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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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연의 수상 이력 /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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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1.svg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2.svg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3.svg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4.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83
1986
1987
1988


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5.svg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6.svg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7.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코치

1989
1991
1993



파일:KBO 로고(세로형, 2013~2021).svg KBO 한국시리즈
1983 한국시리즈 MVP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1982, 1983 KBO 리그 베스트 10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1982, 1986 KBO 리그 홈런왕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1986 KBO 리그 타점왕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1986 KBO 리그 장타율왕









{{{#fff [[해태 타이거즈|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27번}}}
팀 창단

김봉연
(1982~1988)


이호성
(1990~2001)
{{{#fff [[해태 타이거즈|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37번}}}
결번

김봉연
(1989~1994)


정현발
(1995)




파일:金奉淵.png

김봉연
金奉淵 | Kim Bong-Yeoun

출생
1952년 1월 13일 (72세)
전라북도 전주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본관
김녕 김씨 (金寧 金氏)[1]
학력
전주중앙초등학교 (졸업)
군산남중학교 (졸업)[2]
군산상업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체육교육과 / 학사)
원광대학교 대학원 (사회체육학과 / 석사)[3]
포지션
1루수, 지명타자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2년 해태 타이거즈 창단멤버
소속팀
한국화장품 야구단 (1979~1981)
해태 타이거즈 (1982~1988)
지도자
해태 타이거즈 플레잉코치 (1988)
해태 타이거즈 1군 타격코치 (1989~1994)
현대 피닉스 타격 인스트럭터 (1995)
해태 타이거즈 잔류군 타격코치 (1997)
해태 타이거즈 2군 타격코치 (1998)
해태 타이거즈 2군 감독 (1999~2000)
해설위원
SBS 야구 해설위원 (1995)
MBC ESPN 야구 해설위원 (2005)
병역
육군 야구단 (1975~1977)

1. 개요
3. 지도자 경력
4. 교육인 경력
5. 기타 경력
6. 기타
6.1. 학구열
7. 연도별 주요 성적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파일:콧수염 홈런왕 김봉연.png}}}
해태 타이거즈의 선수, 코치이자 前 극동대학교 홍보처장 겸 교수다.

KBO 리그 원년 홈런왕이자[4] 팀 최초의 전국구 스타.[5] 때문에 팀의 개국공신이자, 해태의 여러 스타 출신들 가운데서도 단연 으뜸가는 원로 대접을 받는다.[6] 해태 출신 기념 모임에서도 회장을 맡고 있다.


2. 선수 경력[편집]


김봉연의 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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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지도자 경력[편집]


1989년부터 코칭스탭이 되었다.[7] 1990년에 입단한 이호성은 김봉연의 등번호인 27번까지 물려주면서 공들여서 4번 타자로 키웠다. 1993년부터는 김종모가 타격보조코치로 합류했고 김종모의 배번 7번을 물려받은 이종범을 같이 지도하였다. 1994 시즌 후 계약 관련 마찰로 팀을 나가게 되고, 실업팀 현대 피닉스 타격 코치로 가게 된다.[8]

1996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연수를 받았다. 연수를 받게 된 이유는 당시 해태 단장이 된 사람이 찾아와서는 말 잘들어라 하는 식으로 말하는데 굴욕적인 표현을 본인에게 해서 던지고 나갔다고 한다.[9] 이 당시에는 단장이 없었고, 그룹에서 내려온 구단 사장만이 있었는데 아마 이 사장과 트러블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연수 후, 친정팀의 회유로 다시 코치로 복귀하였고[10], 2000년까지 해태의 타격코치로 일하다가 김응용 감독이 삼성 라이온즈로 옮기면서 차기 감독 0순위로 거명되었다. 이 당시 2군 감독이었던지라 어느 정도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프런트와 사이가 안 좋았기 때문에 후배 김성한이 감독직을 맡으면서 감독직은 물 건너갔다.

