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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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해양부장관 (2008~2013)

초대
정종환
2대
권도엽

국토교통부장관 (2013~현재)


초대
서승환
2대
유일호
3대
강호인
4대
김현미
5대
변창흠

6대
노형욱



역임 직위 및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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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9대 교통부장관
백선엽
白善燁 | Paik Sun-yup
[1]

출생
1920년 11월 23일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
(現 남포시[2] 강서구역 덕흥동)
사망
2020년 7월 10일 (향년 99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묘역
국립대전현충원 장군제2묘역
본관
수원 백씨[3]

우촌(愚村)·운산(雲山)·산남(山南)
재임기간
제7대 육군참모총장
1952년 7월 23일 ~ 1954년 2월 13일
제10대 육군참모총장
1957년 5월 18일 ~ 1959년 2월 22일
제4대 연합참모본부총장
1959년 2월 26일 ~ 1960년 5월 31일
제19대 교통부장관
1969년 10월 21일 ~ 1971년 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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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백윤상, 어머니 방효열
형제자매
누나 백복엽, 남동생 백인엽
배우자
노인숙
자녀
장녀 백남희
장남 백남혁
차녀 백남순
차남 백남흥
학력
약송소학교 (졸업)
평양사범학교 (졸업)
국방대학교 (행정학 / 학사)
종교
개신교
신체
174cm[1]
경력
제4대 주중화민국 대사
제19대 교통부 장관
충주비료 사장
한국종합화학공업 사장
대한화학펄프 사장
한국화학연구소 이사장
국토통일원 상임고문
신민주공화당 상임고문
군사 경력
임관
봉천군관학교 (9기)
군사영어학교 (1기)
복무
만주국 육군
1941년 ~ 1945년
대한민국 육군
1946년 ~ 1960년
최종 계급
중위 (만주국 육군)
대장[2] (대한민국 육군)
주요 보직
제5보병사단장
제1보병사단장
제1군단장
제2군단장
제1군사령관
육군참모총장
연합참모본부총장
병과
보병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중일전쟁)
여순사건
6.25 전쟁

1. 개요
3.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관계
6. 여담
7. 대중매체에서
8. 주요 경력
9. 관련 문서
10.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파일:백선엽장군말년모습.jpg

1953년, 육군참모총장 재직 당시
2013년, 미8군 명예사령관 임명식 및 백선엽 지휘소[4] 개관식 당시

대한민국군인, 정치인, 외교관, 기업인.

일제강점기 시절 간도특설대 복무 전력으로 인해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비판을 받음과 동시에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을 구해낸 명장이라는 평가도 받기에, 대한민국 현대사의 명과 암을 동시에 보여주는 인물이다.


2. 일생[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백선엽/일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관계[편집]


박정희여순 사건 이후 남로당 계열의 군인을 숙청하는 숙군 과정에서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이후 1949년 2월 '군병력 제공죄'로 사형을 구형받은 뒤 결국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때 백선엽은 육군본부에서 정보국장으로 재직 중이었는데, 김안일 방첩대 과장을 통해 직접 면담하고 만주 시절 동료 20명으로부터 ‘박정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라는 보증서를 제출받고서 미군과 이응준 총참모장의 동의를 받아 형 집행정지 처분을 이끌어냈다.

뿐만 아니라 백선엽은 불명예 제대한 박정희를 정보국 전투정보과에서 문관(현 대한민국 군무원) 신분의 북한반 상황실장으로 일할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5] 당시 정보국에서는 예산 문제로 문관 월급을 보장해 줄 수 없다고 했지만, 백선엽은 자신의 판공비 일부를 떼어서 박정희의 월급으로 지불했다. 이렇게 목숨을 부지한 박정희는 이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정보국장이던 장도영의 건의로 1950년 7월 31일 자로 육군 포병 소령으로 복직하게 되었다.[6]

제5사단장으로 부임한 박정희의 보직신고를 받는 백선엽[7]
6.25 전쟁 종전 후인 1953년 11월에 박정희를 장군으로 진급시켜준 것도 백선엽이었다. 당시 백선엽은 육군참모총장이었는데, 경무대에서는 박정희의 남로당 전력을 문제삼아 제외하려 했으나 인사를 강행했다.

