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석(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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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회휘장.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영등포구 을)
제13-14대
나웅배

제15-16대
김민석
[1]

제16-18대
권영세
제19-20대
신경민

제21대
김민석


현직

파일:국회휘장.svg 대한민국 국회 보건복지위원장
제21대 전반기
한정애

제21대 전반기
김민석


제21대 후반기
정춘숙















대한민국 제15·16·21대 국회의원
김민석
金民錫 | Kim Min-seok


파일:김민석 프로필.jpg

출생
1964년 5월 29일 (59세)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신길동[1][2]
거주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시범아파트
본관
경주 김씨
현직
제21대 국회의원
더불어민주당 포용국가비전위원장
더불어민주당 영등포구 을 지역위원장
일본경제침략대책특위 부위원장
미국 뉴저지주 변호사
서명
파일:김민석(정치인) 서명.svg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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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부인 이태린[1]
딸 김비단(1993년), 아들 김희단(2005년)[2]
김민웅, 김민화[3]
학력
숭실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사회학 / 학사)
하버드 대학교 케네디스쿨 (행정학 / 석사)
칭화대학 법학원 (중국법 / 석사)
럿거스 대학교 로스쿨 (법학 / J.D.)
병역
면제 (수형)[4]
종교
개신교 (기침기성)[5]
소속 정당

지역구
서울 영등포구 을
의원 선수
3
의원 대수
15, 16, 21[6]
소속 위원회
보건복지위원회
경력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
전국학생연합 의장
민주당 총재단 특별보좌역
새정치국민회의 당무위원
제15대 국회의원 (서울 영등포구 을 / 새정치국민회의)
새정치국민회의 총재 특별보좌역
엠네스티 국회 총무
제16대 국회의원 (서울 영등포구 을 / 새천년민주당)
새천년민주당 대변인
새천년민주당 총재 비서실장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새천년민주당 서울특별시장 후보
민주당 제17대 대통령 선거 경선후보[7]
민주당 최고위원
통합민주당 최고위원
민주당 최고위원
제2대 민주당 공동대표[8]
제3대 민주당 대표[9]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특보단장
제19대 문재인 대통령 후보 종합상황본부장
제6대 민주연구원장
미국 뉴저지주 변호사
제21대 국회의원 (서울 영등포구 을 / 더불어민주당)
제21대 국회 전반기 보건복지위원회 위원장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회 의장
더불어민주당 포용국가비전위원장

1. 개요
2. 생애
2.1. 학생운동 시절
2.2. DJ계로 정계입문
2.3. 정치적 역풍과 첫 실패
2.4. 김민석 그리고 노무현
2.4.1. 2002년 대선 과정에 대한 본인의 주장
2.5. 고난의 정치 여정
2.6. 복귀
3. 논란
3.2. 불법 정치자금 수수
3.3. 미투 2차 가해 논란 비서관 채용
3.4. 코로나 검사 새치기 논란
3.5. 산업은행 부산이전 관련 발언 논란
4. 여담
5. 소속 정당
6. 선거 이력
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정치인이다. 제15대, 16대, 21대 국회의원이다. 극적인 정치적 부침과 오랜 야인 생활을 거친 정치인이다.


2. 생애[편집]



2.1. 학생운동 시절[편집]


1964년 5월 29일,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신길동에서 3형제 중 막내로[3]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본 유학 시절 결혼했다. 1982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했으며,[4] 4학년 때인 1985년 서울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돼 전국대학 총학생회 연합체인 '전학련' 의장으로 활동하는 등 1980년대 초의 학생 운동을 주도하였다. 1985년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및 삼민투[5] 사건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5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 받고 3년간 복역하였고, 1988년 사면으로 출소했다.

학생운동 활동이야말로 정치인 김민석의 행보에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수감 중 작은형 김민화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김수환 추기경의 노력으로 귀휴 조치되었고 이때 조문객으로 찾아온 김대중을 만났다. 당시 김민석의 어머니 김춘옥 여사는 교통사고 사망 보상금으로 "민화의 집"을 설립하여 구속자 가족과 수배학생들을 돌보았고, 김대중과 김영삼 부부가 민화의 집 개소식에 함께 참석할 정도로 "김민석 어머니"에 대한 신망이 높았다고 한다. 어머니 김춘옥 여사는 김민석이 옥고를 치르는 동안 구속자가족협의회를 설립하였고, 재야단체인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약칭 민가협) 초대 의장이 되었다.


