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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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국사무쌍(國士無雙)
초한쟁패기 시절 한나라의 초대 대장군이다. 당대의 군사적 상식을 파격적으로 뒤집고 연전연승한 중국사 최강의 천재 병법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젊었을 적엔 무능력한 인물로 취급받았다. 반진전쟁기에 항가군에 입대했지만 중용받지 못했다. 그러다 한왕 유방(劉邦)에게 귀부한 뒤 재능을 인정받아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무수한 군공을 세워 유방에게 천하를 안겨주고 자신은 제(齊)왕과 초(楚)왕의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진(秦)나라 멸망 이후 항우의 분봉(分封) 당시 파촉에 갇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한군을 한중에서 암도진창(暗度陳倉)으로 몰래 이끌고 나와 장한을 비롯한 삼진(三秦)을 멸하고 관중 땅을 평정하여 한나라의 기반을 마련했다. 팽성대전 이후 한나라가 멸망할 수도 있는 최악의 상황에서 오합지졸로 이루어진 3만의 별동대를 이끌고 위(魏), 대(代), 조(趙), 연(燕), 제(齊), 초(楚) 6국을 멸망시켜 유방이 항우를 꺾고 천하통일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1] 그 공으로 전한 건국 이후 최초에 봉해진 7명의 이성왕(異姓王)[2] 중에 한 명이 되었다.
괴철의 의견처럼 한신이 점령한 조나라와 제나라는 유방에게서 독립하여 천하삼분을 노려볼 법한 큰 나라였다. 유방과 여후가 한신을 견제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천하를 삼분하거나 유방에게 절대 충성하거나 둘 중 하나를 정확하게 해야 했는데 애매모호하게 있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3][4]
현대에는 유방의 손을 들어 한신의 행동을 유방이 어떻게 더 참을 수 있느냐는 의견이 많다. 평가 항목에서 볼 수 있듯 고대와 중세에는 한신이 반역을 저지른 죄와 별개로, 유방이 한신을 토사구팽했다는 의견이 많았다. 가장 큰 죄인 반역죄에 엮여서 죽은 인물치고는 특이한 일인데 그만큼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는데 한신의 활약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신을 통해서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고사가 널리 퍼졌다. 한신이 처음 만든 단어는 아니지만 토사구팽이라는 사자성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5] 영포와 노관이 한신과 팽월이 죽은 것을 보고 자신들도 죽을 거라고 걱정하여 반란을 계획한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한신이 토사구팽당했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한신은 많은 표현을 만들어냈다. 불량배의 가랑이 사이를 지나가는 치욕을 참아 목숨을 부지하고, 초나라 왕이 된 후 그 자를 불러 돈을 내리고 용서하여 과하지욕(胯下之辱)이란 고사를 만들었다. 한신을 불쌍하게 여겨 밥을 주고 "당신에게 돌려받을 것은 기대도 안 한다."라고 말했던 동네 아낙네에게 왕이 된 후 크게 보답하여 일반천금(一飯千金)이란 고사를 만들었다. 소하가 유방에게 한신을 천거할 때에는 국사무쌍(國士無雙)이라는 표현을 받았다. 유방과 대화에서 지금도 자주 쓰이는 고사인 다다익선(多多益善)을 만들었다. 전략으로 적을 속이는 명수잔도 암도진창(明修棧道 暗度陳倉)이란 말을 만들었다. 병법 최악의 수이자 금기인 배수진(背水陣)을 성공시켜 배수진을 전략적 전술 또는 결사적 각오라는 의미로 재탄생시켰다. 항우와 마지막 결전인 해하 전투에서 항우를 사지로 몰아넣어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말이 나오게 하였다.
한신의 생년에 대해선 정확한 기록이 남지 않아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B.C. 247년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한고제와 그 비슷한 세대인 소하, 장량, 조참 같은 제장 그룹보다는 어린 게 확실해 보인다. 천하통일 이후 시황제 치세 속(B.C. 221~B.C. 210)에서 각종 찌질한 일화를 남긴 회음 시절의 정황을 보면 그 시점 한신의 나이는 대략 20대 무렵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B.C. 209년 발발한 진승·오광의 난에 호응한 항량의 군대에 합류했을 때 나이는 대략 이립(30대)쯤에 접어들었지 않냐는 추정이 가능하다. 즉 B.C. 232년 출생한 것으로 알려진 항우보다 약간 연상이거나 또래일 가능성이 높다. 한신의 몰년인 B.C. 196년쯤엔 30대 후반~40대 전반 정도로 여겨진다.
2. 생애[편집]
자세한 내용은 한신/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평가[편집]
3.1. 뛰어난 용병술[편집]
지금 장군께서는 서하를 건너 위왕을 사로잡았고, 하열을 연여에서 사로잡았습니다. 단번에 정형을 내려와 하루 아침에 조군 20만을 깨뜨리고, 성안군을 베어 죽임으로써 그 이름이 온 나라에 들리고 그 위엄이 천하에 떨쳤습니다.
《사기(史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용병술로는 한신을 따라갈 이가 없소.
