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노에 후미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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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본의 정치인 가문 · 정치인. 제34,38,39대 일본 내각총리대신을 지냈다. 파시즘 성향 정당인 대정익찬회의 당수를 지냈다. 고노에가(近衛家)의 30대 가주. 고노에가는 일본 귀족가이던 후지와라 씨족의 혈통을 잇는 5개 가문인 고셋케(五攝家)[2] 중 하나인 섭관가로, 이 5개 가문에서 돌아가며 일본의 태정대신과 관백을 배출해 온 그야말로 황실 다음으로 최고의 명문가 집안 출생이다. 그중에서도 고노에 가문이 장자 중 장자이기에, 후지와라 씨족 전체의 당주이기도 하다. 가문 내 문서에는 아직도 '후지와라노 후미마로'로 기록한다고 하니, 천황 다음가는 일본 최고혈통의 장자. 일본의 역대 총리들 중에서도 혈통상으로는 황족인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 다음으로 최고인 사람이다.
자손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은 후일 일본 총리가 되는 외손자 호소카와 모리히로와 호소카와 전 총리의 동생인 일본적십자사 총재 고노에 다다테루(近衛忠煇)[3][4] 등이다. 다다테루는 국제적십자연맹 총재이며, 히로히토 천황의 막내동생인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의 큰 사위이다. 부인 고노에 야스코와의 사이에서 고노에 다다히로(近衛忠大)라는 아들을 낳았다. 다다히로는 고준 황후의 큰오빠 구니 아사아키라(久邇朝融)의 손녀인 구니 게이코(久邇桂子)와 결혼, 3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 외 도쿠가와 가문과도 밀접하게 혈연이 닿아 있었다. 그의 어머니인 사와코(衍子)는 카가 번주였던 마에다 요시야스(前田慶寧)의 딸인데, 마에다 요시야스는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외손자가 된다. 마에다 요시야스의 외할머니는 오오쿠 관련 창작물에 자주 나오는 이에나리의 후궁 오미요노카타(お美代の方)이다. 즉, 고노에 후미마로는 도쿠가와 이에나리와 오미요의 4대손이 된다.
중일전쟁을 단순 국경분쟁이 아니라 사실상 전쟁수준으로 키운 핵심 인물이면서[5]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도조 히데키와 함께 태평양 전쟁을 주도했으며, 패전 이후 연합군에 의해 처벌당할 것이 유력해지자, 전범 재판 출두 직전 자살로 최후를 맞이했다.
2. 일생[편집]
2.1. 초기[편집]
도쿄에서 유서 깊은 공가의 고셋케 중 하나인 고노에가 저택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계 혈통상 고요제이 덴노의 12대손[8] 으로, 고요제이 덴노의 제4황자인 니노미야(二宮)가 외가인 고노에가로 입적되면서, 혈통이 시작되었다.[9] 어머니인 사와코[10] 는 일찍 사망했고, 이후 아버지 아츠마로는 고노에 후미마로의 이모이자 아내의 동생, 즉 처제와 재혼하였다. 그래서 후미마로는 이모인 계모 밑에서 자랐다. 오랫동안 이모이자 계모가 친모인 줄 알고 있었으나 장성해서 진실을 알게 되자 큰 충격을 받았고, 이것이 그의 인격 형성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아버지 아츠마로가 1904년 상당한 부채를 떠안기고 죽어버리자 고작 13살에 작위를 승계하고 고노에 가문의 가주가 된다. 아버지 아츠마로는 아시아주의와 대동아공영권의 기초가 되는 아시아 먼로주의를 주장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그런 아버지를 향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던 것으로 술회했지만 그는 총리를 재임하면서 아예 노구교 사건을 중일전쟁으로 키워버렸고, 다음 총리대에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다.
