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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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임시정부 국기.svg
[ 여성 독립 운동가 ]

강원신강혜원공백순권기옥권애라
김경화김덕세김도연김마리아김란사
김순애김알렉산드라김자혜김점순김정숙
김조이김향화김효숙남자현동풍신
민영주박계남박신애박원희박자혜
박차정박현숙방원희부덕량부춘화
신마실라신순호신의경신정숙심영신
안경신안영희양방매어윤희연미당
오건해오광심오희영유관순유순희
윤용자윤희순이병희이신애이의순
이혜련이효정이희경장매성장선희
전수산전월순정정화조마리아조순옥
조신성조화벽주세죽지복영차경신
차미리사차보석최선화최용신최정숙
홍애시덕황마리아황애시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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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
김원봉
고문
김대지황상규
단원
강세우강인수고인덕곽재기
권정필권준김광추김기득
김방우김병현김상옥김상윤
김성숙김시현김익상김지섭
김철호나석주남정각박문희
박자혜박재혁박차정박희광
배동선배중세배치문서상락
송천흠신악신영삼신채호
신철휴오성륜변절유자명윤세주
윤치형이구연이병철이병희
이성우이수택이육사이종암
이태준정이소최수봉황옥불확실
최용덕한봉근한봉인홍가륵
공약 10조
①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②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③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 함.
④ 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⑤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⑥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⑦ 하시 하지에서나 매 초회(招會)에 필응함.
⑧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⑨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⑩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이다.
5파괴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④ 각 경찰서
⑤ 기타 왜적 중요기관
7가살
조선총독 이하 고관
② 군부 수뇌
대만총독
④ 매국노
⑤ 친일파 거두
적탐(밀정)
⑦ 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
조선혁명선언 황옥 경부 폭탄사건 이승만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



파일:박차정 여사.jpg
이명박철애(朴哲愛)·임철애(林哲愛)·임철산(林哲山)
출생1910년 5월 7일
경상남도 동래군 동래면 칠산리
(현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1]
사망1944년 5월 27일 (향년 34세)
중화민국 쓰촨성 충칭
본관밀양 박씨
가족아버지 박용한, 어머니 김맹련
배우자 김원봉
오빠 박문희, 박문호
외당숙 김두봉, 김약수
학력동래여자고등학교 (졸업)
서훈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한국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박문희, 박문호는 그의 친오빠들이다.


2. 상세[편집]


1910년 5월 7일 경상남도 동래군 동래면 칠산리(현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에서 아버지 박용한(朴容翰)과 어머니 김맹련(金孟蓮) 사이의 3남 2녀 가운데 넷째로 태어났다. 1925년 4월 호주장로교 선교부에서 운영하던 동래일신여학교에 입학하여 1929년 3월에 졸업하였다.

의열단 단장으로 유명한 김원봉의 아내이다. 참고로 김원봉의 첫째 부인은 평안도 출신 최씨이었지만 일찍 사망하였고, 두 번째 부인이 박차정이며, 세번째 부인은 독립운동가 최석순의 딸 최동선이다. 독립운동가이자 북한의 초대 국가 원수 겸 초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두봉이 외당숙이며, 역시 독립운동가이자 국회 프락치 사건에 휘말렸던 김약수(본명은 김두전)가 외재종숙이다. 박차정의 아버지, 오빠 역시 독립운동에 투신한 집안이었다.

동래 일신여학교(현 동래여자고등학교) 재학 시절부터 독립 운동에 참여했으며, 신간회 자매 단체 근우회에서 활동하다 1930년 옥고를 치렀다.

이후 오빠 박문희(朴文熺)의 도움으로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1931년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결혼하였다.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의 지원 단체인 남경 조선 부녀회를 결성하여 여성 독립운동가를 양성하였다.

1937년 조선민족전선연맹 창설에 관여하고 1938년 조선의용대 부녀 복무 단장으로 무장 투쟁에 관여하였다. 1939년 장시 성(江西省) 쿤륜산(昆崙山)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입은 총상의 후유증과 관절염[2] 등의 합병증으로 1944년 충칭에서 병사했다. 유해는 해방 직후 1945년 12월 송환, 김원봉의 고향인 밀양의 송산 공동 묘지에 안장되었다.

남편 김원봉이 해방 이후 월북하여 고위직을 역임하였기 때문에 그동안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다가 1995년에서야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사후 50년이 넘게 지나서 받은 것이지만, 월북으로 인해 현재까지도 업적에 불구하고 대접을 받지 못하는 남편보다는 나은 셈. 유관순 열사에 이어서 두번째로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추서받은 여성 독립운동가로 남겨져 있다.

부산광역시 동래구의 동래고등학교 근처에 생가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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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생지인 319번지에 박차정 의사 생가로 보존되어 있다.[2] 남편 김원봉으로부터 감염된 성병으로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김원봉이 여색을 밝혔고 미인계로 청년들을 회유했다는 의혹을 받아 김원봉이 성병 환자란 소문이 돌았으며 이로 인해 부인들이 사망했다는 소문까지 나온 것이다. 이 기록은 화암 정현섭이 남긴 글 "나의 회고록"에 나온다. (그는 독립운동을 하면서, 동시에 같이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의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정화암은 아나키스트 계열에서 민족주의 계열로 노선을 바꾼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 김원봉에 대해서 좋지 않게 글을 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박차정의 공식적인 사망 이유는 총상 후유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