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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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식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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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식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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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lgv1.pn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90

파일:삼성 라이온즈 우승 엠블럼 V2.svg파일:삼성 라이온즈 우승 엠블럼 V3.svg파일:삼성 라이온즈 우승 엠블럼 V4.svg파일:KIA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11.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코치

2002
2005
2006
2017







MBC 청룡 / LG 트윈스 등번호 20번
정순명
(1983~1984)

박흥식
(1985~1993)


김선진
(1995~2000)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3번
장형석
(1995)

박흥식
(1996~2007)


나가시마
(2009)
KIA 타이거즈 등번호 73번
박승호
(2004~2007)

박흥식
(2008)


이건열
(2009~2012)
넥센 히어로즈 등번호 86번
결번

박흥식
(2011)


정수성
(2014~2016)
넥센 히어로즈 등번호 76번
정인교
(2009~2010)

박흥식
(2012)


이근엽
(2013)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71번
이강돈
(2010~2012)

박흥식
(2013~2014)


구동우
(2015~2017)
KIA 타이거즈 등번호 73번
이명수
(2013~2014)

박흥식
(2015~2020)


정명원
(2021~2023)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81번
마인홀드
(2022~2022.6.23.)

박흥식
(2022.8.27.~2022)


최경철
(2023)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76번
김동욱
(2022)

박흥식
(2023)


결번




박흥식
朴興植|Park Heung-sik

출생
1962년 1월 5일 (62세)
경상북도 칠곡군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대구초 - 대구중 - 신일고 - 한양대
포지션
외야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85년 1차 지명 (MBC)
소속팀
MBC 청룡-LG 트윈스 (1985~1993)
지도자
타코마 레이니어스[1] 연수코치 (1994~1995)
삼성 라이온즈 1군 타격코치 (1996~2000)[2]
삼성 라이온즈 2군 타격코치 (2000)[3]
삼성 라이온즈 1군 타격코치 (2001~2006)
삼성 라이온즈 2군 타격코치 (2007)
KIA 타이거즈 1군 타격코치 (2008)
타코마 레이니어스 연수코치 (2009)
영남대학교 야구부 타격 인스트럭터 (2010)
넥센 히어로즈 2군 감독 (2011)
넥센 히어로즈 1군 타격코치 (2012)
롯데 자이언츠 1군 타격코치 (2013~2014)
KIA 타이거즈 1군 타격코치 (2015~2017)
KIA 타이거즈 2군 감독 (2018~2019)[4]
KIA 타이거즈 감독대행 (2019)[5]
KIA 타이거즈 2군 감독 (2020)
대구고등학교 야구부 인스트럭터 (2020)
경북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2021)
롯데 자이언츠 2군 타격코치 (2022)[6]
롯데 자이언츠 1군 수석·타격코치 (2023)[7]
롯데 자이언츠 1군 타격코치 (2023)[8]
병역
예술체육요원[9]
본관
밀양 박씨

1. 개요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4. 여담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前 야구 선수이다.

MBC 청룡-LG 트윈스에서 활약한 원클럽맨으로, 1990년 한국시리즈 우승멤버이기도 하다.

김무관과 함께 2000년대 이후 타격코치의 대표격으로 인식된 인물이었다. 한때는 이승엽의 스승이라는 타이틀에 비해 다소 침체기에 빠져 있었으나, 미국 연수 이후 출루와 장타를 중시하는 메이저리그식 공격 스타일을 공 맞히기에 급급하던 한국 프로야구에 전파하며 타격코치로서의 부활에 성공하였다.

2. 선수 경력[편집]



2.1. 아마추어 시절[편집]


경상북도 칠곡군 출신으로 대구광역시에서 중학교까지 졸업했지만 여담 문단에서 후술할 집안 사정으로 인해 서울특별시신일고등학교로 진학했다.

2.2. MBC 청룡-LG 트윈스[편집]



파일:external/imgnews.naver.net/151605344_ddddd.jpg


한양대학교 졸업 이후 MBC 청룡의 1차 지명 신인으로 입단하여[10] MBC 및 LG 트윈스에서 뛰었다. 전형적인 똑딱이, 쌕쌕이였고, 잘 할 때에는 고정 1번타자로 좋은 모습을 보였다. 그의 리즈 시절은 1987~88년으로 2년연속 3할을 기록하였으며, 1987년에는 3루타 1위(9개)를 차지한 적도 있다.

그러나 1989 시즌 타율 .222의 초라한 성적을 남긴 박흥식은 은퇴와 동시에 가족이 있는 미국으로 이민할 계획을 세웠지만, 이듬해인 1990년 봄 LG 트윈스 감독으로 부임한 백인천의 부름을 받고 은퇴를 철회했다. 그리하여 LG가 1990년 한국시리즈를 제패하는 데 공을 세우기도 했다.


