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파르 앗 사디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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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파 이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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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로코 이드리시 왕조의 초대 아미르.
2. 하산 이븐 알리의 6대손. 타바리스탄 알라비 왕조의 개창자
3. 야흐야 이븐 후세인. 대학자 알 카심의 손자. 예멘 자이디 이맘국의 초대 이맘.






1. 개요
2. 가계
3. 생애
4. 교리 정립
5. 후손
6. 기타


1. 개요[편집]


جعفر بن محمد الصادق
자파르 빈 무함마드 앗-사디크[1]

이맘위: 732년 ~ 765년
생몰: 702년 ~ 765년

열두이맘파의 6대 이맘. 무함마드 알 바키르의 장남으로, 메디나존버 머물며 신앙과 교리 확립에 전념하였다. 그는 열두이맘파의 법학 (피크)인 자파리 학파를 정립하였고, 많은 하디스를 전수하여 종교적으로 크게 존경받았다. 하지만 아바스 왕조의 성립 후 위험인물로 인식되어 알 만수르의 박해를 받다가 장남 이스마일 대신 차남 무사 알 카짐을 후계자로 지목한 후 사망하였다.

다만 이에 대해 장자 상속을 주장한 세력이 이스마일과 그의 아들 무함마드를 이맘으로 세우며 분리되어 이스마일파를 이루게 되었다. 생전 자파르는 많은 제자들을 두었는데, 그중에는 후일 각각 순니 4대 법학파 중 하나피파말리키파를 세우게 되는 아부 하니파 앗-누만과 말리크 이븐 아나스가 있었다. 따라서 자파르는 순니와 쉬아를 막론한 거의 모든 무슬림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2. 가계[편집]


이맘 알리아부 바크르의 고손, 이맘 후세인이맘 하산의 증손. 이는 부친 무함마드 알 바키르가 아부 바크르의 증손녀 움무 파르 빈트 카심 빈 무함마드와 결혼하여 자파르를 낳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선지자를 비롯하여 초기 3대 이맘은 물론, 초대 칼리파의 혈통까지 지닌 첫 이맘으로서 엄청난 정통성을 자랑하였다. 여기에 개인적인 학식도 출중하여 학자로도 명성을 날렸기에 자파르의 대에 있어 열두이맘파가 번성하게 되었다.

3. 생애[편집]


어린 시절 하디스 학자이던 외조부 카심 빈 무함마드 밑에서 수학하며 명석함을 드러내었다. 713년 부친 무함마드 알 바키르가 이맘에 오른 후, 그의 후계자로서 메카 순례나 다마스쿠스 소환 등에 동참하였다. 732년 부친의 사후 이맘위를 계승한 자파르는 우마이야 왕조의 부패와 혼란에 지친 민중에게서 지지를 받았으나 선조들과 마찬가지로 직접적인 정치의 일선에 나서지 않고 신학에 치중하였다. 이는 숙부 자이드와 사촌 야흐야 빈 자이드가 각각 740년 쿠파, 743년 호라산에서 무력 봉기에 나섰다가 순교한 것과 대비되는 태도였다. 몇년 후 호라산에서 압바시야 혁명을 준비하던 아부 무슬림이 지원을 요청했을 때에도 자파르는 '이 자는 나의 사람이 아니며, 지금은 나의 때가 아니다'라고 답하며 그가 보낸 편지를 태워버렸다. 이어진 3차 피트나 당시에도 자파르는 칼리파위를 주장하거나 정치적 견해를 밝히지 않았다.

750년 압바스 왕조가 우마이야 조를 대체한 후로 한동안 히자즈 지방에는 조정의 권위가 제대로 행사되지 않았다. 권력의 공백기를 틈타 자파르는 교리 설파에 박차를 가하였고, 그의 산하에는 명성을 듣고 각지에서 몰려온 4천에 달하는 제자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후일 하나피, 말리키 법학파를 세우는 아부 하니파 누만, 말리크 빈 아나스를 비롯하여 무타질라파의 선구자 와실 빈 아타와 대학자 자비르 이븐 하이얀 등의 명사들이 있었다. 한편 750년대 후반 칼리파 알 만수르는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며 기존의 하쉬미야 이맘 성격을 버리고 순니 칼리파의 성격을 취하며 (압바시야 혁명을 도운) 쉬아 세력을 탄압하였다. 이에 하산의 증손이자 자파르의 6촌인 무함마드 앗-나프스 앗-자키야가 762년 메디나에서 무력 봉기를 일으켰으나, 자파르는 역시 동참하지 않았고 반란은 진압되었다. 그럼에도 알 만수르는 여론의 지지를 받는 자파르를 정권의 위협으로 여기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막 건설 중이던 바그다드로 소환된 자파르는 가족애를 언급한 하디스를 인용하여 알 만수르를 설득, 메디나로 무사 귀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또다시 소환된 자파르는 국문을 당하고 한동안 사마라에 감금을 당한 후에야 메디나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알 만수르는 더 나아가 메디나에 있는 자파르의 집을 태워버리기도 하였다. 이로써 두려움을 느낀 자파르는 그후 메디나에서 은둔하다가 762년 사망하였고, 쉬아 전승은 알 만수르의 독살로 규정하고 있다. 후계자 선정에 있어 자파르는 본래 하산의 손녀 파티마 빈트 후세인과의 장남 이스마일을 지목했으나, 760년경 그가 요절하자 베르베르계 노예 출신이지만 신학적으로 출중했던 하미다와 낳은 무사를 후계자로 삼았다. 다만 파티마 소생의 차남 압둘라와 장손 무함마드 빈 이스마일을 지지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기에, 자파르 사후 히자즈의 쉬아 공동체는 여러 분파로 분열되었다.[2]