2.2. DJ계로 정계입문[편집]


1990년 3당 합당 이후 이기택 등이 주도한 꼬마 민주당에 입당하면서[6] 정치에 입문하였다. 이후 이기택의 민주당과 김대중의 신민주연합당이 합당한 민주당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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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민주당 당수이던 DJ에게 상품성을 높이 평가 받아 약관 27세의 나이로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을 선거구에 공천되어 출마하였다. 김대중의 전폭적 지원에 민주자유당 나웅배 후보에게 불과 260표차로 안타깝게 낙선하면서 화려하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보수 성향이 강했던 여의도동에서 표차가 크게 벌어진 게 패인이었다지만, 애초에 상대 후보인 나웅배는 상공부 장관과 경제부총리, 3선 의원을 역임한 여당의 중진 인사였다. 이런 거물을 상대로 27살짜리 정치 신인이 고작 260표차로 낙선했다는 건 당선 못지 않은 영광인 셈이다.

1993년 KBS 아나운서 김자영과 결혼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1994년 1월부터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 석사과정을 한 학기 이수한 뒤 하버드 대학교 케네디스쿨로 옮겨 행정학 석사[7] 학위를 취득하고 1995년 귀국했다.

1995년 지방선거에서 조순 서울시장 후보 선거대책본부의 기획실장 및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그 후 김대중의 정계 복귀로 인한 민주당 분당 과정에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다시 서울 영등포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한국당 최영한(최불암) 의원을[8] 꺾고 31세의 나이에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 당시 김민석은 유세 중 "유권자 여러분께서 저 김민석을 선택해주신다면 1등 국회의원1등 연기자를 동시에 살릴 수 있다"는 말을 하면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김민석은 이 선거의 당선을 계기로 제15대 국회의원 중 최연소 의원이었다.

1997년 한보그룹 청문회 때는 돋보이는 논리와 질문으로 청문회 스타가 됐다. 제15대 대선 때는 단독으로 김대중 후보의 선거 광고를 찍을 정도였다.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 이후로는 여야를 막론하고 자타가 공인하는 '김대중의 정치적 아들'로서 압도적 포텐셜을 인정받는 사람이 되었다.

1999년에는 새천년민주당 창당준비위 대변인으로서 창당 작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같은 해에 외곽 지원조직인 '젊은 한국'을 결성, 차세대를 의식한 행보를 계속해 나갔다. 1999년 10월에는 영문 시사주간지 '아시아위크'에 의해 아시아의 새천년 젊은 지도자 20인에 선정되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재선에 성공하며 386세대의 대표주자 위상을 확보했다. 2000년에는 세계경제포럼이 선정한 미래를 이끌어갈 세계 지도자 100인에 선정돼 주목을 받았다. 이 때만 해도 김민석의 정치 인생은 순풍에 돛을 달고 무난하게 순항할 것만 같았다.


2.3. 정치적 역풍과 첫 실패[편집]


386세대의 대표 주자로서 탄탄대로를 걷고 있었지만, 2000년 5·18 기념식 전날 벌어진 이른바 새천년 NHK 사건으로 도덕성에 흠집이 생겼다. 이 사건은 김민석을 포함한 386세대 정치인 전부에게 상당한 이미지 훼손을 가져왔다.

2000년 12월 `권노갑 2선 후퇴' 요구를 계기로 민주당이 쇄신 파문에 휩쓸렸을 때, 정풍운동을 주도하던 천신정에 맞서 "질서 있는 쇄신"을 주장하면서 동교동계에 편승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2001년 당내 대선 후보 여론조사 2위[9]에까지 오르며 유력 정치인으로 각광받았다. 그 결과,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이상수를 경선에서 누르고 새천년민주당의 서울시장 후보가 될 수 있었다. 대선 후보 여론조사 2위인데 왜 대선 대신 서울시장에 나섰냐면, 2002년 기준 만 38세라 대통령 후보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헌법에서 대통령 출마의 자격은 만 40세 이상에게만 주어진다.[10]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11]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초반 우세를 보였으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친인척 비리, 측근 비리 문제로 여론이 급속히 악화되면서 분위기는 박빙으로 흘렀고, 결국 개표 결과 이명박 후보에게 10%가 넘는 큰 차이로 패배해버리고 말았다. 그 후 이명박은 승승장구하며 대통령까지 되었음에 반해, 김민석은 이때를 기점으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2.4. 김민석 그리고 노무현[편집]


