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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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장관 (1990~2001)


31대
윤형섭
32대
조완규
33대
오병문
34대
김숙희


35대
박영식
36대
안병영
37대
이명현
38대
이해찬

39대
김덕중
40대
문용린
41대
송자
42대
이돈희

교육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장관 (2001~2008)


43대
한완상
44대
이상주
45대
윤덕홍
46대
안병영

47대
이기준
48대
김진표
49대
김병준
50대
김신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2008~2013)


51대
김도연
52대
안병만
53대
이주호
54대
서남수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 (2013~현재)


55대
서남수
56대
황우여
57대
이준식
58대
김상곤
59대
유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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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초대 문교부 장관
안호상
安浩相 | Ahn Ho-sang


파일:안호상.jpg

출생
1902년 1월 23일
경상남도 의령군 부산면 입산동
(現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입산로2길 13-6)
사망
1999년 2월 21일 (향년 97세)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제1유공자묘역 39번
본관
탐진 안씨[1]
자 / 호
맹연(孟然) / 한뫼
재임기간
초대 문교부 장관
1948년 8월 3일 ~ 1950년 5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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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안석제(安奭濟), 어머니 김야동
배우자
모윤숙 (이혼)
유유정 (재혼)
자녀
아들 안경홍(安炅弘)
딸 안을현(安乙賢), 안경선(安炅仙), 안지숙(安智淑)
학력
세이소쿠영어학교 (졸업)
중덕학교 (예과 / 졸업)
예나 대학교 (철학 / 박사)
종교
유교 (성리학)대종교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5(참)
약력
초대 문교부 장관
초대 참의원의원 (경상남도 제1부)

1. 개요
2. 생애
3. 성향
3.1. 단군민족주의 제창
3.3. 일민주의
4. 선거 이력
5. 여담
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초대 문교부 장관, 독립운동가, 철학자.

고향인 경상남도 의령군에서 제헌 국회의원(조선민족청년단)을 지낸 안준상은 그의 사촌 형이다.[2]


2. 생애[편집]


1902년 경상남도 의령군 부산면 입산동(현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3]에서 종9품 효릉참봉(孝陵參奉)을 지낸# 아버지 안석제(安奭濟)와 어머니 서흥 김씨 김야동(金冶洞)[4] 사이의 1남 2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1920년(19세 때) 대종교에 입문했고, 그해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 영어과에 입학했다.

1921년 세이소쿠 영어학교를 졸업한 후, 1922년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에 있는 중덕학교(中德學校 현 국립 퉁지대학) 예과에 입학했으며, 1924년 7월 예과를 졸업하였다.

그 후 1925년 5월부터 독일의 예나 대학교에서 철학과 법학을 공부하였다. 브루노 바우흐(B. Bauch), 에버하르트 그리제바흐(E. Grisebach), 오토 쾰로이터(O. Koellreutter), 루돌프 휘브너(R. Hübner), 유스투스 빌헬름 헤데만(J. W. Hedemann) 교수[5] 등의 강의를 들었고, 헤겔 학도가 되었다. 1929년 독일 예나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6] 1929년 ~ 1930년에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연구생으로 공부하였고, 1930년에는 일본 교토 제국대학교와 독일 베를린 대학교에서 연구생으로 있었다.

1933년에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임용되었고, 한국 철학연구회 1대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1934년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재직 중 이광수의 소개로 여류문인 모윤숙(毛允淑)과 결혼하였으나 뒤에 이혼하였다.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되었으나 병중(病中)이어서 체포는 면하였다.

광복 이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를 역임하며 철학을 가르쳤다. 이 시기에 김영삼이 철학과에 입학하여 그의 철학 강의를 들었다. 이범석조선민족청년단을 결성하자 부단장으로 참여해 이범석에게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 주기도 하였다.

1948년 8월부터 1950년 5월까지 대한민국의 초대 문교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홍익인간의 이념을 근간으로 하는 교육이념을 토대로 한국교육의 방향을 설정했으며 국민교육헌장의 사상을 구축하는 데 박종홍과 함께 참여하였다. 보성전문학교에서 만난 역사학자 손진태를 문교부 차관 겸 편수국장으로 특별발탁하기도 했다.

