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일

덤프버전 :

파일:다른 뜻 아이콘.sv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동명이인 이수일에 대한 내용은 이수일(동명이인) 문서
이수일(동명이인)번 문단을
이수일(동명이인)#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이수일.jpg

이명
이수기(李壽鹿+基)
이숭향(李嵩鄕)·이숭경(李崇卿)
자 / 호
숭경(嵩卿) / 영헌(逞軒)
본관
광주 이씨 (廣州 李氏)[1]
출생
1885년 1월 29일
경상도 칠곡도호부 파미면 관동
(현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관터마을)[2]
사망
1966년 4월 8일 (향년 81세)
경상북도 칠곡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430호
상훈
건국포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05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이수일은 1885년 1월 29일 경상도 칠곡도호부 파미면 관동(현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관터마을)에서 아버지 이진환(李晋煥)과 어머니 순천 박씨 박해덕(朴海德)[3]의 딸 사이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4]

1919년 '파리장서'를 가지고 중국으로 건너가 활동하던 김창숙은 독립운동의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1925년 이회영 등과 함께 내몽골 지역에 황무지를 개간해 독립군을 양성할 계획을 세웠고, 그에 필요한 군자금 모집을 위해 같은 해 국내로 들어왔다.

이때 이수일은 김창숙을 도와 김헌식(金憲植)·이영로(李泳魯)·홍묵·이동흠(李棟欽)·이종흠(李棕欽) 등과 함께 경상도 일대에 파견되어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5]그러던 중 1927년 7월 26일 생명이 위독한 아내를 만나러 집에 들렀다가 왜관면의 일본 경찰에 폭행을 당한 후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66년 4월 8일 칠곡군에서 별세하였다.

200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2006년 11월 28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4 02:56:27에 나무위키 이수일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좌통례공파(左通禮公派, 칠곡파)-첨정공파 21세 수(壽) 항렬. 족보명은 이수기(李壽麒).[2] 인근의 매원리와 함께 광주 이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이수택·이항진은 인근의 귀바위마을 출신이다.[3]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이다.[4] 아버지 이진환의 첫째 부인인 인동 장씨 장응표(張膺杓)의 딸 슬하에는 자식이 없었다. 참고로 첫째 부인 인동 장씨는 독립유공자 장석영의 누이이기도 하다.[5] 형사사건부에 따르면, 1926년 6월 4일 대구지검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총포화약류 취체령 위반 등의 혐의에 대해 기소중지로 불기소처분 판결이 내려진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