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부 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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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청
(구 조선총독부 청사)
中央廳 (舊朝鮮總督府廳舍)
Capital Hall
Empire of Japan Government-General of Korea Building


파일:조선총독부 청사.jpg

일제강점기 당시 모습

파일:external/pbs.twimg.com/BrZMLFrCIAA7_g0.jpg

전면에 콘크리트 광화문을 세운 모습

파일:external/livedoor.blogimg.jp/0981e32b.jpg

철거 직후 모습[1]
국가
[[일본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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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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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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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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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청사[2]
미군정기 미육군사령부군정청 청사[3]
대한민국 국회의사당[4]
대한민국 정부종합청사 (중앙청)[5]
대한민국 국립중앙박물관[6]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1가 1-57
역사
1916년 7월 10일 기공
1926년 10월 2일 완공 및 개장
1962년 11월 22일 전면 개보수 및 재개장
1983년 5월 31일 관리주체 변경[7]
1986년 8월 21일 국립중앙박물관 개관
1995년 8월 15일 철거 개시
1996년 11월 13일 철거 완료

1. 개요
2. 건물의 특징
3. 역사
3.1. 청사 건립
3.2. 해방과 그 이후
3.3. 철거
3.3.1. 폭파 해체설
3.3.2. 일본의 반응
3.3.3. 청사 해체 논란
3.3.3.1. 철거 반대
3.3.3.2. 건물 이전 사안
3.3.3.3. 유홍준의 폐허론 제기
3.3.3.4. 각종 어록
3.3.4. 해체 이후
4. 건물의 가치
4.1. 건축적 가치
4.2. 각종 부속 예술품의 가치
4.3. 역사적 가치
4.4. 경관 문제
5. 부속건물
6. 대중매체에서
7. 기타



1. 개요[편집]


일제강점기에 합병된 조선의 통치행정기관인 조선총독부 소재였던 건물이다.

8.15 광복 이후에는 '중앙청'[8]이라고 불렸으며, 정부 수립 직후에 대한민국 정부 청사와 국회의사당으로 활용됐다. 이후 국회의사당은 1950년 부민관으로 이전했다가 1975년에 준공된 여의도 국회의사당으로 이전했고, 정부 부처들도 정부중앙청사정부제2종합청사로 이전했다.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가[9] 1995년에 일제 잔재의 청산과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자는 일환으로 철거됐다.[10] 첨탑과 몇몇 부재들은 남겨 독립기념관에 전시했다.


2. 건물의 특징[편집]


파일:external/www.systemclub.co.kr/iBwkywiPsFsKgHBo19eg9wOu9UFEpj.jpg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 청사 일대를 재현한 축소 모형
이 건물의 근본적인 문제는 조선정궁경복궁앞부분을 밀어버리고 지은 건물이라는 데에 있다. 흥례문, 영제교, 유화문과 주변 행각을 모두 철거해버린 자리에 지었다. 정문인 광화문도 마찬가지로 완전히 철거될 처지였으나, 반대 여론에 부딪혀 건춘문 북측으로 옮겨 지어져 다행히 살아남았다.[11] 이 때문에 궁궐의 중심인 근정전 일원의 정문인 근정문 코앞까지 총독부 건물이 들어서서[12] 뒷부분을 가로막는 형태가 되어버렸고, 경복궁 뒷편 북악산과의 미적 조화도 깨져 답답하고 위압적인 형상이 되었다.[13]

그 외로는, 조선에서 세 번째로 엘리베이터를 설치한 건물이기도 하다. 건축에는 당시엔 최신 문물이었던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했다. 그 철근은 일본 코쿠라(구 야하타시[14]) 및 오사카에서 구해왔다. 외벽 표면은 창신동 채석장에서 캔 화강암을 썼고, 대리석은 황해도 금천, 평양, 원산에서, 모래 및 자갈은 한강에서 각각 구해오고 시멘트는 오노다시멘트[15] 제품을 썼으며, 장식철물, 문철물, 가구, 공예품 등은 미국유럽에서 수입해 왔다. 당시 기준으로서는 매우 호화로운 건물이었다.

외적으로는 서구 바로크 양식 건물에 잘 쓰이는 구리 돔 지붕이 인상적이었다. 돔 지붕의 외장재로 외국산 구리 동판 2만 4800근(1만 4880 kg)이 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건설 직후에는 붉은 구릿빛이었지만, 시간이 지나 녹슬어 그럴싸한 청동색 지붕이 되었다.

파일:조선총독부 청사 건물형.png
조선총독부를 위에서 바라본 모습
조선총독부 청사의 건물형은 위 사진과 같이 날일(日)자 모양으로 건설되었다. 여기엔 일본이 조선의 정기를 억누르기 위해 서울에 박아 넣은 '日本' 글자의 '日'에 해당한다는 풍설이 있었다. 실제로 건물을 위에서 보면 '日'자 모양으로 생겼다. 당시 일본인들도 이 떡밥을 좋아했는지 당대 일제의 3개 중추인 일본 국회의사당, 조선총독부, 대만총독부가 모두 '日'자 형태로 생겨 제국주의 삼위일체를 이룬다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낭설로, 조선총독부 청사를 일부러 경복궁 자리에 두어 일제의 통치를 선전하고 조선 왕조를 욕보이기는 했지만 풍수지리적 이유가 반영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일제는 조선의 풍수지리를 미신이라며 비난하는 데 열을 올렸다. 건축물들을 위에서 보면 중간에 빈 공간이 있는 경우가 많다. 독일 국회의사당이나 웨스트민스터 궁전을 포함해서 이외 많은 건물에서 마치 건물이 벽과 같이 주위를 두르고 있는 형태가 나타난다. 그러니까 날일자 모양이 그리 특이한 형태는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저 설계 자체는 독일 국회의사당이나 웨스트민스터가 아니라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공공건축물 설계를 도입한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일본 국회의사당과 구 일본군 대본영육군부 건물인데, 이 둘까지 해서 그야말로 세쌍둥이같은 설계 구조다. 즉 요약하자면 풍수지리로 기를 누른다는 것 자체는 낭설이지만, 당시 일본 대형 공공건축의 날 일(日)자 설계는 분명 국가주의의 형식을 띠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3. 역사[편집]


조선총독부 청사의 역사를 설명한 EBS의 영상

3.1. 청사 건립[편집]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는 남산 왜성대의 일본공사관을 청사로 사용했지만, 1908년에 건립된 용산구의 통감부 건물 역시 별도로 계속 운용했다. 그러나 직원 수는 늘어나고 사절들은 점점 많이 내방하고 온갖 기관들을 통괄하느라 업무량이 폭증했다. 그래서 1910~1911년에 증축했지만 택도 없었고, 결국 넓은 청사를 신축하기로 했다.

원래는 서울시청 자리 등이 부지로 꼽혔지만 당시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반대해 무산되었고, 건축가 이토 주타(伊東忠太)[16]경복궁 터로 정했다. 신 청사의 부지로 행정적으로 편리한 장소를 채택한다는 구실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조선인의 문화·역사·민족적 심리를 압도하고 일제의 우월성을 선전할 자리를 물색했는데, 그 자리가 바로 조선의 정궁 경복궁 터였던 것이다.

1912년에 경복궁을 개조해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이 본격화되면서 흥례문과 주위의 행각, 영제교 등을 철거했다. 1914년에는 이듬해에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를 경복궁에서 개최한다는 명목으로 경복궁의 중요 전각 몇 채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전각들을 헐어버렸다. 사실 이미 일본은 1910년 경복궁 전각 6806칸 중 4천여 칸을 경매로 내놓아 매각한 상태였고[17] 이렇게 확보된 자금은 청사 건립에 사용됐다.

1912년부터 조선철도호텔을 설계한 독일인 건축가 게오르게 데 라란데(George de Lalande)가 설계에 착수했으나 1914년에 기초 설계만 남긴 채 사망했고, 그 뒤에는 일본인 건축가 노무라 이치로(野村一郞),[18] 구니에다 히로시(國枝博) 등이 청사 설계를 완성했다. 건물의 큰 틀은 네오 바로크 양식에 가깝지만 세부적인 의장은 일본의 독자적인 것이다.[19]

1916년 6월 26일 지진제 거행 후 공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기간 5년에 비용 300만 정도로 예상했지만, 실제 완공은 10년 뒤인 1926년에 됐고 비용은 675만 1982엔이나 소요됐다. 예산과 시간이 예상보다 갑절로 들어간 것. 이 과정에서 중국인, 일본인 석공 300명과 한국인 노동자 200명이 해마다 투입됐고, 시공사도 오쿠라[20]/시미즈구미[21] 경성지사였으나 비용/공기 문제로 1918년부터 총독부 직영으로 바뀌었다.

경복궁 입구 역할을 하던 광화문 역시 조선총독부 건물 완공과 때를 같이 해 경복궁 건춘문 옆으로 옮겼다.[22] 일제는 광화문을 옮긴 후 그 자리를 '총독부 광장'이라 부르면서 각종 옥외 행사를 이곳에서 거행했다. 해방 이후에도 이곳은 1968년 광화문이 복원될 때까지 군정청 광장, 중앙청 광장 등 이름만 달리하며 여러 관제 행사의 개최 장소로 사용됐다.