청장년 시기에 머리는 꽤나 좋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로 인해 같은 명문가 출신 정치가이자 자유주의 귀족이었던 사이온지 긴모치의 신임을 얻어, 어린 나이임에도 사이온지를 따라갈 수 있었다. 외국 조약체결식이나 파리 강화 회의에 전권차석대표인 마키노 노부아키 남작의 수행원으로 참가했다. 이때 윌슨의 평화주의는 '이미 전 세계를 다 해처먹은 구미열강이 일본의 생존권을 핍박하면서 일본에게 후배국가의 위치를 강요하는 도구'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면서 인종차별 철폐와 국제적 평등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이상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11] 구제 제1고등학교 졸업 후 진학한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중퇴하고 반수해서 교토제국대학 법학부로 학교를 옮겼으며, 도쿄제대 재학 중에는 마르크스 경제학을 이수하는 등, 젊어서는 좌익에 가까운 행보를 보인다.[12]
그 당시 고노에가 얼마나 자유주의적이었느냐 하면, 궁중 내에서 양성애자(!)로 소문이 퍼져나가고 있었고, 한때는 마르크스주의자로 알려지기도 했다. 복잡한 황실 격식을 거부했고, 나중에 천황이 되는 히로히토 황태자 앞에서 다리를 꼬거나 반말을 쓰는 등[13] 여러 궁중 예절에 어긋나는 행위로 귀족 원로들에게 비판받기도 했다. 그 외에도, 180cm가 넘는 장신에 준수한 외모, 깔끔하고 세련된 옷차림 등으로 당시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여기에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된 일본 대표단의 수행원으로 유럽을 다녀온 후 "일본은 답답하고 꽉 막힌 곳이라서 싫고 유럽 이민을 가고 싶다"고 떠들고 다녀서 일본 정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결국 본인도 사태가 커지자 일본인은 일본에 살아야 한다는 이유로 이민설을 무마했다.
2.2. 정치인 생활[편집]
오카다 내각 이후의 내각들이 삽질만 하다가 결국 흐지부지되자, 결국 1937년 6월에 사이온지의 추천으로 하야시 센쥬로의 후임 총리대신에 임명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이온지는 고노에에게 많은 기대를 하여, 많고 많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정치를 펼 거라고 믿었다.[14] 실제로도 고노에가 총리에 취임하고 취한 행동이 "정당인의 지혜를 모은다"는 취지를 내세워서 중간내각 시기에 폐지되었던 각 성청의 정무관을 부활시킨 것이었고, 이것이 해당 자리에 갈 만한 소장의원들의 마음을 잡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여, 이후 2번에 걸친 총리 취임에 큰 도움이 되었다.
2.3. 일본 총리 취임 이후[편집]
그러나 열정적으로 개혁을 외치던 고노에는 권력을 잡자마자 군부와 결탁하고, 목줄을 잡힌다. 처음 집권하자마자 한 짓이 2.26 사건을 일으킨 장교들을 석방조치하려는 시도였다. 사실 그 전부터 2.26 쿠데타를 일으켰던 황도파 장교들과 자주 교류하는 편이었는데, 총리가 되자마자 이들부터 풀어줘서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보하려고 했던 것. 당연히 사이온지가 경악하며 반대해 실천하지 못했다. 그리고 1달 후인 1937년 7월에 루거우차오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본인이 하고 싶어서 일으킨 건 아니긴 하지만 잘도 끌려갔다. 육군이 "2.26 사건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라고 협박하기만 하면 일단 맡기고 육군이 망치면 수습하자는 식으로 생각없이 대처했다니.
노구교 사건 처음, 고노에는 전쟁 확대론을 부정하며 수습하는 척 중국과 정전협상에 들어가면서 오히려 육군 사단을 증파해 전선으로 보내버렸다. 거기에 육군에서 주장한 국방 예산까지 올려줌으로써 육군의 삽질에 박차를 가했다. 게다가 그 정도로 끝이 아니다. 육군이 화북과 상하이에서 신나게 분탕을 치고 전쟁이 생각외로 확대되자 1937년 10월, 히로타 고키 외무대신을 통해 중화민국에 화평 교섭의 의사를 전달했으나 중화민국이 화북에 설치된 기찰정무위원회를 유지시킴으로 명목상의 주권을 존중해줄 것을 요구하자, 장제스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육군 장성들을 유약하다고 질타하며, "중국의 조건을 받아들이면 열강이 일본을 우습게 알 것"이라면서 전쟁의 브레이크를 박살내버렸다. 이를 본 육군 수뇌부는 내각과 군부의 입장이 바뀐 것 같다며 당황했다.
