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 피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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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압바스 혁명.png
압바쉬야 (하쉬미야) 혁명의 대략적인 진행도

1. 개요
2. 배경
2.1. 자이드 빈 알리의 난
2.2. 아싸비야[1]의 고조
3. 전개
3.1. 세 칼리파의 해 (744년)
3.1.1. 야지드 3세의 집권과 죽음
3.2. 이라크-시리아 전역
3.2.1. 쉬아 반란 (압둘라 빈 무아위야)
3.2.2. 아사비야 (vs 압둘라 빈 우마르)
3.2.3. 카와리지 반란 (앗 다하크)
3.2.4. 시리아 (술라이만 빈 히샴)
3.2.5. 이라크 & 이란 평정 (747년)
3.3. 이집트 전역
3.3.1. 콥트교도 (바쉬무르) 반란
3.4. 히자즈-예멘 전역
3.4.1. 압둘라 알 킨디의 난
3.4.2. 불완전한 진압 (747년)
3.5. 호라산 전역
3.5.1. 하리트 빈 수라이즈의 난
3.5.2. 나스르 빈 사야르의 활약
3.5.3. 아사비야 (나스르 vs 주다이)
3.5.4. 하리트 & 주다이의 난 (746년)
3.6. 압바시야 혁명
3.6.1. 아부 무슬림의 거병 (747년)
3.6.2. 호라산 정복 (748년)
3.6.3. 이란 정복 (749년)
3.6.4. 이라크 정복과 건국
3.6.5. 대 자브 강 전투 (750년)
3.6.6. 압바스 왕조의 승리
4. 평가
5. 여담


1. 개요[편집]


아랍어 الفتنة الثاﻟﺜـة
영어 Third Fitna

제3차 무슬림 내전 (744 ~ 750년)이라고도 한다.

우마이야 왕조가 쇠퇴하던 744년 칼리파 왈리드 2세의 폐위에서 시작되어 747년 마르완 2세의 승리로 마무리되는 듯 했지만, 결국 750년 우마이야 왕조의 멸망과 압바스 왕조의 성립으로 귀결된 3차 이슬람 내전. 747 ~ 750년 구간은 따로 압바시야 혁명으로 분리되기도 한다.

2. 배경[편집]


2차 피트나 당시 이라크의 무크타르가 이룩한 첫 쉬아 운동인 카이사니야[2]아브드 알 말리크가 내전을 승리로 이끈 후에도 명맥을 유지하였다. 카이사니야는 이맘 무함마드 이븐 알-하나피야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아부 하심 압둘라를 이맘으로 추대하며 '하쉬미야'로 불리게 되었다.[3] 하쉬미야 세력은 전통적인 쉬아 거점인 쿠파를 중심으로 제국의 동쪽 변경인 호라산 지역에서 막 현지화가 진행 중이던 아랍 이주민들과 신규 개종자 (마왈리)들의 포섭에 힘썼다. 다만 716년 아부 하심 압둘라가 사망했을 때만 해도 우마이야 왕조는 최전성기를 누리는 강건한 모습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쉬미야 세력은 후계자를 지목하지 않고 사망한 아부 하심 압둘라의 후임 이맘을 두고 그의 6촌인 무함마드 빈 알리[4]와 7촌 조카인 압둘라 빈 무아위야[5]를 두고 분열하였다.[6] 하지만 717-18년의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이 실패로 귀결되자 상황은 급변하였다.

그와 함께 프랑크 왕국, 동로마 제국], 하자르 칸국과의 전쟁 등 군사적 패배가 이어졌고 그나마 제국을 유지하던 칼리파 히샴의 사후에는 억눌려 있던 부족 감정 (아사비야)가 본격화되며 더 큰 혼란을 초래하였다. 720년 야지드 이븐 알-무할라브의 반란 후 이라크와 호라산에서 본격화된 예멘/카이스계 부족 간의 대립은 740년대 들어 제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우마이야 왕조의 약화가 가시화되자 8세기 알-핫자즈 빈 유수프의 주도 하에 정립된 아랍 우월주의 정책에 대한 반발도 더욱 거세졌고, 이는 740-43년의 베르베르 대항거로 제국 서부가 떨어져 나가는 것으로 표출되었다. 혼란과 불만이 팽배한 상황에서 우마이야 가문 대신 '무함마드 가문에서 선택된 자' (알-릿다 민 알 무함마드)를 칼리파로 추대하자는 움직임은 점차 대중들의 여론을 구성하게 되었다. 그 중심에는 후세인 빈 알리의 자손들 및 알리의 방계인 하쉬미야 이맘 아부 하심 압둘라가 있었다.

2.1. 자이드 빈 알리의 난[편집]


680년 후세인이 쿠파에서 거병하려다 살해된 카르발라 참극은 2차 피트나와 첫 쉬아 조직인 카이사니야 운동으로 이어졌다. 한편 후세인의 아들 알리 자인 알 아비딘메디나에 은거하며 조용히 때를 기다렸고, 이맘 위와 칼리파 위를 구분하여 정치에 개입하지 않았다. 알리의 장남 무함마드 알 바키르도 같은 노선을 견지하였고, 교리를 정립해나갔다. 하지만 알리의 차남 자이드는 '악의 세력'인 우마이야 조에 대한 적극적인 투쟁을 지지하였다. 732년 형 무함마드의 사후 조카 자파르 앗 사디크가 이맘에 오르자 알리 가문의 원로로서 입지가 강화된 자이드는 이라크를 지나던 중 쿠파의 쉬아 공동체로부터 1만의 전사들이 준비되어 있으며, 수백의 우마이야 주둔군을 손쉽게 일소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에 설득되어 본격적으로 반란에 나섰다. 자이드의 부름에 쿠파, 바스라, 모술 등 이라크 전역에서 1만 5천명이 군적에 이름을 올리며 호응하였다.

하지만 이 소식을 접한 쿠파 총독의 대처는 신속하였다. 그는 주민들을 대사원에 모이게 한 후, 문을 잠그고는 자이드 색출에 나섰다. 자이드는 소수의 병력과 함께 싸우며 대사원에 당도, 군중에서 동참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60년 전과 마찬가지로 겁에 질린 주민들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오히려 상당수는 자이드를 버리고 진압군에 동참하였다. 자이드는 불과 2백의 병력만이 남았음에도 이라크 총독 유수프 앗-타카피가 이끄는 1만에 달하는 우마이야 군과의 싸움을 이어갔고, 결국 이마에 화살을 맞은 후 이를 빼냈다가 사망하였다. 사후 자이드의 시신은 쉬아 당원들에 의해 쿠파 외곽에 암매장되었는데, 히샴의 명으로 우마이야 당국이 기어코 찾아내어 반란에 대한 보복으로 시신을 파내어 십자가에 못박았다.

742-43년 자이드의 아들 야흐야가 불과 18세의 나이로 호라산에서 현지 하쉬미야 세력과 함께 봉기했지만, 총독 나스르 빈 사야르에게 패하여 현재의 아프가니스탄인 조우잔에서 전사하였다. 쉬아 세력의 준동에 대한 경고로써 자이드의 시신은 743년 칼리파 히샴이 사망할 때까지 무려 3년간 십자가에 걸려있다가 왈리드 2세의 명으로 화장되어 유프라테스 강에 뿌려졌다. 그리고 750년, 우마이야 조를 멸한 압바스 왕조는 (아직까지 쉬아 색채를 유지했기에) 자이드에 대한 복수로 히샴의 시신을 파내어 십자가에 못박은 후 태웠다고 한다. 비록 자이드와 야흐야 부자의 반란은 허무하게 실패했지만, 불의에 대한 적극적인 투쟁을 중시하는 새로운 쉬아 종파인 자이디야의 성립으로 이어졌다.

2.2. 아싸비야[7]의 고조[편집]


2차 피트나의 유산은 당시의 주요 전장이었던 이라크에서 두드러졌다. 주바이르 조의 멸망에 기여하며 제국 동부의 '부왕'이 된 알-핫자즈는 반군에서 전향한 무할라브 가문이 대를 이어 호라산 총독을 맡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알-핫자즈가 자신의 가문을 포함한 카이스계 부족들을 중용하자 야지드는 상대적으로 예멘계 부족들을 포용하며[8] 세력을 키웠다. 양측의 대립은 704년 야지드가 해임되는 것으로 귀결되나 싶었으나 714년 알-핫자즈의 사후 이듬해 칼리파 술라이만은 야지드를 이라크 총독에 봉하였다. 이로써 사실상 '제2의 핫자즈'로서 제국의 동방을 장악한 야지드는 카이스계를 대거 숙청하고, 여러 군사 원정을 벌였으나 717년 우마르 2세에 의해 해임된 후 투옥되었다. 그리고 720년, 알-핫자즈의 인척인 야지드 2세가 즉위하자 야지드는 탈옥하여 바스라에서 마왈리 및 카와리지의 지지 하에 반란을 일으킨다.

야지드는 압둘라흐만 반란의 잔당까지 포섭하여 이라크 남부와 이란 서부를 장악했으나, 야지드 2세의 동생 마슬라마의 진압군에게 바빌론 근처에서 대패하고 전사하였다. (720년 8월) 야지드 2세와 마슬라마는 반란의 잔당을 잔혹히 숙청하였고, 721년 이라크 총독에 봉해진 우마르 빈 후바이라는 카이스계 중심 정책으로 일관하였다. 그러다 724년 칼리파 히샴이 봉한 총독 칼리드 알-카스리가 자신의 애매한 출신답게 나름대로 중용 정책을 피며 정국을 안정시켰으나, 친기독교[9] 정책으로 비난을 받던 끝에 카이스계의 압력으로 738년 해임되고 말았다. 뒤이어 총독이 된 알-핫자즈의 5촌 조카 유수프 앗-타카피는 재물을 노리고 칼리드를 두 차례에 걸쳐 고문하였고[10], 결국 후자는 743년 고문사하였다. 칼리드의 임기에는 별 호응을 하지 않던 예멘계 부족들은 이를 계기로 칼리드를 영웅으로 받들게 되었다. 칼리드의 두 아들들 역시 예멘계 진영의 주요 인사 중 하나가 되었다.

