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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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대 문화방송 대표이사 사장
엄기영
嚴基永 | Eom Ki-young


파일:attachment/엄기영/UKY.jpg

출생
1951년 9월 5일[1] (72세)
강원도 인제군
(현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신체
174cm, 63kg, O형
본관
영월 엄씨
현직
월드비전 세계시민학교 명예교장
보다나은미래를위한 반기문재단 이사
재임기간
제28대 파일:MBC 로고(2005-2011).svg 대표이사 사장
2008년 2월 29일 ~ 2010년 2월 8일
제15대 한국방송협회 회장
2008년 3월 28일 ~ 2009년 3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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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아내 윤희복, 슬하 1남 1녀
학력
평창국민학교[1] (졸업)
춘천중학교 (졸업)
춘천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2] (사회학 / 학사)
소속 정당

경력
1974년 파일:MBC 로고(1969-1974).svg 입사
파일:MBC 로고(1986-2005).svg 보도제작국장 (1998.3.~1999.3.)
파일:MBC 로고(1986-2005).svg 보도국장 (1999.3.~2000.2.)
파일:MBC 로고(1986-2005).svg 보도본부장 (2000.3.~2002.2.)
파일:MBC 로고(1986-2005).svg / 파일:MBC 로고(2005-2011).svg 특임이사 (2002.3.~2007.2.)
파일:MBC 로고(1986-2005).svg / 파일:MBC 로고(2005-2011).svg 뉴스데스크 평일앵커 (1989.10.~1996.11., 2002.1.~2008.2.)
제28대 파일:MBC 로고(2005-2011).svg 대표이사 사장 (2008.2.~2010.2.)
제15대 한국방송협회 회장 (2008.3.~2009.3.)
경기문화재단 대표이사 (2012.4.~2014.9.)
병역
대한민국 육군 이등병 제대[3]
종교
개신교

1. 개요
2. 언론인 경력
2.1. 기자
2.3. MBC 사장
3. 정치 경력
3.1. 정치 성향은?
3.2. 소속 정당
3.3. 선거 이력
4. 이후 행보
5. 수상 경력
6. 여담
7. 출처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직 언론인.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출신으로 춘천고등학교(41회),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1974년 MBC기자로 입사하여 메인 뉴스 앵커, 보도국장, 보도본부장을 거쳐 사장 자리까지 올랐다.

뉴스데스크 앵커를 무려 13년 3개월(1989년 10월 9일 ~ 1996년 11월 8일 / 2002년 1월 1일 ~ 2008년 2월 1일) 동안 맡아서, 대한민국 역사상 최장수 앵커라는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2010년 MBC 리서치에서는 '뉴스데스크 하면 가장 떠오르는 남자 앵커' 부문에서 70%의 득표를 했다.

2. 언론인 경력[편집]



2.1. 기자[편집]


파일:egy.jpg

"파리에서 MBC 뉴스 엄 기영입니다."

파리 특파원 시절 리포트 마무리 멘션. 포인트는 "엄" 과 "기영"을 끊어서 읽어주는 것.


기자 생활 중에 꽤 파란이 많았는데, 1977년 9월에는 설악산을 취재하고 김포국제공항으로 복귀하다가 경비행기 추락 사고로 거의 죽다 살아났고 본인이 밝히길 이 사고로 뇌를 다쳐 2개월 간 식물인간 상태였다고 했다. 이 때 비행기 조종사와 부조종사는 안타깝게도 사망하였다.

1985년 2월부터 1988년 8월까지는 프랑스 파리 특파원을 역임하며 뉴스 마무리를 항상 센 강변에서 하여 화제를 모았다. 이때 흩날리는 머리에 바바리코트 차림이었기에, 기자의 로망으로 불리며 기자 지망생들의 선망을 얻었다.

