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다 요시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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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구치 가즈오
도리이 가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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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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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지마 마사유키
도리이 가즈오
우스이 히데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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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제도 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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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대
다나카 쇼이치

제42-49대
노다 요시히코


현직




일본국 제95대 내각총리대신
노다 요시히코
野田佳彦 | Noda Yoshihiko

파일:野田佳彦.jpg
출생
1957년 5월 20일 (66세)
치바현 후나바시시
현직
제49대 중의원 의원
입헌민주당 최고 고문
재임기간
제95대 내각총리대신
2011년 9월 2일 - 2012년 12월 26일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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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
남동생 노다 다케히코
배우자
노다 히로미
자녀
2남
신장
173cm
학력
후나바시 시립 야크엥다이 소학교 (졸업)
후나바시 시립 니노미야 중학교 (졸업)
치바 현립 후나바시 고등학교 (졸업)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 (정치학 / 학사)
정당

파벌
화제회 (회장)
지역구
(구) 치바 1구치바 4구
의원 선수
9 (중)
의원 대수
40, 42, 43, 44, 45, 46, 47, 48, 49
약력
치바현의회 의원
중의원 의원
제10대 정부세제조사회 회장
민주당 국회대책위원장
제14대 재무대신
제9대 민주당 대표
제95대 내각총리대신
제2대 민진당 간사장

1. 개요
2. 생애
2.1. 민주당 입당 전
2.2. 입당 후 총리 취임까지
2.2.1. 민주당 정권 시기
2.3. 총리 취임 이후
2.3.1. 2011년
2.3.2. 2012년
2.4. 부활 시도와 실패
2.5. 이후
3. 정치적 성향
4. 소속 정당
5. 선거 이력
6. 여담
7. 저서
8.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일본정치인. 민주당 시절 당내 가장 소수 계파(파벌)인 화제회(花斉会)를 이끌었다.[1] 하지만 당내 오자와파와 反오자와파가 다투는 과정에서, 다른 파벌인 중도우파 파벌 료운카이의 리더 마에하라 세이지의 지지로 총리가 되어 95대 내각총리대신으로 1년 4개월 동안 재임했다.


2. 생애[편집]



2.1. 민주당 입당 전[편집]


1957년 치바현 후나바시시에서 자위대 장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는 일본의 명 저널리스트 다치바나 다카시[2]를 동경해서 그와 같은 저널리스트가 되는 것을 꿈꾸었다고 한다.

이후 와세다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설립한 마츠시타 정경숙(松下政経塾)의 1기생으로 합격했다. 마쓰시타 정경숙에서 후일의 정치인들을 여럿 만났는데 그들 중에는 정경숙의 평의원 출신인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라든지, 민주당 대표 자리를 놓고 경쟁한 마에하라 세이지 등이 있다.

마츠시타 정경숙을 졸업한 이후 한동안 가정교사도시가스 검침원 같은 일을 하다가 1987년 29살의 나이에 지바현 의회의 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현의회 의원을 두번 역임한다.

1992년, 같은 마츠시타 정경숙 출신이자 당시 구마모토현 지사였던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일본신당을 창당하자 고이케 유리코, 다루토코 신지 등과 함께 거기에 참여했고 1993년 일본신당 후보로 중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다. 이 선거에서 자민당은 과반이 붕괴된 반면 일본신당, 신생당, 신당 사키가케 등이 연합하여 비자민 연립정권을 수립했다. 또한 이 선거에서 정경숙 출신이 대거 정계에 진출했는데 현재 자민당인 다카이치 사나에, 이토 다쓰야 등도 있다.

그러나 비자민 연립정권은 국민복지세 신설이 좌절되고 사가와 규빈 사건으로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비리 의혹을 받으면서 결국 1994년 4월에 사임하고 만다. 이후 하타 츠토무가 총리직을 이어받았으나 일본사회당이 연립정권을 이탈하면서 결국 소수 여당으로 전락해 비자민 연립정권은 10개월 만에 붕괴되고 만다. 노다는 1994년 말에 일본신당을 탈당해 신진당 설립에 참여했다.

소선거구와 비례대표 중복출마가 허용된 1996년 중의원 선거에서 신진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자민당 후보에게 밀려 낙마하고 만다. 이때 신진당이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비례대표 중복출마를 불허한 탓에 결국 원내 입성에 실패했고 결국 신진당을 탈당해 민주당에 입당했다.


2.2. 입당 후 총리 취임까지[편집]


정치인으로서의 커리어는 민주당에서 본격적으로 쌓기 시작했는데 2000년 중의원 선거에서 치바현 제4구에서 당선되어 다시 4년 만에 원내복귀에 성공했다. 그해에 민주당 총무국장에 임명되었고 이듬해인 2001년에는 민주당의 그림자 내각에서 행정개혁 및 규제개혁 담당 장관에 내정되었다.

2002년 민주당의 대표선거에서는 하토야마 유키오간 나오토[3]의 2명이 주거니 받거니 하던 대표체제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비주류가 연합해 반하토야마 후보를 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신진급 의원들과 중견급 의원들 사이에 후보선정을 두고 난항을 겪은 끝에 노다가 후보로 출마하는 걸로 정리되었다. 비록 대표선거에서 노다는 하토야마에게 밀려서 고배를 마셨지만 위협적인 하토야마 대항마로 인지도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 때문인지 하토야마는 노다를 끌어안는 차원에서 노다에게 정책조사회의 회장직을 제안했지만, 노다는 하토야마가 자신을 지지하며 대표 선거에서 사퇴한 나카노 칸세이[4]를 당 간사장에 임명하자 이를 논공행상이라고 항의하며 정책조사회 회장직을 고사했다. 이로 인해 당내에서 논란이 일었고 이 일로 인해 하토야마는 결국 3달 만에 대표직을 사임하게 되었다.

2002년 12월에 민주당 국회대책위원장이 되어 이듬해 2003년 11월까지 재임했고 2004년에는 민주당의 그림자 내각에서 재무대신에 지명되었다. 그러나 2005년 중의원 선거에서는 자민당의 막강한 상대 후보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911표차의 박빙으로 겨우 의원직을 수성했다. 게다가 노다 외에는 치바현 지역구에서 당선된 민주당 후보가 없었을 정도였다.

2005년 고이즈미 준이치로의회 해산(우정 해산) 후 실시한 중의원 선거는 민주당의 패배로 끝나 이에 책임을 지고 오카다 가쓰야 대표가 사임한후 마에하라 세이지가 후임 대표로 선임되었다. 마에하라는 노다에게 국회대책위원장을 다시 맡겼다. 그러나 2006년 2월 민주당 내에서 일어난 소위 호리에 메일 사건이 파장을 일으키면서 이 사건의 장본인인 나가타 히사야스를 옹호한 노다는 책임을 지고 위원장에서 사퇴하게 된다. 이 일에 대해 후에 노다는 "일반 기업도 갖춘 위기관리능력과 통치능력이 부재한 것"이 사건의 원인이었다고 회고했다. 한편으로 노다 계파에 속했던 마부치 스미오에 의하면 카쿠라자카에서 위원장을 사임한 노다와 술자리를 가졌을 때 "여러 일이 있었지만 그건 다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지"라고 말해 뭔가 말 못 할 사연이 있음을 암시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2008년 민주당 대표 선거에 출마했을 때는 당내의 부정적 여론으로 추천인 20명의 확보도 실패해서 결국 대표 선거 출마를 포기해야 했다. 이 사건으로 노다의 계파는 와해직전까지 갔고 마부치 스미오는 노다의 계파에서 떨어져 나가는 등의 위기를 겪게 된다.

2009년, 오자와 이치로가 정치자금 문제로 사임하면서 열린 대표 보궐선거에서 노다는 오카다 가츠야를 지원했지만 오카다는 하토야마에게 밀려 선거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하토야마가 오카다를 당 간사장에 임명하면서 오카다의 주장으로 노다는 간사장 대리가 되면서 당 대표부에 입성했고 잃었던 세력을 회복하는 계기가 된다.