3. 전개[편집]


2차 피트나 때와 달리 3차 피트나는 시리아에서 시작되어 이라크[* 737년 수하리 이븐 샤바브 앗-샤이바니가 모술에서 카와리지 봉기를 일으키더니 740년 쿠파에서 이드 빈 알리의 쿠파 와 호라산 등지로 퍼졌다. 물론 아라비아 반도에도 이바디 반란이 벌어졌으나, 다른 지역들에 비해 큰 의미가 있지 않았다. 이는 이슬람 정복 후 한 세기가 지나지 아라비아 반도의 정치적 중요성이 완전히 하락하고, 제국 동부의 위상이 급격히 상승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물론, 알리의 직계 후손인 이맘 자파르 앗 사디크가 정치적 중립을 유지한 것도 한몫 했다. 자이드의 순교 후 하쉬미야 세력은 744년에 등극한 압바스 가문의 이맘 이브라힘의 주도 하에 지하 조직을 구축해나갔다. 같은 해 제국의 중심인 시리아에서도 우마이야 왕가 및 부족들의 내전이 벌어지자 우마이야 왕조의 붕괴는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세력별 주요 등장 인물 (펼치기 · 접기)]
  • 주요 등장 인물 (카이스계) [^^]
    • 왈리드 2세 744
    • 마르완 2세 750
    • 유수프 이븐 우마르 앗-타카피 744
    • 야지드 이븐 우마르 알-파자리 750
    • 하우타라 이븐 수하일 알-바힐리 750
    • 나스르 이븐 사야르 알-라이티 알-키나니 748
    • 알 하리트 빈 수라이즈 앗-타미미 746
    • 압둘말리크 빈 무함마드 빈 아티야
    • 압둘말리크 빈 마르완 빈 무사 빈 누사이르 750 전향
    • 알 카심 이븐 우마르 앗-타카피
    • 나드르 이븐 사이드 알-하라시
    • 아미르 빈 두바라
    • 나바타 알-칼라비 748
    • 압둘라 빈 마르완 750

  • 주요 등장 인물 (예멘계)
    • 야지드 3세 744
    • 이브라힘 이븐 알 왈리드 745
    • 술라이만 빈 히샴 745 전향
    • 압둘라 빈 우마르 745 전향
    • 만수르 이븐 줌후르 알-칼비 745 전향
    • 칼리드 알 카스리 745
    • 야지드 이븐 칼리드 알-카스리 745
    • 무함마드 이븐 칼리드 알-카스리 749 전향
    • 하프스 이븐 알 왈리드 알-하드라미 745
    • 주다이 알-키르마니 747

  • 주요 등장 인물 (하쉬미야)
    • 앗 사파흐
    • 알 만수르
    • 아부 무슬림 755
    • 압둘라 빈 알리 754
    • 카타바 이븐 샤빕 앗-타이 749
    • 알 하산 이븐 카타바 앗-타이
    • 무함마드 이븐 칼리드 알-카스리
    • 아부 아운 압둘 말리크 빈 야지드
    • 지야드 이븐 살레흐 알-하라시 752
    • 아부 살라마 하프스 이븐 술라이만 알-칼랄 750

  • 주요 등장 인물 (쉬아)
    • 자이드 빈 알리 740
    • 야흐야 빈 자이드 743
    • 압둘라 빈 무아위야 747
    • 샤리크 이븐 샤이크 알-마흐리 751
    • 자파르 앗 사디크

  • 주요 등장 인물 (카와리지)
    • 앗 다하크 이븐 카이스 앗-샤이바니 746
    • 술라이만 빈 히샴
    • 만수르 이븐 줌후르 알-칼비 751
    • 압둘라 빈 우마르 750

  • 주요 등장 인물 (이바디)
    • 알 무크타르 이븐 아우프 알-아즈디 747
    • 압둘라 이븐 야흐야 알-킨디 747


3.1. 세 칼리파의 해 (744년)[편집]


히샴의 장기 집권 후 743년 계승한 왈리드 2세는 사치와 향락에 빠져 빠르게 민심을 잃었고, 곧 우마이야 왕가 내부에서도 반발이 일었다. 특히 자신의 두 미성년 아들들을 후계자로 정한 후 사촌 술라이만 빈 히샴을 채찍형과 함께 감금한 것은 히샴 계열 왕공들에 대한 선전포고에 해당하였다. 또한 왈리드 2세는 인간의 자유 의지를 주장한 카다리야 학파를 탄압하였고, 부친 야지드 2세처럼 무다르계 카이스 부족을 선호하여 (우마이야 조의 중추이던) 예멘계 칼브 부족의 반발을 샀다. 이는 그가 임명한 카이스 계열의 이라크 총독 유수프 빈 우마르 앗-타카피[11]가 칼브 계열의 전임자 칼리드 알-카스리를 고문하여 죽임으로써 확산되었다.

3.1.1. 야지드 3세의 집권과 죽음[편집]


744년 4월, 왈리드 1세의 아들이자 왈리드 2세의 또다른 사촌인 야지드 3세가 왈리드 2세의 부재를 틈타 칼브 부족과 함께 다마스쿠스를 장악하고 칼리파에 올랐다. 사막 별궁에 머물던 왈리드 2세는 팔미라 근처 알-바크라로 도주한 후 홈스의 카이스 부족과 함께 저항하려 했지만, 압둘아지즈 이븐 알-핫자즈 이븐 압둘말리크의 군대가 당도하자 추종자 대부분이 도주하였고 결국 살해되어 수급이 다마스쿠스로 보내졌다. 이후 홈스에서 카이스 부족이 야지드 1세의 손자인 아부 무함마드 지야드를 칼리파로 선포한 후 다마스쿠스로 진군했지만, 야지드 3세가 석방한 술라이만 빈 히샴에 의해 격퇴되었다. 사로잡힌 지야드는 왈리드 2세의 아들들과 함께 다마스쿠스에 투옥되었다.

야지드 3세는 경건하다는 찬사를 받았던 5촌 당숙 우마르 2세를 본받아 선정을 펼쳤고 박해받던 카다리야 종파에도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 분란을 잠재웠다.[12] 또한 그는 세금을 감면하고 시리아에 대한 편애를 거두었으며 군사 원정을 자제하는 등 기존 우마이야 조의 문제점을 하나씩 개혁해나갔다. 동시에 왈리드 2세와 반대로 그는 예멘계 칼브 부족을 지지하여 유수프 빈 우마르를 해임하였고, 후자는 이라크의 카이스 부족과 함께 반란을 꾀하다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이후 야지드 3세는 카이스계 독재를 이어오던 유수프 앗-타카피 대신 예멘계인 만수르 빈 줌후르를 임명했다가, 우마르 2세의 아들 압둘라로 교체하였다. 압둘라는 호라산 총독 나스르 빈 사야르를 해임하려 했으나 실패하였고, 야지드 3세는 불과 6개월의 재위 끝에 같은해 병사하였다.

3.1.2. 마르완 2세의 집권[편집]


야지드 3세의 사후 동생 이브라힘이 계승했으나 5촌 당숙이자 우마이야 왕가의 원로인 자지라 총독 마르완 빈 무함마드가 반란을 일으켰다. 마르완은 왈리드 2세의 감금된 두 아들들을 옹립한다는 명분 하에 시리아로 진군하였다. 그러자 야지드 3세의 치세에 억눌려 있던 킨나스린홈스의 카이스 부족들이 몰려들었고 마르완은 바알벡-다마스쿠스 노상에서 과거 왈리드 2세에게 태형과 감금을 당한 술라이만과 맞섰다. 술라이만은 칼브 부족 및 (사비로 모집한) 마왈리 출신 5천 병력으로 구성된 다크와니야 부대 이끌고 반군을 저지하려 했으나 다마스쿠스로 패주하였고, 마르완은 사로잡은 포로들을 사면하는 대가로 왈리드 2세의 아들들에게 충성을 서약시켰다.

술라이만은 반란의 명분을 없애기 위해 야지드 이븐 칼리드 알 카스리에게 왈리드 2세의 아들들 및 유수프 앗-타카피를 처형하게 했으나, 이에 마르완이 스스로 칼리파를 칭하며 진군을 계속하자 칼리파 이브라힘 및 소수의 지지자들과 함께 예멘계 거점인 팔미라로 도주하였다. 744년 12월, 마르완은 다마스쿠스에 무혈 입성하여 칼리파에 올랐다. 그는 피의 보복 대신 관용과 통합의 조치를 취하였고, 시리아의 준드 (지방)들에게 각자의 총독 선출권을 부여하였다. 이에 팔미라에서 농성하던 술라이만과 이브라힘은 다마스쿠스로 돌아와 마르완에 충성 서약을 하였다. 시리아가 평정된 듯하자 마르완은 우마이야 가문을 소집하여 자신의 두 아들들을 후계자로 선포, 정권 안정화에 나섰다.

3.2. 이라크-시리아 전역[편집]


마르완은 744년 내내 지속된 우마이야 왕가의 내분을 종식시키고 집권했지만, 하지만 이미 제국의 각지에서 반란이 만연해 있었다. 이집트와 이라크의 반란 중에 또다시 쿠파를 중심으로 쉬아 반란이 터진 후자가 주된 전장이 되었다. 그 주인공은 자이드의 반란에 참가했었던 알리의 동생 자파르 이븐 아비 탈리브의 증손자 압둘라 빈 무아위야였다. 또한 평정된 듯한 시리아 역시 마르완의 일방적인 하란 천도에 기득권을 박탈당했다 여겨 불만을 품고 있었다. 한편, 폐위된 칼리파 이브라힘은 라카의 유폐지를 탈출했다가 745년 1월 붙잡혀 살해되었다.

