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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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영화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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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1.svg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2.svg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3.svg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4.svg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5.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83
1986
1987
1988
1989


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6.svg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7.svg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8.svg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9.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코치
1991
1993
1996
1997





{{{#fff [[해태 타이거즈|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5번}}}
팀 창단

차영화
(1982~1989)


홍현우
(1990~2000)
{{{#fff [[해태 타이거즈|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36번}}}
신태순
(1985~1987)

차영화
(1990~1995)


최희창
(1996~1998)
해태
/
KIA 타이거즈 등번호 76번

결번

차영화
(1996~2005)


이광우
(2006~2009)
KIA 타이거즈 등번호 82번
이케우치
(2005)

차영화
(2006~2013)


타케시
(2015~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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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영화
車榮華 | Cha Younghwa

출생
1957년 6월 27일 (66세)
광주광역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광주서림초 - 전남중 - 광주제일고 - 동신전문대
포지션
내야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2년 해태 타이거즈 창단멤버
소속팀
롯데 자이언트 (1976~1981)
해태 타이거즈 (1982~1989)
지도자
해태 타이거즈 1군 수비코치 (1990~1996)
해태 타이거즈 2군 수비코치 (1996)[1]
해태 타이거즈 1군 수비코치 (1996~1999)[2][3]
해태 타이거즈 감독대행 (1999)[4]
해태 타이거즈 1군 수비코치 (1999~2000)[5]
광주충장중학교 야구부 감독 (2001~2004)
KIA 타이거즈 2군 감독 (2006~2007)[6]
KIA 타이거즈 1군 주루·작전코치 (2007)[7]
KIA 타이거즈 2군 감독 (2008~2009)
KIA 타이거즈 3군 야수코치 (2010)
KIA 타이거즈 3군 총괄코치 (2011~2013)

1. 개요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2.2. 프로 경력
3. 지도자 경력
3.1. 불의의 낙상사고 후 근황
4. 기타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해태 타이거즈의 우투우타 내야수. 해태의 원년 멤버이자, 원년 골든글러브 2루수 수상자[8]다. 은퇴 이후 해태-KIA 한 팀에서만 23년간 코치를 하다가 불의의 낙상 사고를 당해 투병 중이다.

2. 선수 경력[편집]



2.1. 아마추어 시절[편집]


광주일고에 다니던 그는 고교시절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하다가 1976년 실업구단 롯데 자이언트에 입단하게 된다. 1977년 전지훈련에서 롯데 오리온즈의 감독인 가네다 마사이치의 관심을 받기도. 이후 프로 입단 전까지 올스타전에 여러 번 출전도 하고 국제대회서 활약하기도 하였다.


2.2. 프로 경력[편집]



그렇게 실업야구 생활을 하다가 프로 원년에 고향팀인 해태 타이거즈에서 뛰게 되었다.

1989년까지 내야를 골고루 보며 상당히 매끄러운 수비를 보여주면서 육군 경리단 야구부 시절부터 키스톤 콤비를 이뤘던 유격수 서정환과 함께 해태에서도 센터라인을 담당하였고[9] 수비율로만 뽑았던 원년 KBO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기도 했었다. 타격으로는 평균 이하의 똑딱이 타자로, 주로 김일권이순철의 뒤를 받쳐주는 2번과 9번을 맏았다. 종종 찬스에 강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해태의 5회 우승에 힘을 보탠 후 1989년에 은퇴를 선언한다.


3. 지도자 경력[편집]


은퇴 이후 1990년부터 해태 타이거즈의 코치로 선임되면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주로 수비, 작전, 주루코치를 맡다가[10] 2000년 시즌 후 김응용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 옮겨가고 1년 후배 김성한이 신임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재계약에 실패해 팀을 떠났다. 잠시 팀을 떠나있던 시절에는 광주 충장중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았다.[11]

이후 2006년 시즌을 앞두고 왕년의 키스톤 콤비였던 서정환KIA 타이거즈 새 감독에 취임하자 그의 부름을 받고 5년만에 다시 KIA 유니폼을 입게 되었고, 2군 감독 겸 수비코치를 맡았다. 2007 시즌 초반 잠시 1군에 올라와서 주루, 작전 코치를 맡다가 다시 2군 감독으로 돌아갔고, 2009 시즌까지 2군 감독을 맡다가 2010 시즌부터는 3군 총괄코치를 지내게 되었다.[12]


3.1. 불의의 낙상사고 후 근황[편집]


이렇게 3군 총괄코치를 하던 2013년도에 큰 부상을 입었는데, 10월 4일 낙상사고로 경추골절상을 입었다. 선수단과 팬들은 이런 날벼락 같은 소식에 혼란을 겪으면서도 선수단은 아직 재활중인 김동재 코치를 겸해서 돕는 일일호프 행사를 열기도 했다. 2013년 12월 즈음 소식에 따르면 눈만 깜빡이다 손도 조금씩 움직인다고 한다. 이듬해 2014년에도 차영화 전 코치를 돕는 일일 호프 행사를 열었는데 소식에 따르면 아직도 투병 중이라는 듯.