유방(劉邦)
기록상 전공(戰功)과 초한전쟁에서 활약상을 보면 한신은 세계 전쟁사를 통틀어도 흔히 찾을 수 없는 전설적인 명장이다. 위대한 군사 지휘관[6] 으로서 그 화려한 군사적 재능으로 한나라의 대장군이 되어 항우를 무너뜨리고 유방에게 천하통일의 위업을 안겨주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신은 팽성대전의 참패 이후, 열악한 한나라의 상황 속에서 고작 3만의 오합지졸로 군세를 시작하였는데, 수 년만에 위(魏), 대(代), 조(趙), 연(燕), 제(齊), 초(楚)의 여섯 개의 나라(六國)를 무너뜨렸으며, 두 명의 왕을 사로잡았고, 한 명의 왕을 참살했다. 그 과정에서 기동전, 배수진, 우회 공격, 전면전 등 온갖 방식의 전술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했고, 모든 전투에서 이겼다. 또한 당시 중국의 지배자[7] 이자 군사적 능력으로는 역시 역대 최고의 장군 중 하나로 꼽히는 항우를 참살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이기도 하다. 이처럼 군사와 전투에 관련해서는 같은 시대의 그 어떤 인물도 따라오지 못할 업적을 세웠기에, 그의 군사적 능력과 전공에 관해서는 이견을 제시할 수 없다. 당대에도 마찬가지 평가를 받았는데, 사기에서는 그가 제나라를 정벌하여 제왕(齊王)이 되었을 때는 고작 3만의 오합지졸로 시작했던 군세가 유방과 항우의 세력을 능가할 정도로 강성해졌고, 그 이름이 온 나라에 들리고 그 위엄을 천하에 떨쳤다고 서술한다. 용저[8] 를 참살한 이후에는 그 이전까지 회유라는 개념을 가지지 못했던 항우조차도 사신으로 무섭을 보내 한신을 회유하려 했을 정도이니, 한신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특히 한신의 진가는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모든 전투를 대승으로 이끌었다는 점에 있는데, 그 예로 적장 진여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어보고 상황에 맞는 전술을 사용해 배수진(背水陣)이라는 금기를 오히려 대전략으로 승화시켜 '전략적 배수진'의 정의를 만들어 낸 정형 전투, 정보 수집을 통해 적군의 동향을 읽고 단 한 번의 싸움으로 나라를 멸망시키고 적 군주를 사로잡은 안읍 전투, 지형지물과 부하 지휘관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해 제(齊)와 초(楚) 두 나라의 연합군을 완벽하게 제압하고 초한대전의 향방을 결정지은 유수 전투 등이 있다.
사실 한신이 무너트린 여섯 개의 나라들은 이름만 국가지, 전국시대 열국의 후예나 군벌이 항우의 후원을 받아 급조된 정권들이었다. 그래서 이후 출현하는 중앙집권형 국가들보다 국가 체제 자체가 미비했고, 국가의 동원력은 물론 군사의 질 같은 수준도 아주 높았다고 볼 수 없다. 물론 배수진의 일화에서 보듯이 병력의 질이 낮은 것은 한신의 군대도 마찬가지였으며, 거기에 더해 한신의 세력은 병력의 숫자도 밀리고, 원정군이었으므로 대체로 피로가 누적된 상황이었다. 이렇게 대체로 상대보다 유리할 게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전략적 불리함을 극복하고 무패의 군단이 되어 천하를 평정한 것은 한신의 능력이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9][10]
하지만 그 이상으로 재밌는 부분은 한신이라는 사람의 개성이다. 한신은 젊은 시절에는 불량배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다니고 아낙네에게 밥이나 빌어먹고 사는 무능한 사내로 평가받았고,[11] 항우의 군단에 있을 때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한의 대장군이 되기 전에는 대군은 커녕 부하를 다루는 위치도 못 됐던 사람[12] 인데, 유방의 밑에서 한번 기회를 잡자 천연덕스러울 정도로 완벽하게 지휘관으로서 자신의 능력을 내보였다. 현대의 일반기업에서도 낙하산 인사라고 손가락질받으며 조직을 운영하기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 당연한 상황인데 병사들을 이끌고 중국 대륙의 반을 종단하는 대원정을 성공시킨 것은 조직 관리에서도 범인은 상상하기 힘든 영역이라 할 것이다.[13] 거기에다 병법으로 말하자면 타고난 명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야전 지휘관으로서의 활약만 엄청난 게 아니라, 이좌거의 조언에 따라 연나라를 싸움 없이 항복시키는 등 전략적인 식견도 출중했다.
3.2. 부족한 정치력[편집]
한신이 번쾌의 집에 들렀다. 번쾌는 한신을 대왕이라 칭하고, 한신을 대접하며 종종걸음으로 나아가고 물러났다.
한신이 번쾌의 집을 나서며 혼잣말하였다.
"내가 살아서 번쾌와 같은 반열에 서는구나."
한신은 군대를 통솔하는 영역에서만큼은 항우를 제외하면 적수가 없을 정도로 신들린 전략, 전술적 역량을 보여주었지만, 전투 이외의 영역에서는 오히려 모자란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다. 특히 왕이나 신하로서 보여준 정치력이나 행태는 부족함이 많았고 그 중에서도 사회생활에 필요한 처세술은 아예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주군인 유방 입장에서 한신 이놈이 배신하는 것 아닐까 불안할 만한 일을 몇 차례 해놓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유방의 은혜를 잊을 수 없다며 그를 배신하는 걸 꺼렸다.
한신이 유방에게 붙잡힐 때 대단한 전투라도 있었을 것 같지만 한신은 이 지경까지 와서도 정치력이 빵점이었던 탓에 그렇지 않았다. 유방이 자신의 성을 방문하겠다고 하자 혹시 역모를 의심하는 것 아닐까 무서워진 한신은 유방이 싫어하는 종리말의 목만 가지고 호위병 없이 유방에게 나아갔다. 유방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한신을 형틀에 묶어서 한나라 수도로 잡아갔다. 이게 상황의 전부이다.
