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원일

덤프버전 :

파일:다른 뜻 아이콘.sv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대한민국의 성우에 대한 내용은 손원일(성우) 문서
손원일(성우)번 문단을
손원일(성우)#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대한민국 국방부 심벌.svg
파일:국방부장관.svg
>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 펼치기 · 접기 ]
해군 출신}}}
해병대 출신}}}




초대

이범석

제2대

신성모

제3대

이기붕

제4대

신태영

제5대

손원일

제6대

김용우
{{{#!wiki style="margin: -5px -1px; display: inline; padding: 1px 2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00b1eb; font-size: 11px"
제7대
김정렬






제12대

장도영

제13대

송요찬

제14대

박병권
{{{#!wiki style="margin: -5px -1px; display: inline; padding: 1px 2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f0000; font-size: 11px"
제15대
김성은



제16대

최영희

제17대

임충식

제18대

정래혁

제19대

유재흥




제20대

서종철

제21대

노재현
{{{#!wiki style="margin: -5px -1px; display: inline; padding: 1px 2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00b1eb; font-size: 11px"
제22대
주영복



제23대

윤성민

제24대

이기백

제25대

정호용



제26대

오자복

제27대

이상훈

제28대

이종구

제29대

최세창



제30대

권영해

제31대

이병태
{{{#!wiki style="margin: -5px -1px; display: inline; padding: 1px 2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00b1eb; font-size: 11px"
제32대
이양호

제33대

김동진



제34대

천용택

제35대

조성태

제36대

김동신

제37대

이준



제38대

조영길
{{{#!wiki style="margin: -5px -1px; display: inline; padding: 1px 2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000080; font-size: 11px"
제39대
윤광웅

제40대

김장수




제45대

송영무

제46대

정경두
{{{#!wiki style="margin: -5px -1px; display: inline; padding: 1px 2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2A5034; font-size: 11px"
제47대
서욱

-2 {{{#fff [[틀:역대 대한제국 군부대신|{{{#fff 대한제국 군부대신}}}]] · [[틀:역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fff 임시정부 군무부장}}}]]}}}
[[:분류:둘러보기 틀/직위/군인|{{{#FFF ※ 관련 직위 둘러보기}}}]]




역임 직위 및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대한민국 제5대 국방부 장관
손원일
孫元一 | Sohn Won-yil[1]


파일:attachment/c0033475_4afa62210bdd8.jpg

출생
1909년 6월 22일 (음력 5월 5일)
평안남도 증산군 국보면 오흥리
(現 평안남도 증산군 낙생리)[2]
사망
1980년 2월 15일 (향년 70세)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동
본관
밀양 손씨[3]

수향(水鄕), 고산(古山)
재임기간
초대 해군참모총장
1948년 9월 5일 ~ 1953년 6월 30일
제5대 국방부 장관
1953년 6월 30일 ~ 1956년 5월 26일

[ 펼치기 · 접기 ]
부모
아버지 손정도, 어머니 박신일
형제자매
누나 손인실, 손진실, 손채실
남동생 손원태(孫元泰)
배우자
홍은혜(洪恩惠)[1]
자녀
장남 손명원(孫明源), 차남 손동원(孫東源)
셋째 아들 손창원(孫昌源), 넷째 아들 손경원(孫京源)
학력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 석사)
종교
개신교 (감리회)
경력
초대 해군참모총장
제5대 국방부 장관
주서독 한국 대사
국민의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한국 재향군인회 자문위원장
제12차 아시아반공연맹 한국대표
경남대학교 석좌교수
한국반공연맹 이사장 겸 고문
제9차 세계반공연맹 총회 한국 수석대표
군사 경력
임관
상선사관
복무
대한민국 해군
1945년 8월 21일 ~ 1952년 8월 28일
최종 계급
중장 (대한민국 해군)
최종 보직
해군총참모장[2]
주요 보직
해방병단 단장
조선해안경비대 총사령관
참전
6.25 전쟁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ohn_Won_Yil_1948.png

해군 소장 시절
1. 개요
2. 생애
2.2. 독립운동 및 개인사업
2.3.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
2.4. 6.25 전쟁기 활약상
2.4.1. 개전 당시
2.4.2. 인천상륙작전
2.5. 전쟁 이후
3. 가족 관계
5. 손원일급 잠수함
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편집]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이 몸을 삼가 바치나이다.

