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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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메디나 사원 2.jpg
파일:external/www.shiawisdom.com/Holy-City-Medina.jpg
이슬람 제2의 성지인 예언자 모스크의 풍경

아랍어
المدينة المنورة
영어
Medina

1. 개요
2. 역사
2.1. 이슬람의 산실
2.2. 2차 피트나
2.3. 실패한 반란들
2.4. 메디나 토후국
2.5. 근현대
2.5.1. 메디나 공방전 (1916-19년)
2.5.2. 사우디아라비아
4. 사건·사고



1. 개요[편집]


메디나는 사우디아라비아히자즈 지역에 있는 마디나 주의 주도이자 이슬람성지이다. 아랍어 명칭 'المدينة المنورة'에서 '누르'는 '빛', '무누와라'는 '계몽된'이라는 뜻이다. 헤지라 이전에는 야스랍(야스리브)이란 명칭으로 불렸다. 메카에서 무함마드가 망명한 곳으로, 무함마드의 사상은 메디나로 오면서부터 전에 비해 엄격하고 과격한 양상을 띠게 된다.[1] 메카, 예루살렘과 더불어 이슬람의 3대 성지로 꼽힌다.

이슬람의 성지이므로 메카와 마찬가지로 원칙적으로 비무슬림은 출입이 제한되어 있었다. 2019년 9월 28일부터 사우디아라비아 관광비자를 외국인에게 발급해주기 시작했지만 정작 사우디에서 가장 역사적, 상징적으로 의미가 있고 관련 문화재도 많은 성지 메카와 메디나는 방문이 불가능한 반쪽짜리 관광비자다. 물론 한국인이라도 이슬람으로 개종했다면 성지순례 비자를 받아 방문이 가능하다. 성지순례 절차에 대해서는 메카 문서 해당 단락 참조. 메카와 멀지 않은 위치라 사우디에 입국한 김에 같이 방문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2022년부터 비무슬림에게도 방문이 허용되었다! #[2]

메카와 달리 인지도는 다소 떨어지는데, 메카의 경우는 소위 '하즈'라고 하여 일생에 최소 한 번은 해야 하는 성지순례 의무에 따라 가는 곳이지만 메디나는 그렇지 않다[3]. 다시 말하자면 메카는 일생에 적어도 한 번은 가야 하는데 메디나는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된다. 하지만 메카 성지순례 후, 혹은 아무 때라도 메디나에 방문함은 이슬람 기준으로 매우 권장되는 행위이므로, 많은 무슬림들이 하즈 후에 메디나를 방문하곤 한다. 또한 '움라'라고 하여, 소규모 성지순례로도 간다. 메디나에 있는 꾸바(Quba) 사원은 무함마드가 메디나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건축한 사원으로, 무슬림들이 꾸바 사원에서 예배 드림 역시 권장되는 행위이다. 이슬람의 설명에 따르면 꾸바 사원에서 한 번 예배를 드리면 움라와 같은 축복이 내린다고 한다.


2. 역사[편집]


기원전 800년 경부터 도시가 형성되었다. 기원전 5세기 무렵 예멘에서 온 아랍계 유대인 부족인 바누 카이누카, 바누 쿠라이자, 바누 나디르 등이 정착하였다. 그중 가장 큰 부족이던 바누 쿠라이자는 사산 제국이 히자즈를 지배했을 당시 세금 징수를 맡았다고 한다. 그후 비유대계 아랍 부족인 바누 아우스와 바누 카즈라즈가 이주해왔고, 처음에는 기존 유대계 부족들과 우호를 유지하며 공존하였다. 그러나 5세기 말엽 바누 아우스와 카즈라즈는 다른 아랍 부족들을 불러들여 유대 부족들의 지도부를 연회에 초대해 학살함으로써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그후로도 세 유대 부족들은 자치를 유지하긴 했지만 아우스와 카즈라즈에 복속한 상태였다. 당시 지명은 야스리브 (يَثْرِب)였다. 6세기 무렵 예멘 힘야르 왕국의 국왕이 부근을 지나갔는데, 주민들이 그의 아들을 죽였다. 분노한 왕은 야스리브를 초토화시키려 하였는데 바누 쿠라이자의 두 랍비들이 후에 '쿠라이쉬 부족의 사도가 의지할 곳'이라며 그를 설득해 유대교로 개종시켰다.


2.1. 이슬람의 산실[편집]




파일:메디나 쿠바 사원.jpg
이슬람의 첫 마스지드 (모스크)로 여겨지는 쿠바 사원. 히즈라 직후 세워졌고, 무함마드는 이곳에 2주간 머물며 알리의 안전한 도착을 기도하였다. 알리는 무함마드가 메카를 떠난 날 라일라탈 마비트 (لَـیْـلَـة ٱلْـمَـبِـیْـت)에 그 대신 침대에 누워 쿠라이쉬 암살자들을 대면하였다. 그의 희생정신에 감탄한 암살자들은 그냥 돌아갔다고.