2.2. 뉴스데스크 앵커[편집]


파일:newsdesklogo_kor.png
평일 남성 앵커

추성춘/차인태

엄기영 (1989~1996)

이인용
권재홍

엄기영 (2002~2008)

김성수


파일:1989년 엄기영 앵커.png

파일:1996년 엄기영 앵커.png
1989년 10월 9일, 첫 진행 모습 (38세)
1996년 11월 8일, 마지막 진행 모습 (45세)
파일:2002년 엄기영 앵커.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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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월 1일, 복귀 후 첫 진행 모습 (50세)
2008년 2월 1일, 마지막 진행 모습 (56세)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앵커 엄기영의 대표적인 멘션


1988년 8월에 편집부 차장으로 복귀했으며, 1989년 10월에 추성춘 전 앵커(논설위원)의 후임으로 만 38세의 나이로 뉴스데스크의 앵커로 발탁[2]된 이후 1996년 11월 8일까지 7년 가량의 긴 기간 동안 진행을 맡았다. 파트너 김은주 전 앵커와 함께 앵커직에서 물러났다.

1989년 10월 ~ 1993년 4월은 편집1부 차장직을, 1993년 4월 ~ 1996년 10월까지는 앵커자리와 편집1부 부장직을 겸임했다. 다만 편집부장직은 이후에도 부국장 승진 이전까지 수행했다.

이후 1997년 4월에 보도국 부국장(정치부장 겸임)으로 승진했으며, 1998년에는 보도제작국장, 1999년에 보도국장으로 승진했고, 다시 2000년 3월[3]에 보도본부장(이사)으로 승진하여 보도본부장직을 역임하다가[4] 2002년 1월 1일부터 약 5년 2개월 만에 다시 앵커를 맡아 2008년 2월 1일까지 6년 가량 계속 뉴스데스크의 앵커 자리를 지켜왔다.

2002년을 끝으로 김종오 전 보도국장에게 보도본부장직을 넘기고 특임이사로 직책이 바뀌었다. 2003년 김중배 전 사장이 사퇴하자 전임 보도본부장이었던 고진과 더불어 사장 후보에 공모했으나 이긍희 대구MBC 사장에게 밀렸다. 따라서 뉴스데스크 앵커 직도 유임되었다.

2007년부터는 아예 프리랜서로 전환되어 부사장 대우를 받았다.[5] 이후 MBC 사장직에 재도전을 선언하면서 뉴스데스크 앵커직에서 물러났다. 2008년 2월 1일, 엄기영 앵커의 마지막 날엔 뉴스데스크에서 고별 뉴스를 마련해줬다.

최일구 앵커만큼은 아니지만 클로징 멘션으로 종종 이슈가 되는 말을 자주 했다. 최일구 앵커보다는 훈계적인 성격이 더 강하긴 했지만 이전 앵커들은 "뉴스 마치겠습니다"와 같은 간단한 멘션으로 끝마치다 보니 더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유명한 유행어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였다. 이 말을 박명수를 비롯하여 여러 개그맨들이 엄기영 앵커의 성대모사를 할 때 사용했다.

하기야 엄기영 앵커가 앵커직에 있던 때(1989년 10월 ~ 1996년 11월)는 구포 무궁화호 열차 전복 사고를 시작으로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 사고,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성수대교 붕괴 사고,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에 이어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까지 터지는 등 대형 사건들이 워낙 많이 일어났던 때인지라 저런 말이 안 나오려야 안 나올 수 없을 것이다. 결국 계속되는 대형 참사에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 당시엔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후진국형 참사가 계속 돼야만 합니까?" 로 뉴스를 시작한 적이 있다.[6] # 골 때리는 것은 이로부터 불과 두 달이 지나고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일어났다.

그래도 복귀 후 첫 해인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때는 광주월드컵경기장에서 당시는 한국 축구 대표팀이 4강에 진출하는 좋은 성적을 낸 뉴스를 보도해서인지 여태까지에 비해서 늘 밝은 표정이었는데 대회 진행에 따라 한국 대표팀이 계속 승리하고 다음 단계로 올라갈수록 더욱 그런 표정을 지으며 뉴스를 보도했다. #

