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중국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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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추존 군주
太初祖 | 태초조


제3대 화하 군주
黃帝 | 황제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Yellow_Emperor.jpg}}}
묘호
태초조(太初祖)[1]
시호
황제(黃帝)

공손(公孫), (姬)

헌원(軒轅)
부친
소전(少典)
모후
유교씨(有蟜氏)[2]
생몰
기원전 ?년 ~ 기원전 ?년
재위
? ~ ?

1. 개요
2. 상세
3. 황제릉
5. 정체 논란
6. 기타
7. 대중문화 속의 황제
8. 관련 문서
9.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중국 고대의 전설적인 군주.

소전의 아들. 중국 신화이자 현효청양[3]의 아버지. 요(삼황오제) 임금과 우(하나라) 임금의 고조부이기도 하다. 성은 '공손'(公孫), 이름은 '헌원'(軒轅)이라고 한다. 그래서 공손헌원(公孫軒轅), 황제 헌원씨(黃帝軒轅氏), 헌원씨(軒轅氏)라고 부른다. 그 외에도 유웅씨(有熊氏)라고도 하고 제홍씨(帝鸿氏)라고도 부른다.[4] 흔히 알려진 명칭인 황제(黃帝)라는 명칭은 재위 기간 중에 황룡이 나타나 토덕의 상서로운 징조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삼황(三皇)에 이어 중국을 다스린 오제(五帝)들의 첫 번째 왕이며, 사실상 신화로 여겨진 삼황과 다르게 황제를 필두로 한 이들 오제(五帝)들은 실존한 제왕들로 추앙되었고, 그중에서 황제는 중국 문명의 시조로 여겨졌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도 언급되었다.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오제의 필두다. 황보밀의 《제왕세기》에서는 삼황의 첫 번째로 언급된다. 《전국책》, 《주역》, 《예기》, 《회남자》에서는 오제의 세 번째, 나머지 기록에서는 오제의 첫 번째이다. 사후 신나라를 세운 왕망이 '태초조'(太初祖)로 추존했다.

서양제우스가 있다면 동양엔 황제 헌원씨가 있다는 말 그대로 중국 신화의 주신이다. 한국의 단군처럼 중국의 한족들이 전설적인 시조로 가장 흔히 일컫는 존재이기도 하다. 황제에 염제 신농까지 포함해서 '염황의 자손'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대만에서 사용하는 중화민국 국기가에서도 '염제와 황제의 후손'(炎黃世冑)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현대 중국에서 가장 널리 통용되는 설에 따르면, 황제 헌원씨는 기원전 2716년에 태어나 20세가 되는 기원전 2697년에 즉위했고, 119세가 되는 기원전 2598년 천제(天帝)가 보낸 을 타고 승천했다고 한다. 황제 헌원씨의 즉위년을 원년으로 삼은 연호가 '황제기원'이다.

본래 황제 헌원씨는 고대 중국에서 받들던 신격이었다고 추정한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신격이 점차 신이한 힘이 있는 위대한 인간 군주로 격하되어 고서에 기록되었다.


2. 상세[편집]


황제는 화하(華夏)라는 실체를 구성했다고 일컬어지는 전설상의 군주로, 사마천은 삼황오제에서 삼황 부분은 전설이라고 치부해 아예 언급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오제부터는 <본기>(本紀)로 저술했으므로 이 부분부터는 역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5] 그리고, 황제라는 칭호는 '황천상제'(黃天上帝)를 줄인 것으로 '천상의 위대한 신'이란 뜻이다. 이에 걸맞게 천상과 지상을 호령하는 위대한 신이자 군주였다고 한다. 끝없는 싸움과 투쟁의 결과로 지배자가 되었기에, 중국에서 황제 공손헌원을 묘사할 때에는 한손에 항상 헌원검[6]이라고 하는 칼을 쥔 전쟁군주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고대의 다른 전승에 나오는 황제 헌원씨는 인간이 아닌, 확실히 신(神)이다. 제(帝)는 본래 인간의 군주를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었다. 고대 동아시아의 종교는 가문의 조상을 다른 종교의 신에 상당하는 대상으로 섬기는 구조(가부장이 제사장의 역할을 수행)였는데, 이 조상신을 부르는 이름이 제(帝)였으며, 좀더 정확히는, 상나라의 가장 고귀한 가문인 자(子)성 왕실의 조상을 신격화하여 제(帝)라고 불렀다.[7][8] 따라서 노란(黃) 제(帝)라고 불리는 존재가 본래 인간이 아님은 명백하다. 그러나 이 존재를 고대의 위대한 인간 군주로 보는 시각이 퍼진 이래로, 책세상에서 펴낸 《만들어진 민족주의 황제 신화》에 나오듯이 헌원은 역사적으로 수도 없이 덧칠되었다. 《포박자》에 보면 황제가 동서남북 사방의 여러 나라의 신선들을 만나 가르침을 얻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개중에는 청구국(고대 한국)의 자부선인이란 신선도 있다. 참고로, 상나라를 엎고 개국한 주나라의 희(姬)성은 자신들의 조상신을 천(天)으로 칭하며 하늘에 대입하고, 이것으로 제(帝)를 대체하는 프로파간다를 행하였다. 천자라는 명칭도 이에서 유래되었다.