초대 해군참모총장으로 취임할 무렵#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군인, 외교관, 사업가로서,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이자 초대 해군참모총장, 제5대 국방부장관을 역임했다.


2. 생애[편집]


1909년 6월 22일 평안남도 증산군 국보면 오흥리(현 증산군 낙생리)에서 감리회 목사독립유공자인 아버지 손정도와 어머니 박신일(朴信一) 사이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2.1. 상선사관 시절[편집]


중국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열강들의 조계가 여럿 설치되어 있던 상하이에서 이들 조계를 보호하고 친선 방문 등의 목적으로 들어와 있던 각국 해군들을 보고 감명받아, 중화민국 해군에 입대하려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중화민국 해군은 특정 지역 군벌이 장악하고 있어 타지인은 성공하기 힘들다는 말을 듣고 꿈을 접은 뒤, 대신 상선사관이 되기로 결심한다.

1924년 남경 중앙대학 항해과 졸업 후 항해사로 임관했다. 이후 1927년 중국 해군 국비유학생으로 독일에 3년간 유학하며, 1930년대에는 독일 함부르크 소재의 아메리카 라인사에서 상선 항해사로 근무했는데, 이때 하벤슈타인호에 6개월간 2등 항해사로 근무하면서 함부르크에서 수에즈 운하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는 장거리 항해를 처음 경험하였으며, 동양인으로는 드물게 독일의 1만 5천 톤급 대형 원양 여객선 람세스 호에서 근무하는 등으로 해운 업계에서 명성을 쌓았다.[4]

공식적인 언급은 없으나, 이때의 이력이 해군 창설기에 사람들을 모으는 데 큰 도움을 줬을 것이라 추정된다.


2.2. 독립운동 및 개인사업[편집]


손원일의 부친 손정도 목사는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임시의정원 의장(국회의장격)을 역임하는 등 독립운동에 동참했다. 일제가 독립 운동가를 잡아들이면서 고문하던 도중에 손원일의 이름이 나왔고, 그가 손정도 목사의 아들인 것을 안 일제가 당시 휴가를 내 잠시 국내에 들어와 있던 손원일을 체포 및 고문했다. 이 부분은 홍은혜 여사의 회고록에도 나온다. 그렇다고 손원일이 독립운동에 관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손원일은 1930년 상하이의 독립운동 단체의 비밀연락원의 임무로 입국하였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된 경력이 있다.#

석방 후 고문 후유증[5]을 치유하던 와중인 1934년, 매형이었던 남계(南桂) 윤지창[6]의 제안으로 '남계양행'이라는 식료품 수입 및 판매상을 공동 창업해 사업을 시작했다.[7] 이 사업을 위해선 수시로 만주국과 조선을 오가야 했는데, 석방 후 요시찰 대상자가 되어 해외 출국이 금지된 탓에 이를 할 수 없었으나, 그 지인이 일본 경찰에 손을 써서 요시찰 대상에서 제외됐고, 곧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은 손원일의 수완과 전시로 인해 급상승하던 식료품 가격 등에 힘입어 크게 성공했고, 동업자인 남계의 묵인아래 상당수의 사업 수익은 독립 운동 자금으로 이용되었다. 또한 이때 모아둔 재산이 훗날 조선해안경비대 창설 자금으로도 매우 유용하게 쓰였다.


2.3.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편집]


조국의 광복에 즈음하여 앞으로 이 나라 해양과 국토를 지킬 뜻있는 동지들을 구함.

1945년 8월 21일, 해방병단 모집을 위해 서울에 붙인 벽보#

중국유학, 독일 상선사관으로 생활하면서 수많은 강대국해군력을 두눈으로 실감한 손원일은, 광복 이후 귀국해 1945년 11월 11일[8] 대한민국 해군의 모체가 되는 '해방병단(海防兵團)'을 창설했다. 이후 해방병단(海防兵團)과 미군정청 산하의 남조선해안경비국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조선해안경비대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이 해방병단과 조선해안경비대 시절에 손원일 제독은 보유한 선박이라곤 구 일본군이 쓰다가 버린 소형 목선 몇 척이 전부였을 뿐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었던 상황에서 조함창(造艦廠)을 세워 폐선을 수리하고 미 해군에게서 소해정을 인수하는 등 해군을 키워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였다.