2.2.1. 민주당 정권 시기[편집]


그해에 열린 중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압승을 거두면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고 하토야마 내각이 출범한 가운데 노다에 대해서는 원래 방위대신직이 검토되었으나 노다가 자신의 저서에서 집단적 자위권을 찬성하고 나서는 보수적인 사상 때문에 연립에 참여한 사민당과의 갈등을 우려한 당내에서 방위대신직 임명을 철회했다. 그 대신 노다의 국가재정에 대한 능력을 높이 평가한 후지이 히로히사 재무대신의 주장으로 재무부대신에 취임하게 된다.

2010년 1월에 후지이가 건강상의 이유로 재무대신을 사임하려 하면서 후임으로 노다가 거론되었지만 간 나오토 국가전략담당대신이 옮기는걸로 결론이 나면서 재무부대신을 그대로 유임한다.

2010년 6월, 하토야마 총리가 사임하면서 후임 총리로 간 나오토가 취임했다. 간 총리는 부대신이던 노다를 승격시키는 형식으로 재무대신으로 임명했는데 재무 부대신이 재무대신으로 승격되는 일은 이례적이라고 한다.

재무대신으로서 엔고에 대해서 환율 방어에 나선 것이 대표적인 현안으로 꼽히는데 2010년 9월 8일에 "필요하다면 개입을 하겠다"라고 밝혔고 이후 2010년 9월 15일에 일본 중앙은행이 엔을 팔고 달러를 매수해서 환율을 내렸다.

이후 간 총리가 개각을 단행하면서 내각관방장관 임명을 검토했지만 노다 본인의 의지로 재무대신에 유임되었다.

2011년 6월, 간 총리가 재난을 수습하는 대로 퇴진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하면서 차기 총리를 둘러싼 각 계파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간 총리는 내가 물러나더라도 오자와 쪽에 총리를 내줄 수는 없다라는 판단으로 자신의 측근인 센고쿠 요시토 내각관방장관과 오카다 가쓰야 간사장을 중심으로 노다를 밀면서 대표 선거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노다는 비록 반 오자와의 선두에 서있기는 했지만 오자와 쪽을 포용하려는 뜻에서 "탈 오자와 노선은 재검토가 필요하다"라는 입장을 피력하기도 했지만 결국 오자와 쪽에서는 가이에다 반리 경제산업대신을 후보로 내세웠다.

한편으로 노다가 증세를 통한 재정난 해소를 주장하면서 국민적인 지지를 얻지 못할 것을 우려한 반 오자와 측의 일부에서 마에하라 전 외무대신을 내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폈고 국민적 지지가 높은 마에하라가 결국 대표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당초 차기 총리감으로는 마에하라가 높은 국민적 지지율을 바탕으로 유력하게 점쳐졌으나 재외국민 정치후원금 문제등으로 당내에서 신망을 잃은 마에하라는 결국 대표선거에서 가이에다, 노다에 이은 3위로 밀려났고 과반 득표 후보가 없어 2차 결선투표가 치러진 끝에 반 오자와 후보들이 노다에게 모두 표를 밀어주면서 가이에다를 역전하고 민주당 대표에 당선되었다. 여당 대표선거에서 결선투표를 거쳐 역전으로 승리를 거둔 예는 1956년 총리가 된 이시바시 단잔 이후 55년 만이며 민주당에서는 최초로 있는 일이라고 한다.

2011년 8월 30일, 중참 양원에서 열린 내각총리대신 지명투표에서 제95대 일본 총리가 되었다.


2.3. 총리 취임 이후[편집]



2.3.1. 2011년[편집]


파일:external/www.kantei.go.jp/souri95.jpg
제95대 총리 취임
일단 일본 국민들은 노다에게 우호적인 분위기였다. 일본 언론들의 내각 지지율 조사에서 60%대의 높은 지지율을 보였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의 조사로는 67%, 요미우리 신문 65%, 교도통신 62%, 마이니치 신문 56%, 아사히 신문 52% 순. 묘하게 보수성향으로 분류되는 언론들에서 60% 중반을 넘긴데 비해 진보성향으로 분류되는 언론들에서는 50%대이긴 하지만, 여하간 절반은 넘는다.

노다는 8월 29일 연설에서 아이다 미쓰오(相田みつお)[5]의 작품 '미꾸라지'를 인용하여 "미꾸라지처럼 일하겠다"라고 자신을 미꾸라지로 비유하였다. 이런 모습에 한때 '노다표 미꾸지라지 과자' 등이 출시되는 등 미꾸라지 관련 상품이 인기를 얻은 적이 있었다. 이른바 '미꾸라지(どじょう) 정치'라고 불렸다.

이런 높은 지지율은 노다의 서민적인 배경과 무관하지 않아보인다. 사실 지바현의 자위대 장교의 아들이라는 출신성분으로 볼 때 정치와 무관한 평범한 집안출신이라는 게 일본 국민들에게는 친근함으로 다가오는 것으로 보인다.[6] 총리 취임 이후에도 낮은 자세의 행보를 보이는데 재무장관 시절부터 이용하던 도라노몬의 이발소인 QB하우스에서 (10분당) 천 엔짜리 이발을 하고[7] 자민당, 공명당 대표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90도로 고개를 숙여서 인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외국인 정치헌금 문제가 또 터졌다. 마에하라 세이지 전 외무장관이 이 문제로 낙마한 마당에 노다도 재일 한국인 2명에게 30만 엔의 정치헌금을 받았다라고 보도된것. 물론 처벌 시효인 3년은 이미 지났지만 도덕적인 문제는 피할 수 없었다.

내각 구성에 있어서는 반 오자와 세력의 결집으로 당선되었음에도 오자와 계파를 끌어안는 행보를 보여주었다. 다만 외무대신으로 임명된 겐바 고이치로가 외교의 외자도 모르는 생 초짜로 알려져서 논란이 되고 있다. 간 나오토 내각에서 이토 히로부미 고손자인 마쓰모토 다케아키 외무대신도 한국과 마찰을 빚었는데, 겐바는 간 총리가 경술국치 100주년 담화에서 한국에 사과하자, "한국이 배상문제를 다시 들고 나올 수 있다"면서 신중론을 편 인물이기도 하다.

한국 외교부가 일본에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을 제안했지만 한큐에 거절했다.

'일본판 한미 FTA'인 TPP 협상에 참여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국론이 갈라지고 있다. 주간지들은 TPP에 관해서 우려를 표명했다.

수요집회 1,000회를 맞이해서 세운 위안부 평화비에 대해서 이명박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철거해달라고 공식 요청했다고 알려졌다. 위안부 문제의 직접 해결을 강조한 이명박 대통령과는 달리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지혜를 모으겠다는 식의 두루뭉술한 태도로 일관했다.

오키나와를 방문해서 후텐마 기지 존속에 주민들의 양해를 구했지만 오키나와 지사는 총리 앞에서 대놓고 다른 데 알아보라라고 말을 들었을 정도다. 오키나와 주민들의 미군 기지에 대한 분노만 확인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는 증세를 위해 소비세 인상안을 밀어붙였지만 민주당 내에서 반발이 심각한 상황이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와 오자와 이치로 전 대표 등은 2009년 총선 공약에 위배된다면서 소비세 인상안을 반대하고 있는 상황이다.


2.3.2. 2012년[편집]


당내 최대계파인 오자와 파와 하토야마 파가 반대하는 이상 소비세 인상안이 제출되어도 통과가 불투명하게 되자 노다는 자민당의 다니가키 사다카즈 총재와 은밀히 회동해 정계개편을 논의했다는 소식이 일본 언론들을 도배하고 있다. 일본 언론들에 의하면 2012년 1월 25일에 노다 총리와 다니가키 총재가 은밀히 도쿄 모처 호텔에서 한 시간여 동안 회동을 가졌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노다 총리가 자민당과 연립정권을 추진할 것이라고 분석했으나 무산됐다.