4. 교리 정립[편집]


열두이맘파와 이스마일파 쉬아 교리에 있어 자파르는 매우 중요한 위상을 지닌다. 그는 부친 대부터 진행되던 타키야 및 자유 의지에 대한 교리를 정립하였다. 후자의 경우 자파르는 신이 대부분의 일을 정해 두었지만 나머지는 인간의 결정에 남겨두었기에, 인간에 책임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자파르는 이맘위와 칼리파위가 서로 분리되어 있고 하나님이 전자를 승리로 이끄신 후에야 다시 통합되며, 그날이 올 때까지 인내해야 한다는 교리를 정립하였다.[3] 따라서 불의에 대한 항거를 중요하게 여겼던 자이드파와 자파리 교리는 완전히 분리되었다.

당시 화제가 되었던 하디스의 수용에 대하여 자파르는 하디스라 할지라도 쿠란과 위배된다면 (어떠한 기타 근거이 있다 하더라도) 즉시 폐기해야 한다며 단호히 위계 질서를 정리하였다. 동시에 그가 제시한 쿠란의 4대 의미 중 숨겨진 의미는 후일 이스마일파의 주요 논거 중 하나로 이어졌다.

한편 자파르의 명성이 높아지며 일부 굴라트 (급진파) 세력이 그를 신으로 모시기도 하였는데, 자파르는 이를 이단이라 비판하였다. 그중 아불 카타브는 748년 자파르에게서 축출당한 후, 자신이 하나님 자파르가 보낸 사도라 주장하며 755년 쿠파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진압되기도 한다.[4]

5. 후손[편집]


자파르는 하산 빈 알리의 손자이자 자신의 7촌인 파티마 빈트 후세인 알-아트람과 베르베르계 여성 하미다와의 사이에서 아들들을 두었다.

  • 장남 이스마일[파티마] : 요절한 후계자, 이스마일파의 6대 이맘 (추존)
  • 차남 압둘라 알-아프타[파티마] : 파트히야 이맘, 766년 사망
  • 삼남 무사 알 카짐[하미다] : 열두이맘파의 7대 이맘
  • 무함마드 앗-디바즈[하미다] : 815년 자이드파와 결탁하여 칼리파를 칭하고 반란을 일으킨다.[5]
  • 이샤크 알-무타민[하미다] : 하산 이븐 알리의 증손녀이자 하디스 학자로 명성이 높았던 사이다 나피사와 결혼하였다.
  • 막내 알리 알-우라이디 : 바누 하쉼 부족장 (셰이크) 되어 100세까지 장수함[6]

6. 기타[편집]


자파르의 부고를 들은 알 만수르는 메디나 총독에게 그의 아들들을 처형하여 후환을 없애도록 하였다. 하지만 자파르는 유언의 집행인으로 아들들인 압둘라 및 무사와 함께 알 만수르 본인과 메디나 총독을 집행인으로 설정해 두었기에 이맘의 가계를 끊으려는 시도는 실패했다고 한다.

무함마드와 자파르 부자가 전한 하디스는 기존에 있던 하디스의 양을 상회했다고 한다. 하디스 제조기

대학자라는 명성과 방대한 연구 활동에 비해 직접 저술한 것은 남아있지 않은데, 이는 저술에 있어서는 제자들에게 일임했기 때문이다. 자파르의 뜻이 담긴 저서로는 제자 알-무팟달 빈 우마르 알-주티가 집필한 '타우히드 알-무팟달'이 있다.

사후 자파르는 이맘 하산, 알리 자인 알 아비딘, 무함마드 알 바키르와 함께 메디나의 알-바키에 매장되었다. 이후 그의 영묘는 순니와 쉬아를 막론한 무슬림들의 순례지가 되었으나 1926년 사우드 왕가의 와하비파 광신도 군대인 이크완에 의해 파괴되어 현재는 평지로 남아있다.

자파르는 여러 어록을 남겼는데, 그중 일부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신을 경외하는 자에게, 신께서 만물이 그를 경외하게 하신다. 신을 경외하지 않는 자에게, 신께서 그가 만물을 경외하게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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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칭호인 앗 사디크는 '진실된 자'란 뜻이다[2] 다만 자파르의 주요 제자들이 무사를 지지했기에 그의 계승은 순조로운 편이었다.[3] 이는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를 제창한 예수 그리스도와 술탄과 칼리파의 종교 / 세속 권력의 분리를 주장한 10-11세기 이슬람 학자들의 주장과 유사하다[4] 이를 카타비야로 부르며, 그외에 바지기야 역시 자파르를 신으로 모셨다. 타우시야는 자파르 사후 그의 죽음을 부정하고 마흐디로 믿었다[파티마] A B [하미다] A B C [5] 다만 칼리파 알 마문에게 진압된 후, 조카 자파르 앗 사디크의 주선으로 공개 사죄를 하고 사면받았다.[6] 증손자뻘인 알리 알 하디 이맘의 시기까지 생존했다 한다. 그 역시 여러 아들을 남겼고, 그중 무함마드 앗-나킵은 이라크로 이주하였다. 알-우다이리의 후손들은 서아시아 각지에 퍼져 있어 사이드의 상당수를 차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