창군 당시 손원일 제독의 군함 도입 일화.

그후 1948년 9월 5일에 조선해안경비대를 바탕으로 대한민국 해군을 창설하자 해안경비대 총사령관 손원일 대령은 그대로 초대 해군참모총장[9]이 되었다. 1948년 12월 10일 이응준·채병덕·송호성·손원일이 대령에서 준장으로 진급, 김홍일이 준장으로 임관했으며 2개월 후인 1949년 2월 4일 손원일 준장은 이응준·채병덕·김홍일과 함께 소장으로 진급하였다.

이듬해인 1949년에 대한민국 해병대 창설을 승락하기도 했다. 여순 제14연대 반란사건 이후 당시 해군 장교였던 신현준 소령이 해군본부에 "우리도 해군 육전대 같은 상륙부대가 있었으면 바다를 통해 진압병력을 빠르게 기동시켜서 일이 커지기 전인 초기에 진압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보고했고, 이를 설득력 있다고 판단한 손원일 제독이 해병대 창설을 승락하게 된 것이다. 해병대 창설 아이디어를 처음 제시하고 건의한 인물인 신현준 장군은 해군본부의 창설 허가가 나자 해병대 창설을 직접 맡아서 주도했고 해병대 초대 사령관이 되어 중장으로 예편했다.

위에 소개된 링크글에도 나오듯이, 손 제독은 백두산함을 미국에서 우여곡절 끝에 도입할 당시에도 직접 나서서 성사시킨 바 있다. 그리고 백두산함은 6.25 발발 당시의 대한해협 해전에서 중대한 역할을 해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국군 최고 사령관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수도 서울을 탈환했다."라는 포고문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대한민국 최초의 해군 제독으로 미국으로부터 은성 무공훈장을 받은 바 있다.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들 일색이었던 해병대나 육군의 지휘관들과는 달리, 해군의 참모총장들은 일본군 출신이 없다. 손원일 제독이 일본군 출신을 배제하려 해서는 아니고,[10]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해군은 병력이 부족해지자 식민지 출신들을 받아들인 육군과 다르게[11] 불신과 자부심등으로 조선인들을 끝까지 징병하지 않았고 당연히 해군병학교 및 승선 직별 대상자에서도 제외됐으며 자진 지원자들에 한해서 조차도 육상 근무만 겨우 시켰기에[12] 일본 해군 출신 병과[13]사관이 거의 존재하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현상이다. 해군본부에서 발간한 《6.25 전쟁과 한국해군작전》에는 창설 멤버 중 해군병학교 출신 병과 중좌가 한 명 있었다고 나와 있는데, 이 경우도 일본인 집안에 양자로 들어가 법적으로 내지인 신분을 획득해 입학한 특이 케이스다. 대신 이들은 만주군 육군 출신들과 함께 신규 창설한 해병대의 창설멤버가 되었다. 그래서 초대 해병대사령관 신현준, 2대 사령관 김석범, 3대 사령관 김대식이 모두 만주군 육군 출신이었다. 그리고 해병대 내무생활 문화에 일본군 잔재가 짙게 남게 되고 해군을 이끄는 항해장교단은 한동안 상선사관 출신 제독들이 주도하게 되었다.

이렇다 보니 일부에서 '일본군 출신이 없는 해군만이 정통성이 있고, 나머지 군종은 친일 후예'라는 식의 극단적인 주장이 나오기도 하지만, 앞서 설명했듯이 이는 손원일 제독 본인을 포함한 창설 당시 해군 수뇌부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 당시 충원할 수 있었던 인력의 구성을 반영한 결과론일 뿐이다.[14] 게다가 손원일은 건군 및 6.25 전쟁 초기에 육군과 공군 참모총장이었던 정일권, 김정렬(둘다 일본군 출신)과 '육해공 삼형제'라고 부르며 평생 의형제 관계를 유지했다.[15] 이런 점을 보면 '해군 빼고는 친일파 후예'라는 작금의 주장은 손 제독의 뜻과는 무관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런 손 제독의 뜻과는 상관없이 그 점이 해군에게 있어 상당한 메리트가 되어 주고 있다는 점도 사실이다.