안호상은 6.25 전쟁이 발발한 후 부산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그는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로 나온 이범석을 지원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조선민족청년단 동료였던 김동욱이 출마하자 연설을 통해 그를 지원하였다. 이 연설과 선거 뒤 부산 충무로 광장에서 열린 행사에서 했던 연설이 내란을 선동하고 국가 보안법·선거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구속기소되었다. 그러나 재판을 통해서 그는 모두 무죄 선고를 받게되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부산시 영도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이만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대한민국 참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3년 8월 1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국민의당 창당발기인대회를 가졌을 때 참석하였다. 그러나 1967년에는 박정희의 특사로 국제사회를 순방하고 돌아왔다. 1969년에는 재건국민운동 중앙회 회장, 사회정화 대책위원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973~1976년까지는 마을금고연합회(현 새마을금고) 초대 회장, 1981년부터 1991년까지는 한성학원, 한성대학교 이사장을 역임하였으며, 1993년에는 경희대학교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92년부터 1997년까지는 대종교 14대 총전교[7]를 지냈다. 1995년 북한단군릉 개건 기념 어천절 행사에, 대종교 교주 자격으로 참가하고자 밀입북한 적이 있다. # 당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대공용의점이 없고 고령이라는 나이로 불구속 입건되었다. 남북교류협력법에 따라 북한에 밀입북한 혐의만 처벌받았다. 당시 같이 밀입북했던 이는 구속되어서 논란이 되었다.

1999년 사망하였고, 사회장으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3. 성향[편집]



3.1. 단군민족주의 제창[편집]


단군기원 연호에도 영향을 받았고, 오늘날 개천절 국경일, 홍익인간 교육 이념에도 영향을 준건 분명하다.

안호상은 이승만정부에서 초대 문교부장관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는 단군민족주의로부터의 큰 영향속에 학문과 실천운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단군민족주의의 종교방면 전개라 할 수 있는 대종교와의 인연이 중요한데, 그는 청년기에 대종교에 입교하였고 노년기에는 교단의 최고 수장 직도 수행했었다. 이 논문에서는 안호상의 활동노선과 학문연구 및 일민주의 정치이론을 단군민족주의와의 관련속에서 분석하였다. 논문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는 다음과 같은 3가지이다. 첫째, 안호상의 활동과 사상을 단군민족주의와의 관련 속에 검토하고자 하였다. 그가 단군민족주의자가 된 과정과 단군민족주의의 실천과 활성화를 위해 힘쓴 내역을 살폈다. 둘째, 안호상의 일민주의를 특히 단군민족주의와 연계속에 살피고자 하였다. 단군민족주의가 발굴한 자료들에 기초하였고 단군민족주의적 민족적 공동운명론을 정책적으로 구체화하였음을 밝혔다. 셋째, 안호상의 단군민족주의를 평가해보고자 하였다. 논문에서는 안호상의 사상과 학문을 전체주의・국가주의・파시즘・유사역사학이라고 매도하기만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가 전개하는 민족적 공동운명체론은, 개인자유주의를 넘어서 공동체적 통합과 행복으로 나아가는 사상적 대안으로서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고 보았다. 중독・왜독・양독의 삼독극복론과 연구성과들 역시 우리의 학술연구 자세에 대해 반성하게 하고 역사와 문화에 대한 상상력을 보강해준다. 그러나 반공 노선과 대한민국 국가를 민족・단군・통일 등과 같은 가치・과제보다 우선시한 것이나, 전쟁 및 좌우대결 과정에 빚어진 민족적 희생과 이승만의 독재권력 강화에 대해 침묵한 것은 단군민족주의의 기본지향에서 이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위대한 민족사에 대해 과도하게 집착하면서 과학적 엄밀성에서 후퇴한 것 역시 신채호가 정립했던 단군민족주의적 국학정신으로부터 크게 퇴보한 것이라 평가하였다.

-정영훈(2018.12 논문. 안호상과 일민주의의 단군민족주의)



3.2. 파시스트[편집]


제3제국 체제 당시의 독일에서 유학을 한 경험 때문에 나치 독일에 대해 호의적이었고, 이들의 사상에 대해서도 거의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예나 대학교 수학 당시 1930년아돌프 히틀러의 연설을 직접 들었을 정도. 노골적인 파시즘 지론을 책으로 밝히기도 하였다.