지지부진한 대지진 복구와 풀리지 않는 정국 및 경제위기 등으로 초기의 높았던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했고, 민주당 지지율도 자민당의 22%대에 뒤쳐지는 중이었다.

오자와가 무죄 판결을 받기는 했으나 그의 이미지가 워낙 좋지않은 탓에 오자와가 마지막으로 기대하고 있는 이시하라 신타로-하시모토 토오루와의 연대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8] 이시하라는 "오자와와의 연대는 죽어도 싫다"라면서 거부 입장을 분명히 했다. 결국 오자와와 노다의 소비세 증세안을 위한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고 노다 총리는 자민당에게 살을 많이 떼어주더라도 소비세 증세안을 통과시킬 의지를 분명히 했다.

결국 6월 4일, 자민당과의 연대를 위해 내각 중 5명의 국무대신들을 교체하는 부분 개각을 단행했다. 참의원에서 문책 결의안이 통과된 마에다 타케시 국토교통대신과 다나카 나오키 방위대신이 경질되었고 그 외에 법무대신, 농림수산대신, 우정민영화-금융담당대신도 교체되었다. 후임 대신들은 다키 마코토 법무부대신이 법무대신으로 승격 발탁되었고 군지 아키라 전 농림수산부대신이 농림수산대신으로, 하타 유이치로 참의원 국회대책위원장이 국토교통대신으로, 국민신당 의원인 마츠시타 타다히로가 우정민영화-금융담당대신으로 내정되었다.[9] 파격적인 인선은 방위대신으로 일본 헌정사상 최초로 정치인이 아닌 민간 학자인 모리모토 사토시 교수가 임명되었다. 모리모토의 방위대신 임명은 이전 방위대신들이 군사관련 지식이 부족해서 말아먹은 사태를 참작해서 군사전문가인 민간인을 선임한 것이라고 밝혔는데 야당에서는 정치인이 아닌 민간인이 과연 얼마나 정치적 책임을 질수 있겠느냐라고 의문을 표하는 상황이다. 어쨌든 이 개각으로 내각 지지율은 소폭 상승했다.

6월 21일, 일본 국회에서 32년 만에 원자력 기본법이 개정되었는데 문구 하나가 논란이 되고 있다. 개정된 조항에는 "원자력 이용의 안전 확보는 국민의 생명과 건강 및 재산의 보호, 환경보전과 함께 우리나라의 안전보장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되어있는데 안전보장(바로 말해 안보)이라는 문구가 논란이 일었다. 원자력 이용 목적 중에 안전보장이 있다는 것을 첨가함으로써 일본의 안전을 위해서 핵무장을 할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게 아니냐는 비판이 일었다. 이 문구는 당초 각료회의에서 법안을 통과시킬 때는 빠져있다가 자민당이 요구하여 문구를 추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비판이 쏟아지자 관방장관이 나서서 안전보장은 핵무장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핵확산을 막겠다는 의미라고 해명에 나섰고 법안 수정을 주도한 자민당 측에서도 군사목적의 핵이용이 아니라고 물러선 상황이다. 그러나 일각에선 이런 상황 자체가 노다 내각이 소비세 증세를 위해 자민당에게 끌려다니는 결과로 나타나는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결국 6월 26일, 소비세 인상안에 대한 중의원 표결에서 찬성 363, 반대 96의 압도적 차이로 소비세 인상안이 통과되었다. 반대표를 던진 측은 오자와와 하토야마의 계파 쪽 의원들인 걸로 알려졌다. 일본 언론은 노다의 뚝심이 이루어낸 결과라고 분석했다.

결국 오자와 그룹의 중의원, 일본 참의원 52명이 반 증세신당을 창당하겠다면서 민주당에 탈당계를 제출했다. 일본 정계의 지각변동이 시작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하지만 생각보다는 소수였고, 국민 생활이 제일은 일본 극우들에게 신나게 조롱 받았다.

이런 가운데 노다 총리 직할의 위원회에서 "집단 자위권 행사가 필요하다"라는 결론을 내려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노다 총리도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 재해석만으로 집단 자위권 행사가 가능하다는 입장을 표명한 상황에 직면했다.

거기에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가 센카쿠 열도를 매입하겠다면서 모금활동을 벌이자 여기에 호응해 센카쿠 열도의 국유화를 추진하겠다고 밝혀서 중국이 반발했다. 일련의 이런 행보들은 일본 내의 어지러운 상황을 군사대국화 떡밥으로 풀려는 속셈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의원 해산이 임박한 만큼 군사대국 일본 떡밥을 통해 보수 성향의 유권자들을 끌어들이려는 속내가 있는 걸로 여겨진다.

이런 가운데 한일관계 또한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6월 중순에 2012 여수 엑스포독도 영유권 문제와 동해 표기에 일본의 입장과는 다르다는 이유로 정부관료 보이콧을 선언해 논란이 시작되더니, 기어이는 6월 말 한일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이 한국의 국내 여론 반발로 취소되으며, 8월에는 일본이 방위백서에 독도 영유권을 명시하는 수준에 이르렀고, 그리고 바로 이틀 뒤에는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은 그야말로 분노가 절정에 달했다. 노다는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다만 이 수준은 과거 대응들에 비하면 그렇게 심각한 수준은 아닌 "매뉴얼"의 수준이었다.

그런데 광복절(일본의 종전기념일)을 맞아 이명박 대통령이 "일왕이 한국을 방문하려면 진솔한 사과를 해야한다"라고 민감한 천황 문제를 또 건드리자 기어이 문제가 커졌다. 이제는 관방장관이 "한일 통화 스와프를 재검토하겠다"라는 발언까지 터져나온 상황이었다. 관방장관이 통화 스와프 재검토 운운할수 없는 위치라는 것을 감안하면 결국 이는 노다 총리의 의중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다만 한국이나 일본이나 실제적으로 통화 스와프 중단은 쉽지 않고, 도리어 한중일 스와프 체제에서 일본이 이탈되는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실현 가능성은 낮았다.

이리되자 이명박 대통령은 "노다 내각하고는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라면서 대화 단절을 선언하고야 말았다. 사실상 한국의 새 대통령과 일본의 새 내각이 들어선 이후에도 상당한 냉각기가 필요할 것으로 보여졌다.

다만 노다 내각 자체는 지지 기반이 취약한 상황에서 이런 태도가 불가피했다는 점은 분명하다.[10] 어쩌면 이런 논란 속에 노다 내각은 몇 달이나마 수명 연장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시 8월에 센카쿠 열도중국인(홍콩인) 국수주의자들이 상륙을 감행해 허무하게 성공해버렸으니 그야말로 내우외환이다. 이때 센카쿠 열도를 일본땅이라고 천명하는 국회 결의안을 추진했다.

결국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겠다고 선언하고 한국에 구상서를 보내는 한편 노다가 직접 이명박에게 독도는 일본땅이라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으나 무례한 서한으로 인해 한일관계는 더욱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이렇게 되자 한일 간에 거의 막말 수준의 언사가 쏟아지고 있는데 노다는 이명박에게 사죄를 요구했고 청와대는 말같지도 않은 소리라고 받아쳤다.

급기야는 이제 센카쿠 열도(댜오위다오)에 조사단을 파견하고, 부동산 전문가까지 보내버렸다. 게다가 제일 큰 병크는 일본군 위안부를 아예 부인해 버렸다. 그러자 주변 의원들도 찬성하면서 그 분위기를 부채질했다. 그리고 유튜브를 통해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것을 다룬 동영상을 제작한다고 밝혔다.

