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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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군》
70 김태균 · 71 이강철 [[감독#s-1.1|

]] · 72 김강 · 75 장재중
· 76 박기혁 · 82 제춘모 · 84 최만호 · 87 전병두
· 92 유한준 · # 김호'''
《2군》
74 홍성용 · 77 김태한 · 79 이준수 · 80 박정환
· 86 김연훈 · 90 조중근

《육성/재활군》
85 이성열 · 89 백진우 · 91 배우열 · # 곽정철

코칭스태프투수포수내야수외야수군입대선수등록선수
다른 KBO 리그 팀 명단 보기



이강철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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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철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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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4etEfi.png파일:wuokE4a.png파일:Ii0lZeU.png파일:PccoW9i.png파일:XmLbTVV.pn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89
1991
1993
1996
1997

파일:external/oi63.tinypic.com/244s6lk.pn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 코치

2009

파일:2021시즌 kt wiz 한국시리즈 챔피언 우승 엠블럼.pn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 감독

2021

파일: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 로고.svg
2018 자카르타 • 팔렘방 아시안게임 야구 종목
금메달(코치)

2018

파일:KBO 로고(세로형, 2013~2021).svg KBO 한국시리즈
1996 한국시리즈 MVP




보유 기록
10년 연속 10승
1989년~1998년
10년 연속 100탈삼진
1989년~1998년[1]


이강철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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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19번
김만후
(1987~1988)

이강철
(1989~1999)


박충식
(2000~2001)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6번
이복연
(1998)

이강철
(2000~2001.7.29.)


이준호
(2002)
해태
/
KIA 타이거즈 등번호 13번

성영재
(2000.6.2.~2000)

이강철
(2001.7.30.~2001)


홍찬영
(2002~2004)
KIA 타이거즈 등번호 19번
박충식
(2000~2001)

이강철
(2002~2005)


신용운
(2006~2007)
KIA 타이거즈 등번호 72번
박창영
(1995)

이강철
(2006~2007)


장재중
(2008~2011)
KIA 타이거즈 등번호 77번
김태룡
(2006~2007)

이강철
(2008~2012)


김종국
(2013~2014)
넥센 히어로즈 등번호 89번
결번

이강철
(2013~2016)


박도현
(2017~)
두산 베어스 등번호 71번
문동환
(2013~2016)

이강철
(2017~2018)


이도형
(2019~)
kt wiz 등번호 71번
이숭용
(2014~2018)

이강철
(2019~)


현역


A대표팀 참가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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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023 kt 이강철 감독.jpg

{{{#ffffff '''kt wiz No.71 [[감독#s-2|

]]'''
이강철
李强喆[* 李强
에서 개명하였다.] | Lee Kang-Chul
출생
1966년 7월 12일[1] (57세)
광주광역시 북구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광주서림초 - 무등중 - 광주제일고 - 동국대
신체
180cm, 78kg
포지션
투수
투타
우언우타
프로입단
1989년 1차 지명 (해태)
소속팀
해태 타이거즈 (1989~1999)
삼성 라이온즈 (2000~2001)
해태-KIA 타이거즈 (2001~2005)[2]
지도자
KIA 타이거즈 2군 투수코치 (2006~2007)[3]
KIA 타이거즈 1군 투수코치 (2007~2009)[4]
KIA 타이거즈 1군 불펜코치 (2010)[5]
KIA 타이거즈 1군 투수코치 (2010~2011)[6]
KIA 타이거즈 1군 불펜코치 (2012)[7]
KIA 타이거즈 1군 투수코치 (2012)[8]
넥센 히어로즈 1군 수석·투수코치 (2013~2014)[9]
넥센 히어로즈 1군 수석코치 (2014~2016)[10]
두산 베어스 2군 투수코치 (2017)[11]
두산 베어스 2군 감독 (2017)[12]
두산 베어스 1군 수석·투수코치 (2018)
kt wiz 감독 (2019~)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투수코치 (2017~2018)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2023)
계약
2021 - 2023 / 20억원[13]
2024 - 2026 / 24억원[14]
연봉
5억원 (2023년)
종교
개신교(예장통합)[15]
상훈
체육훈장 백마장

1. 개요
2.1. 평가
3. 피칭 스타일
4.1. 지도자 주요 성적
5. 감독 스타일
5.1. 투수진
5.2. 야수진
6. 논란 및 사건 사고
6.1. 202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귀국 인터뷰 중 발언
7. 여담
8. 관련 문서
9.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야구선수 출신 감독. 선수 시절 해태 타이거즈, 삼성 라이온즈, KIA 타이거즈의 투수로 활약했으며, 은퇴 후 코치 생활을 거쳐 2019년부터 kt wiz 감독을 맡고 있다. 202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감독도 겸임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조범현과 함께 트리플 크라운 달성 감독이다. 해태 타이거즈 왕조 시절 우승을 이끌고 1996년 한국시리즈 MVP까지 받았으며, 2009년 한국시리즈에서는 타이거즈의 투수코치로 V10을 이끌었고, 선동열호/2018년에서 투수코치를 맡아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에서 우승을 견인했으며, 2021년 한국시리즈에서는 강철매직으로 kt의 첫 우승까지 이끌었다.

현재 2023 시즌 기준 KBO 리그 최고령 1군 감독이자 유일하게 1980년대에 현역 KBO 리그 선수 경험이 있는 감독이다.

2. 선수 경력[편집]


이강철의 선수 경력
통합 선수 경력 : 이강철/선수 경력
파일:KBO 리그 로고(1982~2012).svg
해태 시절
삼성 시절
KIA 시절

2.1. 평가[편집]


동시대에 해태에서 함께 뛰었던 선배 선동열, 동기생 조계현, 그리고 후배 이대진임창용 등이 보다 많은 주목을 받으면서 본의 아니게 2인자로 인식되었다. 심지어 1996년 한국시리즈에서는 프로 선수로서 본인의 유일한 공식 수상이었던 한국시리즈 MVP로 선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4차전에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현대 정명원이 스포트라이트를 차지하는 웃지 못할 일마저 벌어졌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지만, 이강철이 선수 시절에 거둔 기록들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한국시리즈 우승 5회에 1996년 한국시리즈 MVP 경력과 위의 프로야구 사상 유일한 10년 연속 두자릿수 승과 3자릿수 탈삼진은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 기록. 10년 연속 3자릿수 탈삼진만 해도 역시 굉장한 기록인데 2017년 장원준이 타이를 기록하기 전까지 리그에서 유일한 사례였다. 조계현과 이강철이 우위가 갈리는 시즌이 뚜렷한데,(1989~92는 이강철 우세, 1993~96은 조계현 우세, 이후 다시 이강철 우세) 탈삼진에서만큼은 이강철이 조계현에 한 번도 밀리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2023년 기준 통산 다승 5위, 통산 이닝 4위, 통산 삼진 3위, 통산 sWAR 8위, 통산 완투 6위, 통산 완봉 5위 등, 양적 통산성적에 관련해서는 KBO 리그에서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대선수임에 분명하다.