한편 6세기 들어 기존의 동맹이던 바누 아우스와 카즈라즈는 주도권을 두고 120년에 걸친 내전에 돌입하였다. 바누 나디르와 쿠라이자는 전자, 바누 카이누카는 후자의 편에 서며 야스리브는 지속적으로 혼란에 시달렸다. 두 연합군은 4번에 걸쳐 크게 격돌했는데, 그 마지막인 617년의 부아쓰 전투에서는 바누 아우스의 연합군이 피로스의 승리를 거두었다. 전쟁에 지친 야스리브 인들 중 일부가 620년 메카 순례 도중 무함마드를 만나 지도력에 감화된 후, 그를 전쟁에 지친 야스리브의 중재자로 조청하기에 나섰다. 2번의 메카 밖 아카바에서의 서약을 거쳐 무함마드는 아부 바크르와 함께 622년 7월에 메카를 떠나 야스리브에 당도하였다. 이를 전후로 약 70여명의 초기 무슬림 (무하지룬)들도 야스리브로 향하였다. 바누 카즈라즈 출신인 외증조모를 통해 연고가 있던 무함마드는 메디나 헌법을 제정해 평화로운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아부 아이유브 칼리드의 도움으로 토지를 구매한 무함마드는 첫 모스크인 쿠바 사원을 세웠고 매주 토요일 오후에 방문하였다. 그후 야스리브의 이슬람 군대와 메카의 쿠라이쉬 부족 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624년의 바드르 전투에서 이슬람 군대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메카 군대를 격파하였다. 14인의 무슬림 전사자들 중 6명은 카즈라즈 출신이었다. 이듬해의 우후드 전투에서 카즈라즈 부족의 압둘라 이븐 우바이의 비협조에 이슬람 군대는 많은 사상자를 내며 패배하였고 무함마드도 부상을 입었다. 627년 칸다크 전투에서 무함마드는 페르시아인 살만 알 파르시의 조언대로 도시 바깥에 참호를 파는 지구전으로 메카 군을 철수시켰다. 승전 후 무함마드는 메카 측과 내통하며 서약을 저버린 바누 쿠라이자를 학살하였다. 이로써 야스리브에 대한 확고한 지배력을 구축한 무함마드는 도시를 선하다는 의미의 타이바 (طَيْبَة)로 명명하였다. 그리고 630년 이슬람 군대는 별 저항 없이 메카를 정복하였다.

그후 메카의 종교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타이바, 즉 메디나는 정치적 중심지로 남았고, 632년 무함마드가 고별 순례를 마치고 사망한 곳도 그곳이었다. 알 마디나 (그 도시)라는 지명은 하디스를 시작으로 후대에 정착하였다. 정통 칼리파 시대에 메디나는 이집트에서 이란에 이르는 대제국의 수도로써 24년간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656년 우스만이 이집트의 불만 세력에 의해 암살당한 후 칼리파위에 오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가 수도를 쿠파로 옮긴 후 메디나의 정치적 중요성은 히자즈의 주도 정도로 격하되었다. 661년 알리가 사망한 후 하산 이븐 알리는 협상을 통해 무아위야 1세에게 제위를 양보하고 메디나로 은퇴하였다. 그후 메디나는 우마이야 조에 대항하는 쉬아 알리 가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정작 알리는 메디나에서 천도했지만 한편 662년 알리의 메디나 총독 아부 아이유브 칼리드가 도주한 후 무아위야는 6촌인 마르완 이븐 알 하캄을 총독으로 봉하였다. 그는 아인 앗 아즈라크 (푸른 샘) 등 관개 시설을 정비하여 도시 일대의 식수 공급과 농업 생산력을 개선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2.2. 2차 피트나[편집]


680년 무아위야의 사망 후 그의 아들 야지드 1세로의 계승은 이슬람권에 충격으로 다가왔다. 전례가 없던 칼리파의 세습에 메디나의 사하바들은 분노하였다. 여기에 670년 하산의 사후 이맘이 된 동생 후세인이 쿠파인들의 초청에 같은해 메디나를 떠나 이라크로 향하다가 카르발라에서 70여 사하바들과 참살당하며 반우마이야 감정은 극에 달하였다. 동시에 가수들과 서커스 원숭이 등이 메디나에 흥행하는 등 비이슬람적인 모습이 팽배해진 것과 우마이야 조가 기존에 사하바들이 세습하던 군대 봉급을 현직 시리아 군대에게만 지급하기로 한 것도 봉기의 이유 중 하나였다. 야지드는 메디나 총독인 사촌 우스만 이븐 무함마드로 하여금 사하바 대표단을 다마스쿠스로 보내게 하여 직접 협상하여 하였다. 하지만 선물과 돈으로 사절단을 매수하려던 야지드의 시도는 그들이 메디나로 돌아가 칼리파의 방타한 생활을 고발하며 역풍으로 귀결되었다. 683년 안사르의 일원인 압둘라 이븐 한잘라는 야지드가 보낸 뇌물을 바탕으로 봉기하였고, 같은해 9월 메카에서 압둘라 이븐 주바이르가 반란을 일으키자 그와 연대하였다.

