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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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季布
생몰년도 미상
초한쟁패기 시대의 인물.
의협심으로 유명했으며, 항우를 따라 숱한 전공을 세웠다. 이후, 그가 죽은 후에는 한고조의 신하로서 살다 생을 마감한다. 초한전쟁 중간에 한나라로 전향한게 아닌 초나라의 신하들 중 가장 해피엔딩을 맞은 케이스다.
2. 생애[편집]
항우 휘하의 장군으로 항우를 따라 각지를 전전하며 많은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며, 여러 번 유방을 곤경에 빠뜨리곤 했다. 해하 전투에서 항우가 패사한 이후 유방은 현상금을 걸어 계포를 수배해 그를 숨겨준 사람은 삼족을 멸한다고 공고했다.
항우가 죽은 후 계포는 도망쳐 복양의 주(周)씨 집안에 숨어 있었는데, 주씨(? ~ ?)는 계포의 머리를 깎고 칼을 채워 허름한 베옷을 입힌 후 큰 수레에 넣어 집안 하인들과 함께 노나라의 협객 주가(朱家, ? ~ ?)에게 팔아 넘겼다.[1] 주가는 그가 계포인 것을 알아챘지만 모르는 척 하면서 집안 하인들에게 "밭일은 이 친구의 말을 따르고 꼭 이 친구와 식사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개국공신 하후영을 찾아가 권유하기를,
"계포가 황제를 곤경에 빠뜨린 것은 자기 주군에게 충성한 것 뿐입니다. 신하는 각자의 군주를 위해 충성을 다할 뿐인데 그렇다고 항우의 신하를 다 죽여야 합니까? 또한 황제께서 천하를 얻은지 얼마 되지 않아 사사로운 원한으로 그를 죽이려고 하니 이는 황제의 도량이 좁다는 것을 천하에 보이려 하는 겁니다. 더군다나 그러다가 계포가 흉노로 도망가기라도 한다면 더 큰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말에 마음이 움직인 하후영은 곧 유방을 찾아가 이를 고했다. 유방 또한 계포를 용서해 주었으며 계포는 유방을 알현하여 사죄하고 낭중[2] 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여후 집권기는 물론 (실질적인 3대 황제인) 한문제 때까지도 살아남아서 중랑장[3] , 하동[4] 태수 등을 역임했다.
혜제 시절 묵돌의 능서[5] 로 격분한 여후가 흉노와의 전쟁을 논하다가 번쾌가 "저에게 10만 군사를 주면 내가 저놈들을 밀어버리겠소!"라고 말하자 다른 신하들은 여후의 눈치를 살피느라 맞장구를 치기에 급급했지만 오직 계포만 "고조께서도 40만이 넘는 병사와 명장들을 이끌고 원정을 떠났으나 흉노에게 패하고 고조도 간신히 살아왔는데 번쾌 따위가 10만 병사로 흉노를 어쩐단 말입니까. 대놓고 태후를 우습게 여기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지난 초한전쟁의 상처도 다 낫지 않았는데 저따위 헛소리로 아첨을 해 천하를 흔들려 하니, 당장 목을 베어야 합니다."라는 말로 번쾌를 버로우시켜 버리고 여후도 흉노 정벌 논의를 그만두었다. 사실 이때 이미 군사적으로 묵돌에게 맞설 만한 한신, 팽월, 영포 같은 제후나 왕은 이미 유방 시절에 다 숙청된 후였고 초한전쟁을 겪은 개국공신들은 이미 일선에서 은퇴할 나이였으며 결정적으로 당시 상황으로는 흉노를 토벌 할 만한 군사를 모으는것 자체가 불가능하였다.[6] 하마터면 나라를 또 한 번 크게 말아먹을 뻔한 걸 계포가 잘 막아준 셈이다.