한편 조선총독부는 1937년경복궁 북쪽에 총독 관저를 신축했다. 이곳은 8.15 광복 이후 경무대를 거쳐 지금의 청와대 부지가 되었다. 1930년대 말 전시체제 도입으로 총독부 조직을 확충하면서 1937년 제1별관, 1940년 제2별관을 각각 신축했다. # 1940년대 초반에 제3별관도 신축했지만 정확한 완공년도는 미상이다. 이중 1별관은 광복 후 문화공보부 등 부속 기관들이 입주했다가 1982년 이후 철거됐고, 3별관은 1969년부터 총무처 정부기록보존소가 자리잡다가 1983년 정부중앙청사로 이전 후 1986년에 철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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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회의사당 청사
4년 늦게 착공된 일본 국회의사당 건물과 외관과 구조가 비슷한 편.

경복궁의 신청사로 이전한 뒤 남산의 구 통감부 청사 건물은 '은사기념과학관'이라 하여 일본의 과학기술과 공업 성취를 선전하는 과학전시관으로 사용하였고, 1945년 해방 후에는 국립과학관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통감부 청사는 한국전쟁 당시 완전히 파괴됐다.


3.2. 해방과 그 이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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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8월 15일 중앙청 광장[23]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하자, 1945년 9월 9일 서울에 진주한 미합중국 육군이 총독부 청사를 미군정청 청사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날 오후에 총독부 청사의 제1 회의실에서 미합중국 육군 제24 군단장 존 리드 하지 중장과 조선총독 아베 일본 육군 대장의 항복 문서 서명식이 있었다.

이후 미군정은 조선총독부 청사를 캐피탈 홀(Capital Hall)이라 불렀다. 중앙청(中央廳)이란 이름은 당시 학자였던 정인보가 캐피탈 홀을 직역해 지은 것이다.

1948년 5월 10일 중앙청 중앙 홀에서 대한민국 헌법 제정을 위한 역사적인 제헌 국회를 개의했고, 그해 7월 17일 1층의 메인 홀에서 헌법 공포식을 열였다. 1948년 8월 15일에는 청사 앞뜰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이 거행됐다. 이후 중앙청은 대한민국 정부의 청사로 사용됐으며, 정부 청사로서의 기능이 계속됐다는 점에서 어떤 의미로는 중앙 청사는 강점기와 동일한 기능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 건물이 정부 청사로 사용되기 시작할 때도 그에 대한 비판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시에는 조선총독부 청사만큼 정부 기관이 입주하기에 적절한 건물이 딱히 없었고, 본래는 신청사 건립 계획이 있었지만 6.25 전쟁 발발로 무산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인천 상륙작전 후 후퇴하던 북한군서울을 조직적으로 파괴했고, 그 때문에 서울에 성한 2층 건물이 없을 지경이었다. 중앙청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불을 질렀는데,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라 파괴되진 않고 실내만 극심한 피해를 입게 된다. 아무튼 서울 수복을 상징하는 대한민국 해병대 장병들의 태극기 게양 사진이 찍힌 장소이기도 하다.

파일:attachment/capital_hall_national_flag.jpg
일반 대중들이 9.28 서울 수복 당시 태극기 게양 장면으로 아는 이 사진은 사실 전쟁이 끝나고도 한참이 지난 1957년 서울 수복 기념 행사 때 재현 촬영한 것이다. 사진에서 중앙청 건물의 벽면이 흰색으로 깔끔한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패주하는 인민군이 중앙청을 방화했기 때문에 수복 직후 중앙청 건물은 창문 유리가 대부분 깨지고 불이 난 건물 내부에서 창을 통해 연기가 나와 시커멓게 그을렸다. 이 사진이 1950년에 찍은 게 아니라는 증거들 중 하나다. 서울 전투가 종료된 후에도 얼마 동안은 이 게양대에 인공기가 그대로 걸려 있었고, 이걸 내리고 미군이 태극기가 아닌 유엔기를 달았다. 실제로 태극기를 게양했던 장소는 이 게양대가 아니라 사진에도 보이는 지붕 위 첨탑 방면이었다.

이 게양대는 중앙청이 해체되기 직전까지 남아 있었다. 수복 당시에 태극기를 걸었던 당사자인 대한민국 해병대 제2대대 6중대 1소대장이던 박정모 예비역 해병대령[24]도 생전에 중앙청을 해체하더라도 게양대는 남겨줬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결국 게양대도 철거됐다. 이 게양대 자리가 복원될 흥례문과 협생문과 그 일대였기 때문에, 경복궁 복원이 계획된 이상 특졍 개인의 의사에 따라 철거 여부를 결정할 순 없는 상황이었다. 이 태극기는 용산구 전쟁기념관에 소장 중이다.

1953년 환도 후 제1별관 2층을 임시 국무회의실로 썼고, 1962년 11월 22일에 6.25 전쟁으로 파괴된 청사를 복구해 중앙청 개청식을 열었다. 또 이때 중앙청 건물 밖 동쪽으로 50m 떨어진 곳에 안보회의 장소로 쓰일 벙커를 세우기도 했다. 1979년에는 경복궁 마방 터에 공무원 편의시설 '후생관'이 들어섰다.

1968년에 서양식 정문이 철거되고 광화문이 콘크리트로 복원됐다. 1970년에는 바로 건너편에 정부종합청사가 완공돼 대다수 기관들이 이전하고, 1982년에는 정부제2종합청사가 완공되면서 법무부, 보건사회부, 농림수산부, 건설부, 과학기술처 5개 기관이 이전함에 따라 정부 청사로서 기능을 종료했다.

이에 따라 박물관으로의 개조 계획이 추진됐으며, 개보수 과정을 거쳐 1986년 8월 21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이 과정에서 1983년 안보회의 벙커가 유물 보관소로 개조되었다. 중앙청 후생관은 국립중앙박물관 부속 사회교육관으로 개편돼 1995년 8월 14일까지 정상 운용하다가 1995년 8월 15일 문민정부역사 바로 세우기 정책으로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를 시작하면서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던 문화재들 전부가 임시로 근처 벙커에 들어가 있었다. 이후 경복궁 경내의 당시 사회교육관 건물을 증축 및 개축해 근처 벙커에 임시로 보관 중이던 문화재를 이전했고 2005년부터는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3.3. 철거[편집]



![* 참수형의 참이 이 글자다.] 일제첨탑 - 철거 당일 KBS 뉴스 9 헤드라인 문구
맨 처음에 해체가 논의된 것은 6.25 전쟁 중이었던 1.4 후퇴 이후에 막 서울을 수복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이 일제의 상징을 서울의 심장부에 둔다는 것이 말이 되냐면서 철거를 지시하면서였다.

당시 이 계획을 검토한 사람은 육군 공병감 엄홍섭과 육군 참모총장 백선엽이었는데, 당시 공병대에서는 "이렇게 막대한 석재를 나를 장비를 도무지 못 구하겠다."라고 난색을 표했고 백선엽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미군에게 불도저 4대를 빌려오긴 했는데 중장비는 그게 고작이었고 기껏해야 지게꾼들이나 동원할 수 있었다. 해체할 능력은 아예 없고 폭파라도 시켜서 억지로 없앤다 해도 무거운 석재를 나를 능력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당시는 모든 정부 재정과 수입 물자를 미국 원조에 의존할 때였다. 운전수는 교육시킨다 해도 불도저도 빌려와야 하고, 트럭도 빌려와야 하고, 기름도 얻어와야 하고, 공구와 작업복도 얻어와야 하고, 삼시세끼 급식도 얻어먹어야 하고. 글자 그대로 한국 정부가 동원할 수 있는 게 국민의 맨몸뿐이고 그거 빼고 모든 게 미국 원조이다 보니 사정이 저랬다. 다른 복구 사업을 제쳐두고 인력과 정과 망치와 지게로 우공이산을 하겠다면 아주 못할 것까진 아니었겠지만, 전후 잿더미가 된 서울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큰 건물이어서 부수는 데 예산 쓰고 정부 청사로 쓸 새 건물을 근처에 짓는 데 예산 써야 하는데 그것도 낭비이니 결국 포기했다.

철거는 미뤄졌지만 쓰기에도 영 찜찜했기 때문에 2공화국 시절까지도 공식 정부 청사로 쓰지 않고 방치했다. 1962년에 재개관된 것도 전적으로 중앙청 건물을 개보수해서 쓰면 비용을 아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후로 1970년대까지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에 대한 논의는 지지부진했다가 1982년 과천으로 정부 기능이 부분 이전하는 김에 이때까지도 정부 청사로 쓰였던 조선총독부 청사도 철거하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박물관으로 쓰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민주화 이후 경복궁 복원 계획이 확정되면서 다시금 중앙청 건물 철거 논의가 나왔다. 1991년에 노태우 대통령이 중앙청 철거를 지시했다. 이 때 일본 근대 건축사 연구단체 '메이지 건축 연구회'가 "양국 간에 불행한 역사긴 하지만, 동아시아 근대 건축물 역사상 가치가 높은 건물"이라고 하여 보존을 촉구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이 사실이 공분을 사 한국의 여론이 악화되는 바람에 철거 찬성 여론이 높아졌다. 그러나 이후 노태우 정부의 비서진이 바뀌면서 철거는 또 다시 유야무야됐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뒤 다시 해체 계획이 입안됐다. 이 해체 결정에도 후술될 많은 국내외적인 논쟁이 일어났으나 결국 해체가 결정됐다.

1995년 3월 1일 오전 10시에 정부는 구 총독부 앞 광장에서 '광복 50주년 3.1절 기념 문화 축제'를 열어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옛 총독부 건물을 헐어낸다고 선포했다. 이날 선포식에서 정양모 국립중앙박물관장은 경과 보고를 통해 "오늘 삼일절을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의 시발점으로 삼는다."라고 천명했다. 정 관장은 이어 "8월 15일까지 철거 실측 작업을 마친 뒤 광복절을 기해 총독부 건물 중앙돔의 첨탑을 끊어낸 뒤 내년 초까지 철거를 완료하겠다"고 밝혔다. 거기에 경복궁 복원 계획도 같이 천명했다.

