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회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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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회열의 감독직 /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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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Gwangju_Kia_Tigers_BC_(2001).png KIA 타이거즈 2군 역대 감독
김용달
(2014)

정회열
(2015~2017)

박흥식
(2018~ )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89
1993
1996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25번
김무종(1983~1988)

정회열(1990~1997)

신동주(2001)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46번
홍광천(1996)

정회열(1998)

김현욱(1999~2005)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25번
양용모(1997~1998)

정회열(1999)

배영수(2000~2014)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9번
유남호(2001~2003)

정회열(2006~2011)

황병일(2012)
KIA 타이거즈 등번호 81번
김대진(2010~2011)

정회열(2012~2013)

결번
결번

정회열(2015~2018)

결번



파일:tigers_co_kr_20171016_133004.jpg

이름
정회열(鄭會烈 / Hei-yeol Jung)
생년월일
1968년 10월 9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전라남도 장성군
학력
광주중앙초-충장중-광주일고-연세대 [1]
포지션
포수, 우익수[2]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0년 1차 1순위 (해태 타이거즈)
소속팀
해태 타이거즈 (1990~1997)
삼성 라이온즈 (1998~1999)
지도자
SK 와이번스 1군 배터리코치 (2002)
한화 이글스 1군 배터리코치 (2003)
KIA 타이거즈 1군 배터리코치 (2004)
삼성 라이온즈 2군 배터리코치 (2006~2009)
삼성 라이온즈 1군 배터리코치 (2010~2011)
KIA 타이거즈 1군 배터리코치 (2012~2013)
KIA 타이거즈 2군 배터리코치 (2013)
KIA 타이거즈 2군 감독 (2015~2017)
KIA 타이거즈 1군 수석코치 (2018)

1. 소개
2. 프로 선수 시절
3. 지도자 시절
4. 스카우터 시절
5. 지도자 2기, 2군 감독 시절
5.1. 수석코치 승격
6. 기타 사항
7. 역대 성적



1. 소개[편집]


해태 타이거즈, 삼성 라이온즈의 야구선수이자 前 KIA 타이거즈 1군 수석코치로 현역시절 포지션은 포수였다.


2. 프로 선수 시절[편집]


광주제일고등학교, 연세대학교(1986학번)를 졸업하고 1990년 해태 타이거즈에 1차 1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3] 당시 해태에는 장채근이 주전으로 버티고 있어서 주로 백업으로 활약했으며, 가끔 우익수 대수비로도 나갔다.[4] 과거에는 양용모같이 대놓고 도루하면서 포수를 안 하는 게 나았을 선수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프로 1군에서 포수를 보는 선수 중에 기타 포지션으로 나가는 경우가 거의 없으므로 포수 치고는 주력도 나쁘지 않고 나름 야구 센스가 뛰어났던 선수.

1993년에는 .275를 기록하면서 규정 타석을 충족한 해태 타자들 중에서는 이종범 다음으로 높은 팀 내 2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러한 활약을 발판으로 장채근의 뒤를 이어 주전 포수로 자리잡는 듯 했지만, 다음 해 시즌 막판 새끼손가락 부상을 당해 전력에서 제외되는 신세가 되었다. 이 때문에 1995년에는 8경기 밖에 뛰지 못했고, 그 공백은 1994년 시즌 중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이적한 최해식이 지켰다.

1996년에는 어느 정도 부상에서 회복되며 최해식의 백업으로 역할을 톡톡히 했으나, 그 해 초 하와이 전지훈련 때 송유석, 이순철, 조계현, 이건열 등과 항명사건의 주범으로 찍혀 다음 해인 1997년에는 고작 11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다.[5]

이처럼 오랜 시간 동안 인상적인 성적을 내지 못한 끝에 1997년 시즌을 마치고 해태에서 방출되었고, 이듬해 삼성 라이온즈에 이적했다. 그러나 당시 삼성 구단은 김영진의 스트라이크 낫아웃 사건 때문에 그 대체 요원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서 포수를 영입하면서 포수 자원이 차고 넘쳤다. 때문에 삼성에서도 주전을 차지하지 못했고[6] 결국 1999년에 은퇴했다.

참고로 전설적인 1999년 플레이오프의 마지막 타자로, 롯데의 마무리 투수인 주형광에게 삼진당한 주인공이다. 그래서 명승부 관련 영상에서 수없이 삼진을 당하며 덕아웃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1991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송진우의 퍼펙트를 막은 당사자이기도 하다.