김봉연 본인은 인터뷰에서 구단주가 해태에서 KIA로 바뀌면서 감독의 꿈이 좌절되었다고 밝혔다.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김성한이 밝히기를 도쿄에서 김봉연과 김성한이 저녁을 먹으면서 김봉연이 '내가 감독을 맡으면 날 도와줘야 한다', 김성한은 '예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서로 말했다. 김응용 감독은 당초에 삼성 감독으로 이동하기로 했으나 박건배 구단주가 계속 만류하면서 1-2년 더 감독을 하게됐고 결국 김응용 감독이 이동한 후 김봉연은 본인이 차기 감독일줄 알고 있었지만 김성한이 후임 감독으로 지명되자 큰 충격을 받았으며 가족들과 함께 눈물을 흘렸다고 밝혔다.[11]

김봉연 본인은 타격코치 시절을 상당히 힘들었다고 회고한다. 해태 4번타자 김봉연과 해태 타격코치 김봉연의 대우는 천지차이 수준[12]이었고, 작전이나 여러가지를 두고 감독과 차이가 있었을 때 갈굼을 많이 받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군대 꿈마냥 김응용 감독이 나오는 악몽을 꾸었다고 한다. 암울한 시절이라고 회고했을 정도였다.[13] 더군다나 감독이 프런트에 항의하라고 하면 찾아가서 항의하고, 선수 갈구라고 하면 갈구면서 시키는대로 다 했더니 코치로서의 이미지는 나락으로 가있고 돌아온 것은 두 차례의 재계약 실패였으니 여러모로 억울할 수 밖에 없을 입장이었다. 심지어 김성한이 감독이 되자 다른 구단에도 문을 두드렸으나 자리가 없었다고 한다.


4. 교육인 경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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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야구계를 떠나 2001년부터 극동대학교 사회체육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정년 퇴임했다. 정확히는 2001년 겸임 교수, 2002년부터 전임 교수였으며 2016년 2학기까지 강의를 하고 정년에 퇴임을 한 것이다. 연세대학교 체육교육과를 나왔기 때문에 교원 자격증이 있었는데 의도치 않게 교육자의 길을 가게 된 것 같다고 자평했다.[14]

그의 석사학위 취득 및 교수경력은 야구선수 중에서 보기 드문 경우이며[15], 선수/지도자 은퇴 이후 제 2의 삶을 성공적으로 개척한 사례로서 귀감이 되고 있다.[16]

그가 교수가 된 과정은 이렇다. 2000년 11월에 기아 타이거즈가 출범하고 나서 팀을 떠나게 되었는데, 친구들과 회포를 푸는 자리에 극동대학교 유기일 총장을 만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친구들이 "이 친구는 최고 선수였음에도 항상 공부를 해왔습니다. 강의를 해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이 계기가 되어, 2001년 1학기에 겸임교수로 발령이 났다. 첫 강의 때는 자신의 이름을 대기만 해도 다 알고 강의 진행이 쉬워질 것이라 생각했으나, 왕년의 홈런왕이라고 하니까 "홈런왕은 이승엽이 아닌가?"라는 학생들의 반응이 왔다. 그래서 "부모님께 김봉연 선수한테 수업을 받는다고 말해보라"고 했더니 첫 강의하고 나서 다음 주 부터는 부모님 부탁으로 사인을 해달라는 학생들이 하나둘 나타났으며, 확인차 학교를 찾아오는 부모들도 더러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강의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이 좋아지고 영어와 일어를 어느 정도 하던 터라서 부임 이듬해인 2002년에 전임 교수로 발령받았고, 학생처장과 홍보실장, 학과장 등 주요 보직을 도맡았다.[17]


5. 기타 경력[편집]


2005년 경에는 MBC ESPN에서 부업으로 프로야구 경기 해설을 하기도 했다.