지방선거 패배 이후 새천년민주당의 대선 후보였던 노무현의 지지율이 떨어지자,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목전에 둔 2002년 10월 17일 갑자기 민주당을 탈당하고 정몽준 캠프로 이적하면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고, 철새 정치인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생겨났다. 김민새라는 별명까지 생겨났을 정도. 아무튼 이때까지만 해도 김민석 본인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여유있게 "새들도 저 때문에 피해를 많이 봤다."라고 말하는 상황이였다.

당시 대선후보 지지율은 노무현이 17%, 정몽준, 이회창이 각각 30%를 넘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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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김민석의 탈당은 의외의 후폭풍을 몰고 오는데, 지방선거 참패와 후단협의 흔들기, 월드컵 이후 정몽준의 급부상 등으로 계속 폭락하던 노무현 지지율이 반등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관망하던 개혁성향 유권자들이 노무현에 대한 동정심리 등을 이유로 재결집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면초가에 놓여있던 노무현 캠프는 다시금 활기를 찾았고, 이후 정몽준과 후보단일화하겠다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한다. 지지율이 상승세로 반등했으니 여론조사로 붙어도 정몽준을 누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다.


2.4.1. 2002년 대선 과정에 대한 본인의 주장[편집]



2016년 10월 7일 방송분

김민석은 더불어민주당에 복귀한 뒤 2016년 김어준의 파파이스 115화에 출연해 당시 상황에 대해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계속 떨어지는 상황에서 이회창 후보의 승리를 저지하기 위해 후보단일화가 필요했다. 노무현후보가 단일화를 반대하는 상황에서 여론조사에 의한 후보단일화를 만들어내고 민주당으로 복당하겠다고 성명을 내고 정몽준 캠프에 합류했고 실제 정후보를 설득해 여론조사 단일화를 성사시켰다. 당내 대부분이 단일화의 필요성을 얘기했지만 실제로 이를 위해 움직인 사람이 본인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단일화를 통해 이회창 후보에 대해 승세를 굳혔으나 유세 마지막 날 정몽준의 지지철회 파동 때문에 대선 후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고 해명했다.

파파이스에서 "왜 정몽준에게 갔느냐"는 질문에 "정몽준에게 가서 단일화를 시켜도 대선에 이기면 이후에 결과로 평가될거라 생각했고 워낙 대선승리가 절박했다", "누가 봐도 단일화가 없으면 지는 상황이었다"며 이회창이 되면 남북관계가 급속히 냉각되거나 단절된다는 정치적 공포가 있었고 서울시장 낙선 이후 북한에 유학생을 보내는 사업을 하고 대선에 관여하지 않으려 했는데 대선판세가 급격히 안 좋아져 고심끝에 행동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자서전에서 "김민석의 행동은 충격이었고, 단일화를 위한 합리적 충정이었을 수 있으나 본인은 아주 어렵게 되었다."는 취지로 기록한 것에 대해 감사하다고도 말했다.

"단일화 이후에는 왜 돌아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는 당시 단일화 이후에는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고 대선이 다 끝나고 돌아가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대선이 끝나면 어차피 정치적 상처가 생겼으니 잠시 정치를 떠나 유학할 의사를 주변에 피력했다고 한다.


2.5. 고난의 정치 여정[편집]


결국 "가출했던 아들이 집에 돌아온 심정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국민통합21을 탈당한 뒤 2003년 새천년민주당으로 복당했지만, 이후 출마하는 선거마다 고배를 마셨다. 당장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영등포구 갑으로 지역구를 옮겨 출마했지만, 한나라당 고진화 후보에게 패배했고, 심지어 열린우리당 김명섭 후보에게도 밀리면서 3위로 낙선하는 수모를 당했다.