KBS 뉴스9 보도자료

드디어 8월 15일 광복절 오전 9시, 옛 총독부 광장에서 열린 기념식장에서 중앙돔 첨탑 분리에 앞서 주돈식 문화체육부 장관은 해방 50년 만에 이뤄지는 일제 상징의 제거를 호국 영령들에게 고하는 고유문을 낭독했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우리 민족의 언어와 역사를 말살하고 겨레의 생존까지 박탈했던 식민 정책의 본산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여 암울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워 통일과 밝은 미래를 지향하는 정궁 복원 작업과 새 문화 거리 건설을 오늘부터 시작함을 엄숙히 고합니다.

그리고 9시 21분, 커다란 기중기가 첨탑에 구멍을 뚫어 만든 고리에 1인치 굵기의 쇠밧줄 5개를 걸고 서서히 첨탑을 들어올렸다. 첨탑 중에서도 11.4톤짜리 첨탑 윗부분이 먼저 들어올려진 것이다. 첨탑의 일부분이 들어올려지는 순간, 광복절 경축 행사에 모인 5만여 명의 시민들은 일제히 손뼉을 치고 부채를 흔들었고, 그 당시 식민지배를 겪었던 어르신들은 만세를 부르며, 일제 잔재의 청산을 환영했다. 이어 건물 주변에 설치된 수백 발의 폭죽과 불꽃이 하늘로 높이 솟아올랐다.

첨탑이 기중기에 매달려 지상으로 옮겨지는 동안 광화문 앞 경축 행사장에서는 국립국악관현악단이 연주하는 <다시 찾은 빛>이 장엄히 울려퍼졌으며 이내 잘려진 첨탑은 15분 만인 9시 35분에 지상으로 완전히 내려졌다. 적진을 부쉈다. 이러한 모습을 본 정양모 국립중앙박물관장은 "누가 저 탑이 잘려나가리라 생각했냐." 하며 "이젠 철거–보존을 둘러싸고 갈라진 국론을 새 민족 박물관 건립으로 모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한겨레신문 기사)

첨탐 철거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들은 지하 보관소로 옮겼다가 중앙청 바로 옆에 있는 구 국립중앙박물관 사회교육관 건물로 이전되었다.[25] 이후 1996년 초부터 차근차근 압쇄 및 줄톱 공법으로 절단, 해체하는 과정을 통해 철거해 나가 그해 말인 11월 13일 마지막 벽면을 끝으로 철거가 완료되었다. 한편 잘린 첨탑은 1995년 8월 말까지 구 총독부 앞마당에서 일반에게 공개되었다가 이후 독립기념관으로 옮겨졌다. 이로써 70년간 경복궁 뒷편을 가로막고 있던 건물은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파일:attachment/capital_hall_destroyed.jpg
순수 건물 철거비로 당시 약 47억 원이 소요되었으며, 중앙청 건물의 실측 및 영상 자료, 모형 제작을 합쳐 총 117억 원이 소요되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논쟁에 빠져 잊는 것이지만, 관련 비용에서 가장 컸던 것은 국립중앙박물관 신축 비용이다. 1990년대 초에는 대략 1천억대로 예상되었다고 하며, 지금의 건물은 2005년에 개관했는데 4,100억 원이 들어갔다. 한편 검토되었던 독립기념관 부지로 해체 이전하는 방안에서도 500억 원에 가까운 많은 비용이 소요되리라 추산했다.

조선총독부 철거는 국내의 건설 기술력의 발달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남산 외인아파트여의도 라이프빌딩이 폭파를 통해 짧은 시간에 편하게 철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면, 조선총독부는 다이아몬드 와이어쏘 머신 및 굴삭기에 장착된 크라샤를 사용함으로써 주변에 소음, 진동 등의 피해를 주지 않고 철거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는 주택 등을 철거할 때도 브레이커를 사용했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는 크러셔를 많이 쓴다.


3.3.1. 폭파 해체설[편집]


1995년의 첨탑 절단 행사가 '폭파 행사였다'라고 와전되기도 하는데, 분명히 절단해서 크레인으로 들어 올려 제거했다. 폭파한 적은 없다. 물론 당시 감정적으로 화끈하게 다가오는 '폭파'를 바라는 사람도 많았던 것은 사실이나, 폭파가 아닌 기계식 공법으로 철거를 한 이유는 이 건물이 경복궁(사적 제117호)에 있기 때문이다. 만약 저때 총독부 건물을 폭파했다면 경복궁도 광화문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26] 또한 철거 당시 지상파 3사에서 라이브로 아예 현장중계를 했고 많은 국민이 이를 지켜봤다.

조선총독부 사례와 비슷한 예가 하나 있는데, 2006년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부지 공사 때 남양건설 사옥을 폭파 해체하려고 했으나 바로 옆의 구 전남도청사가 등록 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되어 결국 기계식 공법으로 철거한 게 있다. 만약 조선총독부가 경복궁 코 앞이 아닌 남산 외인아파트 같은 위치에 있었다면 폭파 해체했으리라는 말도 된다.

얼마 오래 되지 않은 일임에도 폭파로 해체했다는 거짓이 널리 퍼진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당시 철거 영상을 보면 마치 마지막 외벽 부분을 폭파하는 듯 보여서# 이런 이야기가 퍼진 듯하다. 첨탑 절단 행사 당시 첨탑 주변을 빙 둘러서 설치한 불꽃이 붉은색인 데다가 연기까지 나온 것도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 아니면 모든 건물 철거를 무조건 폭파 철거로 한다고 생각해서 일 수도 있다.

철거 1년 전 뉴스에서 총독부 철거 계획을 보도할 때 "첨탑을 자르고 건물은 가림막을 설치한 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할 듯"이라는 보도를 해서 이것이 폭파되었을 것이라고 와전된 것이다. 그때 건물을 어떻게 철거할지 학자들과 관계자들 간에 폭파와 해체 의견이 여러 번 설왕설래했다. 그 뉴스가 나간 이후에도 여러 번 논의하다가 광복절에 즈음해 상부 돔만 폭파 해체하려는 논의도 있었으나 뒤에 있는 경복궁에 피해가 갈 것을 우려해 최종적으로는 조각조각 해체하기로 하고 돔 위에 있는 첨탑을 자르는 행사를 했다.

또한 김영삼 대통령 임기 중이던 1994년에 남산의 외인 아파트와 여의도의 라이프빌딩도 철거됐는데, 이 둘은 폭파로 해체하면서 그 장면이 TV로 중계됐다. 같은 문민 정부 중 있었던 해체 행사였던 만큼 상술한 관련 기사에 더해 외인 아파트 및 라이프빌딩 폭파 해체가 총독부 건물 해체로 와전되었거나 기억이 혼재되어 총독부 폭파설이란 오해에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다.

철거되기 전까지 총독부에 대해 폭파로 철거를 할 것이다, 폭파 시도를 한 적이 있다[27] 등 여러가지 뜬소문이나 루머들이 많이 퍼졌는데, 과거 한동안 와전된 폭파 관련설 중에서는 독일의 동물원 대공포탑 철거 관련 이야기가 와전된 것도 있었다. 이 관련설을 1980~1990년대에 일부 중/고등학교 국사 교사들이 실제로 믿고 수업 때 인용했다고 한다. 게다가 저 뜬소문대로 폭파하면, 위에서 말했듯 근처 경복궁 전각들에 파편이 날아갈 수도 있고, 진동이 생겨 경복궁을 파손시킬 수 있기에 폭파 방법은 철거 계획에서 떨어져 나갔다. 폭파하잔 의견은 여러 번 나오긴 했지만, 그동안 총독부 건물을 시도로라도 폭파한 적은 없다. 게다가 총독부 청사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된 건 1986년부터인데, 윗 글은 1970~1980년대에 소장품을 옮겼다고 하여 박물관으로 사용한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미 틀린 내용인 걸 알 수 있다.

비교적 최근에 '폭파설'이 광범위하게 퍼진 원인이라면, 아래 언급되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며 조선총독부 건물을 바로 다음날 폭탄으로 날려버렸다는 내용이 담긴 짤방이 한때 온 인터넷에 퍼질 정도로 인기였던 적이 있다. 자세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걸 알 수 있다. 온갖 문화재 때문에 애초에 폭탄을 사용할 수도 없지만, 만약 가능하다고 해도 그 큰 건물의 폭파 계획을 세우고 시뮬레이션하고 설치하고 시행하고 하는 게 단 하루 만에 될 리가 없다.


3.3.2. 일본의 반응[편집]


철거 결정이 확정된 이후 일본 정부에서 "우리 일본에서 비용을 전액 지불할 테니 통째로 옮겨가겠다." 라고 주장했는데, 김영삼 대통령이 분노하여 바로 다음 날 조선총독부를 날려버리고 "일본 놈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 하는 폭탄 발언을 던졌다던 루머가 있다.

