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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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0대 체신부 장관
최용덕
崔用德 | Choi Yong-duk


파일:20190311001359564.jpg

출생
1898년 9월 19일
한성부 동서 숭신방 동소문외계 성북동
(現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사망
1969년 8월 15일 (향년 70세)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대방동 461-5
(現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제1장군묘역-29
본관
경주 최씨[1]

창석(滄石)
재임기간
초대 국방부 차관
1948년 8월 20일 ~ 1950년 5월 14일
제2대 공군참모총장
1952년 12월 1일 ~ 1954년 11월 19일
제10대 체신부 장관
1960년 6월 2일 ~ 1960년 8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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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호용국
자녀
딸 최보욱
친인척
외손녀 반춘래
학력
중화민국 육군군관학교 (졸업)
허베이성 바오딩 육군항공학교 (졸업)
중화민국 공군군관학교 (졸업)
육군보병학교 (졸업)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 3기)
경력
초대 국방부 차관
제10대 체신부 장관
제5대 주 중화민국 대사
상훈
을지무공훈장 수훈
충무무공훈장 수훈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
군사 경력
임관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3기)
복무
대한민국 공군
1948년 ~ 1955년
최종 계급
중장[1] (대한민국 공군)
최종 보직
공군참모총장 고문
주요 보직
육군항공부대 사령관
국방차관
항공기지사령관
공군사관학교장
작전참모부장
공군참모총장
참전
6.25 전쟁

1. 개요
2. 생애
2.1. 중국 육군장교 그리고 서왈보와의 만남. 공군 전과
2.2. 국민혁명군 항공대
2.3. 광복군 장군
2.4. 귀국. 대한민국 항공대 창설
2.5. 초대 국방차관
2.6. 공군 복귀
2.7. 퇴역 이후
2.8. 공군가, 공군사관학교가 작사
3. 기타
4. 연보
5. 최용덕 장군의 중국군 계급 관련
5.1. 설명



1. 개요[편집]


파일:최용덕_나의운동목표.jpg

나의 운동 목표

한국 청년도 군복을 입도록 해야겠다.

우리 손으로 설계 제작한 항공기가 우리 공역에서 날아야겠다.

인류의 행복과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다른 나라 공역에서도 날아야겠다.

인류문화의 발전을 따라 모두가 항공생활을 해야겠다.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시기에 작성)


나라를 위해 일할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구나.


내가 죽으면 우리 공군복을 입혀달라.


대한민국군인이자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공군 창설을 주도한 7인 중 한 명으로서, 대한민국 공군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한국 공군의 역사에서 높이 평가받는 인물이다.


2. 생애[편집]



2.1. 중국 육군장교 그리고 서왈보와의 만남. 공군 전과[편집]


1898년 9월 19일 한성부 동서 숭신방 동소문외계 성북동(현재의 서울특별시 성북구)에서 태어났다.

대한제국 2등 군의관을 지낸 아버지 슬하에서 자랐으며 1900년대 후반기에 사립 봉명학교에 입학하여 근대 교육을 받았다. 경술국치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2년간 숭실중학교에서 수학하고 1916년 원세개(위안스카이)가 설립한 육군군관학교에서 수학 후 졸업하여 중국군 소위가 되어 단기서 군의 제2사단에서 복무하였다.

이후 서북군벌 펑위샹 군의 항공대장이던 서왈보 장군(독립운동가) [2]의 도움[3]으로 1920년에 중국 허베이성의 보정항공학교에 입교하여 조종사가 된다. 1922년에는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고 상하이·텐진·베이징 시 등지에서 의열단 활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1924년 오패부 (우페이푸)의 직예군벌 소속으로 2차 직봉전쟁에 참전했으나 우페이푸가 패배한 후 손전방(쑨촨팡)에게 흡수되었다.


2.2. 국민혁명군 항공대[편집]


1926년 북벌에 나선 국민혁명군이 상하이와 난징을 점령할 때 손전방(쑨촨팡) 군벌의 항공대 소속이었던 최용덕, 권기옥 등은 당시 국민혁명군 동로군 참모였던 김홍일 소령과 접촉하여 투항하였다.

