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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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해영의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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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삼성 라이온즈 V2.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2002



파일:KBO 리그 아이콘.svg KBO 한국시리즈
2002 한국시리즈 MVP

파일:KBO 리그 로고.svg
1999 KBO 리그 타격왕

파일:KBO 리그 로고.svg
2002 KBO 리그 최다 안타왕

파일:KBO 리그 로고.svg
1995 KBO 올스타전 홈런레이스 우승자


마해영의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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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49번
서정용(1988~1993)

마해영(1995~2000)

이대호(2001~2004)
배장호(2006~2007)

마해영(2008)

홍성흔(2009~2012)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49번
정성열(1999~2000)

마해영(2001~2003)

서홍준(2004~2005)
KIA 타이거즈 등번호 49번
신용운(2002~2003)

마해영(2004~2005)

래리 서튼(2007)
LG 트윈스 등번호 49번
홍성용(2005)

마해영(2006~2007)

노진용(2008~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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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기술위원회 위원
마해영(馬海泳 / Ma Hae-Young)
생년월일
1970년 8월 14일
본관
장흥 마씨
출신지
부산광역시 남구
신체
190cm, 100kg, AB형
학력
대연초 - 부산중 - 부산고 - 고려대[1] - 단국대학교 대학원[2]
가족
아내 방시라, 아들 마낙준[3], 마낙현[4]
포지션
1루수[5], 지명타자[6], 좌익수[7], 3루수[8], 2루수[9]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3년 2차 1라운드 전체 10순위 (롯데)
군복무
상무 피닉스 야구단 (1993~1994)
소속팀
파일:lotte_giants_1992_logo.png 파일:롯데 자이언츠 엠블럼(1996~2002).svg 롯데 자이언츠 (1995~2000)
파일:삼성 라이온즈 엠블럼(1995~2007).svg 삼성 라이온즈 (2001~2003)
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2001~2009).svg KIA 타이거즈 (2004~2005)
파일:LG 트윈스 엠블럼(2006~2016).svg LG 트윈스 (2006~2007)
파일:롯데 자이언츠 엠블럼(2003~2008).svg 롯데 자이언츠 (2008)
지도자
연천 미라클 자문위원 (2015)
성남 블루팬더스 감독 (2017~2019)
별명
마포, 마동탁, 빵해영[10]

1. 개요
2. 선수 경력
3. 플레이 스타일
4. 해설자 경력
4.1. 편파해설 논란
4.2. 그 이후
5. 기자 시절
6. 지도자 경력
7. 별명
8. 자서전 논란
10. 기타
11. 마스트라다무스
12. 연도별 주요 성적



1. 개요[편집]


롯데 자이언츠, 삼성 라이온즈, KIA 타이거즈, LG 트윈스 소속의 야구선수.

2012년부터 XTM야구 해설위원을 맡고 있었지만, 후술할 사건으로 인해 2014시즌 초반에 해임되었다.


2. 선수 경력[편집]



2.1. 롯데 자이언츠 1기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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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출신으로 부산고등학교고려대학교를 졸업했다. 아마 시절에는 국가대표로 뽑혀가기도 했으며 당시부터 차세대 빅뱃 자원으로 일부 아마야구에 관심이 많은 롯데 팬들의 기대를 받았다. 고려대학교 시절, 워낙 힘이 좋아 장타가 자주 나오던 탓에 야구장 그물 너머의 과학도서관 유리창을 하도 깨서 학교 측에서 도서관 1층에 창살을 설치했다는 일화도 있다. 창살은 그대로.[11][12]

고려대학교를 졸업한 후 롯데의 2차 1순위 지명을 받았지만 곧바로 입단하지 않고 상무에서 군 복무를 마친 후, 다소 늦은 26세의 나이로 1995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참고로 마해영이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군대 문제를 해결하지 못 해서 당시 롯데의 강병철 감독을 찾아와서 롯데의 1차 지명을 받아서 내년이면 입단할 수 있는데 군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어떻게 하면 좋은지?에 대해서 조언을 구하자 강병철은 마해영의 포지션부터 물어봤고 마해영이 주 포지션은 1루수고 3루도 볼 수 있다고 하자 바로 "그럼 군대 문제부터 해결해라"라고 돌려보냈다는 일화가 있다. 마해영은 강 감독의 조언을 따라 프로 입단을 미루고 상무행을 택했다.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은 20대 초반 한참 체력이 넘칠 나이의 2차 1순위 지명을 받은 국가대표 출신 대형 신인을 상무를 보내서 2년을 썩게 한 강병철의 실책이라고 까는데 당시 제도나 롯데의 사정에 대해 전혀 몰라야만 할 수 있는 헛소리다. 당시 롯데는 1루에 자갈치 김민호, 3루에는 공필성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어서 두 포지션에서 크게 아쉬울 게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상무는 본래 실업리그에 등록되어 있던 팀이라 3대 구기종목 군팀 중 유일하게 프로선수의 입단이 불가능했다.[13] 마해영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군 문제부터 해결하고 오는 게 맞았다.

비록 강병철은 마해영의 롯데 입단 전에 한화 이글스로 이적했지만 그가 마해영에게 해둔 조치 덕에 롯데는 군대 걱정 없는 중심타자를 얻을 수 있었다. 마해영이 데뷔한 1995년 3루수 공필성의 수비력이 떨어졌고 만 34세였던 1루수 김민호가 노쇠화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굉장히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이뤄졌다. (김민호는 93시즌까지 1루수로 주로 출전했지만 94시즌엔 김응국이 주로 1루수로 나오고 김민호는 주로 지명타자로 나오던 상황이었다. 95시즌에도 김응국이 초반에 1루수로 나오다가 마해영이 1루수로 가면서 김응국이 외야수로 옮겼다.)

입단 첫 해인 1995년 시즌 전 신인임에도 주전 3루수와 4번타자로 낙점받았다. 그러나 수비 부담으로 타격에서도 슬럼프에 빠져 5월부터 김민호 대신 1루수로 이동했고 이 때부터 타격도 상승세. 당시 롯데 라인업 전원이 주루코치 조 알바레즈의 지휘 하에 적극적인 주루플레이를 감행한 덕택에 도루도 무려 16개나 기록하였다. 프로 첫 해인 1995년 전 경기인 126경기 출전에 0.275의 타율 18홈런 87타점 16도루[14]를 기록하며 롯데 구단 창단 첫 20-20을 달성할 뻔했다.[15]

극단적인 오픈 스탠스의 타격 폼으로 인해 타격의 정확도 면에서 아쉬움이 남아 2년차인 1996년에는 스퀘어 스탠스 형태로 타격폼을 바꿨다. 그러나 타율은 별반 다르지 않은 0.276에 되려 홈런과 타점이 더 떨어지자 스퀘어 스탠스를 아예 포기하고 다시 오픈 스탠스 타격폼으로 회귀. 1997년 타율은 0.259로 더 떨어졌으나 25홈런을 기록하며 서서히 거포로서의 입지를 다져가기 시작했다. 마공갈 그리하여 1999년에는 타율 0.372에 35홈런 119타점 OPS 1.114의 맹활약으로 타격왕까지 차지, 펠릭스 호세와 함께 롯데의 거포로 팀을 준우승까지 이끌었고 커리어 하이를 달성했다. 1999년의 마해영은 구단 역사상 최고의 타자 중 하나이며 다른 해였다면 1루수 골든글러브는 물론 정규시즌 MVP까지 바라볼수 있는 성적이였지만, 하필이면 같은 해에 역시 커리어 하이를 달성한... 어쨋든 1999 시즌 타자 중에서는 단연 2등에 빛나는 훌륭한 성적이였다. 그 이후로 타율 0.370이 넘는 타자는 10년 뒤에나 등장했다. 2009시즌의 박용택홍성흔.

데뷔 이후 김용희 롯데 감독의 전폭적인 기용으로 매우 빠른 시간 안에 프로무대에 적응했다. 1990년대 중반 임수혁[16]과 마림포[17]를 이뤘으며 쭈욱 활약했다. 롯데에서 많은 활약을 했으며, 특히 1999년 플레이오프 7차전의 경기는 삼성쪽으로 기울고에서 호세가 퇴장된 직후에 날린 동점 홈런은 아래에서 언급될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의 끝내기 홈런과 함께 두고 두고 회자되는 명장면.