2020년 6월 20일에는 KIA 타이거즈의 올드 유니폼 데이를 맞아 1988년 한국시리즈 MVP 문희수와 함께 시구, 시타를 했다. 또한 타이거즈 프랜차이즈 역대 최다 홈런을 갱신한 나지완에게 꽃다발을 수여하고, 구단으로부터 감사패와 특별 유니폼을 수여받았다.

교수 정년퇴임 후에, 떠난 지 오래된 현장 대신 학계 경력을 바탕으로 문제가 산적한 스포츠 행정이나 산업전략 등에 기여하면 어떨지 올드 팬들은 또 다른 변신을 기대했다. 2022년 현재 중소기업의 고문으로 일하고 있다고 밝혔다.


6. 기타[편집]


  • 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 시절 어린 나이부터 두각을 나타내자, 이를 질투한 일부 선배들에게 심한 기합을 받고 운동을 방해받아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런 어려움을 뚫고 4번타자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다.

  • 백넘버는 27번인데, 김봉연이 은퇴한 후 김봉연이 타격코치가 되어 키운 이호성이 27번을 썼다. 그런데 이호성의 흑역사 때문에 이 번호는 다른 사람이 쓰게 되었다.[18][19] 그래서 김봉연은 이호성 살인 사건 때 등번호를 물려줄 만큼 자기가 아끼던 후배가 그 지경이 된 걸 어이없고 속상하다고 표현했다. 2023년 현재 27번은 고교 후배 김호령이 사용중이다.

  • 김봉연이 먼저 두각을 나타낸 것은 타자가 아닌 투수로서였다. 군산상고 시절에는 에이스로 활악했고 연세대 1학년땐 회장기 전국대학야구 추계리그에서 고려대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했다. 당시 고려대 중심타자였던 허구연은 공이 아주 빠른데다 여기에 각이 큰 커브까지 있어서 치기 어려워서 투수를 계속 했다면 한국야구의 에이스가 됐을 것이라며 회고 했을 정도였다. 군산상고 시절 은사인 최관수 감독이 투수를 안 할땐 방망이도 좀 쳐봐라 라고 해서 타석에 나가니 곧 잘쳐 1학년 때 5번을 시작해서 2학년땐 4, 5번 왔다갔다 했고 3학년이 되어서 부동의 4번 타자가 되었다. 연세대에 진학한 후에는 어깨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러닝훈련에 빠지며 타자에 전념하기 시작했고 1975년 제1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대표팀에 뽑혀 필리핀을 상대로 한 이닝에 홈런 2개를 치는 등 홈런왕에 올랐고 1976년부터는 부동의 국가대표 4번 타자로 기용됐다. 실업야구 시절에는 3연속 홈런을 몇번 쳤고 홈런왕은 대학때부터 휩쓸었다.

  • "아기공룡 둘리"에 '김몽연'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마운드에서부터 3시간이 걸려 날아오는 둘리의 초 슬로볼[20]을 기다리다 지쳐 포수, 심판과 함께 졸다가 원 스트라이크 아웃을 당하고 만다.

  • 2013년부터 한화 이글스의 수석코치로 자리를 옮긴 김성한 전 감독을 대신하여 KBS 광주방송국의 '베이스볼 매거진 야호'의 패널로 발탁되었다. 이 프로그램에서 김봉연 교수는 한 주간의 경기 촌평과 함께 타이거즈 후배들에게 따끔한 충고를 주는 멘토의 역할을 해주기도 하는데, 2013년 5월 6일에 있었던 직속후배 김상현의 트레이드 소식에는 매우 안타까워하는 반응을 보였다. 직속 후배였던 만큼 더 많은 기회를 KIA에서 부여받길 원했었다는 후문.