그걸 넘어 1938년 1월 16일, 1차 고노에 담화를 발표하여 "국민정부를 더 이상 상대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주중일본대사 가와고에 시게루를 소환해버렸으며, 1월 18일에는 "국민정부를 상대하지 않겠다는 담화의 내용은, 단순히 '무시한다'는 것이 아니라 '말살하겠다'는 것"이라는 보충설명까지 발표하면서 외교교섭의 가능성을 잘근잘근 밟아버렸다. 고노에의 이런 과격한 행보에 경악한 사이온지 긴모치는 여러 차례 고노에를 불러 질책하면서, "그딴 식으로 일할 것 같으면 총리를 그만 두라"고 까지 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고노에는 그런 사이온지를 '뒷방 늙은이' 취급하면서 그의 조언을 무시했고, 총리대신인 본인이 상황을 장악하고 있다고 믿었지만 실상은 군부에게 놀아나고 있었다.
고노에의 성품을 일찍 간파한 사람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역임한 유아사 구라헤이였다. 그는 고노에를 디스하며 후지산에 비겼다. "후지산을 멀리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서 보면 황량하기 그지없는 돌이 굴러다니는 황무지인데, 고노에 후미마로라는 사람의 성품이 딱 그러하다"고 말을 남겼다.
거기에 고노에는 전쟁의 확실한 전력 지원을 위한 군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국민학교령을 발표하고 국민 총동원령까지 통과시킨 후, "흥아원"[15] 문제로 1939년 돌연 사퇴한다. 그가 사퇴하고 나서의 내각은 하나같이 미친 군국주의자들로 점철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그의 후임 히라누마 기이치로는 지구상에서 유대인과 공산주의자 박멸을 외치고 다니는 진성 국수주의자인 데다가 사임한 이유도 걸작인데, 독소 불가침조약이 체결되어서. 세상이 미쳐돌아간다며 "구주천지 복잡괴기(歐洲天地 複雜怪奇)"[16] 라고 개탄했다. 이후 할힌골 전투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그나마 중간에 해군 출신의 요나이 미쓰마사[17] 총리가 어느 정도 개념있긴 했는데 군부, 정확히는 사이가 다른 나라 군대급이던 육군에서 지랄하는 바람에 반년만에 사임하는 안습한 사태도 있었다. 총리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후임 내각들의 정책 자문을 하면서 지내다가, 요나이 미쓰마사 총리가 육군 정책에 항의하다가 분노해서 사임하자 다시 총리직에 오른다.
제1차 고노에 내각 당시에는 여러 원로들과 특히 사이온지의 눈치를 보던 면이 있었으나, 원로들이 연로해 점점 죽어가고 특히 1차 내각 당시 팔팔했던 사이온지도 1940년 말 죽었기 때문에, 브레이크를 걸어 줄 대상이 사라진 고노에는 2차 내각에서 똘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게다가 2.26 사건에서 보았듯이, 이미 일본 군부 급진파들의 독단전행은 일본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곪아터지면서 발생한 것인데다가, 예전처럼 현실적인 막강한 원로들이 배후 합의를 하든 말든 알바 아니고 원로들도 간신으로 보고 죽이려 들면 그만이라서 사이온지가 아니라 야마가타가 살아있다 하더라도 개인에 불과한 원로들이 군부의 폭주를 저지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어쨌든 고노에는 다시 권력을 잡자 그는 군부의 힘으로 의회를 강제해산시켰고, 정당들을 폐지해 "대정익찬회"라는 일당독재체제를 수립, 스스로 익찬회 당수에 올라 독재체제를 완성했다. 독-이-일 추축국 삼국동맹을 체결했고, "신질서 운동"을 선전하고 다녔는데, 흔히 아는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충격과 공포의 단어가 이 시기에 탄생했다. 이때 "삼국동맹을 지켜야 하니 소련을 공격해야 한다."라고 주장해대는 일본 육군과 "자원 확보를 위해서 남방으로 진출해야 한다."라는 일본 해군이 다투기 시작했다.
한편 미국은 일본이 인도차이나를 침공하고 점령하는데 성공하자 석유수출을 금지시켰다. 이에 1941년 8월 8일 도요다 외무상이 미국외무성에 교신을 보내 미국에게 1. 미국과 교역재개 2. 필리핀 방어 중단 3. 중국, 영국,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에 무기수출 금지 4. 인도차이나에서 일본의 우월한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지위를 영구적으로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반대로 일본은 1. 인도차이나 이남에 진출을 포기하고 2. 태평양에서 평화가 확립되면 인도차이나에서 철군을 하겠다고 했다. 미국은 이 현실성 없는 요구안을 거절했고, 일본이 인도차이나에서 더 내려와서 영국 식민지와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에 침공을 하면 군사력을 동원해 박살을 내겠다고 경고했다.