3.2.1. 쉬아 반란 (압둘라 빈 무아위야)[편집]


744년 왈리드 2세 사후의 내전을 틈타 압둘라 빈 무아위야는 쿠파에서 자이드파를 중심으로 현지 쉬아 세력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8촌인 자이드와 달리 그는 성채를 함락, 우마이야측 총독을 축출하고 도시를 장악할 수 있었다. 다만 744년 10월, 이라크 총독 압둘라 빈 우마르가 시리아 군대와 함께 (730년대 들어 이라크 총독의 거처가 된) 히라에서 진군해오자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패배하였다. 압둘라는 쿠파 성채로 피신했으나, 이전과 마찬가지로 쿠파 인들이 대거 이탈하여 오직 자이디야 부대만이 남아 항전을 이어갔다.

결국 중과부적으로 패배한 압둘라는 실패에 굴하지 않고, 마다인을 거쳐 지발 (자그로스 산맥) 지역으로 피신하여 저항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우마이야 조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속속 합류하며 세력을 회복한 압둘라는 알리 가문에 대한 애착이 컸던 이란에서 손쉽게 여론의 지지를 얻었다. 따라서 745년 압둘라는 라이, 지발, 후제스탄, 파르스, 케르만, 쿠미스 등 이란 대부분을 장악하였다.[13] 그는 우선 이스파한에 거처를 두었다가 이스타크르로 이전, 지방관을 파견하고 화폐를 주조하며 세금을 걷는 등 자체적인 정부를 구성할 정도로 세력을 과시하였다.

3.2.2. 아사비야 (vs 압둘라 빈 우마르)[편집]


이에 마르완은 카이스 부족 출신의 측근 나드르 이븐 사이드 알-하라시를 신임 이라크 총독으로 봉하여 토벌에 나서게 하였다. 하지만 기존 총독 압둘라 빈 우마르는 대부분 칼브 부족으로 구성된 시리아 군단의 지지를 받아 총독직을 양보하지 않고 버텼다.결국 반군을 옆에 두고 카이스-예메니 우마이야 군대 간의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14] 알-히라를 경계로 양측 간에 벌어지던 수개월간 소규모 전투는 카와리지 세력이 북부 메소포타미아에서 라비아계[15] 샤이반 부족을 중심으로 약 반세기 만에 반란을 일으킨 후에야 중단되었다. 이제 마르완의 최우선 과제는 압둘라가 아닌 아리크의 카와리지 반군이었다.

3.2.3. 카와리지 반란 (앗 다하크)[편집]


카와리지 반란은 본래 사이드 빈 바흐달이 이끌었으나, 그가 곧 병사한 후에는 앗 다하크 이븐 카이스 앗-샤이바니가 지휘를 이어받았다. 745년 초엽, 앗 다하크는 이라크를 침공하여 급히 군대를 합친 두 총독들을 격파하는 위엄을 보였다. 4-5월경 나드르는 시리아로 도주해 마르완과 합류하였고, 압둘라 빈 우마르는 자신의 병력과 요새화된 와시트로 철수하여 농성하다가 8월에 항복하였다. 후자는 여기서 더 나아가 (우마이야 왕족 및 쿠라이쉬 부족원으로는 이례적으로) 카와리지 교리를 수용하였고, 심지어 앗 다하크[16]의 칼리파위를 수용하며 반군에 합류하였다. 앗 다하크는 압둘라를 와시트-이라크 동부-이란 서부 총독에 봉하였고, 본인은 쿠파에서 이라크 서부를 통치하였다. 이로써 이라크에 대립 칼리파 정권이 세워지자, (시리아가 평정되었다 여긴) 마르완은 카이스계 야지드 이븐 우마르 알-파자리[17]를 공석이 된 이라크 총독에 봉하며 대군을 주어 파견하였다.

3.2.4. 시리아 (술라이만 빈 히샴)[편집]


이로써 마르완의 군대가 양분되자 패배했던 술라이만이 재차 북시리아에서 봉기하였고, 루사파에서 진압군이 그에게 이탈하기까지 하였다. 술라이만이 기세를 타고 킨나스린을 점령하자, 많은 시리아 도시들이 재차 반기를 들었다. 시리아의 이러한 반발은 마르완이 자지라의 하란으로 천도한 것에 대한 불만의 표출로 여겨진다. '배신'에 놀란 마르완은 이라크로 보냈던 병력 대부분을 회군시켜 킨나스린 인근에서 술라이만을 격파하였고, 술라이만은 팔미라를 거쳐 이번에는 쿠파로 도주하였다. 한편 남은 반군은 술라이만의 동생 사이드의 지휘 하에 홈스에서 농성하였고, 마르완은 곧 대군과 함께 도시를 포위하였다. 745-46년 겨울 을 지나 10개월 간의 포위 끝에 홈스는 다시 항복하였다. (746년 여름) 관용에도 불구하고 반복되는 반란들에 분노한 마르완은 홈스와 다마스쿠스 등 시리아 주요 도시들의 성벽을 허물어 다시는 저항하지 못하게 하였다.

3.2.5. 이라크 & 이란 평정 (747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마르완 2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마르완이 본토인 시리아에 신경 쓰느라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던 틈에, 앗 다하크는 처음 거병했던 곳이자 고향인 자지라 지역으로 북상하였다. (746년 봄) 홈스 포위가 길어지는 동안 그는 모술을 접수하였고, 앗 다하크의 관용과 비교적 진보적인 카와리지 교리에 반군은 점차 불어났다. 기존 쉬아-카와리지 세력 외에도 예멘계 왕족 술라이만과 다크와니야 잔당 등 많은 동조자들이 모여들어 과장을 보태면 12만 대군을 거느리게 되었다.[18] 마르완은 우선 아들 압둘라를 보내 대적하게 하였으나, 앗-다하크는 니시비스 (누사이빈)[19]에서 토벌군을 저지시켰다. 그러던 746년 여름, 홈스를 항복시킨 마르완은 친정에 나섰다. 8-9월 카프르 투사에서의 알 가즈 전투에서 마르완은 앗 다하크를 전사시키며 대승을 거두었고, 카와리지 반군은 자지라를 포기하고 쿠파로 물러났다. 그 후 반군은 아부 둘라프를 새 지도자로 선임하고는 술라이만의 조언에 따라 티그리스 강의 동안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마르완이 대군을 모아 남하하자 반군은 티그리스 방어선도 포기하고 더욱 동쪽으로 철수하였고, 마르완은 야지드 빈 우마르 빈 후바이라를 이라크 총독으로 봉하여 행정 체계를 복구하게 하였다. 야지드는 카르발라 서쪽의 아인 앗 타므르에서 쿠파의 카와리지 총독을 패배시키고 일대를 점령한 후, 와시트로 진격하여 압둘라 빈 우마르를 사로잡았다. 후자는 이맘 이브라힘과 알-압바스 이븐 알 왈리드 등과 함께 하란에 투옥되었다가, 후일 전염병의 창궐로 병사하였다. 이로써 압바시야 혁명 직전인 747년 여름에 이르면 이라크에 대한 우마이야 지배는 완전히 회복될 수 있었고, 마르완에 맞서는 주요 반군 세력은 (아직 압바시야 군이 본모습을 드러내기 전이므로) 압둘라 빈 무아위야 하나만이 남게 되었다.

이라크의 카와리지 잔병들을 흡수하고, 일부 압바스 가문원까지 포섭하여 마르완에 반대하는 세력을 거의 전부 규합한 압둘라는 카와리지 잔당을 추격하며 자그로스 산맥을 넘은 야지드의 부관 아미르 빈 두바라와 정면으로 맞섰다. 하지만 수적 우세에도 메르브 앗-샤단에서 대패를 당한 압둘라는 잔당과 함께 우마이야 군의 추격을 당하며 쉬라즈와 지로프트를 거쳐 당시 하쉬미야 혁명군이 장악한 헤라트로 망명하였고, 술라이만과 만수르 빈 줌후르는 신드로 도주하여 죽을 때까지 머물렀다.[20] 하쉬미야 사령관 아부 무슬림은 우선 압둘라를 받아주었으나, 몇 달 후 한때 칼리파를 자처했을 만큼 명망이 높은 그를 경계하여 결국 헤라트 태수 아부 나스르 말리크 빈 하이탐에게 유폐한 후 처형하게 하였다. 다만 마르완은 이때까지만 해도 생소한 이름이던 아부 무슬림이 그의 최대의 적수가 되리라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3.3. 이집트 전역[편집]


마르완과 카이스 부족에 대한 반발은 이집트에서도 있었다. 현지 아랍 이주민 중 유력 가문 출신의 총독 하프스 이븐 알 왈리드 이븐 유수프 알-하드라미는 시리아의 혼란을 틈타 카이스계 시리아 주둔군을 푸스타트에서 축출하고 3만에 달하는 현지 마왈리 (비아랍 무슬림 개종자)들을 징병, 하프시야 부대를 구성하여 현지 아랍인들 (준드)에 의한 자치권을 회복하였다. 이에 마르완은 하산 빈 아타히야를 신임 총독으로 봉하며 하프시야의 해산을 명하였다. 이에 하프스는 순순히 사임했지만, 하프시야는 해산을 거부하고 항명하며 하산이 있는 총독 관저를 포위하였다.

결국 하산과 그의 치안국장 (사힙 앗-슈르타)은 이집트를 떠나게 되었고, 하프스는 내키지 않았지만 반군에 의해 총독으로 옹립되었다. (744년 말) 이듬해 마르완은 또 다른 신임 총독 하우타라 이븐 수하일 알-바힐리에게 대규모의 시리아 병력을 주어 이집트로 파견하였다. 하프스는 휘하 병력의 항전 의지에도 항복을 결심하였고, 하우타라는 푸스타트를 무혈 점령한 후 (배은망덕하게도) 숙청에 나서 하프스와 하프시야 지도부를 처형하였다. 하우타라는 친정부 마왈리들과 카이스 부족에게서 2천 3백의 병력을 모아 친위대로 삼았고, 이로써 이집트 역시 평정되는 듯 하였다.