  • 교직에 들어서면서 현장을 떠난지 15년째이지만, 여전히 야구에 관심이 많은 듯 하다. 인터뷰에 의하면 선동열의 후임 감독으로 다시 타이거즈 일선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듯 했으나, 김기태가 새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김응용 감독의 후임으로 자신이 임명될 것으로 굳게 믿었으나 후배 김성한이 감독으로 임명되면서 가족들과 함께 많은 눈물을 흘렸고, 그 때의 응어리가 남아 김응용과 김성한과도 소원해졌다가 2021년 11월 전설의 타이거즈 충장축제 라이브를 기점으로 풀렸다고 한다.

  • 해태 수석코치 시절인 1991년 김성근의 그 유명한 이중오더를 입증해낸 인물이다. 자세한 사항은 이중오더 사건 항목을 참고.

  • 전주시 어느 아파트에 가면 친형이 경비원으로 재직 중이신데, 친해지면 음료수 한 병과 싸인볼로 맞바꿀 수 있다고 한다.

  • 속풀이쇼 동치미교수 자격으로 출연하였다. 사실 이미 옛날부터 프로야구 초창기를 대표했던 스타 선수로서 다양한 방송 출연을 했었다. 김성한 등도 마찬가지.





  • 전라도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말을 들어보면 서남 방언보다는 표준어처럼 들린다.이는 김봉연이 호남 지방에서도 최북단이며, 항구도시로 외지인이 많이 드나드는 군산시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기 때문.[21]

  • WBA 주니어미들급 챔피언을 차지했던 김기수의 동서다. 김봉연의 부인이 김기수의 처제이고, 해태 후배인 이상윤은 김기수의 장녀 김미경과 결혼했으나 김기수의 사망 후 이혼하였다. 그러므로 이상윤은 김봉연의 조카사위였다.

  • 대학 시절에는 사이드암 스로 투수로 활동했으며 슬라이더, 스크류볼 등 다양한 변화구를 가지고 있었다.

  •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밝힌 일화로 여수시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 운전에 트라우마가 있어 한동안 택시를 탔는데, 어떤 기사는 집까지 와서 시즌 끝날 때까지 돈을 안 받고 태워줬다고 한다. 시즌 후 고기 대접으로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


6.1. 학구열[편집]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하루에 100개씩 영어단어를 외우고 잠자리에 든다고 한다. 영어단어를 외우다가 조금 지겨워지면 그때는 일본어를 외운다고 한다. 그 정도로 공부에 열의를 놓지 않고 있다.

그의 이러한 학구열은 교사인 형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전주에서 군산으로 전학을 가면서 형이 콘사이스 영어사전과 천자문을 쥐어주면서 '이건 꼭 공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군산상고 선수들은 졸업 후 대부분 실업팀 아니면 금융팀으로 입단했는데 본인은 교사 쪽으로의 꿈이 있어서 연세대학교로 체육교육과[22][23]로 진학했다.

군산상고 시절에도 수업시간에 충실했고 수학은 별로였지만 영어시험은 항상 90점 이상이었다고 한다. 연세대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도 선생님이 되려고 교직과목을 이수했고 교생실습도 했으며 야구 연습 후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본 이우주 당시 연세대 총장으로부터 "더 공부해서 학교에 남으라."는 권유를 받았다고 한다. 그만큼 기특하게 본 것이다. 결국 학교에 남지는 못하고 바로 실업팀-프로팀에 입단을 하였는데, 현역 선수 시절에도 책을 놓지 않았으며, 프로야구 선수 시절에 원광대학교 대학원에 진학을 하여 1990년에 심한 운동이 자연치사세포능과 T-세포 아형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논문으로 사회체육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특히 프로 선수 생활 중에도 경기가 없을 땐 항상 수업에 참여했다. 광주에서 익산을 오가면서 학업을 이어나갔는데 상당히 고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도 경기나 연습을 결장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석사학위 논문을 발표한 날 단 한 번 결근했다고 한다. 당시 김응용 감독은 "감독할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공부해?"라는 반응을 보였지만 그래도 허락을 해 줬다고 한다.