황제 공손헌원은 신화적으로 창조신이자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도구들을 만들어낸 발명의 신이기도 하며, 백성들에게 처음으로 글자를 배포한 것은 물론, 천문과 역산 등의 다양한 기술과 생활양식을 구성해내어 백성들에게 안정된 삶을 보장해주었다고 한다.[9] 신화상에서 황제, 즉 신으로서 황제 공손헌원은 얼굴이 4개 있어 동서남북으로 자신의 땅을 바라볼 수가 있었고, 그가 움직일 때에는 많은 동물들이 행렬을 뒤따랐다고 한다. 황제는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왕위를 내려놓고 수련하여 신선이 되어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그리고, 단순히 얼굴이 넷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름에 누를 황(黃)자가 들어가는 신답게 노란 용, 즉 황룡의 모습으로도 묘사되곤 한다. 노란색은 황제가 흙의 기운을 지녔기 때문이고, 용이기 때문에 모든 기상현상 그 자체를 마음대로 주관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즉, 황제는 비바람 등을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었다.[10] 황제는 전설 속 곤륜산에서 머무는데, 천계와 곤륜산을 오가며 천하를 다스렸다고 한다. 그러면서, 오행 중에 토()를 관장하며, 그 자체로 전쟁의 신이었다고도 한다.

황제는 모든 신 위에 군림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귀신과 요괴들을 지배했다. 천하를 순시하다 동해 바닷가에 이를 때 백택이라고 하는 짐승으로부터 1만 1520종 귀신과 요괴들의 모습을 배웠기에 이후로 귀신과 요괴들은 전처럼 마음대로 날뛸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황제를 보필하는 신하인 후토는 유명(幽冥)세계의 통치자이자 귀신나라의 왕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황제는 신도와 울루에게 세계를 떠도는 귀신들을 다스리게 했다고도 한다.

그러면서, 염제 신농의 뒤를 이어 차지한 중앙의 상제자리를 물러난 이후에는 동서남북과 중앙의 신 중 중앙의 자리에서 사방을 관리하는 신이 되었다고 한다. 거기에, 이 황제는 백성들의 질 높은 삶을 구축해낸 인물일 뿐만 아니라, 모든 신들로부터 인정받은 덕망이 높았던 임금이라고 한다.

《사기》의 기록은 신이었던 황제를 위대한 인간 황제 공손헌원으로 역사화했다.《사기》에 따르면 성은 공손(公孫), 이름은 헌원(軒轅)이라 했는데, 태어나면서부터 말을 하였으며, 남들이 걸음마도 떼지 못했을 때 이미 뛰어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근근히 쳐들어오면 막고, 나면 먹고 안 나면 굶는 느슨한 공동체 생활을 보고 잠시 생각하더니, , 방패, 수레(바퀴)[11], , 글자, 거울, 60갑자, 팔괘 등을 만들어 문명을 크게 일으켰다고 한다. 안 만든게 없다는 만능의 인물. 심지어 그의 스승들과 함께 한의학을 정리한 것이 《황제내경》이라고 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전설이고, 훨씬 뒤에 황제의 이름을 빌려 만들어진 책이라는 게 정설이다. 거기다 내용도 상당 부분이 공손헌원이 신하이자 스승이었던 기백천사에게 질문하고 가르침을 받는 구조다.