2000시즌에는 선수협 파동으로 인해 시즌 전 제대로 준비를 하지 못했고, 호세의 이탈 등으로 인해 성적이 다소 하락했다. 그러다 시즌 종료 후 트레이드로 팀을 떠나게 되었다.


2.2. 삼성 라이온즈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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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LG 최원호를 상대로 끝내기 홈런을 치고 환호하는 모습.

선수협 파동으로 인해 친정팀 롯데 자이언츠에서 쫓겨나다시피하며 2001년 2월 1일 김주찬이계성[18]을 상대로 삼성 라이온즈트레이드되었다.[19]

삼성에서는 이승엽이 주전 1루수로 자리잡고 있었기에 지명타자로 전업하게 되었고, 3번 타자인 이승엽에 이어 4번 타자로 클린업 트리오로 맹활약했다. 2001 시즌은 커리어하이였던 1999 시즌 다음으로 좋은 152.4라는 wRC+와 4.43이라는 WAR을 기록하며 만개하는 모습을 보였고[20], 2001 한국시리즈에서도 준수한 활약을 보였으나 팀의 준우승을 막지는 못 했다.

이듬해 2002 시즌은 작년보다도 더 우수한 161.3의 wRC+와 5.61의 WAR을 보이며 팀의 2년 연속 정규시즌 1위에 큰 힘을 보탰고, 대망의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 9회 말, 이승엽의 쓰리런으로 동점이 된 9:9 상황에서 이승엽의 다음 타자로 나온 그는 이상훈이 강판당한 후 구원투수로 등판한 최원호를 상대로 끝내기 연속 홈런을 쳐서 삼성 라이온즈의 창단 최초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뤄 내는 1등 공신으로 등극했다. 2002년 한국시리즈 MVP는 덤. 이후 지명타자 골든글러브까지 수상하며 최고의 한해를 보냈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선수 시절 유일한 한국시리즈 우승이다.

2003시즌에 이승엽 - 마해영 - 양준혁으로 이어지는 "이마양" 트리오는 무려 127홈런 356타점을 합작하며 역대 최강의 클린업을 자랑했다. 마해영은 시즌 개막 후 4월과 5월에 홈런 14개를 몰아치며 이승엽, 심정수와 함께 홈런 레이스를 펼치며 엄청난 페이스를 보여주었으나, 6월부터 홈런은 고사하고 안타도 거의 치지 못 하며 급기야는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되는 등 슬럼프를 겪었고, 이후 7월에 다시 부활하는 모습을 보여 그 슬럼프는 어찌어찌 벗어났지만 시즌 막판이었던 9월 들어 다시 부진에 빠지며 급기야 8번 타순까지 내려가는 등 6월과 9월의 부진으로 3할 타율에 실패하더니 포스트시즌에서는 SK와의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역전 기회에 병살타, 2차전에서 주루 미스로 인해 삼중살을 기록하며 삼성의 플레이오프 광탈에 한몫하며 시즌을 마무리했다.

이 해 마해영은 본인의 한 시즌 최다 홈런과 타점을 기록하며 성적 자체는 괜찮았지만 몇 차례의 부진으로 인해 전체적인 성적은 직전 시즌에 비해 떨어졌고, 그 해 지명타자로 뛰던 김동주가 타격왕을 차지할 정도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시즌 중반까지는 유력해 보였던 지명타자 골든글러브 2연패에 실패하였다.[21]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이미지가 급격하게 나빠지며 하향세라는 평가를 받았다. 2015년 최형우와 좀 비슷하다

그리고 2003년 초에 연봉조정 신청을 했다가 삼성에 찍히기도 했기에 시즌 후 FA가 되었지만 삼성은 그를 잡지 않았고, 삼성과 협상이 결렬된 후 KIA 타이거즈와 계약하며 삼성을 떠나게 된다. 그렇게 큰 임팩트를 남긴 채, 삼성과의 짧고 굵었던 시절은 좋지 못 하게 끝나게 됐다. 그럼에도 삼성에 대한 애정이 강한 편이다.

여담으로 2014년 시즌 후 나는 남자다에 출연한 김제동의 말에 따르면, 삼성 이적 초기 페이스를 못 찾고 매번 죽쑤자, 경기를 보던 대구아재들이 "에이씨 마해영 롯데가서 껌이나 씹어라 xx야"라고 그렇게 욕을 하고 다녔다고...

삼성 마지막 해였던 2003 시즌 전 2루수 전향시도했다고한다.[22][23]

그리고 항상 훌륭한 성적을 거두던, 거포이자 홈런타자인 마해영의 모습은 2003년이 마지막이 되었다.


2.3. KIA 타이거즈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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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A 타이거즈 시절

2003 시즌 종료 후 FA를 신청, 삼성에게 4년 31억 이라는 당시 FA 최고액을 요구했으나[24] 협상이 결렬되며 시장으로 나오게 되었다. 직전시즌 몇 차례 부진하며 3할 타율과 골든글러브 수상에 실패했지만 38홈런을 기록하는 등 시즌 스탯은 괜찮았기에 진필중, 정수근과 함께 FA 최대어로 평가받았고, 4번타자감이 필요했던 KIA에서 제시한 4년 28억 제안을 수락, 당시 FA 최고액을 기록하며 KIA로 이적하였다.[25]

그러나 KIA에서의 활약은 삼성 시절에 비해서 많이 떨어졌고, 데뷔 후 처음으로 2군으로 내려가는 등 부진한 모습을 보이다가 이후 먹튀로 까였다.

계약 첫 해였던 2004 시즌, 개막전에서 4번 타자로 출장해 5회 초 2타점 적시 2루타를 기록하며 기아에서의 첫 안타와 타점을 만들어내면서 팀의 승리에 기여했으나 그 후 1할 타율에 홈런은 단 1개에 그치는 극심한 부진에 빠졌다. 6월 들어서 주간타율 5할을 기록하는 등 어느정도 살아나기 시작했으나, 장타력이 올라오지 않으면서 8월에는 데뷔 후 처음으로 2군 강등까지 당할 정도로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였고, 결국 11홈런에 3할대 장타율로 첫 시즌을 마무리했다. 한때 논란이 됐었던 빵 사건이 이 해 나왔다.

다음 해였던 2005년 시즌에는 시즌 4번째 경기였던 SK전에서 만루홈런을 기록했지만 이후 부진한 모습을 보이다가 4월 중순 두산과의 경기에서 멀티홈런을 때려내는 등 살아나기 시작, 5월 들어서는 타율을 크게 끌어올린 후 5월 말 만루홈런 포함 4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하며 맹활약하면서 시즌 타율 3위에 장타율 2위로 올라서는 등 지난해와는 달리 시즌 초 좋은 활약을 보였으나.. 6월부터 시작된 부진이 끝나지 않으면서 결국 두 차례 2군으로 강등되었고, 자기의 미니홈피에 당시 임시감독이던 서정환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다가 서정환 감독과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시즌 후반 내내 벤치에 있어야 했다.[26] 결국 시즌 종료 후 LG와의 3:3 트레이드로 기아를 떠나게 된다.

기아에서의 성적은 2년간 타율 0.275 23홈런 131타점으로 먹튀였지만, 후술할 LG 시절에 비해선 그래도 좀 나은 편이다. 이름값은 못했지만 어쨌든 두 시즌 모두 두 자릿수 홈런을 쳐내며 잘 안 맞지만 그래도 맞으면 위험하다는 공갈포 이미지는 지켰기 때문.


2.4. LG 트윈스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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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트윈스 시절

2005 시즌 후 중심 타자를 원하던 LG 이순철 감독의 요구에 의해 최상덕, 서동욱과 묶여서 LG 트윈스로 트레이드되며 KIA와의 계약기간을 절반밖에 채우지 못하고 LG로 트레이드되었다. 그러나 LG에서 급격한, 정말이지 급격한 추락을 보이면서 KIA에서의 그 것을 넘어서고 말았다.

2006년에는 잠실 홈 개막전에서 솔로포를 기록했지만 그 외에는 계속 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5월 중순 부터는 컨택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타격 스타일에 변화를 주었고, 5월 16일 롯데전에서 4타수 4안타 2타점을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그때부터 타율을 상당히 끌어올리며 살아나는가 싶었지만 찬스 상황에서 번번히 찬물을 끼얹고, 타격 상승세도 다시 꺾이면서 결국 최길성에게 밀리고 7월 초에 2군으로 내려간 뒤 1군으로 올라오지 못하고 시즌을 마감했다. 시즌 성적은 .270 .333 .379 5홈런 28타점.