미영은 자본주의, 노서아공산주의, 독일나치스, 이태리파쇼주의, 이와 같이 여러 나라들은 저마다 제 주의를 서로 다퉈가면서 세계에 퍼트리기에 바뻤든 것입니다. 미영의 자본주의의 뿌리는 각 나라의 지배급에 깊이 박혔으며 노서아 공산주의의 덩굴은 세계 무산대중에게 넓게 뻐쳤든 것입니다. 그러나 이태리 파쇼와 독일의 나치스는 그 역사가 짧은 것만큼 그들 본국을 떠나선 아직까지 큰 지반을 갖이 못하였읍니다. 그러나 독일은 신작 나치스주의로 국민의 사상을 철석같이 굳게 하여 경제적으로 파멸된 독일을 부흥시키기에 왼 힘을 다하였읍니다. 그런 결과 마츰내 중단되였든 독일 역사는 새 진행을 하게 되여 잃어버렸든 독일 백성의 명예는 차々 회복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수의 세계 시청은 이제야 바야흐로 이 나치스 리론의 매력에 흥미와 호기심을 점점 깊어가기 시작했읍니다. 그러나 이것을 대단 두려워하고 미워하는 이들은 두말할 것 없이 미영계통의 자본주의와 노서아계통의 공산주의였읍니다. 만일 독일 나치스가 이와 같은 속도와 위력으로서 발전해간다면 기성 세계를 갖은 미영과 또 인제 겨우 자리를 잡은 노서아는 사상적으로, 정치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크나큰 타격을 받아 앵글싹손족의 세계자본가의 지배권과 슬라브족의 세계무산자의 통치력이 반드시 줄어질 것은 밝기가 불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명백한 사실을 누구보다도 더 또 미리 잘 보고 있는 미영과 노서아로서는 이 독일 나치스를 그대로 둘 리는 절대로 없었든 것입니다. 그러나 독일은 미영과 노서아의 대항에 조금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 대항에 대항만 하면서, 오직 제가 정한 길만을 걸어갈 뿐이었읍니다. 여러분, 그러면 여기에 올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무 다른 것이 아니고, 오직 충돌과 싸움뿐입니다. 그리하여 千九百三十九年 八月卅日 새벽에 독일 파란, 두 나라는 마츰내 제二차 세계대전쟁불뚜껑을 열고 말았읍니다.

해석
미국영국자본주의, 러시아공산주의, 독일나치즘, 이탈리아파시즘, 이와 같이 여러 나라들은 저마다 제 사상을 서로 다퉈가면서 세계에 퍼트리기에 바빴던 것입니다. 미영의 자본주의의 뿌리는 각 나라의 지배 계급에 깊이 박혔으며 러시아 공산주의의 넝쿨은 세계 무산대중에게 넓게 뻗쳤습니다. 그러나 이탈리아 파시즘과 독일의 나치즘은 그 역사가 짧은 것만큼 그들의 본국을 떠나선 아직까지 큰 지반을 가지지 못 합니다. 그러나 독일은 나치즘으로 국민의 사상을 철석같이 굳게 하여 경제적으로 파멸한 독일을 부흥시키기 위해 온 힘을 다하였습니다. 그런 결과 마침내 중단되었던 독일 역사는 새로 진행되어 잃어버렸던 독일 백성의 명예는 차차 회복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수의 국가들은 이제야 이 나치즘 이론의 매력, 흥미와 호기심을 점차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대단히 두려워하고 미워하는 이들은 두말할 것도 없이 미영의 자본주의와 러시아의 공산주의였습니다. 만일 독일 나치즘이 이와 같은 속도와 위력으로써 발전해나간다면 기성 세계를 가진 미영과, 또 이제 겨우 자리 잡은 러시아는 사상적으로, 정치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크나큰 타격을 받아 앵글로색슨족의 세계 자본가의 지배권과 슬라브족의 세계무산자의 통치력이 반드시 줄어들 것은 불보듯 뻔한 것입니다. 이 명백한 사실을 누구보다도, 또 미리 잘 보고 있는 미영과 러시아는 이 독일의 나치즘을 그대로 둘 리가 절대로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독일은 미영과 러시아의 공격에 조금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 공격에 저항만 하면서 오직 제가 정한 길만을 걸어갈 뿐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러면 여기에 올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른 것들이 아니고, 오직 충돌과 싸움 뿐입니다. 그리하여 1939년 8월 30일 새벽독일폴란드, 두 나라는 마침내 제2차 세계 대전의 불뚜껑을 열고 말았습니다.

- 安浩相『우리의 부르짖음』(文化堂, 1947), 39~40

위의 글은 1947년 쓰여진 글로, 2차 세계 대전의 시작을 전간기 당시 사상의 다툼에 있다고 호도하며 은근슬쩍 "가만히 나치즘을 통해 국민을 단결시키고 내실을 키우던 독일을 자본주의의 미국과 영국, 그리고 공산주의 소련이 두고 못 봐서 공격함으로 2차 대전으로 발전했다"라는 식의 논리를 전개한다.

