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민(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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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회휘장.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영등포구 을)
제16-18대
권영세

제19-20대
신경민


제21대
김민석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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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 남성 앵커

김성수

신경민

권순표
주말 남성 앵커
정길용

신경민

정동영



대한민국 제19·20대 국회의원
신경민
辛京珉 | Shin Kyoung-min


파일:민주당 신경민.jpg

출생
1953년 8월 19일 (70세)
전라북도 전주시
본관
영월 신씨[1]
현직
사단법인 연대와 공생 부이사장
거주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장미아파트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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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부인 정순옥[1], 슬하 1남 1녀
학력
전주고등학교 (졸업 / 48회)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사회학 71 / 학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언론학 / 석사 과정 수료)
병역
육군 중위 만기전역
종교
불교
소속 정당

의원 선수
2
의원 대수
19, 20
약력
MBC 기자
MBC 뉴스데스크 주말앵커
MBC 보도국 국제부장
MBC 보도국 부국장
MBC 보도국 국장대행
MBC 보도국 논설위원
MBC 뉴스투데이 평일앵커
MBC 워싱턴 특파원
MBC 보도국 선임기자
법조언론인클럽 부회장
외교통상부 자문위원
MBC 뉴스데스크 평일앵커
이화여자대학교 겸임교수
민주통합당 대변인
제19대 국회의원 (서울 영등포구 을 / 민주통합당)
제19대 국회 후반기 정보위원회 간사
민주당 수석최고위원
새정치민주연합 수석최고위원
더불어민주당 서울시당 위원장
제20대 국회의원 (서울 영등포구 을 / 더불어민주당)
더문캠 방송토론본부장
제20대 국회 전반기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간사
제20대 국회 전반기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간사
필연캠프 상임부위원장


1. 개요
2. 생애
2.1. 언론인 시절
2.2. 정치인 시절
3. 논란
4. 여담
5. 선거 이력
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직 언론인, 전직 국회의원이다.

대한민국의 제19대~20대 국회의원이며 지역구는 서울 영등포구 을 지역이고, 현 소속 정당은 더불어민주당이다.

정계 입문 이전에는 MBC 뉴스데스크에서 앵커를 했던 언론인으로, 이명박 정부 시기에 뉴스데스크 앵커를 하던 시절 폐부를 찌르는 클로징멘트로 각광을 받았다가 앵커보직에서 내려오게 된 후 최고참 평기자[2]로 근무하다 MBC를 정년퇴직한다. 그가 MBC 뉴스데스크 앵커직에서 내려온것은 이명박 정부가 넣은 외압 때문이라는 말들이 많았다.

MBC를 정년퇴직한 후에는 쉬다가, 2012년 19대 총선민주통합당에서 공천을 받아 서울 영등포구 을 지역에 출마해 대한민국 제19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리고 20대 총선 때 같은 지역구에서 재선 도전에 성공했다.

2021년에는 이낙연 대선 캠프에서 활동했다.


2. 생애[편집]



2.1. 언론인 시절[편집]


1953년 8월 19일 전라북도 전주시에서 아버지 신현근(辛鉉根, 1925. 10. 2 ~ )과 어머니 함평 노씨(咸平 魯氏) 노정환(魯正煥, 1930. 6. 28 ~ 2020. 12. 10)[3] 사이에서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신현근 또한 언론인으로, 전북일보 편집국장 및 주필, 전북도민일보 사장을 역임했다. 전주고등학교(48회)[4],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사회학과(71학번)[5]를 졸업하였다.

대학 졸업 후 1981년에 문화방송 공채 기자로 입사하였고, 1993년부터 1994년까지 MBC 뉴스데스크 주말 메인 앵커를 담당하였다.[6] 1980년대에는 평일 뉴스데스크나 아침뉴스에 간간히 출연해 보도국에서 국내외 속보나 단신을 전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88년에 백지연 앵커가 맡을 때까지 이는 계속되었다.[7]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인 1987년 1월 15일에 방송된 MBC 단신보도에서 해당 사건을 전하기도 했다.

어제 낮 12시쯤 서울시 용산구 갈월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21살 박종철군이 갑자기 쓰러져 병원으로 옮기다가 숨졌읍니다.[8]

숨진 박군은 서울대 민민투 책임자로서 수배중인 사회복지학과 박종운군을 숨겨준 혐의로 어제 오전 경찰에 연행됐었읍니다. 지금까지 간추린 뉴스였읍니다.