시즌 도중 마해영을 데려왔던 이순철이 사퇴했고, 본인 성적도 좋지 못했기에 시즌 종료 후 방출대기 상태로 몰렸다가 베테랑을 중용하는 김재박이 2007년 LG의 새 감독으로 부임하자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겠다는 의사를 표시하여 방출은 모면하였다. 마해영의 재기를 확신했다기 보단 당시 LG 타선이 간판타자 이병규의 일본진출 등으로 가뜩이나 약한 타선이 더욱 약화된 상태였기 때문에 커리어가 화려한 마해영을 그냥 내보낼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7년 1군 성적은 11경기 28타수 2안타[27] 0할 7푼 1리(.071). 7푼이, 007 등으로 엄청난 조롱을 받았다. 결국 LG는 중심타선의 부재로 인해 해당 시즌을 5위로, 그것도 포스트 시즌 탈락으로 마무리했다.[28]

당시 LG 2군 감독인 김영직의 평에 의하면 이미 마해영은 배트 스피드가 느려지는 등의 노쇠화 기미가 보였기 때문에 다시 회복될 가능성이 없었다고 한다. 마해영은 매일 자정까지 배팅 연습을 하면서 현역 연장의 의지를 불태웠지만 2007년에는 더욱 노쇠화를 보이며 사실상 1군에서 기용할 수 있는 기량이 아닌 수준까지 되었고[29], 결국 5월 이후로는 더 이상 1군에 올라오지 못했다.


2.5. 롯데 자이언츠 2기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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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2007년 시즌 종료와 함께 LG에서 방출당했다. 그대로 선수 생활을 끝내나 싶었지만, 2008년 롯데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았고 이 때 새로 부임한 외국인 감독 제리 로이스터의 눈에 들어 우여곡절 끝에 친정 팀 롯데 자이언츠에 연봉 5천만 원이라는 헐값으로 재입단 하게 된다. 원래 롯데 구단에서는 마해영을 탐탁치 않아 했지만, 마해영이 원래 부산 프랜차이즈 스타라는 사연을 들은 로이스터 감독이 그런 선수라면 구단에서 직접 데려와야 한다 라고 주장하며 영입했다고 한다. 로이스터 감독의 목적은 고참 선수가 부족한 롯데 선수단에 새로운 정신적 지주를 둠과 동시에, 팬을 중시하는 로이스터의 특징으로 미루어볼 때 흥행적인 차원도 염두에 뒀던 것으로 보인다.

개막전에서는 정보명이 맹타를 휘두르며 출장하지 못했지만 다음날 경기에서 7번 지명타자로 선발 출장하며 2000시즌 이후 약 8년만의 롯데 복귀전을 치뤘고, 8회 초에 안영명을 상대로 승부에 쐐기를 박는 솔로포를 기록하며 팬들의 환호를 받았다.
그 후로도 로이스터의 신임을 받아 시즌 초 꾸준히 출장하였고, 흥행 차원에서도 대성공을 거두며 부산에 다시 마해영 열풍을 불러왔다. 올스타전 투표에서도 엄청난 득표율로 동군 지명타자 1위를 기록하고 있었을 정도.

하지만 시즌이 갈수록 1할대 중반의 타율에 허덕이며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거두고, 롯데도 순위 싸움에 급급한 상황이 되자 2008년 6월 20일에 2군으로 강등당했다. 6월에 2군으로 내려가면서 로이스터 감독이 "이제 그만 은퇴하지 않겠나" 라고 제안했지만 본인이 거부. 그러다 2군으로 강등된 상황에서도 엄청난 득표율로 올스타전 지명타자로 선발되었고, 올스타전에서 희생플라이에 이어 2타점 적시 2루타를 때려내는 활약으로 롯데 팬들에게 기대감을 주었으나 부상 및 부진으로 인해 시즌이 종료될 때 까지 1군으로 다시 승격되지 못하고 시즌 종료 후 방출되면서 현역 생활을 마감하게 된다.

강연 100℃ 마해영 7분부터 직접 보자.

은퇴 후 2012년 11월 9일 KBS1 <TV 강연 100℃>에 출연하여 로이스터 감독이 시즌 개막 후부터 자신에게 기회도 주지 않고 벤치에만 앉혀놨다가 은퇴 권유를 했고 김성근 감독 덕분에 올스타전에서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었다는, 다소 황당한 내용의 강연을 하였다. 전술했듯이 로이스터는 마해영이 1군에 있는 동안에는 계속해서 선발 출전 및 대타로 기회를 주었음에도, 자신이 1할대 중반 타율을 기록하면서 부진했다는 말은 쏙 빼고(...) 자신이 정보명에게 밀려 벤치만 달구다 대뜸 2군으로 강등되었으며 채 두 달 동안 기회도 주지 않았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등, 이해가 되지 않는 거짓말을 늘여놓았다. 이게 진짜 거짓말+배은망덕한 게 어떤 감독이 미쳤거나 승부조작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수비도 안하면서 타격도 겨우 1할 5푼 정도나 치는 "지명타자"를 계속 기용하겠는가? 강연에서 정보명이 개막전에서 4타수 3안타 1홈런을 기록하는 바람에 자신은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계속 경기에 못 나갔다는 거짓말을 늘여놓았는데, 실제 팩트는 개막전에서 정보명이 그런 맹활약을 했음에도 다음 날 정보명을 빼고 마해영을 선발 출장시킨 게 로이스터였다. 결국 마해영이 6월 이후 1군 엔트리에서 빠지고 주전 자리를 꿰찬 정보명은 96경기 285타수에 0.277의 준수한 타율을 기록했다. 오히려 당시 로이스터는 정보명 대신 마해영을 기용한 부분 때문에 팬들에게 욕을 많이 먹었었다.

이렇게 강연에 나가서까지 태연작약하게 거짓말하는 작태에 몇몇 롯데 팬들은 더 이상 꼴도 보기 싫다는 반응.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마해영이 로이스터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것은 확실한 듯이 보인다. 마해영이 롯데와 다시 계약할 수 있도록 지지해준 게 로이스터였고, 이에 그치지 않고 개막 후 6월까지 1할 5푼 치는 타자에게 계속해서 지명타자와 대타로 기회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이 기회 한 번 얻지 못 하고 벤치에만 앉아있다가 대뜸 은퇴를 권유받은 것처럼 거짓말까지 늘여놓으며 로이스터를 깐 모습에 대해 일부 롯데 팬들은 마해영이 상당히 실망스럽다는 반응.


3. 플레이 스타일[편집]



현역시절 타격폼.

프로 데뷔 직후에 잠깐 3루수로 뛰었지만 주 포지션은 1루수였으며, 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된 후에는 잠깐 좌익수로 뛰다가 헬게이트급의 수비[30]를 보여 주며 결국 지명타자로 활약했다.[31]

한 시대를 풍미한 오른손 빅뱃 타자 중 한 명으로 엘롯기 세 팀에서 모두 뛰어 봤고 11시즌 동안 3할 이상을 3시즌, OPS 9할 이상을 4시즌, KBO 리그 토종 우타자 최초로 3년 연속 30홈런을 기록했다. 선수로서의 최전성기는 1999 ~ 2003년 시즌으로 볼 수 있으며 그 시즌만큼은 이승엽, 양준혁, 심정수 등의 타자 본좌들과 비교해도 그다지 꿀리지 않을 정도의 놀라운 성적이었다. 그러나 30대 초중반의 비교적 이른 나이에 급격히 하락세에 접어들게 된다.