3.3.1. 콥트교도 (바쉬무르) 반란[편집]


이대로 끝났다면 3차 피트나라는 이름도 없었을 것이고, 압바시야 혁명도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며 2번째 마르완이 재차 제국 안정의 공을 세운 것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21] 하지만 이집트의 분란은 끝나지 않았다. 특히 외부 출신 시리아 부대의 전횡과 지나친 과세는 하프시야에 가담했던 하이집트의 콥트교도 (바쉬무르)들의 분노를 야기하였고, 그들은 아부 미나 (혹은 미나 빈 바키라)의 지휘 하에 사만누드 인근 슈브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하우타라는 수차례 육-해상으로 진압에 나섰으나 실패하였고, 마르완이 직접 나서기에 이르렀다. (748년) 다마스쿠스에 다다른 그는 우선 반군에게 사면과 휴전을 제안했지만, 거절되자 친정에 나섰다. 마르완은 호라산이 이미 하쉬미야 군에게 떨어졌고, 이란 역시 위태로운 것을 알았지만 허술한 반란군이 정예병인 시리아 병력을 보내면 격파될 것이라 여겨 진군을 이어갔다.

한편 하우타라는 콥트 교황 미카일 (카일) 1세를 인질로 잡아 라쉬드 (로제타)에 억류한 후, 무장해제를 하지 않는다면 그를 죽이겠다고 협박하였다. 하지만 이는 역효과를 불러왔다. 반군은 위협을 가볍게 무시하며 라쉬드를 습격, 무슬림 주민들을 학살하는 것으로 강경 대응하였다. 이후 반군은 이집트 관문이자 전통적인 군사 거점인 펠루시움까지 공격하며 기세를 올렸다. 분노한 하우타라는 미카일 1세의 처형을 명했으나, 더 큰 반발로 이어질 것을 염려하여 철회하였다.[22] 다만 마르완은 일대의 콥트교 마을 및 수도원들을 약탈하고 파괴하는 초토화 전술을 밀어붙였다. 749년 1월, 이집트에 당도한 마르완은 하우타라에게 하쉬미야 혁명군과 맞서게 된 이라크 총독 야지드에게 보내는 2만 원군의 지휘를 맡겨 보내며 임무를 교대하였다. 그후 바쉬무르 토벌에 있어 수괴 아부 미나를 전사시키긴 했지만 고전을 이어가던 마르완에게 하쉬미야 혁명군이 쿠파를 점령하고 아불 압바스를 칼리파를 추대했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놀란 마르완은 진압을 포기하고 황급히 수도 하란으로 향하였다.[23]

3.4. 히자즈-예멘 전역[편집]


바스라에서 결성된 온건파 카와리지인 이바디파는 본래 우마이야 칼리파들을 설득하는 평화 노선을 견지했지만 8세기 중반 들어 우마이야 조와의 타협이 불가하다고 여겨 급진화되어 무장 투쟁에 나섰다. 아부 우바이다 휘하의 이바디 공동체는 바스라에서 보편 이바디 이맘국의 설립을 위해 재물을 모으고 선교사들을 양성하였다. 후자는 제국 전역에 파견되어 이파디 교리를 전파, 혁명을 이룰만한 지지세의 확보에 나섰다.

743년부터 우마이야 조가 내전에 돌입하며 난세가 도래하자, 바스라에서 메카로 파견된 선교사 아부 함자 알 무크타르 이븐 아우프 알-아즈디는 주민들 및 순례객들에게 반우마이야 선전을 퍼뜨렸다. (746년) 그러던 도중 알-무크타르에게 하드라마우트의 카디 (법관) 압둘라 이븐 야흐야 알-킨디[24]가 접근하여 그의 기치에 공감하며, 주민들 역시 마찬가지라며 함께 하드라마우트로 가서 마르완에 대항하는 설교를 하자고 제안하였다.

3.4.1. 압둘라 알 킨디의 난[편집]


바스라의 이바디 지도부는 하드라마우트에서의 반란 가능성이 보이자 적극 동조하였고, 여러 바스라 출신 지원자들을 파견하였다. 746-7년 압둘라는 하드라마우트에서 봉기하여 총독 이브라힘 이븐 자발라 알-킨디를 제압하고 일대를 장악하였다. 현지와 바스라의 이바디 신도들로부터 이맘으로의 충성 서약을 받은 압둘라는 예멘의 주도인 사나로 진격하였다. 사나의 총독 알 카심 이븐 우마르 앗-타카피는 반군보다 수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이끌고 나아가 맞섰지만, 아브얀에서 패배하여 사나로 철수하였다. 그후 반군의 당도와 함께 사나 부근에서 두 번째 전투가 벌어졌는데, 알 카심은 재차 패주하였고 수비 병력 상당수가 전사하였다. 압둘라는 사나에 입성하여 그 부를 취하였고, 몇 달 간 머무른 후 알 무크타르와 (또다른 바스라 출신인) 발즈 이븐 우크바 알-아즈디를 북으로 보내어 히자즈를 접수하게 하였다.

747년 8월, 하지 기간에 알 무크타르와 발즈는 메카에 당도하여 순례객들에게 반우마이야 선전을 하였다. 히자즈 총독 압둘와히드 이븐 술라이만 이븐 압둘말리크는 저항하지 않았고, 알 무크타르는 압둘라의 이름으로 순례를 이끌었다. 그후 압둘와히드가 메디나로 떠나며 메카는 이바디 반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한편 메디나에서는 민병대가 결성되어 압둘아지즈 이븐 압둘라 이븐 아므르의 지휘 하에 남하하였다. 알 무크타르 역시 메카에 부관을 남기고 발즈를 선봉에 두며 북상하였다. 둘은 메카에서 메디나로 향하는 길목인 쿠다이드에서 격돌하였고, 반군은 압둘아지즈를 위시로 한 다수의 쿠라이쉬 병사들을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생존자들은 압둘와히드와 함께 시리아 방면으로 도주하였고, 알 무크타르는 메디나를 무혈 점령하였다. (747년 10월) 히자즈까지 장악한 이바디 세력은 여세를 몰아 시리아까지 진격하기로 하였고, 바스라가 복속을 표하였다.

심각성을 인지한 마르완은 부족한 병력을 나눠 압둘말리크 빈 무함마드 빈 아티야 휘하의 4천 시리아 기병을 파견하였다. 마르완은 압둘말리크에게 신속히 진군하고, 히자즈를 수복한다면 예멘의 압둘라까지 일망타진 할 것을 지시하였다. 압둘말리크는 메디나와 타북 사이의 와디 알 쿠라에서 이바디 반군의 선발대와 조우하여 선봉장 발즈와 대부분의 병력을 전사시켰다. 승전 소식이 전해지자 메디나에서는 주민들이 봉기하여 이바디 주둔군을 학살하고 우마이야 조의 지배를 회복하였다. 압둘말리크 역시 계속 남하하여 도시를 접수하였고, 그의 기세에 눌린 알 무크타르는 잔여 병력과 함께 메카로 철수하였다. 하지만 압둘말리크는 빠른 기동력으로 반군을 따라잡아 알 무크타르를 비롯한 다수를 전사시켰고, 이러한 두 번의 승전으로 히자즈는 평정되었다. 그후 압둘말리크는 지시대로 계속 남하하였고, 사나의 압둘라는 3만 대군을 모아 맞섰다.

3.4.2. 불완전한 진압 (747년)[편집]


사나 인근 주라쉬에서 벌어진 길고 치열한 전투 끝에 압둘말리크는 압둘라를 죽이며 또다시 승리하였다. 압둘라의 수급은 마르완에게 보내졌고, 압둘말리크는 사나를 수복하였다. 그후 한동안 (이바디 반란과 동시에 터진) 타이즈와 해안 지대의 야흐야 빈 카리브와 야흐야 이븐 압둘라 앗-사바크가 이끈 힘야르인 봉기를 진압한 압둘말리크는 압둘라의 부관 압둘라 빈 사이드가 수습한 이바디 반군의 잔존 세력[25]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하드라마우트로 진군하였다. 하지만 도중 마르완에게서 747년의 하지 인솔 명령을 받은 압둘말리크는 임무를 위해 메카로 향해야 했기에 이바디 잔당과 휴전을 맺은 후 회군하였다.

비록 이바디 반란은 우마이야 조를 전복시키는 목표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남아라비아에 견고한 거점을 마련했다는 의의가 있다. 또한 우마이야 당국은 이바디 반란에 맞서 멀고 험난한 원정에 많은 병력과 자원을 소모해야 했다. 이는 곧 이어질 압바시야 혁명의 성공에 간접적인 도움이 되었고, 압바스 조의 건국을 틈타 하드라마우트에서 명맥을 이어오던 이바디 세력은 동쪽의 오만에서 첫 이맘국을 선포하게 된다. 11세기 중반 술라이히 왕조의 예멘 통일 전까지 하드라마우트는 이바디파 다수 지역으로 남았다.

3.5. 호라산 전역[편집]


8세기 초엽 아무다리야 너머의 트란스옥시아나를 정복한 쿠타이바 빈 무슬림이 716년 살해된 후 일대에 대한 우마이야 조의 지배력은 현저히 약화되었고, 730년을 전후로 (당나라와의 동맹인) 튀르게쉬 칸국의 카간 술루크에게 연패를 겪으며 아무다리야 유역으로 밀려났다. 동시에 지나친 세금과 마왈리 (신규 개종 무슬림)에 대한 차별은 현지인들의 불만으로 이어졌고, 728년 아불 사이다 살리흐 빈 타리프를 시작으로 여러 반란이 일어났다. 한편 호라산의 특수한 상황은 타밈 부족 등 7만에 달하는 후라사니 아랍인들과 현지인 간의 특별한 유대 관계 형성을 야기하였다.