그가 새천년민주당에 복당한 시점은 2003년 11월 4일로 열린우리당 창당 일주일 전이었는데[12] 차라리 새천년민주당 복당 대신 열린우리당 입당을 선택했다면 당장 17대 총선에서부터 재기에 성공했을지도 모를 일. 노무현과 척을 졌던 송석찬, 김명섭, 송영진 등도 열린우리당에 합류했던 만큼 김민석이라고 가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실제로 우상호, 임종석, 송영길 등 김민석을 제외한 386 정치인들 대다수는 열린우리당으로 가서, 그 후 우상호는 4선 의원에 20대 국회 전반기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임종석은 문재인 정부 초대 대통령 비서실장, 송영길은 인천광역시장을 거쳐 더불어민주당 제5대 대표를 역임했다.

이후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예비후보로 경선에 뛰어들었지만, 이인제 후보에 밀려 2위로 탈락하였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서울시장 선거 당시 회계 문제로 컷오프를 당했지만 승복하고 불출마한 뒤 오리알 유세단을 이끌었고, 그 후 치러진 전당대회에서 통합민주당 최고위원에 2위로 당선되며 부활하는 듯 했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불법 정치자금 수사가 발목을 잡았고 당시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를 비난하며 당사에서 한 달간 농성을 벌였지만 끝내 구속되고 말았다.

후술할 불법 정치자금 수수 논란으로 2015년까지 피선거권 상실과 벌금형이 확정되었다.

대법원 심리가 진행 중이던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부산광역시장 출마를 선언했지만, 경선에서 김정길대한체육회장에게 밀렸다.

공백기 중에 2010년 칭화대학 중국법 석사, 2011년 럿거스 대학교 로스쿨 J.D. 과정을 마쳤다.

안철수, 김한길새정치민주연합 출범으로 민주당 당명이 사라지자 민주당의 이름과 전통을 지킨다며 2014년 원외 민주당[13]을 창당하고 당대표로 취임했다.

이후 원외 민주당 간판으로 20대 총선에 비례대표로 출마했지만, 2위로 낙선하면서 국회 복귀에 또 실패하였다.


2.6. 복귀[편집]


2016년 10월 원외 민주당이 더불어민주당에 흡수통합되면서 더불어민주당 소속이 되었다. 그 후 문재인 대통령 후보 종합상황본부장, 민주연구원장을 거쳐, 2020년 21대 총선을 앞두고 자신의 옛 지역구이자 정치적 고향인 서울 영등포구 을에 출마를 선언했다.

해당 지역구 재선 현역인 신경민 의원과 겨룬 경선에서 승리하면서 2000년 16대 총선 이후 20년 만에 민주당 후보로 총선에 도전하게 됐다. 지상파 출구조사에서는 미래통합당 박용찬 후보에 1.4% 차(김민석 46.9% vs 박용찬 48.3%)로 밀리는 것으로 나왔으나, 실제 개표에서는 50.3%의 득표율로 낙승하면서 국회 복귀에 성공했다. 2002년 서울시장 출마를 위해 의원직을 사퇴한 뒤 정확히 18년 만의 원내 복귀이다.[14]

그가 낙선한 17대 총선부터 재기에 성공한 21대 총선까지 연달아 당선된 사람들이 현재 무려 5선이다. 더불어민주당에서는 김진표, 변재일, 조정식, 안민석, 이상민[15] 등이, 국민의힘에서는 주호영[16], 조경태[17] 등이 있다. 그리고 김민석 의원이 재선 의원일 때 초선 의원으로 16대 국회에 들어온 박병석은 그 이후로 다섯 차례 내리 당선되어 제21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이었다. 즉, 의장보다도 정치 경력은 선배라는 얘기. 만일 계속 영등포에 있었으면 55세에 7선 국회의원이었을 수도 있다. 참고로 14대 총선에서도 낙선했는데, 만일 이 때도 당선됐으면 8선 국회의원[18] 즉, 김영삼 전 대통령, 김종필 전 총리, 박준규 전 국회의장 다음으로 높았을 것이다[19] 만일 그랬다면 21대 국회 최다선 의원이 되어 전반기 의장은 박병석이 아닌 김민석이 되었을지도 것이다. 더불어서 권영세의 국회 입성이 좀 더 늦어지거나, 아예 국회에 들어올 일 자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20]

2021년 3월 50인을 모아서 간호법 수정안을 대표발의했다.