2.4. 6.25 전쟁기 활약상[편집]



2.4.1. 개전 당시[편집]


개전 당시에는 해군 함정 인수를 위해 미국에 가 있었다. 개전 소식이 들리자 귀국을 서둘렀으나, 이승만 대한민국 대통령이 인수 중인 함정을 이끌고 오도록 지시해 전쟁이 어느 정도 진행된 뒤에야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2.4.2. 인천상륙작전[편집]


우리는 지금 인천 앞바다에 와 있습니다. 우리는 드디어 오늘 상륙작전을 감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작전이야말로 불법 남침한 북한군을 분쇄하고 위기에 처한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정의와 자유를 회복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USS Pickaway (APA-222)함 함교에서 상륙개시를 기다리는 해병대 장병들에게 한 훈시.

인천 상륙작전 성공을 위해 영흥도와 덕적도의 탈환을 해군의 이희정 중령함명수 소령[16]에게 지시, 이를 성공시켜 인천 상륙작전의 밑거름이 되게 했다.[17] 상륙작전 당시에는 함대 지휘권은 없었지만, 직접 소총을 들고 한국 해병대의 상륙작전을 지휘했다. 원래 손 제독은 미군 지휘부와 함께 기함 함교에서 작전을 참관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어느 순간 사라진 손 제독이 직접 돌격하고 있다는 보고에 미군 장성들이 기겁했다고 한다. 이렇게 장성이 전장에서 직접 돌격한 사례는 같은 6.25 전쟁 당시의 육군 백선엽 장군의 사례 정도를 제외하면 극히 드물다. 애시당초 미군 위주의 연합군이 주도하던 인천 상륙작전의 개시 직전에 한국 해군과 해병대도 참가할 수 있었던 것도 손 제독이 이 역사적인 작전에 한국군도 꼭 참여시켜야 한다고 연합군측에 적극적으로 주장한 공이 컸다.

2.5. 전쟁 이후[편집]


1952년에 중장 계급으로 예편 후 이듬해 국방부장관이 되어 1956년까지 역임했다. 이후 1958년 초대 주서독 대사를 지냈다. 대장으로 진급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전투함이 한 척도 없는 해군에서 대장이 나온다면 그건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한국 해군에 전투함이 갖춰지거든 그 이후에 대장 계급을 받겠다고 본인이 고사했다.[18] 대한민국 해군에서 최초의 대장은 1966년에 취임한 8대 김영관 참모총장이다.[19]

대한민국 해군에서 이순신, 장보고와 함께 추앙받는 3대 제독 중 하나.[20] 화려한 전과는 없지만 겨우 일본 해군에서 목선 몇 척 인계받은 아무것도 없는 한국 해군을 일으켜 세웠고 장성으로서의 모범을 보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21]

1980년, 신장병으로 투병 중에 끝내 사망하였는데, 이때 아내와 자녀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사랑하는 내 조국을 위해 나에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한다. 그들은 모두 바르고 굳건한 신념으로 해군을 만들어 보려고 힘썼고, 오늘날의 해군으로 발전하는데 밑거름이 됐다고 확신한다. 내 나라를 도로 찾으려고 귀한 생명을 바친 우리 조상들의 사무친 한과 나라를 지키려고 싸우다 산화한 장병들의 넋과 한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라없는 서러움보다 더한 것은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다시는 내 조국을 남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잘 지켜주기를 간절히 바란다.[22]


투병 시기에 국방부에서 군의관 1명을 주치의로 전담시켰는데, 처음엔 육군 군의관이 왔으나 얼마 뒤 손 제독의 희망에 따라 해군 군의관으로 교체되었다. 개인적으론 처음부터 해군 군의관의 진료를 받고 싶었으나 배정된 육군 군의관이 자신을 못 믿냐며 섭섭해 할까 우려해 한동안 얘길 못 했는데, 자신은 해군 출신이니 해군 군의관의 진료를 받고 싶다는 뜻을 그 육군 군의관에게 전하자 군의관이 바로 이해해줬다고 한다.


3. 가족 관계[편집]


부친은 독립운동가였던 손정도 목사.