1926년 국민혁명군은 상해와 남창(南昌) 등지에서 군벌들의 항공대를 흡수하여 항공대를 구성하였다. 1927년 3월 이를 근간으로 국민혁명군 총사령부항공처 항공총대(航空總隊)를 편성함과 동시에 손전방 군벌의 항공사령부를 수용하여 동로군항공사령부(東路軍航空司令部)를 설립했다. 권기옥 등과 함께 이곳에서 공군으로 활약했으며, 1928년 초 수상비행대(水上飛行隊) 부대장에 임명되어 북벌에 참여했다.

이후 최용덕은 중화민국 공군에 헌신하며 2차 장계전쟁, 중원대전 중에 활약했고 1930년 10월 국민혁명군 항공 제4대 부대장을 역임하였으며 1931년 1차 양광사변이 발생하자 광저우 국민정부를 지지했으나 1931년 12월 4차 전국대표대회로 난징 국민정부와 광저우 국민정부가 통합되면서 난징 항공대 소속으로 제1차 상하이 사변에 투입되었다. 이후 1934년 중앙항공학교 교육처 교관으로 근무하면서 후진을 양성했고, 1935년 남창총참장(南昌總站長), 1930년대 후반 성도비행대(成都飛行隊) 창장(廠長) 및 중국 공군 상교 [4] 으로 활약하였다. 이처럼 최용덕은 중국 공군으로 일제와 전투에 직접 참전하여 맞서 싸웠고, 중국 공군의 확장과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이후 공군지휘부 참모장, 공군기지사령관 겸 공군기지학교장직을 수행하였으며, 중국 국민혁명군의 육군대학을 졸업한 한국인 3인 (김홍일 육군소장, 박시창 육군상교, 최용덕 공군 상교 - 중국국 계급 기준) 중 한 명으로 김홍일, 박시창 등보다 1년 앞서 졸업하였다.


2.3. 광복군 장군[편집]


1940년대에는 당시 광복군에 대한 중국 국민정부의 9개 준승에 따라 중국군 상교의 신분으로 한국광복군 총무처장, 참모처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항공건설 위원회 주임 등을 역임하였으며 9개 준승이 철폐된 이후로는 지청천 총사령관의 고급참모로서 활동하였다.
광복 이후 북평 잠편지대장으로서 만주일대의 한적 사병 (일본군, 만주군)을 광복군으로 포섭하는 데 힘썼다.


2.4. 귀국. 대한민국 항공대 창설[편집]


광복 후 귀국하여 대한민국 공군의 모태가 되는 항공건설협회[5] 회장을 지냈다. 최용덕 자신을 포함해 권기옥·장덕창·박범집·김정렬·이근석·김영환 등 조종사 출신들이 항공대 설립을 추진하지만 1947년에 미군정이 중국 항공대의 창군원로로서 당시 국부군 항공위원회 지휘부[6]로 공군 상교까지 역임한[7][8] 그의 경력을 인정하지 않았고,[9] 조선경비대 보병학교에 입교하여 미국식 군사훈련을 이수하라는 조건을 내건다. 많은 이들이 반대했지만 최용덕은 다른 간부들을 설득하였고, 결국 입교하여 보병교육을 받고 1948년 4월 참위[소위]로 임관했다. 이때 나이가 만 49세였다. 다행히 임관 후에는 고속진급하여 같은 해 7월 9일에 대위 계급으로 백인엽 소령의 후임으로 육군 항공기지부대 2대 사령관이 되었다.[10]


2.5. 초대 국방차관[편집]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대한민국 국방부차관을 지냈고 대한민국 공군이 1949년에 육군으로부터 독립하는데 공헌하였다. 예비역 공군 장군인 최규순의 증언에 따르면 임시정부 당시에는 이범석과 사이가 안좋은 편이었으나 김정렬이 공군의 독립을 위해 국방차관직을 맡아 줄 것을 요청하였다. 운남강무당 출신인 이범석과 달리 최용덕은 송호성과 같은 보정군관학교 출신이었고, 이러한 차이가 그 들의 사이를 멀게 한 원인 중 하나였다.


2.6. 공군 복귀[편집]


1950년 5월 차관에서 물러난 이후 공군사관학교장, 김포기지전투사령관, 공군본부 작전참모부장 등을 지냈다. 1952년에는 전임인 김정렬[11]에 이어 2대 공참총장에 올랐다.

