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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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박시창.jpg

출생
1900년[1] 11월 5일
경기도 시흥군
(現 서울특별시 금천구)
사망
1986년 6월 7일 (향년 85세)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본관
밀양 박씨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2. 독립운동
2.3. 광복 이후
3. 일화
4. 여담
5. 연표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군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2대 대통령 박은식의 아들[2]이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편집]



2.1. 초년기[편집]


1900년 11월 5일 경기도 시흥군(現 서울특별시 금천구)에서 태어났다. 그는 생부 박해겸(朴海謙)의 슬하 3남 5녀 중 막내아들이자 다섯째로 출생했고, 유아 시절 한양과 인천 제물포, 경기도 파주, 양주 일대에서 지내기도 했다. 1904년 2월 경기도 시흥에 귀향하여 성장하다가 아버지가 일찍 죽자 1905년 11월 1일 6살 때에 아버지 박해겸의 6촌 형인 박은식에게 입양되었고, 이후 황해도 해주에서 성장했다. 1911년 4월 모친이 사망했고, 5월에는 박은식이 조선을 떠나 만주 서간도로 망명했다. 이 때문에 어린 시절 6살 위의 의붓누나이자 박은식의 하나뿐인 친딸인 박영애의 집에서 지내야 했던 박시창은 1916년 서울 오성학교를 졸업한 뒤 부친의 지인을 따라 해삼위(海蔘威)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부친 박은식과 수년만에 극적으로 상봉했다.

1919년 3월 노령(露領)에서 3.1 운동 소식을 접했고, 얼마 후에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같은 해 9월 부친과 함께 하얼빈을 거쳐 상하이로 갔다. 그는 1921년 10월 부친 박은식, 박경산, 박태하, 황훈, 최중호, 김문세, 이영운 등과 함께 <사민보>를 발행했다. 사민보는 배일의식을 고취시키는 기사를 게재하며 3만여 부를 발행했고, 그 중 2천여 부는 한국 내로 보내졌다. 박은식은 사민보의 주필을 맡아 항일논설을 게재하고 이순신 전기를 연재했다.


2.2. 독립운동[편집]


1923년, 난징 중앙대학에 입학했지만 몇달 후 휴학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생활고 때문에 학비를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상하이로 돌아온 그는 조선인청년동맹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1925년 11월 부친 박은식이 서거하자 상하이에서 거행된 장례식에 참석한 그는 1926년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인 황포군관학교 제5기 포병과에 입교했다. 1926년 7월 국민당의 1차 북벌이 개시되자, 그는 국민혁명군 포병대에 편입되어 북벌에 참가했다. 그해 10월 국민혁명군이 우한에 입성한 뒤 황포군관학교 우한분교가 설립되었다. 그는 다른 학생들과 함께 우한분교에 입학했고 1927년 7월 졸업 후 중국군 장교로 지내는 동시에 한국의 독립 운동에 참여했다.

우한분교 재학 시절 친분을 맺었던 진공목, 진갑수, 안재환, 김영재, 송욱동, 장기준, 그리고 중국 기술교관으로 있던 백득림, 홍의균, 권준, 전창무, 노세방 등과 같이 무한한인혁명청년회를 조직했다. 이 조직은 점점 확장되어 후에 의열단 무창지부로 발전했다. 또한 1928년 난징의 군관단(軍官團)에 입대했으며, 1929년에는 국민혁명군 경위군(警衛軍)에서 8년 동안 복무했다. 경위단은 나중에 제 87사단으로 개명되었는데, 제87사단은 당시 국민혁명군 중 손에 꼽히는 정예부대였다. 1932년 일제가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일으켰을 때, 박시창은 제 87사단 소속 중대장으로서 참전하여 2달 동안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일본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밀려 후퇴했다.

1935년, 김구의 중국군관학교 입교생 모집 활동에 적극 협력했다. 그는 노태연, 염온동과 함께 낙양에 배치되어 연락원으로 활동하며 그 일대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중국군관학교에 입교시키려 노력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독립운동가 최중호의 딸 최윤신과 결혼했고, 계속 중국군에서 복무를 했으며 1937년 노구교 사변 당시 중국군 포병연대장으로 보정에 주둔하고 있기도 했다. 이후 1941년 김홍일과 함께 육군대학에 입교했다.[3] 당시 한국인으로서 육군대학에 입교한 이는 그와 김홍일, 그리고 최용덕 뿐이었다.