현역 시절에는 사직 야구장에서 매우 강했다. 1993년 연타석 홈런을 치는가 하면, 1999년 생애 프로 마지막 홈런도 여기서 뽑아낸다. 그런데 왜 99년 플레이오프 때에는..... 사직 야구장이 아니었잖아


3. 지도자 시절[편집]


은퇴 후 SK 와이번스, 한화 이글스, KIA 타이거즈의 배터리코치를 역임했고 2005년에는 KIA의 전력분석원으로 있다가 이듬해 2006년부터는 선동열 감독의 부름을 받아 삼성의 2군 배터리코치로 부임하였다. 2009년 말 기존 1군 배터리코치였던 강성우가 한화 감독으로 임명된 한대화를 따라 이적하면서 1군 배터리코치로 승격되었다. 1군 배터리코치가 된 후, 삼성 포수들의 주자견제와 도루저지는 보다 나아졌다. 그러나 다년 간 삼성에 있었음에도 백업 포수를 키우지 못해 진갑용현재윤이 부상을 당했을 때 심광호채상병 등 외부에서 포수를 영입해야 했기에, 삼팬들에게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2011 시즌 종료 후, 선동열KIA 타이거즈의 신임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모두의 예상대로 김평호 코치와 함께 KIA로 이적하였다. 그러나 2013 시즌 중인 8월 17일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김용달, 조규제와 2군으로 내려갔다. 2013 시즌 후 스카우트 팀장으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2014 시즌 후에는 2군 감독으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4. 스카우터 시절[편집]


2015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10명 중 7명을 대졸로 뽑는 등, 지나치게 대졸 일색으로 지명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만 라운드에 상관없이 꽂히는 선수가 있으면 무자비하게 바로 지명했던 권윤민과 달리, 이번에는 라운드에 맞는 적절한 픽을 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 때문에 최소 권윤민보다는 낫다는 의견. 무엇보다도 스카우트 팀에 재직했던 2015년 신인드래프트 10라운드 픽이었던 김호령이 2016년 포텐이 터지며 어느 정도 좋은 평을 받았다. 참고로 이 해에 뽑은 11명 중 황대인, 문경찬, 이종석, 이준영, 박정수, 김명찬, 김호령까지 무려 7명이 군경팀에서 군 복무를 끝냈거나 복무 중에 있다. 군경팀 합격 여부가 코어 유망주와 그렇지 않은 유망주를 나누는 필요조건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에 7명이나 군경팀에 합격한 것은 상당히 인상적인 수치라고 할 수 있다. 망 드랲으로 취급받는 2013, 2014 드래프트를 거치며 황폐화된 유망주 팜을 15픽들이 그나마 먹여살리는 중.

여기에 팔꿈치 수술을 받고 사회복무요원 입대가 확정된 투수 박지훈에게 본가 대신 함평으로 주소를 옮겨서 복무하는 것을 권한 것도 정회열 스카우트였다. 함평에 있는 2군 클럽하우스에서 출퇴근하면서 복무하고, 쉬는 시간이나 주말을 이용해서 몸을 만들수 있도록 배려한 것.


5. 지도자 2기, 2군 감독 시절[편집]


김용달 2군 감독이 2014 시즌이 끝나고 계약기간 만료로 물러나자 새 2군 감독이 되었다.

부임 후에는 육성 기조에 맞게 당장의 퓨처스리그 성적보다 각 개인의 기량을 점검하고 향상하고, 2군으로 내려간 선수들의 컨디션을 조절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후배이자 1군 감독인 김기태 감독과 소통을 하면서 2군 현황을 알려 주고, 필요에 따라 눈에 띄는 선수를 1군으로 올려보내면서 KIA 전력 강화의 숨은 공신이 되고 있다.기아도 이제 화수분 야구?

백용환(부상 복귀), 이정훈, 신범수, 한준수(2018년 1차 지명) 등 유례없이 2군 포수 자원이 많아져 김상훈 코치와 포수들을 가르치는데 주력하고 있다.

2017 퓨처스 올스타전에서 팀이 1위를 달리고 있는 가운데 소회를 담담하게 담은 인터뷰가 올라왔다.# 이 영상을 본 KIA 팬은 흔한 타이거즈 팬 아재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카메라를 보지 않고 얼짱 각도를 유지한다


5.1. 수석코치 승격[편집]


2017년 12월 7일 조계현 코치가 단장으로 승진 임명 되면서 후임 수석코치로 승격되었다.