이에 도조 히데키와 군부가 "미국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구장창 주장해대는 가운데에서도, 고노에는 대미전쟁 반대 입장은 고수하면서 정작 군부를 제어하지는 않고, 거기에 미국 성질을 돋을만한 군사적 도발 조치들을 승인하고 전쟁까지 각오하는 국방방침을 통과시키는 등 대체 원하는게 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만 잔뜩 만들면서 악화시켰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노에는 개인적으로 태평양 전쟁에 반대했을지언정 개전의 책임을 아주 무겁게 질 수밖에 없다. 이미 중화민국과 전선을 형성하는 바람에 미국과 영국과의 관계는 파탄이 났고, 거기에 인도차이나 침공을 하면 미국의 주권(필리핀)과 영국의 주권(말레이시아)이 침해당해 반드시 개입을 한다는걸 알면서도 남방의 이권에 눈이 어두워 침공을 했는데. 미국은 7월에 영국과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인도네시아)와 함께 석유수출금지를 포함한 대(對)일본 수출수입 금지령과 일본의 해외재산 동결령을 내리게 된다. 이렇게 되니 일본 석유 수입의 90%가 날라가버려 경제와 사회전체가 난리가 났고 개전파와 미국의 등쌀에 시달리다가 총리질 못해먹겠다고 도망치듯이 사임해서 천황 히로히토까지 당혹케 만들었다.
총리 퇴임 후 처음 전황이 유리할 적에는 죽은 듯이 지내다가, 미드웨이 해전 이후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반전주의자로 변신한다. 고노에는 공개적으로 전황에 대해 비웃으면서 이래서 내가 대미 개전을 반대했다! 라고 으스댔고 이 때문에 군부의 미움을 사서 비국민 소리까지 듣게 된다. 1944년에 도조가 사이판 전투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자 도조의 사퇴에 반대했다. 근데 그 이유가 참으로 걸작인게 후임 총리가 무슨 죄가 있냐? 어차피 진 전쟁인데 도조놈이 끝까지 총리하다가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처형당하게 냅두자(...)[18] 이 당시 군부를 중심으로 소련과 교섭하여 중재평화의 형식으로 종전을 하려는 공작이 있었는데, 여기에 맞서 당시 반전운동을 펼치고 있었던 요시다 시게루와 결탁해 미국, 영국과의 평화협상을 하려고 했고, 천황에게는 "소련은 믿을 수 없으니, 공산주의자들이 난리를 일으키기 전에 당장 서방에 무조건 항복해야 한다"며 서한을 보낸 것이 1945년 초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소련과의 중재평화에 대한 기대와 결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히로히토가 시종장을 보내어 "나대지 마라."라고 전하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결전이 어렵다는 결론이 나온 것은 1945년 스즈키 간타로의 총리 취임 이후의 일인데, 이때 무슨 장난이었는 줄은 모르겠으나 소련의 중재에 반대하던 고노에 후미마로가 모스크바 특사로 임명되는 아이러니한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 거론되었던 협상 조건은 일본의 모든 식민지 한반도, 중국, 필리핀, 인도차이나 반도, 오가사와라 제도, 가라후토, 쿠릴 열도, 홋카이도, 류큐 등의 영토들을 포기하고 소련에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 일본군 장병들을 보내는 등이었다. 그러나 이미 다 이긴 전쟁을 굳이 포기할 이유가 없었던 소련은 고노에가 소련에 못 들어오게 막아버렸고, 붉은 군대는 만주 작전을 발동한다. 이 과정에서 만주에 있던 고노에의 장남 고노에 후미타카 중위는 포로가 된다.[19]
2.4. 패전과 자살[편집]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 2개가 떨어지고 난 후에 항복을 결정하고 옥음방송으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직후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이 총리로 취임한 뒤 만든 내각에서는 부총리 겸 국무대신으로 입각했지만, GHQ가 일본에 들어오고 내각 자체가 유명무실해지자 요시다 시게루 등 종전 공작으로 친해진 인사들을 정계로 진출시켜 영향력을 유지했다. 연합국 쪽에 제대로 전범으로 찍혔음을 자각했는지, 형벌을 면하기 위해 잡지에 군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기고를 하기도 했다.