백선엽을 교통부 장관으로 임명하는 박정희 대통령
그러나 5.16 군사정변 직후 중화민국 주재 대사로 타이페이에 있던 백선엽은 미국 대사와의 면담에서 박정희의 전력을 이유로 사상을 의심해봐야 한다고 발언했다.[8] 그 이후 백선엽은 중화민국 주재 대사에서 유럽/아프리카 총괄대사로 전임[9]되어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고 유럽과 아프리카, 캐나다를 떠돌았다. 모친 병환을 이유로 잠시 귀국했을 때 박정희를 면담하고 나서도 2년 뒤인 1969년 12월에야 교통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10년 만에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10] 교통부 장관 퇴임 후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 한국종합화학 등 공기업체 사장을 두루 거치며 보상받았다.

여담으로 백선엽은 박정희보다 3살 어리지만 항렬로는 외할아버지뻘이다. 박정희의 모친 백남의수원 백씨 28세손으로 남(南)자 항렬이었고, 백선엽은 수원 백씨 27세손이다.[11] 숙군 당시 사형 위기에서 구명해준 점, 이러한 모친쪽 가문과의 인연이 두루 작용해서, 박정희는 대통령이 된 뒤에까지 3살 아래였던 백선엽을 또는 백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4. 사건사고 및 논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백선엽/사건사고 및 논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저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백선엽/저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여담[편집]


창씨개명도 했는데 일본식 이름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 義則)로 공교롭게도 윤봉길 의사에게 처단당한 일본군 장군 이름과 같다. 이에 대한 논란은 백선엽/사건사고 및 논란 문서 참조.

전설적인 사채업자 명동 큰 손 백 할머니 백희엽 (1916년 ~ 1995년)이 사촌 누나다. 백희엽광화문 곰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고성일과 더불어 백 할머니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대한민국 사채업의 양대 거물이었고, 미래에셋 박현주 회장의 스승으로도 유명한 1970 ~ 90년대 슈퍼 개미[12]였다. 영화《마스터》에서 주인공 김재명 팀장(강동원 분)이 사기꾼 진현필 회장(이병헌 분)을 유인하기 위한 작전 자금을 빌린 할머니(박정자 분)가 바로 백 할머니 백희엽을 모델로 만든 캐릭터이다.

뉴욕에서 어느 기자동양 사람들은 대개 키가 작고 안경을 쓰면서 금니를 했는데, 당신은 왜 그런 모습이 아니냐[13]라고 묻는 해프닝이 있었다. 이에 백선엽이 그런 질문엔 대답하지 않겠다고 하자 기자가 머쓱하게 물러났다고 한다.
알레이 버크 제독과 담소를 나누는 백선엽 장군
6.25 전쟁알레이 버크 제독의 해군 77기동 함대가 국군 1군단에게 함포사격을 지원해준것을 계기로 알레이 버크 제독과 절친이 되었다. 해군 함대가 육군의 포병대 노릇을 해 준 셈인데, 그 덕분에 백 장군은 전쟁 막바지에 미 육군 제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에게 "본관의 포병 지휘관입니다."라고 소개할 정도였다. 버크 제독이 사망했을 때, 그의 장례식에 참석해 해상자위대 대표들에게 버크 제독이 자위대 창설에 크게 기여했음을 잊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퇴역한 지 오래지만 대한민국 육군에서는 별세 전까지 각별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대한민국 육군본부 방문 시에 군악대와 의장대가 동원된 공식적인 의전도 받았다. 현역 육군참모총장이 퇴역한 백선엽에게 경례를 하는 모습이 나올 정도였다. 2013년 9월 민주당 김광진 국회의원이 국방부 등으로부터 입수한 자료에 의하면, 백선엽은 지난 2003년 11월부터 2012년까지 근 10년간 업무용 에쿠스 차량 1대와 운전병, 그리고 4급 상당의 개인 보좌관 등을 국방부로부터 지원받고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그가 세운 공으로 상당한 예우를 받았던 편이다.