어떻게 보면 이강철은 단순한 기록의 비교 뿐 아니라 선동열을 중심으로 했던 1980년대 말~90년대 초반 해태의 마운드 운영으로 손해를 본 셈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기껏 선발로 나와 잘 던지다가 5회 아웃카운트 1~2개만 남기고서 흔들린다 싶으면 바로 선동열로 교체해 승수를 챙기지 못하는 경우도 꽤 잦았다. 그런 와중에 얻은 승수는 많았지만 한국시리즈 MVP를 차지했던 1996년을 제외하면 큰 경기에서 타자를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부족해서 팬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주지 못한 것도 있으며,[16] 정작 시즌 최다승을 기록한 1992년과 이종범의 일본진출과 모기업의 몰락으로 해태가 망하기 시작한 1998년을 제외하면 그가 팀 내 최다승을 거두지 못해 팬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점이 떨어졌던 것도 있다. 또한 선동열이나 조계현, 이대진보다 비교적 피홈런도 많았던 선수였기 때문에 더욱 선입견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선동열을 제외하더라도, 1990년대 타이거즈를 함께 지탱했던 조계현의 1993~1996년과 이대진의 짧고 강했던 전성기인 1995~1998년, 임창용이 해태에서 짧고 강하게 맹활약했던 1997~1998년이 워낙 좋았던 점도 있었다. 선동열이 부상으로 이탈했던 1992년에는 팀내 최고 에이스 자리를 맡았지만 데뷔시즌부터 4년 평균 200이닝이 넘는 혹사를 당한 여파인지 1993~96년에는 조계현에게 확실히 밀렸고, 그때 조계현은 4년간 60승을 거두고, 당시 2년간 왕좌를 양분하였던 LG 트윈스에게 12연승[17]을 거두며 절대 에이스로 자리매김한 것도 있다. 거기에 1995년부터 기량이 만개해 4년간 평균 2점대 방어율에 59승을 쌓으며 탈삼진 1위를 2번이나 석권하고 1998년 10타자 연속 탈삼진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이대진의 활약이 너무나도 커 사실상 1997년, 1998년 해태 타이거즈의 1선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타이거즈의 에이스 호칭을 이대진에게 내주는 등 2인자 이미지가 굳어진다.[18]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10승과 150이닝, 100삼진을 꾸준히 챙기며 선발진의 한 축을 맡아 1990년대 타이거즈 왕조에 큰 역할을 했던 스타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1990년대에 이강철은 프로 입단 동기인 송진우와 라이벌 구도가 있었다. 위에서 언급했듯 입단 당시 송진우가 신인 최고 계약금을 받았다고 이강철도 같은 금액으로 부풀려 발표했었고,1992년에는 송진우와 다승왕 경쟁을 했는데, 김영덕 감독의 노골적인 다승왕 만들어주기를 등에 업은 송진우에게 아쉽게 패한다.[19] 본인이 회상하길 처음에는 담담하게 받아들이려고 했지만 사람들이 아깝다고 얘기를 하니 허탈하고 눈물도 나고 그랬다고.[20] 그 해에 최다 탈삼진을 기록했지만 1992년 당시에는 탈삼진 타이틀이 없었고, 그 다음 해인 1993년에 탈삼진 타이틀이 신설된지라 타이틀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또 12년 뒤 선동열의 통산 최다 탈삼진을 경신했지만 그마저도 송진우에 의해 깨지고 말았다. 이후 2022년 팀 후배인 양현종이 이강철의 기록을 또 경신한다.

송진우 뿐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전성기를 구가했으며 똑같이 16시즌을 뛰었고, 꾸준하게 선발 로테이션을 지켰던 정민철과 비교되는 경우가 많은데, 대체적으로 누적 스탯은 정민철이(sWAR 정민철 60.02 이강철 50.75), 비율 스탯은 이강철이(스탯티즈 기준 ERA+ 정민철 117.9 이강철 123.8) 각각 우세한 면을 보인다. 그러나 다른 누적스탯인 탈삼진에선 이강철이 (1749 vs 1661), 비율스탯인 FIP+에서는 정민철이(스탯티즈 기준 정민철 116.3 이강철 109.2)각각 우세한 면을 보인다. 이러한 점을 전반적으로 고려해본다면 비슷해 보이지만 WAR에서 명백한 차이를 보이고 있으므로 정민철의 근소 우위라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세이버 스탯으로 가지 않아도 정민철은 90년대 당시 선발투수 중 평균자책점 1위(2.80)에 해외진출까지 성공했다는 점도 고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3. 피칭 스타일[편집]




선동열의 별명이 무등산 폭격기였다면, 이강철의 별명은 "무등산 핵잠수함"이었다. 특유의 물 흐르는 듯한 부드러운 투구폼으로 당시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언더핸드 투수로 유명했다.

전성기 시절 빠르지 않은 130km/h 중후반대의 구속을 가지고 있었지만, 당시 해설자들의 단골 레퍼토리가 '이강철의 속구가 속도는 느리지만 우완 정통파 투수의 140km/h대 패스트볼 이상의 위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을 정도로 속도에 비해 위력적인 속구를 뿌렸다. 이강철의 주무기는 떠오르는 패스트볼이었는데, 낮게 깔려서 오다가 대략 포수 머리 근처 또는 약간 높은 정도의 범위에서 형성되었다. 당시에는 이 볼이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제대로 들어가면 타자는 맞히기도 어려운 마구급 구질이었지만, 반대로 홈런을 맞기도 쉬웠다. 또한 언더핸드답게 공 끝의 움직임이 상당히 변화무쌍했고, 커브와 슬라이더는 당대에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았던 구질들이었다. 특히 이강철의 주무기였던 슬라이더는 남아있는 영상을 보면 살짝 떠오르면서 우타자 바깥쪽이나 좌타자 몸쪽으로 예리하게 휘어져 들어가는데, 이강철이 선발로 오래 기용될 수 있었던 이유도 이 슬라이더가 당시 좌타자들에게 잘 먹혀 들어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외로 언더핸드 투수들의 주무기로 많이 이용되는 싱커는 별로 안 던졌는데, 많이 맞아나가서인지 당시 배터리를 이루던 장채근과의 상의 끝에 봉인했다고 한다. # 사실 이강철의 플레이 스타일이 삼진을 잡는 데 맞춰져 있어 땅볼 유도에 효과를 보이는 싱커를 쓸 필요는 크게 없었다. 그래도 별로 안 던졌다 뿐이지 주력 구종 중 하나였는데, 주로 삼진을 잡기 힘든 선수를 처리하거나 투구 패턴에 변화를 주기 위해, 혹은 체력 소모를 막기 위해 쓰곤 했다. 싱커 자체도 꽤나 훌륭했던지라 당시에도 최고의 싱커볼 투수로 정평이 나 있었다. 여기에 이강철은 완급조절에 있어서도 리그 수준급으로, 다른 타이거즈 에이스들에 비해 떨어지는 구위를 완급조절을 통해 커버하는 영리한 투구를 보여주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구위가 떨어지는 나이에도 선수로 뛰며 롱런할 수 있었다.