이후 문제가 즉위한 후 누군가가 당시 하동 태수로 있던 계포를 현명하다고 평하자 문제가 계포를 장안으로 호출하여 어사대부로 임명하려고 했다. 그런데 또 다른 사람이 계포가 용맹하고 강직하지만 주정뱅이라서 가까이 하기 힘들다고 했다. 이 때문에 문제는 계포를 임명하는 데 주저했고 이 사이 한 달이 지나버려 황제를 알현하지 못하고 임지로 돌아가게 되었다. 돌아가면서 문제에게 "신을 아무 까닭 없이 부르신 것은 누군가가 신을 터무니없이 칭찬한 까닭이고, 신이 어떤 명도 받지 못하고 돌아간 것은 누군가가 신을 헐뜯었기 때문인데 이런 식으로 한 사람의 말만 듣고 신하를 오고 가게 하는 것은 황제께서 할 일이 아닙니다"라고 진언했다. 문제는 부끄러워하면서 그를 하동 태수의 원래 관직으로 돌려보냈다. 이 때 문제는 미안하긴 했는지 계포에게 "하동은 짐의 손발과 같은 군이기 때문에 경을 부른 것이오"라고 말했다.
초나라 출신 조구생(曹丘生, ? ~ ?)이라는 사람은 말빨이 좋아서 권세에 아부하여 돈을 얻었다고 한다. 특히 문제의 황후인 효문황후 두씨의 오빠 두장군(窦長君, ? ~ 기원전 154)과 사이가 좋았는데, 계포는 두 장군에게 조구생을 가까이 하지 말 것을 청했다. 조구생은 계포를 만나기 위해 두장군의 소개장을 얻고자 했는데, 계포가 조구생을 싫어한 것을 알았던 두장군은 만나지 말 것을 권했지만 조구생은 끝내 소개장을 얻어 계포를 만나러 갔다. 조구생을 맞은 계포는 크게 화를 냈는데, 조구생은 대뜸 계포에게 이렇게 말했다.
"초나라 사람들 사이에 '황금 1백근을 얻는 것보다 계포의 허락을 받는 것이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장군은 어떻게 그런 명성을 얻으셨습니까? 저도 귀공도 모두 초나라 사람인데 제가 돌아다니며 장군의 이름을 널리 선양하면 귀하게 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말에 넘어간 계포는 조구생을 여러 달 동안 머물게 하며 크게 대접하고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후 계포의 명성이 높아진 것은 조구생 덕분이라고 사기 계포열전에서 말한다. 여기서 나온 말이 바로 한 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의미의 계포일낙(季布一諾)이다. 계포는 특히 부탁받은 것을 거절하지 못한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어쨌든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초한전쟁 내내 항우 측에 있었음에도 진작에 항우에게서 전향했던 한신, 팽월, 영포 같은 공신들보다 되레 말년을 아름답게 지낸 재미있는 상황을 볼 수 있다. 문제 치세까지 살았던 것을 보면 제법 장수했던 모양. 덕분에 사마천이 살았던 시기까지 기록이 많이 남아서인지 자신의 열전을 가지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초한쟁패기의 시대의 인물들 중에서 서초의 인물로서는 진정한 인생의 승리자 반열에 올랐다 할 것이다.
역사서의 완성을 위해 사형 대신 궁형을 택한 사마천은 계포에 대해 이렇게 극찬하였다.
"현능한 사람이야말로 진실로 헛되이 죽지 않는 법이다. 분함을 이기지 못해서 목숨을 끊는 게 용기가 아니라, 비겁하게 욕을 보더라도 자신의 능력을 믿고 한나라의 명신이 된 계포야말로 진정한 용기를 보였다."
3. 초한지[편집]
초한지에서는 용저, 종리말과 함께 항우군을 대표하는 명장으로 등장한다. 여기서는 범증을 설득한 인물도 계포로 나오며, 지용을 겸비한 인재로 묘사된다. 후에 범증이 은퇴하고 죽게 되자, 은근스럽게 항우에게 조언을 하고 계책을 내놓는 모사 역할을 겸하면서 범증의 빈 자리를 메꾸는 캐릭터가 되긴 하는데 항우가 그다지 들어먹지를 않는게 문제다...