선수 생활 후반기에 LG 트윈스, KIA 타이거즈에서 먹튀질을 하는 바람에 그 팀 팬들에게는 좋지 않은 이미지가 강하다. 친정 롯데 자이언츠 팬도 대놓고 심하게 까지는 않지만 별로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선수다. 만년에 LG에서 먹튀짓을 하고 오갈데 없던 그를 로이스터 감독이 거두어들였는데, 그렇게 팀으로 돌아오고 난 후 실망스런 모습을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로이스터 감독이 자신이 출장시켜주지 않았다면서 갈등을 일으켰고, 은퇴 후에도 로이스터나 구단을 여러 차례 까면서 다수의 롯데팬들이 그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

반면, 전성기 때 활동했던 팀인 삼성 라이온즈 팬들에게는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의 끝내기 백투백 홈런과 2003년 이마양 트리오 등 좋은 이미지로 남아 있다. 아래에서 설명하겠지만 마해영 자체도 삼성 라이온즈 시절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히 높은 편이다. 그 때문인지 친정팀 롯데보다 삼성을 더 편애하며 심지어 삼성과 롯데가 경기를 하면 삼성에게 유리한 편파 해설을 할 때가 있다. 그 때문에 친정인 롯데 팬보다 오히려 삼성 팬들에게 더 사랑받는 기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001년 한국시리즈에서는 고군분투 끝에 삼진 아웃을,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는 기적같은 끝내기 홈런으로 2년 연속 팀의 한국시리즈 마지막을 장식한 타자로도 기억에 남아 있다.[32]

말년에 노쇠화로 추락하긴 했지만 통산 스탯에서 알 수 있듯이 역대 타자들 가운데서도 10손가락 안에 드는 안타, 타점, 홈런 기록을 보유한 역대 최고의 타자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특히 홈런의 경우 당시 국내에서 잠실 야구장 다음으로 홈런을 치기 힘든 사직 야구장[33]을 홈으로 쓰면서 상당한 커리어를 쌓았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역대 롯데 선수 중에서 시즌 30홈런 이상을 친 적이 있는 선수는 마해영(1999), 펠릭스 호세(1999, 2001), 카림 가르시아(2008), 이대호(2010, 2017, 2018), 강민호(2015), 최준석(2015), 전준우(2018) 단 7명뿐이다. 게다가 펠릭스 호세, 카림 가르시아가 외국인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롯데 자이언츠 최초의 한국인 거포 타자였다. 이 계보는 마해영 → 이대호(현재진행형) → 강민호 또는 최준석 → 전준우로 이어진다.

전성기 때도 극단적인 오픈스탠스 타격의 반동으로 몸쪽 공에 취약했던 문제점이 노쇠화로 인한 배트 스피드 저하로 극명히 드러났지만 본인의 고집으로 이 점을 개선하지 않았던 점이 급격한 몰락의 이유[34]라고 할 수 있다. 혹자는 마해영이 우산효과를 받지 않았다면 이런 성적을 낼 리 없다고 하지만 원래 우산효과야 서로서로 주고받는 것이니. 결정적으로 야구에 만약이란 없다.


4. 해설자 경력[편집]


은퇴 후 엑스포츠의 해설위원을 맡으면서 해설자 생활을 시작했다. 엑스포츠가 SBS에 인수된 이후 2010년 3월부터 대경대학교 스포츠건강과학과의 겸임교수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KNN 등에서 해설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2012 시즌부터는 XTM의 해설위원을 맡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선수로 뛰었고, 여러 팀을 전전한 탓에 상당수 선수들의 사생활이나 신체조건 등에 대한 정보가 빠삭하다. 대표적으로 "정근우는 벗으면 격투기 선수급 몸매를 가졌다" 등이 있다.

다만 이 시절 좋은 평가는 받지 못했는데, 자신이 애정을 가지는 삼성과 롯데를 빼면 무슨 허구연 한일전 해설하듯이 편파적으로 해설했기 때문.

심지어 롯데와 삼성 경기중계에서는 오승환이 안타를 맞자, 아! 안돼요! 라는 발언을 하여, 롯데팬들도 마레기라고 깠다. 다만 실제로는 아! 안타에요 인데 잘못 들은 듯 하다. 이 쪽도 몬데그린인듯. 솔직히 롯데에도 애착 가졌는데 부정적인 말을 할까

여러 가지로 보면 서울 연고팀을 싫어하는 것 같다. 대충 허구연이, 한화 이글스, 삼성 라이온즈 경기 해설하는 거랑 수준은 비슷하다.

결국 2014시즌에도 또 편파해설을 하다가, 기아팬들이 방송국에 거세게 항의해 전화가 마비될 정도까지 가자 마해영 위원을 해임하면서 대충 일을 수습했다.

그런데 또 다른 해설위원인 진필중이 LG, 두산 편파해설을 계속하자 삼성팬들은 왜 마해영은 자르고 진필중은 안 자르냐는 반응이다. 마해영과 진필중 둘 다 다른 팀에서 전성기를 보내다가 기아로 가서 기량 하락을 겪은 후 LG에서 완벽한 먹튀가 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4.1. 편파해설 논란[편집]


해설을 시작하자마자 지나친 편파 해설과 잘못된 정보를 들먹이는 일이 많아진 탓에 폭풍같이 까였다. 대표적으로 박찬호의 KBO 첫 선발 경기인 4월 12일 청주 한화:두산전. 거기에 이 날 마해영은 경기 초반부터 편파중계하겠다고 대놓고 이야기했다. 불암콩콩코믹스당시 상황 풍자

특히 그의 편파 해설에 많이 당한 LG 트윈스 팬들, 두산 베어스 팬들과 넥센 히어로즈 팬들은 그를 마가놈, 마레기라 부르며 혐오에 가까운 반응을 보인다. 특히 넥센 히어로즈를 엄청나게 싫어하는데 2013년도에는 두산과 넥센 경기에서 두산편을 들어주는 충격과 공포의 편파 해설을 보여주어서 넥센 팬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사기도 했다. 허구연의 삼성 경기 해설과 마해영의 넥센 경기 해설...

주로 선호하는 팀은 영남권 팀들인 롯데, NC, 삼성[35] 그 중에서 삼성 라이온즈 경기에서 가장 우호적으로 편파해설한다. 가끔씩은 대구아재가 해설한다 싶을 정도가 들 때도 있다. 이로 인하여 롯데 자이언츠 갤러리에서는 마가놈이라고 까였다. 이 팀들과 해당 서울 팀들간의 경기가 있을 땐 거의 한일전 수준의 편파중계가 나온다. 또한 2013년 두산과 엘지전에서는 엘지에 대한 저주해설로 엘지 팬들에게 마해영 경기는 뮤트가 답이란 소리도 들었다. LG 트윈스 팬들도 먹튀질도 지긋지긋한데 해설마저 마레기라며 이를 가는 걸로 봐선 그냥 서울 팀들을 마해영이 싫어하는 듯하다. 엠엘비파크에서 가장 싫어하는 해설 중 1위에 뽑히기도 했다. 물론 이 글 자체도 정식 설문글도 아니고 엠엘비파크 자체의 성향이나 팬 분포도를 생각할 때 고작 이 글 하나만으로 모든 야구팬이 싫어한다고 단정짓는 건 무리가 있다. 다만 매우 평가가 나쁜 해설위원이다의 참고자료 수준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급기야 2014년 3월 30일에 열린 KIA 타이거즈 vs 삼성 라이온즈 전에서 기어이 고름이 터져 버렸다. 경기 내내 삼성 편을 드는 해설 덕분에 KIA 팬들이 집단으로 들고 일어난 것. 차라리 편파해설이면 그나마 나은데 아예 아는 게 없이 캐스터 말이나 끊었다. 캐스터가 KIA 얘기를 하면 되받아쳐 삼성 얘기를 하는 등, 말 끊기의 진수를 제대로 보여주었다. 삼성 용병 마누라는 아는데 반해 KIA 2014년 1차 신인 강한울이 누군지 모르는 지경이었다. KIA 타이거즈 갤러리와 엠엘비파크에는 XTM 사무실에 전화했다는 글이 3월 31일 오후에만 수십 개가 올라왔으며, 급기야 XTM 측에서 KIA 타이거즈 경기에는 해설을 맡기지 않기로 했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KIA 경기에서 빠지는 만큼 다른 팀 경기의 해설을 배당한다는 말이 나오면서 마해영의 해설 완전 퇴출을 원하는 목소리도 높은 터라 파장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마해영 중계 누리꾼 와글와글 "삼성 이야기만 하더라"vs"기아 경기가 엉망" 결국 4월 1일 베이스볼 워너B 방송을 통해 사과를 하긴 했으나 고의는 아니었다, 어쩔 수 없었다는 투로 변명을 하는 데에 급급해 진정한 의미의 사과가 아니라는 비판을 받았다. 팬들의 계속된 항의가 통했는지 이후로는 더 이상 현장 해설은 나가지 못하고 베이스볼 워너B에만 출연하다가 끝내는 XTM에서 완전히 퇴출되었다. 그래도 워너B 오프닝 때마다 등장하긴 한다. 사실 그 이후에도 지역민영방송 공동제작 프로그램 토크콘서트 화통에서도 편파해설 이야기가 나오자 해명을 했는데, 자신이 거쳐간 팀의 사정을 잘 알다보니 그 팀 위주로 이야기했다고 한다.마치 기아는 한 번도 거치지 않은 인연도 없는 팀인양 말하는 이 뻔뻔함 거쳐간 팀의 사정을 잘 안다면서 삼성에 대한 이야기만 주저리주저리 했지만, 정작 마해영이 그 삼성에서 FA시즌으로 간 팀이 기아였다.