한 가지 아이러니한 점은, 북한의 김일성이 손정도 목사와 깊은 관계가 있었다는 점이다. 손 목사가 중국 길림 지역에서 목회 활동을 할 때 김일성은 그의 교회에 다녔고 손 목사의 도움으로 손원일이 다니던 중국 길림의 육문중학교에 입학하는 등 많은 도움을 받았다. 믿기지 않을지도 모르나, 김일성 집안은 원래 대대로 개신교 집안이었다. 김일성의 어머니의 이름은 강반석인데, 이 반석은 12사도 중 1명인 베드로에서 따온 이름이다. 베드로라는 이름의 뜻이 기반, 반석이기 때문. 김일성의 아버지인 김형직은 손정도의 숭실학교 2년 선배였다. 손정도 목사는 김일성이 투옥되었을 때 옥바라지를 해 줄 정도로 그를 상당히 아꼈고, 김일성도 회고록인 세기와 더불어에서 손정도 목사에 대해 친아버지와 동급으로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또한 손 목사의 차남이자 손원일의 동생인 손원태 박사와는 육문중학교 동급생으로 의형제처럼 지냈다.[23] 이러한 인연 때문인지 1994년 8월에 김일성이 사망하자 조문 차 방북한 손원태 박사의 생일잔치를 김정일이 평양에서 마련해주기도 하였다. 손원일 제독이 대한민국 해군의 참모총장으로 6.25 전쟁 당시 김일성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생각하면 역사의 아이러니. 심지어 손원일 제독은 국립서울현충원에, 손원태 박사는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돼있다.#

부인인 홍은혜는 음악교사 출신으로 독실한 개신교(감리회) 신자였다.[24] 해군 창설 초기에 남편인 손원일을 도와 자금을 모았으며, 전공을 살려서 해군 최초의 군가인 <해방행진곡>과 바다로 가자 등을 작곡하였다. 2017년 4월 19일 향년 99세로 별세했다.



해방행진곡, 바다로 가자는 손원일 작사, 홍은혜 작곡 이다.

장남 손명원은 기업인으로 살았고[25], 차남 손동원(건축사), 3남 손창원(사업가)이 있다. 누나 손진실은 윤치호의 이복동생이자 윤치영의 사촌동생인 윤치창과 결혼했다.

장남 손명원의 차녀인 손정희는 전 국회의원 홍정욱과 결혼했다. 즉, 홍정욱은 손원일의 손녀사위가 된다.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옹은 그의 7촌 조카로, 손원일의 조부 손몽룡(孫夢龍)[26]과 손기정의 증조부 손종일(孫鍾一)은 친형제였다.


4. 보도연맹 학살 사건 관여[편집]


반헌법행위자열전, 반헌법행위자열전 수록 집중검토대상자 405명 사건별 명단이라는 것의 학살자 명단에도 손원일 이란 이름은 확인되지 않는다. 손원일 제독이 학살을 지시했거나 묵인하고 행위를 간접으로 지속시켰다는 내용은 보고서에 없었다. 그러나 직접적인 학살 명령은 아니어도 명령 계통상의 학살 책임의 소재가 될 수 있는 자료가 발견되었고 # 그외에 이런 저런 증언에서도 학살론을 긍정하는 기사들을 발굴할 수 있었다. 동아일보 기사, 나주투데이 기사

모든 것이 정리된 후의 사건 요약글

손원일은 신성모 국방부 장관의 명령 아래, 1950년 7월부터 9월까지 대한민국 해군 포항경비사령부에 보도연맹원 학살을 지시했다. 해군 외에는 포항경찰, 육군 제3보병사단, 그리고 대한청년단이 관여되어 있다. 3사단과 한청, 포항경찰은 포항의료원 및 고디굴, 오늘날 과메기 덕장이 있는 구룡포에서 직접 희생자들을 총살하였다. 해군은 경찰의 협조를 얻어 포항 앞바다에 주민들을 끌고 나가 총살한 후 시신에 돌을 매달아 수장했다. 희생자들의 정확한 숫자는 불명확하며 수장된 이들이 200명, 육지에서의 총살로 살해된 이들은 도합 약 290명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된다.[27]

5. 손원일급 잠수함[편집]


한국 해군이 장보고급 잠수함의 후계함으로 도입한 214급 잠수함이 그의 이름을 따서 손원일급으로 명명되었다. 경상남도 창원시에 위치한 해군 진해기지사령부 영내에 손원일 제독의 동상이 있다. 진해 군항제 기간에 이루어지는 부대 개방 시 일반인도 직접 볼 수 있다.