언더핸드 투수지만 땅볼을 유도하진 않았고, 슬라이더와 패스트볼의 변화각과 완급 조절을 이용해서 삼진을 많이 잡아내던 투수이기도 했다. 언더핸드 투수 중 이닝 대비 탈삼진율이 매우 높은 게 그 증거. 그래서 선동열, 정민철, 주형광처럼 괴물 같은 탈삼진 능력을 가진 투수들이 리그를 호령하던 1990년대에도 심심찮게 탈삼진 순위에 이름을 올리던 투수였고, 타이거즈 프랜차이즈 중 최다 탈삼진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통산 최다 탈삼진 기록을 갖고 있는 송진우보다 앞서 통산 최다 탈삼진 기록을 세웠다는 것은 특기할 점이다.[21]

다만 당시 대표적 홈런 공장장 중 하나가 이강철이었데, 통산 218개의 피홈런을 맞아 통산 3위에 올라와 있다. 투고타저 시기에 주로 활동했음에도 홈런공장장이라는 별명이 있었을 정도. 하지만 언더핸드는 투구폼 특성상 배팅볼로 던져주는 각도와 비슷한데다 구속도 다른 폼에 비해 느리다 보니 피홈런에 매우 취약하다. 이 때문에 이강철에 앞선 언더핸드 에이스였던 한희민 역시 8시즌 동안 104홈런을 맞아 홈런 공장장이라는 오명이 붙곤 했다. 더군다나 유독 이강철의 피홈런은 임팩트 있는 경우가 많아 더욱 그 이미지가 지워지지 않는 편이다. 김기태이승엽의 프로 커리어 첫 홈런을 허용했고, 2004년 준플레이오프에서 홍성흔에게 만루홈런을 맞고 나서는 빵 사건이 일어났다. 다만 피홈런이 많은 것은 그만큼 오래 뛰고 많이 던질 기회를 받았기에 그런 측면도 있다. 실제 이강철은 통산 이닝도 2204⅔이닝으로 KBO리그 3위이다. 간단히 말해 많이 던졌으니 그만큼 홈런 맞는 빈도수도 많았던 것이다. KBO 최다승, 최다 이닝 투수인 송진우가 최다패, 최다 피홈런 투수인 것과 비슷한 이치다.

4. 지도자 경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강철/지도자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1. 지도자 주요 성적[편집]


역대 감독 전적
연도
소속팀
경기수



승률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2019
kt wiz
144
71
71
2
.500
6위
-
2020
144
81
62
1
.566
2위
3위
2021
144
76
59
9
.563
1위[22]
우승
2022
140[23]
78
60
2
.563
4위
4위
2023
144
79
62
3
.560
2위
??위
통산
(5시즌)
716
385
314
17
0.551
우승 1회
준우승 2회
우승 1회

5. 감독 스타일[편집]


베테랑 선수들에 대한 존중과 신뢰를 바탕으로 선수의 기량을 끌어내는데 능하다고 평가받고 있다. 팀의 정신적 지주라 할 수 있는 유한준, 박경수과 끈끈한 신뢰 관계를 구축해 선수들의 성공적인 말년을 이끌어냈고, 키움 히어로즈에서 부진하고 있던 베테랑 박병호에게 꾸준한 믿음과 신뢰를 보내 다시 한 번 홈런왕 타이틀을 얻는 것에 일조했다. 또한 팀의 최고의 스타라 할 수 있는 강백호를 비롯한 선수들과 소통을 잘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이게 점점 기존 주전 야수, 불펜 투수들에 대한 집착으로 변질되면서 2022년부터는 역효과가 나고 있는 상황이다. 박경수가 2022년 이후 급격한 부진을 겪으며 역대 최악의 야수로 거듭났음에도 묵묵하게 주전으로 기용한 것이 대표적이다. 2023년에는 도저히 '베테랑 선호'라고 볼 수 없는 수준까지 변질되어 강박, 집착에 가까운 형태가 되었다. 이전부터 이강철의 큰 사랑을 받던 황재균이 파울타구로 발등 부상을 입고 내려간 후 팀이 부진하자,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선수를 주전 출장시켜 결국 부상을 악화시켜 다시 말소되는 결과를 낳았다. 3년 넘게 혹사시켰던 어린 신인 소형준도 부상이 낫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1군에 등판시켰다 결국 토미 존 수술로 2년 넘게 선수생활이 끊기게 만들었고, 김민수, 주권도 아직까지 이강철의 혹사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형편없는 대타기용과 투수교체는 덤. 특히 누가봐도 흔들리는 투수에게 이닝을 어거지로 더 맡겼다가 기껏 리드를 잡은 게임이 터져버리고 부랴부랴 어린 선수들을 "너희가 뭐라도 해서 아무튼 막아봐라." 식의 무책임한 교체로 자주 올려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곤 한다. 또한 인터뷰 스킬이 매우 좋지 않아 졸전 후 팬들의 속을 박박 긁어버리는 책임전가성 인터뷰가 자주 나온다. 인터뷰 관련해선 정말 종잡을 수가 없는 캐릭터인 것이 아무런 필터링 없이 머릿속에 있는 생각 그대로를 뱉는 스타일인지라 상황에 따라 팬들을 열받게 하다가도 어이없는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야구 스타일 자체는 빅볼보다는 지키는 야구인 스몰볼을 지향한다. 문제는 교체가 매우 좋지 않고 부진한 주전 선수에 대한 신뢰가 지나치다 보니 득점권 타율이 매우 낮고 실점을 최소화해야 하는 팀 컬러에서 늑장 투수 교체로 실점을 불려버린다는 것. 스몰볼을 추구하는 만큼 작전을 매우 자주 내는 감독으로 정평이 나있으며 팬덤 내에선 비판 여론이 있는 편이다. 이강철의 작전은 성공률도 낮고[24] 상황을 고려하지 않으며[25] 너무 뻔할 정도로 기계적이라는 평. 안 그래도 kt의 타격은 아주 좋은 편이 아닌데 누가 봐도 뻔한 작전까지 곁들여지니 기껏 잡은 득점 찬스를 허무하게 날리는 장면이 너무 잦다. 그 유명한 강백호 3중살도 사실은 이강철의 무리한 작전이 원인이었다.

