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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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공화국
전두환 정부
全斗煥 政府 | Chun Doo-hwan Government

1980년 8월 27일 ~ 1987년 6월 28일
출범 이전
이후
최규하 정부
박충훈 권한대행 체제

노태우 정부
대통령
전두환 ,/ 제11·12대,
국무총리
남덕우 ,/ 제14대 (1980.9.22.~1982.1.3.),
유창순 ,/ 제15대 (1982.1.23.~1982.6.24.),
김상협 ,/ 제16대 (1982.9.21.~1983.10.14.),
진의종 ,/ 제17대 (1983.10.17.~1985.2.18.),
노신영 ,/ 제18대 (1985.5.16.~1987.5.25.),
여당
민주정의당 ,(1981.1.15.~1987.6.29.),

파일:unnamed 전두환.jpg
▲ 대한민국 제11·12대 대통령 전두환 취임 선서

1. 개요
2. 상세
2.1. 시대적 특징
2.3. "2중대, 3소대"로 전락한 관제 야당
3. 대외관계



1. 개요[편집]


전두환 정부1979년 12.12 군사반란과 1980년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이후 헌법 개정을 통해 탄생한 대한민국의 정부이다. 1980년 8월 27일부터 1987년 6월 28일까지 존속했다.

2. 상세[편집]



2.1. 시대적 특징[편집]


이 정부의 모토이자 캐치 프레이즈는 선진조국창조와 정의사회구현이며 국정지표는 다음과 같다.

  • 정치 - 민주주의 토착화
  • 경제 - 복지사회 건설
  • 사회 - 정의사회 구현
  • 문화 - 교육개혁과 문화창달

"선진조국창조" 의 경우, 이 시절 만들어진 공익광고를 보면 '선진조국'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강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정의사회구현"의 경우는 각급 경찰서 현판 바로 밑에 대통령의 사진과 함께 달린 것은 물론 동사무소 등 관공서에 버젓이 걸려있었고 당시 국민학교 외벽에도 걸려있던 문구. 이 정부의 태생부터 따져보자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캐치프레이즈다.[1] 그리고 여당의 이름은 그들의 존재가 결코 민주적이지도 않았고 정의롭지도 않았음에도 민주정의이었다.[2]

당시 최고 인기 코미디언이었던 김병조는 민주정의당 전당대회 및 차기 대선 후보 지명식에서 "민정당은 국민에게 (情)을 주는 당, 통일민주당은 국민에게 고을 주는 당"이라고 말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3][4] 이 발언이 터져나왔던 장소는 잠실실내체육관이었으며, 그날은 1987년 6월 10일이다.


2.2. 제5공화국 헌법[편집]


파일:external/www.pa.go.kr/img_photo0810.jpg
제5공화국 헌법은 1980년 10월 22일 국민투표를 거쳐 10월 27일 개정되었다. 현행 제6공화국 헌법은 1987년 10월 29일 개정되었다. 제2공화국 다음으로 가장 짧은 체제. 전두환이 투표 직전에 "기권은 반대보다 더 나쁘다!"고 극언을 했던 까닭에 투표장에 환자가 앰뷸런스를 타고 나타나서 투표를 하고 간 것이 대서특필되었던 미담 아닌 미담이 있다. 다만 국민 눈치를 아예 안 본 것은 아니어서 이전처럼 개헌절차를 거치고 임기연장을 하는 수법을 하지 않고 대통령은 무조건 단임으로 하기로 했다.

다만 본인의 임기는 단임으로 하되 후술하듯이 자신의 영향력 안에 있는 사람을 다음 대통령으로 내세워 이른바 '상왕'처럼 군림하려는 꾀를 냈다. 원안에서는 대통령 임기를 6년 단임으로 했는데, 전두환이 숫자는 럭키 세븐이라며 7년 단임으로 슬그머니 고쳤다. 여하간, 단임이란 점을 누누이 강조했다. 그리고 강제로라도 약속은 지켜서 임기가 끝나자마자 조용히(?) 물러났다.[5]

대통령 선출 방식은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제[6]. 당시 전두환의 측근들 중에는 그냥 직선제로 가자는 사람들도[7] 많았지만 결국 간선제를 택했다고 한다.