1945년 10월 4일에 고노에는 맥아더를 만나서 "천황과 그 주변사람들이나 일본의 귀족세력, 일본의 재벌들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고 변명하거나, "전쟁을 막으려고 했던 사람들을 제거한다면 일본은 공산화될 거에요"라며 살아보려는 발버둥을 쳐보았다.
초기에 맥아더는 반공 자유주의자처럼 그럴듯하게 행세한 고노에에게 호감을 느껴 일본국 헌법을 개정하는 일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일본의 언론과 몇몇 정치인들은 고노에가 결과적으로는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는 책임에 대한 문제를 강하게 제기했고, 결국 1945년 말 사이토 타카오(斎藤隆夫)[20] 의 연설이 고노에의 몰락을 가져오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전쟁 책임의 문제에서, 본인의 의견으로는 도조와 고노에 이 양자에게 책임이 있다고 본다. 지나사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번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태평양 전쟁의 책임이 도조 대장에게 있다면, 지나사변의 책임은 고노에 공에게 있다. 무력한 왕징웨이를 내세운 일, 삼국동맹을 맺은 일, 이런 것들은 미국과 영국에 대한 도발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일미회담은 왜 이루지 못했는가. 도조 대장은 전범이 되었지만, 고노에 공은 아직도 궁중과 엮이고 있다. 이건 국민의 사상에 악영향을 준다. 이걸 방치하는 건 왜인가?"
사이토 타카오, 1945년 말, 국회에서.
이 연설이 고노에의 정치적 생명을 끝장냈다.
이 때문에 더글러스 맥아더와 GHQ는 고노에 후미마로가 일본의 새로운 헌법을 개정하는 일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막아버렸고, 고노에 후미마로의 전범 혐의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결국 고노에 후미마로의 살아보려는 발버둥은 모조리 실패하고, 1945년 12월 9일 고노에 후미마로의 체포 영장이 발부된다. 고노에는 GHQ로부터 12월 16일 스가모 형무소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고노에는 쇼와 덴노가 자신을 변호해주길 바랐지만, 천황은 그렇게 해줄 마음이 없었다. 고노에가 자살하기 하루 전, 고노에는 쇼와 덴노&고준 황후 부부와 식사를 하길 원했지만 천황 부부는 고노에의 요청을 거절했다. 고위 귀족 출신, 그것도 오섭가인 고노에는 언제든지 천황을 접견할 권한이 있었으나, 그걸 거부당했다는 것부터가 버림받았다는 증거다. 사실 전범 여부를 떠나서 히로히토의 개인적인 입장에서도 일전에 고노에가 자신에게 저지른 무례한 언사 덕에 정나미가 떨어졌을테니.
결국 고노에는 1945년 12월 16일, 스가모 형무소 출두 당일 새벽에 청산가리를 마시고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54세였다. 자살하기 전날 고노에는 독일에서 돌아온 이복동생 히데마로와 친구 고토 류노스케(後藤隆之介) 등을 초대해 마지막 식사를 함께했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차남 고노에 미치타카(近衛通隆)에게 유서를 남겼다.[21][22]
나는 지나사변(중일전쟁) 이래로 많은 정치적 과오를 저질렀다. 이에 대해 깊은 책임을 느끼지만, 이른바 전쟁범죄인으로서 미국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다. 특히 나는 지나사변에 책임을 느껴 이 사변의 해결을 최대 과제로 삼았다. 그리고 이 해결의 유일한 길은 미국과의 양해에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일미 교섭에 전력을 다했던 것이다. 그런 미국으로부터 이제 범죄인으로 지명받게 되니 참으로 유감스럽다. 나의 뜻을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미국에도 나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전쟁에 동반된 흥분과 격정과 승자의 지나친 행동과 조장, 패배한 자의 고도의 굴욕과 고의의 중상과 오해에 기초한 유언비어들, 이런 것들이 섞여 있는 여론, 이 모든 것이 언젠가는 냉정을 되찾아 정상으로 돌아올 날이 있을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신의 법정에서 정의의 판결이 내려질 것이다.
3달 앞서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하여 스가모 형무소에 갇혀 있던 도조 히데키는 고노에의 죽음에 "그 심정을 이해한다. 깔끔하게 죽은 그가 부럽다."는 말을 남겼다.
그의 시체를 조사하기 위해, 미 제1기병사단 소속 대위가 시체를 살피면서 검시를 하고 있다.