특히 한국전쟁 당시 50세의 노장임에도 불구하고[12] 제 3대 공군사관학교장(1950.5.1.~1952.12.10)으로 재임하며 김포지구 경비사령부를 편성, 김포기지를 방어했다. 그리고 1952년 12월 1일 제 2대 공군참모총장으로 취임해 휴전이 될 때까지 공군의 항공작전을 총괄했다.
전쟁이 한창 일때 최용덕 장군은 우리의 손으로 만든 항공기를 꿈꾸었다. 비행기 제작기술은 미래의 경쟁력과 직결되는 일임을 직감 했기 때문이다.

“올해는 기어코 우리들의 손으로, 우리들의 뇌로서 만들어져 나올 비행기를 자체 제작하고 싶다. 우리들의 하늘을 우리들의 비행기로서 지키지 못한다는 것이 이 얼마나 비통하고 부끄러운 일인가.


최용덕 장군은 항공창을 설립해 대한민국 스스로 비행기를 만들 수 있는 준비를 했고 1953년 한국 최초의 경비행기 부활호가 제작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부활(復活)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직접 친필 휘호를 내렸다.
파일:external/b08d7648de559d057918b4fcff1b9ab0d973cc9549f5176b78cab1c745ecbd56.jpg
부활호.

파일:external/www.ecobs.co.kr/3672786899_689cf6af_fred.jpg
2004년 10월, 복원되어 50여 년 만에 다시 이름 그대로 부활하여 비행하는 부활호.


2.7. 퇴역 이후[편집]


1955년 공군 중장으로 퇴임하고 건국공로훈장,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등을 수훈받았으며 1960년에 체신부 장관, 1961년에 중화민국 대사를 지냈다.

1969년 8월 15일 광복절 당일, 대방동 자택에서 고혈압으로 인해 사망했다. 당시 향년 72세.

중국에서 활약했을 당시 우정을 나누었던 시인 이은상이 그의 부음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최용덕 장군에 대한 시를 남겼다.

애사(哀詞) - 시인 이은상

오늘 아침, 낯익은 벗들 공군 장병들 다 모였는데 장군은 혼자 어디로 가십니까

당신은 이 나라 공군의 아버지아들들 무럭무럭 자라는데 장군은 돌아서 어디로 가십니까

(중략)

한인전선에서 조각조각 부숴진 다리뼈 피눈물 괸 독립운동의 표본으로

절뚝거리며 다니던 불구장군 이 땅에 우글거리는 사상의 불구자

지조의 불구자들을 꾸짖던 걸음걸이 병과, 가난과, 온갖 유혹도 비웃으며

다만 광복된 조국땅에서 일할 수 있는 것을 기뻐하더니 장군은 문득 어디로 가십니까.

(중략)

그 높고 맑은 인간성 그 나라 사랑하던 정신과 지조 남은 우리들 가슴 속에 새겨졌기에

오늘 아침 당신 관 위에 태극기 덮고 원하던 조국땅, 포근한 흙 속으로 꽃이랑 먼저 보내옵니다.

보내며 마지막 드리는 말씀 몸은 비록 흙 속에 묻힐지라도

넋은 저 해와 달과 별들과 함께 조국 하늘 지켜주소서.

(1969.8.19, 영결식에서)


오늘날 대한민국 공군이 세계 10위권의 강군으로 성장하기까지 1세대 최용덕 장군의 의지와 결의가 매우 지대한 역할을 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8. 공군가, 공군사관학교가 작사[편집]


대한민국 공군의 대표 군가인 <공군가>의 작사가이기도 하다. 다음은 <공군가>의 가사 전문.
1.
하늘을 달리는 우리 꿈을 보아라
하늘을 지키는 우리 힘을 믿으라
죽어도 또 죽어도 겨레와 나라
가슴 속 끓는 피를 저 하늘에 뿌린다
2.
하늘은 우리의 일터요 싸움터
하늘은 우리의 고향이요 또 무덤
살아도 되살아도 정의와 자유
넋이야 있고 없고 저 하늘을 지킨다



또한 공군사관학교 교가의 작사가 이다.