메디나 인들은 모스크에서 터번, 신발 등 옷의 일부를 한데 모으며 연대를 결의하였고, 시내의 1천 우마이야 세력은 원로 마르완 이븐 알 하캄의 구역으로 피신하였다. 마르완의 요청에 야지드는 1만 대군을 파견하였고, 군인 개개인에게 1백 디르함의 보너스를 지급하였다. 야지드는 본래 친척인 아므르 이븐 사이드 이븐 알 아스를 사령관으로 선임했지만 그가 같은 쿠라이쉬 간의 동족 상잔을 거부하였고 후세인을 죽인 우바이둘라 역시 그 충격이 가시지 않아 거부하였다. 결국 비쿠라이쉬 계열인 무슬림 이븐 우크바가 사령관이 되어 남하하였다. 한편 우마이야 구역을 포위하던 압둘라는 그들이 토벌군에 가세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도시를 떠날 수 있게 해주었는데, 마르완의 주도로 대다수는 서약을 어기고 원정군에 합류하였다. 압둘라 휘하 2천의 사하바 병력은 도시 북쪽에 방어 참호를 파고 4등분하여 방어하였다. 8월 23일 메디나 외곽에 당도한 무슬림 이븐 우크바는 연금 지급 및 곡물 가격 인하 등의 조건으로 3일간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결렬되었다. 26일 메디나 기병대가 알 하라라의 적진으로 출격하며 전투가 벌어졌다.

메디나 군대는 초반에 무슬림 이븐 우크바의 본진까지 진격하며 기세를 올렸으나 그가 직접 반격에 나서자 밀려났다. 결정적으로 참호의 한 부분을 맡은 바누 하리싸가 배신, 마르완의 기마 부대에게 길을 터주었고 이에 그들이 후방에서 공격해오자 메디나 진영은 붕괴하였다. 압둘라 등 지도부가 전사하였고, 압둘라 이븐 무티 휘하의 쿠라이쉬 부대는 메카로 도주하였다. 승전 후 우마이야 군대는 3일간 메디나를 약탈하였다. 메디나 측은 7백의 사하바 병력과 수천에 달하는 기타 민간인들이 희생되었다. 우마이야 조에 적대적이던 역사가 앗 삼후디는 약탈을 수반한 강간으로 후에 메디나에선 1천에 달하는 서자들이 태어났다고 기술하였다. 다만 8세기 초반의 사료에 의하면 무슬림 이븐 우크바는 메디나 원로들로 하여금 쿠바 사원에서 야지드에게 충성 서약을 시켰고, 그를 거부한 세력의 주도자들을 처형하였다고 한다. 처형된 이들 중에는 무슬림 이븐 우크바의 절친한 친구인 마킬 이븐 시난도 있었다. 그후 메카로 남하한 무슬림 이븐 우크바는 도중 사망하였고, 홈스 부대를 이끌던 후세인 이븐 누마이르가 사령관이 되어 메카를 포위한다.[4]

두달에 걸친 메카 포위는 야지드의 죽음과 함께 중단되었고, 우마이야 군대는 철수하였다. 그러자 메디나는 메카의 압둘라 이븐 주바이르에 복속하였고, 그가 칼리파를 칭하자 시리아를 제외한 이슬람권 전역이 복속해왔다. 684년부터 압둘라는 동생들을 연이어 메디나의 총독으로 봉하여 다스렸다. 그러나 우마이야 조는 일전에 알 하라라 전투에서 활약한 마르완 1세 하에 뭉쳤고, 685년 네지드 (야마마)에서 자립한 카와리지 세력이 4년 후 메카 부근의 타이프를 점령하는 등 압둘라의 입지는 점점 축소되었다. 691년 마르완의 후계자 아브드 알 말리크는 이라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압둘라의 지배력은 히자즈에 국한되었다. 692년 우마이야 대장군 알 핫자즈 이븐 유수프는 메디나를 우회하여 메카를 포위하였고, 그를 돕기 위해 파견된 바스라 총독 타리크 이븐 아므르는 5천 병력과 남하해 메디나를 점령하였다. 그후 격렬한 전투 끝에 압둘라가 전사하며 10여년에 걸친 2차 피트나가 종식되었다. 그후 안정을 회복한 메디나는 무역 도시로 번영하였고, 주변 사람들이 몰려들어 인구가 증가하였다.


2.3. 실패한 반란들[편집]


694년부터 우마이야 조는 왕실 출신의 총독들을 임명하며 메디나에 대한 지배력을 공고히 하였다. 특히 706-712년간 총독을 역임한 우마르 이븐 아둘 아지즈는 후에 칼리파 우마르 2세로 등극하였다. 그의 부임기인 711년에 순니 4대 법학파 중 하나인 말리키파의 개창자 말리크 이븐 아나스가 메디나에서 출생하기도 하였다. 반세기간 평화를 유지하던 히자즈는 740년대 우마이야 조의 쇠퇴와 함께 다시 혼란에 접어들었다. 747년 카와리지 세력의 이바디파는 예멘을 장악하고 메카를 무혈 접수하였다. 메디나의 총독 압둘 와히드 이븐 술라이만이 반격에 나섰지만 패배하였고, 그해 10월 이바디 지도자 알 무크타르는 메디나 역시 점령하였다. 다만 히자즈를 넘어 시리아까지 노리던 이바디 군대는 748년 초엽 와디 알 쿠라 전투에서 압둘 말리크 이븐 무함마드 휘하의 우마이야 토벌군에게 대패하였다. 소식을 접한 메디나 주민들은 봉기해 시내의 이바디 세력을 학살하고 칼리파 군대를 맞이하였다. 그후 메카로 철수하던 알 무크타르도 추격을 받아 전사하며, 히자즈는 평정되었다. 다만 불과 2년 후 우마이야 조는 압바스 왕조로 대체되었다.

