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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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이라크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 중세 이슬람 제국의 수도 중 하나였다. 당대 명칭은 마디나트 알 살람[1] , 즉 '평화의 도시'였다. 하지만 별명과 맞지 않게 몽골 제국에게 파괴되었으며, 현대에는 이라크 내전과 ISIL로 인해 정세가 혼란해지면서 원래 인구보다 많이 줄어들었다가 그나마 조금씩 안정되면서 회복세에 있다. 티그리스강이 도시를 지난다.
오랜 역사를 지닌데다가 이라크의 최대도시인만큼 명소가 많지만 아직까지 한국에서 이라크가 여행금지국가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현재는 방문할 수 없다.
아드하미야(Adhamiyah), 카흐(Karkh), 카라다(Karrada), 카디미야(Kadhimiya), 만수르(Mansour), 사드르시티(Sadr City)[2] , 알라시드(Al Rashid), 루사파(Rusafa), 뉴바그다드(Tisaa Nissan = 4월9일) 등 9개 구가 있다.
2. 역사[편집]
2.1. 고대[편집]
바그다드 서쪽 외곽의 카시트 왕조 시기 유적인 두르 쿠리갈주[3] 의 지구라트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중심부에 위치한 도시지만, 중심지 역할은 고대 이래로 바빌론과 셀레우키아, 크테시폰이 수행해 왔다. 바빌론은 바빌로니아의 도읍으로 번창했고, 셀레우키아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대도시로 번성했고, 크테시폰은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 제국과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로 번영했다. 기원전 14세기에는 카시트 왕조의 쿠리갈주 1세가 바그다드 중심에서 서쪽으로 약 30km 떨어진 곳에 거대한 아칼쿠프 지구라트를 비롯한 도시를 건설했으며 이 도시 유적의 위치는 현재 바그다드 주에 속해 있다.
역사적으로 천년 이상 번영하던 바빌론은 기원전 3세기 셀레우키아에 대체되었고, 셀레우키아는 다시 기원전 1세기 무렵 크테시폰에 흡수되었다. 7세기 가량 서아시아 최대 도시로 번영하던 크테시폰은 651년 사산 왕조가 멸망하면서 도읍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했고, 이슬람 세계로 편입된 서아시아의 중심지는 다마스쿠스(현재 시리아의 수도)로 옮겨졌다.
2.2. 알 만수르의 건설[편집]
"바로 이곳이 내가 도읍을 건설할 곳이로다. 물자들이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운하 등을 통해 이곳에 당도할 수 있을 것이다. 군대와 백성들을 부양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여기 뿐이다. 실로 이곳이 내가 살 곳이고, 나의 후예들이 통치할 곳이다"
-새 수도를 정하기 위한 탐사 도중 칼리파 알 만수르가 남긴 말. 앗 타바리의 기록.
그러다가 750년 3차 피트나로 압바스 왕조가 흥기하여 우마이야 왕조를 멸망시키고 이슬람 세계를 장악하자 아바스 왕조는 왕가의 지지세력인 페르시아인들에게 가까운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중심지로 삼았다. 하쉬미 이맘을 칭하며 쉬아 세력을 포섭하기 위해 우선 쿠파 (나자프)에서 대관식을 올린 앗 사파흐는 현 팔루자 일대인 안바르에 알 하쉬미야란 신도시를 세워 수도로 삼았다. 다만 이는 임시수도 격이었고, 그의 동생이자 후계자인 알 만수르는 제국의 규모에 걸맞는 페르시아식 원형 도시를 건설하기로 했다. 역사가 앗 타바리에 의하면 기독교 수사들이 안젠가 티그리스 강변의 바그다드에 미클라스란 왕이 대도시를 건설할 것이라 예언했고, 이 이야기를 들은 알 만수르는 자신의 아명이 미클라스였다며 좋아했다 한다.
"건설하라. 알라께서 너희를 축복하시리라."
--알 만수르, 첫 벽돌을 놓으며
역시 페르시아식 원형 도시 구조를 가진 발흐 출신의 바르마크 가문의 주도 하에 티그리스 강변의 바그다드 일대에 대규모 신도시 건설이 추진되었고, 762년 7월 30일 알 만수르는 친히 그 첫 삽을 떴다. 768년, 둘레 10km의 원형 성벽과 궁전 및 모스크 등이 완공되자 알 만수르는 평화의 도시란 뜻인 마디나트 앗살람 (مدينة ااسلام)이라 명명하고 입주했다. 원형도시에 대한 애정이 컸던 그는 도심부가 시끄럽거나 붐비지 않도록 북쪽 성문 밖의 알 카르크 일대를 시장으로 설정하여 주거와 상업 구역을 구분했다.[4] 또한 밤에는 성문을 통한 상업 왕래를 금하여 차분한 분위기를 유지했다. 곧 바그다드는 남쪽 20km 지점의 기존 대도시인 크테시폰을 대체했다. 시가지는 점점 확장되어 원형도시, 앗 샤르키야 (알 카르크), 아스카르 알 마흐디 등 세 구역으로 분할되었다.
