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용덕 (문단 편집) === 귀국. 대한민국 항공대 창설 === 광복 후 귀국하여 [[대한민국 공군]]의 모태가 되는 항공건설협회[* 당시의 항공경력자를 끌어모으는 단체였다. 파일럿과 기술자 등을 합쳐 대한민국 전체에 항공 관련 인력이 50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비행이 가능한 인력은 100명 남짓.] 회장을 지냈다. 최용덕 자신을 포함해 [[권기옥]]·[[장덕창]]·박범집·[[김정렬(1917)|김정렬]]·[[이근석]]·[[김영환(군인)|김영환]] 등 조종사 출신들이 항공대 설립을 추진하지만 1947년에 [[미군정]]이 중국 항공대의 창군원로로서 당시 국부군 항공위원회 지휘부[* 장개석 총통의 전용기 부기장을 전속으로 추천하는 등 중국 국민정부 고위층과의 유대가 투터웠다.]로 공군 상교까지 역임한[* 중국군에서 공군 상교는 육군 중장과 동일한 대우였다. 즉 최장군은 중국군 육군 기준 장성급 인사였던 것.][* 광복군 참장] 그의 경력을 인정하지 않았고,[* [[특별임관]] 형태로 중국군 중장을 지낸 [[김홍일(군인)|김홍일]]이 [[준장]] 임관, [[일본군]] 대좌를 지낸 [[이응준]]이 대령으로 임관한 걸 생각하면 좀 불합리한 처사였다.] [[조선경비대]] 보병학교에 입교하여 미국식 군사훈련을 이수하라는 조건을 내건다. 많은 이들이 반대했지만 최용덕은 다른 간부들을 설득하였고, 결국 입교하여 보병교육을 받고 1948년 4월 참위[*소위]로 임관했다. 이때 나이가 만 49세였다. 다행히 임관 후에는 고속진급하여 같은 해 7월 9일에 대위 계급으로 백인엽 소령의 후임으로 육군 항공기지부대 2대 사령관이 되었다.[* [[백인엽]] 소령이 부임한 7인의 면면을 보자마자 바로 사퇴했다고 한다. 상대는 광복군 장군, 중국군 상교, 중교, 일본군 대위 등의 기라성 같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