그는 있는 힘과 있는 열을 다하여 하는 말이 "우리는 빵과 노동과 자유를 원한다. 이 원을 풀어줄 이는 오직 나치스뿐이다. 이 원을 해결하는 데 비로소 나치스 승리, 즉 독일의 승리가 있는 것이다. 만일 그대들이 독일의 승리를 획득하거든 한 사람도 빼지 말고 나치스로 오게 하라!" 할 때에 죽은 듯한 군중은 다시 새 생명이나 얻은 듯이 "히틀러 만세"를 열광적으로 외쳐 부른다. 흥분한 군중을 그는 다시 진정시키고 말을 계속하여 "독일을 망쳐준 자베르사유 조약을 작성한 연합국보다 오히려 그 조약에 서명한 독일의 유태적 사회민주당공산당이다"라고 브르짖을 적에 군중으로부터 쏱아지는 "Ja!"(그렇다) 소리는 대양 위에 폭풍우 밀리듯 하였다. 그의 행동은 철혈로서 된 것 같으며 그의 말은 금심으로 우러나오는 듯하며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도취와 신뢰를 아끼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역대 혁명가들이 그러하듯이 그가 또한 위대한 웅변의 소유자이다. 어떠한 혁명가에 있어서든지 웅변은 위대한 무기였었지만, 히틀러에게 있어선 그것이 위대할 뿐만 아니라 최고로 발달되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게끔 되었다.

安浩相,『히틀러, 아인스타인, 오이켄 제씨의 인상』조광 1938년 11월호


안호상은 파시즘적 역사인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준 인물이다. 그는 독일에서 공부한 관념론 철학과 대종교, 민족사상을 결합시키고자 했다. 문교부장관, 학도호국단 단장 등의 정치적 활동을 하였고, 박정희 정부 시기까지도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전체를 중시하고, ‘국가의 자유’를 우선시하되 자본주의공산주의에 모두 반대하며, 한국 고유 전통 사상에서 보편적 민주주의를 찾는 방식에서 파시즘적 세계관을 보여준다. 단군과 화랑도를 강조하며 민족주의 역사학 계승도 내세웠다. 그는 근대 서구에서 발달된 자유주의적 개인 관념을 이해한 상태에서 그것의 극복 담론으로서 민족주의를 내세우고 있었다.

...

3. 안호상의 일민주의에 보이는 파시즘적 역사인식

안호상은 어떤 인물인가? 그의 경력에서 크게 세 가지 사항이 중요하다. 첫째, 일제 시기 독일에서 유학하며 관념론 철학을 공부했다는 점이다. 그는 중국을 거쳐 1925년부터 독일 예나대학에 입학하였고, 1929년 헤르만 로체의 유심론 철학에 대해 논문을 써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일에서의 유학 경력으로 인해 그가 히틀러 추종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줄곧 따라다녔다. 대표적으로 1947년 이범석민족청년단 훈련학교를 히틀러 유겐트를 본떠 조직한 인물로 지목받은 바 있다. 당시 미군정 대민정보수집 분야에서 일하던 리차드 로빈슨은 수원 훈련학교를 방문한 기자단을 통해 ‘이 학교 교장이 1931년부터 1935년까지 독일에서 살았고 히틀러 청년운동의 열렬한 지지자’임을 알게 되었다고 밝혔다. 역시 미국 대사관 근무 경험이 있는 그레고리 헨더슨은 『소용돌이의 한국정치』에서 리차드 로빈슨의 글을 인용하여 해당 인물이 안호상이라고 단정했다. ‘그가 나치 시대의 예나 대학 졸업생으로 헤겔학도였으며 공개적으로 히틀러 유겐트를 찬미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다시 이들 기록이 알려지며 한국인 연구에도 ‘안호상은 히틀러 유겐트의 열렬한 멤버’라는 서술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후지이 다케시는, 해당 인물이 1930년대 독일에서 유학한 뒤 돌아와 일독문화협회 주사로 활동하며 히틀러 유겐트를 적극 소개한 강세형(姜世馨)이라고 바로잡았다. 안호상의 경우 유학 기간 자체가 다르고, 안호상이 히틀러 유겐트의 멤버였다거나 공공연하게 찬양했다는 증거도 없으며, 그의 히틀러 평가가 당대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고 보았다.