결국 9월 21일 치러진 민주당 대표선거에서는 노다가 재선되었다. 이에 따라 노다는 차기 총선까지 총리직을 계속 수행하게 된다. 노다는 이 기세로 9월 말에 유엔총회에서 한국에 국제사법재판소의 강제관할권 수락을 촉구하는 연설을 할 것으로 알려졌다. 강제관할권은 영토문제 제소가 들어올 경우 강제로 재판회부에 동의하게 되는 제도로 한국은 1991년에 국제사법재판소에 가입하면서 강제관할권 수락을 보류한 상태다. 사실상 한국에게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해보자는 입장이라서 바로 한국의 강력한 반발을 불렀다.

재선이 되는 분위기가 되면서 자민당이 중의원 해산을 조건으로 내건 총리문책 결의안을 참의원에서 처리해서 무산된 상황이라 노다 총리는 자민당이 무기를 내려놓았으니 중의원 선거를 연기해야 한다이라고 밝혀서 파문이 일었다. 간 나오토 총리가 총리 불신임 결의안을 부결시킨 뒤에 임기 연장 의사를 밝힌 것과 같은 상황이다. 당연히 자민당과 유신회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와중에 9월 26일 1차 투표의 승자 이시바 시게루를 꺾고 아베 신조가 2차 투표에서 승리하면서 노다의 재선은 금방 묻혀버렸다.

대표에 재선된 후 전면개각을 단행했다. 18명의 국무대신 중 10명을 교체했는데 특히 주목할 만한 인선이 다나카 마키코 의원을 문부과학대신으로 기용한 것.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의 딸이기도 한 그녀의 기용은 여러 목적이 있는데 우선은 민주당의 탈당러시를 막으려는 데 목적이 있다. 그녀는 노다 총리와 껄끄러운 의원들과 친분이 있기 때문에 다나카 마키코가 중재 역으로 민주당 잔류를 설득하려는 목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대중 외교를 강화했던 다나카 전 총리의 딸답게 중국 지도부와도 친분이 있어서 악화되는 중일관계 개선의 목적도 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개각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다나카 게이슈 법무대신이 외국인으로부터 정치헌금을 받고 야쿠자와 교제했다는 폭로가 터지면서 사임했다. 이어 자살한 국민신당 출신 마츠시타 타다히로 금융담당상의 지역구 가고시마 3구 보궐선거에서 자민당의 지원을 받는 공명당 후보가 국민신당 후보를 제치고 당선되면서 노다 정권은 바람앞의 촛불신세가 된 상황이었다. 국민신당이 의석을 한 석 잃으면서 민주당은 이제 8명의 의원들이 탈당하면 중의원 과반이 무너지는 상황이 되었다.

여기에 다나카 마키코 문부과학대신이 취임 한 달여 만에 3개 신규 대학의 인허가를 불허했다가 여론의 엄청난 역풍을 맞고[11] 결국 생전 하지 않던 대국민사과까지 하게 되면서 다시 노다 내각을 휘청이게 하고 있다. 자민당 등 야당은 다나카 마키코의 문부과학대신 문책결의안을 내겠다고 큰 소리를 치는 상황이다.[12]

결국 여론에 밀려 2012년 11월 16일 중의원 해산을 선언[13]했다. 민주당 의원들의 줄줄이 탈당이 이어져서 중의원 과반 붕괴가 임박함에 따라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었다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14] 이에 따라 12월 16일에 총선을 치르고 새 총리는 12월 24일에 중/참 양원 지명을 하고 12월 26일에 취임한다.

중의원 해산을 조건으로 의원 세비를 20% 낮추고 중의원정수를 480명에서 440명으로 줄이겠다는 협조를 얻는 데는 성공했다.

민주당은 최소 120석을 확보하고 자민당의 단독 과반, 하다못해 2/3 확보를 저지하여 연정으로 정권을 유지하겠다고 생각했으나 출구조사보다도 낮은 57석에 그쳐 노다는 선거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2.4. 부활 시도와 실패[편집]


상술했듯이 2016년 9월 16일, 민진당 신임 대표에 선출된 렌호가 민진당 간사장으로 지명하여, 양원의원총회에서 간사장 취임이 확정되었다.[15]

일본 내에서는 대표 선거 기간 중 렌호의 이중국적에 대한 일부 세력의 문제 제기를 '우익, 인종주의자들의 비겁한 인신 공격'이라고 주장하며 렌호를 옹호해왔던 혁신, 리버럴 세력 시민들조차 렌호의 간사장 지명에 크게 실망한 모습이다. 자민당 못지 않은 보수 성향에 소비세 인상 3당 합의로 재무성의 입장을 충실히 대변해왔던 노다를 간사장으로 지명하다니, 대표 당선되자 말자 배신당한 꼴이라나 뭐라나...

벌써부터 렌호 신 집행부 체제는 사실상 노다의 괴뢰 정권(...)이라는 말마저 나오며 일본 내 혁신, 리버럴 세력 시민들의 실망은 상당히 큰 편이다.[16]

반면 넷 우익을 비롯한 보수우익 세력에서는 가뜩이나 렌호의 이중국적 파문으로 신 집행부 출범 후에도 민진당의 지지율 반등은 사실상 기대하기 어려워졌는데, 일본 내에서는 좌우를 가리지 않고 이미지가 나쁜 노다를 간사장에 임명함으로써 렌호의 '참신함'마저도 가려지게 되었다며 좋아하는 중이다.

렌호 신대표는 노다 간사장 지명 이유에 대해서, '자신이 참의원 의원 신분이기 때문에 중의원에서 아베 총리와 대치할 수 있는 토론에 강한 중진을 지명했다'고 설명 중이다. 이미 노다와 아베는 2012년, 민주당 정권 말기에 각각 현직 총리와 자민당 총재 신분으로 국회에서 질의응답을 거듭해왔기 때문에 뜨거운 2라운드가 예상되었다.

일단 노다 본인은 자신의 정치 인생 마지막 요직이라는 각오로 오직 렌호 대표를 뒷받침 하는 데 전력을 다하겠다고 저자세를 표명하는 중이었으나 가뜩이나 '민주당 정권 실패'의 '최대최악의 전범'이라고 당내에서도 악평이 가득한데 고자세로 나섰다가는 결과는 뻔하다는 관측이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 내에서는 저명한 정치학자, 정치사학자인 미쿠리야 다카시(御厨貴) 도쿄대학 명예교수가 '최근의 일본 정계는 시니어 그룹, 올드보이(OB)들의 전성시대'라고 지적한 하나의 흐름, 경향이 자민당 뿐만 아니라 야당도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17]

과거 55년 체제하의 자민당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총리총재를 역임한 거물들의 부활이 반복되는 중인데 민진당도 노다의 간사장 취임으로 자민당과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그만큼 일본 정계의 인재 고갈 현상이 심각하다는 뜻이다. [18]

2016년 9월 18일, 당 정조회장[19]에 노다가 총리 시절 수상보좌관을 지낸 최측근 의원인 오구시 히로시를 기용함으로써 일본 내에서 노다의 괴뢰정권이라는 불만이 더 높아지고 있다. 사실상 노다가 당권을 쥔 셈인데, 향후 전개가 주목된다.

2017년 7월 21일, 7월 2일 치러졌던 도쿄도의회 선거에서, 전신인 민주당 시대를 포함해서 단 5석만 획득하고 참패한 것으로 인해 민진당 렌호 대표가 가까운 시일 내에 행할 당 내 인사에서 노다를 교체하는 쪽으로 최종 가닥이 잡혀가는 모양이다. # 선거 참패 후 당내에서 당 집행부의 쇄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면서, 9월 이뤄질 예정이던 인사도 앞당겨서 빠르면 이번 달 중으로 착수할 예정이다.

결국 7월 27일, 간사장직에서 물러나고 이틀 뒤 렌호 대표도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노다 요시히코의 부활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당대표 마에하라 세이지의 의견에 따라 고이케 유리코가 창당한 희망의 당에 공천을 신청했으나, 실패한 총리라는 이미지 때문에 노다의 가담을 꺼린 고이케 대표의 거부로 무소속으로 출마하게 됐다. 하지만 선거에서는 자민당의 공천을 받은 후보를 상대로 거의 2배에 가까운 표를 획득하며 당선, 중의원 직은 유지할 수 있었다.