초대 압바스 칼리파 아부 압바스는 숙부와 삼촌을 연달아 메디나의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우마이야 조와 마찬가지로 압바스 칼리파들 역시 자신들의 가문에서 총독을 임명하였으나 전자와 달리 종종 가문 외에서도 임명하였다. 본래 압바스 조와 우호를 유지하던 메디나의 알리 가문은 2대 칼리파 알 만수르가 쉬아파에 대한 박해에 나서자 762년 하산 이븐 알리의 증손자 무함마드 앗 나프스 앗 자키야의 지휘 하에 봉기하였다. 9월 25일 무함마드는 압바스 조의 메디나 총독 리야흐 이븐 우스만을 기습해 사로잡았고, 안사르 가문들의 지지 하에 도시를 장악하였다. 그러나 그가 다소 즉흥적으로 봉기한 탓에 이라크에서 호응하기로 했던 동생 이브라힘은 두달 후에야 거병하였고, 압바스 조가 메디나의 보급줄이던 이집트의 식량 공급을 차단하자 도시는 배고픔에 시달리게 되었다. 당시 바그다드 건설을 감독하던 알 만수르는 쿠파에 작전 본부를 차리고 무함마드에게 사면 약속과 함께 항복을 종용하였다. 양측의 서신 공방에서 무함마드의 혈통 주장에 알 만수르는 파티마를 통한 모계 상속은 아랍의 전통이 아니라며 일축하였고, 협상은 결렬되었다.

그후 알 만수르는 조카 이사 이븐 무사 휘하의 4천 병력을 파견하였다. 무함마드는 5대조이기도 한 선지자가 조성한 참호를 복구하며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하지만 굶주림과 두려움에 휩쌓인 지지자들이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참호 앞에 다다른 이사 이븐 무사는 며칠간 사면 및 항복을 제안하다가 마침내 공격에 나섰다. 압바스 군대는 참호에 나무판을 깔아 메디나에 진군하였고, 무함마드는 남은 3백여 지지자들과 함께 저항하였으나 762년 12월 6일 전사하였다. 그의 수급은 알 만수르에게 보내졌다. 비슷한 시기 이라크 남부에서 봉기한 이브라힘 역시 자이드파 및 후세인 가문과 내분을 겪은 후 이듬해 초엽 이사 이븐 무사에게 패하고 사망하였다. 이로써 이슬람 이래 최대 규모의 쉬아 반란은 5개월만에 진압되었다. 그후 767년 알 만수르는 알리 가문에서 드물게도 압바스 조를 인정하던 하산 이븐 자이드[5]를 메디나 총독으로 봉하며 일종의 타협을 시도하였다. 다만 772년 칼리파와 불화를 겪은 하산은 재산을 몰수당하며 해임되었다. 다만 후임 칼리파 알 마하디은 그의 재산을 돌려주고 알리 가문과의 우호를 회복하려 하였다. 하지만 775년 그가 사망한 후 칼리파 알 하디가 다시 강경책으로 회귀하자 메디나는 전운이 감돌았다. 그 무렵 메디나 총독 우마르 이븐 압둘 아지즈 알리 가문의 기를 죽이려는 의도로 음주 혐의를 받던 무함마드의 아들 압둘 지프트 등 알리 가문원들을 공개적으로 채찍형에 처하는 등 망신을 주었다.

그의 가혹한 처사는 쉬아 세력의 공분을 샀고, 그들은 쿠파의 조직원들 및 순례객들 중 일부와 함께 봉기를 계획하였다. 총독 우마르와 설전을 벌인 무함마드의 이복 동생 야흐야는 다음날인 786년 5월 16일 지지자들과 우마르 체포에 나섰다. 다만 우마르는 이미 숨은 뒤였고, 예언자 모스크에 집결한 26명의 알리 가문원들과 지지자들은 무함마드의 외조카이자 하산 이븐 알리의 고손자인 후세인 이븐 알리 알 아비드를 지도자로 추대하였다. 그는 백의와 하얀 터번을 쓰고 선지자의 연단에 앉았고, 무엣진에게 아침 예배를 쉬아 방식으로 진행하게 했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호응하지 않았으나, 모여든 지지자들은 후세인에게 충성 서약을 하였고 그는 이맘-칼리파 알 무르타다[6]로 추대되었다. 다만 열두이맘파의 7대 이맘 무사 알 카딤은 이에 합류하지 않았고 후세인에게 결과는 죽음 뿐이라며 경고하였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봉기를 지속한 후세인은 곧 2백여 압바스 수비대와 돌아온 우마르와 대치하였다. 압바스 병력 중 칼리드 알 바르바리가 후세인을 죽이려 달려들었으나 후자의 동생인 이드리스와 야흐야 형제에게 처단되었다.