2021년 6월 16일, 민주당의 대선 후보로 정세균 전 총리를 공개 지지선언했다. #

2022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이후 더불어민주당 대표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에 당대표 후보로 출마하여 호남 지역을 대상으로 한 일부 여론조사에서 호남 출신 박용진 후보를 제치고 2위를 기록하는 등의 저력을 보였으나 비이재명 후보들이 난립하면서 결국 컷오프되었다.

2023년 3월 27일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회 의장에 임명되었다. #

2023년 9월 26일 더불어민주당 새 원내대표를 뽑는 3인 선거에서 결선투표에도 들지 못하며 패배하였다.[21]

3. 논란[편집]



3.1. 새천년 NHK 사건[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새천년 NHK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2. 불법 정치자금 수수[편집]


2009년 3월 지인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 7억 2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과 함께 추징금 7억2000만원을 선고받았다. 이후 2심에서 벌금 600만원으로 형량이 낮아졌다.

2010년 8월 대법원에서 2심 판결이 그대로 확정되면서 2015년까지 피선거권을 상실하였다. 당시 선고받은 추징금 7억2000만원 중 1억원가량만 납부하고 6억2600만원을 12년 후인 2020년 총선 출마 당시까지 납부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3.3. 미투 2차 가해 논란 비서관 채용[편집]


김민석, 미투 '2차 가해' 논란 보좌진 채용
김민석 의원, '미투 2차 가해 논란' 비서관 채용…"성비위 사건 무관용 원칙 어디갔나"

2020년 6월 17일 만화계성폭력대책위와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김민기 의원실의 5급 비서관인 A씨가 성폭력 혐의를 받는 박재동 화백 편에서 2차 가해를 했다며 비서관 기용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논란이 일었다.

김민석 의원은 비서관 A씨가 명예훼손이나 모욕, 저작권법 위반, 상습협박 등에 대해 무혐의 또는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며 임용을 취소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고 이후 당사자 간 재판을 신중하게 지켜보고 결론을 낼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3.4. 코로나 검사 새치기 논란[편집]




김민석 의원은 9월 2일 오전 9시 10분 쯤 코로나19 검사를 받으러 서울의 한 병원을 찾았다. 당시 검사를 받기 위해 시민들은 줄을 서 있었는데, 김 의원은 병원 측 안내를 받으며 바로 검사를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먼저 기다리던 시민들에게는 아무런 설명이 없었다고 한다.

병원 측은 SBS 취재진에게 "평소 코로나 검사에 대해 예약을 받지 않는다면서도 VIP나 응급환자에 대해서는 필요한 경우 먼저 검사를 받게 한다"며 "김 의원 측의 연락은 전날(1일) 받았다"고 밝혔다. 다만 병원 측은 '새치기 논란' 관련해 "당시 시민 5~6명 정도만 줄을 서 있었다"고 설명한 것으로 전해졌다.[22]

그러나 해당 병원은 영등포구 신길동 소재 성애병원으로 해당 병원은 유료 검사로만 진행이 되며 시간 예약을 받지 않고 시민 누구나 줄을 서서 검사를 받아야 한다.


3.5. 산업은행 부산이전 관련 발언 논란[편집]


산은 이전 막으며 꺼낸 부산 발전안이 돔구장? - 국제신문
산은 이전 반대하더니 돌연 “부산에 돔구장” - 부산일보

2023년 4월 18일 국회 기자회견에서 지방발전 방안 중 하나로 부산에 산업은행 이전 대신 도쿄 돔과 동급 혹은 그이상 규모의 돔구장 건설을 제시했다.

그런데 사직 야구장은 2025년 시즌 종료 후 철거하고 2029년 개장을 하기로 이미 확정했기 때문에 그냥 뻘짓이나 다름없는 발언이었고, 위 발언으로 인해서 민주당 정책위원장으로서 지방분권, 균형발전에 전혀 관심이 없다고 자백한 꼴이 됐다. 무엇보다도 부산에 돔구장 짓는것이 지역발전과 무슨 상관이냐는 것인데, 본인 지역구에 산업은행 본점이 있다보니 부산 시민들 눈에는 수도권 의원들의 기득권 수호로 보일 수 밖에 없는것.[23]



4. 여담[편집]


  • 정계 입문 자체를 매우 이른 나이에 했다. 1964년 생인데, 20대 후반의 나이에 14대 총선에 출마했고, 처음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15대 총선 당시만 해도 32세에 불과했을 정도로 젊었다.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출마를 위해 의원직을 사퇴했을 당시에도 겨우 38세였다. 그래서 2002년 지방선거에서 21대 총선까지 무려 18년간의 긴 공백이 있었음에도 2020년 기준 국회의원 전체 평균 정도인 50대 중후반이다. 즉 현재는 1964년 생이 평균이지만, 90년대에는 아직 청년이었다. 정치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 정치로 사회생활을 끝낸 김영삼과 유사한 케이스이다.