2016년 9월 초, 한국프로야구은퇴선수협회에서 투병중인 차영화와 김동재 전 코치를 병문안 했다는 기사가 떴는데, 안타깝게도 아직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2019년에도 병상이 있다는 기사만 떴다.#

4. 기타[편집]


  • 야구계 사람들 말에 따르면 선수, 코치생활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단 한 번도 언성을 높인 적이 없다고 한다.[13] 그래서 2, 3군 선수들은 그를 아버지처럼 따랐다고 한다. 사고 소식에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고.

  • 해태 타이거즈 이름으로 우승한 9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모두 경험해 본 사람 중 하나다. 선수로써 1983년, 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 총 5번의 우승을, 은퇴 후 코치로써 1991년, 1993년, 1996년, 1997년 4번의 우승을 더 경험해보며 해태의 9회 우승 당시 모두 이름을 올렸다.[14] 어찌보면 해태 역사의 산 증인 중 하나인 셈.

  • 실업팀 롯데에서 6년 동안 선수생활을 한 것을 빼면 광주광역시를 떠나본 적이 없는 광주 토박이고, 마찬가지로 실업팀 시절을 제외하면 한 번도 타이거즈 유니폼 외 타 구단 유니폼을 입어보지 않은 타이거즈 순혈이다. 바다 건너 모 구단골품제로 비교해보면 거의 성골에 속한다.

  • 1999년 5월 29일, 김응용 감독이 장진범 심판을 폭행하고 12경기 출장정지 처분을 받자 당시 코치였던 차영화는 그 해 5월 30일부터 6월 10일까지 진행된 10경기 동안 감독대행을 하여 8승 2패의 좋은 성적을 거둔 이례적인 기록이 있다.[15]

  • 해태 코치 시절 1990년대 중반에 함평에 사비를 들여서 훈련장을 지을 생각이었다고 한다. 비록 무산되었지만 시간이 흘러서 함평-KIA 챌린저스 필드가 지어지면서 매우 좋아했다는 후문이다.

  • 아들 차정구도 야구선수였지만, 프로 지명은 받지 못했고 2006년 삼성 라이온즈신고선수로 입단했다가 1년만에 방출되었다. 2012년에 KBO 심판이 되었다. 그의 광주일고 동기로는 김성계, 모창민이 있었다.


  • 방수원의 KBO 최초 노히트노런 당시 2루 베이스 옆을 통과하려는 타구를 다이빙캐치하여 극적으로 아웃으로 연결하여 노히트 기록이 깨질뻔 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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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월 24일[2] 1996년 6월 25일~1999년 5월 21일[3] 2001 한국프로야구 인명록 참조.[4] 5월 22일~6월 4일[5] 6월 5일~[6] ~6월 17일[7] 6월 18일~[8] 원년에는 골든글러브를 오로지 수비율과 수비평가로만 선정했다.[9] 포수는 김무종, 중견수는 김일권이 주로 맡았다.[10] 특히 3루 주루코치로 오랫동안 일했다. 1990년대 해태 왕조 시절의 영상을 보면 3루 코처스 박스에서 열심히 사인을 보내고 팔을 돌리는 사람으로 차영화가 등장한다.[11] 이 시절 키워낸 대표적인 제자가 다름아닌 두산 베어스허경민인데, 인터뷰에서 1~2학년 때 차영화 감독 밑에서 강도높은 기본기 훈련을 받아 자신이 성장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12] 원래는 구단에서 2010 시즌부터 2군 수비코치로 기용할 방침이었지만 3군이 신설되면서 그냥 3군 총괄코치로 눌러앉게 되었다.[13] 1980~1990년대 해태 타이거즈가 선후배간 엄격한 규율과 강한 군기, 구타와 폭력으로 유명한 팀이었고 이 분위기가 2000년대 초반까지 남아있던 걸 생각해 보면 특이한 케이스다.[14] 이게 얼마나 대단한 기록이냐면, 선동열, 이순철, 조계현, 이강철, 이종범 등 해태를 대표하던 간판급 선수들도 해보지 못한 기록이다.[15] 유남호는 20경기 출장정지 및 제재금 3백만원, 김응용은 12경기 출장금지 및 제재금 2백만원, 장진범은 10경기 출장금지 및 제재금 1백만원의 징계를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