기세를 얻은 봉기군이 압바스 군에 돌격하자 후자는 도주하였다. 하지만 '이맘'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메디나 주민들은 대문을 걸어잠근 채 상황을 주시하였고, 다음날 도시는 알리 가문과 압바스 세력 간의 시가전에 휩쌓였다. 그날은 압바스 세력이 우세를 점하였고, 이듬날 무바라크 알 투르키 휘하의 압바스 원군이 당도하자 그들의 사기는 충만하였다. 무더운 정오 무렵을 제외하고 전개된 그 다음날의 충돌에서 봉기군은 예언자 모스크 일대로 밀려났다. 압바스 군은 부근의 총독 관저를 기지로 삼았고, 양측은 11일간 대치하였다. 메디나 장악의 실패가 확실해지자 후세인은 3백여 지지자들과 물자를 모아 5월 28일 도시를 떠났다. 수복된 예언자 모스크에는 그들이 먹다 남긴 동물 뼈와 의복 제조를 위해 뜯겨나간 장막 등이 남겨져 있어 메디나 여론의 분노를 샀다. 그후 메카로 향한 후세인은 알 파크 전투에서 압바스 군에 패하고 전사하였다. 762년과 786년의 반란 이후 잠잠하던 메디나는 압바스 조가 4차 피트나에 돌입한 틈에 알리 가문의 요원 아부 앗 사라야 이븐 만수르에게 장악되었다. (815년) 다만 그의 반란 역시 신속히 진압되었다.


2.4. 메디나 토후국[편집]


9세기 중엽 압바스 조의 쇠퇴와 함께 히자즈에 대한 그의 장악력도 약화되었고, 메디나는 도적떼의 공격에 시달렸다. 879년 한해에만 히자즈에는 4명의 총독이 거쳐갔다. 기존 총독이던 이샤크 이븐 무함마드가 사망하자 동생 무사가 총독이 되었는데, 자이디 반란을 이끈 아흐마드 이븐 무함마드[7]에게 살해되었다. 그후 아흐마드가 조정에 의해 총독으로 승인되었으나 같은해 해임되고 페르시아인 무함마드 이븐 아비 알 사즈가 사파르 왕조 임명된 것이다. 여담으로 후자는 10년 후 아제르바이잔에 사즈 왕조를 세우게 된다. 그 무렵 히자즈 총독부는 사실상 메카로 옮겨간 상태였고, 메디나는 이슬람 시대 들어 가장 쇠락한 시기를 맞았다. 935년 이집트 이흐시드 왕조의 무함마드 이븐 투그즈는 칼리파 알 라디로부터 메카와 메디나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이흐시드 왕조는 960년대 들어 쇠퇴하였고, 968년 메카에는 하산 가문의 아미르가 세습 정권을 세웠다.

한편 후세인 이븐 알리의 8대손인 아부 자파르 무슬림은 이집트에 머물며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는데, 파티마 왕조의 정복 이후 칼리파 알 무이즈와 충돌을 빚었다. 976년 아부 자파르 무슬림이 사망한 후 그의 아들 타히르는 메디나로 향하였고, 압바스 칼리파 앗 타이의 승인을 하에 아미르로 등극하였다. 이에 파티마 칼리파 알 아지즈는 군대를 파견하였는데, 타히르를 폐위시키진 않고 명목상의 복속을 얻어내는 것에 만족하였다. 992년 타히르가 사망한 후 아들 하산이 계승하며 파티마 조에 복속한 메디나 토후국이 공식 설립되었다. 타히르의 가문은 후세인의 다른 후손인 다우드 이븐 알 카심에 의해 1007년 메디나에서 축출되었다. 그후 다우드의 후손들이 아미르 직을 이어갔다. 1151년 메디나는 파티마 왕조 대신 장기 왕조의 술탄 누르 앗 딘에게 복속하였다. 누르 앗 딘은 순례자들의 교통로를 정비하고 시내의 수도 시설과 거리의 보수를 후원하였다. 1162년 그는 메디나를 방문, 옛 성벽 밖으로 팽창한 신시가지를 포함하는 새로운 성벽 건설을 명하였다.

그에 이어 시리아를 지배한 살라흐 앗 딘은 메디나의 아미르 카심 이븐 무한나를 후원하였고, 동시에 순례자들이 납부하던 세금을 대폭 인하시켰다. 또한 그는 순례 경로에 거주하는 베두인들에게 순례단을 보호하는 대가로 보조금을 지급하였다.압바스 칼리파들도 지속적으로 후원했기에 메디나의 아미르들은 공식적으로는 그에 충성했지만 장기-아이유브 술탄들과 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당대에 메디나는 성탑을 갖춘 약 10m 높이의 강한 성벽으로 둘러진 타원 형태의 유서깊은 도시였다. 4개의 성문 중에서는 밥 앗 살람 (평화의 문)이 그 아름다움으로 유명하였다. 성벽 밖의 남쪽과 서쪽 교외는 낮은 집들과 정원, 뜰, 대농장이 자리하였다. 1183년 살라흐 앗 딘과 대립하던 예루살렘 왕국르노 드 샤티용홍해 함대를 건조해 메디나 침공을 시도하였다. 메디나의 외항 얀부에 상륙한 십자군은 메디나의 하루 거리에서 현지 병력에 의해 격파되었다. 한편 메디나의 아미르들은 13세기 아이유브 왕조와 메카의 아미르 및 그 동맹인 예멘의 라술 왕조 간의 전쟁에서 가까운 이집트에 위치한 아이유브 조에 항상 충성하였다.