안호상도 자신에 대한 세간의 의혹을 의식하고 있었다. 1996년 출간된 회고록에서 그는 자신이 유학했을 때 나치 세력은 두드러지지 않았고 히틀러 유겐트는 ‘청소년들의 순수한 애국단체’ 정도였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유엔총회 소련대표가 ‘학도호국단은 히틀러 유겐트요, 안호상은 파쇼’라고 했고, 미국 대사도 자신을 보며 ‘히틀러 유겐트가 왔다며 가시돋힌 농담’을 던졌다는 것이다. 안호상은 이에 학도호국단은 히틀러 유겐트가 아니라 화랑을 본뜬 것이고, 나치스 사상이 아니라 국조 단군 한배검의 한백성주의를 따른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또한 스위스 평범한 가정집의 무장 상태에 감명을 받아 학도호국단을 조직한 것이라고 했다. 한편 밀라노 호텔에서 무솔리니 연설 광경을 보고 그저 ‘한 장면의 연극을 보는 듯’ 했다고 떠올리기도 했다. 물론 이상은 시간이 많이 지난 뒤 스스로의 해명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 시점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기억은 지워버렸을 수 있다. 무솔리니를 본 일은 담담하게 적었으나, 히틀러의 연설을 본 경험은 회고록에 남기지 않은 것이다. 안호상이 1938년에 쓴 글을 보면 1930년 바이마르시에서 히틀러 연설을 보고 전율을 느꼈던 일을 고백하고 있다. ‘위대한 웅변의 소유자이자 혁명가’인 히틀러의 연설에 ‘죽은 듯한 군중이 다시 새 생명이나 얻은 듯’ 환호하는 모습, 안호상에게 파시즘은 그러한 체험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1949년 3월 8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학도호국단 결성식에서 문교부장관으로서 10만 학도들에게 ‘여러분이야말로 조국을 지키는 민족의 정예부대’라고 ‘훈시’할 때, 1950년 4월 22일 학도호국단 1주년 기념식에서 ‘남북통일을 피로써 맹서하자’고 외칠 때, 아마도 안호상은 앞서 히틀러의 연설 장면을 떠올렸을 것이다.

즉, 안호상의 기억 속에서 히틀러와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삭제되고 있었지만, ‘대중을 조국애, 민족애로 각성시킨다’는 감각의 계승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의 전통적인, 주체적인 어휘로 분식(粉飾)시키면 되기 때문이다. 분식의 출발점은 대종교 입문, 신채호와의 만남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대종교에 입문하였다. 그리고 독일 유학길에 중국에서 신채호를 직접 만났다. 안호상은 신채호로부터 ‘올바른 민족 역사를 찾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민족의식과 애국심을 불러내는 역할을 역사가 해야 한다’는 사상에 감명받은 바 있는 안호상은 이 때 철학을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젊은 시절에는 서양 사상과 전통 사상의 조화를 고민하는 모습도 보였다. 예를 들어 율곡의 이기론에서 이와 기의 관계를 헤겔 철학과 전체주의에서 부분이 곧 전체라는 이론과 연결시켰다. 그러나 해방 이후 조국이 만들어지고 정치 활동에 직접 나서면서 ‘순수하고 고유한 우리 사상’에 심취하는 모습을 보인다. 유교불교 모두 우리의 것이 아니고, ‘순수한 의미의 한국사상’은 단군 사상밖에 없다는 것이다. 독일 철학의 특정 개념이 순수한 우리 것을 찾는 복고주의로 변형된 것이다. 단군 숭배를 통해 신채호의 국수론을 계승하면서 파시즘은 수면 아래 숨겼다고 할 수 있다.

...

그러면 안호상의 일민주의는 학계에서 어떠한 평가를 받고 있는가? 일민주의를 학술적으로 처음 정의한 연구자는 1990년대 중반 서중석이었다. 일민주의 이데올로그 안호상의 주장-단군 홍익인간 정신과 화랑도 사상을 이어받아 현대의 모든 이론체계를 지양한 가장 깊고 큰 주의-은 그저 ‘모순과 허황함’ 그리고 ‘역사의식의 결여’를 보여준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면서도 민족주의처럼 보이게 하는 면이 파시즘 논리와 뒤섞여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도자 중시, 개인주의 비판, 도의와 윤리 같은 추상적 정신 강조 등의 봉건적 요소를 ‘한국형 파시즘’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중도파 민족주의자들과 일민주의의 반자본주의가 흡사’한 부분에 대해서는 평가를 유보하였다. 서중석은 일민주의의 파시즘적 요소를 선구적으로 찾아냈으나 파시즘과 민족주의의 유사성 문제는 모호한 상태로 놔두었다.

