들도록 되어있으므로 훈민정음 창제 당시 쓰이던 동국정운대로 국호를 '대한민국'이 아닌 '땡ᅘᅡᆫ민귁'으로 표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정부에서는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글씨체로 한다고 했지,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표기법대로 한다는 소리가 아니라고 일축했다. 국새 문서 참조.

6. 외부 링크[편집]




7. 국보 제71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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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國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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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국보 제71호
동국정운 권1, 6
東國正韻 卷一, 六


소재지
서울특별시 성북구
분류
기록유산 / 전적류 / 활자본 / 금속활자본
수량/면적
2책
지정연도
1962년 12월 20일
제작시기
조선 세종 30년(1448)

파일:국보71호 동국정운.jpg

간송미술관 소장본이다. 완질본은 아니며 전체 6권 중에서 1권과 6권만 있다. 1962년 국보 제71호로 지정됐다.

조선 세종 때 신숙주, 최항, 박팽년 등이 왕의 명으로 편찬하여 세종 30년(1448년)에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표준음에 관한 책으로, 6권 6책의 활자본이다.

중국의 운(韻)에 관한 책인 『홍무정운』에 대비되는 것으로, ‘동국정운’이란 우리나라의 바른 음이라는 뜻이다. 당시 혼란스럽던 우리나라의 한자음을 바로잡아 통일된 표준음을 정하려는 목적으로 편찬, 간행되었다.

이 책은 세종 29년(1447년) 9월에 완성되자 간행하라는 임금의 명이 있었고, 이듬해인 세종 30년(1448년) 11월에 성균관, 사부학당 등에 보급되어, 이 책이 간행되고 보급되었던 시기를 알 수 있다.

현재 이 책은 전 6권 가운데 1권과 6권만이 남아있다. 내용을 보면 본문의 큰 글자는 나무활자이고, 작은 글자와 서문의 큰 글자는 갑인자이다. 글자체는 큰 글자가 진양대군의 글씨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한자음을 우리의 음으로 표기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국어 연구 자료로서의 중요성도『훈민정음』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한자음의 음운 체계 연구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훈민정음의 글자를 만든 배경이나 음운 체계 연구에 있어서 기본 자료가 된다.



8. 국보 제142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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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국보 제142호
동국정운
東國正韻


소재지
서울특별시 광진구
분류
기록유산 / 전적류 / 활자본 / 금속활자본
수량/면적
1질 6책
지정연도
1972년 3월 2일
제작시기
조선 세종 30년(1448)

파일:국보142호 동국정운.jpg


1972년 발견 당시 모습

건국대학교 박물관 소장본이다. 1972년 국보 제142호로 지정됐다.

조선 세종 때 신숙주, 최항, 박팽년 등이 왕의 명으로 편찬하여 세종 30년(1448년)에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표준음에 관한 책으로, 6권 6책이며, 활자본이다.

중국의 운(韻)에 관한 책인 『홍무정운』에 대비되는 것으로, ‘동국정운’이란 우리나라의 바른 음이라는 뜻이다. 당시 혼란스럽던 우리나라의 한자음을 바로잡아 통일된 표준음을 정하려는 목적으로 편찬, 간행되었다.

형태를 보면 본문의 큰 글자는 나무활자, 작은 글자는 갑인자, 서문은 갑인자 대자로 기록되어 있다. 구성을 보면 서문 7장, 목록 4장, 권1은 46장, 권 2는 47장, 권3은 46장, 권4는 40장, 권5는 43장, 권6은 4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크기는 가로 19.8㎝, 세로 31.9㎝이다.

특히 이 책은 동시 출간된 국보 제71호『동국정운』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첫째, 개장(改裝) 당시 책의 천, 지를 약간 절단해 냈고, 둘째, 제목은 다같이 목판인쇄이나, 그 서체가 서로 다르다. 셋째, 책의 순서로 예, 악, 사, 어, 서, 수를 묵서했는데 이것은 뒤에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한자음을 우리의 음으로 표기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국어 연구 자료로서의 중요성도 『훈민정음』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한자음의 음운 체계 연구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훈민정음의 글자를 만든 배경이나 음운 체계 연구에 있어서 기본 자료가 된다. 이 책은 동시 출간된 국보 제71호 『동국정운』과 함께 당시 음운학을 연구하는데 아주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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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글창제 2년 후. (반포 기준)[2] 흔히 수양대군으로 알려졌지만 이는 나중에 고친 봉호다. 그마저도 진양대군을 썼던 기간보다 사용한 기간이 짧았다(…).[3] 영모(影母, ㆆ)로 래모(來母, ㄹ)을 보충한다.[4] '中'의 발음은 현실음도 '듀ᇰ'일 것으로 추측되나, '國'은 번역소학(1518) 등의 예를 볼 때 현실음은 오늘날과 같이 '국'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수나라당나라의 실제 발음인 중고한어에서는 '國'은 kwək으로 발음되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를 훈민정음으로 표현하면 '궉'이 되었을 것이다. 때문에 동국정운에서 國을 '귁'으로 표현한 것은 문제점이 있는 표기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