  • 1993년, 서울대 동창인 KBS 김자영 아나운서[24]와 결혼했다. 결혼할 당시 `운동권과 제도권의 결합', '한국의 케네디-재클린 커플' 이라며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1남 1녀를 두었으나, 2014년 12월에 이혼했다. 이후 2019년 12월 12일에 같은 교회(신길교회)에 다니는 이태린 씨와 신길교회에서 재혼했다.

  • 일본 고노 다로[25] 전 일본 방위상과는 오랜 친구 사이로, 일본 해상초계기 사건으로 한일관계가 급랭하던 때 도쿄의 모처에서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한 만남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 시사평론가 곽동수[26]는 자신의 유튜브를 통해 김민석이 철새가 아님을 주장했다. # 이걸 본 김민석 본인은 감동받아 크게 울었다고 하며, 이것을 자기 유튜브에 다시 올리기도 했다.

  • 중앙일보가 공개한 21대 국회의원 총 재산 액수 순위에서 뒤에서 2위를 기록했다. 신고된 액수는 -577,019,000원이다.[27] 참고로 꼴찌는 같은 당 진선미로, 그보다 약 2배나 더 채무가 많은 -1,147,271,000원. #[28]

  • 원래 이름이 '완석'이 될 뻔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성함인 '주완'에서 '완', 자신을 받아준 산부인과 의사 이름에서 '석'. 그러나 형들이 동생이 남의 아이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민'자 돌림으로 이름을 지어야 한다고 완강하게 주장해서 아버지는 자신의 이름자를 넣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고 한다.


  • 2023년 윤상현, 서삼석, 김성주, 김희곤과 함께 국회 솔버톤을 공동 주최하였다.[29] 주제는 기후 위기 및 환경 변화이며, 국내외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진행한다.


5.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파일:민주당 1990년 글자.svg

1990 - 1991
정계 입문

파일:민주당(1991) 글자.svg

1991 - 1995
합당[30]

[[무소속|
무소속
]]

1995
탈당[31]

[[새정치국민회의|
파일:새정치국민회의 흰색 로고타입.svg
]]

1995 - 2000
창당

[[새천년민주당|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00 - 2002
합당[32]

[[무소속|
무소속
]]

2002
탈당[33]

[[국민통합21|
파일:국민통합21 흰색 로고타입.svg
]]

2002 - 2003
창당

[[무소속|
무소속
]]

2003
탈당[34]

[[새천년민주당|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03 - 2005
복당

[[민주당(2005년)|
파일:민주당(2005년) 흰색 로고타입.svg
]]

2005 - 2007
당명 변경

파일:중도통합민주당 남색 글씨.svg

2007
합당[35]

[[민주당(2007년)|
파일:민주당(2005년) 흰색 로고타입.svg
]]

2007 - 2008
당명 변경

[[통합민주당(2008년)|
파일:통합민주당(2008년) 흰색 로고타입.svg
]]

2008
합당[36]

[[민주당(2008년)|
파일:민주당(2008년) 흰색 로고타입.svg
]]

2008 - 2010
당명 변경

[[무소속|
무소속
]]

2010 - 2014
당적 상실

[[민주당(2014년)|
파일:민주당(2014년) 로고타입.svg
]]

2014 - 2016
창당
정계 복귀

파일:더불어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2016 - 현재
합당[37]


6.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영등포 을

파일:민주당(1991) 글자.svg

48,151 (40.95%)
낙선 (2위)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49,657 (48.87%)
당선 (1위)
초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50,438 (60.39%)
재선[38]
2002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특별시장
1,496,754 (43.02%)
낙선 (2위)
[39]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영등포 갑
21,033 (20.88%)
낙선 (3위)

2016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209,872 (0.88%)
낙선 (2번)
[40]
2020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영등포 을

47,075 (50.26%)
당선 (1위)
3선[41]