경기가 끝난 밤부터 그 다음날 경기까지 시간이 많이 남는데 그 시간에 책을 보거나 AFKN을 시청해서 룸메이트들이 힘들었다고 한다. 야간경기가 끝나고 나면 다음날 야간경기까지 의외로 시간이 많이 남기 때문에 행여나 허튼 짓을 할 수 있어서 후배 선수들에게 상당히 무섭게 대했다고 한다.[24] 야구선수뿐만이 아니라 운동선수들 모두가 항상 공부도 열심히 해야한다는 것을 계속해서 외치고 있으며, 야구연습하는 시간의 10분의 1만 공부에 할애하면 은퇴 후 안정된 생활이 보장됩니다라고 말을 하기도 했다.


7.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역대 기록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2
해태
74
269
.331
(5위)
89
14
1
22
(1위)
52
(4위)
55
(1위)
7
34
.636
(2위)
.406
1983
80
286
.280
80
10
1
22
(2위)
59
53
(4위)
2
42
.552
(3위)
.372
1984
97
341
.249
85
18
0
17
(4위)
48
42
3
54
.452
.352
1985
91
316
.253
80
9
1
17
(3위)
47
45
7
46
.449
.348
1986
108
407
.300
(4위)
122
(2위)
18
3
21
(1위)
67
(1위)
63
(3위)
3
42
.514
(1위)
.363
1987
98
339
.271
92
11
2
6
39
33
1
31
.369
.331
1988
82
187
.257
48
4
0
5
22
20
1
13
.358
.303
KBO 통산
(7시즌)
630
2145
.278
596
84
8
110
334
311
24
262
.478
.355