5.1. 투수진[편집]


우선 선발진에서는 전임 김진욱 감독 시절 트레이드로 데려온 배제성의 가능성을 보며 2019년에 선발 수업하며 선발 첫 시즌에 10승을 기록하며 성공적으로 안착시키고,[26] 2020년 신인왕 소형준 역시 kt의 대표적인 토종 선발로 안착시키고, 2021년에는 군에서 돌아온 고영표를 리그를 대표하는 사이드암 투수로 안착시키는가 하면 엄상백 역시 상무를 폭격한 이후 돌아와 준수한 성적을 기록하며 kt의 토종 선발진을 풍족하게 만들었고, 마침내 2022년 엄상백은 선발 로테이션의 당당한 한 축으로 자리매김하여 10승 투수로 거듭났다. 또한 그의 재임 기간 내내 함께한 외국인 투수 듀오 오드리사머 데스파이네, 윌리엄 쿠에바스 역시 kt에서 좋은 성적을 기록하며 2021년 리그에서 선발 QS 1위를 기록한 원동력이 되었다. 때로는 불펜으로 강등시키겠다거나 기본이 전혀 안 되어있다는 등 쓴소리를 하기도 했지만, 이내 컨디션을 회복하면 마음껏 칭찬해주면서 선수단 장악에도 합격점을 받았다.[27] 덕분에 이전까지 제대로 된 선발진 확보 자체가 어려웠던 kt가 그의 재임기 내내 안정적으로 5선발 체제를 구축, 심지어 한 명이 부상당해도 대체 선발들이 준수하게 던져주며 KBO에서 가장 풍부하고 강력한 선발진을 갖추게 되었다.

불펜에서도 이강철 재임 전까지 배팅볼 투수에 머물렀던 주권, 뚜렷한 좌완투수가 부족한 팀에서 2차 드래프트를 통해 다시 데려온 조현우, SK에서 트레이드로 온 베테랑 전유수, 2차 드래프트로 영입한 이보근(2020 시즌 한정), 유원상(2020 시즌 한정), 롯데에서 트레이드로 데려온 박시영 등이 모두 이강철 체제에서 준수한 필승조로 (최소 1시즌 이상) 활약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외에도 김민수를 롱 릴리프와 필승조로 잘 써먹고 김재윤 역시 KBO 상위권 마무리로 완전히 정착했으며 박영현이라는 루키를 또 발굴해냈다. 하여튼 투수를 고르는 안목과 보직을 편성하는 능력은 뛰어나다고 볼 수 있다. 팀 내 어리거나 애매한 자원들 및 다른 팀의 방출 명단에 오른 선수들을 데려와서 이런 성과룰 낸 것만큼은 높은 평가를 받을만하다.

그러나 야수 파트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쓸놈쓸 성향이 강해 혹사의 피해자들이 나타나곤 한다. 연도별로 2019, 2020년 주권, 2021년 이적생 박시영, 2022년 김민수 등이 그 사례. 결국 이들은 모두 부상으로 쉬는 상황이 오면서 2023년 팀의 불펜 운영에 큰 차질을 빚는 원인을 자신이 직접 만들고 말았다. 게다가 팀의 필승조나 마무리에게 멀티이닝을 너무 자주 맡긴단 것도 단점. 실제로 김재윤의 스탯을 보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마무리인 선수가 출전 경기수 대비 이닝이 항상 1을 넘어가며 멀티이닝을 자주 맡다가 터지는 경우가 종종 나온다. 박영현 역시 경기 수 대비 이닝 수가 과한 편. kt 불펜들의 세부 스탯을 뜯어보면 대부분 이런 식으로, 투구 수도 30구를 꽉꽉 채우거나 그것보다 좀 더 많이 던지는데 경기 수 대비 이닝 수가 지나치게 많다. 즉 불펜 필승조의 혹사가 상당히 심하단 것이다.

사실 선발진에서도 2022년은 외국인 투수들이 망한 대신[28], 고영표와 소형준, 엄상백 등 국내 선발진들의 맹활약을 바탕으로 가을야구로 이끌긴 했으나, 그 면면을 보면 지나친 국내 선발진 의존도로 인한 혹사, 특히 소형준이 그 희생자이기도 하다. 소형준은 데뷔 후부터 2년 차인 2021년까지는 나름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2020년 133이닝 + 포스트시즌 9이닝, 2021년 119이닝 + 포스트시즌 6이닝을 소화했지만 사실 이것도 적지 않은 이닝이다. 그러다가 2022년 외국인 투수가 망한 대신 본인이 에이스 역할을 맡으며 고졸 3년차가 171⅓이닝을 소화하고, 포스트시즌에서도 팀 내에서 가장 많은 이닝이던 11⅓이닝을 소화해 2022년 도합 182⅔이닝을 던지며 3년 총합 449⅔이닝을 소화해왔다. 1, 2년차 때도 나이를 감안하며 관리해줄 필요가 있었지만, 2022년에 특히 무리하면서까지 많은 이닝을 소화한 여파가 2023년 개막 시리즈 2번째 경기에서 2⅓이닝 10피안타 9실점 경기가 나오고 전완근 통증으로 엔트리에서 빠지는 등 혹사의 여파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무리하게 일찍 복귀하였지만 5월 NC와의 경기에서 팔꿈치에 불편함을 느끼고 강판되었으며 인대파열로 토미 존 수술을 받게 되었다.

그 와중에 이런 정신나간 인터뷰까지 했다. 2023년 팀 불펜이 부상이탈과 불지르는 남은 불펜으로 시름을 앓는 상황인데 상대팀 불펜투수들이 150km를 던지자 "와 좋다 싶더라."라는 팬들 분노에 기름을 붓는 정신나간 발언을 했다. #

5.2. 야수진[편집]


야수진에서는 배정대, 김민혁, 조용호 등을 2019년에 발굴하여 주전급 선수로 발돋움했지만, 2021년에는 이들의 10월의 극심한 타격부진으로 부침을 겪음에도 신진 자원이 등장하지 않아 야수진 육성에서는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배정대, 조용호가 부진한 와중에 김민혁이 타격감이 좋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타격감 좋은 김민혁을 천대하고 타격감 안 좋은 조용호를 주야장천 기용하다 날려먹은 경기들도 있었을 정도로 쓸놈쓸 운영만 하고, 2군에서 새로운 자원을 써볼 생각을 안 해 상당한 비판을 겪고 있다.[29] 다만 김민혁의 경우는 타격 능력은 있어도 수비가 불안한 점으로 인해 수비를 중시하는 감독 특성상 조용호를 안 쓰고 싶어도 쓸 수 밖에 없던 점도 있다.