2.3. 압바스 칼리파 조의 수도[편집]
출처는 BBC 뉴스 일러스트.
아바스 왕조 치하의 바그다드는 이슬람 황금기에 명실상부한 이슬람 세계의 중심지로서 화려한 문명을 꽃피웠으며, 문화, 예술, 정치, 종교의 중심지로서 번영했다. 당나라 시대까지 번영한 실크로드의 한 축으로서 바그다드는 세계적 규모의 경제 교류의 핵이었다. 한때는 인구가 200만명에 달한다고 칭해질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였다.[5] 당시 바그다드와 맞먹는 규모의 도시는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과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 뿐일 정도였다.
역사상 처음으로 수표가 쓰인 것도 아바스 왕조 하의 바그다드에서였다. #
그러나 10세기 이후 지역 왕조들이 분립하면서 바그다드는 점차 정치적인 영향력을 잃고 종교적인 영향력, 혹은 통합 이슬람 세계의 상징이라는 역할로 전락해 갔다. 특히 945년부터 시아파인 부와이흐 왕조가 바그다드를 점령, 수니파 칼리파 직위를 좌지우지했다.
2.4. 쇠퇴기[편집]
1055년에는 수니파 셀주크 제국이 바그다드를 정복했다. 이후 영향력은 강했다 약해졌다를 반복하긴 했으나, 바그다드는 이미 이슬람 세계의 중심지 역할을 상실했다. 비록 12세기 중반 ~ 13세기 전반에 걸쳐 아바스 칼리파가 다시 이라크의 지배권을 회복했으나 그 과정에서 셀주크 왕조와 벌인 공성전으로 시가지가 심하게 파괴되었다.
도시의 건물 대부분이 사라졌고 남은 것은 오직 도시의 허울 좋은 이름 뿐이었다. 도시는 마치 누군가 머물고 지나간 흔적이 지워지는 것 같았으며, 무언가의 자취가 서서히 흐려지는 느낌이었고, 상상력의 덧없는 환영 같았다. 시선을 끄는 아름다움 같은 것은 더 이상 없었으며, 여유롭게 유랑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이끄는 매력도 이젠 찾아보기 힘들다. 도시에 남은 것은 맹수같은 야생의 느낌 뿐이다.
-아랍 여행가 이븐 주바이르 (1184년)
아바스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 1세가 세운 무스탄시리야 마드라사
특히 1258년, 몽골 제국의 공격으로 바그다드가 함락되고, 칼리파 알 무스타심이 피살된 사건은 바그다드 몰락의 결정타였다. 이 때 바그다드는 몽골군의 약탈과 학살로 황폐화되었으며, 이후 바그다드는 종교적 상징성마저 상실했다. 당시 지혜의 집, 니자미야, 무스탄스리야 등 유명한 학문의 금자탑이 잿더미로 변한 사실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소실 이상으로 인류의 손실이었다. 거기다 칼리파는 이집트 맘루크 왕조의 통제하에 카이로에서 선출되다가 1517년 오스만 제국의 셀림 1세가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오스만 제국에 넘어간다.
이런 상태에서 1401년 티무르에게 정복될 때 20,000여명의 시민들이 학살되며 한 차례 수난을 겪기도 했다. 그로써 한때 세계 최대, 최고의 도시이던 바그다드는 지방 도시로 전락하고 말았다.
바그다드는 폐허 상태이다. 이곳에는 사원도, 신도들도 없고, 기도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으며, 시장도 열리지 않는다. 야자수 대부분은 말라 비틀어졌다. 이곳은 이제 도시라고 부를 수 없는 상태이다.
알 마크리시 (1437년)
2.5. 근대[편집]
1534년 오스만 제국이 바그다드와 메소포타미아를 정복하면서 본격적인 튀르크계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이 지역의 패권은 사파비 왕조 페르시아와 오스만 제국에게 자존심을 건 대결 현장이 되었다.