한신은 모든 문제를 자기 생각대로 판단했다. 자기 감정에 따라 문제를 일으키고, 결정적인 순간에서도 이성적으로 유리한 판단이 아니라 인간적인 감정으로 판단했다. 항우가 보낸 무섭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도 다른 인물들이 그랬듯 정치적인 고려가 아니라 "항우는 나를 형편없이 대했으나, 유방은 나를 인간적으로 잘 대해주었다." 같은 감정적인 이유였다. 그런데 정작 그런 말을 한 한신은 이전에 유방이 세운 제나라 화친책을 자기 멋대로 어그러뜨려 최측근 참모 역이기를 죽게 만들었다. 이래놓고는 자기가 제나라를 이겼으니 제나라 왕위를 달라고 하였다.결과적으로 역이기의 사망은 고제의 권위에 흠집을 내는 행동이였고 더불어 불필요한 피를 흘리게 만들고 원수나 다름없던 제와 초가 연합한다는 최악의 결과를 불러왔다.
과정이야 어찌됐든 용저의 삽질 덕분에 결과적으론 한신이 이겼으니 망정이지 잘못하여 패배했다면 한신 본인도 죽거나 하북이 평정되고 항우는 최후의 반전을 기대해볼 수 있게 되는 건 물론 눈엣가시 같은 팽월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게 되고 자칫하면 제후들이 또다시 유방과 항우 사이에서 간을 보는 등 유방에게 불리한 일만 생겼을 것이다. 게다가 고제가 위급할 때 무려 2년씩이나 원군은 안 보내면서 반란을 핑계삼아[15] 왕위를 요구한 것은 협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신 본인에게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가장 중요한 국면에서 상사의 명령에 거래를 시도한 것부터가 문제이다. 딜을 걸더라도 일단 상황을 파악하고 걸어야 하는데도 한신은 초대형 사고를 친 직후에 유방이 한신을 가장 필요로 했을 때 딜을 걺으로써 고제를 격분하게 만들었다. 애초 유방이 아무리 필요해서 그랬다고는 해도 옹치같은 놈조차 열후에 봉하였고 한신보다 못한 공적을 지닌 관영 조참 등도 다 나름대로 상을 받았고 제나라를 역이기가 회유한다고 해서 한신의 공적이 가려질리도 없었다. 오히려 이후에도 초와 한은 몇 번 전투를 더 벌였고 최후의 결전인 해하 전투까지 남아있었기에 한신이 활약할 기회도 더 남아있어서 비록 제나라를 피를 흘리지 않고 회유하게 될 역이기나 소하 등에게 공적을 뺏긴다고는 해도 무조건 5순위 공신 안에는 가뿐히 들어갈 공적이라 가만히만 있어도 될 것을 괜히 유방의 심기만 건드린 꼴이 됐다.
유방에게 단단히 밉보여 언제 토사구팽 당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인 만큼 이제라도 정신 차리고 자기 살길을 찾았어야 했지만 한신은 이 지경에서도 상황 파악이 전혀 안된 건지 유일한 출구 전략이 될 수 있는 항우와의 연대를 유방과의 개인적인 의리 때문에 거부했고 이는 항우의 몰락은 물론 본인의 죽음에도 일조했다. 물론 가왕이니 제왕이니 한들 당시 한신은 한나라 소속이었으며 한신의 제나라 왕 작위와 한신의 병력은 유방에게서 받은 것이었고 유방의 충신인 조참 등이 그의 명령을 따르면서도 감시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유방을 적으로 돌리고 거병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란 의견도 있다. 그리고 애시당초 항우가 마냥 믿을 만한 인물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애초 항우는 한신을 홀대해 떠나게 만들었고 유방이 먼저 관중을 점령했음에도 의제와의 약속을 어기고 멋대로 관중의 왕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홍문연서 유방을 죽이려 한 게 항우이다. 거기다 원래는 의제가 해야 했던 제후들의 분봉도 무시하고 자기가 해버린 것도 이후에 의제가 거슬린답시고 죽여버린 것도 항우였기에 항우의 악명과 더불어 항우가 믿을만한 놈이 못된다는 생각은 이미 전 중국에 퍼져 있었고 애초부터 이이제이를 노려서 유방과 한신이 둘다 자멸하거나 한신이 유방과 척을 치게 만들 속셈으로 그러니까 자신의 이익을 위해 독립을 권유한 것이니 한신 입장에서 무작정 신뢰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하긴 하다.실제로 독립하라는 제안이 먹혔다면 한신도 한신이지만 항우도 그만큼 이득을 봤을 터였다.
허나 그럼에도 한신은 신중하게 자신의 미래를 고민하며 저울질해 보고 항우의 제안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항우는 날 홀대했는데 유방은 날 잘해줬지 같은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거부한 것이다. 거기다가 처음 손쓰기만 어렵지 막상 실행만 하면 한신은 최적의 위치에서 우세를 점할 수 있음에도 무작정 거병조차 포기해 버렸다.물론 예양이나 고순의 사례처럼 충신은 좋은 평가를 듣기 마련이긴 하지만, 그 같은 선택이 본인이 죽는 결과를 초래한 건 물론 아군을 팀킬하고 제나라 왕위를 달라고 요구하는 등 예양이나 고순의 순수한 충성심이나 의리와 비교하면 한참 모자라는 지라 진정한 충신으로 보기도 어렵다. 거기다 항우의 제안을 물리친 건 둘째치더라도 정작 본인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전쟁이 끝나면 유방이 자신을 어떻게 대할지 같은 건 전혀 고민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저 막연히 내가 이만큼 공을 세웠는데 설마 폐하가 날 죽이겠어? 같은 게 전부였고 이 같은 안일한 생각은 결국 토사구팽과 본인의 죽음으로 돌아왔다.