하지만 그의 앵커 생활에도 흑역사가 있는데, 2007년 7월 26일, 샘물교회 선교단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에 관한 뉴스를 전해주다 화면이 특파원 쪽으로 넘어가기 전에 무의식적으로 웃음을 짓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에 대해 네티즌들이 엄 앵커를 비판하고 옹호하는 싸움이 일어났는데, 결국 엄기영 전 앵커가 이에 대해 사과했다. #

2.3. MBC 사장[편집]


파일:external/cphoto.asiae.co.kr/2008031907271769489_6.jpg

최문순 전 사장의 임기가 끝나가던 2008년 1월 23일, 차기 MBC 사장 공모에 나가기 위해 뉴스데스크 앵커 하차를 선언했다. 2월 1일에 신종인(당시 부사장), 구영회(당시 삼척MBC 사장)와 함께 최종 후보로 올라 개별 인터뷰 및 무기명 비밀투표를 거친 후, 15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회에서 이 2명을 제치고 선임되어 29일에 정식 취임했다. 2009년까지는 한국방송협회 회장도 겸직하였다.

그의 사장 재임 시절 PD수첩에서 광우병 논란에 대해 다뤘다. 논란이 심하고, 현재 거짓으로 밝혀진 주제에 대해 다루다 보니, 한나라당에서 MBC측에 항의를 했다.[7] 심지어 2007년에 생긴 MBC공정방송노조(2노조) 측이 당사 보도가 좌편향이라며 비난의 각을 세운 데다 극우 단체까지도 MBC를 '좌파 선동 방송'이라며 항의 시위까지 하고 보수 네티즌까지 덩달아 '좌비씨'라고 비난했다.

2009년 김우룡 한국외대 명예교수[8]가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자리에 취임한 후 사퇴 압력이 더해졌고, 결국 2009년 12월 초에 엄 사장을 비롯한 임원들이 사표를 제출하는 일이 발생한다. 방문진은 엄 사장 및 일부 임원들의 재신임을 천명했고, 김세영 부사장(편성본부장 겸임), 이재갑 TV제작본부장, 송재종 보도본부장, 박성희 경영본부장의 사표를 수리했다.

2010년 2월 8일에 임기를 1년이나 남겼음에도 2달만에 다시 MBC 사장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했다. # 뉴 MBC 플랜이 특별한 성과를 내지 못한 책임이라고 알려졌다. # 엄기영이 사장직에서 물러나자 MBC의 암흑기가 시작되었다. 그의 사퇴를 시작으로 많은 아나운서와 기자들[9]도 파업 등으로 줄줄이 MBC를 퇴사했다. 그의 사임 이후 며칠간은 김종국 기획조정실장이 사장 직무대행을 맡다가[10][11] 당시 청주문화방송 사장이었던 김재철이 선임되었다.

이후 2010년에 방송된 뉴스데스크 40주년 특집에 참석했다.

3. 정치 경력[편집]


퇴임 이후 한나라당으로부터 계속 강원도지사 출마를 요청받았으나 거부해왔다. 하지만 이광재강원지사가 뇌물수수로 자격을 상실하여 열린 2011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 출마할 것이라는 세간의 예상이 끊이지 않았다.

2011년 3월 1일, 엄기영은 한나라당에 입당하고 강원도지사 보궐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공교롭게도 상대인 민주당 후보는 엄기영과 같은 MBC 사장 출신의 최문순이었다. 최문순은 엄기영보다 사장은 먼저 맡았지만 엄기영보다 나이가 5살 어리며 춘천고등학교와 MBC 입사 후배이다. (엄기영은 1974년 입사, 최문순은 1984년 입사)

엄기영 캠프는 강릉시의 한 펜션에서 불법적으로 전화 홍보원 30여 명을 동원해 불법 선거 운동을 하다 적발되었다. 엄기영은 선거운동원들이 자발적으로 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팬션과 휴대폰을 엄기영이 마련해줬기 때문에 설득력이 떨어졌다.

강원도지사 후보 토론회에서 앵커 출신이라는 점이 무색한 정도를 넘어서 횡설수설했다. 오죽했으면 MBC 후배였던 박영선민주당 의원이 엄 선배님, 왜 이렇게 바뀌셨습니까?라고 안타까워하기도 했으며, 최문순 후보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라는 엄기영의 명대사로 역공했을 정도였다.