7. 둘러보기[편집]













[1] #[2] 선친의 고향은 경상남도 사천시 곤명면이다.# [3] 큰 형은 잡지 ''의 기자를 지냈고 2010년대 후반부터는 판도라라는 방송 프로그램에 나와 조국백서 주도세력으로 유명해진 김민웅 경희대학교 교수, 서울겨레하나 대표이다. 작은 형 김민화는 1987년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4] 더불어민주당은수미성남시장과 같은 과, 같은 학번의 동기이기도 하다.[5] 민족통일, 민주쟁취, 민중해방위원회. 약칭 삼민투이다.[6] 당시 이 당에는 노무현, 이철 등도 있었고 후일 유명해진 안희정, 이광재 등 여러 인물들도 있었다. 야구선수 최동원1991년 지방선거 당시 이 당에 입당해서 시의원 선거에 나갔다.[7] 1년 기간의 MC/MPA, 정규 2년 정책학 석사(MPP)학위와는 다른 전문가 과정[8]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정주영통일국민당에 입당하여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해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정주영이 낙선하면서 사실상 국민당이 해체되자 민주자유당으로 이적했던 것이었다. 이때는 전국구(16대 국회 이후의 비례대표) 의원이 탈당해도 국회의원직 유지가 가능했다.[9] 1위 이인제, 3위 한화갑, 4위 노무현[10] 2021년 12월 말 지방선거와 총선의 출마 나이대가 25>18세로 조정되는 국회안이 통과되었으나, 대통령 선거의 피선거권은 헌법 개정이 이뤄지지 않는 한 먼 일이다.[11] 지방선거 이후에 치러진 영등포 을 보궐선거에서는 한나라당 권영세 후보가 당선된다.[12] 다만 실제로는 1개월 반쯤 전인 9월 20일에 새천년민주당 의원 37명과 한나라당 의원 5명이 각각 탈당 후 국민참여통합신당이라는 교섭단체를 만든 시점으로, 정식 창당만 안된 상태였다.[13] 다만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직전에 신기남 의원이 합류해서 잠시 원내정당이 되긴 했다.[14] 다만 국회 복귀가 워낙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일부 사람들 중에서는 초선인 줄 알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근데 워낙 그럴 만도 한 게, 국회에 복귀하기까지 기간이 상당히 길었고, 정치 활동도 워낙 장기간 동안 안 해서 대중들로부터도 자연히 잊혀진 사람 신세가 되었으니... 근데 따지고 보면 김민석 본인과 박주선, 안철수 정도를 제외하면 서울특별시장 낙선자들은 대부분 정치적으로 몰락했다.[15] 18대 총선대한민국의 보수정당자유선진당 당적으로 당선. 이후 19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계 정당민주통합당으로 돌아온다.[16] 20대 총선 때 공천 불복으로 탈당해 무소속으로 당선되었고, 21대 총선 때는 미래통합당 지도부에 의해 원래 지역구를 떠나 수성구 갑에 공천되어 김부겸국무총리를 격파하고 당선.[17] 잘 알려져있다시피 민주당계 정당에 있으면서 3선을 달성한 뒤, 20대 총선 직전에 새누리당으로 이적.[18] 이만섭 전 국회의장, 정일형 전 의원, 김재광 전 국회부의장, 서청원 전 의원과 같은 선수이다. 즉, 낙선만 없이 14대부터 계속 당선됐으면 서청원 전 의원에 뒤를 이은 5번째 8선 의원이었을 것이다.[19] 이렇게 오랜 세월이 걸려 정치적 재기에 성공하는 경우는 가끔씩 있다. 1992년 14대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당선되었다가 15대 총선에서 낙선하고 2008년 18대 총선에서 12년 만에 여의도 복귀에 성공했던 박지원 전 의원(단, 박지원 전 의원의 경우는 중간에 국민의 정부 시기에 문화관광부장관, 공보수석과 비서실장 등 정부와 청와대에서 여러 직책을 맡았고, 참여정부 시기에는 대북송금 특검으로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했기에 원내 복귀가 늦었다.)