사실 그렇다고 한신이 마냥 인정 없고 냉혹한 면모만 보여준 것은 아니다. 충분한 기반과 계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방과의 의리를 이유로 괴철의 반란 제안을 거듭 거절한 것과, 자신을 찾아온 종리말을 내치지 않고 숨겨준 일, 일개 패전국의 신하에 불과한 이좌거를 스승으로 모시고 거듭 예를 표하며 자문을 구한 일 등, 한신은 형식상이나마 의리 있고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문제는 그 의리와 겸손한 태도가 자신이 유리한 상황에서만 발휘되었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해지면 항상 이기적인 행태를 보여준다. 당장 처음 한나라로 들어갔을 때부터 죽을 뻔한 상황에서 하후영과 소하가 목숨도 살려주고 치속도위라는 중책을 맡겼지만[16] 길어야 3달 정도 만에 유방이 크게 쓰지 않는다며 탈영해 버렸으며,[17] 괴철의 말에 넘어가 동료인 역이기를 죽게 만들고 적국을 멋대로 늘려버린 행태나 상하관계가 명확하긴 했어도 한때 같은 전선에서 싸웠던 전우 관영을 두고 "내가 저 따위 놈이랑 어떻게 동급이란 말이냐?" 같은 말을 서슴없이 했다.[18] 또 자신의 보전을 위해 의탁하던 종리말을 죽게 했고,[19][20] 죽기 직전에 괴철이 자신에게 반란을 사주했다고 불어버려서 괴철을 위기로 몰아넣었다.[21] 이는 결국 자신에게 도움이 되거나 자신을 도우려 한 사람을 스스로 차 버린 것이다. 일각에서는 한신이 끝끝내 거병을 하지 않았고 유방이 잡으러 왔을 때도 무장조차 안 하다가 순순히 포박된 것을 근거로 충신이라고 평하기도 하지만 이건 정치력이나 처세술의 문제라고 봐야지 정말로 한신이 충신이었을 가능성은 낮다. 물론 대우도 제대로 안 해 주는데 가만히 있으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자신이 공을 세운만큼 대우를 받는 게 합당하긴 하지만 공을 세우려고 아군조차 팀킬하고 군주가 위기의 상황인데 왕위를 달라고 이야기하는 건 아예 격이 다른 문제다.
유방은 이성왕을 숙청하는 등 공신들을 견제하는 작업을 했고 소하, 번쾌 같은 최측근들까지 의심하여 죽이려는 면모를 보였다.[22] 그런데 이들과 한신을 동일하게 묶기 어려운 게 한신 숙청에 관련된 인선만 봐도 고제가 견제했고, 소하가 협력했고, 여후가 제거했고, 장량이 소하에게 상을 줄 것을 청했으며 그 과정에서 한신을 변호하거나 소하에게 그랬던 것처럼 제대로 귀띔해준 사람이 전혀 없었다.[23]
한신은 사람을 모으고 그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능력이 부족했다. 조, 위, 연, 제 4개의 나라를 무찌를 정도의 공을 세웠으면 분명히 한신의 아래에도 여러 인재가 있었을 것이고, 그런 인재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것도 능력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을 제대로 보여준 게 고제이다. 고제는 형식상 초나라의 밑에서 성장했지만, 원정 도중에 장량, 역이기, 관영 등을 직속 수하로 얻으며 그 세력을 불려나갔다.[24] 이좌거나 괴철의 사례를 보면 한신이 인재를 포섭하려는 시도를 아예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유방에게는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신에게는 신하로 삼을 만큼 능력 있는 사람들이 주위에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괴철과 이좌거 등 일부 참모진이 전부고, 부장급 인물들은 대부분 유방에게 충성을 바치는 데다 지휘관급들도 조참, 관영 등 유방의 최측근인 사람들 뿐이었다. 그래서 한신이 반란을 일으키면 이들이 합류할 가능성은 없었다.[25] 그 와중에 이좌거도 유방의 지시로 산둥성 일대에 둔전을 개척하는 임무로 빠진 뒤 그곳에서 천수를 누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즉, 고제는 한신을 그나마 도와줄 사람까지도 빼낼 정도로 눈이 좋았고, 한신의 태도를 교정해 줄 조언자는 한 명도 없었으며, 기껏 있다 간 괴철은 바람만 넣고 갔으니 사람 복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게다가 단순히 운이 없어 주변에 훌륭한 사람이 없이 쓸데없이 아첨만 하는 사람만 붙었다고 하기도 뭐한 것이, 전 시대와 상황을 막론하고 유명한 권력자 옆에는 항상 저절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마련인데, 그들 중에는 당연히 능력있는 인재도 있겠지만 아첨만 해서 득만 보려는 소인배도 많다. 이런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 속에서 인재를 골라내어 중용하고, 소인배는 내쳐버리는 것이야말로 권력자의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사람 잘 쓰기로 유명한 유방의 곁이라고 충신들만 몰려들고 소인배들이 없었겠는가? 유방은 소인배를 알아보고 쓰지 않았고, 한신은 소인배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날뛰게 놔둔 것에서 둘의 용인술의 역량 차이는 이미 천지차이였다.