6월 3일 선수들에게 허용됐던 반바지 복장을 분위기 쇄신을 이유로 금지했다. 팬들은 꼰대같다고 매우 깠다. 다만 LG 트윈스 감독시절부터 작년까지 반바지를 금지했던게 김기태이기 때문에 팬들의 여론이 안 좋아지자 정회열에게 반바지 금지 인터뷰하라고 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10월 4일 의문의 말소를 당했다.

10월 15일 미디어데이 이후 발표된 와일드카드 결정전 엔트리에서도 코치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10월 19일 선수및 코치진 정리기사에 명단이 포함되어 방출되었다. 무식한 사람이 권력을 쥐게되면 이렇게 무섭습니다. 김기태 감독과 모종의 갈등이 있지 않았나 추정된다. 당장 단순 갈등이었다면 프런트 직으로 돌려도 되었을 사람을[7] 이런식으로 내보낸다는 것 자체가 의심스러운 일이다. 구단에서 김기태의 파워가 강력해 이러한 전횡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추정의 신빙성은 더더욱 심화된다.

6. 기타 사항[편집]


  • 프로필에서도 보듯 원래는 염경엽 SK 단장과 같은 또래이고, 같은 해 충장중학교에 입학했으나, 프로 입단은 염경엽보다 1년 빨랐다. 이는 염경엽이 중학생 시절 유급한 적이 있었기 때문. 대학도 정회열은 연세대, 염경엽은 라이벌인 고려대를 다녔다.
  • 2군 코치 시절 당시 경희대 야구부 투수 인스트럭터에게 KIA 입단을 제안했는데, 이 선수가 바로 최영필이다.
  • 둘째 아들 정해영 군이 광주일고 2학년에 재학 중이며, 포지션은 투수, 3루수, 1루수이다. 동성중학교 시절 대통령기 전국중학야구대회 우승을 이끈 에이스 투수이자 중심타자로 활약했었다. 2018년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3학년 에이스 조준혁과 함께 마운드를 지키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내년과 내후년의 활약에 따라 결정되겠지만 만약 정해영 군이 2020년 드래프트에서 1차 지명을 받는다면, 부자가 한 팀의 1차 지명을 받은 KBO 리그 최초의 사례로 기록될 전망이다.[8][9]

7. 역대 성적[편집]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0
해태 타이거즈
74
202
0.257
52
10
1
3
26
19
1
13
.361
.300
1991
89
193
0.238
46
6
1
6
26
24
2
25
.373
.324
1992
97
214
0.276
59
10
1
7
46
28
3
19
.430
.331
1993
117
345
0.275
95
14
1
7
35
33
0
21
.383
.316
1994
80
271
0.236
64
8
0
8
34
22
0
13
.354
.266
1995
8
14
0.143
2
1
0
0
0
0
0
0
.214
.143
1996
59
103
0.184
19
4
0
3
11
12
0
19
.311
.307
1997
11
9
0.000
0
0
0
0
0
0
0
1
.000
.100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8
삼성 라이온즈
39
61
0.262
16
2
0
0
8
2
0
6
.295
.319
1999
47
89
0.180
16
3
0
2
14
6
1
7
.281
.235
KBO 통산
(10시즌)
621
1501
0.246
369
58
4
36
200
146
7
124
.362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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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6학번[2] 주전을 차지하기 전인 1992 시즌 플레이오프까지는 우익수로 종종 나왔다.[3] 고교 - 대학 동기인 이호성도 같이 2순위 지명받아 입단했다. [4] 프로야구 매니저에서는 수비S랭크까지는 못찍지만 외야 수비가 가능하다.[5] 더군다나 1996년 한국시리즈 2차전 때 번트 실패로 김응용 감독한테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6] 김영진, 김지훈, 정회열, 김광현이 주전 포수 경쟁을 했으나, 1999시즌 중 트레이드로 영입한 진갑용이 주전 포수가 되었다.[7] 당장 스카우터로서의 능력은 제대로 보여주었기 때문에 스카우터로 돌렸으면 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크다. 15 16 드래프트 픽도 그렇고 2014시즌 시작 전 최영필을 데려온것만 하더라도 스카우터로서의 능력은 이미 충분히 증명된 인물이다.[8] 다들 알겠지만 KBO 리그 사상 최초 부자(父子) 1차 지명은 이종범-이정후의 사례다.[9] 사실 이전에 부자가 같은 구단에 1차 지명을 받은 경우는 삼성 라이온즈원민구-원태인의 경우가 있지만, 원민구 씨가 1차 지명을 받았을 당시에는 지금처럼 1명만 지명하는게 아닌 여러 명을 지명했었고 원민구 씨는 삼성에 입단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