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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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上曰: "義州, 上國使臣往來之地, 事務煩多, 往欽哉."
임금이 말하였다. "의주는 상국 사신이 왕래하는 땅이어서 사무가 번다하니, 가서 조심하라."
조선시대 평안도 북부지역의 중심지이자 제1무역지로 통하였던 대고을. 조선의 중심지가 한성부와 평양부라 하면, 조선에서 한성부와 평양부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돈이 오갔던 고을은 의주부가 손꼽힐 정도로 막대한 부를 창출하였던 지역이다. 내륙 지역과 국경을 접하였고, 압록강을 끼고있어 중국 및 만주의 상인들과 조선의 상인들이 서로 활발한 교역을 펼쳤던 고을이기도 하다.
2. 문화와 역사[편집]
의주부는 예로부터 그 중요성이 언급되어 왔다. 특히 의주부 지역은 고려시대때는 보주라 불리며 요나라, 금나라와 치열한 외교전을 펼쳤던 장소였다. 고려가 이 지역을 얻으면 요동지역과 대륙으로 진출할 발판이 될 수 있었고, 국경지역의 안정화를 추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요나라와 금나라 등 이민족이 이 지역을 점령할 경우 고려를 침략할 발판이 되었기 때문에 고려는 이 지역을 무척 신경쓰며 중요시 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압록강을 기점으로 국경이 확정되면서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요동과 한반도를 사이로 둔 의주부는 한국과 중국을 이어주는 길목이었기에 평화로울 때는 중국과의 국제무역이 활발하게 진행되며 수많은 돈이 오가는 풍경이 매년 펼쳐졌다. 그리고 양국에서 파견된 사신단의 출입이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고을이었지만 동아시아에서 국제적인 분쟁이나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에는 적이 가정 먼저 처들어오는 제 1관문에 해당하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이러한 가치 때문에 조선에서는 초기부터 목사를 파견하여 관할하는 노력을 다하였고, 그 결과 조선초기에 의주목이라는 지위로 자리잡게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는 평양을 거쳐 여차하면 명나라로 넘어가려고 의주까지 몽진을 왔다. 이듬해 명군의 파병 후 환도한 선조는 의주목의 관리들과 백성들을 치하기 위해 종2품의 부윤을 수령으로 파견하는 조치를 취하였고, 이렇게 의주부로 승격되어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그리고 이후 대한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의주부는 압록강과 평안도 북서부지역의 대중무역의 기점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지녔다.
3. 역사 및 문화[편집]
예로부터 평양과 안주와 더불어서 평안도 지역의 군사적 요충지로 손꼽히던 지역으로, 고조선의 문화권에 속하여 있었던 지역으로 추정된다. 고조선 멸망 이후 한사군이 설치되었으나 고구려의 건국 이후로 다시 한민족의 역사속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고구려 멸망 이후로도 발해와 요나라가 이 지역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강동 6주의 회복으로 고려가 압록강까지 북진하기는 했으나 엄밀히 따지면 고려가 차지한 강동 6주의 최북단은 의주군 남부 위원면에 위치한 흥화진(興化鎭)으로 지금의 의주읍 일대인 보주(保州)와 내원성(來遠城)은 요나라가 계속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다 요나라가 금나라한테 멸망할 당시 고려가 차지하여 이후 고려와 조선의 최전방이자 군사적 요충지로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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