2000년대 이후 안호상의 사상 체계에 대한 분석은 좀 더 정교해졌다. 안호상이 국가유기체론의 입장에서 사회계약설을 비판했고, 부분은 전체의 부분으로서만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는 전체주의적 사고로 개인에 대한 국가의 우월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후대에도 강한 영향력을 갖는다는 문제제기가 등장했다. ‘해방 직후 상황에 한정된 허황된 이데올로기’ 이상의 의미를 보아야 성찰이 가능하다는 제언인 셈이다. 그러나 한국사학계에선 여전히 안호상의 역사인식과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그것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영향을 받았지만 진정성 여부에서 나누어진다고 보거나, 안재홍의 신민족주의는 ‘개인’도 중시했다고 애써 구분하는 것이다. 그런데 ‘개인의 자유’를 ‘국가와 민족의 자유’에 종속시키고, 개인의 정치적 독립성과 자율성 실현을 외면했다는 점에서 양자 사이에 차이가 있는지는 검증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실제 안호상의 일민주의 저술에 나타난 파시즘적 특성에는 무엇이 있을까? 어떠한 이념을 파시즘으로 보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첫째, 개인에 대해 전체의 우위를 주장해야 한다. 개인은 유기체인 전체에 종속되어 있는 존재다. 이 때 혈통, 전통, 역사를 강조할수록 대외적 위기가 부각되고 대내적 억압 정도는 강해진다. 둘째, 개개인을 대중, 민중, 민족, 국민 등으로 호명하고 각성을 촉구한다는 점에서 전근대적 전제주의나 전체주의와는 차별화된다. 이념적으로 대중적 지지가 계속 상기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셋째, 실제 모든 이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안티테제로서만 기능한다. 자유주의(개인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민주주의 모두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국민 내부에서도 누가 배신자인지 가려내는 데 적극적이다. 무언가를 반대하고 억누르는 열정이 체제를 지탱하는 동력이 된다.

먼저 안호상이 전체를 중시한다는 진술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헤겔주의자인 안호상에게 전체로서의 국가는 이상적이고 절대적인 존재로 전제되어 있다. 검토해보아야 할 것은 개인을 전체에 종속시키는 방식이다. 개인의 자유와 평등 제한을 어떠한 근거로 정당화하고 있고, 기존 이데올로기들을 어떠한 논리로 거부하였는가? 안호상에 따르면 일민주의의 근본 목표는 일민의 자유다. 그런데 자유는 객관적이고 도덕적인 가치를 갖는 것이기 때문에 강제적이다. 왜 강제적이어야 하는가? 개인의 자유를 다른 나라가 간섭하고 구속하기 때문이다. 즉, 개인이 자유로우려면 겨레와 나라가 먼저 자유롭게 독립해야 한다. ‘개인의 자유’와 ‘국가의 자유’를 선후관계로 놓고, 우선순위 결정이 마치 ‘객관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가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입각하여, 개인의 자유를 앞세우는 자유주의는 우리 현실에 적합하지 않은 이념으로 취급된다. 아울러 민족보다 계급을 중시하는 공산주의 역시 전체의 평등을 해치기 때문에 문제다. 독특한 것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싸잡아서 돈 숭배주의, 유물주의로 배척한다는 점이다. 또한 이들 주의가 실제로는 제국주의에 불과함에도 겉으로는 민주주의 간판을 내세우기 때문에 우리 내부에 이를 추종하는 배신자들이 나온다고 보았다. 안호상은 자유주의와 달리 민주주의의 가치 자체는 부정하지 않으며, 일민주의가 ‘진짜’ 민주주의라는 입장을 보인다. 태평양전쟁기 근대초극론과 마찬가지로 반자본주의, 반공산주의 관점을 보임에도 자신은 파시스트가 아니라고 항변하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파시즘조차 민주주의를 표방함은 안호상도 알고 있었다. 안호상은 한국 고유의 전통 사상에서 보편적 민주주의를 발견해냄으로써, 일민주의를 세계 보편의 가치로 승화시키는 논리적 비약을 감행한다.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에 ‘배타적이지 않은’ 민족주의라고 자처한다. 역설적이게도 안호상은 민족의 역사성을 강조하는 파시즘적 역사인식을 통해 파시즘으로부터 결백함을 증명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면 안호상의 ‘개인’ 관념에 근대적인 요소는 전혀 없었는가? 서중석의 지적대로 충성을 다해야 하는 신민에 불과하다면 파시즘으로서는 결격 사유가 된다. 안호상은, 자본주의가 본래 사람은 이기적이라는 철학적 고찰과 생존경쟁의 법칙을 따른다는 생물학적 관찰에서 비롯되었으며 당시에는 타당한 관점이었다고 보았다. 일민주의는 공산주의와 달리 개인의 소유도 절대로 보장한다고 밝혔다. 다만 ‘민족 이익’이 ‘개인 이익’보다 더 크다는 말을 덧붙인다. ‘개인 이익’의 희생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개인 소유권 보장과 모순되는 진술이다. 1960년대 쓴 글에서 안호상은 문교부장관 재임 시절 정립한 ‘민주적 민족론’에 입각해 좀 더 적극적인 해석들을 덧붙인다. 일단 한백성주의(=일민주의) 역시 ‘사회계약설에 바탕한 원자론적인 다원론적 사회관’이 아니라 ‘유기적 전체론에 바탕한 일원론적 사회관’이라는 점에서 전체주의임을 인정한다. 안호상은 자본주의를 비판할 때는 ‘국가가 자본가들의 이익과 재산의 증식기구’라는 공산주의의 주장을 차용하고, 정작 공산주의의 계급주의는 개인주의에 불과하다고 일축해 버린다. 그에게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 동일시되고, 민주주의 역시 정치 방법에 불과한 것이다. 이제 민족의 정치 목적으로서 ‘민족주의’가 일민주의 대신 새롭게 부각된다. 자본주의적 세계주의, 공산주의적 국제주의는 전체주의이긴 하지만 민족주의가 아니라는 점에서 극단의 개인자유주의와 상통한다. 이처럼 근대 서구에서 발달된 자유주의적 개인 관념을 이해한 상태에서 그것의 극복 담론으로서 민족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왜 민족국가가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있는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핏줄(혈연), 전통사상, 역사를 소환하는 것이지, 단순한 전통 회귀는 아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안호상의 파시즘적 세계관은 일정하게 근대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여진다.