MBC 기자 출신인 재야 언론인 이용마 전 기자가 생전에 남긴 증언에 따르면 엄기영은 정치부장 시절에도 차장에게 끌려다니기 일쑤였고, 회의 때도 상당히 조용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말 잘하는 진보 언론인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용마 전 기자는 사장 자리만을 평생 쫓아 온 것 같다고 분석했다.[12]

결국 투표 결과 엄기영은 득표율 46.56%로, 득표율 51.08%의 최문순에게 밀려 낙선하였고, 정계를 은퇴했다.

3.1. 정치 성향은?[편집]


결론적으로 엄기영은 딱히 민주당이나 보수 성향이라고는 재단하기 힘들다. 엄기영은 2006년에 정동영 전 의장[13] 체제인 열린우리당에서 강원도지사 후보 영입 시도를 받았으나 거절한 이력이 있었다.[14] 그리고 이명박 정부와 사사건건 대립하면서 MBC의 자율성을 지키려다 반강제로 퇴임했기 때문에 민주당과 최문순 전 의원이 후보 양보론까지 꺼내가면서 직접 영입을 시도할 정도였으나, 정직 엄기영의 퇴임 후 선택은 한나라당 입당이었다.

사실 엄기영 MBC 사장 시절 MBC 노조원들이 미디어법 개정안에 반대하는 파업을 두 차례 강행했으나 열흘을 못 넘겨 철회된 바가 있고, 여러 차례 민주당 영입설이 불거질 당시 그의 측근들은 엄기영이 한나라당 성향이라 반박한 적도 있다. 또한 1992년과 1996년에 MBC에서 파업이 일어났을 때 손석희, 백지연 등 다른 직원들이[15] 제작거부에 동참하거나 리본을 달면서 간접적으로나마 파업에 참여할 때 땜빵 방송을 맡았다. 그래서 20년 뉴스 보기에서 MBC 파업기간의 뉴스데스크 방송일자를 검색해보면 엄기영 앵커가 혼자 진행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반면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출구조사 때 진보 정당인 민주노동당이 10석 내외를 얻을 것이라는 예측조사가 나오자 "아! 대단합니다!" 라고 말하는가 하면, 2017년 8월에는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의 공영방송 장악사를 다룬 영화 공범자들의 시사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민주당도 보수 정당이 아닌 진보 정당 성향이지만, 말 그대로 고향에서의 표심 등을 생각하기도 한 기회주의자이기도 해서 보수 정당에 입당했다는 말도 있으나 이것도 확실한 것은 아니다.

2017년 9월 19일 미디어오늘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엄기영이 밝히기를, 우선 MBC 장악에 국정원이 개입한 사실은 본인도 얼마 전에 난 신문 기사를 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고 MBC 사장 시절 끝까지 버티지 않고 사임한 것은 나름대로 '관용'을 찾고자 했다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자신이 물러날 테니 이쯤에서 멈춰 달라는 의미였던 듯 하다. 후임 사장들(김재철, 김종국, 안광한, 김장겸)에 대해서는 "MBC 구성원들을 대하는 방식은 완전 잘못됐다. 기자·PD 하겠다고 온 친구들을…. 그들을 설득해서 함께 가야 했다. 내 뒤 후배 사장들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라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래서 엄기영 자신은 좌우성향이 없으며, 민주당으로 들어가면 오히려 MBC=친 민주당 방송사라는 이미지가 굳어질 것을 염려해서 반대로 한나라당에 들어갔다고 한다. "당시에 집권여당이었던 한나라당 소속인 자신을 강원도지사로 선택했으면 강원도 행정이 지금보다 더 순조로웠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엄기영과 개인적 친분이 있는 라디오 PD 김용민은 "엄기영의 고향 친구들이 전부 한나라당 성향이라 민주당으로 갈 경우 고향에서 지지를 못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한나라당으로 간 것이다" 라고 보았다.