내야진에서는 더 암담하다. 강백호는 1루로 고정은 했지만 수비가 불안하고 병역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으며, 심우준 역시 점차 나아지는 모습이지만 타격 부분에선 여전히 아쉬운 모습을 보이며 특히나 아직 병역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점이 발목을 잡는다. 그의 군입대에 대비해 1군에 부른 권동진도 주루나 수비에서 자잘자잘한 실수가 계속해서 쌓이며 아직까지 뚜렷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박경수는 노쇠화를 겪으며 2021 시즌 기점으로 극심한 타격침체를 겪고 있으며 은퇴가 코앞임에도 불구하고 트레이드로 데려온 2루수 신본기오윤석은 어디까지나 주전으로서 도약이 아닌 백업에 머물러 있다. 노쇠화의 기미가 보이는 3루수 황재균을 대체할 만한 선수도 딱히 없는 것이 문제. 그나마 시즌 초반 김병희가 좋은 타격으로 인상을 남겼지만, 부상 이후 계속되는 잦은 부상으로 감을 잃으며 다시 시즌 초의 활약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또힌, 내야진의 뎁스문제도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강백호2022 항저우 아시안 게임으로 병역 혜택을 받았지만 다른 선수들의 병역 문제, 노쇠화 및 잦은 부상 등, 주전들의 공백을 백업선수들이 메꿀 수 있는 지의 문제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포수진 역시 마찬가지인데, 장성우를 뒷받침할 만한 젊은 포수 역시 없다. 그나마 2021년 허도환이 개인 커리어하이를 보냈으나, 그 역시 부상으로 빠진 이후에 뒷받침할 만한 좋은 포수는 없었다. 입단 4년차 조대현은 1군 등록은 했지만 1군 경기 출전은 1경기도 없었다. 다만, 백업으로 키워보려 했으나 타격에서 재미를 보지 못했던 안승한을 두산으로 보내고 롯데와의 트레이드로 데려온 김준태가 팀을 옮기면서 생긴 의욕과 분유로이드로 WAR 5위라는 준수한 성적을 내고 있기는 하다.

일단 2021년에 팀이 1위 순위싸움을 하는 상황이다 보니 적극적인 기용을 잘 안 한 것으로 보이지만 야수진이 10월에 집단부진을 겪으며 아무런 조치도 안한 것으로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2022년부터는 이 단점들이 특히 심화되었다. 우선 2022년부터 FA로 영입한 박병호는 뛰어난 활약을 펼치고 있지만 30대 후반에 접어든 선수이고, 박병호와 나이가 비슷한 3루수 황재균을 대체할 만한 선수는 전혀 나오지 못하고 있다. 김병희는 툭하면 찾아오는 부상으로 1군에서 쓰기 힘든 데다, 타격도 작년보다 크게 하락했다. 그나마 올 시즌 완전히 몰락한 박경수를 대신해 오윤석이 어느 정도 활약하고 있지만, 역시 아직 완벽한 주전까지는 되지 못했다. 신본기도 작년보다 훨씬 퇴보했다. 트레이드로 영입한 장준원을 쏠쏠하게 썼지만 후반기 시작하자마자 십자인대 파열로 시즌아웃되어 큰 손해가 되고 말았다. 내년 후반기는 되어야 복귀가 가능한 상황이며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2군 야수진이 완전히 황폐화되어 1군 기량이 전혀 안되어 있다는 점이다.[30] 다만 마냥 야수진 풀을 욕하기엔 본인의 지나친 베테랑 선호 및 쓸놈쓸 성향이 상황을 악화시킨 탓도 크다. 반대로 투수진은 어린 선수도 잘 기용하는 성향을 보여서 현 kt는 투수진은 국내 5선발을 세울 정도로 빵빵한데 야수진은 조용호 빼곤 3할을 찍긴 커녕 1할대 선수들도 있으며 36세 3루수가 풀타임을 뛰고 내년엔 주전 유격수도 이탈하며 주전 2루수는 1할을 겨우 치는 암울한 수준이다.

2023 시즌을 앞두고 강백호를 지명타자로, 박병호를 1루수로 기용하겠다는 인터뷰가 나오자 논란이 일고 있다. 강백호가 타격에 비해 수비가 약하다는 평가를 받긴 하지만 아직 나이가 어려서 충분히 발전의 여지가 있고, 박병호는 이제 한국 나이로 38세에 접어드는 나이라 체력관리를 해줘야 할 나이인데 정반대로 젊은 선수를 사실상 수비 불가 판정을 내리고서 지명타자로 활용하겠다는 감독의 계획에 의구심을 가지는 팬들이 늘어나고 있다.[31] 이 문제는 강백호가 우익수로 전향하면서 논란이 조금은 가라앉는가 했지만... 마지막 시범경기에서 지명타자로 출전시키면서 다시 욕을 한 사발 받고 있다. 개막 2연전에서도 약속했던 좌익수로는 단 한 경기도 출전시키지 않았고 지명타자로만 출장하게 하여 우려를 현실화했다.


6. 논란 및 사건 사고[편집]



6.1. 202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귀국 인터뷰 중 발언[편집]


야심차게 출발했던 202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호주전일본전을 모두 패하면서 1라운드 탈락이 확정되는 동시에 야구 팬들의 시선에서 이해할 수 없는 선수 기용으로 큰 비판을 받게 되었다.

투수의 기량이 매우 중요한 단기전에서 특정 선수들, 특히 원태인, 정철원, 김원중을 연달아 혹사시키고 그 여파로 폼저하가 눈에 띄는 상황에서도[32] 경기를 투입시키는 등 혹사 논란이 계속해서 점화되었고, 김하성, 토미 에드먼의 경우 대회 내내 매우 부진한 활약을 보여주었음에도[33] 이름값 때문에 꾸준히 상위 타선에 배치하는 등 과정과 결과 모두 석연치 않았던 탓에 많은 비판을 받았다.

또한 이강철 감독은 B조 중국과 최종전에서 콜드게임으로 대승 후 KBO 리그 최고 투수이지만 고교 시절 '학폭'을 일으켜 국가대표에 뽑히지 못한 안우진에 관한 취재진의 질문에서 이번 대회를 앞두고 지난 시즌 최고의 활약을 펼쳤던 안우진의 발탁 여부로 논란이 일었다.[34] # 대표팀에 마땅히 뽑혔어야 할 실력이었지만, 학교폭력 전력으로 인해 WBC 대표팀 최종 30인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이에 대해 이 감독은 "그 결정에 대해서는 아직도 변함없고, 후회 없다"고 짧게 답했다.
파일:이강철 사과.jpg
귀국 후 사과하는 이강철
이후 3월 14일, 1라운드 탈락 후 한국으로 귀국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투수 혹사와 다른 팀에서 선수 좀 늦게 써달라는 요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지에 대해 질문이 나오자 "한국 시리즈 할 때 투수 몇 명 쓰는가 좀 알아보시고 할 말 좀 했으면 좋겠습니다"[35][36][37] 라는 답변을 내놓으며 안 그래도 적지 않았던 비판 여론에 기름을 부어버렸다.

게다가 이 정도로는 모자랐는지 분명 비난은 자신에게만 해달라고 운을 띄운 이후에 "소형준, 이의리 같은 젊은 투수들이 자기 공만 던졌다면 좋은 결과 나왔을 거다"라는 욕 먹기 딱 좋은 발언을 추가하며 팬들의 분노에 스스로 불을 지피고 있다.

7. 여담[편집]


  • 2013년 정규리그가 끝나고 KIA의 차기 감독 후보군으로 분류되었다. 염경엽 감독 옆에서 수석코치를 하고 있는 이강철이 메리트를 가질 수 있다는 것. 김평호 KIA 코치도 팬들과 소통을 잘하고 평가도 괜찮아 감독 후보로 거론되지만 외야수 출신이라는 점에서 투수 출신인 이강철이 더 유리하다는 지적도 있다.