4.2. 그 이후[편집]


프로야구 해설을 그만 둔 뒤에는 IB스포츠에서 고교야구 해설을 맡았다. 전반적으로 프로야구 해설 때와 크게 달라진 점은 없으며 고교야구와 신인 지명 제도에 대해 다소 무지한 듯한 인상을 보이고 있다.[36]

2021년 3월 23일, 키움 히어로즈삼성 라이온즈의 시범경기 중계로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5. 기자 시절[편집]


현재 일간스포츠 베이스볼긱에서 같은 XTM 출신인 정순주 등과 함께 야구기자로 활동하면서 칼럼을 쓰고 있는데 혹평받은 해설과는 달리 마해영의 칼럼에 대한 평가는 매우 높은 편이다. 마해영 본인도 해설자보다는 최종 목표가 야구 기자라고 했고, 특히 2014 시즌 초에 류중일 감독을 마해영이 인터뷰한 기사의 평가가 매우 좋은 편이었다.


6. 지도자 경력[편집]


과거 대표적인 홈런타자였지만, 프로야구 지도자가 되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자서전에서의 롯데구단 비판과 LG 시절 연봉소송, 선수협 창립구성원 경력 등 여러 구단 프런트와 척을 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프로에서 영입제안은 없고, 독립리그인 ISG 미라클에서 그를 타격코치로 영입했다.

실제로는 본업이 기자인지라 자문위원 정도라고 한다. 경기감독관이 본업인 김재박도 같은 경우이다. 최근 들어서는 기록전문업체 ‘스포츠투아이’가 운영하는 야구학교의 타격코치일을 잠시 하게 되었고 그 산하 독립야구단인 성남 블루팬더스의 1대 감독을 맡게 되는 등 아마나 독립리그 지도자로만 돌고 있다. 구단에 밉보인 마해영이 프로 지도자를 하려면 아마야구 지도자로서 눈에 띄는 실적을 내는 길밖에 없겠지만, 아직까지는 키워낸 선수는 뚜렷이 없는 상황.[37]


7. 별명[편집]


대표적인 별명은 마포(馬砲). 하지만 먹튀가 된 뒤엔 마공갈로 전락(…)했고, 부진이 지속되자 마해영은 머해영?이라는 말도 생겼다. 또한 어이없는 공에 스탠딩 삼진을 당하거나 택도 아닌 변화구에 등을 돌리는 등의 활약에 의해 마수아비, 마네킹이란 불명예스러운 별명도 생기기도.

파일:attachment/마해영/마몰레드.jpg
또다른 별명으로는 마몰레드. 뷔페에서 음식 가져가려고 줄 서있는 사진인데, 그 때 입은 마해영의 옷 색조합이 워낙에 튀는 색조합이라...[38]

2017년 2월 9일 SBS '자기야 백년손님'에 출연한 아내의 말에 의하면 상의/하의 모두 자기가 사줬으나 저걸 동시에 입고 가라고 한 적은 없다고 한다.

아마시절에는 좌준혁 우해영으로 유명했었다. 또 안경잡이 빅뱃+성이 마씨라서 마동탁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었다.

아래 언급될 빵 사건 때문에 빵해영이라고도 불린다.

각 팀마다 별명이 다른데 롯데 자이언츠 팬에게는 올드팬은 마포, 2008년 이후 팬들은 제리 로이스터를 비판했던 탓에 마가놈이라고 까인다.

삼성 라이온즈에서는 팀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과 이마양으로 대표되는 강타선의 좋은 기억이 었어서 삼해영이라고 불린다.

나머지 구단은 도가 지나친 편파 해설 때문에 들과, 한화 이글스, KIA 타이거즈 팬들한테는 마레기라고 불린다.


8. 자서전 논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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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자서전 <마해영의 야구본색>을 내놨는데 여기에 실려있는 내용의 일부가 약물의혹이라 야구계가 발칵 뒤집혔다. 대강 요약하자면, 선수 시절 금지약물인 스테로이드를 상습 복용하는 선수들을 제법 목격했는데, 대부분 외국인 선수였지만 국내 선수들도 제법 많았다는 내용이다.

마해영은 몇몇 선수들이 호기심에 한 두 번 해본 게 전부라며 해명했다. 어쨌든 마해영이 약물 선수를 직접 지목하지는 않고 덮어둔 덕에 사안의 심각성에 비해 그리 큰 파장은 일지 않고 묻혔다.

여담으로 자신은 금지약물에 손대지 않았다면서, 바로 다음 문장에 카페인커피30배나 들어있는 약을 한 번 먹은 적이 있다고 했다. 고농축 카페인 제재가 금지약물인 것을 몰랐는지 의도치 않게 자수를 한 셈이다.[39] 이는 그 후 2013년 이숭용이 고농축 카페인 복용에 대해 실토하면서 더 이상 그냥 듣고 넘길 수 없는 이야기가 되었다. 이숭용은 약물 의혹 내용에 대해 "다른 선수가 약물 복용하는 것을 본인이 봤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나. 증거없이 그런 말을 하면 안된다"고 마해영을 비판한 적이 있다.(...)

여기에 약물 스캔들에 묻혔지만 사인거래 논란에 대한 이야기도 이게 비판인지 아니면 그냥 에피소드인지 애매할 정도로 슬쩍 지나가서 한 쪽에서는 상당한 논란을 불러왔다.
여기에 실명만 거론하지 않았지 누구나 알 만하게 적은 감독에 대한 평가 등도 논란거리가 아닐 수 없다. 단적으로 스타 선수는 좋은 감독이 될 수 있느냐를 다룬 부분에서 빠른 속도와 최고의 타자라는 평을 받았지만 감독으로는 자질이 부족하다고 평가받는 익명의 인물이나, 한국 최고로 인정받았고 국제적으로도 명성을 얻은 또 다른 인물에 대한 비판이 등장한다. 이들에 대해서 명문 팀의 감독으로 성적도 나왔지만, 감독으로서의 역량도 부족하고 후배들로부터 존경도 받지 못 한다는 식의 글이 등장한다.

추가로 대학 동문들인 이상훈, 진갑용, 손민한, 박동희, 임수혁, 조성민에 대해서도 한 마디씩 했다. 그리고 자기 평가도. 이상훈과 자신의 경우 자질은 떨어졌지만 노력으로 일어선 케이스로 평가했고, 진갑용과 손민한은 자질에 비해서는 만개하지 못 했다고 평가했다. 박동희에 대해서도 대충 대충 놀며 하는 형은 아니지만 피나는 노력을 하는 노력파가 아니라고 언급했으며, 조성민의 경우 자기관리에 소홀했던 점을 꼬집었다. 또한 그 밖에도 프런트의 병크, 특히 롯데 자이언츠, 한국야구위원회의 병크를 샅샅이 파헤쳤다. 2000년대 초반 신인 계약에 번번히 실패한 것을 푼돈 아끼려다 대어 여럿 놓친 롯데라고 대놓고 깠다. 이제 롯데로 지도자 가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 되어버렸다. 장호연도 그랬지 않나.