또한, 제후왕 자리, 그것도 특별한 위상과 의미를 가진 제왕과 초왕의 작위를 한신은 겉으로 내세울 명분이나 혈통도 없이 손에 넣었다.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과정도 당시의 가치관으로 보면 부적절하기 짝이 없었고 단순히 가치관 문제 이전에 한신의 무리한 제나라 정벌로 초한전쟁이 1~2년은 더 연장되어 버렸으며 이 과정에서 희생된 인명도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26] 이러니 한신에 대해 단순한 질투 이상의 악감정이 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데, 번쾌의 일화에서 보듯이 한신은 시종일관 공신들을 무시하고 오만한 태도를 취했다. 자신의 공훈을 믿고 교만해진 탓에 자신에게 독이 되는 행동을 서슴없이 저지른 것이다. 거기에 자신의 보전을 위해서 종리말에게 죽어달라고 말한 것부터가 상황 판단도 문제지만, 인망이 없을 만하다는 예시를 완벽하게 보여준다. 오히려 종리말을 어설프게 껴안은 탓에 본인의 왕 자리까지 뺏긴 것을 보면 더더욱. 차라리 처음부터 고제에게 종리말을 붙잡아 가든가, 의리가 문제라면 끝까지 껴안든지 차라리 모른 척하고 풀어주는 것이 상책이었음에도 기껏 보호할 때는 언제고 고제가 종리말을 잡으려 들자 뒤통수를 친 것이다. 종리말이 격분해서 자살할 정도로 이기적인 짓이었으니 욕을 먹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27]
한신의 행보를 보면 눈에 띄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어중간함'이라는 부분이다. 한신은 열렬한 충신[28] 이 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극단적으로 냉혹하고 철두철미한 모략가가 되지도 못했다. 제나라 왕을 탐한 것처럼 야심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나 막상 지금이 최적의 기회니 거병을 하라는 괴철의 제안을 거부하는 등 본인이 살 길을 찾아봐야 함에도 손을 쓰는 건 거부했고, 종리말을 숨겨주듯 자잘한 인정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나 하후영처럼 막상 그를 끝까지 보호해준 것도 아니라서 자신에게 위기의 순간이 다가오자 종리말을 죽게 만든 것처럼 인정을 위해 한몸을 바친 것도 아니었다. 생각은 있는 듯 하며 여러 사람들에게 도발적인 행보를 보이면서도 막상 실행은 안 하고 꾸물거리며 여러 사람들의 부아만 돋구고 말았다. 즉 열렬한 충신도, 극단적인 모략가도, 대단한 선인도, 지독한 악인도 되지 못했다. 그저 모든 것이 어중간했다.일단 정말로 반역을 저지른 건 아니지만 또 반역자로 몰려도 할 말이 없을만한 짓들을 했기에 팽월처럼 마냥 억울하다고 보기도 어렵다.[29] 어떻게 보면 지나칠 정도로 인간적이었는데, 그의 능력을 보면 천하를 뒤흔든 천하대장군이자 영웅적인 모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사람됨은 묘한 소인배스러움이 느껴지는 신기한 경우다.
이런 점 때문에 간혹 한신에 대해 "영웅의 모습과 소인배의 모습이 섞였다."라는 식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시바 료타로는 자신의 소설 항우와 유방에서 한신의 이런 이중성을 부각시켰는데, 작중 괴철이 한신에 대해 "무인으로서는 걸출한 재능의 소유자지만 다른 면에서는 백치같은 인물"이라고 평가하는 부분이 있다.[30]
결론적으로 한신은 능력 자체는 뛰어나지만, 군공이 쌓여갈수록 자신의 능력을 믿고 교만해졌으며, 군사적 재능에 비해 정치적으로 사람부릴 줄 모르며, 처세술의 부재로 인해 서서히 주변 사람들의 인망을 잃어갔다. 군사적 재능 하나만으로 한의 대장군이 되어 왕의 자리까지 오른 그가 그 능력 때문에 토사구팽당해 비참하게 죽어갔다는 점은 항우와 매우 비슷하다.
4. 역사서의 평가[편집]
진평이 말하였다. "폐하의 제장들 중 용병술이 한신을 뛰어넘는 인물이 있습니까?"
황상(유방)이 말하였다. "용병술은 한신을 따라갈 사람이 없소."
사기(史記)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
만약 한신이 도리를 배우고 겸양의 미덕을 발휘하여 자기를 공을 과시하지 않고, 자기의 재능을 과신하지 않았다면, 그가 세운 공은 아마도 주나라 천 년 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주공(周公), 소공(召公), 태공(太公) 등이 세운 공훈에 비견되어 후세들로부터 혈식(血食)을 받아먹으며 받들어졌을 것이다.
이렇게 되려고 힘쓰지 않고, 천하의 정세가 이미 정해진 뒤에야 반역을 꾀했으니, 일족이 멸망한 것은 역시 당연한 일이 아닌가?
사마천, 사기(史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세상에서 어떤 사람은 한신이 첫째로 큰 계책을 세웠다고 하니, 고조와 더불어 한중(漢中)에서 군사를 일으켜 삼진(三秦)을 평정하고, 드디어 군사를 나누어 가지고 북쪽으로 가서 위표(魏豹)를 사로잡고, 대(代)를 빼앗았으며, 조나라(趙)를 무너뜨렸고, 연(燕)을 위협하였으며, 동쪽으로 가서 제나라(齊)를 공격하여 이를 소유하고 남쪽으로는 초를 해하(垓下)에서 멸망시켰으니, 한나라(漢) 왕조가 천하를 소유할 수 있던 것은 대개 한신의 공로입니다.