다른 지역들과 달리 호라산에서는 분리된 병영 도시인 암사르가 세워지지 않았고, 따라서 두 집단 간의 통혼이 잦았다. 이로써 혼혈이 진행된 후라사니 아랍인들은 이란 정체성도 겸비하게 되었고, (사산 제국 시절부터 계속되었던) 튀르크 유목민들의 침공에 있어 현지인들과 함께 대항하며 더욱 밀접해졌다. 그러한 상황에서 튀르게쉬에 맞서기 위해 이라크 출신의 신규 병력이 투입되자 상대적으로 차별 대우를 받게 된 후라사니 아랍인들은 현지인들의 불만에 동참하게 되었다. 이는 734년, 타밈 부족의 알 하리트 빈 수라이즈를 중심으로 한 대대적인 반란으로 이어졌다.

3.5.1. 하리트 빈 수라이즈의 난[편집]


하리트는 6만 대군을 모아 메르브로 진격했으나 호라산 총독 아심 빈 압둘라 알-힐랄리의 우마이야 정규군에 패하여 휴전을 맺고 메르브 알-루드로 철수하였다. 735년, 신규 호라산 총독으로 부임한 이라크 총독 칼리드 알 카스리의 동생 아사드는 증강된 정규군을 앞세워 토벌에 나섰다. 하리트는 토하리스탄으로 철수하여 쿠탈의 군주와 동맹하여 맞섰으나 패하였고, 히사르 산지의 투부쉬칸 성채에서 농성하였다. 아사드의 부관 주다이 알-키르마니가 성채를 포위하자 수비대는 항복했으나 하리트는 재차 도주하였고, 튀르게쉬 카간 술루크에 의탁하였다. 737년 술루크는 또다시 우마이야 군을 패배시켰고, 하리트는 그를 설득하여 동부 호라산으로 진격하였다.

하지만 아사드는 튀르게쉬 군이 약탈을 위해 흩어져 있던 틈에 기습하여 카리스탄 전투에서 술루크를 격파하였고, 주다이 알-키르마니는 아무다리야 이남의 튀르게쉬 세력을 일소하며 호라산에 대한 우마이야 조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였다. 패배로 명성을 잃은 술루크는 738년 암살되었고, 그후 튀르게쉬 칸국은 내전에 돌입하며 쇠락하였다.[26] 하리트는 튀르게쉬 칸국과 동맹한 채로 한동안 앗-사슈 (타슈칸트)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이로써 호라산은 안정되었고, 토하리스탄의 호족들도 재차 우마이야 조에 복속하였다. 호라산을 평정한 아사드는 738년 봄 병사하였고, 예멘계 부관 주다이 대신 발흐 태수로 활약하던 카이스 계열의 나스르 빈 사야르가 74세의 나이로 호라산 총독에 봉해졌다.

3.5.2. 나스르 빈 사야르의 활약[편집]


739년 나스르는 신민들의 불만을 접수하여 대대적인 세제 개혁에 나섰다. 우선 개종 후에도 지즈야 (인두세)가 부과되던 마왈리들을 위무하기 위해 현지 조로아스터교도 (디칸)들에 대해 지즈야를 늘리는 대신 정량이 지켜지게 하였고, 토지를 가진 자라면 종교에 상관없이 누구나 카라즈 (토지세)를 부과하였다. 이로써 현지인들의 부담이 경감되었고, 민심이 회복되어 나스르는 이전 총독들과 달리 각지의 도시들에 태수를 직접 임명할 수 있었다. 내부를 안정시킨 나스르는 술루크 사후 쇠퇴하던 튀르게쉬 칸국에 대한 공세에 나서 740년 사마르칸트를 수복하였고, 오랜만에 아랍 군대를 이끌고 시르다리야까지 나아가 하리트와 튀르게쉬 카간 쿠르술까지 격파하였다.

이후 하리트는 망명지인 앗샤슈에서 축출되어 아프간 산지로 피신하였다. 나스르는 (튀르게쉬-하리트의 군대가 도하 저지를 위해 주둔하던) 시르다리야를 넘어 앗샤슈로 나아가는 대신 하리트가 변방의 파라브 (오트라르)[27]로 망명한다는 조건의 휴전을 맺은 후, 상류 방면의 페르가나 지방을 약탈하고 회군하였다.[28] 이로써 20여년만에 트란스옥시아나 지방에 대한 우마이야 조의 지배권이 재확립되었다. 742년 나스르는 호라산의 하쉬미야 쉬아 세력을 이끌고 봉기한 자이드 빈 알리의 아들 야흐야를 사로잡아 처형하였고, 잔존 세력들은 후세인 빈 알리의 7촌이자 압바스 가문의 무함마드 빈 알리 (무함마드 알-이맘)의 지도 하에 후일을 기약하였다. 744년 무함마드 빈 알리가 사망한 후에는 그의 장남 이브라힘이 하쉬미야 이맘이 되었다.

3.5.3. 아사비야 (나스르 vs 주다이)[편집]


안정적으로 재임하던 나스르는 743년 주군 히샴이 사망한 후 위기에 봉착하였다. 우선 이라크 총독 유수프 빈 우마르 앗-타카피가의 소환에 나스르는 핑계를 대며 미루었고, 744년 야지드 3세의 등극과 함께 유수프가 해임되며 직위를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야지드 3세의 예멘계 우선 정책에 따라 호라산의 예멘계 부족들은 주다이 알-키르마니의 총독 선임을 주장하였고, 신임 이라크 총독 만수르 빈 줌후르는 자신의 동생을 호라산에 봉하려 하였다. 비록 나스르에게는 다행이도 만수르는 2개월만에 해임되었고, 그 후임자인 압둘라 빈 우마르의 해임 통보에 대해 나스르는 아예 거부하였다. 다만 호라산의 예멘계 부족들은 자신들의 지도자 주다이의 총독 선임 칙령을 나스르가 가로챘다는 소문을 퍼뜨리며 (정황성 가능성이 높긴 하다) 불만을 표출하였다. 그러자 나스르는 주다이를 체포, 감금하는 강수를 두었으나 되려 예멘계 부족들[29]의 대대적인 반란을 야기하는 역효과를 낳았다.

744년 8월, 체포 한달만에 탈옥하여 반군의 지도자가 된 주다이는 720년대 카이스 계열 정권에 대항하다 진압된 예멘계 무할라브 가문에 대한 복수를 천명하였다. 나스르는 우선 반군과 임시 휴전을 맺었으나 협상 도중 야지드 3세가 나스르의 총독위를 인정하자 주다이는 반란을 재개하였다. 이에 나스르는 (적의 적은 동맹이란 나의 논리로) 주다이의 옛 적수인 하리트를 찾아내 (칼리파 명의의) 사면과 함께 동맹을 제안하였다. 압수된 하리트의 재산 역시 반환되었고, 야지드 3세는 '쿠란과 순나에 의거하여 통치'하기로 약속하였다. 745년 7월 초, 하리트가 메르브에 당도하자 동료 타밈 부족이 호응하였다. 하지만 그 무럽, 신임 칼리파 마르완의 즉위 소식이 호라산에 당도하자 나스르는 그에게 충성을 서약했지만 휘하 병사들 중 상당수는 마르완을 인정하지 않았다. 나스르를 총독으로 인정한 마르완 역시 각지에 만연한 반란 탓에 원군을 보낼 수 없었다.

3.5.4. 하리트 & 주다이의 난 (746년)[편집]


이러한 기류를 파악한 하리트는 나스르의 지방 태수직 제의를 거부하며 그와 거리를 두었고, 받은 선물을 직속 병력들에게 분배하였다. 뒤이어 그는 공개적으로 마르완을 비판한 후, 참모 자흠 빈 사프완의 선동과 함께 타밈 부족을 중추로 하는 3천 병력을 이끌고 메르브를 떠나 자립 및 반란을 시작하였다. 이로써 호라산은 3파전의 내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나스르에 있어 점차 주다이보다 하리트가 더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그럼에도 나스르는 우선 협상을 통해 재차 동맹을 꾀했으나 결렬되었고, 746년 3월 하리트가 메르브를 공격하며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하였다. 이어진 전투에서 나스르는 하리트를 격파하였고, 후자의 참모 자흠 빈 사프완이 전사하였다.

큰 타격을 입은 하리트는 부족 감정을 잠시 누르고 주다이와 동맹하여 공통의 적에 맞섰다. 그해 말엽 둘의 연합군이 메르브로 다가오자 나스르는 중과부적이라 여겨 도시를 포기하고 자신의 거점인 니샤푸르로 철수하였다. 메르브를 장악한 하리트와 주다이는 곧 부족 감정의 재발과 함께 도시의 지배권을 두고 대립하였고, 결국 하리트가 살해되며 주다이가 집권하였다. 승리 후 주다이는 하리트의 거점이던 시내의 타밈 구역을 파괴하였는데, 주거지는 건드리지 않던 아랍 전통을 깬 것이라 지탄을 받았다. 특히 카이스계 부족들이 나스르에 귀부하였고, 747년 여름 그와 주다이는 메르브 성밖에서 각자 요새화된 진영을 두고 대립하였다.

3.6. 압바시야 혁명[편집]


740년의 자이드 빈 알리, 744년의 압둘라 빈 무아위야와 달리 하쉬미야 세력은 성공 가능성을 높히기 위해 은밀히 지하 조직을 중심으로 오랫동안 치밀하게 봉기를 준비하였다. 그 무렵, 전통적인 반우마이야 세력의 거점인 쿠파에는 마왈리 청년 아부 무슬림이 있었다. 10대부터 열렬한 쉬아 추종자가 된 그는 737년 당국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741년 무렵 메카로 향하던 압바스 가문의 나킵 (선교사)에 의해 석방되었다. 일행에 합류한 아부 무슬림은 신임 이맘 이브라힘에게 소개되었고, 745년 후자에 의해 (시리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호라산 지역의 하쉬미야 세력을 규합 및 확장하는 임무를 받아 그곳으로 파견되었다. 얼마 후 이브라힘은 마르완에 의해 사로잡혀 하란에 투옥되었고, 아부 무슬림은 빠르게 현지 하쉬미야 조직을 장악하며 봉기를 준비하였다. 페르시아 계로 추정되는 아부 무슬림은 성공적으로 현지인들의 민심을 장악하였다.