다우드의 6대손인 메디나의 아미르 쉬하흐 이븐 하심은 1232년 여름 아이유브 군대와 함께 메카를 점령하였다. 비록 같은해 축출되었지만 쉬하흐는 1240년 1천 이집트 군과 재차 메카를 점령할 수 있었다. 다만 그럼에도 메디나의 아미르는 메카의 라지흐와 통혼으로 인한 혈연 관계로 얽혀 있었고, 1250년 폐위당한 그의 복위 시도를 돕기도 하였다. 1256년 메디나는 주변의 하라트 라하트 화산지대에서 흘러온 용암에 의해 불타버릴 위기에 처하였는데, 용암이 극적으로 북쪽 방면으로 선회하며 무사할 수 있었다. 다만 같은해 예언자 모스크의 창고에서 발생한 불로 사원이 전소되는 피해를 입었다. 압바스 칼리파 알 무스타심이 복구를 후원하였으나 2년 후 바그다드가 몽골군에게 파괴되고 칼리파가 살해되며 중단되었다. 그후 맘루크 왕조의 술탄 바이바르스가 복원을 완수하였고, 술탄 칼라운의 후원으로 거대한 초록 돔이 세워졌다. [8]

1259년 메디나의 아미르로 등극한 이즈 앗 딘 자마즈 이븐 쉬하흐는 1268년 조카 말리크 이븐 무니프에게 폐위되었는데, 메카의 아미르와 베두인의 도움으로 복위를 시도했으니 실패하였다. 다만 그 직후 말리크가 양위하며 자마즈는 복위하였고, 향후 32년간 히자즈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1271년 자마즈는 메카를 점령해 두 달간 유지하였고, 1288년에는 맘루크 술탄 칼라운의 지원으로 재차 메카를 점령하곤 이듬해까지 주둔하다가 현지 아미르 아부 누마이 1세의 독살 기도에 당한 후에야 회군하였다. 자마즈는 1300년 아들 만수르에게 양위한 후 1304년 가을 사망하였다. 그의 후손들은 약 40대에 걸쳐 1495년까지 통치하였다. 다만 1408년 메카의 아미르 하산이 맘루크 술탄에 의해 히자즈 부왕으로 봉해진 것을 시작으로 메디나 역시 그로부터 아미르가 임명되는 등 복속당하였다. 한편 1481년 예언자 모스크에 내려친 번개로 사원 일부가 파괴되었고, 맘루크 술탄 카이트베이의 주도 하에 복원되었다. 메디나 토후국에 대한 더 많은 정보는 이곳 참고 (아랍어)


2.5. 근현대[편집]


파일:메디나 19세기.jpg
파일:메디나 돔.jpg
19세기 메디나 지도
1837년 녹색으로 칠해진 예언자 사원의 돔

1517년부터 히자즈는 오스만 제국령이 되었고, 메카의 샤리프들이 그 제후로써 통치하였다. 1532년 술탄 쉴레이만 1세는 메디나에 견고한 성채를 세워 지배력을 강화하였고 예언자 사원을 확장하였다. 1632년 메카의 아미르 자이드가 예멘 군대의 침공으로 도시가 함락되자 메디나로 피신, 오스만 군과 함께 메카를 수복한 것 외에 메디나는 역사에 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던 1804년 4월 사우드 이븐 압둘아지즈 휘하의 와하비 군대가 메디나를 점령하였다. 오스만 술탄의 명으로 이집트 총독 메흐메드 알리 파샤는 1811년 아들 투순 파샤 휘하의 1만 병력을 파견하였다. 1812년 메디나의 외항 얀부에서 아흐메트 아가의 1만 원군과 합류한 투순 파샤는 그해 11월 메디나로 진격, 사우디 수비대 6백여를 전사시키고 도시를 점령하였다.

그후 현재의 사우디 일대를 지배하게 된 메흐메드 알리의 차남 이브라힘 파샤는 메디나의 성벽과 예언자 사원을 보수하였다. 그는 또한 타키야를 세워 필요한 자에게 식량과 돈을 나눠줌으로써 도시에 안정과 평화를 가져왔다. 다만 1840년 유럽 열강의 개입으로 오스만 조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메흐메드 알리 파샤는 시리아와 히자즈를 오스만 제국에 양도하였다. 메디나를 되찾은 술탄 압뒬메지트 1세는 1849년 예언자 모스크에 대한 전면적인 보수 공사에 나섰는데, 기도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금씩 공사를 진행한 끝에 1861년에야 완성되었다. 그후 술탄 압둘 하미드 2세는 1896년 메디나에 통신선, 전보국 및 예언자 모스크를 위한 발전소 등을 세워 근대화에 나섰고, 1908년에는 다마스쿠스와 메디나 간의 헤자즈 철도가 개통하였다. 근대화에 힘입어 도시의 인구는 8만명까지 불어났다.