《사기》에 따르면 황제 공손헌원에게는 아들 25명이 있었고, 그 중 14명이 부왕 공손헌원의 성을 이어받아 수천 년 후 황하 평원을 가득 채울 부족이 되었고, 중국 역대 왕조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역시 삼황오제이자 황제의 뒤를 이어 신들을 지배하게 된 전욱 고양씨, 동해의 신 우호와 북해의 신 우경, 대홍수를 다스린 곤과 부자 등 이름난 신들과 영웅들을 비롯하여 중원의 한족과 변방의 일부 종족들이 바로 이 황제의 후예로, 이 때문에 황제 공손헌원은 중국인의 시조가 된다고 한다.

그가 부족의 우두머리가 되었을 때, 중국의 왕이라 할 수 있는 세력은 농업의 아버지인 염제 신농(神農)이었고, 노쇠한 신농의 나라를 북동에서 내려온 치우(蚩尤)의 세력이 늘 노리고 있었다. 황제는 신농과의 주도권 싸움을 3차례 벌여 세 번 다 승리하고 거대한 연맹체를 구성, 치우와 일대 결전을 벌여 결국 탁록 땅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그 뒤 황제는 1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자신이 죽을 날을 선택하고 용을 타며 승천하였다고 한다. 그때 신하들이 같이 올라가려고 들어 용을 붙잡고 수염이 뽑혀서 떨어지는 등의 추태를 보였다는 기록이 있다.(…)

아내는 총 4명이 있었다. 그중 조강지처이자 본부인이며 첫 번째 부인은 서릉씨(西陵氏) 누조(嫘祖)인데, 비단과 양잠을 발명했고 황제와의 사이에서 많은 자손을 두었다고 한다. 네 번째 부인은 모모(嫫母)라고 하는 여자인데 외모가 추했으나 거울을 발명했다고 한다. 수시로 바람도 피우고 다니며 결혼 생활을 개막장으로 해서 아내인 헤라의 속을 어지간히 썩였던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와 달리, 황제는 바람도 피우지 않았고 건전한 결혼 생활을 하였다.

황제의 존재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보기 힘들다. 설령 황제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존재했다고 해도 그가 모든 것을 다 만들었다는 것은 후세 사람들의 첨삭이 있었을 것이다. 단 그의 존재가 후세에도 '이상적인 군주'로서 추앙받았다는 것을 볼 때 그런 인물이 실제 있었다기보다는 그런 인물이 '필요'했기 때문에 황제는 존재했다고 볼 수 있겠다.

워낙 대단한 인물로 묘사되고 동양에서 학술적 내용의 연원을 고대에서 찾는 경향이 있어 각종 학파의 시조가 되기도 한다.

황제는 여러 가지 진귀한 물건도 소유했었다. 그중에 현주(玄珠)라는 검붉은 구슬이 있었는데 세상만사를 꿰뚫어볼 수 있는 신통한 것이었으나 황제가 분실했다고 한다. 한 신통한 여인이 이 구슬을 얻어 황제가 되찾으려 군사를 보냈으나 여인은 이 구슬을 삼키고 바다에 몸을 던졌고, 곧 말의 머리를 한 해룡이 되었다고 한다. 《황제음부경》(黃帝陰符經)은 황제가 집필한 서적이라고 전하는데, 모호한 말로 쓰여서 혹자는 병법서, 도사들은 도가의 경전, 문인들은 유가의 말을 적은 책이라 여겼다고 한다.

그러면서, 달리 함푸뉴로 불리는 것은 물론, 토성[12][13]무모신이기도 하다고 한다.


3. 황제릉[편집]


파일:Xuanyuan_Temple_in_Huangling,_Yan'an,_Shaanxi.png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산시 성 옌안 시에는 황제의 무덤이 실존하고 있다. 물론 전설에서 황제는 등선했다고 전해지므로 이 무덤은 의관총이다. 이곳은 중국의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전국 중점 문물 단위로 지정되었다. 분류상 고묘장(古墓葬)의 1호로 천하제일릉이라고도 부른다.

허난성 링보현에도 황제릉이 존재하는데, 2020년 현재 바이두 백과에 황제릉을 검색하면 이 쪽이 나온다.


4. 황제기원[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황제기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황제가 처음 즉위했다고 하는 기원전 2697년을 원년으로 하는 황제기원이 청나라 말기에 사용되기도 했고, 중국에서 더러 비공식적으로 사용되곤 했다.