중의원 당선에는 성공했지만 마에하라 세이지처럼 노다도 희망의 당으로도 못가고 입헌민주당으로도 못가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알려져 있다. 당장 에다노 유키오가 입헌민주당을 만들면서 노다한테 입당을 제의할 때 노다가 쿨하게 씹어버려서 입헌민주당하고도 사이가 별로인데 희망의 당에서도 배제당한 상태라[20] 오갈 곳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의원 선거 이후 3년 동안의 통합 조율이 이뤄지고, 국민민주당 내의 보수 의원들이 분당하는 쪽으로 야당 통합의 가닥이 잡히면서 새로 출범하는 입헌민주당에 입당하게 되었다.


2.5. 이후[편집]


2017년 10월 26일, 제4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살아남은 舊 민진당 출신 무소속 의원들이 중도주의를 표방하며 민진당 전 대표였던 오카다 가쓰야를 대표로 '무소속 모임'(無所属の会) 회파를 결성하자 여기 합류했다. 이후 2018년 민진당이 희망의 당과 함께 합당해 국민민주당을 창당하려 하자 오카다 가쓰야와 같이 이에 반대하여 공식적으로 민진당을 탈당했다.

2019년 1월 7일 오카다 가쓰야 무소속 모임 대표가 입헌민주당 회파 개별 합류를 추진하며 회파 해산을 추진하자 민주당계 정당의 대단결의 촉매제가 되겠다며[21] 자신과 마찬가지로 입헌민주당 회파 합류를 미룬 의원 8명을 모아 '사회보장 재건을 위한 국민회의'(社会保障を立て直す国民会議)를 결성하고 본인이 그 대표로 취임했다.

2020년 7월 말부터 입헌민주당국민민주당 간 통합 논의가 진전되자, 오카다 가쓰야 등과 함께 민진당 출신 무소속 의원들을 이끌고 통합 신당에 합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20년 9월 15일, 본인이 이끄는 회파를 이끌고 입헌민주당에 합류하면서 2018년 탈당 후 2년만에 민주당 계열 정당에 복귀하게 됐다. 웃긴 점은 결국 이 합류로 2012년 노다 내각 붕괴에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했던 오자와 이치로와 같은 당에서 재회하게 되었다.

이후 평의원으로서 정중동하고 있다가 2021년 10월 31일 열린 총선에서 당내 중진들이 대거 고전하는 가운데서도 60%가 넘는 득표율로 압승을 거두며 선전했다.

2022년 9월 27일 열릴 아베 신조 전 총리의 국장에 대해 당 지도부와 입장을 달리해 참석하기로 했다. BSTV도쿄와의 인터뷰에서 본인 역시 아베 전 총리에 대해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일방적으로 국장을 결정한 점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이지만, 그래도 국장이 열리게 된 이상 전직 총리로서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해명했다.# 한편 9월 21일에 하토야마 유키오간 나오토 두 민주당 출신 전 총리가 불참 의사를 밝히면서 민주당 출신 총리 중에는 노다만 유일하게 국장에 참석하게 됐다.

2023년 2월 13일 교도통신 기자회견에서 중도적인 국민정당을 만들기 위해선 일본유신회국민민주당과의 연계가 중요하다고 하며 특히 예산안 찬성 이후 사이가 틀어진 국민민주당과 재결합해야 된다고 얘기했다.#

이후 2023년 3월 5일, 아베 신조 피살 사건이 일어난 사건 현장을 찾아 조의애도의 뜻을 표했다.#

2022년 통과된 10증10감 공직선거법 개편안에 따라, 기존의 치바 4구가 분열되면서 차기 중의원 선거에선 신설되는 치바현 제14구에 출마하기로 결정하였다[22]

2023년 5월 열린 제20회 통일지방선거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입헌민주당이 참패하면서 현 이즈미 겐타 지도부에 대한 불신임 소리가 나왔는데 이 과정에서 노다 대표 추대론이 당내에서 제기되었다. 다만 본인은 보궐선거 과정에서 치바 5구에서 패한 것에 대한 책임이 있다며 추대론을 고사했다.

3. 정치적 성향[편집]


아사히 신문 · 도쿄대 다니구치 연구실 공동 조사
2021년 중의원 선거 후보자 정보 - 노다 요시히코

이슈
질문
답변
개헌
헌법 개정
<colcolor#000> 조금 찬성[23]

정부
사회복지 등 정부의 서비스가 나빠져도 예산이 들지 않는 작은 정부가 더 낫다.
반대
일자리 확충
공공 사업을 통한 일자리 확충은 필요하다.
중립
소비세
한시적이거나 영구적으로 소비세율을 낮춰야 한다.
조금 반대
재정 지출
당장은 재정 재건을 위한 세출의 억제보다는 경기 부양을 위한 재정 투입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중립
격차 해소
A: 사회적 격차가 다소 있더라도 경제 경쟁력 향상을 우선해야 한다.
B: 경제 경쟁력을 다소 희생하더라도 격차 시정을 우선해야 한다.
조금 B
제정 적자
A: 국채는 안정적으로 소화되고 있어 재정 적자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B: 재정적자는 위기 수준이기 때문에, 국채 발행을 억제해야 한다.
B
부자 증세
소득이나 자산이 많은 사람에 대한 과세를 강화해야 한다.
조금 찬성
법인세 증세
기업들이 내는 법인세율을 인상해야 한다.
조금 반대
산업
A. 국내 산업을 보호해야 한다.
B: 무역과 투자의 자유화를 추진해야 한다.
조금 B

후쿠시마 오염수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처리수의 해양 방출은 어쩔 수 없다.
조금 반대
치안·인권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개인 정보 보호 및 개인의 권리가 제한되는 것은 당연하다.
중립
동성혼
동성간의 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찬성
동성애 법안
LGBT 등 성 소수자를 둘러싼 '이해 증진' 법안을 조속히 통과시켜야 한다.
찬성
외국인 노동
외국인 노동자의 수용을 추진해야 한다.
조금 찬성
탈원전
A: 지금 바로 원자력 발전을 폐지해야 한다.
B: 앞으로도 원자력 발전을 에너지 원의 하나로 유지해야 한다.
조금 A
부부별성
부부가 원하는 경우, 결혼 후에도 부부가 각각 혼전 성을 유지하는 것을 법률로서 인정해야 한다.
찬성

핵개발
비핵 3원칙[24] 을 견지해야 한다.
조금 찬성
국방
일본의 방위력은 더 강화해야 한다.
조금 찬성
선제 공격
타국으로부터의 공격이 예상되는 경우 선제 공격도 주저해서는 안 된다.
중립
대북관계
북한에 대해 대화보다 압력을 우선해야 한다.
조금 찬성
후텐마 기지
오키나와현 후텐마 기지의 헤노코 매립지 이전은 부득이한 일이다.
중립
미일안보조약
A: 위기 때 미국과의 협력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미일 안보조약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
B: 일본과 관계없는 전쟁에 말려들지 않도록 미일 안보조약 강화에 신중해야 한다.
조금 A
중국 위협론
A: 중국은 일본에 위협이 된다.
B:일본에 있어서 중국은 파트너이다.
조금 A

참의원 선거
A: 한 표 격차 시정을 위해서도 참의원 선거구의 합구는 허용돼야 한다.
B: 참의원 선거구의 합구를 해소하기 위해서도 일정 범위 내의 한 표 격차는 허용되어야 한다.
조금 A

코로나19 대책
치료 체제의 확충, 치료약 및 백신 개발·확보, 검사 체제의 확충
'조금'의 답변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자면(どちらかと言えば)'이며 '중립'은 '어느쪽도 아니다(どちらとも言えない)'이다.
본래 자위대 장교의 아들이라는 배경 때문인지는 몰라도 정치적 경력은 일관되게 자민당과 다른 야당의 행보를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외적으로는 자민당과 별 차이가 없는 보수적인 사상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이 붕괴된 후 노다 자신의 성향이 조금 왼쪽으로 옮겨가고[25], 자민당이 아베 신조의 영향으로 워낙 우경화되면서 총리 시절은 몰라도 현재 시점에서는 자민당보다는 진보적인 포지션을 취하고 있다.