사실 이 발언은 당시 일본의 역사 관련 도발이 있었는데, '버르장머리' 발언 1주일 전이던 11월 8일에 전해진 에토 다카미(江藤隆美) 일본 총무성 장관의 망언이 결정적이었다. 에토 장관은 "한일합방 당시 한국은 나라의 힘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단행된 것이었다. 더구나 일본은 한일합방을 통해 한국에 좋은 일을 많이 했다. 한국에 학교도 지어주고, 철도도 만들어주고, 도로도 닦아주지 않았느냐. 창씨개명도 강제로 진행되지 않았다." 라고 망언을 했다. 그야말로, 불난 집에다 기름 붓는 것보다 더한 유조차를 몰고 들어간 셈이다. 발언이 공개된 이후, 에토 장관은 스스로 물러났지만 이에 대한 사과를 하지도 않았다. 이를 놓치지 않은 김영삼 대통령이 장쩌민 중국 주석과 정상회담을 마친 후 공동 기자회견에서 했던 명언이 그 유명한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발언이다. 관련 기사 시기적으로 건물 해체는 8월 15일부터 시작했고, 저 발언은 석 달 후인 11월 14일에 하였다.

이때 일본 내 웬만한 지한파, 한국통들도 '버르장머리'란 단어를 해석하지 못했다는 후문이 있다. 이 발언 이후 철거과정에서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율이 치솟았다 카더라. 다만, 1995년 지방 선거에서 참패하고 한국통신 파업 강제진압을 비롯해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라 지지율 유지에 유의미한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았다. 한국갤럽 자료에 의하면 1995년 3분기의 업무 수행에 관한 긍정 지지율은 29%이다.[28]

이 철거에 관한 일본 측의 이야기로, 일제강점기에 활동하며 대한민국 고건축을 연구했던 학자 후지시마 가이지로(藤島 亥治郎)의 책인 《韓의 건축 문화》 증보판 서문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쓰여있다. 역자인 이광노 서울대학교 명예 교수가 쓴 서문인데, 자신이 1984년 교환교수로 일본에 가서 후지시마 가이지로를 만났을 때 후지시마가 "지금 조선총독부 청사를 국립박물관으로 쓰고 있다고 들었다. 총독부 건물 속에 한국의 반만 년 역사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 스모 선수가 승부에서 지면 상투를 자르듯, 이제라도 그 건물의 상투 부분(돔 부분)을 잘라버려라" 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한국의 고건축을 연구한 일본인 학자다운 말이다. 다만, 일본인 고건축 학자가 상투 자르듯이 첨탑을 절단하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서 정말로 말을 따른 것인지는 알 수는 없고, 당시 정치가들과 문화체육부 실무자들의 의견을 자세히 들어봐야 알 수 있는 일이다.

조선총독부 청사의 문제는 한국을 식민지배한 총독부의 건물로 세워졌다는 것 외에도 문제가 있었다. 경복궁 흥례문 권역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지어놓은 건물이라는 것이다. 거기다가 고의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은 있으나, 경복궁을 가리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원래 광화문과 근정문, 근정전은 일직선에 있어서, 왕이 근정전에 앉으면 육조거리가 보이도록 설계되어 있었는데 그 앞을 완전히 막아버린 것이다. 게다가 조선총독부는 저 셋이 이루는 축에 맞지 않게 지어져서, 2006년 12월, 새로 복원하기 이전의 광화문은 각도가 약간 비뚤어져 있었다. 위치 또한 기존 조선총독부 정문 자리에 지어졌다. 그러다 보니 국가 차원에서 중요한 일들이 있을 때마다 현수막이 걸리기도 했다. 사실 이는 진북과 자북의 차이로 인한 것이었지만, 일제의 악의였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는 한 가지 논란점이다.

개그맨 전유성은 "아깝다! 총독 집무실 자리에 화장실을 만들어서 전 국민이 시원하게 볼일을 볼 수 있도록 하면 좋았을 텐데!" 라고 신랄하게 이야기를 했다. 재활용 의견 중에는 전유성처럼 "화장실로 만들어서 재활용하자든지, 쓰레기 저장고로 쓰면 되겠네?" 처럼 일본을 비하하는 의견이 수두룩했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총독부 청사를 일본으로 이전하여 복원하겠다고 제안했다는 소문은 근거가 없다. 조선총독부를 한국 국내의 다른 곳으로 이전해 복원하자는 주장은 철거 수년 전부터 고고학계나 건축계에서 나오던 이야기였는데, 철거 두 달 전인 6월에도 성금을 모으느냐 마느냐 하는 얘기가 나오고 있던 참이었다.# 당시 정부가 계산해 본 바로는 국내 복원 비용이 1400억 원에 달했는데, 일본 정부가 지불하기에는 너무나도 높은 비용이다.# 한국 국내가 아닌 바다 건너 일본까지 수송한다면 더더욱 비쌌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도 근대 건축 보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도쿄 대공습으로 도쿄가 초토화 되었고, 그나마 살아남은 몇몇 건축물도 상당수가 고도 성장기에 고층 빌딩을 세우기 위해 철거되었다. 그리고 뒤늦게 근대 건축 보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런 관심을 조선총독부 건물에 그대로 투영했던 것이다. 실제로 도쿄의 마루노우치에 가보면, 근대 건축 보존이라는 명목으로 파사드만 남겨놓고 상층부는 고층 빌딩을 올린 매우 어정쩡한 모습이 남아 있는 건물도 있다. 그 유명한 서울도서관으로 바뀐 옛 서울시청 청사 또한 이를 참고했다.[29][30]


3.3.3. 청사 해체 논란[편집]


일본이 회수 비용을 부담한다고 의사를 피력했기 때문에 일본에 팔아먹는 게 이득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없지는 않았지만, 일단 일본이 회수한 뒤에 어떻게 치장해 자신들의 업적(?)을 자랑할 지 걱정되는 것을 제외하고라도 1990년부터 이미 본격적으로 시작된 경복궁 복원이라는 숙원 사업을 진행할 것이 뻔한 상황이라 시간이 많이 걸리는 원형 보존식의 회수보다 철거하는 방식이 우위로 여겨졌다. 이는 국민 다수의 의견에 부합하는 조치였기 때문에 단행될 수 있었다. 정치권뿐만 아니라 학계 교수들 사이에서도 찬반대가 논쟁이 되었을 정도 이다.

정부 내부에서 '건물을 해체한 후 독립기념관 부지로 이전해 복원하자.'는 의견이 있었고 이 사안이 정부 관계자들의 지지를 적지 않게 받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 안 또한 앞서 말한 대로 국민정서에 불합치한다고 여겨졌던 데다, 이전복원 비용이 철거 비용을 초월했다. 철거 비용은 117억 원, 이전하여 복원 공사하는 비용은 500억 원대…. 그러자 정부가 내린 결론은 "그 정도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복원할 가치가 없다."였다.


3.3.3.1. 철거 반대[편집]

당시 철거에 반대하는 여론도 많았다. 반대 측의 견해는 크게 다음으로 정리할 수 있다.

  • 치욕의 역사도 역사이기 때문에 보존의 가치가 있다.
  • 대한민국 중앙청으로 존재한 기간(34년)이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로 존재한 기간(17년)보다 월등히 길며, 대한민국 정부의 공간으로서 상징성이 높은 건물이다.
  • 일제 잔재라는 이유로 철거해야 한다면 서울역, 한국은행, 서울대학교[31](서울대학교 연건캠퍼스, 서울과기대) 등 일제강점기에 건설한 무수히 많은 건물도 철거해야 하고 도로, 철도, 공항, 비행장, , 상하수도 등 대다수도 일제의 수탈 및 대륙 침략 목적으로 건설한 것이므로 헐어야 한다.[32]
  • 군주제가 폐지된 대한민국에서 궁궐 특히 경복궁을 복원해봤자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다.[33]

월간조선 편집장 조갑제의 주장에 따르면 김대중은 철거에 반대했다고 한다. 당시에도 김대중은 일본과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대선에서 김영삼에게 패해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막 돌아와 있던 김대중은 중앙청 철거에 명확히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것을 철거하는 것은 일종의 역사 파괴라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출처 당시 김대중을 인터뷰했던 조갑제 기자는 "김대중이 명확히 중앙청 철거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현직 대통령이 추진하는 정책을 명시적으로 반대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는지, 인터뷰 교정 과정에서 김대중이 '해당 내용을 삭제해달라'고 해 기사화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철거 입안 후 1993년 10월 5일에 한국고고학회, 영남고고학회, 호남고고학회 3개 단체가 "구 총독부 철거는 새 국립중앙박물관 건물 다 지은 뒤에 해야 한다."며 온건하게 '선 건립, 후 철거' 주장을 내세웠지만, 광복회 등이 주축이 된 '옛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촉진 위원회' 측에 의해 '민족 반역자 집단'이라고 공격받았다. 이리하여 양측은 연일 성명서를 발표해 대립각을 내세웠다. 또 11월 10일 '국립중앙박물관 신축 및 유물 전시장 변경에 관한 공청회 및 설명회'에서도 유사한 일이 벌어졌다.