국회의원 선거 방식은 전국 92개의 중대선거구 지역구에서 최다와 차다 득표자를 뽑고(184명), 지역구에서 받은 의석에 비례해서 비례대표인 전국구를 92명 뽑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지역구 제1당이 비례대표의 2/3인 61석을 무조건 먹는다. 즉 여당이 전 지역구에서 2등 안에 들어 지역구 절반을 먹고 들어간다 + 여당이 지역구에서 제1당이 되지 않을 리가 없으니, 61석을 먹는다 = 여당이 5/9인 153석, 즉 150석 언저리는 먹고 들어가므로 여당은 결코 과반(총 의석 276석 중 138석)을 놓칠 수 없다. 이를 두고 11대 총선 당시 민정당 초대 대표위원 이재형(야당에서 변절해 5공에 참여했고 12대 국회의장이 되었다)은 "지역구와 전국구를 다 합쳐 봤자 55%밖에 안 되는데 무슨 비민주적이라는 거냐."라고 발언했다. 1985년 제12대 총선에서는 선명야당을 표방한 신한민주당이 돌풍을 일으키면서 득표율은 신민 29.3% + 민한19.7% = 49.0% > 민정 35.2% 였는데도 민정당이 148석[8]을 차지하여 과반을 넘겼다. 만약 전국구를 지역구 득표율에 따라 정확히 배분했다면 신민+민한 120석 VS 민정 119석이 될 수 있었는데, 이것만 봐도 선거제도가 얼마나 엉터리였는지 잘 알 수 있다.

2.3. "2중대, 3소대"로 전락한 관제 야당[편집]


게다가 야당은 안기부에서 만든 관제 야당이었다. 3김[9]으로 대표되는 유력 야당 정치인은 정치 활동이 금지되어 1985년에야 해금되었다. 구 신민당 계열의 민주한국당(2중대), 구 민주공화당 계열의 한국국민당(3소대), 그 외 신정치사회당, 민권당, 농민당, 민족당, 거기에 민주사회당(사회민주당) 등의 진보 정당까지 만들었다. 참고로 2중대, 3소대라는 조롱에서 민주정의당은 1대대였다. 진정한 야당이 생긴 것은 1985년 1월 신한민주당이 창당되면서부터라 할 수 있다.

심지어 1981년 국회의원 선거 당시 민주정의당으로 공천신청을 했더니 제1야당 민주한국당 후보로 공천된 사례도 있다. 당시 보안사령부가 모든 정당의 공천작업을 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10] 야당의 당직 임명도 전부 안기부에서 챙겼다. 한마디로 여/야 모두 정권의 꼭두각시였던 셈이다. 자세한 건 민주한국당 참조. 이것이 어원이 되어서 현재에서도 특정 단체/집단/커뮤니티의 멀티라는 의미를 비꼴 때도 이 2중대라는 용어가 가끔 쓰인다.[11]

당시 민한당 총재였던 유치송의 회상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창당 후 야당총재들이 전두환 대통령의 초청으로 청와대에서 조찬을 한 적이 있다. 전씨 앞에서는 야당이라는 용어를 쓸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대화 중에 야당총재와라는 말을 무심코 썼더니 전씨가 "야당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1.2.3 당이지요."라고 정색을 했다. 전씨의 이 말에 아무런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고, 또 그러는 야당총재도 없었다.'


실제로 여야라는 표현은 국론분열을 부추긴다며 나라일을 사이좋게 함께 논의하는 친구 정당이라고 "우(友)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3. 대외관계[편집]


  • 대미관계
미국과의 관계는 대체로 돈독했는데, 전두환은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대소정책에 부응하여 한-미-일 삼각군사동맹체제를 강화하며 전술핵무기 배치, 팀 스피릿 훈련 강화 등 긴장고조 정책을 추진하며 전임 정권 때 추진했던 자주국방 정책도 포기했다. 이에 따라 당시 민주세력 사이에선 '한반도 핵 볼모화' 우려가 커져갔고, 미군 주둔비용도 늘어나 1986년 존 위컴의 미 의회 증언 기준으로 매년 10억 불로 늘어났다. 더군다나 1980년대 중반경부터 미국의 압력으로 농/축산물 수입이 개방돼 농민들도 경제적 타격을 받았다. 이에 따라 반미운동 핵심도 미국에 정치/군사/경제적으로 종속돼 있다는 구조적/역사적인 면이라는 걸 운동권들로 하여금 깨우치게 했다.

그러나 미국 내에서는 전두환 정권을 향한 비판이 계속되었다. 이미 1979년 12.12 쿠데타 때부터 미국측과 사전협의를 거치지 않아 마찰이 심했고, 박정희가 집권말에 미국과 마찰을 겪어 무너진 거라는 걸 안 전두환은 미국의 요구를 전적으로 수용해 대미관계를 회복했다.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 관련해선 레이건 대통령이 전두환 방미를 조건으로 김대중의 사형을 반대했고, 1985년 김대중이 귀국할 때 그를 걱정해 따라온 미국 정치 인사[12]들과 안기부 요원들 사이에 몸싸움마저 있었다. 미국 정계 인사들이 김대중과 동행한 이유는 바로 전 해에 비슷한 경로로 귀국했던 필리핀 정객 아키노가 공항에서 마르코스에 의해 암살되었기 때문에 김대중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한국 경찰과 안기부 요원이 김대중을 데려간답시고 미국 인사들에게까지 무력을 행사한 데 대해 미국 내부적으로 매우 언짢아 했을 뿐만 아니라, 엘살바도르 주재 미국대사를 지낸 로버트 화이츠는 "한국 경찰이 저 모양인데, 3년 후에 미국인들이 안심하고 서울 거리를 다닐 수 있을지 의문이다."라는 말까지 하며 전두환 정권을 무안의 극치로 몰아넣었다. 안 그래도 5.18 민주화운동으로 인해 전 세계에서 비난을 퍼붓던 시기였다. 중국도 천안문 사태 때문에 국제사회의 온갖 비난과 제재를 받아야만 했다.