하지만 야구 산업의 발전을 위한 진지한 조언을 빼놓지 않았고, 어린 야구 꿈나무들에게 "야구 선수가 되고 싶다면 우선 공부하라!"고 조언을 했다[40]. 더불어 프로 야구 선수들에게 "선수는 공인이다. 그 어떠한 욕설을 듣더라도 끝까지 참고, 자기 자신을 통제하고,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 또한 공인이 반드시 가져야 할 필수적인 요소다."라고 충고했다. 거기에 추가로 "열 배, 백 배 더 힘이 든다고 할 지라도 공인은 사회로부터 그 만큼의 대접을 받을 뿐만 아니라 상당 부분 보상도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조건들을 많이 갖춘 것에 대해 감사하며 살아가야 하고, 그 감사하는 마음을 팬들에게 돌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팬 서비스에 대한 내용도 언급했는데 자신의 집에 음식을 배달하러 온 배달원이 자신을 알아보고 너무나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때까지 자신은 아무리 피곤해도 팬들의 사인 요청을 거절한 적이 없는 것으로 팬들에게 할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정리해 보면, 자서전 자체에 대해서는 전체적으로 평이 엇갈린다. 전직 선수가 야구계의 수많은 문제점과 나아갈 바를 지적한 본격적인 야구전문서적인 양서라는 호평과 사인거래[41]와 약물 스캔들, 현역인 인물들에 대한 평가들을 스쳐지나가는 에피소드처럼 무책임하게[42] 언급했다는 점을 비판하는 입장이 동시에 존재한다. 여기에 뭔 놈의 야구선수 출신 사람 책에 야구가 없어질 수도 있네 없네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동시에 골프 찬양은 왜 이렇게 기냐는 이야기도 있다. 깊이 파고들수록 떡밥이 한 무더기인 책.


9. 빵 사건[편집]


사건이 이슈화된 직후에는 이종범박재홍이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이후 KBS의 옐로우카드 51회에서 이재국 야구전문기자가 빵 사건의 전모에 대해 밝혔다. 해당 범인선수는 FA로 기아에 온 선수로 당시 준플레이오프 엔트리에 들어있었고, 팀 분위기를 저해시키고 융화되지 못한 선수. 2009년부터 '어디선가 잘 살고 있다'고 말했다. FA로 기아에 들어왔으나 팀에 융화되지 못하고 결국 타 팀으로 트레이드됐으며 이후 2008년 은퇴하여 2009년부터 해설가로 새 삶을 살고 있던, 용의점의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마해영이 빵 사건의 새로운 용의자로 주목받게 됐다.

당시 옐로우카드에서 확실히 진범을 알고 있다는 투로 말을 했던 점과 평소 남들이 언급하기 꺼리는 부분에도 거침없이 돌직구를 날려대던 그의 야구전문기자로서의 신용도가 이재국 기자의 발언을 사실상 확정적인 증거로 만들었다.

문제는 혐의를 부인했다고 오해를 받은 것. 마해영 본인은 사건 자체를 잘 기억하지 못 했다. 인터뷰 본문을 읽어보면 마해영에게 간 질문은 '박재홍이 빵을 먹었는지'에 대한 답변이었고, 이에 대해 잘 모른다는 얘기. 그러나 인터뷰 중 아래 문장만 퍼져서 '본인이 먹지 않았다'는 식으로 와전되어 이야기가 퍼졌다.

(전략) 특히 먼저 한 여성 독자는 야구 커뮤니티를 통해 여러 가지 질문을 준비해오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박재홍 선수와 빵에 대한 사건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마해영 해설위원은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답했다. (후략)본문출처


한참 뒤인 2012년, 두드림에 출연했던 이종범이 빵 사건의 범인이 아직 현역임을 언급하면서, "어디선가 잘 살고 있다."라는 말이 은퇴를 직접적으로 나타낸 것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 현역이면서 동시에 이재국 기자가 언급한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새로운 용의자 최향남이 등장함과 동시에 마해영의 혐의 또한 풀리는 줄 알았는데, 2014년 1월 29일에 빵 사건의 최초 발설자인 정철우 기자가 이 사건을 다시 언급하면서 사건의 진범은 2014년 기준으로 박재홍 방송 해설위원과 같은 직업이라고 밝혀, 최종적으로 마해영이 빵 사건의 진범임이 확정되었다. 물론 마해영 본인은 '박재홍의 빵 섭취 여부'에 대한 질문에 모른다고 답했지 '본인의 빵 섭취 여부'에 대해 답한 건 아니므로, 해당 사건에서 빵 먹은 게 죄라면 죄일지 언정(...) 아니 빵 먹은 게 그렇게 잘못인가? 마해영의 발언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애당초 틀린 문제를 냈는데, 답이 제대로 나올 리가 없기 때문.

사실 마해영보다 현역드립으로 최향남이 범인이라 생각하게 만든 이종범 쪽이 더 까이고 있다. 빵 사건 문서 참고.

불암콩콩코믹스에서도 박재홍이 "빵은 네가 먹었잖..."이라며 마해영과 싸운다.

최향남이 인터뷰에서 간접적으로 언급.


10. 기타[편집]


  • 그의 가족들은 대구에 살고 있다가 롯데로 이적한 후 부산으로 돌아왔다. 아들은 아버지가 마해영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전학을 오자마자 반장을 했다니 말 다했다.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 "마해영인데예" 하지만 현역에서 은퇴한 후 대구로 다시 이사와서 가족이 대구에 거주하고 있으며, 2012 시즌 XTM에서의 해설 및 한 강연에서도 본인이 직접 대구에 거주하고 있다고 발언했다. 한 때 부인이 경북고등학교 맞은편 건물에 파스타집을 열었으나, 지금은 문을 닫은 상태.


  • 김은식 기자가 집필, 출간한 <ㅇㅇ 때문에 산다>에서 마해영을 <롯데 자이언츠 때문에 산다>가 아닌 <삼성 라이온즈 때문에 산다>의 라이온즈 MVP 8인 중 한 명으로 넣었다. 나머지 라이온즈 MVP는 이만수, 김시진, 장효조, 이승엽, 배영수, 오승환, 박진만. 참고로 박진만은 마해영과 함께 타 구단 출신이면서 라이온즈 MVP로 선정되었다. 저 MVP는 김은식 작가가 임의로 선정한 게 아니라 각각 정규시즌, 한국시리즈, 올스타전 MVP를 받은 선수들이다. 마해영은 한국시리즈 MVP여서 당연히 언급된 것 뿐이다. 다만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각각 01, 02년 한국시리즈 마해영의 타석이라는 점은 의미있는 부분.

  • 상당한 금강불괴인데, 롯데와 삼성에서 뛴 총 9시즌 동안 전 경기를 출전한 시즌이 무려 6시즌이다. 2년차인 1996년에 6경기 결장, 2000년 1경기 결장, 삼성에서의 마지막 시즌인 2003년 딱 한 경기를 결장한 게 전부. 즉 프로 9시즌 동안 결장한 경기수가 8경기밖에 안 된다. 10번째 시즌인 KIA 이적 이후부터는 급격히 노쇠화와 하락세가 찾아온 덕에 벤치에 있는 날이 많아져서 그런지 은근히 묻히는 사실. 주 포지션이 1루수와 지명타자였다는 점을 감안해도 얼마나 금강불괴였는지를 알 수 있다.

  • 2006년 LG 시절 2군 연봉 삭감 규정의 피해자가 되었는데, 문제는 마해영의 FA 계약은 2003년 연말이고 고액연봉자의 2군 삭감을 규정한 야구 규약은 2005년에 발효된 터라 이른바 불리한 소급 적용의 대상자가 된 것. 당연히 소송을 걸었고 LG측으로부터 1억 3,800여 만 원을 지급받으라는 승소 판결을 받았다.

  • 제리 로이스터 감독과 통역 없이 대화를 주고받을 정도로 영어를 굉장히 잘 한다. 메이저리그 진출에 생각이 있어서 꾸준히 공부해 왔다고 한다. 게다가 서울 출신의 현 부인을 종로의 한 외국어 학원에서 만났다.[43] 그거 때문에 더욱 노력한 것도 있을 듯.

  • 운전면허를 상당히 늦게 취득했다. 이유는 젊은 시절 선배들이 음주운전하는 걸 하도 많이 봐서라고...이건 개념있네

  • 이 팀 저 팀 옮겨다닌 데다가 KIA와 LG 시절 먹튀짓, LG 시절 연봉 삭감 규정에 대해 구단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던 전적, 그리고 약물관련 등 논란이 많은 자서전 출판, 그리고 강연 100°C에 출연해 로이스터 전 감독과 친정팀 롯데 구단을 대놓고 비난했던 데다가 현역 시절 보복성 트레이드를 당했을 정도로 선수협 활동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프로에서 지도자를 하기는 힘들 걸로 보인다. 그래도 한 시대를 풍미한 타자인데, 야구판에서 떨어져 살게 된 건 호불호를 떠나서 안타까운 일이다.