1942년 5월 조선의용대 일부가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었을 때, 당시 조선의용대 대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그 역시 광복군에 편입되어 광복군 제1지대 장교로 활동했으며, 1943년 8월에는 광복군 총사령부 고급참모에 선임되었다. 또한 민족혁명당에 가입하여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4년 10월,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그와 문일민을 광복군 참모부 참모로 임명했고, 그는 그해 12월까지 참모로 재직했다.


2.3. 광복 이후[편집]


1945년 8.15 광복 후, 광복군은 일본군에 동원되었던 한인 청년들을 편입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는 귀국 후 대한민국 군대의 기초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박시창은 광복군 상하이 잠편지대의 지대장에 임명되어 상하이 및 인근 일대 한인 교포들의 생명, 재산을 보호했고 병사들의 귀국 알선에도 진력했다. 또한 1945년 10월 7일엔 광복군 총사령부 판사처장 김학규와 함께 광복군 총사령 지청천 장군에게 특파단 활동 상황과 일본군에 동원되었던 한인 청년들을 편입시키는 일에 대해 보고했으며, 10월 10일에 상하이 호강대학에 집결한 한인 사병 6천여 명의 사열식을 진행했다.

그러나 광복 후 남한에 설치된 미군정이 광복군이 군대로서 편제를 유지하여 귀국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자, 중국 국민정부 역시 1945년 12월 광복군의 확군 활동을 금지했다. 결국 박시창은 장병 및 교민들과 함께 개인 자격으로서 1946년 7월에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후 대한민국 국군에 입대해 중령 계급을 수여받고 1948년 신설된 제 16연대 연대장을 맡았으며, 1949년에는 제102여단장[4]을 역임했다. 6.25 개전 이후 1950년 7월에는 1군단 민사참모(대령)가 되었으며 흥남철수작전에서는 1군단 예민참모로 많은 활약을 하였다. [5]

1951년 3월에는 제103사단장 (노무사단), 1954년 전북병사구사령관을 지냈고 1955년 6월 2일에 김근배, 조재미 등과 함께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1956년 1군단 부군단장(준장) 을 거쳐 1959년 6월 3군단 제직 시 육군 소장으로 33년의 군생활을 마무리한다.

박 장군의 군 경력(중국군 상교, 포병연대장 경력) 대비 한국군에서의 임관계급(대위)이 낮았고 초기 보직(연대장) 등에 비추어 이후의 진급과 보직이 다소 늦거나 한직이었는데 이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과 장군의 선친인 박은식 선생과의 불화가 원인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6]

육사 3기 동기이자 광복군 동지이며 중국군에서 후배 장교 였던 최덕신이 부친인 최동오가 납북 후 김일성에게 대우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950년에 준장, 53년에 소장으로 진급하였고, 부정부패 혐의로 예편했으나 육사동기이자 황포군관학교 동기인 채원개도 그가 연대장이나 호국군 여단장에 머물렀을 때 육군 준장으로 3사단장을 역임했다. 심지어 그보다 육사에 늦게 입교한 이준식역시 1952년 소장으로 진급한 것을 봤을 때 같은 광복군 및 중국군 출신들에 비해서도 대우받지는 못한 편이었다.

이후 1972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고, 1976년 제5회 광복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대동기업 고문 등을 역임하다 1986년 6월 7일 서거했다. 향년 86세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박시창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1986년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3. 일화[편집]


1937년 7.7 사변 (노구교 사건) 당시 보정에서 포병연대장을 맡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그곳 국부군 군단장이 류안치 였는데 후에 중화민국 육군 참모총장 자리에 오른 사람이다. 언젠가 그가 서울에 방문을 했는데 김신 장군이 주선하여 박시창 장군과 함께 자리를 가졌다고 한다. 그때 류 장군이 과거를 회상하며 "아이고 내가 박시창 장군 때문에 여러번 혼이 났습니다" 라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연유를 알고보니 류 장군이 군단장으로 보정에서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을 때 휘하 포병연대장이었던 박 장군이 유독 일본군의 도발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강하게 대응하더라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보정에는 크고 작은 일이 항상 벌어졌다고 한다. 박 장군이 일본군의 작은 도발에도 강경하게 대응한 것은 일본과 중국이 싸움을 하는 것이 독립운동 하는 데 유리한 상황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4. 여담[편집]


  • 아들 박유철은 1938년 상하이에서 태어났으며 미국과 영국에서 공부한 후에 단국대학교 이사장, 국가보훈처장, 광복회 회장 등을 맡았다.