우리는 피끓는 배달의 아들
높고 빛나는 한배님 정신 이어 받아서
누리에 떨 치고자 하늘로 솟나니
우리들 영혼의 기지 공군사관학교
하늘은 우리의 일터요 싸움터
하늘에 살면서 하늘에 목숨 바친다




3. 기타[편집]


공군교육사령부공군사관학교에 최용덕 장군 동상이 세워졌으며, 2019년 11월 19일 공군사관학교에서 제막식이 개최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장군은 현역에 있을 때 국가에서 나오는 월급의 대부분을 후배나 남을 위해 써버리고 정작 본인은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했다. 부인 호용국 여사가 장사로 간신히 생계를 이어갈 정도로 부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퇴역 이후 갈현동의 셋방에서 기거하였으며 딸 [13] 의 병으로 부인 호용국 여사는 한동안 대만으로 건너가 장군은 식모와 부관의 도움으로 지냈다. 1968년 공군 보라매회 후배들의 도움으로 서울 공군회관 근처에 작은 집을 선물받아 기거했다.[14]

임종을 지킨 이는 급히 대만에서 달려온 부인 호용국 여사와 외할머니 등에 업힌 8개월의 외손녀[15] 그리고 시인 이은상 선생이었다.
장군이 영면한 후 외손녀의 분유값을 찾기 위해 장군의 고의적삼을 뒤져보니 나온 전 재산은 단돈 240원[16] 뿐이었다고 한다.[17]


4. 연보[편집]


(참조: 이윤식 著 조국의 별 최용덕, 위키백과 - 일본어 판)
1898년 서울 생
1913년 서울 봉명중 졸업 후 중국 망명
1914년 북경 숭실중학교 졸업
1916년 중국 보정 육군군관학교 졸업, 중국 육군 소대장 / 중대장 역임
1919년 중국군 사직 후 독립운동에 투신, 일본 경찰에 체포 투옥, 중국군 헌병사령관 도움으로 풀려남
1920년 서왈보의 도움으로 중국 보정비행학교에 입교, 졸업 후 비행학교 교관 역임
1922년 중국 수상 비행대 副대장
1923년 중국 공군 지휘부 참모장 겸 공군기지사령관 [18]
1925년 중국 공군기지학교 교장
1925년 중국 국민 제3군 항공 제2대대장
1926년 중국 국민정부 항공대 창설 멤버로 참가 [19]
1926년 중국 국민정부 국민 제3군 항공 제2대대장
1929년 중국 수상 비행대 副대장 [20]
1930년 중국 국민혁명군 육군 중교 (중령) [21], 항공 제4대 副대장
1933년 중국 공군 소교 (소령) 상급 [22] [23]
1935년 중국 공군 소교 [24]
1935년 중국 남창비행장 사령관, 서군항공대대 부대대장
1937년 중국 공군 중교 [25] [26]
1938년 중앙훈련위원회 육공연락훈련반 부주임
1940년 중국 육군대학 특별반 제5기 입교 [27]
1942년 중국 육군대학 특별반 5기 졸업,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총무처장
1944년 공군 상교 [28] [29]
1945년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처장, 광복군북평잠편지대장
1946년 중국에서 귀국
1946년 항공건설협회 회장
1948년 조선경비대 육군 항공대 창설, 참위로 임관
1948년 초대 항공기지사령관
1948년 국방부 차관
1950년 공군 준장으로 진급. 공군사관학교 교장, 김포지구 전투사령부 사령관. 공군 후방사령관
1952년 공군 소장 진급, 공군기술학교 창설, 2대 참모총장 취임
1953년 공군 중장 진급.
1954년 참모총장 퇴임. 참모총장 고문
1956년 퇴역
1960년 4.19 혁명 이후 과도 정부 내각 체신부장관
1961년 주 중화민국 대사
1962년 외교부 고문 보직
1969년 8월 15일 별세


5. 최용덕 장군의 중국군 계급 관련[편집]



5.1. 설명[편집]


최용덕 장군의 경우 중국 공군 중교(중령), 상교(대령)였느냐 장성급이냐 하는 부분에 있어 명확하지가 않는 부분이 있다. 1944년 5월 주중 미국대사가 국무부에 보고하는 기록에 따르면 최장군을 "최용덕 대령, 광복군 참모부 소장"이라 하고 있어 1940년대 초반에는 공군 상교(대령)였을 것으로 추측을 하고 있다.