그가 괴철(蒯徹)의 유세를 거절하고 고조를 진구(陳丘)에서 환영한 것을 보면, 어찌 반란한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오랫동안 직책을 잃어 앙앙불락(怏怏不樂)하다가 드디어 패역의 구렁텅이로 빠진 것입니다. 무릇 노관(盧綰) 같은 자는 고조와 같은 고향이라는 옛날의 정리(情理)를 가지고 연나라에서 왕 노릇을 했는데, 한신은 열후가 되어 조회에나 참석하니 이것은 고조가 한신에게 잘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 사마광은 그런 한신을 고조가 속이는 꾀를 써서 진구에서 사로잡았으니, 이것은 고조가 잘못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신 역시도 죄를 받을만한 일을 했습니다.
애초에, 한이 초나라(楚)와 형양(衡陽)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는데, 한신은 제를 멸망시키고 돌아와서 보고도 하지 않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며, 그 후에 한이 초를 추격하여 고릉(固陵)에 이르러서는 고조가 한신과 더불어 초를 공격하기로 기약했었는데 한신은 오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이미 고조는 한신을 사로잡을 마음이 있었지만, 다만 힘이 부족했을 뿐입니다. 천하가 평정되고 나서는, 대체 한신을 다시 믿을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무릇 때를 틈타서 이익을 취하려는 것은 시정잡배의 생각이고, 공로를 돌리고 은덕에 보답하는 것이 선비나 군자들의 마음입니다. 한신은 스스로가 시정잡배의 뜻을 가지고 그 몸을 이롭게 하면서, 정작 다른 사람에게는 선비나 군자의 마음을 기대했으니 이는 어려운 일이 아닙니까?
사마광, 자치통감(資治通鑑)
한나라 고조가 천하를 얻은 것은 모두 한신의 힘인데, 만약 한신으로 하여금 괴철의 꾀를 들어 써서 제(齊)나라의 강함을 근거삼아 솥발처럼 세 곳에 할거하여 서로 대치하였다면 고조가 비록 천명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형세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니, 역시 반드시 곤궁(困窮)한 뒤에야 얻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신은 본디 배반할 마음이 없었는데 오로지 고조가 그의 능력을 두려워하고 미워하여 반드시 죽이려고 하였기 때문에 분격(憤激)하여 반모(反謀)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비록 그러나 한신의 공은 제사를 지내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집에 살아남은 이가 없게 하였으니, 고조는 진실로 한신을 저버림이 있습니다.
이맹현, 성종실록, 5년(1474) 8월 10일(임진) 5번째 기사
한 고조가 공신을 대우함을 있어 처음에는 옳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그것으로 천하를 취하려고만 했을 뿐 잘 어거하는 도는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한신(韓信)이 가왕(假王)되기를 청한 것은 참람하고 방종한 마음을 가지고 임금의 마음을 의심케 함을 면치 못하였고, 고제(高帝) 역시 마지못해 그의 청을 들어주고는 후일을 도모하려는 생각을 면치 못하여, 상하가 서로 의심한 끝에 결국은 보전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나는 새가 다 없어지니, 좋은 활도 쓸모가 없게 됐다.'는 탄식이 있게 된 까닭입니다.
안처성, 중종실록, 2년(1507 2월 13일(정해) 2번째 기사
한신은 이미 재능 때문에 고제가 꺼렸고 여후(呂后) 또한 총애하는 심이기(審食其)와 더불어 한신과 팽월(彭越)을 죽이려고 도모했었습니다. 그러므로 팽월에 있어서는 사인(舍人)을 시켜 무고하게 하여 죽였고 한신에 있어서도 그렇게 한 것이니, 소위 '진희(陳豨)를 시켜 모반하게 했다.'는 것은 곧 사인의 아우 사공(謝公)이란 자가 고발한 말입니다. 주자는 일찍이 말하기를 '한신의 반역은 나타난 증거가 없다.'고 했고, 여조겸(呂祖謙)이 《십칠사상절(十七史詳節)》·《대사기(大事記)》를 편수할 적에 모두 한신이 모반하려다가 주벌당했다는 것으로 말하자 주자는 '사람을 잘못 죄에 빠뜨린 것이다.'고 했었습니다.
대개 진희가 대(代)의 정승으로 부임할 적에 따라간 빈객(賓客)의 수레가 1천 승(乘)이었는데 주창(周昌)이 빈객이 불법인지를 조사하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말이 진희에게까지 걸리게 되자 진희가 주벌당할까 두려워하여 모반한 것이니, 한신에게서 나온 일이 아님이 매우 분명합니다. 주자가 지극히 은미한 내용을 추찰해 보고서 《강목》에 '여후가 회음후(淮陰侯) 한신을 죽이고 삼족을 멸했다.'고 특서한 것입니다.