우마이야 조에 대한 불만은 호라산에서 더욱 높았다. 우선 우마이야 조의 고질적인 악습인 아랍 중심주의에 대한 반발이 컸는데, 특히 이슬람화가 덜 진행된 변방인 호라산에는 아직 비무슬림 귀족들이 토호로 남아있었다. 그들은 자치권의 상실과 주민들이 아랍 이주민들에 동화되는 것에 반감을 드러내었고, 튀르게쉬 칸국의 경우 당나라 조정에 지원을 청하였다. 후자의 경우 3차 피트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으나, 압바스 왕조의 통일 직후 탈라스 전투로 이어졌다. 현지인들의 불만과 함께 아랍 이주민들 역시 다른 지역들에서처럼 북부 무다리계와 남부 예멘계 간의 부족 감정이 격화되며 당파를 구성하였다. 또한 다른 지역들에 비해 수적으로 적었던 아랍 이주민들은 쉽게 현지화되었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시리아 주둔군의 전횡과 나스르의 중앙 집권화에 반발하였다. 이러한 불만과 갈등 요소들이 축적되던 시기에 747년의 해가 밝았다.

3.6.1. 아부 무슬림의 거병 (747년)[편집]


나스르-주다이-하리트 간의 3파전이 벌어지던 747년, 아부 무슬림은 조용히 봉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747년 봄, 이맘 이브라힘이 2년 간의 수감 생활 끝에 하란에서 처형되었다. 부고를 접한 아부 무슬림은 봉기의 때가 왔음을 짐작하였다. 라마단 말엽인 6월 7일, 메르브 동남쪽 방면의 예멘계 마을인 시카단즈에서는 (무함마드의 깃발 양식이던) 검은 깃발이 내걸렸다. 모여든 군중 앞에서 아부 무슬림은 이브라힘을 추모함과 동시에 후자의 동생 아불 압바스 압둘라의 명의 하에 예배를 인도하였다. 엄숙한 의식 후 그는 비밀리에 양성한 1만 병력에 출정 명령을 내렸고, 이러한 하쉬미야 (압바시야) 봉기군은 나스르와 주다이가 대치하던 메르브로 나아갔다.

느닷없는 제3 세력의 등장에 나스르는 주다이와 화해하였고, 우선 공통의 적부터 처리하고자 연합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양측의 협상은 나스르 휘하에 있던 하리트의 아들이 주다이를 공격해 죽이며 결렬되었다. 비록 이로써 나스르는 메르브를 회복할 수 있었지만, 홀로 아부 무슬림에 맞서야 했다. 주다이의 세력 역시 그의 아들 알리 알-키르마니 휘하에 잔존하였다. 아부 무슬림은 두 진영의 갈등이 제대로 봉합되지 않은 점을 주목, 알리에게 부친 살해의 배후는 나스르라며 불안한 공존을 이어오던 양측을 교란하였다. 그 결과 두 진영은 재차 대립하게 되었고, 각각 힘의 균형추가 된 아부 무슬림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후자는 우마이야 왕조의 현 집권층인 북부 카이스계 대신 남부 예멘계의 편에 서 알리와 동맹하였다.

3.6.2. 호라산 정복 (748년)[편집]


748년 초엽, 봉기군이 다가오자 총독 나스르는 재차 메르브를 포기하고 니샤푸르로 철수하였다. 2월 14일, 아부 무슬림은 메르브에 입성하며 처음으로 이슬람 제국의 주요 도시에 검은 깃발을 내걸었다. 그후 아부 무슬림은 부관 카타바 빈 샤빕 앗-타이를 니샤푸르로 보내어 나스르를 추격하게 하였다. 나스르는 아들 타밈에게 대적하게 했으나 그가 투스에서 패배하자 니샤푸르를 버리고 호라산의 서쪽 경계인 쿠미스 (담간)로 철수하였다. 그 무렵 마침내 마르완이 보낸 나바타 알-칼라비 휘하 1만의 원군이 당도했지만 나스르와 합류하기 전에 고르간에서 나바타가 전사하며 패배하였다. (748년 8월) 나스르는 현 테헤란 광역권인 라이에서 그 잔존 병력과 합류했지만, 카타바에게 패하여 하마단 방면으로 도주하던 중 사베흐에서 85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12월 9일) 연승을 거둔 하쉬미야 혁명군은 해방 노예 등이 가담하여 약 3만으로 불어났다.

한편, 아부 무슬림은 메르브에 남아 샤이반 알-하리지의 카와리지 반란과 마즈다교 및 이슬람 교리를 혼합한 페르시아 신비주의자 비하파리드의 반란을 현지 무슬림과 조로아스터교도 모두의 지지를 받으며 진압하였다. 사로잡힌 비하파리드는 교수형에 처해졌다.[30] 뒤이어 니샤푸르를 접수한 그는 기존의 동맹이던 알리와 우스만 알-키르마니 형제를 암살하여 후환을 제거하였다. 동시에 나스르와 휴전을 맺었던 반군 세력들은 아부 무슬림과 협정을 연장했으나, 결국 배신당하고 토벌되었다. 또한 메르브와 니샤푸르 장악 후 헤라트와 발흐 등이 항복하며 이로써 호라산은 완전히 하쉬미야 혁명군의 수중에 놓였다. 아부 무슬림은 사실상의 호라산 총독이 되어 (트란스옥시아나와 박트리아를 포함한) 각 도시들에 지방관을 파견하는 등 통치 체계를 정비하였다. 그동안 카타바는 1차 원군 및 나스르 부대의 잔당을 추격하며 서부 이란으로 진격하였다.

3.6.3. 이란 정복 (749년)[편집]


시리아-호라산 부대로 구성된 우마이야 패잔병은 요새화된 나하반드로 피신하여 기존의 수비대와 함께 농성하였고, 곧 카타바에 의해 포위되었다. 한편, 상황이 심각해지자 이집트에 있던 마르완은 일전에 압둘라 빈 무아위야의 난을 진압했던 아미르 빈 두바라를 지휘관으로 이란에 대규모 원군을 파견하였다. 아미르 휘하 5만에 달하는 원군이 나하반드 대신 곧장 이란 중부로 향하자, 카타바는 아들 알 하산에게 포위를 맡기고는 이스파한 부근에서 그들을 따라잡아 격파하였다. (749년 3월) 더이상 구원 가능성이 없다고 여긴 니하반드의 우마이야 군은 협상을 통해 5-6월 무렵 항복하였다. 이때 시리아 부대는 같은 편이던 호라산 부대를 적에게 넘기고 목숨을 구하는 추태를 보였고, 후자는 결국 학살되었다. 이란이 평정되며 이라크로 향하는 길이 열리자, 카타바는 곧장 상징적인 도시 쿠파를 목표로 진격하였다.

749년 봄, 팔루자에서 야지드와 합류한 하우타라는 카타바가 이라크로 진격해오자 역으로 적의 본거지인 호라산으로 진격하여 유인하고 마르완이 추격하여 격파하게 하자는 전략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야지드는 이를 거부, 카타바가 쿠파에 이르기 전에 정공법으로 격파한다는 전략을 세우고는 하우타라를 선봉장으로 삼아 진격하였다. 양측이 조우한 후, 카타바는 우마이야 군이 진영을 제대로 세우기 전에 야간 기습을 감행하였다. 비록 카타바 본인은 전사했지만, 기습의 결과 우마이야 군은 서쪽으로 패퇴하였다. (8월 27일) 이후 카타바의 아들 알 하산이 지휘를 이어받아 쿠파로 진격하였다. 한편 패퇴한 야지드와 하우타라는 각각 동부 이라크의 중심 거점인 와시트와 바빌론 북쪽의 카스르 이븐 후바이라[31]로 철수하였다.

3.6.4. 이라크 정복과 건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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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파로 즉위하는 아부 알 아바스 (앗 사파흐)

패잔병을 수습한 하우타라는 쿠파로 향하였으나, 그 총독 무함마드 이븐 칼리드 알-카스리가 하쉬미야 측과 공모하여 성채에서 봉기하였기에 결국 와시트의 야지드와 합류하였다. 따라서 요새화된 와시트를 바로 공격하는 대신 우회하여 쿠파로 향하던 알-하산은 손쉽게 도시를 접수할 수 있었다. 9월 2일, 알-하산은 쿠파에 입성하였다. 남은 이라크의 주요 도시 바스라 역시 무할라브 가문을 필두로 한 예멘계 부족들의 봉기로 혁명군에게 무혈 접수되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후일 무할라브 가문은 8세기 후반 이프리키야 총독을 세습하는 등 특권을 누리게 된다.[32] 티크리트, 할완 등 다른 도시들에서도 하쉬미야 당원들이 봉기하여 도시를 접수하였다. (와시트를 제외한) 이라크가 평정된 후 쿠파에서는 칼리파 옹립이 논의되었다.

이때 해방 노예 출신의 쿠파 하쉬미야 당수 아부 살라마 하프스는 압바스 가문 대신 알리 가문의 인사를 칼리파로 추대하려 하였다. 그는 압바스 가문에게 계속 은둔할 것을 종용, 쿠파로의 여행 경비 지원도 거부하였다. 이때까지 일반 하쉬미야 지지자와 병사들은 '선택받은 자'가 누군지 몰랐기에 하프스는 아얀의 혁명군 주둔지에서 후보자를 물색하였다. 하지만 그가 접촉한 자파르 앗 사디크, 압둘라 이븐 알-하산, 우마르 이븐 알리 이븐 알-후세인 모두 거부 혹은 주저하거나 더 나은 조건으로 협상하려 하였다. 이렇게 지연되는 동안 아부 무슬림의 심복 아불 자흠이 행동에 나서 12인의 혁명군 장군들과 함께 쿠파로 진입, 이미 도착해 있던 이맘 아불 압바스 압둘라에게 칼리파로의 바이아 (충성 서약)를 하였다.