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편집]


제3공화국에서 배우 민욱이 손원일 역을 맡았다. 다만 여기서는 5.16 군사정변 이후에 허정의 신정당 산하의 인물로 나오기 때문에 군인으로써의 등장이라기보단 정치인으로써의 등장에 가깝다.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 2의 소련군 4번째 미션 동영상에 한국군 사령관이 등장하는데 손원일 제독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보인다. 배우는 일본계 미국인 배우 리처드 나리타. 물론 고증 따윈 씹어버리는 전통(?)을 자랑하는 시리즈답게 입고 있는 동정복 상태가 심히 엉망[28]이다.

대체역사물에서는 해군이라는 접점때문인지 대한제국 해군 장교였던 신순성과 함께 자주 나온다.[29]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4 06:22:19에 나무위키 손원일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손원일' 이라는 이름을 로마자로 올바로 표기하면 'Sohn Won-yil' 또는 'Sohn Wonyil' 로 본인이 생전에 그렇게 썼으며,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의 유품 등으로 확인할 수 있고 해군 내에서도 그렇게 써 왔다. 하지만 손원일함의 영문 표기는 표준 로마자 표기법을 적용하여 'ROKS Son Wonil' 이라 썼는데, 정작 국립국어원에서는 '인명, 회사명, 단체명 등은 그동안 써 온 표기를 쓸 수 있다' 라는 규정을 두고 있다.[2] 이북5도 기준으로는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 오흥리[3] 진주사공(휘 상겸)파 45세.[4] 25만 톤에 달하는 현대 유조선들을 생각한다면 작은 배처럼 느껴질수도 있겠지만, 호화여객선으로 건조되었다가 개조되어 항공모함이 된 히요, 준요가 배수량 2만 4천 톤급에 전장은 200m를 넘었다. 이 둘은 미군에서도 경항모가 아니라 정규항모급(함대형항모지만)으로 분류되었을 정도로 큰 배이다.[5] 고문으로 인해 공황장애에 평생 시달렸다.[6] 남계 윤지창은 윤치호의 이복동생으로 미국 시카고 루이스 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수재였다.[7] 남계양행은 2층 붉은 벽돌 건물을 지어 창업했는데 이 건물은 현재도 상업시설로 사용되고 있다. 주소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우정국로 36'(조계사 방면 인사동 입구). 이 건물에는 서울시미래유산에 선정되었던 '동헌필방'이 1966년부터 폐업한 2020년까지 영업하고 있었고 현재는 복고풍 컨셉의 커피점이 들어서 있다.[8] "해군은 신사(士)다."라는 뜻에서 11(十一)월 11일 11시에 해방병단 결단식 거행[9] 당시에는 해군총참모장.[10] 손제독은 해병대 창설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었고 해병대도 해군과 다름없이 자식처럼 여겼다.[11] 조선인 같은 경우 1939년 후반까지 가서야 일본육군에 처음 지원이 가능해졌다.(그에 반해 모든 일본인 남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병역의 의무를 부여받았다.)[12] 따라서 '일제강점기때 해군으로 끌려가 배타고 싸웠다'는 주장을 하면, 그 신뢰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13] 일본 해군에서 병과란 항해, 포술, 수뢰, 항공 등을 맡는 전투병과의 일종으로, 일본 해군에는 전투병과란 병과 단 하나뿐이었다. 항공과가 따로 있었으나, 이는 사병 출신 사관인 특무사관들 중 항공 계열인 이들에게만 붙었다. 해군에서 기관과, 군의과, 법무과, 기술과, 주계과 등 병과가 아닌 사관들은 비병과사관이라는 용어를 썼다.[14] 공군의 경우만 봐도 초대 참모총장 김정렬은 일본군 출신이라고 하지만, 공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2대 참모총장이자 앞서 초대 국방차관이었던 최용덕은 광복군 출신이었고, 김신(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아들)을 비롯한 다른 광복군 출신들도 참여했다. 