이후 1995년 8월에는 일부 서울특별시 시의원들이 서울시의회에 청사의 역사적 가치와 경제적 이유로 <구 조선총독부 건물철거보류 동의안>을 제출하기도 했으며, 1996년 6월에는 '국립중앙박물관 건물 보존을 위한 시민의 모임'이 서울지방법원에 '건물 훼손 및 철거 금지 가처분'을 신청했지만 모두 기각됐다. 강원용 목사도 경향신문에 철거 반대 주장을 기고했고# 일부 신문은 사설을 통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기도 했으며, 조선일보는 4컷 만화로 역사적 자료가 사라진다고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20세기 초 아시아의 주요 건축물이란 가치를 들어 한국 건축계는 거의 일치단결에 가까운 모습으로 적극적으로 철거에 반대했으며, 적어도 이전이라도 해서 복원하길 바랐다. 건축가 승효상은 해체 결정에 대해 배타적 국수주의, 문화적 편협성, 반문화적 폭거, 천민 문화라고 극렬하게 비난했다. # 승효상은 이때 천민 문화주의 운운하며 비난한 탓에 '외세가 강제로 지은 건물을 지키는 넌 잘났으니 양반 문화주의라고 하는 거냐?'는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이런 비난 속에 당시 그에게 건축 관련 주문을 한 사람들까지 대거 그에게 보이콧하고 주문을 취소하는 등 건축 의뢰까지 대폭 줄어 경제적 피해를 봤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아쉬워하고 그때 그 주장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건축계는 당연히 건축 철거에 민감할 수밖에 없고, 한국의 고도 성장으로 인한 근대 건축 유산의 무분별한 파괴에 대한 반감이 컸기 때문에 이런 태도를 취한 측면이 크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중앙청은 일본인 관광객들에겐 필수 코스였다. 일본인들이 한국에 놀러오면 이 곳에 들러 자신들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확인하고 갔다. 김영삼 대통령은 과거 일본 가고시마의 한 정치인의 집에 초대를 받아 방문했을 때 그의 집에 조선총독부 사진이 자랑스레 걸려있었고 거기에 굉장한 모욕감을 느꼈다고 한다.[34] 또한 야당 총재 시절에도 중앙청에 갔을 때 일본에서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이 중앙청을 배경으로 자랑스레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고, 중앙청을 최소한 그 위치에서는 없애야 한다고 마음 먹은 모양이다.인터뷰


3.3.3.2. 건물 이전 사안[편집]

철거를 반대하는 인사들과 건축가, 고고학 전문가들 중에선 "새 박물관 건립 후 철거하자"는 주장과, "철거하지 말고 해체 후 이전[35]하여 재조립(재현)하자"는 의견이 많았다. 이 중에서 정부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많은 지지를 받은 의견으로는, 앞서 거론했던 "건물 전체를 해체한 후 독립기념관 부지 안으로 이전해서, 독립기념관 본건물인 겨레의 집 기준으로 서쪽 뜰에 다시 지어 재현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왜 하필 서쪽이냐 하면 해가 지는 방향이라 저문 일제의 세력을 상징하기 때문이다.[36] 현재 조선총독부 부재 공원도 그런 의미로 독립기념관 서쪽 밀레니엄 공원 쪽에 위치한다.

이 의견은 독립기념관 뜰 안에 건물채 옮겨 세우고 이를 항일활동 전시관으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식민 지배의 상징적 건물을 이전한 사례로는 홍콩에서 영국령 홍콩 시절 총독부에 해당하는 관청이었던 머레이 하우스(Murray House)[37]를 중심가 센트럴에서 외곽 지역의 스탠리로 벽돌 하나하나의 순서까지 그대로 옮겨버린 사례가 있었기에 나온 나온 사안이었다. 후술할 김종필 전 총리도 이와 맥을 같이 하는 의견을 냈다.

물론 이렇게 되면 민족 기념관 부지 안에 식민 시대를 되돌아보는 건물을 재현하는 의미는 있었겠으나, 어딘가에 식민 지배의 상징이자 흔적을 그대로 남겨놓는 것에 대한 문제 등이 논란이 되어 사장되었다. 돈이 철거 비용을 훨씬 상회할 500억대 정도로 들어간다고 보이긴 했지만 사실 그 정도를 국가적 사업에 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고, 단지 그만한 돈을 쓸 만한 가치가 있느냐가 문제였기에 비용이 이전의 핵심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이전 비용은 다음의 기사에서 확인 가능하다. 기사. 당시에 새로운 국립중앙박물관의 신축 비용만 1천억 원으로 추산되었기 때문에 500억 원은 감당 못할 돈은 아니었다.

이 의견은 나가떨어졌으나 부분적으로는 반영되어, 현재는 건물의 일부 석재가 독립기념관 부지 안에 옮겨져 있다. 하여간 전면 철거보다는 잠시 해체하여 독립기념관 부지 안으로 이전 후 재현해서 일제강점기 역사관 등으로 활용하자는 주장 등 많은 논의가 있었으나, 짧은 시간동안 제대로 된 합의나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양측의 논쟁을 제대로 끝맺지도, 타협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1995년 8월 15일에 정부는 철거식을 강행하였다.


3.3.3.3. 유홍준의 폐허론 제기[편집]

철거 논란 와중에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유홍준 영남대학교 교수는 1995년 2월 25일자 한겨레신문에 구 총독부 터를 잡초가 무성한 폐허(!)로 남기자는 칼럼을 남겼다. 그는 해당 칼럼에서 철거론자들의 주장에 대한 자기모순[38], 8.15 광복이나 대한민국 정부수립 시기에 제때 처리하지 못한 데서 생긴 오랜 소모적 논쟁 등을 비판하는 한편, 굳이 경복궁 복원해서 봉건 왕조로 회귀하길 원치 않다고 생각하여 구 총독부 터를 폐허로 남기자고 주장했다. 이에 재야사학자 성낙주는 1997년 《인물과 사상》 2권에서 반론을 제기했다.


3.3.3.4. 각종 어록[편집]

김종필 前 국무총리는 중앙일보에 연재된 회고록에서 이를 회상하며 YS의 역사 인식에 대하여 비판의 뜻을 내비쳤다.

YS는 ‘역사의 후퇴’를 말했지만 역사는 어떠한 경우에도 뒤로 가지 않고 앞으로 전개되는 법이다. 어제는 어제의 논리로 최선을 다했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 오늘이 이뤄진 것이다. 어제는 오늘의 어머니, 어제가 있기에 오늘이 있는 것이다. 역사의 평가는 역사가에게 맡겨둬야 한다. 정치인이 역사를 단죄(斷罪)하려 들면 역사를 오도(誤導)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대통령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국립중앙박물관 건물의 중앙홀은 1948년 출범한 제헌국회 의사당으로 쓰인 역사적 장소입니다. 그 중앙홀만은 부수지 말고 독립기념관으로 이전하시지요. 제헌 국회가 탄생한 장소는 대한민국 독립의 명맥을 잇는 역사물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 앞 국기 게양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가 해방됐을 때 가장 처음 태극기를 올린 게양대입니다. 또 6·25 사변으로 부산까지 피란을 갔던 우리 군이 3달 만에 서울을 수복하고 태극기를 올린 바로 그곳이기도 합니다. 이 국기 게양대도 함께 독립기념관으로 옮겨 남겨 놓으시죠.


'폐허론'을 제기한 유홍준 교수 또한 구 총독부 철거 사안에 침묵을 지켰다는 비판에 직면했었다. 유 교수가 침묵을 지킨 게 당시 철거론자였던 정양모 국립중앙박물관장과의 학연을 무시 못했더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39] 이에 유 교수는 월간 말 1997년 9월호에서 아래와 같이 항변했다.

이전 반대 운동에 왜 동참하지 않았느냐고 하는데 고고학계는 그걸 했지만 미술사학계는 동참 안 했어요. 난 미술사학계고, 또 박물관 건물의 이전은 새로 지어서 옮기는 게 낫죠. 그런데 당시 그것은 정직한 주장이 아니었어요. 그 주장은 총독부 건물을 허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진짜 헐 것 같으니까 궁여지책으로 내건 주장이었고요. (중략) 총독부 건물은 헐어야 해요.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헐고 있는데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요. 그건 박물관 건물을 헌 게 아니예요. 총독부 건물을 헌 거지.

- 월간 말 1997년 9월호 p22~29. <권두인터뷰: 유홍준(유홍준-안철홍 기자 대담)>

이에 소설가이자 재야사학자 성낙주[40]는 유 교수의 항변에 대해 "도대체 문화유산을 지키는 데 소속이 뭔 상관인가. 고고학계와 미술사학계를 편가름하는 것부터 가소롭거니와, 뭔 미술사학계가 자신의 과오를 지켜주는 방패라도 된다는 말인가"는 요지로 다음 달에 같은 잡지에서 아래와 같이 반박했다. 또, 같은 시기 <인물과 사상> 2권에서도 비슷한 의견을 냈다.

게다가, '정직한 주장'이 아니라니, 박물관 관계자며 대학 교수 등 5천여 명의 지식인들이 오직 구총독부 건물을 보존하기 위한 위장 논리로 문화재 보호를 들고 나왔단 말인가. 또한 총독부 건물을 헌 것이라면, 그 안에 있는 십수만 점의 유물은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논리인가. 지금 유홍준의 시계는 몇 시인가. 구시대의 유물인 권위주의 시계를 차고 이 혼돈에 찬 세기말의 시계를 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설사 미술사학계가 몽땅 침묵했다 치더라도, 언필칭(言必稱) 문화유산을 목숨처럼 사랑한다는 유홍준은 혼자라도 나섰어야 옳았다. 정작 싸워야 할 때 모르쇠로 있었으면 반성하고 자숙하는 것이 도리이거늘, 자신의 치부를 감추기에 급급해 그분들을 매도할 수 없는 일 아닌가.

- 월간 말 1997년 10월호 p244~247. <'문화권력' 유홍준의 권위주의(성낙주 글)>



3.3.4. 해체 이후[편집]


국립중앙박물관2005년에 현재의 용산구 이촌동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임시로 쓰던 구 중앙청 후생관, 사회교육관 건물은 원안대로 국립고궁박물관이 되었다. 왕궁 박물관 건립에 291억 원, 신 국립중앙박물관 건립에 3,300억 원 정도가 들어갔다. 다만 10년 간 나누어 집행하기 때문에 1년에 300억 정도 들어간 셈.