노년까지도 상당한 대식가였다고 한다. 2009년 2월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육군협회 관련 행사에 참석한 이의 증언으로는, 계속 꾸벅대다가 만찬이 시작되자마자 접시를 순식간에 비워낸 어르신이 백선엽인 걸 나중에 알고 황당했다고 한다. 사실 군인 출신인 걸 감안하면 크게 이상할 건 없다.[14]

영어, 일본어, 표준중국어를 능통하게 구사하였다.

육군사관학교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육사를 방문해 생도들에게 자신의 저서를 나눠주거나 장학금을 기탁하기도 했다.

6.25 전쟁 당시 백선엽이 사단장으로 근무했던 육군 제1보병사단에는 그의 동상이 있다.

JSA 경비대대 주둔지 내 소재하고 있는 막사 신관의 이름은 그의 이름을 딴 백선엽관이다.

노신영 전 국무총리와 같은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바로 옆마을 출신이라고 한다. 이러한 인연 덕분인지 2019년, 노 전 총리의 사망 직전까지 자주 연락했다.

2013년 9월, 한미동맹 60주년을 맞아 그의 이름을 따 '백선엽 한미 동맹상'이 제정되었다.

전술되어왔듯 친일 행보에 대해 논란이 있는 백선엽이지만, 그 조차도 6.25 전쟁이승만 정부에서 진행했던 학살과 부패에는 부정적인 모습을 보인다. 국방일보 '노병이 걸어온 길' 칼럼에서는 인민공화국 치하 마을을 약탈한 병사를 즉결처형한다고 일부러 빗맞춰서 돌려보낸 일화라든가, 빨치산에 대한 관대한 처분을 긍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중에서 백선엽도 가장 안타깝다는 어조로 서술한 일화가 있는데, 본인은 다만 전후에 들은 이야기라고 한다. 수도사단 소속이던 당시 24세의 김 대위가 있었는데, 그는 지리산에서 작전중 오양수라는 이름의 악질 20살 여성 빨치산 포로에 한눈에 반하고 만다. 결국 그는 주변의 시비를 물리치고 오양수에게 군인가족증명을 만들어줘서 본가로 돌려보낸다. 그러나 이후 둘 다 방첩대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는 신세가 되고 만다. 오양수는 심문에 답하지 않고 다만 김 대위의 안부를 묻다가 감시병의 총으로 자살했고, 김 대위는 남원 수용소[15]에 수용되어 있다가 백야전사의 작전이 종료된 뒤 후임사단장의 특사로 원대복귀했다. 그 후 그는 오양수의 유해를 찾으려고 노력하다가 1973년 중령으로 예편하였다고 한다.

2017년에는 주한 미 육군의 평택 이전 행사에 초청받았는데, 모두 휠체어를 탄 모습이었다. 하기야 그도 어느덧 100세를 바라보는 백전노장이니 딱히 이상할 것도 없다. 애초에 백선엽과 비슷한 시기에 군생활을 했던 이들은 물론이고 한국전쟁시기 백선엽보다 10년 가랑 어린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참전용사들도 대부분 늙어서 사망한 상태이다.

2018년 11월 21일에 98세 생일을 맞이했다. 이날 잔치에는 정경두 국방부 장관,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 로버트 에이브람스 주한미군 사령관 등 한미 양국의 군사 및 외교 주요 당국자들이 대거 참석했다. 같은 해 비상국민회의에 이름을 올렸다.