1996년에는 선거방송인 MBC 선택 96(1996년 15대 총선)의 진행을 맡았다.



1997년에 삼성문화재단의 후원을 받아 해외연수를 다녀왔고, 1998년 9월부터 1999년 4월까지는 김주하 앵커와 같이 MBC 뉴스투데이의 진행을 맡았다.

2000년부터 워싱턴에서 특파원으로 근무했다. 2003년 귀국하여 국제부 부장과 보도국 부국장을 거쳤으며, 2005년에는 강성주 보도국장 경질에 따라 보도국장 직무대리직을 수행했다. 그 해 보도본부 논설위원이 되었다. 2006년에는 보도국 선임기자(국장급)가 되었으며, 2007년에는 법조언론인클럽의 부회장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또한 MBC 표준FMMBC 뉴스의 광장의 진행을 2007년 3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맡았다. 그리고 그 해 12월 19일 17대 대선 중계방송인 MBC 선택 2007을 단독진행했다.

그리고 드디어 2008년부터 엄기영 앵커가 사장으로 승진하면서 MBC 뉴스데스크 평일 메인 앵커를 담당하게 되었다.[9] 이때 진행하면서 남긴 촌철살인 같은 클로징 멘트로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10]

(박혜진 : 여대생 머리를 짓밟는 군화와 직사 물대포에서 공권력의 정당한 집행은 읽을 수 없었습니다. 경찰 수뇌의 다급함과 피곤한 전경의 화풀이만 보였습니다.) 이렇게 많은 열성 시민이 주말 새벽부터 밤까지 왜 그랬을까요? 만약에 배후가 있었다면 이런 시민을 동원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정부와 경찰이 아직도 디지털시대와 시민 분노를 이해하지 못하고 7080식으로 대처했습니다.

- 2008년 6월 2일 뉴스데스크 클로징.


(박혜진 : 요즘 인터넷 경제논객 미네르바로 시끄럽습니다. 찬반논란이 있고 월간지에 기고가 실리고 비난방송까지 나왔습니다.) 이렇게 된 까닭은 그의 분석이 정부보다 더 정확하고 논리적이기 때문입니다. 누구인지 찾아내고 입을 다물게 하기보다는 미네르바의 한수에 귀를 기울이는 게 맞아 보입니다.

-2008년 11월 18일 뉴스데스크 클로징.


그러나 2009년 4월 이명박 정부에 대해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뉴스데스크 앵커직에서 강제로 하차당했고, 2010년에는 김재철 사장 선임에 반대하면서 취재와는 상관없는 부서인 논설위원실로 전보되었으며, 2011년 9월 국장급 논설위원을 끝으로 퇴사하였다.[11]

회사 결정에 따라서 저는 오늘 자로 물러납니다. 지난 1년여 제가 지닌 원칙은 자유, 민주, 힘에 대한 견제, 약자 배려, 그리고 안전이었습니다. 하지만 힘은 언론의 비판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아서 답답하고 암울했습니다. 구석구석과 매일매일 문제가 도사리고 있어 밝은 메시지를 전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희망을 품은 내일이 언젠가 올 것을 믿습니다. 할 말은 많아도 제 클로징 멘트를 여기서 클로징하겠습니다.

-2009년 4월 13일 뉴스데스크 클로징.



2.2. 정치인 시절[편집]


뉴스데스크 앵커로서의 유명세와 당시 이명박 정부에 의해 앵커직에서 강제 하차된 언론탄압 피해자 이미지가 겹쳐지면서 민주당의 강력한 러브콜을 받았다. 2010년 7월 재보선에서 민주당은 한나라당 중진이자 정권 실세인 이재오를 잡기 위해 서울특별시 은평구 을 출마를 권유했으나 본인이 거절해 무산되었다.

하지만 2011년 9월에 MBC에서 정년퇴임한 이후에는 이화여대 겸임교수를 하다가 스스로도 MBC 계열 기자 출신이 많던 민주통합당[12]에 2012년 1월에 입당하여 정치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민주통합당 대변인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치러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막판까지 공천 지역이 정해지지 않았지만[13], 결국 새누리당의 현역의원인 친박 권영세가 버티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을 선거구에 전략공천을 받아 출마하게 되었다. 여러모로 공천을 잘했고 명분 및 실리적으로도 출마하기 좋은 상황었다는 평이 많았다. 이유는 본인이 기자가 된 이후 30여년 동안 거주한 곳인 데다 본인이 MBC 출신이고 그 당시엔 자신의 친정인 문화방송이 영등포구 여의도동에 소재해 낙하산 논란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14]