그러자 하프스 역시 반대할 명분을 찾지 못하여 바이아를 하였다. 다음날인 11월 28일 금요일, 아불 압바스는 쿠파의 대사원에서 칼리파 앗 사파흐로 추대되며 압바스 왕조의 건국을 선포하였다. 앗 사파흐는 하프스를 우선 와지르 격의 고위직에 봉했지만, 충성심이 의심되는 그를 죽이기로 결정하여 아부 무슬림에 서신을 보내 의논하였다. 아부 무슬림은 오랜 동료였던 하프스의 제거에 기꺼이 동의하며 자객들을 보내어 암살하였고, 카와리지의 소행으로 덮어 씌웠다. 한편 그동안 이집트에서 하란으로 돌아온 마르완은 약 10만 대군을 모아 한 번의 회전에서 전세의 역전을 노렸다. 불리한 상황이긴 했지만 마르완이 대승을 거둔다면 와시트에서 농성하는 야지드와 함께 쿠파를 협공할 수 있는 여지도 있었다.

3.6.5. 대 자브 강 전투 (750년)[편집]


한편 칼리파 등극 후 앗 사파흐는 압바스 가문원들을 요직에 기용하며 친위 세력의 양성에 나섰고, 그 일환으로 숙부 압둘라 빈 알리가 군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와시트 포위에 전념하던 알 하산을 대신하여 압둘라는 페르시아인 마왈리 출신의 장군 아부 아운 압둘 말리크 빈 야지드와 함께 4만 대군을 이끌고 모술로 향하였다. 호라산에 있던 아부 무슬림 역시 합류하여 전략을 담당하였다. 압바스 군대는 모술에 이르기 전, 대 자브 강이 티그리스 강과 합류하는 지점에서 마르완의 10만 대군과 조우하였다. (750년 1월 16일) 마르완은 대 자브 강을 넘어 배수진을 쳤고, 양측은 1월 25일의 새벽 기도 후에 전투를 개시하였다. 궁병들간의 전초전 후 마르완은 동로마 제국과 싸우며 단련된 시리아 기병들을 돌격시켰다.

당시 참전했던 압바스 측 병사에 의하면 '철의 산'처럼 보였던 시리아 기병들의 돌격은 아부 무슬림이 준비해 둔 창병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마치 수세기 이후의 크레시 전투 혹은 아쟁쿠르 전투 때처럼 시리아 기병들은 뒤엉켰고, 곧 낙마하거나 말에서 내려 싸움을 이어갔으나 압바스 측 기병들이 출격하여 측면을 포위하자 궤멸되었다. 믿었던 기병대가 무너지자 우마이야 진영은 혼란에 휩쌓여 무질서하게 후퇴하였고, 그 과정에서 강을 건너다가 수천이 익사하였다. 압바스 군은 잔존하는 적군들을 일소한 후 모술과 하란을 장악하였고, 마르완은 부상을 입은 채 시리아 방면으로 패주하였다. 마르완은 우선 다마스쿠스로 향하였지만, 도시를 장악한 예멘계 부족들이 입성을 거부하자 이집트로 도주하였다.

3.6.6. 압바스 왕조의 승리[편집]


750년 4월 25일, 압둘라가 이끄는 압바스 군대는 약간의 저항 끝에 다마스쿠스에 입성하였다. 그는 서남쪽 성문 밖의 우마이야 왕가 무덤들을 철저히 파괴하였고, 남아있던 우마이야 왕족들을 학살했으며 (얼마 전 재건된) 성벽도 허물었다. 전란 이후로도 지진과 역병을 겪은 시리아에서 더 이상의 저항은 없었고, 순순히 압바스 왕조 령이 되었다. 한편 10개월 넘게 와시트에서 농성하던 야지드는 대 자브 전투의 결과 및 압바스 왕조의 시리아 정복이 알려지며 내부에서 예멘계-카이스계 분쟁이 심화되고, 탈영병이 속출하게 된 6월이 되어서야 알 하산과 협상에 나섰다. 알 하산에게서 안전을 약속받은 후 야지드는 항복했으나, 앗 사파흐(혹은 알 만수르)는 오리발을 내밀며 야지드와 하우타라 등 수뇌부를 처형하였다. 야지드와 그의 아들 다우드는 예배 중 살해되었고, 야마마 태수이던 다른 아들 무탄나 역시 임지에서 살해되었다.[33]

한편 이집트에서는 마지막 우마이야 총독 압둘 말리크 ('마그레브와 안달루스의 정복자' 무사 빈 누사이르의 손자)가 바쉬무르 및 하우프 반군과 휴전을 맺으며 상황을 진정시킨 상태였다. 그러던 750년 6월, 패잔병과 함께 이집트에 당도한 마르완은 반란 지역 뿐만 아니라 알렉산드리아와 상이집트 (아스완) 등지에 이미 압바스 조의 승전보와 함께 그를 상징하는 검은 깃발이 내걸린 것을 확인하였다. 배신감에 분노한 그는 총독 관저인 황금 궁전 및 나일 강의 교량들을 파괴한 후, 푸스타트를 떠나 알렉산드리아 및 아스완에 병력을 보내어 이집트의 재정복을 시도한다. 하지만 이집트에서 마르완의 재기를 두고 볼 생각이 없던 압바스 지도부는, 시리아 관리를 위해 팔레스타인에서 진격을 멈춘 압둘라 대신 형 살리흐와 페르시아인 장군 아부 아운 압둘 말리크 빈 야지드에게 추격을 맡겼다. 마르완은 잔병과 함께 저항했으나, 8월 6일 파이윰 부근 부시르에서 패배하고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이때 우마이야 패잔병이 대부분 전사 혹은 처형되었고, 이집트가 압바스 왕조에 항복하며[34] 우마이야 왕조는 멸망하였다. 마르완의 두 아들 우바이둘라와 압둘라는 현대의 에리트레아로 피신하여 저항을 이어갔으나, 전자는 사라지고 후자는 전사하였다. 우마이야 조의 멸망 후, 이슬람 제국의 주도권을 잃어버리고 호라산 아랍 부대의 군정에 놓인 시리아에서는 자주 반란이 벌어졌다. 특히 750년 6월 22일, 압둘라가 야파 인근의 아부 푸트루스 (안티파트리스)에서 양가의 화해를 주선한다며 80여명의 우마이야 왕족들을 초청한 후 연회 중에 학살한 것은 당대는 물론 현대까지 시리아 인들에게 큰 충격으로 남아있다.[35] 그해 가을, 시리아 북부의 발리스에서 우마이야 가문의 여인들이 희롱당했다는 소문이 돌자 킨나스린에서 옛 총독 아불 와르드 마즈자 이븐 알-카우타르가 봉기하였다. 마즈자와 함께 무아위야 2세의 조카 아부 무함마드 지야드가 역시 봉기하였다.

알레포에서는 후자의 조카 알 압바스 빈 무함마드가 거병하였다. 다마스쿠스에서도 주민들이 호응하였다. 이에 시리아 총독 압둘라가 다마스쿠스를 진압한 후 연말 무렵 마즈자를 전사시켰다. 지야드는 팔미라를 거쳐 도주하였고, 알레포의 알 압바스 역시 자지라 총독 알 만수르에게 진압되었다. 이후 압둘라는 기존 관리들과 장군들을 모두 해임하였고, 대사원과 궁전을 제외한 우마이야 왕조 시기의 주요 건물들을 대부분 파괴하였다. 반란의 6만 잔당은 유프라테스 상류의 요새 사모사타에서 농성했으나, 알 만수르는 이들을 자신의 군대에 편입시키는 조건 하에 항복시켰다. (751년) 그리고 얼마 후, 압둘라가 동로마 원정을 떠난 틈에 히샴의 손자이자 아브드 알 라흐만 1세의 형제인 아반 빈 무아위야가 봉기하여 사모사타 인근 카이숨 (베스니)에서 농성했으나 급히 회군한 압둘라에게 진압되었다.

사로잡힌 아반은 수족 절단형에 처해진 후 '우마이야 가문의 용사'란 깃발 하에 시리아에 경고 용으로 조리돌림되었다. 이로써 시리아는 평정되었고, 810년대 4차 피트나를 수반한 반란 외에는 더 이상 큰 규모으 우마이야 부흥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임지인 호라산으로 돌아간 아부 무슬림 역시 751년 부하라에서 벌어진 샤리크 이븐 샤이크 알-마흐리의 쉬아 봉기를 진압하였다. 뒤이어 아부 무슬림은 아부 다우드 칼리드 빈 이브라힘에게 군대를 주어 중앙아시아로 보냈고, 부하라 쉬아 봉기의 진압에 활약했던 지야드 이븐 살레흐 알-하라시는 탈라스 전투에서 고선지당나라 군대를 격파하였다. 다만 이듬해 지야드는 발흐에서 반란을 일으킨 후 도주했다가 살해되었다.[36] 이후 755년 모술 인근에서 물라비드 이븐 하라말라 앗-샤이바니가 카위리지 봉기를 일으킨 것을 제외하면 762년 쉬아 반란 전까지 제국 주요부[37]는 비교적 안정을 유지한다.