육사 학술정보원(원장 오경두 대령)은 육군사관학교 교내 포털사이트에 자서전 '군과 나'를 기초로 한 웹툰을 올렸다. ###

슬하에 2남 2녀를 뒀으며, 2020년 사망 기준 한국 나이로 101세였다.

백선엽과 가까운 백씨 집안 인사들은 상당히 장수했다. 백선엽 본인이 만 99세에 사망했으며, 본인보다 늦게 태어나서 일찍 죽은 동생 백인엽도 91살에 사망했다. 또한 비교적 일찍 죽은 편에 속하는 사촌누나 백희엽조차 79살에 사망했다.

2012년 원수 진급심사를 받았으나 간도특설대 문제로 인해 원수 진급이 좌절되었다.

사후 백선엽 추모행사는 민간 차원에서 열었으나 2022년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재평가의 움직임이 일자, 7월 2주기부터 국군 측이 의장병과 군악대를 보내고 조화를 보내기 시작했으며#, 2023년 3주기 때부터 경상북도청, 칠곡군청, 국가보훈부, 육군본부 4곳이 공동으로 주최하기 시작했다. 7월 6일 '다부동 전투 참전 주민위령비'를 먼저 제막하고 백 장군의 동상까지 세웠다.#

2023년 4월 20일, 국가보훈처와 한미연합군사령관이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이해 공동으로 지정한 '6.25 10대 영웅' 중 하나에 올랐고#, 5월 3일까지 미국 뉴욕시 타임스스퀘어 전광판에 비추어진 바 있다.

6월 30일 그의 호국 정신을 기리기 위해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이 공식 출범되었는데, 명예이사장으로 장녀 백남희, 초대 이사장으로 김관진 전 국방부장관이 각각 앉았다. 7월 6일 박민식 국가보훈부장관조선일보와의 통화에서 백선엽, 김백일, 이응준, 이종찬, 신태영 등 12명에게 붙은 '친일반민족행위자' 문구를 국립현충원 안장정보에서 떼내겠다는 방안을 밝혔으며[16],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백선엽 장군이 친일파가 아니라는 것은 직을 걸고 이야기할 자신이 있다고 발언했다.[17] 24일에는 안장정보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문구를 뗐다.#


7. 대중매체에서[편집]


  • 1984년 KBS1 특집드라마 <휴전 6.25>에서는 배우 박근형이 연기했다.
  • 1989년 MBC 드라마 <제2공화국>에서는 배우 김수찬이 연기했다.
  • 1993년 MBC 드라마 <제3공화국>에서는 성우 황일청이 연기했다.
  • 1998년 SBS 정치 대하드라마 <삼김시대>에서는 성우 황윤걸이 연기했다.
  • 대체역사물 Thousand-Week Reich에 성공적으로 건국된 조선인민공화국 장군으로 등장. 군 내부 파벌 싸움에서 만주군계 소속이다.
  • 대체역사물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대만주제국 장관으로 등장했다.


8. 주요 경력[편집]