고우영 초한지에서는 고우영 삼국지의 조조와 똑같은 얼굴로 등장한다. 등장인물 소개에서 대놓고 '삼국지에서 조조로 분해 남우조연상을 받았던 친구. 이번에는 항우의 똘마니 역을 맡았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쯤 되면 유비, 조조, 제갈량 캐릭터는 고우영 화백 작품의 레귤러 멤버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지도 모른다. 또한 검열당한 판본에서는, 항우가 죽은 뒤 종리말과 도망다니다가 헤어진 후 신분을 숨기고 하인으로 지내던 중, 하후영을 통해 사면받는 부분을 처음부터 새로 그렸는지 그림체가 확연하게 다르다. 기존 판본에 비해 그림체가 더 무겁고 자세한 편. 무삭제본에서는 이 부분이 통째로 사라졌고 계포가 유방 앞에서 용서를 비는 딱 한 장면만 나온다.
문정후 초한지에서도 항우 휘하에서 가장 신뢰받는 장군 중 한명으로 등장한다. 요코하마 미츠테루 만화에서처럼 범증을 설득하는 것도 계포가 맡는데, 계포의 예의바른 모습과 정성에 감동해서 속세로 내려가지만 범증은 바로 그 다음 컷에 별을 보다가 초나라의 왕기가 오래 못 갈 것임을 알아챈다(...). 유방이 황제가 된 뒤 전국의 군관을 총동원해 수배령을 내리자 자수해 오는데, 나라도 망했고 황제를 볼 낯이 없는데 항우와 함께 오강에서 죽지 못한 것이 한이라며 슬퍼하자 충심에 감동한 유방이 사면해주고 벼슬도 내린다. 항백과 함께 초나라 출신 인물들 중에 가장 끝이 좋았던 캐릭터.
4. 대중매체에서[편집]
드라마 초한전기에선 11화부터 출현. 배우는 이병연, 한국 더빙판 성우는 백경훈. 보통 초한지 매체에서 차분하고 지략있는 장수로 그려지는 반해 성급하고 혈기넘치는 성격으로 나온다.
요코야마 미쓰테루의 항우와 유방에서도 초군의 메인 캐릭터. 무용보단 지장 또는 사려깊은 무장으로 그려진다. 범증을 설득한 것도 계포이며, 사로잡은 영양성 수비대장 종공의 항복 설득 또한 계포가 한다. 그러나 군무 부분에서 종리매보단 덜 언급된다. 사면초가 시기 종리매와 함께 병졸 복장으로 항우를 버리고 도주한다. 종리매, 영포 등이 관중 점령 이후 갑옷에 변화가 있는데 반해 한결같이 똑같은 갑옷을 유지한다.
시바 료타로의 항우와 유방에선 1권에서만 나온다. 소평 접대연에서 나오는데 소평은 계포를 보자마자 '마냥 느긋한 소'를 연상했다. 이런 기풍이 장졸, 참모들의 애정을 사 목숨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평한다. 하지만 이후 언급이 없다. 게다가 종리매, 용저가 2대 명장 취급인데 그 반열에 끼지도 못한다...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 에서 다른 초한쟁패기 인물과 같이 등장, 패왕항우의 패에 창병으로 등장한다. 특이하게도 본문에서 언급한 계포일낙이 특성으로 구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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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계포를 도망치게 하기 위한 주씨의 계책. 이를 수행하기 전에 주씨는 계포에게 "제 말을 안 들으시겠다면 목숨을 끊으시지요"라고 권유했고 계포는 그의 말을 군소리없이 따랐다.[2] 郎中, 궁문을 지키고 수레나 말을 모는 등 황제를 시종하는 일. 아무리 용서해줬다지만 몇 년 전까지 자기를 괴롭혔던 적장 출신 인물을 신변 호위 담당으로 삼은 격으로 이는 유방의 배포를 외부에 알리는 의도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3] 中郞將, 황제의 호위와 궁중의 경비를 맡은 광록훈(光祿勳)에 속하는 무관직[4] 지금의 산서성 윈청시[5] 能書, 잘 쓴 글씨를 말하지만 여기에서는 욕설과 중상(中傷)을 의미한다. 묵돌이 여후에게 보낸 서신 내용은 노골적인 성희롱이었다.[6] 초한전쟁으로 인해 인구가 반 이하로 줄었던 상황이었다. 물론 그 사람들이 다 전란으로 죽은 건 아니지만 호적 자체가 사라졌으므로 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 된 상황에서 어떻게 불러모을 방법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