현재 철거지에는 경복궁 복원 계획에 따라 경복궁 흥례문을 복원해 놓았고, 본격적인 철거 전에 행해진 첨탑 절단 행사 당시 잘린 첨탑과 일부 잔해는 독립기념관에 전시돼 있다.[41] 독립기념관 부지 내에 조선총독부 청사 이전을 위한 부지를 마련해 놓았는데,[42] 그게 지금의 총독부 철거부재 전시 공원이다. 하지만 이 장식물들의 전시 목적은 치욕의 역사를 보존해 다시 이런 과오를 반복 하지 않게 조심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총독부 부재들이 어떠한 보호 설비나 장치도 없이 사실상 방치돼 있으니 비바람과 햇볕에 그대로 노출되어 부식되고 있다. 심지어 낙서도 있다. 그 외에도 해당 장식물은 5m 반매장해서 모든 사람들이 내려다 볼 수 있게 만들었고[43], 부지 또한 해가 지는 방향인 서쪽에 배치해 일제의 몰락과 식민 지배의 종말을 상징적으로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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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 첨탑은 이렇게 방치되어 있다. 독립기념관 내부의 조경이 깔끔하기로 이름난 것을 감안하면, 이 총독부 철거부재 전시 공원만큼은 정말 의도적으로 방치한다는 뜻.

이렇게 방치할거면 차라리 아예 없애버리지 저렇게 방치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지적도 있다. 영국령 홍콩 시절 총독부에 해당하는 관청이었던 머레이 하우스를 벽돌 하나하나 순서로 그대로 옮긴 사례처럼 독립기념관이라는 이름에 맞게 항일활동 전시관으로 활용할 수 도 있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역사적 치욕인 삼전도의 굴욕의 상징물인 삼전도비가 현재까지도 비교적 말끔하게 보존되고 관리된다는 점을 논거로 들어 제대로 관리를 안 하는 태도를 비판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삼전도비도 청일전쟁 이후 고종의 철거, 일제의 복구, 이승만 정부의 철거, 장면 내각의 복구 등 우여곡절이 있었고, 지역 주민들에게 애물단지 취급을 받았다.[44] 또한 삼전도비가 국민 감정과는 별개로 청나라 초기의 만주어가 기록된 몇 안 되는 금석문이라서 언어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과 달리, 총독부 첨탑은 어떠한 문장이 새겨진 것도 아니라서 그 정도의 가치는 없다.

총독부 청사 철거 당시 현장 주변에서 조선총독부의 돌조각을 베를린 장벽처럼 기념품으로 판매하기도 하였다. 다만 조각, 중앙홀 대리석 등 보존 가치가 있는 일부 자재는 신 국립중앙박물관서울역사박물관[45]으로 옮겨졌다.

총독부에 사자상이 있었는데, 이 사자상은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정문에 있다고 한다.


4. 건물의 가치[편집]



4.1. 건축적 가치[편집]


건물의 구조나 내 외부의 의장은 크게 보았을 때 근대 유럽의 네오 바로크 양식에 가깝다.

그러나 지역색을 기반으로 한 독창적인 결과물이 아니라, 타 건물을 벤치마킹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 여럿 있다. 일례로 이 건물 정면의 동, 서 끝 부분은 1910년에 세워진 남아프리카 공화국더반 시청(Durban city hall)의 그 부분과 매우 닮았다. 더반 시청이 10년 정도 먼저 세워졌고 두 건물 다 비슷하게 네오 바로크 양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문제의 해당 부분은 둥글게 아치 형태로 처리된 코니스(cornice), 그 아래의 절단된 코니스를 비롯한 엔타블러처(entablature), 그 아래의 벽체 속에 매립된 원형 기둥들이 조합되는 등 구성이 지나치게 유사하다.

이런 요소들은 미켈란젤로의 캄피돌리오 이래로 르네상스, 바로크 계통의 양식들에서 종종 나타났던 것들이다. 하지만 더반 시청과 조선총독부만큼 유사하게 조합되어 배치된 사례는 드문데, 우연의 산물일 가능성은 낮아보인다. 사실 더반 시청도 벨파스트 시청(Belfast city hall)의 복제라는 소리를 듣고 있는 건물인데, 해당 부분은 벨파스트 시청에서도 비슷한 구성 요소들을 가지고 있지만 세부적인 조합 방식이나 비율 등은 좀 다른 편이다. 일본 건축가들이 영국식 네오 바로크 건물의 모방을 목표로 잡은 상태에서 비교적 건설된지 얼마 안 된 영국식의 관공서 건물에 주목했을 가능성이 있다.

건물의 주 재료는 당대의 최신 재료였던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였지만 양식은 구시대적인 과도기적 건물이다.[46] 설계되었던 1910년과 달리 건물이 완공되었던 1920년대는 유럽에서 모더니즘 건축이 시작되고 있던 시기라 이 건물이 완공되었을 때는 이미 시대에 뒤떨어지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일제는 1930년대 이후에는 유럽 건축을 대놓고 모방함을 부끄러워해서 이런 양식을 따른 건물을 별로 짓지 않았다.[47]

세계 건축이 대규모로 변하는 시기에 옛 유럽 양식을 모방해 일본만의 장식으로 채웠고, 이후 시대의 건축물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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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홀 북측
중앙홀 남측
천장 스테인드 글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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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공 초기 총독실 내부

물론 일제는 나름대로 공들여 만들기는 했다. 실내는 벽과 바닥을 타일로 장식하고 부분적으로 암각한 석조각과 대리석, 콘크리트 부속 등으로 치장하였다. 바닥 타일의 경우 중앙홀을 중심으로 별모양의 모습을 갖추고 있고, 중앙 천장의 유리화에도 장식성을 가미하였다. 실외는 조선에서 채굴되는 화강암 등을 활용하여 주요 장식을 석공들이 수작업으로 완성하였다.


4.2. 각종 부속 예술품의 가치[편집]


조선총독부 철거 당시 청사 안에 있던 그림과 여러 미술품은 그것을 그린 일본인 화가들의 후손이 반환 요청[48]을 하여 폐기는 취소되었다. 그러나 반환은 되지 않고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KBS에서 조선총독부의 미술품들을 다큐멘터리로 다루었는데, 일본한국식민지로 아주 오랫동안 가지리라 보고 일부러 조선총독부 안에 전시했다고 한다. 당시 방송에서 약 650점이 넘는 그림이나 조각들이 박물관 지하에 둘둘 말려서 통에 넣은 채로 보관된다고 나왔다. 이것들은 오랫동안 전시 없이 보관만 되었으나 2014년에 와다 산조(和田三造)가 그린 홀의 북쪽 벽화 하고로모만은 일제가 수집했었던 다른 예술품과 함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일시 전시한 바가 있다. 해당 작품에 관한 상세한 설명


4.3. 역사적 가치[편집]


민족주의적 관점에서는 역사를 보존하여 후세에 반성과 자성의 계기로 삼는 상징이 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의 조선 식민통치의 흔적을 보여주는 유적이자 오랫동안 대한민국 정부국립중앙박물관 건물로서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보존 상태가 양호했던 건축물이므로 근대 건축 유산에 들어갈 가치가 있었다. 가령 같은 일본 근대 건축물이자 역사적 가치와 건축학적 가치가 비교적 높은 한국은행 본관과 옛 서울역 역사는 현재 대한민국의 사적이다.

또한 이 건물이 조선총독부로 사용된 것은 불과 19년이며, 그 뒤 대한민국 정부 청사로써 사용되었다. 일제 패망 이후 조선 총독미군에 항복한 장소도, 대한민국 헌법이 최초로 발표된 곳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곳도, 6.25 전쟁 당시 서울 수복의 상징과 같은 태극기 게양식의 배경이 된 곳도 다 이곳이었다. 그래서 김종필 전 총리는 중앙 홀만이라도 따로 옮겨서 보존하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청사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일제강점기를 연상시켰고, 그 위치가 한국의 수도에서 위압적으로 잘 보이며, 경복궁을 훼손하고 있었다.[49] 또한 이 건물을 보러 오는 일본인들은 과거 자신들의 침략과 식민지배 역사를 반성하기보다는 한반도를 식민지배했던 사실에 대한 우월감과 제국주의 시절에 대한 향수에 도취될 뿐이라, 그걸 보는 한국인들을 매우 기분 나쁘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 조선총독부 청사가 철거되기 이전까지 한국으로 여행을 오는 일본인들은 거의 모두가 이 청사를 관광 코스에 반드시 넣었다고 한다.[50][51] 해체 이후에는 독립기념관에 방치된 조선총독부 첨탑이라도 보러 오는 일본인들도 가끔 있는데, 이들은 대놓고 훼손된 첨탑의 몰골을 보고 역으로 눈물을 흘리며 간다는 이야기도 있다.


4.4. 경관 문제[편집]


조선총독부 청사는 건물이 너무 거대해서 북악산을 완전히 가렸기 때문에 서울 시민들 사이에서 답답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반면 조선총독부 청사가 사라진 뒤에는 북악산이 보이면서 가슴이 뻥 뚫린다는 시민들의 의견이 많았고, 당시 9시 뉴스로도 보도된 적이 있다. 실제로 지금 개선공사가 끝난 광화문 광장에 가면 이순신 동상, 세종대왕 동상, 광화문, 근정전, 청와대, 북악산 순으로 주요 상징물과 유적, 지형지물 등이 정렬되어 한눈에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경관이 뛰어나다.