1916~1918년 아랍인들의 반란과 연합군의 간섭으로 오스만 제국은 이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했고, <후세인-맥마흔 협정>(1915)의 약속을 무시하고 <사이크스-피코 협정>(1916)에 따라 영국이 메소포타미아에 대한 통치권을 장악하면서 1932년까지 영국의 신탁통치하에 놓였다.
그러다가 1932년에 영국이 물러나면서 바그다드는 이라크 왕국의 수도로 정해졌고, 이후 공화국으로 변한 뒤에도, 사담 후세인 독재 정권 시기에도 이라크의 중심이자 수도였다. 때문에 걸프 전쟁 때는 공습을 당하기도 했고, 이라크 전쟁 때도 미군의 폭격을 심하게 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2.6. 현대[편집]
사담 정권이 붕괴되고, 2003년 이후에 미군이 주둔한 뒤로는 이슬람 반군들과 미군 사이의 전투로 도시 곳곳에 폭탄 테러나 총격전이 일어나는 등 혼란기를 겪기도 했다.[6] 또한 바그다드에는 옛날부터 수니파와 시아파가 도심 곳곳에 섞여 살았는데, 이라크 전쟁 이후로 수니-시아파 간 종파갈등이 극도로 치달으면서 하루가 멀다 하고 종파간 테러와 폭력사태가 이어졌고, 도시 곳곳에는 종파간 영역을 나누는 분리장벽이 설치되는 등 도시 분위기가 매우 살벌해졌다.
미군이 철수한 이후로 혼란상이 많이 줄어들 것 같았지만, ISIL이라는 이라크 역사상 최악의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 단체의 등장으로 다시 위험한 도시가 되었다. 그나마 바그다드가 함락되네 마네 소리가 나올 정도로 ISIL 세력이 바그다드에 근접했던[7] 2014년에 비해 2016년에는 이라크 정부군이 힘을 되찾고, 각지에서 다에시 군에 대한 반격이 성공하며, 서방 세력의 연이은 공습으로 IS의 전체적인 세력이 크게 줄어든 상황이라, ISIL은 2016년 6월 기준으로 바그다드에서도 한참 멀리 쫓겨난 상황이다. 2016년 5월 바그다드 폭탄 테러, 2016년 카라다 폭탄 테러 등 여전히 잔혹한 테러는 일어나긴 하지만, 확실히 상황 자체는 좀 나아진 편이다. 이후 테러만 줄어들고 안정을 되찾는다면 여행금지가 먼저 풀릴 것으로 보인다.
남동쪽 10km 떨어진 곳에 비스마야 신도시를 건설한다고 한다. 신도시 건설은 대한민국의 한화건설이 주도하고 있다.
2019년 6월 4일에 바그다드의 그린 존(Green Zone)이 이라크 전쟁 16년 만에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다.#
2019년 10월 1일부터는 생활고를 견디다 못한 이라크 시민들의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100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
반정부 시위도 문제이지만 세력권을 잃은 IS는 점조직화되어 계속 게릴라식 테러를 저지르고 있는 관계로 바스라 등 남부 이라크면 몰라도 모술, 바그다드 등 중부, 북부 지역은 한동안 여행 금지 지역 상태일 것으로 보인다.
3. 지리[편집]
티그리스강이 도시를 가로지르며 바그다드에서 강 동쪽 지역을 알 루사파, 서쪽 지역은 카르크로 부른다. 티그리스강을 접하면서도 유프라테스강과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메소포타미아 평원 중심부에 위치한만큼 대부분이 평야인데다 저지대이며 해발고도가 34m에 불과하다.
3.1. 그린 존[편집]
파일:5628442718_b10fc2c47f_o.jpg
그린존 전경
파일:Republican_Palace,_Baghdad,_Iraq_front.jpg
파이살 2세가 세우고 사담 후세인이 증축한 공화국 궁전
티그리스 서안의 지역으로, 넓이는 약 10 제곱킬로미터다. 바그다드에서 가장 보안이 철저한 곳으로 손꼽히며, 각종 정부 기관 및 외교 공관들이 밀집된 조계지 느낌이다. 바트당 시절부터 정부 구역으로 개발되었고, 현재까지도 이라크 정치 1번지이다. 2003년 ~ 2009년간 미군이 주둔하다가 민정으로 이관되었고, 한동안 안보를 이유로 통제 구역으로 유지되다가 2018년 핵심 구역을 제외한 대부분이 민간에 공개되었다.
4. 경제[편집]
이라크 인구의 22%를 차지하는 최대도시인만큼 경제적으로도 가장 중요한 도시이며 많은 기업들이 활동하는 곳이다.