'황제기원'은 일본의 '황기'를 보고 자극받은 중국 지식인들이 창안한 것이다. 일본제국 당시 일본은 천황 즉위에 따른 연호를 사용하면서도, 동시에 진무 덴노가 즉위했다고 전해지는 기원전 660년을 원년으로 하는 '진무덴노즉위기원'(神武天皇即位紀元), 통칭 '황기'(皇紀)도 병용했는데, 일본제국에 유학을 온 중국의 지식인들이 이를 보고 '황제기원'을 다시 떠올린 것이다.

처음 '황제기원'을 주장했을 때는 원년을 어느 해로 정할지 사람에 따라 수백 년씩 널뛰기를 했으나[14] 1905년부터 기원전 2697년을 원년으로 하는 것이 널리 퍼졌다. 기원전 2697년은 최초의 '상원갑자'(上元甲子)라고도 전하기 때문에, 옛 중국인들이 상당히 인위적으로 정한 해임을 짐작할 수 있다. 요와 우가 실존했다면 훗날 헌원씨로 불리게 되는 요와 우의 고조부는 황제기원보다 훨씬 수백년 뒤에 살았을 것이다.


5. 정체 논란[편집]


황제 헌원씨는 천자(天子)로서 사마천의 《사기》 <오제본기>의 시작이었다. 또한 중국 한(漢)족의 전신인 화하족의 시조로도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이와 다른 기록들도 존재하는데, 《사기》의 삼가(三家) 주석인 《사기집해》에는 응소가

'치우는 옛 천자'(蚩尤古天子)

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헌원의 직책에 대해 운사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昔者黃帝氏以雲紀 故爲雲師而雲名

옛적에 황제씨는 구름으로써 관명을 기록하였다. 고로 백관과 사장을 모두 운자로 이름하였다.

《춘추좌전》 '소공 17년'

《사기》 <오제본기>에도 헌원의 직책이 운사라고 나온다. 또한 상고시대의 기록인 《금문》을 보면 헌원이 왕위에 올랐다는 내용이 없다. 중국 고대 왕의 계보는 신농으로부터 시작하며 신농 열산씨-소호 금천씨-전욱 고양씨-제곡 고신씨-제지 청양씨-제요 도당씨-제순 유우씨--백익으로 나온다. 또한 진나라의 진시황제나 한나라 태조인 유방이 전쟁 전에 헌원이 아닌 치우에게 제사를 지낸 기록들도 나온다.# [15] 그래서 헌원과 치우에 대해서 다르게 보는 시각도 있다.

한편, 청나라 말기 강유위, 고힐강 등의 의고학파에서는 황제 신화를 비롯한 삼황오제의 신화 자체를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역사성을 부인하고, 전국시대에서 위진남북조시대에 걸쳐 종교적 영향으로 꾸며진 신화 정도로 판정하기도 했다. 일본에서도 시라토리 구라키치, 이치무라 신지로, 이이지마 타다오 등이 황제의 실존을 부정하는 논문을 저술했다고 한다. 이런 황제가 다시 역사적 실존인물로 규정되고 있는 것은, 1990년대 이후 중국 학계가 정부의 개입 아래 한족 중심의 민족주의적인 영향으로 황제 신화를 한족의 국조 설화로 중요시 여기면서, 황제나 치우를 역사적 실존인물로 구축하는 작업을 진행한 영향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16]

황제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는 《황제내경》 역시 황제를 저자로 내세워 권위를 얻으려 했을 뿐, 실제 저작은 한나라 시기로 추측되며 황로백서라고도 불리는 황제사경을 비롯한 다른 황제 저작의 서적들 역시 황제를 저자로 내세운 위서일 확률이 높다고 한다.


6. 기타[편집]


  • 사자자리레굴루스를 중국에서는 '헌원대성'이라고 부른다.
  • 테메레르 시리즈》에서는 한나라의 건국을 도운 최초의 셀러스티얼 '황제'가 존재하며, 황제가 쓴 병법서가 있다고 한다. 황제 헌원씨에서 모티브를 딴 듯. 어쩌면 셀러스티얼 황제가 황제 헌원씨일지도 모른다.
  • <여신전생 시리즈>에서는 황제라는 이름으로 영걸 혹은 영웅 종족의 악마로 등장한다.
  • 전생검신》 - 해당 항목으로.