원래는 비례대표로 출마하려 했으나, 출마 당시 정부의 방송장악을 비판하고 공정방송을 요구하는 KBS, MBC 기자들의 파업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고 정부와 여당은 탄압으로 일관하고 있어 이에 대한 대항마 및 저지를 위해 이 문제를 이슈화하고 정당성 확보라는 명분을 이유로 언론계를 중심으로 지역구로 출마하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당장 본인부터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적인 클로징 멘트로 인해 정부와 여당에게 찍혀 외압으로 인해 강제로 메인 앵커에서 하차했으니... 이에 고민하다 결국 지역구 출마로 선회한 것이고 그것을 부각하기 위해 공천했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그러다보니 전략공천인데도 반발하는 모습은 전혀 없었으며 야권 연대로 인해 통합진보당 후보가 알아서 양보해 1:1 대결이 되었다.

선거 초반에는 이 지역 현역 3선의 새누리당 권영세 의원에게 밀렸지만 자신의 유명세를 활용하면서 52.61% 득표율로 역전에 성공해 그를 꺾고 당선되었다. 권영세의 패인은 당 사무총장 및 공천관리위원회 부위원장이라 중앙당의 공천 업무에 매달리다 보니 지역구에 상대적으로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15] 이를 신경민이 비집고 들어온 것.

2013년 5월 민주통합당 전당대회에서 수석최고위원에 당선되었다. 2014년 3월 민주통합당의 후신인 민주당이 새정치연합과 합당하여 새정치민주연합이 되자 초대 수석최고위원으로 활동하였다.

2016년 2월 25일,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에서 연설을 하게 되었다. 과거 자신의 어린 시절과 언론인의 인생을 회고하는 것으로 연설을 시작했다. 언론인 출신답게 아주 날카로운 지적이 이어졌다.

2016년 4월 13일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 영등포 을 후보로 재출마하여 35,221표를 득표(41.05%)하며 재선에 성공했다. 지난 19대에서는 일대일 대결에서 승리한 것과 달리 이번에는 17대까지 이 지역에서 출마해 권영세에게 간발의 차로 패한 김종구 후보가 국민의당으로 출마해 18.7%나 표를 잠식했지만, 상대적으로 권영세도 주중 한국대사관 대사로 나가는 등 지역구에서 오래 활동하지 못한 약점도 있었던 것도 있어 재선에 성공했다. 선거 당시 서울특별시당 시당위원장을 역임하며 무려 35석을 차지하는 괴력을 보여주는 등 당내 입지가 더 넓어졌다고 평가된다.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 당시 문재인 후보의 선거대책위원회 TV토론본부장을 맡았다.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3선 도전을 선언했으나 김민석에 패해 경선서 탈락하였다. 만일 공천되었다면 같은 MBC 출신인 박용찬과 맞붙을 뻔했으나 실현되지는 못했다.


3. 논란[편집]



3.1.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경선 불복[편집]


상술했듯이 신경민은 민주당 내에서나 당 지지자들한테 결코 이미지가 나쁜 정치인이 아니었다.

그런데 21대 총선을 앞두고 자신의 지역구에서 김민석과 경선을 하게 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공천 면접에서 '좀비', '철새' 등의 표현으로 김민석의 과거 행적을 비난했고 여기까지는 선거를 앞둔 정당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볼 수 있으나 중앙일보에서 마치 권양숙 여사가 민주당 공천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말을 한 것처럼]] 비춰지는 기사까지 나게 만들었다.

그런데 경선 결과 김민석이 신경민을 꺾는 이변이 발생했다. 이후 민주당 후보가 된 김민석은 신경민에게 2번이나 전화통화를 시도했지만 신경민은 끝내 민주당의 공천 결정 과정에 문제가 있었음을 암시하면서[16] 공개적으로 경선 불복을 선언했다. 또한 다른 지역구에 선거 지원을 가도 본인 지역구 영등포구 을은 절대가지 않았으며, 사전투표일에도 "지역구민들이 저런 함량미달의 후보를 찍게 되어서 내가 다 미안함"이라는 요지의 트윗으로 뒤끝을 팍팍 남겼다.[17]

이후 지금까지 각종 방송에 상대 진영인 미래통합당 김영우, 정의당 박원석 전 의원 등과 함께 패널로 출연하고 있는데 주로 자기 친정인 민주당, 특히 이재명계를 비판하는 발언을 많이 하고 있다.