...

그러면 안호상의 파시즘적 역사인식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안호상의 역사인식을 간단히 요약하면 단군의 홍익인간 정신이 신라의 화랑주의로 이어졌다가 오늘날의 일민주의로 되살아났다는 것이다. 이들 사상의 정수는 ‘민족과 조국에 대한 의리’가 된다. 또한 고조선신라 때 백성이 임금을 뽑았다는 기록에 의거하여 ‘참된 민주주의의 시초’로 규정하였다. 국인(國人)이 단군을 임금으로 뽑았다(立以爲君)는 『동몽선습(童蒙先習)』의 기록, 신라에서 박씨, 석씨, 김씨, 장자나 차자, 남자나 여자가 모두 임금이 된 사례 등이 들어진다. 사실 맹자 등 전통 유학 사상에 민본, 민권 사상이 들어 있었다는 생각은 정약용 이래 이기(李沂), 박은식 등 개신유학자들에 의해 공유된 바 있었다. 외부의 낯선 사상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내부의 고유한 무언가를 끌어들이려 했다는 점에서 양자는 유사하다. 그러나 ‘민’의 범주, 정치 참여 정도를 따지지 않는 한, 자의적 해석일 수밖에 없다.

1970년대에 이르러 안호상은 오로지 단군의 역사를 인정하는가 아닌가에 따라 ‘올바른 역사관’ 여부를 판단하는 모습을 보인다. 단군을 부정하고 민족주의를 파쇼주의라 떠드는 공산주의자들과 일본교육에 중독된 실증주의 역사교수들이 동격으로 취급된다. 역사교수들만이 ‘과학적’이냐고 반문하면서도 한편으로 몰상식적, 비학문적, 정치적 언술들을 늘어놓는다. 위만조선을 언급하는 것은 ‘이적(利敵)과 반역의 행위’라거나, 낙랑군대동강 유역으로 비정하면 그 지역을 점거하고 있는 김일성에게 ‘민족사적 정통성’을 빼앗기게 된다는 주장 등이 그러하다. '오늘날 이른바 유사역사학자들의 억지 주장들이 어디에서 기원하고 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단군 연구가 신채호, 최남선, 안재홍, 정인보 등 (신)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의 그것을 계승하였음을 내세운다. 신라 화랑주의와 현대 일민주의 사이의 긴 기간을 단절로 보는 관점 역시 신채호의 역사인식을 닮아 있다. 사실 우리 민족의 진취적, 자주적 기상이 신라의 삼국통일로 한 번 위축되었고, 묘청이 사대주의적 유학자 김부식에게 패함으로써 결정적으로 약화되었으며, 망국에 이르렀다는 것은 신채호 이래 민족주의 역사가들에게 공통된 역사상이다. 기존 사학사는 이를 식민주의 역사학에 맞서 싸우면서 형성된 ‘근대적 민족주의적 민중사관’으로 의미화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안호상 이래 유사역사학과의 친연성을 제대로 설명해내지 못한다. 그저 유사역사학에 대해 ‘과도한 민족의식과 부실한 실증’이라는 원론적 비판만 되풀이되고 있다. 식민주의 역사학과의 관계는 별개로 따져야겠지만, 파시즘이라는 기준을 명확하게 가지고 들여다보면 안호상과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이 공유하고 있던 역사인식이 무엇인지 드러날 것이다

해방 이후 파시즘적 역사인식의 정립 과정#


3.3. 일민주의[편집]


"우리 3천만의 최고영도자이신 이승만 박사의 밝은 이성의 판단과 맑은 양심의 반성과, 그리고 또 굳센 의지의 결정으로서(중략)3천만 겨레는 재래의 모든 주의들과 주장들을 모조리 다 버리고 오직 이 일민주의의 깃발 밑으로만 모여야 된다. 우리는 일민주의를 위하여 일하며 싸우며 또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

안호상, 『一民主義의 본바탕』 중


1949년 이승만이 제시한 일민주의(一民主義)[8]의 이론적 틀을 제시하였다. 본래 일민주의는 이승만이 제시한 구호수준의 단어였는데, 안호상에 의하여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로 인하여 일민주의는 대한국민당의 당 이념이 되었고 일민주의 보급회에 의한 국민운동으로 나아갔다.