  • 2013년 열린 제2회 한일 올드스타 슈퍼게임 9회초에 등판하여 평균 100km/h의 공으로 일본측의 올드스타를 상대로 우세를 보였다.

  • 장채근은 이강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강철이는 내 피부를 너무 좋아했다. 내가 상의를 탈의하고 있으면 내 곁으로 와선 '형, 피부가 너무 뽀얗고 부드럽다'며 내 몸 구석구석을 만지곤 했다. 참 이상한 녀석이었다. 물론 강철이가 성적 취향이 이상한 건 절대 아니다. 강철이는 분명한 사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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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 무등산에서 해태 선수들과의 야유회에서 장채근과 찍은 사진.

  • 선동열도 이강철이 자기 피부가 부드럽다고 만지는 것을 좋아했다며 비슷한 회고를 한 것을 보면 부드러운 피부를 만지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던 듯.

  • 뛰어난 성적과 더불어 곱상하고 여린 외모로 여성 팬들을 몰고 다닌 것으로도 유명하다. 선동열의 증언으로는 젊은 시절 옷 좀 차려입으면 제비가 따로 없게 잘생겨서 여자 관계가 매우 복잡했고, 어느 날 야구에 집중하겠다고 여자 관계를 싹 정리했더니 그 여자들로부터 걸려오는 전화에 룸메이트 시절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고. 50대인 현재도 상당히 잘생긴 외모를 자랑하는 편. 자기 관리도 잘 해서 배도 거의 안 나왔다. 다만 나이가 들면서 피부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어서 젊었을 때 하얀 피부의 곱상한 외모를 기억하는 올드 팬들은 많이 안타까워 한다. 특히 감독이 된 후엔 스트레스로 트러블이 생긴 건지 매우 안 좋아졌다.

  • 팬 서비스도 매우 좋은 축에 들어가는데 선수 시절 때부터 팬들과 마주하면 사인도 잘해주었다. 감독이 된 이후에도 어린이 팬을 대상으로 농담을 주고 받고 사인을 해준다.

  • 그가 코칭을 해준 사이드암 투수들이 그가 팀을 떠난 후 불을 지르는 경향이 있어 사이드암 코칭에만 특화된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이 있다. 대표적으로 KIA의 0점대 마무리였던 유동훈과 넥센의 2016 시즌 신인왕 신재영. 박치국도 부진하다가 다시 부활하기까지 1년 넘는 시간이 걸렸다.

  • KIA 타이거즈맷 윌리엄스 감독이 KBO팀 감독들에게 인사차 선물로 와인을 주자 빈손으로 받기 그렇다고 답례품으로 연고지 수원의 명물인 왕갈비를 답례품으로 선물해 줬다는 일화가 있다. 이후 다른 감독들이 답례품으로 어떤 것을 주게 되는지 소소한 관심을 끌었다.

  • 현역 시절에 달았던 19번은 그의 은퇴 이후 이강철이 키워낸 사이드암이나 언더핸드 투수가 가장 달고 싶어하는 번호가 되었다. 신용운손영민이 이 배번을 달았었다. 그러나 손영민이 임탈되고, 이강철이 넥센으로 가면서 언더핸드와 사이드암이 아닌 뜬금없는 좌완 손동욱이 달더니 이젠 노장 우완 최영필이 달았다가, 최영필의 은퇴 다음엔 2015년 1차지명 투수 이민우가 달았다. 이후 2018 시즌이 되어 투수인 손영민이 다시 19번을 가져가면서 원래대로 사이드암 투수가 달게되었다. 한편 넥센에서도 한현희가 이 번호를 달았지만 송신영이 돌아오면서 한현희는 원래 달던 63번을 달게 되었다. 다만 2020시즌 KIA 타이거즈에서는 투수가 아니라 내야수인 김태진이 달고 있는데, 이는 트레이드로 워낙 급하게 KIA로 온 지라 번호를 고를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38] 2023년 현재는 사이드암인 윤중현이 달고 있다.

  • 이승엽의 프로 첫 홈런을 허용한 투수이다. 1995년 5월 2일 광주구장에서 이승엽이 데뷔 첫 홈런을 쳤는데 상대투수가 이강철이었다. 어찌 보면 이승엽을 레전드로 가게끔 만든 장본인인 셈.[39]

  •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장채근이 체조 선수처럼 몸이 유연했던 투수 3명 중 한 명으로 뽑았다. 나머지 2명은 선동열과 김정수다. 제자들에게 유연성을 강조하는 이유가 다 있다고 했다.

  •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김성한이 군기 반장으로 팀 내 기강을 잡을 때 기량이 좋은 선수를 대표로 혼내야 효과가 좋았다고 늘 타깃으로 삼았던 선수가 이강철이었다고 밝혔다.


  • 해태 타이거즈 선수 출신 감독으로는 선동열 이후 2번째로 팀을 한국시리즈로 이끈 감독이자 한국시리즈 우승 감독이 됐다. 역대 해태 선수 출신 감독은 이강철 외에 서정환, 김성한, 유승안, 이순철, 한대화, 선동열 등이 있으나 선동열을 빼고는 대부분 감독으로서 실패한 이들로 꼽힌다.[40]

  • KBO 리그에서 선수-코치-감독으로 모두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해본 세 사람중 한명이다. 나머지 둘은 조범현, 김원형. 다만 아직 한 팀 유니폼만 입고 선수-코치-감독으로 모두 우승 반지를 껴본 사례는 아직 전무하다.[41]

  • KBO 리그 선수 출신 한국시리즈 우승 감독 중 유일하게 현역 시절 한국시리즈 MVP 수상자 출신이다.


  • 2023 WBC 이전까지는 '성공한 야구인'의 대명사로 언급되었다. 선수 시절 때부터 한국시리즈 MVP를 거머쥐는 등 선동열, 이대진 등과 함께 해태 왕조를 대표한 투수로 활약했었으며, 감독으로써도 kt의 통합우승을 이끄는 등 고평가 받았다.[42][43] 하지만 2023 WBC에서 예선 탈락+김경문을 연상시키는 투수 혹사[44]로 사실상 모든 명성을 잃어버렸다. 설상가상으로 kt마저 2023시즌 초반 매우 부진한 모습에다가 매우 비상식적인 운영[45]을 반복하면서 사실상 감독으로써의 평가는 완전히 나락으로 갔다 봐도 무방했으나, 2023년 여름부터 갑자기 성적이 매우 좋아지며 올드스쿨한 운영을 하지만 성적만큼은 매우 잘 내는 전성기 시절 김성근과 유사한 평가[46]를 받고 있다.