2.5.1. 메디나 공방전 (1916-19년)[편집]


안정을 누리던 메디나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6년 6월 샤리프 후세인이 메카에서 봉기를 일으킨 것에 호응한 하심 가문 세력의 준동과 함께 3년간 전란과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1916년 10월 후세인의 아들 파이살이 영국의 도움으로 메디나를 공격하였다. 파크렛딘 파샤 휘하의 튀르크 수비대는 화력을 앞세워 이를 격퇴하였고, 하심 군대는 큰 피해를 입고 철수하였다. 그후 파이살은 메디나를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오스만 제국이 그에 대한 보급을 위해 막대한 물자를 소모하게 만드는 것이라 여겨 공격 대신 봉쇄에 나섰다. 그리고 헤자즈 철도를 따라 내려오는 보급품은 수시로 베두인들에 의해 탈취되었다. 1917년에만 보급 열차에 대한 130번의 습격이 있었고 1918년에는 수백번으로 늘어났다. 후세인의 아들 압둘라, 알리, 파이잘이 이끄는 3만 대군의 포위에도 파흐렛틴 파샤(또는 파흐렛딘 파샤 Fahreddin Pasha라고도 부르는데 본명은 외메르 파흐렛틴 튀르칸/Ömer Fahrettin Türkkan,1868~1948)는 계속 버텨내었다. 장기화된 봉쇄에 지친 주민들은 식량을 찾아 다른 도시로 대거 이주하였다.

1918년 10월 30일 오스만 제국의 항복 선언 및 이제 항복하라는 술탄의 당부에도 파크렛틴 파샤는 저항을 이어갔다. 다만 더이상 보급이 오지 않았기에 물자가 부족해진 수비대가 반기를 들어 파흐렛틴 파샤를 체포한 후에야 도시는 1919년 1월 10일에야 항복하였고, 3일 후 압둘라 이븐 후세인이 입성하였다. 터키군 산하의 7500명의 수비대와 500명의 관료들은 이집트로 소개되었고, 화약과 무기들은 하심 군대에게 넘겨졌다. 한편 약탈을 예상한 파흐렛틴 파샤는 비밀리에 무함마드의 성유물을 이스탄불로 빼돌렸다. 1920년 영국 자료들은 메디나가 메카보다 더 자족적이라 기술하였다. 다만 영국과 동맹한 샤리프 후세인의 헤자즈 왕국에 대한 반감이 크던 메디나 주민들은 1924년 비밀리에 네지드 토후국의 압둘 아지즈 이븐 사우드와 연락을 취하였다. 그리고 1925년 12월 5일 무함마드 빈 압둘 아지즈의 사우디 군대는 메디나를 점령하였다. 12일 후 제다 역시 항복하며 히자즈는 사우드 가문 하의 히자즈-네지드 왕국으로 편입되었다.

파흐렛틴 파샤는 1921년까지 포로로 있다가 석방되었다. 그는 아타튀르크를 만나 그를 따르기로 하고 튀르키예 독립전쟁에도 참전하며 활약했다. 이 공로로 튀르키예 공화국에서도 육군 중장으로 진급했고 이후 아프가니스탄 대사같은 정치인으로도 활약했다. 그를 두고 2010년대 후반에 아랍에미리트와 튀르키예가 갈등을 빚은 바 있다. UAE 외무장관인 셰이크 압둘라 이븐 자이드 알 나흐얀(Sheikh Abdullah bin Zayed Al Nahayan)은 2017년 12월 17일 "1916년 오스만 제국 장군 파크리 파샤(Fakhri Pasha, 파흐렛틴을 가르키는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는 메디나 시민들에게 범죄를 자행했다. 그는 그들의 돈을 갈취하고 납치하여 기차에 태워 '세페르베를릭(Seferberlik, 동원)'이라는 이름 아래 시리아와 이스탄불로 보냈다. 또한 터키인들은 메디나의 마흐무디야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필사본을 훔치고 튀르키예로 보냈다. 이들이 바로 에르도안의 조상이며 그들이 아랍인에게 자행한 역사다"라는 알리 알 이라키(Ali al-Iraqi)라는 인물의 트윗을 리트윗했다. 위에 서술하듯이 파흐렛틴은 무함마드 성유물을 빼돌려 이스탄불로 보냈기에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튀르키예 정부는 UAE 외무장관의 리트윗에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정부는 터키 주재 UAE 대사를 초치하여 항의했으며 이브라힘 칼린(Ibrahim Kalin) 터키 대통령실 대변인은 "파크리 파샤는 1916년부터 1919년까지 영국에 맞서 메디나를 용감하게 지켜냈다"고 주장하며 해당 리트윗이 "거짓 선동"이라고 일축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한술 더 떠 "우리 조상인 파흐렛딘 파샤가 메디나를 지킬 때, 우리를 중상모략하는 그대 안쓰러운 자의 조상은 어디에 있었나?"고 매우 격렬한 논조를 써가며 반발했다. 그는 또한 "우리는 우리의 역사와 파흐렛딘 파샤를 비난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으며, 적절한 때가 되면 누구인지 공개할 것이다. 아랍 국가의 지도자 일부가 그들의 무지함과 무능력함 그리고 배신을 숨기기 위해 터키를 공격한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튀르키예 정부는 UAE 대사관이 있는 앙카라 거리를 "파흐렛틴 파샤 거리"로 고쳐서 뒤끝있는 보복을 보였다....