연도
계급
발령지
비고
1941년 12월
소위
(만주국)
만주국 봉천군관학교 졸업
[18]
1946년 2월

군사영어학교 졸업

1946년 2월
부위
제3여단[19] 제5연대 1중대장

1946년 9월

제5연대 1대대장

1947년 1월
중령
제5연대 연대장

1947년 12월

제3여단 참모장

1948년 4월

통위부 정보국장
국방경비대 총사령부 정보처장

1948년 12월
대령


1949년 5월

육군정보학교 교장

1949년 7월

제5보병사단 사단장

1950년 4월

제1보병사단 사단장

1950년 7월
준장


1951년 4월
소장
제1군단 군단장

1951년 7월

휴전회담 대한민국 대표

1951년 11월

야전군사령부 사령관

1952년 1월
중장


1952년 4월

제2군단 군단장

1952년 7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1953년 1월
대장

[20]
1953년 5월

육군대학 총장 겸직

1954년 2월

제1야전군사령부 사령관

1957년 5월

육군참모총장

1959년 2월

연합참모의장

1960년 5월

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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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제강점기에 사용했던 일본식 이름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였다는 전직 일본 헌병대 장교의 증언이 있으나, 공식 문서로 검증된 사실은 아니다. 간도특설대에 복무했으니, 꼭 저 이름이 아니더라도 창씨개명한 이름이 있을 것이다.[2] 북한 당국은 2010년 남포를 도급 도시로 삼고, 한국 이북5도의 행정구역에서 강서군에 해당하는 지역을 남포에 편입시켰다.[3] 27세손 '낙(樂)O' 항렬이지만, 항렬자를 쓰지 않았다.[4] 연합합동특수임무부대 미8군 작전지휘소[5] 여기서 김종필이후락을 만난다.[6] 장도영회고에 의하면, 전쟁 발발 이후 한강 인도교 폭파로 조직 수습이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도 박정희가 정보국 장병들을 수습하고 중요 문서를 챙겨 6월 28일에 수원에 자발적으로 나타난 점을 보고 완전히 사상에 대한 의심을 거뒀다고 한다.[7] 왼쪽 세번째의 인물이 당시의 박정희 준장, 가장 왼쪽의 인물이 백선엽 대장이다.[8] #[9] 지금과는 사정이 달라서 당시 중화민국미국 다음으로 중요한 국가였다. 부임한 지 1년도 못 되어 전임한 건 사실상 미국과 군내 신망이 있는 그를 부담스러워한 조치였다.[10] #[11] 수원 백씨 27세손들로는 백낙준, 백낙청 등이 있고 이들은 낙(樂)자 항렬을 썼으나, 백선엽 집안은 엽(燁)을 돌림자로 썼다.[12] 개인 주식 투자가[13] 1970년대 미국인의 평균 키는 172.7cm이었는데, 그 당시 백선엽의 키는 174cm였다. 따라서 미국인 기준으로는 평균 키 이상이었고 한국인 기준으로도 엄청 큰 편이었던 것이다.[14] 박정희 탓에 군인들이 검소한 소식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군인 출신이면서 소식가였던 박정희가 유별난 경우고, 업무 특성상 고강도의 훈련량과 빈번한 육체노동, 업무가 주는 스트레스 탓에 군인들 중에서는 대식가가 많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많이 먹는다고 해도 체력적으로 소모가 큰 업무 특성상 먹는 족족 살이 빠지거나 근육으로 가니 그리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당장 2년 남짓 복무하는 사병만 하더라도 짬밥으로는 모자라서 PX에서 배를 마저 채우는 게 일상이다. 여담이지만 전두환도 대식가였다.[15] 백야전전투사령부는 빨치산 토벌의 사전작업으로 광주와 남원에 포로수용소를 세웠다. 붙잡힌 포로와 부역자는 두 수용소로 압송된 다음, 신원조사와 심문을 거쳐 처벌여부와 형량이 결정 되었다. 여기에 육군 중대장을 가뒀으니 사실상 부역자 내지 변절자 취급을 한 셈. 현재도 남원에는 교도소가 없다.[16] “백선엽 등 국가유공자 12명 명예회복 추진”
보훈부 “현충원 안장 기록에서 친일 반민족 문구 삭제 검토”
[17] 국립현충원 안장정보에 '친일파' 문구 삽입 여부는 당시에도 제아무리 친일파라지만 공을 세우기도 했고 묘소에까지 그럴 필요가 있느냐란 여론 때문에 넣지 않았다. 가장 문제시되는 건 박민식 보훈부장관이 직접 백선엽의 친일을 부정한 것이다.[18] 제2차 세계대전 종전시 만주군 육군 헌병 중위 신분이었는데, 당시 헌병은 군사 경찰이 아닌 지금의 정보, 기무, 특수전 병과와 유사했다.[19] 현: 제3보병사단.[20] 국군 1호 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