아무튼, 엄기영이 선거에서 낙선한 이후부터는 더 이상 정계에 몸을 담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3.2.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svg

2011
정계 입문

[[무소속|
무소속
]]

2011 - 현재
탈당
낙선 후 정계 은퇴

3.3.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11
상반기 재보궐선거
(광역자치단체장)
강원도지사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svg

267,538 (46.56%)
낙선 (2위)
[16]

역대 선거 벽보


4. 이후 행보[편집]


김문수경기도지사의 임명으로 경기문화재단 대표이사를 맡았다가 2014년 7월 8일에 사임했다.

2018년 6월 6일, 2018년 재보궐선거 충청북도 제천시·단양군 선거구에서 자유한국당 후보로 출마한 같은 문중 사람인 엄태영[17] 전 제천시장의 지원 유세를 나섰다. 그러나 유세원 중 유일하게 자유한국당의 붉은색 점퍼를 입지 않고 양복을 입었으며, 지지 호소 발언에서도 후보와의 인연을 강조한 걸 보면 그저 친분이 있어서 유세를 도와준 것으로 보인다.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지원 유세를 하였다.

이후 박노숙 전 3군단장이 설립한 NGO 단체인 월드투게더에 영입되어 세계시민학교 명예교장이 되었다.

2020년 3월 국내 개봉한 영화 다크 워터스의 한 장면에 자료화면으로 깜짝 등장하였다. 극중 소송이 진행되면서 PFOA에 대해 보도하는 세계 각국의 뉴스 중 MBC 뉴스데스크의 한 장면으로 앵커 시절의 자료화면이 사용된 것. 이후 2020년 3월에는 원경환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후보 사무실 개소식에 참석했다.

5. 수상 경력[편집]


  • 한국방송60년 유공상 (1987)
  • 제23회 한국방송대상 앵커상 (1996)
  • 제11회 위암 장지연상 (2000)

6. 여담[편집]


  • 당시 MBC 관계자 등을 비롯해 방송계에서 인간성 좋기로는 유명했다. 예전에 EBS PD가 MBC에 취재를 간 적이 있는데, 다른 사람이 거만하게 대할 때[18] MBC 고위 간부였던 엄기영만큼은 깍듯이 대하면서 취재에 잘 협조해주었다고 한다. 나중에 이사직 역임 당시에도 평기자에게도 대우를 잘 해주었다고 한다.

  • 2005년 자사의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김삼식 역을 맡은 배우 현빈의 외모가 엄기영 자신의 젊은 시절 모습과 비슷해서 '옛날 삼식이'란 별명이 붙어 화제가 되었다.

  • 엄기영은 춘천시 출신이라서 평소에 고향 강원특별자치도를 위해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MBC 재직 시절부터 주변에 자주 피력했고, 사장 퇴임 이후에는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추진위원장을 맡은 바 있다. 이 시기에 평창 유치 홍보를 위해서 KBS아침마당에 출연한 적이 있었는데 자신은 KBS에 나오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고 한다.

  • 국어 강사 김동욱단모음이중모음을 설명하면서 엄기영 이야기를 꺼냈다. ㅚ와 ㅟ는 단모음이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중모음처럼 발음하는데[19], 엄기영은 불문과를 나왔기 때문에 제대로 발음한다는 것. 그러나 엄기영은 불문과가 아니라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프랑스에서 특파원을 한 것 때문에 혼동한 것으로 추측된다.

  • 황상무가 엄기영과 비슷한 점이 많다. 강원특별자치도·춘천고등학교·서울대학교 출신 언론인, 방송 기자, 지상파 뉴스 메인 앵커였고 보수 정당 소속으로 강원도지사 출마를 했다는 점[20] 등이 엄기영과 황상무의 공통점이다.


  • 엄기영 이후부터 최승호 이전까지 사장들은 전부 고려대학교 출신이다.