  • 성공한 야구인의 대명사로 언급되는 것과 별개로 삼성 라이온즈 팬들에게는 이미지가 좋지 않다. 장정석과 함께 제일 싫어하는 인물로 자주 꼽힐 정도. 일단 선수 시절 삼성 라이온즈에서 먹튀하기도 했었고, 2021년 kt wiz의 감독으로 타이브레이커에서 이기는 바람에 삼성의 플루크 시즌을 아쉽게 끝나게 하였으며[47] 2023 WBC에서 사실상 삼성의 유일한 유의미한 투수 전력인 원태인에게 지나친 혹사를 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삼성 소속이었던 적이 길지 않았던 데다 선수로서도, 감독으로서도 성공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삼성 팬들에게 까인다.

8.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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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
1 고영표 · 18 정우영 · 19 고우석 · 21 박세웅
29 김광현 · 30 소형준 · 34 김원중 · 45 이용찬
46 원태인 · 48 이의리 · 54 양현종 · 57 김윤식
59 구창모 · 61 곽빈 · 65 정철원
포수
25 양의지 · 56 이지영
내야수
2 김혜성 · 7 김하성 · 10 오지환 · 11 에드먼
14 최정 · 50 강백호 · 52 박병호
외야수
17 박해민 · 22 김현수 · 37 박건우
47 나성범 · 51 이정후 · 53 최지훈
'''

감독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71''' 이강철

타격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77 김기태

투수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91 정현욱

배터리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70 진갑용

작전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72 김민호

수비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76 김민재

불펜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81 배영수

QC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88 심재학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 역대 로스터