당시 '중앙청' 건물이 경복궁은 물론이고 청와대도 가렸기 때문에, 지은 지 얼마 안 된 청와대가 북악산 아래 있기는 있는데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는 사람이 수두룩했다. 반면 중앙청을 철거한 지금은 잘 보인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이렇게 청와대의 위치를 민간인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차단해주니 보안상 없애기 아까운 물건이긴 했다. 광복 당시부터 철거가 거론되었으나 문민정부에서야 총독부 해체가 실현된 것이 우연은 아닌 것. 실제로 경복궁 복원사업의 첫 단추는 다름아닌 30경비단의 경복궁 외부 이전이었고 이는 6공 들어 진행된 권위주의 청산의 일환이었다.[52]

4.5. 등록문화재[편집]


아이러니한 것은 총독부 철거로 인해 근대 문화재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되어서 2000년대 이후에 등록문화재라는 이름으로 근대 건축물 등에 대한 재평가와 보호 제도가 생겼다는 점이 있다. 이때 군산시동국사 등도 같이 헐려버릴 위기에 처했으나 살아남았고, 지금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다만 등록문화재는 법적인 강제성이 없어 보호 기능이 미약하다.


5. 부속건물[편집]


  • 조선총독부 박물관: 사실 조선총독부에는 부속 시설로 원래부터 전시관으로 세워진 건물이 존재했다. 조선총독부 박물관(朝鮮總督府博物館)이란 건물로, 1915년에 개최된 조선 물산공진회(物産共進會)를 위해 조선의 예술품을 전시하기 위한 2층 건물이었다. 경복궁의 동편에 위치했던 건물이다. 확장 계획도 있었던 모양이지만 실행되지 못했고, 이후로도 국립중앙박물관 부속시설을 거쳐 전통 공예관으로 쓰였다. 이쪽은 1995년에 조선총독부가 철거되기로 결정한 이후 같은 연도에 경복궁 복원 사업에 따라 철거되었지만 잘 기억되지도 않는 편. 이후 경복궁의 동궁(왕세자의 처소)이 그 자리에 복원되었다.

  • 조선총독부 미술관: 경복궁 북쪽의 건청궁 자리에 위치했던 건물. 1935년에 현상 설계가 되었으며, 당선작은 제관양식이었었다. 1939년에 완공되었으며 1998년에 철거되었다.


6. 대중매체에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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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기타[편집]


  • 조선총독부 내의 승강기에서 독립운동을 모의하다가 체포된 사건이 있었다. #

  • 다사다난한 한국 근현대사를 반영하듯, 많은 국적의 깃발이 내걸리고 내려간 건물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장기부터 시작해서 미군정 기간 동안에는 성조기가, 정부 수립 이후에는 태극기가 내걸렸다. 이후 6.25 전쟁 때 서울이 함락당하면서 인공기가 내걸렸고 수복과 함께 태극기가 다시 걸렸다. 국적 깃발은 아니지만 수복 직후에는 유엔기도 걸린 역사가 있다.
    • 김정은은 남북관계에서 수틀리는 일이 있을 때마다 서울 함락시 인공기를 내건 것에 매우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2016년 3월에는 탱크병 경기대회에서 조국통일을 위한 천금같은 기회는 우리가 먼저 선택하게 될 것이라면서 '제일 먼저 서울에 돌입해 괴뢰중앙청에 공화국깃발을 꽂은 영웅 땅크(탱크)병들의 싸움 본때와 투쟁정신을 이어받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 2023년 5월, 평양의 6.25전쟁의 '승리'를 주장하는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에서 '우리 인민군대가 반공격으로 넘어간지 3일만에 적들의 아성인 서울을 해방하고 괴뢰 중앙청에 공화국 깃발을 휘날린 것은 세계전쟁사에 특기할 전과라고 하시면서 괴뢰 중앙청 깃발대에 공화국기를 띄운 사진도 전시하여야 한다고, 서울해방작전에 대한 해설에서 괴뢰중앙청 깃발대에 공화국기를 띄운 사실을 제일 중요시하여야 한다'라고 하는 등 남한을 정복하는 것이 자랑스럽다는 막말을 하기도 했다. #

  • 철거 과정에서 중앙계단 아래에 89.25㎡(약 27평) 규모의, 모두 4개의 방과 복도로 구성된 지하실이 발견되었는데 이게 누가 봐도 감금시설에다 고문실이라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방은 한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0.2평(독방)과 5평, 2평 정도의 크기였으며 각 방으로 통하는 철판문은 14㎝의 두께인데 나무와 모래로 속을 채워 넣어져 있었다. 방음을 위한 목적임을 짐작케 한다. 여기에 잠금장치와 감시창도 있었다. 각 방에 배수로까지 설치되어 있었는데, 당시 광복회 회원들은 배수로를 두고 물고문 또는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할 때 흘린 피를 물로 닦아내기 위한 시설로 추정했다. 이곳을 공개하기 전에 국립중앙박물관은 30년 경력의 전직 서대문형무소 교도관 출신자들 2명을 초빙해 지하실을 둘러보게 하고, 잠금장치와 감시창 등의 시설로 미뤄 일제가 사용한 전형적인 고문·감금실임을 확인받았다고 한다.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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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방 당시 한국과 비슷하게 대만 총통부 청사는 1949년부터 지금까지 대만총독부 건물을 그대로 쓰고 있다. 마잉주 정권 때부터 이전하자는 논의가 시작되기는 했지만 한국처럼 철거하자는 말은 없다.
    • 한국처럼 철거 여론이 미미한 이유는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우선 범람연맹 또는 외성인의 입장에서 총독부 건물은 패전국의 상징으로, 승전국인 중화민국이 획득한 전리품으로 여기는 입장이다. 한편 범록연맹 또는 본성인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청나라,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역사적 문제(독립문제, 지방의 소외감, 중앙정부에 대한 반감 등등) 등이 얽혀, 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일본의 대만 식민 지배를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현재의 지배자(?)인 중화민국 역시 자신들의 고장을 지배한/하는 여러 세력들 중 하나로 보기 때문에 대만총독부 건물을 역사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상기와 같은 이유로 대만총독부 건물은 지금도 잘 쓰이고 있으며 타이베이의 유명 관광지 중 하나로 일본인 관광객이 항상 들르는 코스 중 하나. 대만 총통부 건물은 외적으로 상당히 이국적인 독특한 디자인과 밝은 색감으로 눈에 잘 띄어 관광 코스로 부족하지 않다. 게다가 한국처럼 기존문화유산을 헐거나 뒤틀고 지은 것도 아니라서 이걸 헐어버린다고 딱히 뭔가 이득이 있는 것도 아니다.[53] 뭐 건물에서 발암물질이 대량 검출된다면 또 몰라도 [54]

  • 대만총독부 청사와 비교해도 예산을 매우 많이 쓴 편이다. 조선총독부를 제외하더라도 일본이 한반도에 상당한 예산과 많은 일본 기업들이 한반도에 진출하게 했었다. 미군정이 들어섰을때 남한에 적산 불하된 일본 기업만 2700 여개였다. 아무래도 일본 본토가 식민지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관리 문제와 지진의 문제로 수도를 한반도로 옮기려고 했었다. 일본 입장에서는 한반도에 상당히 공들였다는 것.

  • 2019년 3월 1일, KBS 뉴스 9에서는 광화문에서 야외진행을 하면서 조선총독부 청사를 증강현실로 재현했다. 이 날 보도는 조선총독부가 3.1 운동 주도자급 인물 140명을 계보도 형식으로 작성한 문서를 발굴한 단독 보도를 전하면서 총독부 청사 건물을 그래픽으로 재현한 것이다. #

  • 한국조경학회지 <근대 역사 경관의 보존과 철거 - 구 조선총독부 철거 논쟁을 사례로 ->에 체계적으로 관련 사건의 흐름이 정리되어 있다.