  • 해설가에서 물러난 후에는 박사과정에 몰두하였다.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스포츠 심리학과 관련된 논문으로 2015년에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대구에 거주하다 보니 대학원 수업을 들으러 올라가느라 힘들었다고 한다. 일반대학원 체육학과를 다녔는데, 캠퍼스가 용인에 있다 보니 사실상 죽을 맛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선수 시절에는 등번호 49번을 고집했는데, 이는 대학 시절 좋아했던 야구선수인 외야수 조 카터의 등번호다. 이상훈에게는 톰 글래빈의 47번을 추천해 줬다고 한다. 칼럼에서 볼 수 있듯이, 마해영은 조 카터톰 글래빈맞붙었던 월드시리즈를 보고서 '투수는 저래야지'라면서 이상훈에게 47번을 추천해 주었다고.(관련 칼럼) 그리고 두 번호는 모두 한국프로야구에서 두 선수의 상징으로 남았다.

  •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 끝내기 결승 홈런을 치고, 선수들과 격하게 부둥켜 울다가 안경을 잃어버렸다. 당시 영상을 보면 마해영은 모두가 기뻐하는 와중에도 두 손을 동그랗게 모으며 절박하게(?) 안경이 어딨냐고 묻고 있다.

  • 2001년, 2002년 2년 연속으로 한국시리즈에서 마지막 타자로 기록되었다. 2001년에는 5:6으로 뒤진상태에서 진필중에게 삼진을 당하면서 삼성은 두산에 2승 4패로 패권을 내주게 되었다. 바로 다음 해에는...

  • 서울 출생이며 부산과는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는 쇼트트랙 황제 안현수를 롯데팬으로 이끈 장본인이다. 사인을 요청하는 꼬마 안현수를 친근하게 대해줘서 안현수가 크게 감동했다고...

  • 2017년 2월 9일날 방영된 백년손님에 강제 처가살이를 하게 되었다.


  • 얼음별 대모험에서 마씨 집안은 힘이 있는 집안이라며 소개를 할 때에 야구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11. 마스트라다무스[편집]


2014 시즌 전 프야매 호구의 밤구단주의 밤 행사에 참가했을 당시, 4명의 해설자에게 순위을 묻는 코너에서 마해영이 삼성의 4연패, 넥센의 성장 가능성, NC의 용병 4명 어드밴티지를 언급하며 이 세 팀을 상위권으로 예측했고, 이 세팀이 1, 2, 3위를 차지하며 당시의 발언이 재조명받기도 했다. 특히나 삼성과 넥센은 한국시리즈에서 만났다.


