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렬(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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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9대 국무총리
김정렬[1]
金貞烈 | Kim Chung-yul


파일:김정렬_묘소 사진.jpg

출생
1917년 9월 29일
카가와현 젠츠지시 이쿠노쵸
사망
1992년 9월 7일 (향년 74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본관
경주 김씨[2]

서암(曙巖)
재임기간
초대 공군참모총장
1949년 10월 31일 ~ 1952년 11월 1일
제3대 공군참모총장
1954년 12월 1일 ~ 1956년 12월 1일
제7대 국방부 장관
1957년 7월 6일 ~ 1960년 5월 2일
초대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수석부의장
1981년 5월 7일 ~ 1985년 6월 2일
제19대 국무총리[3]
1987년 8월 7일 ~ 1988년 2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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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김준원, 어머니 변상희
형제자매
남동생 김영환
배우자
이희재
자녀
아들 김덕기, 김정기, 김형기
딸 김태자, 김경순
친인척
큰아버지 김기원
학력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졸업)
일본육군사관학교 (예과)
종교
불교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7
경력
초대, 제3대 공군참모총장
초대 민주공화당 의장
제6대 주미대사
제7대 국방부 장관
반공연맹 이사장
제19대 국무총리
제7대 국회의원 (전국구/민주공화당)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군사 경력
임관
일본육군항공사관학교 (54기)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특3기)
복무
일본제국 육군
1941년 ~ 1945년
대한민국 육군
1946년 ~ 1949년
대한민국 공군
1949년 ~ 1952년
최종 계급
대위 (일본제국 육군)
대령 (대한민국 육군)
중장 (대한민국 공군)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6.25 전쟁


1. 개요
2. 일생
2.1. 일제강점기 및 광복 직후
2.2.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3. 둘러보기
4. 관련 도서
5. 김정렬을 연기한 배우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제19대 국무총리이자 제7대 국방부 장관.

광복 이후 국방부 장관국무총리를 지내기도 했다. 대한민국 공군 1호 군번인 50001번을 받았으며, 동생인 김영환과 함께 공군 창설 7인에 들어간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다. 이 명단에는 큰아버지 김기원과 아버지 김준원도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김기원은 일본육군사관학교 15기로 일본군 공병 중좌를 지냈고, 김준원은 일본육사 26기로 일본군 보병 대위를 지냈기 때문. 이들은 8~90년대에 임종국이 주도하던 한국의 친일파 관련 서적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4]

한국 현대사에서 한 명도 아닌 두 명의 대통령을(이승만, 최규하) 하야시킨 특이한 이력이 있다.


2. 일생[편집]



2.1. 일제강점기 및 광복 직후[편집]


1917년 9월 29일 일제 강점기 카가와현 젠쓰지(善通寺) 이쿠노쵸(生野町)에서 태어났다. 1937년 경성공립중학교를 졸업하였고, 1937년 12월 일본육군사관학교 예과에 입교, 1938년 11월에 졸업했다. 부대 실습을 거친 후 1939년 3월 일본 육사 본과에 진학해 1940년 9월 제54기로 졸업했다. 1941년 5월 일본육군항공사관학교의 전투기과를 졸업하고 육군 항공 소위로 임관했다. 1942년 3월 첫 부임지를 일본 항공전대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선망의 대상이었던 큐수 제4전대에 배치받았다. 1941년 9월 제4전대에서 훈련 중 중위로 진급했다.

1941년 11월부터 제4전대원으로 시모노세키 오즈키 비행장에 주둔하다가 홋카이도 아사히카와로 이동했다. 1941년 11월 말 오키나와의 나하비 비행장을 거쳐 11월 28일 대만으로 이동했다. 1주일 후 대만 옆의 펑후 열도를 떠나 남방으로 향하는 선단을 공중 엄호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1941년 12월 8일 오전 5시 필리핀 공격작전에 참가해 미국 공군력을 거의 궤멸시켰다. 말레이시아 작전에 참가한 최명하와 노태순을 포함해 태평양 전쟁 개전 당일 참전한 세 명의 조선인 장교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42년 2월 일본 본토의 오즈키 기지로 돌아와 4전대의 본래 임무인 일본 본토 방위를 담당하였다. 같은 해 5월 경 미군 폭격기들이 기습적으로 도쿄를 공습하자 규슈 야하다 제철소를 엄호하기 위해 비상 대기하였다.