일본 우익 보수~들의 오랜 떡밥이 집단적 자위권 행사와 정상국가인데, 이는 한마디로 말해서 자위대를 정식 군대로 만들고 다른 나라들처럼 정상적으로 군사력을 행사하자는 주장이다. 그런데 노다는 이런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지지하는 인물이다. 이 때문에 하토야마 내각 당시에도 방위대신 임명이 검토되다가 연립에 참여한 사민당과 당내의 (비교적) 진보적인 성향의 의원들의 반발을 고려해서 재무부대신으로 임명된 적이 있다.

또한 역사 인식에 대해서도 일본의 우익 보수들의 역사관을 그대로 신봉하고 있는데 2005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자 민주당 내의 비판적 조류와는 달리 "야스쿠니 신사에 전범이 어디 있나? 그들은 전범이 아니다!"라는 황당한 주장으로 한국에 '망언 장관'으로 보도된 적이 있다. 게다가 난징대학살과 일본의 침략전쟁을 부정하는 우익 보수의 입장이 정론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보수적 사고에 입각해서 내정에서는 "안전보장 기본법"과 "긴급사태법"의 입법을 주장하고 있으며 외교에 있어서는 중국이 오키노토리 섬을 비난한 것에 대해 "니들도 남사군도 점령하고 있잖아? 누굴 비난해!"라고 맞받아 치는 등 일관되게 중국 안티, 혐중임을 자처하고 있다.

또한 민주당의 정권교체 이후의 떡밥인 외국인 참정권 문제에 대해서는 "외국인들에게 참정권을 주느니 그냥 귀화시켜서 투표시키는게 낫지 않나?"라면서 반대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한편 경제적인 면에서는 대표적인 증세론자로 알려져 있다. 당초 민주당 대표선거에서 노다가 총리가 될 경우 증세론 때문에 국민적인 지지를 얻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을 정도. 도호쿠 대지진의 복구를 위해 일시적으로 임시 증세를 주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점에서 보면, 경제정책에선 제법 좌파의 경향을 띤다.

이러한 사상과 정책적 흐름으로 본다면 노다 내각은 대외적으로는 자민당과 거의 다를 바가 없는 보수 정권인 것은 명약관화하다. 영토 문제와 역사 인식에 있어서 극보수나 다름이 없는 인물이라 중국과 한국과의 관계는 악화될 가능성이 커보였다. 특히 한국 입장에서는 독도 문제로 갈등이 커지는 상황이라 노다 내각이 무슨 사고를 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커지는 상황이다.

이런 우려들을 의식했는지 노다는 총리가 된 이후 "야스쿠니 신사 문제는 정부의 해석을 따르겠다"라면서 한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다. 실제로 총리 재임 중에 각료들이 야스쿠니 참배를 간 적은 있지만 본인은 한번도 야스쿠니 참배를 하지 않기는 했다. 또한 중국과 한국과의 관계에 대해서 우호관계를 유지하겠다라고 밝혔지만 이게 일반적인 원론 수준의 답변이라 우려가 거둬지지는 않는 것 같다. 다만 자위권 행사에 대해서 "권리는 있으나 행사는 하지 않는다"라는 시각이라는 약간의 옹호론도 있다.

뒤에서 따로 다루겠지만 미국과의 TPP에 대해서는 간 나오토 내각 때보다는 우호적이지만 마냥 찬성만은 하지 않는 수준이고, 2011년 12월 18일 한일 정상회담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두고 이명박 대통령과 강력하게 대립각을 세웠다. 하지만 위안부의 강제동원을 인정하는 발언을 했다. 日총리, 고노담화 들어 '軍위안부 부정론' 반박

대략 위치를 보면 경제적으로는 간 나오토보다 약간 오른쪽이지만 전반적으로는 왼쪽이고, 대외정책에서는 미국과의 관계(거꾸로 아시아와의 불화 정도) 순으로 세우면 하토야마 < 오자와 ~ 간 나오토 < 약간의 간극< 노다 <= 자민당 수준이 된다.[26]

4.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무소속|
무소속
]]

1987 - 1992
정계 입문


1992 - 1994
입당


1994 - 1996
합당

[[무소속|
무소속
]]

1996 - 1998
선거 낙선 후 탈당


1998 - 2016
입당


2016 - 2018
당명 변경[27]

[[무소속|
무소속
]]

2018 - 2020
희망의 당과의 합당을 반대하며 탈당


2020 - 현재
창당


5.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지역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3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구)치바 1구


175,671 (20.54%)
당선 (1위)
초선[28]
1996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치바 4구


73,687 (31.99%)
낙선 (2위)

2000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16,156 (47.27%)
당선 (1위)
재선
2003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35,522 (55.77%)
3선
2005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29,834 (44.90%)
4선
2009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62,153 (53.64%)
5선
2012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63,334 (57.28%)
6선
2014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19,193 (51.69%)
7선
2017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무소속|
무소속
]]

131,024 (59.59%)
8선
2021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54,412 (64.55%)
9선


6. 여담[편집]


  • 역대 총리 중에서 (돈가치의 변화를 생각하면) 가장 재산이 적은 총리라고 한다. 2011년 자산공개에 의하면 그의 재산은 치바현에 있는 집, 토지 1514만 엔, 정기예금 260만 엔으로 도합 1774만 엔이었다. 현재 환율로 환산 시 한국 원화로 1억 7000만 원이 안 된다.

  • 술을 좋아하는 편인데, 단골가게에 고급바는 별로 없고 서민적인 가게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 1957년생으로 지금까지의 전직 총리 중 가장 젊다.[29]

  • 파일:attachment/노다 요시히코/kcj.jpg
머리가 좀 커보인다는 의견이 있다.

7. 저서[편집]




8. 둘러보기[편집]



파일:입헌민주당(2020년) 로고 하얀색 CDP 포함.svg
입헌민주당
제49대 중의원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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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시타 다이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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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이 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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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에마쓰 요시노리
스에쓰구 세이이치
스즈키 요스케
시게토쿠 가즈히코
시나 다케시
시노하라 고
시노하라 다카시
시모조 미쓰
쓰쓰미 가나메
아라이 유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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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야기 요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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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기시 잇세이
야마노이 가즈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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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와 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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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모토 아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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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세다 유키
와타나베 소
와타나베 슈
요네야마 류이치
요시다 쓰네히코
요시다 하루미
요시카와 하지메
우메타니 마모루
유노키 미치요시
유하라 슌지
이나토미 슈지
이사카 노부히코
이시카와 가오리
이즈미 겐타
이토 슌스케
하라구치 가즈히로
혼조 사토시
후지오카 다카오
후쿠다 아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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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입헌민주당(2020년) 로고 하얀색 CDP 포함.svg
입헌민주당
제48대 중의원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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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지마 가나메
다카기 렌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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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즈카 요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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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부치 스미오
마쓰다 이사오
마쓰다이라 고이치
마쓰바라 진
마쓰오 아키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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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키 다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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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 다케시
시노하라 고
시노하라 다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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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죠 미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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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도모코
아오야기 요이치로
아오야마 야마토
아즈미 준
아카마츠 히로타카
아쿠쓰 유키히코
야가미 마사요시
야라 도모히로
야마노이 가즈노리
야마모토 와카코
야마오카 다쓰마루
야마우치 고이치
야마자키 마코토
야마카와 유리코
야마하나 이쿠오
야타가와 하지메
에다 켄지
에다노 유키오
오가와 준야
오구마 신지
오구시 히로시
오사카 세이지
오시마 아쓰시
오니시 겐스케
오자와 이치로
오쓰지 가나코
오치아이 다카유키
오카다 가쓰야
오카모토 미쓰노리
오카모토 아키코
오카와라 마사코
오카지마 가즈마사
오쿠노 소이치로
와세다 유키
와타나베 슈
요시다 쓰네히코
야타가와 하지메
요코미쓰 가쓰히코
우후카타 유키오
유노키 미치요시
이나토미 슈지
이마이 마사토
이시카와 가오리
이즈미 겐타
이케다 마키
이토 슌스케
하라구치 가즈히로
하세가와 가이치
호리코시 게닌
후쿠다 아키오
히라노 히로후미
히로타 하지메
히요시 유타
쓰무라 게이스케
쓰지모토 기요미