  • 대일관계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 때처럼 미국뿐만 아니라 일본과도 관계가 깊었는데, 1983년 1월 나카소네 방한 및 11월 레이건 방일/방한을 계기로 '안보경제협력'이란 명분하에 7년간 40억 불씩 받도록 합의했다. 이를 전후해 1982년 일본 문부성의 역사교과서 왜곡사건이 터지면서 반미뿐만 아니라 반일투쟁도 더해갔다. 전두환 정부 출범 이전에도 광주민주화운동 진압에 대해서 옹호하는 듯한 외무성 발언이 드러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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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의사회 구현에 앞장선다고 '사회정화위원회'라는 행정부서를 전국 읍면동 단위까지 만들었다. 주로 각종 관변 캠페인에 앞장서고 각 지역 유지들 한자리용이었고, 1980년~1981년에는 삼청교육대 잡아들이기 용이기까지 했다. 민주화 이후 1989년에 해체되어 구성원은 '바르게살기운동중앙협의회'라는 민간단체에 흡수됐다.[2] 이후 김영삼3당 합당을 통해 당권을 잡고 민주자유당, 신한국당, 한나라당을 거쳐 새누리당이 되었다가 자유한국당, 바른정당으로 갈라지게 된다. 그리고 바른정당은 다시 바른미래당, 새로운보수당을 거쳐 미래통합당 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자유한국당과 다시 합쳐지게 되고 이것이 현재 국민의힘으로 이어졌다.[3] "일요일 밤의 대행진"(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전신)을 진행하면서 현재 유재석이나 강호동, 신동엽 이상의 인기를 누렸던 코미디언이었으나 이 발언으로 전국민의 공분을 샀으며 그 이후 거의 연예계 생명이 끝났다고 할 정도로 타격을 받았고, 조용히 지내다가 SBS 개국 때 옮겨갔다. 그러나 당시 SBS로 옮겨간 원로급 코미디언이 다 그렇듯이 폐기처분된다.[4] 다만 이는 엄연히 정권과 MBC의 기획으로 만들어진 대사였으며, 실제 김병조 본인은 대본을 보는 순간 매우 당혹스러웠다고. 리허설 때 이 모습을 지켜본 정권 관계자는 "그 부분이 곤란하면 빼라."는 말을 했으며 결국...[5] 사실 전두환은 내각제로 바꿔서 수상도 해볼까 고려했고, 후엔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으로 막후 실세, 사실상의 대통령 노릇을 하려고 했지만 후임인 노태우가 뒤통수를 쳤다. 결국 전은 백담사에 칩거했다가, 김영삼이 당선되자 친구와 함께 얄짤 없이 감옥으로 들어갔다.[6] 개선 된 게 있다면, 이번엔 선거인단에 야당이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여당이 전체 선거인단의 53.1%, 친여무소속이 31.8% 입후보한 데 비해, 제1야당은 전체 선거인단의 12.5%만이 입후보해서 선거인단 선거 자체가 형식적인 절차였다. 전두환은 90.2%의 득표율로 당선.[7] 사실 이게 실현됐다면 전두환을 처리하기는 훨씬 어려워졌을 공산이 크다. 어쨌건 위법하게라도 국민의 신임을 어느 정도 얻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박정희정권은 5.16으로 헌법을 무효화 시켰지만,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를 통하지 않고 직선제를 통해 윤보선과 대선에서 경쟁 후 당선되었다. 이후에도 제3공화국존속 중에는 국민들에게 돈을 뿌리긴 했지만 직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직을 연임했다. 물론 이후 10월 유신으로 도루묵. [8] 지역구 87 + 전국구 61.[9] 김대중,김영삼,김종필 [10] 창당은 여당은 보안사, 야당은 안기부/ 여하간 해당 후보는 걱정할 거 없다. 2등까진 다 붙으니까.[11] 대표적인 건 김용갑 의원이 2000년에 사용한 사용한 "조선로동당 2중대"로서 북한의 멀티, 친북파라는 표현이다. 웃기는 건 김 의원 개인은 5공의 핵심인사로서, 이 표현을 다시 띄운 대표인사가 되었다는 것이다.[12] 민주/공화 양당의 상원의원은 물론이고 전직 외교관, 학자들이 대거 동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