여후와 심이기는 평소에 제장들을 없애려고 했었기 때문에 고제가 붕(崩)했을 적에 비밀로 하고 발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때에 진평(陳平)과 주발(周勃)은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노관(盧綰)에게 붙어 연(燕)에 있었고 관영(灌嬰) 또한 군사 10만을 거느리고 낙양(洛陽)에 있었는데 역상(酈商)이 심이기를 달래어 '만일 제장들을 족주(族誅)한다면 주발과 관영이 회군하여 그대들을 씨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고 말하므로 이에 발상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한서》 형법지(刑法志)를 고찰해보면 '한신과 팽월을 벨 적에 여후가 우선 혀를 모두 베도록 했다.' 했으니, 이는 자신의 추잡한 행실을 말할까봐 두려워서 그렇게 외람하게 형벌을 쓴 것이 아니겠습니까.
유희춘(柳希春)
한신이 어찌 군신의 의리를 안 사람이겠습니까. 한왕(漢王)과 함께 초나라(楚)를 치기로 기약해놓고도 오지 않았습니다.
김우옹(金宇顒)의 반박
초래(草萊)에서 서로 의탁한 사이는 평상시의 군신 사이와는 다릅니다. 그 당시에 한나라 신하들이 한왕을 족하라고 불렀으나 이것이 어찌 평상시 군신의 예이겠습니까. 한신이 기약을 어기고 오지 않은 것은 진실로 죄가 있는 일입니다마는, 제(齊)나라 전부를 차지하여 천하를 삼분(三分)한 형세가 되었을 적에 괴철(蒯徹)이 거듭 꾀었는데도 '내 어찌 이득을 좇아 의리를 저버리겠는가.' 하고 잘라서 말했으니, 이는 그의 늠름한 대절(大節)이 드러난 부분입니다.
또, 항우를 처음 패배시켰을 때 한왕이 시급히 제왕(齊王)의 성으로 들어가 정예병을 모조리 빼앗고 다시 초왕(楚王)으로 봉했지만 조금도 불평하는 기색이 없었으므로 선유(先儒)들은 '그가 스스로 의심을 품고서 사로잡았으니 이는 진실로 한왕의 잘못이다.' 하였는데,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는 한나라의 신하이기 때문에 곧바로 쓰지 못한 것이고, 뒷날의 사마공과 대계(戴溪) 또한 그가 모반하였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온공(溫公: 사마광)은 성격이 순후하기는 하지만 그다지 사리에 밝지는 못하여 평상시의 군신의 예를 고집하여 초래에서 서로 의탁한 사람을 책망한 것입니다. 한신이 죄없이 사로잡혀서 열후(列侯)로 강등되어 번쾌(樊噲)와 같은 서열에 든 것이 부끄러워서 불만스럽고 무료해 한 적은 있었겠지만, 모반했다고 한다면 심하게 무함한 것입니다.
유희춘의 재반박, 선조실록 8권, 7년(1574 2월 5일(경술) 1번째 기사
한 고조가 한신을 죽인 것은 대체로 혜제(惠帝)가 어리고 약했기 때문에 후환이 있을까 염려하여 그랬던 것이다. 만약 혜제도 문제(文帝)처럼 영명(英明)했다면 필시 한신 등을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효종, 효종실록 4권, 1년(1650 7년) 7월 28일(기묘) 2번째 기사
한나라 고조가 운몽(雲夢)에서 거짓으로 놀다가 한신(韓信)을 사로잡은 것은 정도(正道)가 아닌 듯하다. 진평(陳平)의 계략은 진실로 정도가 아니고, 한신 또한 그르다. 경포(黥布)에 대해 말한 것과 군사를 일으키고 장수를 보낸 일은 어찌 사리에 맞는 말이겠는가?
또 무섭(武涉)을 사양하여 돌려보냈을 때를 당하여 '나를 먹여 주고 나를 입혀 주었다.'는 말은 이미 전국(戰國) 때의 여풍(餘風)이 있음을 면하지 못한다. 그러나 한신의 재주는 과연 성질이 사납고 교만한 까닭에 반심(反心)이 이미 싹텄었으니, 그 형세가 길 수 없었다. 한나라 고조의 일은 부득이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찍이 한나라 고조가 그를 성심(誠心)으로 대우하였었는데,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순조, 순조실록 11권, 8년(1808 11월 19일(경진) 1번째 기사
무릎을 꿇었다고 한신을 겁쟁이라고 봐선 안 된다. 무릎을 꿇을 때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놀라서 간이 콩알만 해지고 정신이 멍해져서 털퍼덕 하고 무릎을 꿇는 경우다. 이런 사람은 겁쟁이다. 다른 하나는 위로 뛰어오르기 위해 무릎을 꿇는 경우다. 나중에 높이 뛰어오르기 위해 무릎을 꿇는 사람이라면 분명 영웅이다. 화가 치민다고 덥썩 깨물고 죽어도 놓지 않는다면 개나 다름없는 사람이다.
보양(栢楊)
한신은 한 시대의 명장이자 최고의 공신이었습니다. 그는 꿋꿋하게 곤경을 버티고 일어나 전투에서 뛰어난 공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그는 백전백승하여 최고의 위치에 올랐다가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유방을 배신할 수 있었을 때 충성을 지켰으며, 반란이 성공할 가능성이 가장 적을 때 모반을 꾀했습니다. 혹자는 한신의 모반이 (날조된 혐의라)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하고, 혹자는 모반의 증거가 확실하다고 주장합니다. 또 혹자는 그가 핍박을 당해 최후의 발악으로 모반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신은 영웅 시대의 영웅으로서 치욕을 참았으며,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가끔씩 우유부단하고 이해득실에 노심초사했지만, 후세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겨 주었습니다. 그의 일대기는 음미할수록 깊은 감동을 주는 동시에 음미하는 이를 심사숙고하게 만듭니다.