대만의 盧克彰 編著『空軍建軍史話』空軍總部政治作戰部、1974年 46p 에 따르면 육군에서 항공서 소속 장병을 공군 계급으로 분리하면서 대우는 전과 동일하게 하되 2계급 씩 낮췄다. (1933년 2월). 이에 당시 육군 소장은 공군 중교, 육군 상교는 공군 소교, 육군 중교는 공군 상위 등으로 변경되었다. 최 장군은 공군 중교 또는 상교이었을 거라 보면 육군 소장-중장 대우로 볼 수 있다. 일례로 공군의 아주머니 권기옥 여사는 보병중교에서 공군 상위로 변경 후 공군 중교로 퇴역했다. 육군 상교~소장 대우 인셈. 실제 kbs에서 그녀를 국민정부 정규군 소장으로 표현하였다
이영무 [30]의 경우도 해방 후 중일전쟁에 대한 기고문의 자기소개에서 공군중교라 적고 소장 대우를 병기한 것을 보면 국미혁명군에서의 항공서 장병에 대한 계급 변경 사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김신 장군의 과거 조선일보 인터뷰에 따르면 [31] 최용덕 장군은 중국군 공군 중교로 있었는데 이는 매우 높은 계급으로 당시 중국 공군의 최고 계급은 소장 이었다고 하고 있다. [32]