그리고 전쟁을 거치며 미 공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서 미 공군 색깔이 강하다. 게다가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임시정부의 국방장관격인 노백린이 공군력 건설에 착수한 바 있다.[15] 출처는 한국해양전략연구소가 편찬한 손원일 제독 평전.[16] 북한 간첩에 의해 미군 배가 북한으로 건너갈 당시 해군특공대를 임시로 조직해 옹진만을 급습한 주역이다. 이후 제 7대 해군참모총장을 역임했고, 군 예편 후에는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등 정치인으로도 활동하였다.[17] 다만 안타깝게도 당시 작전에 직접 참가하여 교전을 벌인 해군 특공대 병력은 북한군과의 총격전 끝에 모두 전사했다.[18] 현실적으로도 당시 한국 해군을 지휘하던 미 극동해군사령관의 계급이 중장이었는데 손 제독이 대장직을 수락하게 되면 미군과 지휘체계 문제도 발생할 소지가 있었다. 현재 대한민국의 해군참모총장은 대장 계급이지만 작전권이 없고, 작전권은 중장 계급인 대한민국의 해군작전사령관이 행사하므로 미7함대와 연계 시 큰 문제는 없다. 미7함대 사령관도 중장이지만, 미군에도 사령관과 부사령관의 계급이 같은 부대는 널렸고, 당장 한미연합군사령부사령관은 미군 대장이, 부사령관은 한국군 대장이 역임한다.[19] 해사 1기 동기생들인 이맹기(6대), 함명수(7대) 모두 중장으로 참모총장직을 수행했고 역시 해사 1기 동기생인 9대 참모총장 장지수도 대장이었다. 해사 1기 동기생인 공정식해병대로 전군하여 해병대사령관이 됐다. 1963년 충무함을 도입해 구축함을 가지게 되면서 해군에서 대장 계급이 나올 수 있는 명분이 갖춰진 점도 있다.[20] 그래서 이순신, 장보고, 손원일은 모두 자신의 이름이 붙은 함급이 존재한다.[21] 장보고는 청해진을 통해 한국사에서 해양력의 가치를 처음 실증해냈고, 이순신은 임진왜란 당시 지상에서의 거듭되는 패배 속에서 바다에서의 승리를 통해 역전의 계기를 마련했고, 결국 멸망 직전에 봉착했던 나라를 구했다. 그리고 손원일 제독은 초대 해군참모총장이자 항일 독립투쟁에 동참한 인물로서 신생 해군의 역사적 정통성을 확립한 공로가 크다. 아울러 이 세 인물들은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 스스로 함대를 키우고 병력을 양성했다는 공통점도 있다. 이순신은 초창기에 빠르게 승진한 것 외에는 선조에게 지원을 못 받아서 둔전과 어업으로 자금을 모아 함대를 꾸렸고, 장보고는 신라 조정에게서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해 무역으로 스스로 자금을 충당했으며, 손원일은 대한민국 정부의 지원 의지는 확실했지만 막 정부 수립이 이루어져 더욱 지원받을 여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해군을 건설했다.[22] 이 구절은 2018년 서해수호의 날 영상 "헌신"의 주제로 쓰이기도 했다.[23] 참고로 김일성의 아버지인 김형직반공주의를 지지하는 목사였다. 결국 공산주의자들에게 피살당했는데, 김일성은 자기 은인의 뒷통수를 친 것도 모자라, 자기 아버지를 죽인 원수들의 편에 선 것이다.[24] 개신교 관련 증언이나 서적에 자주 나오며, 회고록도 절반 정도가 교회 이야기다.[25] 1941년생. 서울고등학교(11회)를 졸업하고 도미하여 대학을 마쳤으며 1980년 현대그룹에 입사하여 현대중공업 전무와 부사장, 현대미포조선 사장, 쌍용자동차 사장을 지냈다. 김동조 전 외무부장관의 차녀 김영숙과 결혼하였으며 아랫동서가 정몽준이다.[26] 족보명 손형준(孫亨俊).[27] 신기철, "전쟁범죄" 151p[28] 미 육군 방공병과 장교 병과장을 달고 있다.[29] 그러나 실제 역사 속에서 신순성 본인은 1944년에 죽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해군은 물론 그 전신인 해방병단과도 접점이 없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