이중톈, 초한지 강의 pp.70 中
5. 기타[편집]
- 한신이 왕이 되어 다스렸었던 제나라와 초나라는 이전에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 바로 다음 가는 국력을 자랑한 두 강국이다. 진나라에 의해서 통일되고 다시 여러 군웅이 나눠먹었던 초한쟁패기를 겪은 다음의 국가이니 과거 전국시대만큼의 국토나 국력을 지니고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정통 6국의 이름을 그대로 계승한 특별한 위상을 가진 국가였다. 한때 유방의 주군이었고 유방에게 항우를 토벌할 최고의 대의명분을 제공해 준 초의제는 본래 '초회왕'이었다. 항우의 시해로 인해 끊어졌던 초왕의 지위를 한신이 받았으니 이는 형식적으로 초의제의 자리를 한신이 이어받은 것이었다. 그 밖에도 고조 유방과 그의 측근들, 한신 자신도 초나라 출신이었고 최대의 적수였던 항우의 나라였던 만큼 정서적으로 각별한 의미가 있다.
- 중국 역사에서는 물론 한국사에서도 뛰어난 장수를 칭송하면서 '옛날 한신과 같다.'라는 표현이 자주 쓰였다. 대표적으로 펑더화이나 린뱌오 등이 이런 말을 들은 중국 인민해방군 장군이다.
- 한신이 장기를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불가능하다는 의견은 '상'에 해당하는 코끼리는 먼 옛날 초나라 땅에 코끼리가 살았으니 가능하지만 '포'는 대포인데 이 당시에 화약 무기는 없었다. 화약은 12세기 남송 시절에나 등장하는 것으로 이때의 화포로 몽골군의 진격을 몇 차례나 막아냈을 정도인데 이것이 기원전에 있었더라면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시대를 거쳐가면서 종이나 여러 요소가 바뀌어왔다고 주장한다면 얼추 내용을 맞출 수 있기는 하다. 가령 투석기와 노포는 이미 춘추전국시대부터 널리 쓰였다. 가능하다는 의견은 장기 항목에서도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장기의 포(包)는 그 한자(砲) 자체의 의미에서부터 꼭 화약을 이용한 화포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투석기든 노포든 탄환을 쏘아보내는 무기를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므로 '한신이 살던 시절에는 화약이 없었는데 어떻게 포가 있을수 있느냐'는 지적은 완전히 빗나간 것이다. 오히려 이 부분은 화약의 보급으로 비 화약 사격병기가 모두 도태되면서 포라고 하면 당연히 화포를 생각하게 된 현대인의 고정관념이 지나치게 개입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점은 기원전 1세기 전한시대의 서적에도 장기(샹치에 대한 언급이 있고, 6세기 북주시대의 서적에는 아예 규칙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있는 점을 보아서도 명백하다. 어쨌든 장기(샹치) 자체는 차투랑가에서 파생된 다양한 게임 중 하나로써 그 탄생과정에 한신이라는 특정 인물이 개입했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전혀 제시되고 있지 않으므로, 이런 종류의 전설과 민담에서 흔히 그러하듯 유명인의 행적에 신비감을 부여하기 위해 (또는 해당 놀이에 신비감을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장군, 장군께서 저에게 병법을 전수해 주신다면 저는 그것을 대대로 전수하여 장군의 이름을 빛내도록 하겠습니다."
처음에는 그의 부탁을 수락하지 않았으나, 그 병졸이 몇 번이나 간곡히 청하자 한신은 마침내 그에게 3일 후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하였다. 3일 후 한신은 그 병졸과 마주앉았다. 그리고는 땅바닥에 있던 큰 네모 판자에 적군과 아군 진영을 나누고 거기에 각각 32개의 칸을 그려넣은 다음, 중간에 강을 경계로 삼고 그 안에 "초하(楚河), 한계(漢界)"라고 적어 넣었다.[31]
또 한편에는 16개의 붉은 종이조각을 배치한 후,
수(帥), 사(仕), 상(相), 차(車), 마(馬), 포(炮), 병(兵) 등의 글자를 써넣고
다른 한편에는 16개의 푸른 종이조각을 배치한 후,
장(將), 사(士), 상(象), 차(車), 마(馬), 포(炮), 졸(卒) 등의 글자를 써넣었다.
그 모습을 본 병졸은 갸우뚱하며 "이것이 병법입니까?"라고 말했다. 그러자 한신이 대답했다.
"이 72개의 작은 사각형을 우습게 보지 말거라. 여기에는 천군만마의 대전투를 모두 담을 수 있다. 이 16개의 종이조각은 각각 자기 편을 대표하는데, 용병에 있어서도 문무를 바탕으로 상하가 일치단결하여 전반적인 계획을 적절하게 운용하면 어떤 변화에도 능히 대처하여 백전백승할 수 있다. 이 방법에 정통한 후에 그것을 군사(軍事)에 응용하면 그대로 적용할 수 있어 천하에 적수가 없게 될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병졸은 무릎을 꿇고 절한 뒤 한신을 스승으로 삼고 병법을 배웠다. 한신이 죽은 뒤 병졸은 공직을 사양하고 병법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편의상 그는 종이에 장기판을 그리고 종이 조각 대신 나무조각을 깎아 장기알을 만들었다. 그 후 이것은 사회에 널리 전파되어 지금까지도 유행하고 있다.||
6. 대중문화에서[편집]
자세한 내용은 한신/기타 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