툴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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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어 طولكرم
영어 Tulkarm

팔레스타인 서안지구 서부의 도시. 인구는 약 9만명으로, 이스라엘의 해안 도시 네타냐와 불과 12km 떨어진 국경 도시이다. 과거 농업으로 유명한 도시였으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단 후 배후 농경지를 상실하여 현재는 난민들 위주의 중소 도시로 남아있다.

1. 역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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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경에 세워진 툴카름 모스크

아이유브 왕조살라흐 앗 딘나블루스 산지와 십자군 해안 과의 완충지대로 쿠르드계 자이단 부족을 정착시키며 도시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맘루크, 오스만 시대에도 계속 호족으로 군림하였다. 13세기 무렵 이주해 온 베두인계 푸카하 부족은 스스로 아슈라프 (무함마드 가문)를 칭하며 성직자 계급인 울라마가 되어 쌍벽을 이루었다. 14세기 맘루크 왕조기 툴카름의 농지는 예루살렘의 알-파르시야 마드라사의 와크프 (기금)에 속했고, 오스만 제국의 술탄 쉴레이만 1세 시기에 알-자우하리야 마드라사로 이관되었다. 카슴이라 불린 해당 세금은 수확의 1/3이 와크프로 귀속되는 것이었다. 나블루스 산지의 분란으로 피난민들이 모여든 결과, 16세기 중반이 되자 인구는 5백에서 1천여로 늘었다.

오스만 시기 툴카름에서는 각종 곡물과 올리브, 벌꿀, 포도, 염소 등이 생산되는 등 특산물이 많았다. 17세기 들어 자이단 가문 외에도 타라바이 가문이 대두하였으나, 전자가 무타살림 (징세관) 지위를 유지하였다. 다만 17세기 중반, 금요 예배 도중 벌어진 민중 봉기로 수세기 간 독재와 과한 징세를 이어가던 자이단 가문은 성인 남성 대부분이 학살당하며 몰락하였다. 이후 바드란 부족이 정치, 푸카하 가문이 종교적 영향력 하에 와크프를 관리하는 체제가 이어졌다. 1858년 오스만 법제 개혁 후 집단 지주제인 무샤가 폐지되자 농민들에게 재산 등록 의무가 부여되었는데, 대부분 징병을 두려워하여 기득권층의 명의로 등록하였다. 따라서 결국 기득권층의 토지 독점이 더욱 견고해지고 말았다.

19세기 들어 수천으로 인구가 불어난 툴카름은 1875년 카다 (군)를 거쳐 1892년 시로 승격되었고, 팔레스타인 중서부의 주요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따라서 시청, 우체국, 서구식 학교, 병원 등 근대화의 혜택을 입었고 1908년에는 갈릴리 지방 및 하이파가자-야파-예루살렘을 잇는 히자즈 철도의 지선이 놓였다. 제1차 세계 대전기 툴카름은 팔레스타인 주둔 오스만 제국군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고, 영국군의 공습을 당한 끝에 1918년 점령되었다. 1936년 팔레스타인 대반란 시기 툴카름은 현지 출신인 압둘라힘 알-핫즈 무함마드의 거점 중 하나로써 격전의 현장이었다. 1940년대 들어 툴카름의 시가지는 북서쪽으로 확장되었고, 인구도 1만에 이르렀다.

1차 중동전쟁 당시 일대에는 이라크 군이 주둔했고, 요르단령 서안 지구에 포함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농경지가 이스라엘에 빼앗기고, 해안으로의 도로도 차단되었기에 도시는 쇠퇴하였다. 땅을 잃은 대부분의 기존 주민들은 일자리를 찾아 요르단으로 향했고, 그 빈자리는 하이파나 야파 등지에서 온 난민들이 채웠다. 1967년 3차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이 점령하여 군정을 실시했고, 1982년 민정으로 이관했다. 1982년 제1차 인티파다 당시 툴카름은 저항의 거점 중 하나였고, 오슬로 협정 후 1995년 12월 이스라엘이 철수하여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주권을 얻은 3번째 도시가 되었다. 비록 제2차 인티파다 당시 이스라엘 군이 재점령했으나 2005년 철수하였고, 자치 정부는 주민들의 무기 소지를 엄격히 통제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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