4. 평가[편집]


747년 말엽 기준 마르완 2세는 하이집트와 호라산을 제외하면 제국 주요부 (이집트 ~ 이란)를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이미 최소 10개의 반란을 진압하느라 고초를 겪은 우마이야 조정이, 압바시야 혁명을 알았더라도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을 것이라 평가한다. 우선 하쉬미야측 본거지인 북부 호라산이 앞서 언급된 나스르, 주다이, 하리트 간의 내전으로 혼란 상태였고 마르완은 곡창 지대인 이집트의 콥트교 반란에 더욱 치중하였다. 또한 직전까지 예멘, 이라크, 이란의 반란을 진압하며 피로가 누적된 카이스계 시리아 병력을 더 운용하는 것도 상당한 무리였을 것이다. 따라서, 비록 749년 말까지 이집트에 있으며 적을 과소평가한 마르완 2세의 잘못도 있긴 하나 나름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이라 평가된다. 물론, 무리하게 하란으로 천도하여 전통적인 본거지인 시리아의 민심마저 잃은 것은 큰 패착이었다.

3차 피트나는 왕족 및 부족들 간의 내분에서 시작하여 부패하고, 아랍 중심적이며, 권위적이던 우마이야 왕조에 대한 반대 세력들이 동시에 들고 일어난 결과였다. 특히 쉬아 세력과 마왈리들이 그 중심이었고, 후자 중에서도 페르시아인 마왈리들이 호라산 아랍인들과 함께 혁명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비록 압바스 왕조의 건립 직후 쉬아 진영은 재차 핍박을 받으며 지하화되었지만, 페르시아인들은 조정에 대거 기용되며 7세기 사산 제국의 멸망 후 한세기 이상 억눌려 있던 페르시아 문화의 중흥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많은 페르시아인들이 조로아스터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다양한 방면에서 활약하였고, 소외되어 있던 이란은 빠르게 이슬람 문명의 중심지 중 하나로 부상하게 되었다. 따라서 압바시야 혁명은 호라산을 중심으로 한 이란 지역의 부활과 이슬람화를 야기하였다. 그와 함께 기존의 중심이던 시리아는 소외되었고, 이는 여러 반란으로 이어졌다.

5. 여담[편집]


살아남은 우마이야 왕족들에 대한 압바스 당국의 집요한 추적과 학살에도 불구하고 일부 왕족들은 살아남았고, 그중 아브드 알 라흐만 1세는 중앙 조정의 영향권 밖이던 안달루스에서 자립하는데 성공한다. 국내에서는 조선의 왕씨 몰살과 종종 비교된다.

747년 술라이만과 함께 인도로 도주했던 만수르 빈 줌후르는 신드 총독에 올라 후일 아부 무슬림의 인정까지 받았으나, 압바스 왕조의 설립 후 파견된 대체 총독 무갈리스 알-압디를 죽이며 저항하다가 752년 뒤이은 신임 총독 무사 이븐 카압 앗-타미미에 의해 살해되었다.

압바시야 혁명의 1등공신 아부 무슬림은 대 자브 강 전투를 지휘한 후 시리아 총독이 된 압둘라 빈 알리가 754년 반란을 일으키자, 알 만수르를 도와 진압하는 등 압바스 조에 대한 충성을 이어갔다. 하지만 알 만수르는 8년 가량 호라산 총독을 지내며 현지 민심을 장악한 아부 무슬림을 경계, 755년 그를 안바르로 소환한 후 처형하였다. 비록 아부 무슬림의 측근들은 사면되어 계속 기용되었지만, 조로아스터 교도들 등 페르시아 인들은 호람딘 반란을 일으키며 한세기 가까 반발을 이어갔다.

740년대 말엽 혼란에 빠졌던 호라산과 달리 나스르가 친히 재정복한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은 압바시야 혁명 당시에도 그에게 충성을 유지하였다. 손자 라피 이븐 알-라이트는 806년, 아랍 이주민 및 이란-튀르크 현지인들과 함께 사마르칸트에서 압바스 조에 대한 반란을 일으킨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칼리파 하룬 알 라시드는 기존 총독 알리 빈 무사를 해임하고 친정에 나섰으나, 809년 3월 투스에서 병사하였다. 다만 이후 라피는 하룬의 아들이자 호라산 총독인 알 마문에게 항복하여 사면을 받았다. 이후로의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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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멘계, 카이스계 간의 부족감정[2] 알리가 무크타르에게 내린 이름 카이산 혹은 무크타르의 마왈리 부관 아부 아므라 카이산에서 유래된 것이라고도 한다.[3] 일부 카이사니야 세력은 그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거나 마흐디, 심지어 신격화하기도 하였다.[4] 무함마드의 숙부이자 친구 알-압바스의 증손자[5]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알리의 동생인 자파르의 증손자[6] 물론 무함마드의 조부 압둘무탈립을 기준으로 무함마드 알 바키르나 압둘라 빈 무아위야보다 항렬이 하나 더 높았던 무함마드의 이맘위가 더 수용되었다.[7] 예멘계, 카이스계 간의 부족감정[8] 이는 압둘라흐만 빈 무함마드의 반란 당시 호라산으로 몰려온 잔당들 중 야지드가 예멘계만 수용하고 카이스계는 알-핫자즈에게 보내어 처벌받게 한 것에서 드러난다[9] 모친이 기독교도였고, 그녀를 위해 쿠파 대사원 옆에 성당을 세웠다. 또한 기독교가 이슬람보다 우월하다는 말도 했다 하여 반대파에서 이븐 나스라니야라고 비난받았다[10] 738년 1차 고문 후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으나 야지드 2세의 아들 왈리드 2세가 재차 매각하여 또 고문당해 사망[11] 핫자즈 빈 유수프의 5촌 조카[12] 심지어 여론이 원한다면 자신을 폐위해도 좋다고까지 밝혔다 한다[13] 사실상 이란 지역에서 북서부, 중북부, 동북부만이 우마이야 조의 수중에 있었다[14] 우마이야 왕조는 8세기 들어 총독위에 대해 칼리파는 사실상 임명만 하고 총독이 직접 가서 기존 총독을 폐하고, 처벌한 후 집권하는 것이 관례화되어 있었다. 따라서 기존 총독들은 종종 저항하였다.[15] 무다르, 카이스 부족의 전통적인 경쟁 상대, 친카이스 계열의 마르완과 대립[16] 심지어 그는 (당대 아랍 주류 부족들의 기준에서 칼리파를 배출할 수 있는 유일한 혈통인) 쿠라이쉬 출신도 아니었다[17] 칼리드 알-카스리 이전의 총독 우마르 빈 후바이라의 아들[18] 반 우마이야 기치를 위해서든 그의 높은 급여든 여러 부족들이 가담하였다[19] 2차 피트나 때에도 주요 격전지 중 하나였던 요충지[20] 일부 잔당은 오만으로 도주하였다[21] 748년 기준 마르완 2세는 호라산의 대부분을 잃은 것과 바쉬무르 반란으로 하이집트가 불안정한 것을 제외하고는 제국 주요부를 장악하고 있었다[22] 집행 직전에 철회했다 한다. 이후 그는 767년까지 장수한다. 어찌보면 최종 승자..[23] 이후 압바스 왕조는 바쉬무르 측에게 2년 간의 면세를 제안하여 반란을 잠재울 수 있었다. 바쉬무르 세력 역시 일단 포용적인 편인 새 정권의 행보를 지켜보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767년 바쉬무르는 현지화된 아랍 이주민들과 함께 재차 반란을 일으켜 자립하였고, 압바스 당국은 반세기 이상 나일강 하구를 완전히 제어하지 못하였다.[24] 별명인 탈리브 알-학크, 즉 정의를 구하는 자로 더 알려져 있다[25] 아직도 세력이 컸다고 한다[26] 이후 튀르게쉬 칸국은 위구르 칸국에 밀려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잃었고, 766년 카를루크에게 멸망당한다[27] 시르다리야 너머로, 현재의 카자흐스탄 투르키스탄 인근에 해당한다[28] 애초에 나스르의 원정은 튀르게쉬 및 다양한 현지 왕공들을 포섭하여 잠재적인 위협이 될 수 있는 하리트를 국경 밖으로 축출하는 것이었다고도 한다[29] 아즈드, 라비아 부족[30] 다만 그 잔당은 767년 신의 사도를 칭한 (그리고 알 마문의 외조부로 추정되는) 우스타드 시스의 반란에 참여했다 한다[31] 야지드 빈 우마르 빈 후바이라가 세운 도시로, 미완성되었다가 후일 아불 압바스 압둘라가 완공하여 알 하쉬미야라 명명하고 수도로 삼았다고 한다[32] 특히 와시트 포위 당시 알 만수르를 도운 야지드 이븐 하팀 알-무할라비는 후일 아제르바이잔과 자지라를 거쳐 이집트 총독을 8년간 지냈다[33] 오직 시리아에 있던 막내 아들 무칼리드만이 살아남아 후손을 남겼다. 수뇌부 중에서는 협상을 위해 앗 사파르에 사절로 파견되었던 마안 이븐 자이드 앗-샤이바니만이 도주하여 살아남았고, 은둔하던 중 758년 알 만수르의 라완디야 숙청을 도와 정계에 복귀한다.[34] 이때 우마이야 조의 마지막 이집트 총독 압둘 말리크와 그의 동생 무아위야가 항복하여 투옥되었다가, 총독 재임기 하쉬미야 당원들에게 온정적이었다는 이유로 살리흐에 의해 석방되었다. 함께 항복했던 무아위야 1세 시기 이프리키야 총독이던 무아위야 이븐 후다이즈 앗-투지비의 손자 압둘라 이븐 압둘 라흐만과 무함마드 형제는 770년을 전후로 연이어 총독이 되었다. 그외에도 770-80년대에 종종 옛 우마이야 귀족 출신들이 이집트 총독에 선임되었다.[35] 지금도 시리아에서는 압바스 왕조나 앗 사파흐에 대한 인식이 나쁘다[36] 현지 귀족 (디칸)이 그의 목을 베어 아부 무슬림에게 보냈다 한다[37] 이집트 - 시리아 - 이라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