계급에 대한 추정은 당시 국민정부 공보에 근거하는 것이 정확하다. 다만 현재 디지털화된 공보자료로 확인하기 어려운 상교 진급에 관해 미국 대사의 보고자료가 아니더라도 9개준승 하 광복군 총사령부는 중국군 상교들이 차지했는데, 그중 한명이 최용덕 이므로 그는 최소한 공군 상교에 이르렀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김홍일장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공보에 근거한 계급 추정은 좀 더 연구가 필요한데 이는 김홍일 장군의 경우도 회고록에서의 계급과 공보상의 계급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부분은 2차대전기 미군의 정규,임시계급 운용에 대한 용례 및 김홍일장군 편에 기술된 내용을 참고하기 바란다.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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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57년 경주 최씨 중앙종친회 초대 회장에 취임한 바 있다.#[2] 서왈보는 1886년 함경남도 원산(元山)에서 출생하여 평양 대성학교(大成學校)에서 수학했다. 경술국치 이후 중국 북경으로 망명, 남원항공학교(南苑航空學校)에 입학하여 비행사가 되었다. 남원항공학교는 1913년 원세개에 의해 창립된 중국 최초의 정규 항공학교였다. 1923년 국립북경항공학교로 개칭했고 1925년 폐교되기 전까지 4기에 걸쳐 중국 항공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비행사를 배출했다. 항공학교를 나온 뒤 중국 오패부(吳佩孚) 군벌에서 공군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풍옥상(馮玉祥) 군벌에 가담하여 서북변방독판서참정공병대좌(西北邊防督辦署參政工兵大佐) 및 서북항공대(西北航空隊) 교육주임·부대장으로 활약하다 1926년 5월 비행기 추락 사고로 운명하였다.[3] 그의 도움을 받은 유명인 2인이 최용덕 장군과 최초의 여 비행사로 알려진 권기옥 여사[4] 육군 2성장군 대우[5] 당시의 항공경력자를 끌어모으는 단체였다. 파일럿과 기술자 등을 합쳐 대한민국 전체에 항공 관련 인력이 50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비행이 가능한 인력은 100명 남짓.[6] 장개석 총통의 전용기 부기장을 전속으로 추천하는 등 중국 국민정부 고위층과의 유대가 투터웠다.[7] 중국군에서 공군 상교는 육군 중장과 동일한 대우였다. 즉 최장군은 중국군 육군 기준 장성급 인사였던 것.[8] 광복군 참장[9] 특별임관 형태로 중국군 중장을 지낸 김홍일준장 임관, 일본군 대좌를 지낸 이응준이 대령으로 임관한 걸 생각하면 좀 불합리한 처사였다.[소위] [10] 백인엽 소령이 부임한 7인의 면면을 보자마자 바로 사퇴했다고 한다. 상대는 광복군 장군, 중국군 상교, 중교, 일본군 대위 등의 기라성 같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11] 최용덕보다 19살이나 어렸다.[12] 지금이야 장성급 장교가 40대 후반 ~ 60대 초반 까지이며, 50세면 준장, 소장급 정도로 한창 나이대이나, 국군 초창기만 해도 30, 40대 장성들이 넘치던 시기였다.[13] 최보욱 여사. 중화민국(대만) 장교와 혼인하였다. [14] 1969년 최용덕 장군이 사망하고 1991년 부인 호용국 여사가 사망한 후 2004년 공군에서 홀로 남은 외손녀를 상대로 공군 소유의 땅에 세워진 이 집에서 퇴거할 것을 요구해서 이슈화 된 적이 있었다.# 그 뒤에 대한 결과는 알려진바가 없다.[15] 반춘래 여사. 위 동영상에 나온다 [16] 2021년 현재 가치로 3만원 정도.[17] 조선일보 1969년 8월 16일 기사 참조 [18] 북양 군벌군[19] 국민혁명군 북벌 시 동로군 총사령부 참모 김홍일 소령과 접선[20] 申報第20218号 (PDF) 13コマ目 「航空水飛機並不移停吳淞」에 中校飛航員崔滄石 이란 기록이 남아있음[21] 국민정부 공보에 의함. 1929년 육군중교의 기사가 남아있어 공보에 의한 진급공지가 실제보다 늦었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명령서에서 권기옥 여사는 소교.[22] 1933년 2월 국민혁명군 항공서 직원은 모두 대우는 전과 동일하게 하되 계급만 2계급 낮춤. 육군 중교→ 상위. 육군 소장 → 공군 중교. 盧克彰編著『空軍建軍史話』空軍總部政治作戰部、1974年 46p. 참조[23] 권기옥 여사는 육군 중교에서 공군 상위로 변경되었다. 최 장군은 육군 상교 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24] 육군 상교 대우 [25] 공군 중교는 육군 소장 대우이다[26] 공보상의 진급동기인 가오즈항이 1934년에 이미 중교 대대장인 것을 볼 때 최용덕 장군 또한 1934년 무렵에 공군 중교 였을 것으로 추측가능하다.[27] 오성장군 김홍일장군은 육대 6기 이다[28] 공군 상교는 육군 중장급 대우.[29] 1944년 주중 미국대사 C. E. 고스(Gauss) 가 미 국무부에 보낸 보고서에는 최용덕 장군이 중국군 상교이자 광복군 소장으로 나와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료집12 2009, 61쪽, "(중략) 原生이 지명한 사람들 가운데, 오직 한 사람만이 “임시정부”에 속해 있다고 전해지는데, 그는 崔用德 대령으로, 한국광복군 참모부 소장이다" [30] 한국전쟁 당시 납북? 월북? [31] 1972년 2월 20일 [32] 국부군 공군 중교는 국부군 육군 소장 대우로 매우 높은 계급이 맞다. [33] 김홍일장군의 경우 국민정부의 공보에 따르면 1933년과 1937년 중교, 1940년 상교 진급명령이 되어 있다. 1944년 지식청년군 조직도에는 소장 참모처장으로 되어 있다. 회고록과 비교하면 중교 진급시기는 7~11년, 상교는 13년 차이가 나는 셈. 회고록에 워낙 정확한 일자를 기록하고 있는 까닭에 당사자의 기록을 우선 존중하면서도 국민정부의 공보와 다른 점에 대해서는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다만 당시 미군의 경우도 정식계급과 참전을 위해 징집된 AUS 의 임시계급이 상호 달랐던 점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2차대전 미군장성의 계급은 임시계급임.) 등을 고려했을 때 미군 군사고문단의 지원을 받던 2차대전 후반기의 국민혁명군의 경우도 비슷하리라 추측해볼 수 있다. 또한 전시 임시계급일 가능성과 더불어 전술급 제대 단위의 전시 진급명령 후 기록변경일 가능성 등이 있다. 당시 국민혁명군은 전구 단위로 관리가 되고 있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