파일:1990 LG 박흥식.png

1990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의 박흥식. 1번 타자로 나왔고 이 타석에서 안타를 쳤다.

이후 1993년까지 선수로 뛰었지만 고질적인 허리 부상으로 인해 32세라는 젊은 나이로 은퇴하였다.


3. 지도자 경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박흥식(야구)/지도자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여담[편집]


  • 대구중학교 시절 야구에 제법 소질을 보이던 박흥식이었지만, 그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가족이 모두 미국으로 이민을 가기로 결정하면서 박흥식은 마음 한 편으로 '미국에서도 야구를 할 수 있을까' 라는 걱정 속에 이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신일고등학교한동화 감독이 박흥식의 아버지를 찾아와 "아들을 저에게 맡겨 주시면 훌륭한 선수로 키워 보겠다"[11] 라며 그를 신일고로 전학시켜달라고 간청했다. 아버지는 처음에 반대했지만 한국에 혼자 남더라도 야구선수로 열심히 뛰겠다는 박흥식의 결심에 어쩔 수 없이 아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렇게 박흥식의 가족은 미국으로 건너갔고, 한국에 홀로 남은 박흥식은 한동화 감독의 집에 기거하면서 고등학교 생활을 보냈다.

  • 신일고등학교 재학 시절, 미국으로 간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이 사무칠 때 마다 박흥식은 슬픈 감정을 달래려 크림빵을 먹었고, 주변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고 박흥식에게 빵식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고 한다.

  • 프로 은퇴를 전후로 두번이나 가족들이 사는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지만, 그 때마다 스승 백인천의 부름으로 다시 KBO 리그에 돌아왔다. 제시된 내용은 약간 달라도 백인천이 박흥식을 부른 말은 둘 다 거의 같았다고 한다.

1989 시즌 후 은퇴를 선언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형님의 세탁소 일을 돕고 있던 박흥식에게 LG 트윈스의 창단 감독으로 부임한 백인천이 전화를 걸었다.
백인천. 빵식아, 요새 뭐하냐?
박흥식. 네 감독님, 세탁소 하고 있습니다.
백인천. 야 이놈아 세탁소는 아무나 하는 줄 알아? 당장 짐 싸서 한국으로 건너와라. 나랑 같이 뛰자.
박흥식. ...알겠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 선수 생활을 계속하겠다는 남편의 말에 아내는 결사 반대했지만 박흥식은 아내 몰래 혼자서 한국행 비행기를 탔고, 미국의 아내에게 전화로 미안하다고 하자 아내는 어쩔 수 없으니 열심히 잘 하라며 격려했다고 한다.
이후 선수생활을 완전히 마감한 박흥식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세탁소를 경영하던 중, 1996년 삼성 라이온즈애리조나 스프링캠프를 방문했다가 백인천 감독과 다시 조우하였다.
백인천. 빵식아, 요새 뭐하냐?
박흥식. 네 감독님, 세탁소 하고 있습니다.
백인천. 야 이놈아 세탁소는 아무나 하는 줄 알아? 당장 짐 싸서 한국으로 건너와라.
박흥식. 저 은퇴한 지 3년이나 됐는데요?
백인천. 누가 선수로 뛰래? 이번엔 코치야. 나랑 같이 뛰자.
박흥식. ...알겠습니다.

박흥식이 또다시 한국행을 선언하자 아내는 자식 교육도 생각하라며 만류했지만, 결국 백인천의 호출을 받아들여 귀국한 박흥식은 한동안 KBO 리그에서 명 타격코치로 이름을 남겼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겠지만 여러모로 백인천의 안목이 오늘날의 명코치 박흥식을 만들어낸 셈이다.

  • 소대수캐스터와 김동영 스타뉴스 기자가 진행하는 <오! 마이 타이거즈> 방송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박흥식 감독대행 부임 이후 선수들에게 팬들을 위하여 싸인을 잘 해주라고 이야기했다 한다. 배신감을 가지면 야구장에 안 오는 팬들이 나올 수 있다고 했으며, 오늘날의 팬 서비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KIA 타이거즈 감독대행 시절에 안 좋았던 팬 서비스를 개선시켜주기까지 했었다.

5. 관련 문서[편집]


[1] 시애틀 매리너스 산하 트리플A[2] ~6월 4일[3] 6월 5일~[4] ~5월 16일[5] 5월 17일~[6] 8월 24일~[7] ~6월 26일[8] 6월 27일~[9] 1983년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우승 출처[10] 서울특별시 출신이 아님에도 서울팀의 1차 지명 신인이 된 것은 그가 고등학교를 서울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이 당시에는 타지역 전학생의 1차 지명 금지 조약이 없었다.[11] 물론 한 감독의 집에서 숙식 일체제공이라는 조건이 붙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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