  • 김재규, 박정희와 친분이 있었다. 김재규가 복무하던 여단에 부여단장으로 근무하던 중 군경체육대회에서 김재규가 경찰, 미군과 충돌하자 김재규와 함께 사임하였다. 박시창은 부인 최윤신이 유동열 통위부장에게 항의하자 복직했으며, 박시창이 김재규에게 수 차례 편지를 보내 복직할것을 설득하자 군에 돌아갔다. 김재규는 이 일로 박시창에게 고마워했고 박정희에게 박시창에 대해서 좋은 이야기를 많이했다. 박정희도 7사단장 복무 중 사단 보급창고 화재로 문책을 받게 됐을때, 진상조사단장인 박시창이 조사 후 책임을 묻지 않는 선에서 마무리 지었다. 박시창 본인의 발언에 의하면 박정희가 본인을 존경했다하며, 나이가 많지 않았다면 5.16 군사정변을 같이하자고 제의했을 것이라고 하였다. 박정희 정권인 1972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고 1976년에 광복회 회장이 되었다.


5. 연표[편집]


1900년 11월 5일 경기도 시흥군 출생
1916년 경성부 오성학교 졸업
1919년 입시정부 합류
1921년 부친 박은식, 박경산, 박태하, 황훈, 최중호, 김문세, 이영운 등과 함께 <사민보>를 발행했다
1925년 중화민국 중앙육군군관학교인 황포군관학교 제5기 포병과에 입교
1926년 국민당 북벌 참가
1927년 황포군관학교 우한분교 졸업후 국민혁명군 장교로 입관
1928년 난진 의군관단(軍官團) 편입
1929년 국민혁명군 경위군(警衛軍) 복무
1935년 노태연 염온동과 함계 낙양에서 중국 거주 한인들을 중국군관학교에 입교시키는 활동을 함
1942년 5월 광복군 제1지대 장교로 활동
1943년 8월 광복군 총사령부 고급참모 선임
1944년 10월~12월 광복군 참모부 참모 임명
1945년 8월 광복이후 중국 본토에서 일본군에 동원되었던 한인 청년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는 작업에 착수
1946년 7월 귀국및 조선 국방 경비대 입대
1947년 3월 국방 경비대 졸업 이후 1달뒤 소령진급 제2연대 제2대대장 으로 근무
1948년 11월 25일 16연대장 취임
1949년 5월 호국군 102 여단장 9월에 대전 지구 사령관 영전
1950년 한국 전쟁 직전 충청남북도 위수사령관 7월 1군단 민사 부장
1950년 12월 1군단 민간참모 역임 흥남 철수 작전 당시 육로로 피난민 대피 작전 참여
1951년 한국 근무단 103사단장 역임
1954년 전라북도 위수 사령관
1956년 제1군단 부군단장
1959년 6월 소장으로 예편
1972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1976년 5월 제5대 광복회 회장 역임
1963년 건국 훈장 독립장 수여
1989년 6월 7일 노환으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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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적상으론 1903년[2] 양아들이다. 원래는 7촌 조카. 박은식은 친아들이 모두 어린 나이에 요절하여 양자를 들일 수밖에 없었고, 당시 6촌동생이 사망하였기에 그 아들을 입양한 것이다. 친자녀가 총 2남 3녀였으나, 1명 빼고 모두 어릴때 사망하여 성인까지 생존한 친자녀는 막내딸 박영애(1894~1986) 1명 밖에 없었다. 아내도 병으로 일찍 사망해서 혼자 산 기간이 길며 독립운동 말년에는 가족 중에서는 양아들 박시창하고만 활동했다.[3] 중국군 상교[4] 6.25 직전 사라진 호국군 여단으로 육사 8기 특1기 고위 장교들을 중심으로 호국군 여단장으로 임명했다.[5] 예민참모는 그 직무에 의해 민간인 피난민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을 것이다. 그는 피난민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 등을 제공하고 그들의 탑승을 지원하는 일을 담당했다. 박 대령과 함께 민사부장으로 유원식 소령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증언하는 사람이 있으며, 또한 헌병참모 김득모 소령이 피난민 관리와 통제에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6] 6.25 전쟁 후 미군이 참전하면서 백선엽 등 젊은 장교들이 핵심요직을 차지하고, 김홍일, 김석원, 이응준, 백홍석 등 고령의 군 원로들이 후방보직 및 한직으로 물러나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일본군 중국군 출신의 구별이 없었으며 1903년 생인 박시창 역시 고령으로 한직으로 밀려난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