  •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의 2009년에 완공된 신본관이 이와 비슷해 초기에 한양총독부라고 비웃음을 당한적이 있다. 다만 이것은 한양대학교의 전신학교인 동아공과학원을 모티브로 해서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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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총독부 청사가 철거된 후 드러난 큰 지붕의 건물이 근정전이다. 현재 올바른 위치에 있는 전통 목조 광화문은 2006년 말에 사진 속의 콘크리트 광화문을 철거한 이후 2010년에 본체를, 2023년에 월대를 복원한 것이다. 왼쪽 뒤에 보이는 파란 지붕은 청와대이고, 그 앞의 기와지붕은 경회루이다.[2] 1926년 10월 2일 ~ 1945년 9월 7일[3] 1945년 9월 8일 ~ 1948년 8월 14일[4] 1948년 5월 31일 ~ 1950년 6월 27일, 1950년 10월 7일 ~ 1950년 11월 26일[5] 1962년 11월 22일 ~ 1983년 5월 31일[6] 1986년 8월 21일 ~ 1995년 8월 14일[7] 총무처→문화공보부. 정부청사였던 중앙청으로서의 역할을 마치고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개조하기 위해 건물의 관리 권한을 총무처에서 문공부로 넘겼다.[8] 3호선 현 경복궁역의 초기 역명은 '중앙청역'으로, 1985년 서울 지하철 3호선 개통 당시 중앙청이 반영되었다. '중앙청역'에서 '경복궁역'으로 바뀐 시점은 1987년 5월 1일이다.[9] 당시 뉴스를 보면 일제강점기를 상징하는 건물에 유물들을 전시하는 게 옳은가에 대한 의견도 꽤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은 2005년경에 서울특별시 용산구에 전용 건물을 새로 짓고 재개장된다.[10] "건전한 한일관계의 구축은, 일본의 과거 침략행위와 식민지 지배에 대한 진정성 있는 반성의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 김영삼 前 대통령, 광복 50주년 기념사 中[11] 광화문 철거는 당시 조선 사람들은 물론이고, 야나기 무네요시 같은 학자를 비롯한 일부 일본인들까지 반대한 사안이었다. 다만 그 덕에 겨우내 살아남은 이 원래 광화문은 6.25 전쟁 당시 폭격으로 인해 불타 소실되었다.[12] 위 모형 사진에서 총독부 뒷편의 작은 기와문이 바로 근정문이다.[13] 한국 말고도 식민지 였던 나라들 역시 총독부가 있다. 다른 나라들도 지금도 다른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경북궁 앞이 아닌 다른 곳에 지었다면 헐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14] 일본 두 번째 제철소인 야하타 제철소가 있다. 현재도 스미토모그룹 산하의 신일본 제철에서 관리 중.[15] 1998년 닛폰시멘트와 통합해 다이헤이요시멘트가 되었다.[16] 이 사람은 메이지 신궁, 조선신궁도 건축했다.[17] 일본인들에게 매각된 전각들은 일본 기생집, 별장에 활용되거나 개인 미술관에 전시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 중 하나는 온돌 째로 호텔로 개조돼 유명한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묵은 후 현대식 난방 체계를 만드는 시작점이 되기도 했다.[18] 대만총독부 신청사 건립 참여자.[19] 일제가 남긴 문서에는 조선총독부의 양식을 근세부흥식(近世復興式)이라고 표현했는데, 단어는 대략적으로 네오 르네상스 양식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따라 한국에서도 이 건물의 양식을 네오 르네상스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건물의 전체적인 양식은 네오 르네상스보다는 네오 바로크에 가깝다. 물론 세부 의장은 일본의 독자적인 것을 사용했다.[20] 현 다이세이건설(大成建設). 창업주 오쿠라 기하치로는 경복궁 자선당을 일본으로 빼앗아갔다.[21] 현 시미즈건설(清水建設). 1804년에 설립됐으며 훗날 세워진 국립 요요기 경기장선샤인 60도 이 회사의 건축물이다.[22] 이를 그린 수필이 설의식의 '헐려 짓는 광화문'이란 작품으로, 과거 6차 교육과정 당시에는 국어교과서에도 실려 있었기에 현재 40대 이상의 중장년층들은 한 번쯤은 읽어본 글이다.[23] 참고로 2023년 3월 7일, 경복궁 광화문 월대 복원공사 중 땅을 파다가 사진에 보이는 전차 궤도가 발굴되었다. 이 노선은 서울전차 효자동선으로 일제강점기 부설 당시에는 경성전차 고궁지선이라 불렀다.#[24] 서울 수복 당시 소위[25] 총독부 철거 1년 전부터 '조선왕궁 역사박물관'으로 기획됐으며, 2005년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구로 신축 이전하자 원안대로 국립고궁박물관이 되었다.[26] 일단 사진을 보면 총독부 주변에 경복궁 궁전을 감싸는 여러 벽들도 있지만, 무엇보다 뒤에 근정전이 있었다. 만약에 폭파 철거로 했다가는 그 폭발로 인해서 튄 파편이나 돌들이 오히려 멀쩡하던 근정전을 비롯한 각종 경복궁 문화재들에게 손상을 줘 문화적 가치가 하락되었을 것이다.[27] 이 내용 자체는 상술했듯 폭파 방식 논의과정에서 논의 된 바 있으니 사실이긴 하다[28] 참고 그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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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일본의 이런 문화의 정점은 아이치현에 있는 메이지무라다. 근대 건축물을 그대로 옮겨 전시하는데, 몇개의 전시물은 일부 조각만 전시하기도 한다.[30] 사실 이런 방식의 '보존'은 랜드마크법이 있는 뉴욕에서도 유효한 방식이다. 대표적인 예시가 보존 대상 건물은 파사드만 남기고 그 위에다 유리빌딩을 꽂은 Hearst Tower.[31] 경성제국대학 9개의 전문학교들을 통합해서 서울대를 설립했다.[32] 조선총독부 청사는 일부러 경복궁 앞부분을 밀어버리고 지은데다 경복궁을 가로막고 있었고 경복궁 뒷편 북악산과의 미적 조화도 깨져 답답하고 위압적인 형상이었기 때문에 단순히 일제의 잔재라는 이유만으로 철거가 결정된건 아니었다.[33] 경복궁은 법궁은 법궁이었으되 이미 임진왜란 전부터 외교적 행사 등에만 주로 쓰였고 사실상 주요 정무는 창덕궁 등에서 보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전소된 후 수백 년간 불탄 폐허 상태로 방치되었고, 흥선대원군 때 중건되어 실제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며, 임진왜란 전의 경복궁 본래 원형과는 차이가 많다. 왜란 이전의 경복궁은 기와도 청자 기와를 사용했고# 세부적인 부분도 조선 초의 경복궁과 간극이 크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복원될 경복궁에 비해 총독부가 더 가치가 높느냐 하는 것은 별개 이야기.[34] 자신이 한국 정치인을 초대해 놓고도 그 사진을 치우지 않았다는 건 일부러 보라고 했던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35] 이는 건물을 조각조각 블록처럼 해체해서 다른 넓은 부지로 옮긴 후, 다시 본래 크기로 재조립해서 재현하자는 것을 말한다. 흔히 만화나 영화에서처럼 건물 겉껍데기를 헬기 등으로 옮기는 등 건물 째로 이동시켜 세우는 연출을 생각할 수 있으나, 그런 건 가능은 하겠지만 위험성도 있고 해체 후 조립보다 비용도 천문학적으로 많이 든다.[36] 피라미드나일강의 서쪽에 있는 것과 같은 이유. [37] 영국홍콩을 식민지화하면서 총독부 개념으로 세운 건물인데, 이전된 지금은 집무실을 포함한 내부를 고급 레스토랑으로 만들어 놨다고 한다.[38] 대략 이들은 민족적인 것에 관심이 없거나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조선총독부 철거 문제 같은 게 나오면 목소리가 높아진다는 식.[39] 사실 유홍준 교수는 자신과 학연 등이 있는 학계 인사들의 과실에 유독 관대한 경우가 많아서 비판의 대상이 되곤 했다. 국민교육헌장 제정을 주도했던 전 서울대학교 철학 교수 박종홍, 무령왕릉 날림 발굴로 욕을 얻어먹었던 역시 서울대학교 김원용 교수 등에 대해서는 유독 관대하게 평함을 그의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40] 1955~2020년 11월 5일 뇌출혈로 사망. 이 사람은 석굴암 연구로 유명했고 석굴암 관련 분야에서도 손꼽히는 전문가였다. 사학자로서 일본의 유물 약탈 및 훼손을 조사하며 비난하고 자료도 남겼던 그도 총독부 청사를 역사적 자료로 봤던 것.[41] 1960년대 이후 조선총독부 청사의 정문 역할을 했던 콘크리트 광화문 역시 일부 잔해가 서울역사박물관에 보존돼 있다.[42] 원래는 건물을 일일이 해체한 다음 그 자재를 옮겨와 다시 짓는 방식으로 보존할 계획이었다.[43] 총독부가 존재하던 당시 모두가 올려다 봐야 했던 첨탑이 이제는 모두가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로 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44] 거기다 보존에 대한 여론이 엇갈려서 관리가 제대로 안 되는 바람에 페인트 테러까지 당하기도 했다.[45] 참고로 이곳에는 중앙청-국립중앙박물관 시절의 조선총독부 청사의 정문 역할(?)을 했던 콘크리트 광화문의 부재 일부도 전시 중이다.[46] 원래는 벽돌 조적조 건물로 계획되었으나 변경되었다. 유럽에도 근대의 신 재료인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였지만 양식은 구시대적인 석조 건물 형식으로 지은 사례들이 많은데, 오귀스트 페레의 샹젤리제 극장이나 덴마크의 크리스티안스보그 성 등이 있다.[47] 고전 유럽식 건축에 일본식 건축 양식을 더 적극적으로 결합한 제관양식(帝冠樣式)의 비중이 커진다.[48] 유상반환 요청과 무상 반환 요청이 섞여 있었다.[49] 1988 서울올림픽 당시에도 외국인 대표 관광코스로 국립중앙박물관경복궁이 소개되었는데, 정작 경복궁은 여기저기 만신창이가 되어 경회루 정도를 제외하면 볼 게 없는 상황이라 여러모로 문제가 되었다.[50] 이 때문에 1999년에 집필된 고원정의 대체역사소설 <횃불>에서는 일본 제국 루트를 그대로 따라간 한국인들이 전후에 일본 여행을 가면서 도쿄의 일본총독부 청사를 돌아보며 과거의 영광을 되새기는 모습이 묘사된다.[51] 조선총독부 청사처럼 조선 궁궐을 훼손하면서 그 자리에 들어선 창경원 또한 한일수교 이후부터 전두환 정부 때 철거되기 전까지는 일본인 관광객들이 옛 일본 제국의 영광을 되새기는 차원에서 관광 코스에 넣는 경우가 많았다.[52] 이 시절 청와대의 보안에 대한 강박관념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청와대에서 와룡고개 넘어야 나오는 성균관대학교에서 축제용 애드벌룬을 띄우자, 청와대 경호실에서 바로 전화를 걸어 "애드벌룬 총으로 쏴버리기 전에 내리라"고 협박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53] 사실상 이 마지막 차이가 두 건물의 운명을 갈랐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54] 대만에서 경복궁에 비견될만한 고건축물인 대만순무아문 청사 부지에는 대북공회당을 거쳐 현재는 중산홀이 들어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