과거에는 많은 관광 자원을 가진만큼 관광객이 많이 방문했으나 여러 전쟁을 거치며 대부분의 국가가 이라크를 여행금지국가로 지정하여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기면서 관광업이 침체되었었다. 2020년대인 현재는 비교적 안정을 되찾아 여러 국가에서 관광객을 유치하는 중이다.[8]
5. 시아파의 성지[편집]
열두이맘파의 7대 이맘 무사 알 카짐과 9대 이맘 무함마드 알 자와드가 안장된 카지미야 (혹은 알-카지메인) 성지
이라크 내에서도 나자프(쿠파)와 카르발라에 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바그다드 북쪽 외곽의 카지미야 역시 시아파의 주요 성지 중 하나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란 최대의 성지라 꼽히는 마슈하드보다 더 중요한 곳인데, 바로 12 이맘들 중 7대와 9대 이맘들을 모시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8세기 말부터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들이 당대 학문적, 신앙적으로 명성을 드높혀가던 쉬아 이맘들을 경계하여 본래 그들이 거주하던 메디나에서 이라크로 소환하여 죽을 때까지 감금하였기에 알리와 후세인 이후로도 7 ~ 11대 이맘들은 (이란에서 죽은 8대 이맘 알리 레자를 제외하면) 모두 이라크에서 사망하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생사가 확실한 11명의 이맘들 중 5명이 이라크에 매장된 것이다.
10세기 부와이 왕조 (열두이맘파를 신봉함)에 의해 세워진 카지미야는 이슬람력의 일곱 번째 달인 라잡 25일마다 무사의 순교를 기념하는 백만에 달하는 쉬아 순례객들로 붐비게 된다. 그러다 보니 2005년에는 수백명이 압사당하는 참사도 있었다. 카지미야 일대는 바그다드 중에서도 쉬아 세가 가장 강한 곳이며, 명문 쉬아 마드라사들이 있다. 따라서 이라크 외에 이란이나 레바논, 바레인, 아제르바이잔 등 외국인들도 가끔 볼 수 있다.
6. 언어별 명칭[편집]
7. 창작물에서[편집]
- 콜 오브 듀티: 어드밴스드 워페어에서 아틀라스 코퍼레이션의 본사가 위치한 곳으로 등장한다. 아틀라스 코퍼레이션이 전쟁으로 망가진 바그다드를 보수하고 뉴 바그다드를 세웠는데, 조나단 아이언스가 본심을 드러낸 다음에 도시는 다시 전쟁터가 된다.
- <시간탐험대> 애니메이션의 주요 무대. 마침 아바스 왕조의 최전성기인 9세기로 번영하는 세계 수도의 모습을 하고 있다.
- 영화 <알라딘의 새로운 모험>의 배경 도시이다.
- 소련, 러시아의 실험주의적 아방가르드 밴드인 아욱치온의 앨범 중 <바그다드에서는 모든 것이 고요하다>라는 앨범이 있다
- 어쌔신 크리드: 미라지의 배경으로 등장한다. 시대는 아바스 왕조.
8.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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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مدينة السلام[2] 1959년 압둘 카림 카셈 정권에 의해 지방 이주민들을 수용하려고 건설된 신도시로 시아파 다수 거주지역이다. 처음에는 타우라(Thawra, 혁명)였다가, 1982년 사담시티로 바뀌었고, 2003년 이후 시아파 성직자 알사드르의 이름을 따 바뀌었다. 구역 전체가 빈민가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생활 여건이 좋지 않으며, 치안도 대단히 위험한 지역이다. 미군 주둔 당시 미군이 호위를 맡아도 안전이 보장되지 않을 정도였다.[3] 현 지명: 아카르 쿠프 عَقَرْقُوف[4] 이에 더하여 무흐타시브란 관직을 두어 시장 관리 및 속임수 방지 등을 맡겼다[5] 당시 수만명만 사는 도시도 대도시라 불릴 정도였고, 좀 잘 나가는 국가들의 인구가 수백만명 수준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매우 대단한 수치다.[6] 그런데 이런 위험한 도시에 들어간 민간인이 있었다. 로렌스 앤서니라는 남아프리카의 환경운동가로, 순전히 바그다드의 동물을 위하여 들어갔다고. 그가 한 일을 보려면 본인의 서적《바그다드 동물원 구하기》를 참조.[7] 한 때는 바그다드 외곽에서 불과 1.6km 떨어진 곳까지 IS가 진출했을 정도였다.[8]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와 요르단, 이란 등 중동 이웃 국가들은 이라크는 그래도 시리아에 비해 정세가 안정되었다고 판단해 외무부의 방문 금지 단계에서 해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