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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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이항진은 그의 조카이다.
2. 생애[편집]
이수택은 1891년 2월 17일 경상도 칠곡도호부 파미면 이동[4] 에서 아버지 이정환(李珽煥)과 어머니 광산 김씨 김기(金沂)의 딸 사이의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약목면 소재 동락의숙(同樂義塾)과 경성부 소재 보혜학교(普惠學校)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1913년 경상남도 밀양군에서 항일비밀결사 일합사(一合社)를 조직했으나 동지들이 체포되어 활동을 중단하였으며, 같은 해 경상북도 풍기군에서 채기중·한훈·유창순·유장렬 등과 더불어 광복단(光復團)을 결성하여 군자금 모금 및 친일반민족행위자 처단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19년 3.1 운동 직후 박중화 등과 함께 만주로 건너가 같은 해 11월 10일 길림성 길림현에서 김원봉·곽재기·이종암 등과 의열단을 조직하였으나, 그해 겨울 모친의 병환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그후 국내에서 자금 조달과 무기 관리를 맡았으며, 1920년 3월 곽재기·이성우(李成宇) 등과 더불어 밀양군과 김해군 하계면(下界面)[5] 의 주요기관을 폭파하려고 폭탄과 권총을 밀반입하려다가 발각되자, 피신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1920년 12월 이종암·구영필(具榮泌)·김상윤 등과 더불어 밀양경찰서를 폭파할 계획을 모의하고, 같은 달 27일 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순사부장(巡査部長)에 상처를 입혀 죽게 하였다. 이 사건 직후 피신한 그는 부산부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벙어리 행세를 하여 7일만에 석방되었다.
그후 계속 의열단원으로서 활동하던 중 이종암·김상윤·서상락 등과 군자금을 모금하려다 1924년 1월 25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같은 해 5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폭발물 취체벌칙 위반 및 다이쇼 8년(1919년)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7년 2월 19일경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가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끝내 그해 7월 4일 칠곡군 자택에서 37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같은 달 10일에는 왜관면 각 사회단체의 연합장으로 거행될 예정이었으나, 일제 당국의 금지로 간소하게 치러졌다.#
8.15 광복 후 1951년 12월 9일 사회부에서 그의 유가족들에게 생활비를 지급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1977년 건국포장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2007년 5월 30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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