결국 그는 일본 총리 중에서 2번째로 젊은 나이에 총리가 되어, 가장 단명한 총리(54세)이자, 유일하게 자살로 생을 마감한 총리가 되었다. 1945년 12월 21일에 장례가 치뤄졌고 교토 다이도쿠지(大德寺)의 고노에 가문 묘역에 묻혔다. 고노에는 귀족 출신인 모리 치요코와 결혼해서 2남 2녀를 낳았는데, 차녀가 호소카와 가문에 시집을 가서 낳은 외손자 두 명 중 장남은 훗날 제79대 일본 총리가 되는 호소카와 모리히로이다.
3. 기타[편집]
- 고노에 후미마로는 하인과 하녀를 매우 많이 보유했다.
- 키가 무려 180cm 이상으로 추축국 지도자 중 최장신이다.
- 일본 최초의 연임 총리다. 그간 일본제국에서는 중도 사임했다가 다시 총리가 되는 일은 많았지만 연속으로 대수를 이어간 총리는 전무했다. 전후 요시다 시게루가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하게 4연임 총리의 기록을 세웠다.
- 개전 직후 "우리 집 뒤에 있는 우물에서 휘발유가 나오던데?"라는 터무니없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냥 한 말인데 이걸 군부에서는 진지하게 받아들여, 물에서 휘발유를 뽑아낸다는 터무니없는 연구를 한 적이 있다.
- 몇몇 사람들은 고노에가 태평양 전쟁 전후(前後)로 미국과의 교섭에 공을 들인 것을 들어 동정어린 평가를 내린다. 그러나 사이온지 긴모치를 비롯해 대내의 신망을 저버린 것과 자신이 일으킨 행동의 여파를 생각하지 않은 무책임한 행동을 놓고 보면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입장이다.
- 고노에 후미마로의 사후 가문의 가주는 원칙대로라면 장남 고노에 후미타카가 되어야 하나 그는 후미마로가 죽을 당시에 소련이 만주 진공때 포로로 잡혀버린 상태[24] 였으며 차남 미치타카는 이복동생 히데마로의 양자[25] 가 되었고 장녀인 고노에 아키코는 고준 황후의 외가인 시마즈 공작가문에 시집을 가서 2남 1녀를 낳고 잘 사는 듯 했으나 1945년 시마즈 가문에 자주 들락거리던 안마사 노구치와 눈 맞아서 자녀들을 놔두고 도망치는 대사건(...)을 일으켜 고노에가의 이름에 먹칠한 탓에[26] , 결국 차녀 고노에 아쓰코가 호소카와 가문에 시집가서 낳은 차남 호소카와 모리테루(고노에 다다테루)를 고노에 후미타카의 사후양자로 들이는 식으로 고노에 가문을 이었다.[27]
4. 매체[편집]
- 2008년, TBS에서 1부 다큐멘터리와 2부 드라마로 구성된 2부작 특집극 '그 전쟁은 무엇이었는가 일미개전과 도조 히데키'(あの戦争は何だったのか 日米開戦と東条英機)에 등장한다. 배우는 야마구치 유이치로.[28] 육군대신이자 개전파인 도조는 빨리 개전 하라며 고노에 총리를 압박하고 있었고, 이에 고노에 내각은 버티지 못하고 총사퇴를 해버린다.
- 영화 도라 도라 도라의 초반부에서 등장한다. 수상관저에서 도조 히데키 총리, 마츠오카 요스케 외무대신과 대미 개전을 할 것인지를 두고 이야기를 나눈다.
-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여학생에도 이름이 등장하는데, 거기서는 신문에 실린 사진을 본 주인공이 "이마가 이상하게 생겨서 호감 안 가는 얼굴이다."라고 깐다.
- 2014년작 영화 엠페러(Emperor)[29] 의 초반부에서 더글라스 맥아더의 부관 펠러스 준장을 만나 히로히토 천황의 전쟁 책임에 대해 추궁받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나름 카리스마있게 연합국도 식민지를 경영하기 위해 침략 전쟁을 하지 않았느냐고 항변하지만, 전반적으로 일본측 인물들을 미화한 영화 특성상 실제 고노에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는 편.
- 영화 스파이의 아내에서 고노에가 삼국 동맹 조약 체결을 알리는 라디오 뉴스가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