2.5.2. 사우디아라비아[편집]


이는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로 개편되었다. 사우디의 지배 하에 메디나는 알 바키 묘지 등 300여개의 이슬람 유적들이 와하비 신념에 맞지 않는 '쉬르크'라는 이유로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다. 파괴된 자리에는 순례자들을 위한 호텔이 들어섰다. 도시를 두른 성벽도 시가지가 확장되며 파괴되었고, 3개의 순환도로가 대신 들어섰다. 따라서 장구한 역사를 지닌 도시임에도 메카나 제다 등에 비해 메디나에는 역사적인 건물이 많지 않다. 한편 메카와 달리 비무슬림의 출입이 허용된 메디나에는 20세기 말엽부터 남아시아 계열 노동자들이 유입되었고, 2010년 도시의 인구는 110만에 이르렀다. 2016년 7월 예언자 모스크에 대한 IS의 자살 폭탄 테러 공격으로 2명의 순례객이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


3. 예언자 모스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예언자의 모스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메디나 사원.jpg

메디나에 있는 예언자 사원(Al-Masjid an-Nabawī)은 무함마드가 말년에 살다가 숨을 거둔 집터에 세운 건물이며, 무함마드의 묘소 또한 예언자 사원에 있다.[9]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만든 이슬람 대학 또한 이곳 메디나에 있으며, 세계 각지에서 학생들을 받는다. 와하비즘이 세계로 퍼진다고 문제시되는 부분이다.


4. 사건·사고[편집]


2016년 7월 4일에 겁도 없이 IS가 테러를 강행했다.[10] 일반적으로 아무리 악명 높은 테러 집단도 메카와 메디나만큼은 건드리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심지어 탈레반에서도 이슬람의 성지인 곳을 공격하는 것만큼은 선을 넘는 행위라고 생각할 정도이다.[11] 이슬람교에 있어서 메카와 메디나는 그 종교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온 이슬람 국가로부터 엄청난 비판과 함께 더 이상 이들은 이슬람 단체가 아닌 사이비 종교 테러리스트들이라는 것을 천하에 알리게 되었다.

이슬람 사회에 크나큰 충격을 선사한 사건이었다. 메디나 시내에서 전투나 테러같은 폭력 사태가 벌어진 것은 벌어진 것은 815년 쉬아 반란 후 처음이다. 탈레반도 이 성지 테러를 비판했다.

이 일로 인해 IS는 이슬람에도 버림받아 전 인류의 적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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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때문에 소말리아 출신 여성인권 운동가이자 반이슬람 운동가, 니얼 퍼거슨의 부인이기도 한 아얀 히르시 알리는 독실하면서도 온건한 과반수의 무슬림을 메카 무슬림, 전체 12억 무슬림 중에서 5%가량인 약 550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하는 과격파 무슬림들을 메디나 무슬림으로 칭하였다.[2] 링크된 기사에서 언급했다시피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의 정책으로 인한 조치이다. 다만 이곳 역시 이슬람의 주요 성지이므로 신성모독에 해당되는 행동은 철저하게 금지될 것이다.[3] 사우디아라비아가 메디나의 비무슬림 방문을 허용한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4] 한편 우마이야 군대의 잔혹함에 대한 전설은 계속 남았고, 메디나 주민들은 무슬림 이븐 우크바의 이름을 '무슬림' 대신 도를 넘는 자라는 뜻인 '무스리프'로 바꿔불렀다[5] 하산 이븐 알리의 손자. 앗 사파흐의 궁정에 머물렀고, 그와 자신의 딸을 결혼시킴[6] 하산 이븐 알리가 지녔던 그 칭호이다[7] 그는 740년 쿠파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자이드 이븐 알리의 고손자로 추정된다. 아흐마드 이븐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 알 하산 이븐 자이드[8] 다만 현재와 같이 초록색으로 칠해진 것은 19세기 말엽 오스만 시절의 복구 공사에 의한 것이다. [9] 사진의 녹색 돔.[10] 이미 2014년에도 IS 내부의 일부가 메카를 부숴버리겠다는 뜻을 내비친 적이 있었다. 당시 이 발언을 전해들은 메카의 보호국인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포함한 무슬림들의 엄청난 비판과 경멸을 받았으며, 이후 발언을 수정하여 "그래도 무함마드의 돌은 부수지 않고 소중히 간직할 것"이라는 등의 입장을 밝히며 분위기를 수습하고자 하였으나, 이미 이 시점부터 이슬람세계에서도 상종하지 못할 자들로 취급받게 되었다고 한다.[11] 1990년대 후반 한겨레 신문의 정문태 기자가 탈레반 지도자를 만나서 "당신들은 메카에도 테러를 저지를 수 있나?" 라는 질문을 하자 세상에 별 미친 질문을 다 한다는 듯이 경멸어린 눈초리로 보면서 거기에 간다면 무기조차도 가지고 가지 말아야 한다며 더 말도 하기 싫다며 피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그 말을 들은 주변 사람들은 깜짝 놀라더니 이후 분위기가 몹시 험악해졌을 정도라고 한다. 다행히 당시 지도자가 해외에서의 인식과 세상 물정을 어느정도 알고 있어 넘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