4. 여담[편집]


  • 2009년 4월 16일 오마이뉴스 기사, 2009년 4월 23일 전북일보 기사신석정 시인이 신경민 의원의 "작은 할아버지"로 소개되는 기사가 종종 있다. 그러나 2019년 11월 24일 전북일보 기사에서 신경민 의원이 직접 "신석정 시인은 저의 유년과 청소년 시절 꽃이 가득한 윗집의 조부 항렬 할아버지였다"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실제로 신석정이 부원군파(府院君派) 31세 석(錫) 항렬, 신경민이 부원군파 33세 경(京) 항렬로 신석정이 신경민에게 조부뻘이 되는 것은 맞으나, 족보상으로 26촌 지간이나 차이가 난다. 신경민 의원의 작은 할아버지는 심석(心石) 신영엽(辛泳曄, 1911. 4. 10 ~ )씨이다.

5.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1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영등포 을

[[민주통합당|
파일:민주통합당 연두 로고타입.svg
]]

45,458 (52.61%)
당선 (1위)
초선
2016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파일:더불어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35,221 (41.05%)
재선


6.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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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 남성 앵커

최우철

신경민

손석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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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주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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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원군파(府院君派) 33세 경(京) 항렬.[2] 정확히는 국장급 선임기자와 국장급 논설위원. 둘 다 데스크 보직은 아니다.[3] 노계미(魯季美)의 딸이다.[4] 정동영 민주평화당 의원과는 전주고 48회 졸업생 동기이다. 다만 MBC에 입사한 것은 정동영이 1978년으로 3년 선배이다.[5] 이해찬, 은수미 의원이 사회학과 동문이다. 신경민은 71학번, 이해찬 의원은 71년 서울대 공대에 입학하였다가 사회학과 72학번으로 다시 입학, 은수미는 82학번이다.[6] 후임으로 온 앵커는 고교, 대학 동창인 정동영이다. 여담으로 1993년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당시 뉴스데스크 시작하면서 끝날때까지 깊은 빡침이 느껴지는 표정으로 보도를 했다.[7] 백지연 앵커가 뉴스데스크에 출연하기 전에는 서브앵커없이 정동영, 신경민 등 젊은 기자들이 서브앵커역할을 돌아가면서 맡았었다.[8] 당시 맞춤법으로는 '읍니다'가 맞다.[9] 다만 바로 앵커가 된 것은 아니고, 한동안 김성수 보도국장이 진행을 맡았다. 2008년 3월에 보직을 서로 맞바꿔서 김성수 앵커는 표준FM의 뉴스의 광장(08:00~08:30)을 맡게 된다.[10] 최일구가 해학적이고 유머러스한 느낌이었다면, 신경민은 굉장히 날카로우면서도 냉철한 느낌의 멘트를 주로 하였다.[11] 2003년 4월 4일 오전 9시 38분 빌 게이츠 사망 오보사건 당시 김장겸 기자가(전 MBC 사장, 이때는 국제부 소속 기자였다) 팩트체크 없이 멋대로 가짜뉴스를 보도국 측에 전해 대형 오보를 일으켰었다. 이후 징계위원회에 회부됐으나 신경민 국제부장이 보도국에다가 열심히 하다가 그런 거니 한 번만 봐달라며 사정사정한 덕에 간신히 경고조치로 끝난 적이 있다. 그런데 정작 김장겸은 신경민 의원이 앵커 하차 압박을 받을 당시 회사를 위해 물러나라며 설전을 벌인 적이 있다고 한다[12] 정동영을 시작으로 이득렬(새천년민주당 창당준비위원), 박영선과 노웅래가 들어왔으며, 이후 최문순 사장이 2008년에, 2011년에 신경민이 들어왔다. 이후 박광온김성수도 들어온다.[13] 본인 고향인 전북 전주시 지역이나 서울 중구 지역이 공천이 거론되기도 했었다.[14] MBC는 2014년에 마포구 상암동으로 이전했다.[15] 전국 선거는 졌으나 수도권은 확실히 이명박 정부에 대한 심판 바람이 불었다. 새누리당은 수도권에서 43:69로 야권에게 졌다. 그리고 다음 선거에서 서울특별시는...[16] 이 역시 낙천한 정치인의 고정 레퍼토리이다.[17] 일반적으로 초반 공천을 불복하더라도 정치적 재기를 도모하기 위해선 후반에 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다반사이나 끝까지 화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