그 후 제4전대 2중대 중대장 대리로 2중대를 골간으로 규슈 아시아에서 248전대를 신설할 때 부대 창설 책임자가 되어 1942년 9월 부대 편성을 완료했다. 248전대는 97식 전투기를 하야부사(송골매)라는 기종으로 개량한 최신 전투기로 구성되었다. 부대 편성 직후 아키노(明野) 비행학교 갑종 학생으로 선발되었다. 갑종 학생교육은 중대장, 전대장을 만들기 위한 특별 교육과정으로 고급 항공 전술과 전투기, 전폭기 연합작전과 해군과의 협력 등 고급 비행훈련을 이수해야 했다. 일본 육사 54기생은 단 네 명이 선발되었다고 한다. 1943년 3월 갑종 학생 과정을 이수했다.

파일:3식 전투기 히엔의 앞에 서 있는 김정렬.jpg
3식 전투기 히엔(飛燕)의 앞에 서 있는 김정렬.
1943년 7월 동기생 중 최초로 전투기 중대장에 발탁되어 248전대 제1중대를 이끌고 인도네시아 반둥으로 이동했다. 여기서 117교육비행대대에 편성되어 제3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남방으로 배속된 제3중대를 제외한 나머지 248전대 2개 중대는 뉴기니로 이동 중 미군의 공격으로 넉 달 만에 부대 자체가 완전히 없어졌다. 1944년 4월 육군 항공 대위로 진급해 자바의 솔로로 전출해 그곳에서 전대장 대리로 제35교육비행대를 창설했다. 이 부대는 독일의 메서슈미트 전투기를 모델로 해 만든 신형 전투기 Ki-61[5]로 구성되어 '비연전대'라고 불리었다.

본인의 회고로는 1944년에 육군대학교에 응시했다고 하는데, 합격 여부를 확인받지 못한 상태로 전쟁이 끝났다고 한다.

1945년 2월 비연전대를 끌고 전 남방지역 유류 공급기지인 수마트라 팔렘방으로 이동해 수마트라 서해안 지역을 담당했다. 연합국 비행기가 팔렘방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인도양 코코스 제도에 기지를 둔 영국 비행기와 거의 매일 공중전을 치렀다.

1945년 8월 10일 아키노 비행학교 갑종 학생의 교관으로 발령받아 출발하는 당일 8월 15일 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 발표를 청취했다. 곧바로 전출 이임식을 갖고 일본으로 가기 위해 팔렘방을 떠나 프놈펜으로 갔다. 그러나 종전 직후 연합군이 모든 일본군의 항공로를 완전히 폐쇄시켜 다시 사이공에 가서 지내다 그곳에 모인 한국인 1,110명을 인솔해 일본 구축함을 타고 부산항으로 귀환해 1946년 5월 15일 서울에 도착했다.

광복한 조국에서 그는 대한민국 공군 창설의 주역들인 김영환, 박범집, 이근석, 장덕창, 최용덕, 이영무와 함께 육군 내의 항공 부대를 창설하는데 기여했다. 1948년 5월 14일 그는 육군항공사관 후보 1기생으로 입교하여 교육 수료 후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김계원의 회고에 따르면 일본 육군 항공대 출신들은 군사영어학교에서 일진처럼 몰려다녔고 그중에서 김정렬의 동생도 있었는데 입이 험했다고 한다. 그래서 김계원은 그 패거리한테 맞을까 봐 피해 다녔다고 한다. 그럴 만도 한 게 김계원은 학병 출신이라 강제로 끌려갔다가 견습사관만 하다가 나온 터라 군맥(軍脈)이라 할 만한 게 미약했기 때문.


2.2.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편집]


파일:김정렬_프로필.jpg
공군참모총장 시절
1948년 9월 13일 그는 조선경비대 항공기지 사령부 비행부대 부대장으로 임명되었고 여수·순천 10.19 사건이 발생하자 진압작전에 참가하여 공중 지원을 실시했다. 1949년 2월에는 중령으로 진급, 육군항공사관학교 초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제주 4.3 사건 진압 및 옹진지구전투 지원'이라는 임무를 맡아 출격했다. 이후 국군조직법에 의해 대한민국 공군육군으로부터 독립한 1949년 10월 1일에 초대 공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고[6] 이듬해 5월에 공군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이때 그는 공군 육성에 전심전력을 경주하여 오늘날의 공군을 만드는데 기초를 쌓았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공군참모총장으로서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전투기의 필요성을 건의하였다.[7] 열악하게도 당시의 공군의 비행전력은 연습기와 연락기뿐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건의를 한 이후 1950년 7월 2일 미 극동 공군으로부터 P-51[8] 전폭기 10대를 지원받았다. 그는 자신의 전투기에 탑승, 진두에서 지휘했다. 그렇지만 당시 만 33세에 불과했으니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리고 그의 지휘를 따라 공군은 육군의 근접지원 및 후방 차단 작전을 감행, 국군의 지상작전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게 된다. 특히 그는 1951년 8월 17일부터 9월 18일까지 지리산지구 전투경찰사령부 요청을 받고 P-51 전폭기들을 이용,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에 투입시켜 지상작전을 도왔다. 휴전 후인 1954년 12월에는 다시 공군참모총장에 취임하였다. 1957년 7월 6일 공군 중장으로 예편한 후, 같은 달 국방부 장관으로 발탁되었다.