이나 10월 유신으로 8대 국회가 해산된 뒤, 1988년 13대 총선을 통해 17년 만에 원내 복귀한 조윤형 전 의원, 1992년 14대 총선을 통해 21년 만에 국회에 복귀한 김상현 전 의원,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낙선 이후 총선과 지선에서 5연속 낙선만 하다가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를 통하여 칠순이 넘은 이후 장장 16년 만에 전국 최고령 당선자라는 타이틀과 함께 국회에 복귀한 이용희, 2015년 재보궐선거를 통해 15년 만에 원내 복귀한 안상수인천광역시장, 2020년 21대 총선을 통해 10년 만에 원내 복귀에 성공한 이광재강원도지사, 11대 국회의원을 역임하고 18대 총선으로 23년 만에 원내 복귀에 성공한 김노식(다만 공천 과정에서 뇌물을 준 사실이 발각되어 의원직을 상실하였다.)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물론 이들은 유신으로 인한 물리적인 공백기나 여타 임명직, 선출직 수행으로 인한 공백기로 인해서 오랫동안 국회를 떠나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완전히 잊혀졌다가 18년만에 돌아온 김민석은 그 중에서도 특이한 케이스가 맞긴 하다.[20] 권영세는 김민석의 사퇴로 촉발된 2002년 재보궐선거(영등포구 을)에서 처음 당선되어 국회에 입성했다. 웃긴 건 김민석의 후임자인 권영세는 4선으로, 전임자인 김민석보다 선수가 높다는 것.[21] 남인순, 홍익표 후보가 원내대표 결선투표에 진출하였고 홍익표 후보가 최종적으로 새 원내대표로 선출되었다.[22] 어째서 국회의원이 VIP냐 하면, 이들이 입법부이기 때문이다.[23] 이전부터 김 의원이 제일 선봉에 나서서 산은 부산 이전을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산지역 언론에서는 이미 으로 찍힌 상태이다.[24] 서울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1987년 KBS 공채 14기 아나운서가 됐고, 입사 직후부터 TV와 라디오를 넘나들며 각종 프로그램 진행을 맡아 두각을 나타냈다.[25] 외무상 취임 당시 초기에는 친한파적인 노선을 취했지만, 이후 아버지 고노 요헤이와는 다르게 한국에 강경적인 자세를 취해왔다. 그러나 김민석과의 오찬 이후 한국에 대한 발언이 다소 부드러워졌고, 한국 정부의 어려움을 이해한다는 식의 반응을 보여 두 사람의 관계가 한ㆍ일 양측을 중재할 수 있는 의사소통 채널로 급부상 하고 있다.[26] 친민주당 성향 패널로 방송가에 종종 출연했다가 말기 암 환자에게 4천500만원 가로챈 혐의로 피소되어 유죄 선고를 받은 인물이다. 그 뒤로는 방송가에서는 출몰하지 않고 유튜브 활동을 하고있다. #1, #2[27] 선거공영제 실시 이전에 치른 2002년 서울시장 선거에 들어간 자금, 민주당(2014년) 창당에 소요된 자금 및 그 동안 지출한 각종 생활비가 상환되지 못한 채 개인채무로 남은 것으로 추측된다. 2004년 17대 총선부터 공직선거후보자에게 선거비용을 보전해주기 시작했는데, 당연히 이 이전에 선거에 나설 때는 당 자금이나 개인 사재를 털어 치를 수밖에 없었어서 서울시장 출마가 재산을 어느 정도 소모한 것으로 보이며, 더불어서 원외에 있었던 지난 18년 중 직업이 없었던 기간도 있어서 그 동안 쓴 돈이 고스란히 빚이 되었을 것이다.[28] 이 쪽은 남편의 사업 채무 때문에 재산이 깎인 경우.[29] 국회사무처가 후원이며, 헤럴드경제, 코리아헤럴드디베이트코리아가 공동주관이다[30] 신민주연합당과 신설 합당.[31]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을 위한 탈당.[32] 새천년민주당에 흡수 합당.[33] 국민통합21 합류를 위한 탈당.[34] 새천년민주당 복당을 위한 탈당.[35] 중도개혁통합신당과 신설 합당.[36] 대통합민주신당과 신설 합당.[37] 더불어민주당에 흡수 합당.[38] 2002.5.25. 사퇴. (서울시장 선거 출마)[39] 맞대결한 당시 한나라당의 후보는 5년 후 대통령에 당선되는 이명박이었다.[40] 더불어민주당과 합당.[41] 18년만에 원내 복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