[1] 음력 5월 24일.[2] 2001년 7월 30일 삼성에서 해태로 트레이드되었고, 2001년 8월 1일 해태에서 기아자동차로 모기업이 바뀌어 KIA 타이거즈가 출범했기에 딱 이틀 동안 해태 소속이었다.[3] ~6월 17일[4] 6월18일~[5] ~7월 22일[6] 7월 23일~[7] ~4월 24일[8] 4월 25일~[9] ~6월 10일[10] 6월 11일~[11] ~4월 17일[12] 4월 18일~[13] 계약금 5억원 / 연봉 총액 15억원[14] 계약금 6억원 / 연봉 총액 18억원[15]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 서울 강남구 역삼2동에 위치한 청운교회의 집사다. #[16] 통산 포스트시즌 방어율이 4.12로 나쁘지 않지만 1993년(평균자책점 7.71)과 1997년 한국시리즈(1회 5실점 강판)에서 신통치 않은 모습을 보여준 것이 크고, 더욱이 말년 마지막 포스트시즌에서 결정적인 홈런을 안경현홍성흔에게 2방이나 얻어맞은 모습 때문에 더욱 그렇게 비추어졌다. 그에 비해 선동열이 포스트시즌에서 약했다고는 하지만 그 약했던 모습도 평균자책점 2.24(한국시리즈 한정 1.74)였으며 문희수김정수같이 한국시리즈에서 뛰어난 임팩트를 보여준 선수들이 많아 비교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17] 이 12연승의 시작이 된 경기에서 노히트 노런 일보직전까지 갔다가 9회 2사에서 송구홍에게 통한의 안타를 맞고 말았다.[18] 사실 이대진과의 공헌도 차이는 두 해 다 크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팀의 에이스라고 부르기 어려웠다. 또한 이대진 뿐 아니라 1997,98년의 타이거즈 투수진 운용의 핵심키를 가진 투수는 임창용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임창용은 2년간 123경기에서 268이닝 평균자책점 2.11 22승 60세이브 261삼진 WAR 13.29라는 엄청난 성적을 거두며 타이거즈의 투수진의 큰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19] 1992년 빙그레와 해태는 시즌 마지막 2연전에서 대결했는데, 첫 경기에서 장종훈의 시즌 40홈런 달성 등으로 빙그레가 여유있게 앞서자 김영덕 감독은 잘 던지던 선발 한희민을 5회부터 송진우로 교체해 당시 이강철과 18승으로 다승 공동 1위였던 송진우에게 1승을 선사했다. 다른 상대도 아니고 다승 경쟁을 하던 당사자의 팀을 상대로 노골적인 타이틀 만들어주기를 시도하니, 이에 대한 비판이 거세었다. 이강철은 다음날 빙그레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에 선발로 나서 '공동' 다승 1위의 가능성에 도전했지만, 장종훈의 시즌 홈런 기록을 41개로 늘려주는 제물이 되며 패전투수가 되었다.[20] 하지만 당시 자료를 보면 '송진우를 선배로 생각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는 기사도 나왔다고 한다. 당사자인 송진우는 "내가 아는 강철이는 그런 말 할 애가 아니다." 라고 말했다. (출처 - 1992년 10월 7일 주간야구)[21] 송진우가 통산 최다 탈삼진 기록을 뺏긴 했지만 이는 송진우가 이례적으로 롱런했기 때문이다. 둘은 같은 1989년에 데뷔했고, 송진우가 약 5년 더 뛰었다. 이강철이 송진우와 비슷한 커리어를 썼다면 지금까지도 통산 최다 탈삼진 기록 소유자는 이강철이었을 것이다. 단, 송진우는 주민등록이 잘못되어 학교를 1년 늦게 들어가고, 실업야구생활로 프로데뷔도 1년 늦은 케이스로 실제로는 음력 1964년생(양력 1965년 1월)이라고 본인이 주장하였고, 어릴때는 빠른 1966으로 1965년생들과 친구였으나 프로에 와서 자기 사연을 밝히고 1964년생, 빠른 1965년생들과 친구를 했다고 한다. 즉 이강철보다 원래는 2년 위이며, 주민등록 문제를 인정하지 않아도 실업야구 경력때문에 여전히 1년 선배고 이강철도 선배로 대우한다. 그렇기에 송진우가 제 나이에 프로데뷔했다는 가정을 하면 이강철이 롱런했다는 가정에도 송진우가 기록에서 우위에 선다.[22] 타이브레이커 승리를 통한 정규시즌 우승[23] 시즌 중 4경기는 이강철 감독이 충수염으로 병원에 후송돼 김태균 당시 수석코치가 감독대행으로 팀을 이끌었다. 김태균 대행 당시 성적은 2승 2패.[24] 단편적인 증거지만 실제로 2023 시즌 kt의 팀 번트 성공률은 50%도 되지 않는 최하위이며 번트만 하는게 아니라 히트앤드런, 더블스틸, 스퀴즈 번트와 같은 하이리스크 고난도 작전도 굉장히 즐겨한다.[25] 당시 투수의 컨디션과 타자의 타격감과 작전 수행 실력 등이 고려되지 않으며 만약 상대 선발로 에이스급 투수라도 나오면 1,2회에도 거침없이 작전이 나온다.[26] 배제성은 트레이드 당시 오태곤에 밀려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상태였으나 어느 날 배제성이 공을 던지는 모습을 본 이강철 감독은 '저렇게 볼을 때릴 줄 아는 선수가 필요하다'며 기회를 주기 시작했다.[27] 이는 야수들에게도 마찬가지인데 멜 로하스 주니어 등 팀의 중심인 선수도 어이없는 실수를 하면 곧바로 대수비로 교체해버린 뒤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28] 시즌 초반부터 쿠에바스가 부상으로 아웃되었고 데스파이네는 꾸준히 부진했다. 그나마 쿠에바스의 대체자 웨스 벤자민이 좋은 활약을 펼쳤으나 데스파이네는 시즌이 끝날 때까지 부활하지 못했다.[29] 단 김민혁은 부상상태였음을 감안해야 한다.[30] 이로 인하여 kt도 2군 시스템 개선을 위하여 퓨쳐스 및 코치, 감독 경험이 풍부하고 감독으로서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있는 김기태를 영입하였다.[31] 이승엽, 김태균, 이대호 등등 강백호와 비슷한 강타자들 대부분은 베테랑에 접어들며 노쇠화와 함께 은퇴 시점이 가까워질 시기부터 주로 지명타자로 출전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강백호의 나잇대 시절에는 빠짐없이 수비에 나섰다. 심지어 현역 시절 수비 능력이 거의 없다고 지적받던 양준혁도 전업 지명타자로 나선 것이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이후다.[32] 체코전에 불펜 투수로 등판한 김원중과 중국전 선발 투수로 등판한 원태인 모두 혹사의 여파로 150km/h를 넘기던 직구 구속이 140km/h 중반, 심한 경우 초반까지 나오는 등 컨디션이 완전히 무너진 듯한 모습을 보여주며 이닝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마운드를 내려갔다.[33] 김하성의 경우 약체인 체코전과 중국전에서 3개의 홈런을 기록했을 뿐 정작 한국의 2라운드 진출 여부가 달려있던 호주전, 일본전에선 완전히 침묵했다.[34] 안우진은 2022 시즌 15승 8패 평균자책점 2.11을 마크하며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품에 안았다.[35] 아무리 한국 시리즈라도 선발을 불펜으로 매 경기 올리는 건 찾기 힘들며,무엇보다 불펜투수라해도 정철원김원중처럼 5~6연투의 과한 혹사를 시키지 않는다. 아무리 중요한 시리즈더라도 이후 투수에게 큰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기 때문.[36] 다만 이강철은 자팀인 kt에서도 주권, 박시영, 유원상, 조현우 등의 수많은 불펜 투수를 정규시즌, 포스트시즌 가리지 않고 연투시켜 팔꿈치 부상, 기량 저하, 심지어는 은퇴까지 만들어버리는 혹사를 계속해서 해왔었다. 즉 원래 코칭 스타일이 문제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37] 그리고 같은 단기전이다 보니 본인의 성공 경험인 한국시리즈를 들어 반박하려고 했던 듯한데, 처해있는 상황도 다르거니와 같은 상대와 7전4선승제를 하는 한국시리즈와 전력이 천차만별인 여러 상대와 1경기씩만 하는 WBC 조별리그는 전혀 다르다. 한국시리즈야 모든 경기의 중요도가 거의 똑같지만, 이번 조별리그 같은 경우 승패가 의미있는 경기들은 호주전과 일본전이었고 나머지 두 경기는 사회인 야구팀이라 총력전이 큰 의미가 없고 지는 게 더 어려웠던 경기다. 혹사 관련 여론이 나쁜 가장 큰 이유는 정작 중요한 두 경기를 본인이 말아먹고 나서 사실상 큰 의미가 없는 체코전과 중국전에서도 굳이 총력전을 하겠다고 앞선 두 경기에서 잘 던졌던 투수들만을 계속 올렸다는 점이다. 일부 팬들은 이강철의 말대로라면 '탈락이 확정되고 난 뒤에도 굳이 원태인을 올린 중국전까지도 한국시리즈 경기라는 것이냐'고 분노하고 있다.[38] 트레이드 이전 이 번호를 단 박정수는 사이드암 투수가 맞다.[39] 여담이지만 이승엽과 이강철은 2000년~2001년 시즌 중반까지 1시즌 반동안 삼성 라이온즈에서 선수로 한솥밥을 먹기도 했고 2023년부터는 감독으로 맞대결을 펼치게 됐다.[40] 이강철과 선동열 외에 그나마 가을야구를 경험한 해태 출신 감독은 서정환과 김성한 뿐이다. 서정환은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이던 1998년과 1999년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으나 전자 라이벌 LG 트윈스, 영남 라이벌 롯데 자이언츠에 제압당하는 바람에 경질됐고 김성한도 KIA 타이거즈 감독 시절이던 2002년과 2003년 연달아 플레이오프로 팀을 이끌었으나 각각 LG 트윈스, SK 와이번스에게 패하면서 미끄러졌다.[41] 당장 삼성 라이온즈를 4차례 우승시킨 류중일 전 감독도 선수 시절에는 우승 반지를 한 번도 껴본 적 없다.[42] 물론 류지현김원형도 현역 시절에는 성공적인 커리어를 누린 슈퍼스타였고 삼성 라이온즈의 대행을 맡게 된 박진만 역시 현대와 삼성에서 한국시리즈 우승을 수차례 이끌었고 국가대표까지 발탁된 2000년대 최고의 유격수로 군림하였다. 하지만 이강철은 꾸준히 10승을 달성하고 한국시리즈 MVP에 오르면서 해태 선발진의 핵심을 맡아서 커리어는 이들보다 높다고 할수 있다. 이강철 말고 현역 감독들 중 이강철 이상의 커리어를 가진 인물은 두산 베어스의 감독인 이승엽 뿐이다.[43] 이재국 기자는 영구결번이 아니어서 아쉬운 선수로 이강철을 꼽았다.[44] 물론 김경문처럼 선수 한 명을 완전히 작살낸 것은 아니지만, 이쪽은 김원중, 곽빈, 정철원, 원태인 등 여러 투수를 돌아가면서 갈았고 결국 김원중과 원태인은 시즌 시작부터 컨디션이 영 좋지 않다. 특히 두산, 삼성, 롯데 모두 투수진이 약점으로 지적되는 팀이라 더더욱.[45] 투수 혹사, 리빌딩 무관심, 선수층 황폐화, 벌투 반복[46] 김성근이 한화 시절 폭망으로 최악의 평가를 받지만 시간이 지나 비판 여론이 줄어든 현재는 그래도 한화 시절을 제외하면 올드스쿨 윈나우형 감독으로는 커리어상으로 정점에 선 인물로 여겨진다. 왕조 시기를 경험했던 SK 시절을 포함하여 SK 감독 이전에도 당시 약팀으로 평가되었던 태평양, 쌍방울 감독을 맡아 창단 첫 가을야구 진출 및 LG 감독으로서 한국시리즈 준우승의 경험이 있는 등 한화 감독을 맡기 전 약팀을 강팀으로 자리매김하는데 탁월한 지도자라는 평을 받고 있었고 이강철도 이에 비견되는 평을 받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47] 물론 모든 경기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프로의 자세이므로, 이강철 감독이 타이브레이커에서 이긴 것은 아무런 문제 될 사항이 없기는 하지만 삼성 팬들에게는 어쨌든 오랜만의 한국시리즈 진출을 좌절시킨 원흉 중 하나로 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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