7. 출처[편집]


  • 한국언론 인물사전: 1883~2009 - 한국언론재단. 2009. p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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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1951년 8월 5일.[2] 이득렬 앵커 이후 2년간 강성구 논설주간과 추성춘 논설위원이 뒤를 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백지연 아나운서는 계속 자리를 지켰다. 엄기영이 뉴스데스크를 맡기 직전에는 차인태 아나운서가 임시 앵커였다.[3] 보도국장직을 김상균에게 넘겼다.[4] 그 사이 뉴스데스크는 이인용 앵커(1996년 11월 11일 ~2000년 10월 27일)와 권재홍 앵커(2000년 10월 30일 ~2001년 12월 31일)를 거쳤다.[5] MBC 이사의 임기는 6년을 초과할 수 없었기 때문에, 2000년에 이사로 승진한 그는 회사를 떠나야 했다. 그래서 MBC는 프리랜서가 된 그와 부사장급 대우로 계약을 맺은 것.[6] 당시 사고 현장에 파견된 기자는 훗날 정치인이 되는 정동영이다.[7] 공식적으로 MBC의 최대 주주는 특수법인 방송문화진흥회(약칭 방문진)이며 이사장 및 이사는 방송통신위원회에서 임명한다. 그런데 방통위원장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방통위원은 국회의석 비율에 따라서 추천한다. 따라서 구조적으로 대통령과 집권당이 공영방송에 개입할 수 있다. KBS도 마찬가지로 이사회 의원의 대다수를 정부 여당과 청와대에서 추천한 인물이 맡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역시 개입이 가능하다.[8] 1943년생. 1969년~1985년에 MBC PD로 근무했고 1987~2008년에 한국외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교수 시절에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1990~1993), MBC 시청자위원회 부위원장(2000~2001)을 지내며 친정인 MBC와 교류했다.[9] 김주하, 박혜진, 오상진, 최윤영, 문지애, 서현진 등 20명 가까이 떠났다.[10] 이후 김재철의 후임 사장으로 임명된다.[11] 김세영 부사장이 사직하는 바람에 부사장이 없었다. 그래서 3인자격인 김종국 기조실장이 대행을 맡은 것.[12] 앵커라는 자리 자체는 다른 사람과 토론이나 대화를 하는 자리가 아니다. 주어진 뉴스를 정제된 앵커 멘트를 덧붙여서 시청자들에게 전하는 자리이다. 더군다나 엄기영은 대담형 뉴스 프로그램 이전 시대 사람이다. 그래서 토론실력이 드러날 일도 없었다. 앵커 자리에서 은퇴한 이후에 정치권에 입문했고 그 과정에서 그의 처참한 토론 실력이 뒤늦게 부각되고 밑천을 드러낸 것.[13] 엄기영 전 앵커가 평일 진행을 하던 시절에 주말 앵커였었다.[14] 물론 이때 열린우리당은 지지율이 10%대였을 만큼 엉망이었고 승산도 없었다. 괜히 지는 선거에 고생하느니 안 나가겠다는 이름값 높은 이들과, 썩어도 준치라고 집권여당 공천장을 받기 위해 몰려드는 이들이 대조적이었다.[15] 친MB 인사인 김재철이나 후에 한나라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이 되는 한선교도 파업에 동참한 적이 있었다. #.[16] 전임자 이광재 도지사직 상실.[17] 엄태영의 아들은 MBC 아나운서인 엄주원이다.[18] EBS는 KBS, MBC 두 공영방송에 비해 영세하기 때문에 설립 이후 한동안은 두 회사에서 무시받는 경향도 없지 않았다. 다만 EBS의 권위가 낮았다기보다는, 당시 KBS와 MBC의 권위가 그만큼 높았다는 반증이다. EBS는 과거 KBS였고, 지금도 공영방송으로 한국 사회의 중추적 역할을 맡고 있다. 그러나 KBS와 MBC는 한때 우리나라 유이의 방송국이었고, 언론 지형이 다각화 된 지금도 최상위 언론으로 분류되는 둘의 위치는 과거엔 더 높았다.[19] 어느 쪽으로 발음해도 규정 상 문제는 없다. ㅚ는 단모음으로 발음할 경우 ㅞ와 비슷하게 들린다.[20] 다만 엄기엉은 본선에서 패배하였지만 황상무는 경선에서 탈락하였다는 점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