파일:민주당(일본 1998년) 로고.svg 민주당(일본 1998년)의 계파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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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91919><width=50%><-2><rowbgcolor=#DA2128> 호헌파 ||<width=25%> 중립 ||<-3><width=25%> 개헌파 ||
||<width=25%> 생추어리
아카마츠 히로타카
요코미치 다카히로
사사키 다카히로
아베 도모코
쓰지모토 기요미
가이에다 반리
하치로 요시오
곤도 쇼이치
군지 아키라
오사카 세이지 ||<width=25%> 나라의 모습 연구회
간 나오토
에다 사쓰키
아라이 사토시
니시무라 지나미
에다노 유키오
하쿠 신쿤
구로이와 다카히로
나가츠마 아키라
스에마쓰 요시노리
야마노이 가즈노리 ||<width=25%> 화제회
노다 요시히코
무라타 렌호
나가하마 히로유키
구로이와 다카히로
후루모토 신이치로
타케마사 코이치
곤도 요스케
아즈미 준
마부치 스미오 ||<width=25%> 료운카이
마에하라 세이지
에다노 유키오
아즈미 준
이즈미 겐타
와타나베 슈
야마노이 가즈노리
야마오 시오리
후루카와 모토히사
다마키 유이치로
오쓰카 고헤이
아다치 신야
다지마 가나메
카미야마 요스케
기이 다카시 ||
|| 소교회
오하타 아키히로
카노 미치히코
오시마 아쓰시
나카야마 요시카츠
시노하라 다카시
다나부 마사요
마시코 데루히코 || 민사협회
다카키 요시아키
가와바타 다쓰오
요네자와 다카시
나카노 간세이
이토 에이세이
신바 가즈야
기쿠타 마키코
후루모토 신이치로
야나기다 미노루 || 지세이카이
호소노 고시
시나 다케시
쓰무라 게이스케
고미야마 야스코
류 히로후미
신바 가즈야
유노키 미치요시
사쿠라이 미쓰루
기카와다 토오루
구시부치 마리 || 정권전략연구회
하타 쓰토무
하타 유이치로
하라구치 가즈히로
마쓰바라 진
가네코 에미
마쓰자와 시게후미
나카가와 마사하루 ||
|| 리버럴회
곤도 쇼이치
히라오카 히데오
니시무라 지나미
하쿠 신쿤
시노하라 다카시
데라다 마나부 || 청산회
다루토코 신지
마쓰모토 다케아키
마쓰노 요리히사
고미야마 야스코
류 히로후미
모리야마 히로유키 || 「일본의 그랜드 디자인」 연구회
겐바 고이치로
오구시 히로시
고토 유이치
후쿠시마 노부유키
구로이와 다카히로
가네코 에미
기시모토 슈헤이 || 국가 축의 모임
나가시마 아키히사
와시오 에이이치로
기라 슈지
오노 모토히로
키타가미 케이로
하마노 요시후미
노마 다케시 ||
||<-2> 정권공약을 실천하는 모임
하토야마 유키오
오카다 가쓰야
마쓰바라 진
후쿠다 아키오
오시마 아쓰시
신바 가즈야
가와바타 다쓰오
다카키 요시아키 ||<-2> 일신회
오자와 이치로
기쿠타 마키코
고미야마 야스코
모리 유코
마쓰키 겐코
아오키 아이
사토 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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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헌파
중립
개헌파
생추어리
아카마츠 히로타카
요코미치 다카히로
사사키 다카히로
아베 도모코
쓰지모토 기요미
가이에다 반리
하치로 요시오
군지 아키라
오사카 세이지
곤도 쇼이치
나라의 모습 연구회
간 나오토
에다 사쓰키
에다노 유키오
아라이 사토시
오가와 도시오
니시무라 지나미
사사키 다카히로
하쿠 신쿤
구로이와 다카히로
나가츠마 아키라
야마노이 가즈노리
화제회
노다 요시히코
무라타 렌호
나가하마 히로유키
구로이와 다카히로
후루모토 신이치로
타케마사 코이치
곤도 요스케
아즈미 준
마부치 스미오
시게토쿠 가즈히코
료운카이
마에하라 세이지
에다노 유키오
아즈미 준
이즈미 겐타
와타나베 슈
야마노이 가즈노리
야마오 시오리
후루카와 모토히사
다마키 유이치로
오쓰카 고헤이
아다치 신야
다지마 가나메
카미야마 요스케
기이 다카시
소교회
오하타 아키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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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야마 요시카츠
시노하라 다카시
다나부 마사요
마시코 데루히코
민권정경 아카데미
에다 겐지
마쓰노 요리히사
오치아이 다카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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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 요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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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모토 신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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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바라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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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사협회
다카키 요시아키
가와바타 다쓰오
신바 가즈야
기쿠타 마키코
후루모토 신이치로
야나기다 미노루
신정신슈
기타자와 도시미
스기오 히데야
하타 유이치로
시노하라 다카시
시모조 미쓰
이데 요세이
데라시마 요시유키
「일본의 그랜드 디자인」 연구회
겐바 고이치로
오구시 히로시
고토 유이치
가네코 에미
기시모토 슈헤이
국가 축의 모임
나가시마 아키히사
와시오 에이이치로
기라 슈지
오노 모토히로
기타카미 케이로
하마노 요시후미
무계파
오카다 가쓰야
나카가와 마사하루
하라구치 가즈히로
마쓰바라 진
시모조 미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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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하마 히로유키
구로이와 다카히로
후루모토 신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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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케마사 코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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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조 미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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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야마 히로유키
하타 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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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다다토모
요시카와 하지메
오자와 그룹
오자와 이치로
고미야마 야스코
모리 유코
아오키 아이
기쿠타 마키코
사토 고지
지세이카이
시나 다케시
쓰무라 게이스케
고미야마 야스코
다나부 마사요
마키 요시오
고토 유이치
세키 겐이치로
보수파
에다 겐지
하라구치 가즈히로
후루모토 신이치로
와타나베 슈
겐바 고이치로
류 히로후미
마쓰바라 진
마부치 스미오
소승회
오카다 가쓰야
나카무라 기시로
야마노이 가즈노리
에다 겐지
기쿠타 마키코
이마이 마사토
오가와 준야
가네코 에미
다지마 카나메
직간회
시게토쿠 가즈히코
야오야기 요이치로
오구마 신지
나카지마 가쓰히토
시노하라 고
겐마 겐타로
브릿지 모임
에다 겐지
오치아이 다카유키
오구마 신지
시오무라 아야카
일심회
마부치 스미오
마쓰키 겐코
다나가와 하지메
다카야마 사토시
나가야스 사토시
일본 정당별 계파 (기타 일본 혁신정당 · 입헌 · 국민 · 자민)