문교부 장관시절인 1949년 2월 18일에는 학도호국단을 창설하였다. 이는 당시 국회의 반대 속에서 탄생한 것으로, 히틀러의 유겐트를 만들었다는 비판이 있었다. 이에 대해 안호상은 당시 국시였던 일민주의에 따른 것이라고 하였다.

1949년 12월 일민주의보급회 부회장직에 선출되었으며, 관련 이론서들을 저술하면서 일민주의를 적극 홍보하였다. # 그의 저서인 『일민주의의 본바탕』(1950)에서는 '하나의 민족에는 하나의 사상만이 존재한다'라고 말하면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우리 민족의 지도원리가 되기에는 천박하다'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민족 전체가 하나로 뭉쳐 이승만 대통령의 영도에 따라 움직여야한다.'라고 강조한다.

이후 안호상은 이 사상을 더욱 발전시켜, '한백성주의'를 탄생시켰다. 이 사상은 모든 차별의 철폐를 주장하고 하나로 일체화된 단일민족의 통일사회상을 제시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애국적인 민족주의자라는 긍정적인 평가와 파시스트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엇갈린다.[9]


4.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58
제4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제5선거구)
무소속
1,768표 (8.73%)
낙선 (3위)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 (경상남도 참의원)
무소속

당선
초선 [10]


5. 여담[편집]


  • 제3제국 당시 독일 유학 경험 탓인지 나치 독일에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자신의 회고록에서 자신은 나치주의자는 아니라고 서술했다.

  • 단군릉 참배를 위해서 무단 방북을 2차례 감행했고 북한에서 주는 조국통일상도 받았다. 이승만과 친분이 깊었던 인물인걸 생각하면 아이러니.

  • 이범석과 함께 대체역사 소설 및 게임에서는 한국의 파시스트 역할을 맡게되는 경우가 많다.

  •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유사 파시즘 사상인 삼균주의 이론을 전공했음에도 고고학자 처럼 행동한다. 범민족주의를 내세우며 만주족과 같은 북방 민족은 예맥세력의 일원이라고 포장하고 일본은 도래인들이 죠몬인들을 괴롭혀서 만든 식민왕국이라면서 일본은 없다를 대놓고 외치고 들고 나오는 유물은 전부 진짜라서 아무도 반박을 못한다.

  • 대한민국 초대 문교부(교육부) 장관 시절에 대만 린위탕에게 "중국이 어려운 한자(漢字)를 만들어 놔 우리 한국까지 문제가 많다”고 하자, 이에 린위탕은 “그게 무슨 말이오? 한자당신네 조상이 만든 문자인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라고 반문했다는 일화가 있다.

  • 문교부 장관일 당시 영희와 철수 그리고 바둑이가 교과서에 처음으로 등제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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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5세 상(相) 항렬.[2] 족보상으로는 재종형(再從兄)이나, 이는 아버지 안석제(安奭濟)가 아들이 없던 종조부 안용(安鎔)에 입양되었기 때문이며, 실제로는 사촌 동생이다.[3] 탐진 안씨 집성촌이다. 독립운동가 안창제·안효제·안희제와 제헌 국회의원 안준상도 이 마을 출신이다. 안호상의 생가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39호로 지정되었다.[4] 한훤당 김굉필의 후손인 김규수(金奎銖)의 딸이다.[5] 이 중에서 쾰로이터와 헤데만은 나치 정권에 적극적으로 부역했다.[6] 이는 한국인으로는 다섯번 째라고 한다.[7] 본래 교주를 가리키는 명칭이 '도사교'였으나 3대 도사교 윤세복이 총전교로 명칭을 바꾸었다. 엄밀히 말해서 16대 교주이다.[8] '하나의 국민(一民)'으로 대동단결하여 민주주의의 토대를 마련하고 공산주의에 대항한다는 통치이념[9] 그와 가장 비슷한 성향의 정치인으로는 한국 무장독립운동의 대부인 철기 이범석이 있다. 이범석 또한 나치의 패망은 안타까워 했다.[10]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인한 국회 해산으로 의원직 상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