12.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장타율
출루율
1995
롯데
126
476
.275
131
26
4
18
87
(2위)
76
16
54
.460
.359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장타율
출루율
1996
롯데
120
428
.276
118
26
3
12
64
49
5
30
.435
.325
1997
126
452
.259
117
22
3
25
75
61
6
39
.487
.328
1998
126
465
.292
136
33
(2위)
2
15
64
77
2
51
.465
.375
1999
132
503
.372
(1위)
187
(2위)
38
(2위)
4
35
119
(3위)
111
(3위)
6
59
.672
(2위)
.442
(2위)
2000
132
497
.294
146
25
1
23
90
73
2
51
.487
.378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장타율
출루율
2001
삼성
133
470
.328
154
(4위)
18
0
30
(4위)
95
86
1
68
.557
.415
2002
133
532
.323
(2위)[44]
172
(1위)
40
(2위)
2
33
(5위)
116
(3위)
92
2
46
.592
(4위)
.386
2003
132
502
.291
146
25
0
38
(3위)
123
(3위)
90
1
56
.568
.371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장타율
출루율
2004
KIA
124
437
.281
123
16
0
11
71
54
4
56
.394
.373
2005
94
338
.266
90
17
0
12
60
46
0
35
.423
.345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장타율
출루율
2006
LG
80
282
.270
76
12
2
5
28
30
1
24
.379
.333
2007
11
28
.071
2
0
0
1
3
2
0
4
.179
.176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장타율
출루율
2008
롯데
32
72
.153
11
0
0
2
8
3
0
14
.236
.287
KBO 통산
(14시즌)
1501
5482
.294
1609
298
20
260
1003
850
46
587
.497
.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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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사, 석사 모두 고려대였다.[2] 박사과정 한정[3] 1997년생[4] 1999년생[5] 프랜차이즈 스타로 활약한 롯데시절 대부분의 경기를 1루수로 출전하며 6시즌간 주전 1루수로 활약했다. 선수 전체 커리어에서도 1루수로 887경기에 출전하며 가장 많이 출전했다.[6] 삼성 이적 후에는 2004년(1루수)을 제외하면 거의 지명타자로만 나왔다. 600경기 가까이 출전하며 1루수 다음으로 많이 경기 출전[7] 삼성 이적 첫해에 15경기 출장했다.[8] 신인 시절 10경기 출전했었다.[9] 사실 대학 시절 2루수를 본 적 있고, 그것 때문인지 아래에도 나와 있듯이 삼성 시절 2루수 전향을 시도하다가 큰 키와 몸무게 그리고 체격에 비하여 엄청나게 작은 발 사이즈 때문에 결국 포기했다고 한다. 신인시절에 1경기 출전하긴 했다.[10] 자세한 것은 빵 사건 참조.[11] 이공대 캠퍼스에 있던 야구장은 경기 양주시 장흥면으로 옮겨갔다. 송추야구장, 축구장, 럭비장 등이 있다.[12] 비슷한 일화로 김봉연도 연세대 시절 운동장을 넘어가는 큰 타구를 자주 날렸다고 한다.[13] 상무가 프로선수를 받은 건 1998년 말 5명을 입단시킨 게 최초이며 프로선수들이 아무 문제없이 참여할 수 있게 된 건 1999년부터다.[14] 발이 느린 편은 아니었다고 한다.[15] 이후 정확히 20년 뒤인 2015년 외국인 타자 짐 아두치가 롯데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20-20을 달성했고 한국인 선수로는 2016년 황재균이 최초로 달성하게 되었다.[16] 사족으로 임수혁은 마해영의 고려대 1년 선배이다. 마해영은 임수혁과 고려대 3년, 상무 1년, 롯데 6년을 함께 뛰었으며, 마해영은 2002년 한국시리즈 끝내기 홈런 당시 인터뷰에서 '전날 밤 수혁이 형이 병상에서 일어나 같이 운동하는 꿈을 꿨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을 정도로 둘의 사이는 각별했다.[17] 임수혁이 任씨이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마임포'로 불러야 맞다.[18] 2005년 롯데 자이언츠에서 은퇴한 후 심판 자격을 취득하여 현재는 KBO 소속의 오심 전문 심판으로 활동 중이다.[19] 당시 해태 타이거즈도 마해영의 트레이드를 추진했었다고 하는데, 트레이드 상대는 외야수 김창희와 투수 1명을 내주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후 팀이 KIA로 바뀌고 FA를 통해 마해영을 데려오게 된다.[20] 7월까지 단 8홈런에 그쳤는데 8월 이후 두 달간 22홈런을 기록했다.[21] 당시 두 선수의 성적은 김동주는 타율 .342 23홈런 OPS 1.031, 마해영은 타율 .291 38홈런 OPS .938 로 홈런과 타점을 제외하면 김동주가 압도적이었다.[22] 마해영은 대학 시절 2루수를 본 적 있다. 삼성은 강기웅의 은퇴 이후 정경배가 연타석 만루 홈런을 치는 등 2루수 자리를 차지하지만 그닥 수비에서 좋은 성적을 보이지 못하고 SK로 트레이드, 이후 박정환, 고지행, 김재걸 등으로 2루수 자리를 돌려막기할 정도로 2루수가 약한 팀이었다. 결국 2004년 FA 자격을 얻은 박종호를 영입하여 2루수 자리를 급히 메꿨으나 박종호마저 부진과 노쇠화를 보이자 2006년 말 롯데에 강영식을 내주고 신명철을 데려와 주전 2루수로 기용한다. 삼성은 이후 신명철이 부진하자 역대 삼성 최고의 2루수라 평가받는 야마이코 나바로를 데려와 2루 공백을 메꾼다. 나바로가 떠나고, 백상원, 조동찬 등으로 눈물겹게 땜빵하다 이학주를 영입하고서야 유격수였던 김상수가 2루수로 전업하며 2루가 안정화된다.[23] 2루수 전향에 실패한 이유로 발 사이즈가 거론된 적이 있다. 실제로 마해영의 발 사이즈는 275mm로 체격에 비하여 많이 작은 편이다. 체격에 비하여 발이 작으니 안정적인 수비 자세를 갖추는데 애로사항이 있었다고 한다.[24] 종전 FA 계약 최고액은 2001년 양준혁이 삼성으로 돌아오며 기록한 4년 최대 27억 2천만 원이었다.[25] 하지만 바로 다음 날 진필중과 정수근이 각각 4년 30억, 6년 40억 6천만 원으로 이적하며 하루만에 최고액 기록이 바뀌게 된다.[26] 당시 기아는 시즌 초부터 투수진 붕괴로 최하위로 추락하며 분위기가 개판이었다. 그나마 타선은 이종범장성호, 마해영으로 어찌어찌 돌아갔지만 시즌 후반에 감독과의 불화로 마해영이 빠져나가며 이종범과 장성호 두 명만 남게 되었다.[27] 안타 2개 중의 1개는 솔로 홈런이었다. (4월 7일 KIA전) 당시의 영상 자료가 남아 있지 않은데, 이유는 그 경기를 KIA가 9대 1로 크게 이기는 상황에서 중계 방송사였던 MBC가(주말 개막전이었기 때문에 지상파 중계가 있었다.) 정규방송 관계로 중계를 끊었기 때문(…). 경기는 마해영의 홈런으로 인해 9:2로 끝났다. 참고로 이 경기는 송인득 캐스터의 마지막 지상파 중계였다.[28] 이 해 팀 내 수위타자는 0.308의 이대형(당해 골든글러브, 도루왕), 2위이자 팀 내 4번타자는 0.306, 12홈런의 최동수였다. 그 외에 그나마 쳐준 선수는 0.282 13홈런(팀 내 최다 타점)의 조인성, 0.278, 14홈런의 박용택과 0.285의 이종열이 다였다. 꽤 많아 보이지만 3할 타자는 꼴랑 두 명에, 제대로 된 홈런타자는 조인성과 최동수가 다였고 이마저도 15홈런도 못 넘겼다. 장타력으로 기대받던 김상사는 영 좋지 않은 3루 수비와 공갈포 기질로 0.235에 7홈런만 때렸고 나머지는...[29] 마해영이라는 이름값을 떼고 보면 그냥저냥한 수준이긴 한데 장타율이 급감했고 마해영은 본래 볼삼비가 좋지 않았고 배트 스피드가 줄어들며 삼진이 극도로 늘어나 생산성이 최악이었기 때문. 이 해 성적을 보면 이대형보다도 장타율이 크게 밀리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이 때 이대형은 유일하게 장타율이 4할을 친 해였다.) 출루율과 OPS도 크게 밀리는 걸 볼 수 있다.[30] 당시 삼성은 포지션 상관 없이 강타자다 싶으면 선수를 데려와서 일단 출장만 시키던 시절이었다. 당시 삼성에는 김기태, 이승엽이라는 1루수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한 명은 외야로 이동해야 했다. 결국 2001년에는 짬에서 밀린 마해영이 외야수를 뛰게 된다. 그러나 마해영이 좌익수에 적응하지 못 하고 김기태가 부진으로 2군에 머무르는 기간이 많아지자 결국 01시즌 삼성의 주전 지명타자는 마해영이 되었다. 그리고 삼성은 01시즌 후 김기태를 SK로 트레이드 한다.[31] 다만 상술했듯 03시즌을 앞두고 2루수 전향도 시도한 적은 있다.[32] 삼성팬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딱히 특이하지도 않은 현상이다. 삼성은 프로원년부터 줄곧 명문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으나 1985년 통합우승 이후,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단 한 차례도 우승을 거둔 적이 없었기에 그 어느 팀보다도 우승에 대한 갈증이 강했다. 우승을 위해 라이벌팀의 수장이었던 김응용을 영입하고 IMF로 휘청이던 쌍방울에서 핵심 계투진과 중심타자를 데려오는 등 상당히 공을 들이다 마침내 2002년에 이르러서야 이-마-양 트리오를 앞세워 숙원을 달성할 수 있었다. 비록 타팀 출신이긴 하나, 막힌 혈을 뚫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터라 팬들 입장에선 각별한 애정을 보이는 게 당연했다.[33] 사직 야구장은 구장의 크기는 큰 편이 아니지만 5미터 높이에 달하는 크고 아름다운 펜스를 갖고 있어서 라인드라이브성 타구는 거의 다 걸린다고 보면 된다.[34] 사실 본인의 나이로 인해 신체능력에 변화가 생긴 걸 선수 자체가 쉽게 인정하지 못 했던 케이스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데뷔 초부터 전성기까지 그리고 조짐이 있었다고는 해도 FA가 되던 2003년지만 해도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장타자로서의 뛰어난 시즌을 가능하게 했던 타격폼을 수정하는 거 자체가 본인에게 굉장히 큰 모험이다. 사실 에이징커브 이후의 낙폭 자체는 컸지만 그 에이징커브가 급속도로 드러난 나이 자체가 한국 나이로는 35세 만으로는 33세에 시작되는 시즌이라 아주 빠른 에이징커브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특별한 부상이 없었던 선수였던지라 납득이 안될 정도로 낙폭이 너무 급격했을 뿐이다.[35] 롯데는 자신의 연고/데뷔 팀이니 설명 생략. 삼성 라이온즈는 자신의 전성기를 보냈던 팀이고, 자기 커리어에서 유일하게 우승을 맛봤던 2002년 한국시리즈와의 큰 인연 때문인 듯.[36] 2019년 8월 14일 봉황대기 강릉고:세광고 경기를 중계하면서 강릉고 2학년 투수 김진욱에 대해 언급하면서 "삼성이 1차 지명을 놓고 고민하겠네요"라고 말했는데 강릉고가 삼성의 1차지명 연고 학교는 맞지만 김진욱은 수원북중을 졸업하고 타 지역인 강릉고에 진학했기 때문에 1차지명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롯데 자이언츠 2차 전체 1라운드 지명이 유력한 상황. 현재는 진짜 롯진욱이다...[37] 냉정히 말해서 독립리그에서 실적을 내기는 쉽지 않다. 이미 모종의 이유로 지명이 안 되거나 방출된 선수들이 주축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선수들의 기량이 낮을 수밖에 없기 때문.[38] 사실 저런 색상을 아래위로 입어서 워낙 튄거지 따로 입었다면 꽤 괜찮은 의상이다.[39] 정작 본인은 카페인에 예민한 체질이라 그 날 병살타 포함 4타수 무안타의 화려한 기록을 거두고 다음날까지 뜬눈으로 지샜다고 한다.[40] 이게 어디서 나오냐면 자기가 미국 진출 생각하고 영어 공부한 부분이다. 아래도 언급되지만, 마해영은 미국은 커녕 해외진출 근처에도 못 가봤지만, 부인은 얻었다. 그래서 마해영이 말하는 공부는 야구 관련 지식이라기 보다는 진짜 공부라는 느낌이 들게 된다.[41] 예를 들어 가까운 선후배간에 2군행을 놓고 간청하는 경우.[42] 이건 언급한 게 무책임했다는 것이 아니라, 언급한 방식이 무책임했다는 것이다. 야구 시스템과 그 감시체제에 대한 비판과 그에 대한 개선 필요를 주장했다면 몰라도, 실제로는 과거 일화 정도로 간단히 언급하고 지나간다. 분명히 내용은 폭발력이 있는데, 책 내의 비중이나 저자가 기울이는 관심은 정말로 가볍다. 책 판매용 노이즈 마케팅 소재로 끼워넣은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43] 2017년 2월 9일 백년손님에 방영된 바에 의하면 부인은 당시 일본어를 배우고 있었고 마해영은 영어를 배우고 있었는데 다짜고짜 마해영이 부인을 쫓아오더니 시간을 내달라고 했다는 것. 그 후 그가 했던 말은 "저 모르세요? 저 롯데 4번타자 마해영인데요?"(...)였다고 한다. 그러자 부인이 "이 사람 뭐야?"하고 상당히 당황을 했다. 부인이 그 당시만 해도 야구를 전혀 모르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당황했다고 한다. 얼마나 야구를 몰랐냐면... 지인에게 "왜 4번이야? 잘하는 사람이 1번타자 아니야?"라고 질문했을 정도.(...) 여튼 이차저차 잘 만나서 결혼을 하긴 했는데 부부싸움 과정이 매우 유아틱하다고(...) 한다.[44] 소수점 아래 네자리까지 0.3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