그 후 박정희가 소장진급심사 대상자가 되어 소장 진급이 확정된 상황에서 곽영주의 훼방으로 인해 소장 진급이 취소되자 이 소식을 듣고 급하게 달려가서 심사위원들을 잘 달래고 박정희를 변호해줘서 박정희가 무사히 소장에 진급하게 도와줬다. 이 은혜를 잊지 않고 있었던 박정희는 훗날 김정렬을 민주공화당 의장, 제7대 전국구 국회의원 등에 임명하였다.

5.18 민주화운동의 유혈 진압 이후, 제5공화국을 출범시키려던 전두환의 부탁으로, 친구였던 최규하를 설득, 8월 16일에 하야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제6공화국 초기인 1987년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9]

재밌는 건 4.19 혁명 당시에도 이승만에게 하야를 건의했다는 점.[10][11]


3.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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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관련 도서[편집]


  • 《항공의 경종》(회고록)


5. 김정렬을 연기한 배우[편집]




6.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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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씨개명 당시 썼던 이름은 카가와 사다오. (香川貞雄(かがわさだお)[2] 상촌공파 20세손 '렬(烈)'자 항렬[3] 노신영의 총리직 사임으로 인해 취임 이전까지 국무총리 서리 수행. (1987년 7월 14일 ~ 1987년 8월 6일)[4] 동생 김영환은 대학 재학 중 징집된 케이스여서 수록되지 않았다.[5] 별칭은 히엔(飛燕)이었다.[6] 최용덕 장군이 초대 국방차관으로 영전하여 있었던 까닭도 있다.[7] 이때 건의한 것이 회고록 이름인 항공의 경종이다. 지금은 절판되었기 때문에 중고나라 및 헌책방에서 구할 수 밖에 없다. 또한 15000원이지만 헌 책방에서 기본적으로 3만원~4만원 정도 된다. 아무튼 책을 사서 보면 아쉬울 수도있는데 서암이 쓰다가 중간 지병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미완성 회고록으로 남았다. 그러나 공군 창설에 대해서는 충분히 잘나와있기 때문에 만족할만하다. 참고로 제목에 있는 항공의 경종은 부록에 수록되었다.[8] 1940년대 말에 미군의 항공기 명명 체계가 바뀌면서 전투기도 Pursuit에서 Fighter가 되었다.[9] 국무총리실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정두언의 증언에 의하면, 김정렬은 총리 재임시에 매일 저녁 식사 후 코냑을 한 잔씩 마셨다고 한다. 그래서 총리실에서 부처 예산으로 코냑잔 여러 개를 구입했었다고 한다. 김 총리 부인이 퇴임 전 이삿짐을 쌀 때 이 코냑잔 중 일부를 같이 부쳤는데, 여느 날과 같이 저녁 식사 후 코냑을 마시던 김 총리가 잔이 없어진 걸 발견하고 "평생을 부끄러움 없이 살아왔는데 하루 아침에 명예에 먹칠하려고 그러느냐"고 당장 공관에 다시 코냑잔을 갖다 놓으라고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10]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도 이 부분이 언급된다. "세상 참 묘하구만. 이승만 대통령에게 하야하라고 설득한 지가 엊그제인데 오늘 똑같은 부탁을 받으니 말이야."[11] 드라마 제2공화국에서는 4.19 혁명 당시 홍진기와 함께 이기붕을 찾아가 “이렇게 국민들의 민심을 잃은 상태에서 계엄령으로 무력 진압하게 되면 유혈사태가 뻔해지는데 이 상황에서 김일성이 남조선 동포들을 구하겠다며 내려온다면 어떻게 막나?”면서 부통령 당선 사퇴를 건의하는 장면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