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 자인 알 아비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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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علي بن الحسين زين العابدين
알리 이븐 알-후세인 자인 알-아비딘[1]
생몰: 659년 ~ 713년
후세인 이븐 알리의 아들로, 형제들 중 카르발라 참극에서 유일하게 생존하여 이맘위를 계승하였다.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파 야지드 1세의 사면을 받아 메디나로 돌아가 은둔했으며, 2차 피트나 중에 본격적으로 쉬아 세력이 형성될 때에도 그에 가담하지 않고 저술 및 신앙 활동에 전념하였다. 다만 712년 칼리파 왈리드 1세에 의해 독살되었고, 사후 장남 무함마드와 차남 자이드가 대립하며 쉬아 세력은 분열을 겪게 된다.
2. 생애[편집]
쉬아 전승에 따르면 이맘 후세인과 페르시아 황녀 샤흐르바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알리 & 무함마드와 사산 왕조의 혈통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 680년, 운명적인 카르발라 전투 당시 알리는 크게 아팠기에 전투에 참가하지 못하고 후방에 여인들과 남아있었다. 전투 도중 후세인과 그의 아들들을 비롯한 남성 대부분이 전사한 후, 우마이야 장군 샤미르와 우바이둘라 빈 지야드는 후세인의 마지막 남성 혈통인 알리마저 죽이려 하였으나 후세인의 여동생 자이납이 청원하여 살아남았다. 다마스쿠스로 압송된 후 알리는 감옥 앞에 모여든 군중에게 연설을 하였고, 알리 가문에 대한 동정 여론이 일자 야지드 1세는 알리를 비롯한 포로들에게 빼앗긴 재물을 배상하고 고향인 메디나로 되돌려보냈다.
소수의 추종자들과 은둔하며 신앙 생활에 치중하던 알리는 683년 2차 피트나의 일환으로 메디나에서 압둘라 빈 한달라가 봉기하자 그에 동참하지 않았고, 오히려 우마이야측 인사인 마르완 이븐 알 하캄을 보호해주었다. 따라서 얼마후 우마이야 군대가 반란을 진압한 후에도 알리는 야지드에 대한 충성 서약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뒤이어 이라크에서 타와빈 (참회자) 운동이 벌어졌을 때에도 알리는 동조하지 않았고, 이에 최초의 쉬아 국가를 세웠다 평가되는 무크타르 앗-타카피는 알리 대신 후세인의 이복 동생인 무함마드 이븐 알-하나피야를 이맘으로 모셨다. 따라서 687년 압둘라 이븐 앗 주바이르가 무크타르를 격파한 후에도, 그리고 692년 우마이야 군이 압둘라를 격파하고 히자즈를 재정복한 후에도 알리는 별 간섭을 받지 않았다.
알리와 숙부인 이븐 알 하나피야 사이에는 여러 일화가 있다. 그중 유명한 일화는 누가 후세인의 뒤를 잇는 이맘인지 결정하기 위해 함께 카으바로 향하여 기도했는데, 신성한 검은 돌이 알리의 편을 들었다는 것이다. 일부 쉬아 신도들은 이븐 알 하나피야가 알리를 보호하기 위한 '임시 이맘'으로 점지된 것이라 여기기도 한다. 무크타르 사후에도 쉬아 세력의 대부분은 이븐 알 하나피야를 이맘으로 모셨고, 700년 그가 사망한 후에는 아들 아부 하쉼 압둘라를 이맘으로 모셨다. (하쉬미야) 다른 분파는 이븐 알 하나피야의 죽음을 부정하며, 그가 메디나 인근 산에 은둔 중이고 마흐디로 재림할 것이라 믿었다. (카르비야) 그리고 일부 세력은 알리의 지지 세력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조금씩 영향력을 확장하던 알리는 713년 10월 우마이야 칼리파 왈리드 1세 (혹은 그의 동생 히샴)에 의해 메디나에서 독살되었다. 알리는 하산 빈 알리의 딸이자 사촌인 파티마와 낳은 장남 무함마드 알-바키르를 후계자로 지목하였다. 다만 다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자이드 역시 하산과 후세인의 자손들 중 학식이 있고, 경견한 자라면 누구나 이맘이 될 수 있다며 이맘위를 주장하였기에 쉬아 진영은 재차 분열되었다. 우마이야 조에 무력 항쟁을 선택하고 순교한 자이드와 달리 무함마드는 부친과 달리 신앙과 저술 활동에 치중하며 때를 기다렸다. 30년 가량 은둔하며 알리가 집필한 앗-사히파 앗-사자디야는 향후 쉬아 교리의 핵심 서적 중 하나로써 중시되었다. 사후 백부 하산이 묻힌 알 바키 묘원에 안장되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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