[1] 화제회는 본래는 마쓰시타 정경숙 출신들의 모임에서 유래해서 마에하라 세이지 전 외무대신쪽과 연대가 있었지만 이후 정경숙 출신들이 뿔뿔히 흩어지면서 노다를 중심으로 한 스터디 그룹이 발전한 형태다. "화제"라는 이름은 "백화제방"에서 따온 말이라고. 료운카이 파벌의 마에하라쪽과는 느슨한 형태로 연대가 이뤄지는듯. 화제회는 민주당 내에서 나름 가장 결속력이 강한 계파로 평가받는다. 좌익 ~ 중도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민주당 內 파벌(계파) 중에서 가장 보수적인 성향의 집단이다. 대만계 탤런트 출신으로 유명한 렌호도 이 파벌에 소속했다.[2] 흔히 잘 알려진 NHK당 당수 타치바나 타카시가 아닌, 문예춘추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의 금권정치를 신랄하게 깐 보도로 다나카를 총리직에서 끌어내린 사람이다.[3] 잘 알겠지만 이 둘은 이후 차례로 총리에 오르며, 노다 본인 또한 간의 후임자로 총리가 된다.[4] 당시 민사당계 의원들이 결성한 민사협회의 회장이었다.[5] 본명은 相田光男(독음은 같다). 생몰년도 1924년 5월 20일 ~ 1991년 12월 17일. 시인, 서예가[6] 여야를 가리지 않고 현재 일본 국회의원의 40%가 아버지에게 지역구를 물려받은 2세 의원들이다. 심지어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부터 의원이던 3세, 4세 의원도 흔하다. 2세가 정계진출을 포기하자 지역구를 대신 물려받은 비서관 출신들도 상당하다. 결국 평범한 서민 출신 의원은 별로 없다고 봐야한다.[7] 그러나 날이 갈수록 노다는 고급 미용실을 이용하게 되었다. 1,000엔이던 이발료가 4,515엔으로, 다시 1만 2천 엔으로 오르더니, 결국 2만 엔대까지 달성했다. 언론은 이런 노다의 이발료 상승을 비판하였다. 이때 쓰인 관용어가 'うなぎ上り'인데, 마치 장어가 물을 타고 올라가는 것에 빗대어 물가 등이 상승하는 것을 빗댄 표현이다. 와가츠마 님은 내 신부에서 이걸 비꼰 적이 있다.[8] 솔직히 오자와의 정치성향을 보면 가능하지도 않다.[9] 그러나 마츠시타 대신은 9월 10일 자택에서 자살한 채로 발견되어 충격을 안겨주었다. 마츠시타 대신의 자살 원인으로는 2012년 봄에 암 선고를 받아 신병을 비관한 탓이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주간 신초가 그의 불륜을 폭로할 예정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어서 그 때문이라는 추측도 나돌았다.[10] 자민당 등 야당에서는 "지금 한국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했는데 저렇게 매뉴얼 대로만 대응하면 어떡하냐" 라는 식의 발언도 쏟아나왔다. 더욱이 천황 문제까지 나와버렸으니... [11] 일본은 신규대학설립 인허가가 지난 30년 동안 단 한 번도 불허된 적이 없었다. 당연이 이들 대학들은 교직원과 학생들까지 선발해놓고 2013년 3월 개교를 하려고 한 마당에 불허 처분이 났으니 당연히 분노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다나카 입장에서도 대학이 너무 많으면 교육의 질이 떨어진다는 명분이 있긴 했지만 그런 식으로만 말하기에는 여론이 너무 악화되었다.[12] 그녀의 남편인 다나카 나오키 전 방위대신도 문책결의안이 통과되어 짤린 경험이 있다. 만약 그녀의 문책결의안이 제출된다면 일본 헌정사상 최초로 부부가 문책결의안이 제출되는 희대의 상황이 연출된다.[13] 해산명은 '조만간 해산'.[14] 오자와 이치로 파의 집단 탈당으로 총리 임기 말에는 중·참 양원에서 자민당과 공명당에게 사정사정하면서 겨우 내각을 유지하고 있었다.[15] 렌호는 노다가 이끄는 '화제회' 소속이다. 즉 자기 파벌의 영수를 당내 2인자인 간사장으로 지명한 것이었다. 렌호가 정계에서 가장 신뢰하는 인물이 노다 전 총리이며, 사실상 렌호의 정계 후견인 격이라고 한다. 원래는 과거 자민당 정권 시절에 총리가 자기 파벌에서 가장 신뢰하는 부하를 '총리의 아내 격'이라고 불리는 관방장관 혹은 간사장에 임명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에는 그것이 거꾸로 된 격이다.[16] 2012년, '카미카제 해산'이라고 조롱당할 정도로 패배가 뻔히 눈에 보이는 해산을 감행하여, 결과적으로 현재까지 이어지는 아베 장기 집권 체제를 만들어낸 노다에 대한 혁신/리버럴 세력의 증오는 대단하다.[17] 당장 아베 신조 내각-자민당만 보아도 전직 총리인 아베가 요시다 시게루 이후 최초로 다시 총리직에 복귀했고, 마찬가지로 전직 총리인 아소 다로는 부총리 겸 재무상으로 발탁했다. 그리고 얼마 전 사임한 다니가키 사다카즈 전 자민당 간사장도 야당 시절 자민당 총재를 역임한 인물이다.[18] 사실 이전부터 민진당(과 전신인 민주당)의 회전문 인사는 자민당보다 더 악질이라는 말이 많았다. 당장 민주당 창당 이래 하토야마 유키오, 간 나오토가 번갈아가며 대표, 간사장을 맡았었고, 민유합병(민주당과 자유당의 합당) 이후로는 여기에 오자와 이치로가 가담하여 '트로이카 체제'로 불리우며 세 명이서 돌아가며 당내 요직을 맡아왔다. 이 외에도, 야당시절부터 민주당 정권을 거쳐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오카다 카츠야 전 부총리, 마에하라 세이지 전 외무대신, 에다노 유키오 전 내각관방장관, 호소노 고시 전 환경대신, 다카키 요시아키 전 문부과학대신, 가와바타 다쓰오 전 총무대신, 아카마츠 히로타카 전 농림수산대신, 하치로 요시오 전 경제산업대신, 센고쿠 요시토 전 법무대신 등 똑같은 인물들이 계속해서 요직을 돌려가며 맡았다.[19] 정무조사회장. 자민당의 경우 간사장, 총무회장, 정조회장을 가리켜 당3역이라 부르며 정조회장은 한국의 정책위의장에 해당되는 대단히 중요한 직책이다. 간사장의 경우 명실공히 당의 2인자이자, 총리인 총재를 대신하여 당무를 총괄하는 자리이며 당 자금, 공천권 등을 쥐고 있다. 흔히들 간사장 자리를 가리켜 대신=장관직 2개의 가치를 지닌다고 표현. 총무회장이나 정조회장도 각료 경험자가 맡는 직책으로 재무대신, 외무대신, 경제산업대신 등 중요 각료를 제외하면 각료보다 상급 포스트로 여겨진다 [20] 다만 이 배제당한 것은 이후 희망의 당이 선거에서 패하면서 전화위복이 되었다. 자중지란이 일어난 희망의 당 소속 의원보다는 무소속이 아무래도 운신의 폭이 넓기 때문이다. 노다 본인이 언론에 밝히기를 빨리 무소속으로 나오는 것을 정해서 다행이었다고 할 정도다.[21] 합의를 봐서 좋게 회파를 해산했다.[22] 기존 노다 전 총리의 선거구였던 치바현 제4구는 신인 후보가 출마한다.[23] 재정의 건전성에 관한 조항을 신설하는 부분의 개헌을 찬성했다.[24] '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25] 반대로 중도우파 포지션이었던 마에하라 세이지가 정권이 무너진 후에 끝모르게 우경화하며 위치가 바뀐 측면이 있다.[26] 사실 오자와 이치로의 경우엔 탈미국 친아시아지만 그보다는 군비 확충과 미일의 대등한 외교를 주장하는 수준이다. 반면 하토야마나 간 나오토는 군비 확장에 대해서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은 정도. 사실 친미=반중, 탈미=친중이 반드시 도식화되진 않는다.[27] 당적과는 별개로 무소속 출마, 2017년부터는 국회에서 무소속으로 활동.[28]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29] 현직 총리와 동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