8.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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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충의공파 28대손 연(淵) 항렬이다.[2] 원래 전주북중학교에 다녔는데 야구부가 해체되어 전학을 갔다고 한다 #[3] 이후 동신대학교 박사과정에 진학하였다.[4] 프로 직전 실업 시기의 최고의 홈런 타자였으며, 프로로 넘어온 후에도 삼성 라이온즈이만수, 같은 팀김성한과 함께 리그 초창기의 대표적인 홈런타자였다. 이만수와의 100호 홈런 경쟁은 아직도 회자될 정도.[5] 이후 김성한, 선동열, 이종범 등이 이 계보를 잇는다.[6] 나이만 두고 봐도 김봉연이 해태 출신 선수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축에 속하기도 한다. 프로 입단 당시에도 이미 당시 선수로는 대부분 은퇴를 선택하던 31세였고, 그럼에도 리그 창설 당시 프로 선수 연봉 계약 중 최고 기준점이 될 정도로 전국구 스타였다. 다만 최고령 선수는 재일교포 출신으로 해태에 잠시 몸 담았던 주동식(48년생).[7] 기량이 예전 같지 않던 터라 구단에서 거의 강제로 은퇴를 시켰으며 이후 은퇴를 수용하자 1군 타격 코치로 3년 계약을 맺었다.[8] 다만 당시만 해도 프로야구 선수 출신들의 실업팀 정식 코칭스태프 취업이 불허된 상태여서 타격 인스트럭터라는 변칙 보직을 맡았고, 부업으로 1995년에는 SBS TV 야구 해설위원도 겸했다.[9] 선수단으로부터 호평이 많았던 이상국 단장이 선동열 일본 진출 관련 협상으로 모기업과 마찰 후 노주관 사장과 같이 경질되면서 1996 시즌은 단장 없이 시즌을 치렀고 노주관 사장의 후임은 마의웅 사장이다.[10] 복귀 후엔 주로 2군과 잔류군을 담당하였다.[11] 이를 계기로 김성한과도 관계가 소원해져 김성한이 전화를 하면 '니가 웬일이냐 전화를 다 하고'라고 받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2021년 11월 충장축제 전설의 타이거즈 라이브 방송과 카퍼레이드 재현을 계기로 1983년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 6명(김봉연, 김준환, 김일권, 김성한, 김종모, 방수원)과 김응용 감독이 모였고 밤새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에게 서운했던 점들을 풀었다고 한다.[12] 당연히 코치로서 대우가 더 열악했다는 뜻이다.[13] 2014 시즌 중에 김성한이 한화 이글스 수석코치를 그만두자, 전화를 해서 중도에 그만 둔 것을 가지고 한마디 했는데, 김성한이 "형님, 잘 아시면서 왜 그러세요."라면서 했다고 한다. 확실한 것은 김응용 감독이 코치 길들이기를 했다는 점이다. 해태 시절 박정일, 백기성, 김봉연이 그렇게 당한 케이스였고, 삼성에서는 유남호, 한화에서는 김성한이 당했다.[14] 당시 프로야구가 출범전이라 고교 졸업 후 실업야구로 직행하거나, 대학교에 진학해 선수 생활을 이어나갔기 때문에 많은 선수가 학사 학위를 가지고 있다.[15] 김봉연 외에 대표적인 석/박사 학위를 얻은 야구선수로는 박노준, 서용빈이 있다. 심지어 박노준은 박사학위를 따고 전임교수를 하다가 대학 총장까지 올랐다.[16] 스포츠 선수나 군인, 연예인 같은 직종은 그들만의 리그가 구축되어 있는데다가, 어릴 적부터 해당 업계에 종사하면서 그 일만 계속해서 하다보니 사회경험을 쌓을 기회를 얻지 못하여 은퇴 후 사회에 진출했다가 실패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 김봉연이 코치 시절 애제자로 키웠던 이호성이 그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되곤 한다. 실제로 이호성이 범죄자가 되어 자살하자 가장 안타까워했던 이가 김봉연.[17] 관련 기사[18] 타이거즈의 27번은 강철민, 호세 리마를 거친 뒤 2009년부터 김상현이, 그리고 2013년에 신승현이 쓰고 있었다. 2013 시즌 종료 후 신승현이 LG 트윈스로 이적하면서 김태영이 물려받았다. 이호성부터 27번을 단 기아 선수들이 자살, 트레이드, 돌연사, 트레이드, 트레이드 등의 부침을 겪으면서 27번 잔혹사라는 이야기까지 있을 정도다. 그리고 김상현이 음란행위로 임의탈퇴되면서 저주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2017시즌에는 포수 이홍구가 달았으나 SK로 트레이드 되었고, SK에서 트레이드 되어 온 이명기KIA 타이거즈 이적 후 맹활약 하다가 NC에 갔는데 그 곳에서 대형사고를 치고 말았다. 이명기 이후에 27번을 이어 받은 문선재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19] 김봉연이 타이거즈 레전드이기도 하고 27번이 더 이상 더럽혀지지 않길 바라며 영구결번으로 지정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 팬들이 제법 있다.[20] 둘리는 김몽연의 팬이라는 설정이고, 바로 전 장면에서 둘리의 강속구에 야구장 벽이 뚫리는 것을 본 김몽연 선수가 원하는 대로(빠른 공 보다는 느린 공이 치기 편하지 라고 했다)초 슬로볼을 던진 것이다.[21] 실제로 군산시는 금강을 마주보고 있는 장항읍과의 교류가 전주시, 익산시 등의 다른 전라북도 지역보다 많았다. 현재는 군산 시가지가 동남쪽으로 확장되고 새만금 사업으로 인해 좋든 싫든 김제시, 부안군과 엮이며 전북 지역과의 교류가 이전보다 훨씬 활발해졌다.[22] 배우 신현준이 학과 16년 후배이다.[23] 고교 동기 김준환은 연세대 진학에 뜻을 뒀으나 대학 진학을 단념하고 금융팀으로 발길을 돌렸다.[24] 일례로, 송유석한테 영어공부를 시키려고 하자 송유석은 매니저에게 요청해 매니저와 같은 방을 쓰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