7. 대중문화 속의 황제[편집]


  • 공손헌원 - 소설치우천왕기
  • <에이지 오브 미쏠로지 - 용의 이야기>에서 중국 문명의 고전 시대 하위 신으로 등장한다.
  • 천국의 신화》 - 2부에서 치우의 라이벌로 나온다. 서왕모의 아들로서 반고[17]의 손에 자란다. 서왕모의 아들답게 선천적으로 동물과 소통할 줄 알고, 무예에 매우 능통하다. 치우와 7년간 대립한 결과 거의 파멸할 뻔하지만 치우가 흑화로 인해 가신들에게 살해당한 후 자신의 땅으로 돌아가서 평화로운 시대를 이끈다고 에필로그에 언급된다. 순수한 선인도 악인도 없는 해당 작품답게, 헌원은 악인임에도 의외로 인간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황토인의 군주로 추대되자마자 자신에게 극진한 예를 다 하는 반고에게 '우리 친구인데 왜 그러냐'며 끝까지 반고를 신하라기보단 오랜 친구로 대했고, 자신의 사랑을 거부하고 정조를 지키는 히로인을 죽일 수 있음에도 차마 죽이거나 매몰차게 대하지 못했다. 또, 대전쟁이 끝난 후 내분의 씨앗을 없애고자 반고를 죽일 때[18], 반고의 마지막 부탁을 약속하고 그가 죽자 매우 슬퍼하며, 냉혈하면서도 타인과의 약속을 중요시 여기고, 사람 짐승 가리지 않고 허물없이 대하는, 잔인한 악인이면서도 자신의 백성들 앞엔 모범적인 군주인 캐릭터이다.



8.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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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 · 구백 · 정백 · 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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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진 분립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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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성 전씨(嬀姓 田氏)

진완 · 전맹이 · 전맹장 · 전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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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왕 · 제왕 건}}} ||<-2> 공자 ||<-2> 진승 · [[오광(초한쟁패기)|{{{#black,#e5e5e5 오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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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rowbgcolor=#fff,#191919> 박태후 · 두태후 · 왕태후 · 위황후 · 구익부인 ||<-2> 유교 · 유수 ||<-2> 유고 · 유택 ||
||<-2> 52권 「제도혜왕세가(齊悼惠王世家)」 ||<-2> 53권 「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 ||<-2> 54권 「조상국세가(曹相國世家)」 ||
||<-2><rowbgcolor=#fff,#191919> 유비(劉肥) ||<-2> 소하 ||<-2> 조참 ||
||<-2> 55권 「유후세가(留侯世家)」 ||<-2> 56권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 ||<-2> 57권 「강후주발세가(絳侯周勃世家)」 ||
||<-2><rowbgcolor=#fff,#191919> 장량 ||<-2> 진평 · 왕릉 · 심이기 ||<-2> 주발 ||
||<-6><width=1000> 58권 「양효왕세가(梁孝王世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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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59권 「오종세가(五宗世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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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61권 「백이전(伯夷傳)」
62권 「관안전(管晏傳)」
63권 「노자한비전(老子韓非傳)」
백이 · 숙제
관중 · 안영
노자 · 장자 · 신불해 · 한비
64권 「사마양저전(司馬穰苴傳)」
65권 「손자오기전(孫子吳起傳)」
66권 「오자서전(伍子胥傳)」
사마양저
손무 · 손빈 · 오기
오자서
67권 「중니제자전(仲尼弟子傳)」
안회 · 민손 · 염경 · 염옹 · 염구 · 중유 · 언언 · 복상 · 전손사 · 증삼 · 담대멸명 · 복부제 · 원헌 · 공야장 · 남궁괄 · 공석애 · 증점 · 안무요 · 상구 · 고시 · 칠조개 · 공백료 · 사마경 · 번수 · 자유 · 칠조개 · 공서적 · 양전 · 안행 · 염유 · 조휼 · 백건 · 공손룡
68권 「상군전(商君傳)」
69권 「소진전(蘇秦傳)」
70권 「장의전(張儀傳)」
상앙
소진
장의
71권 「저리자감무전(樗里子甘茂傳)」
72권 「양후전(穰侯傳)」
73권 「백기왕전전(白起王翦傳)」
저리질 · 감무
위염
백기 · 왕전
74권 「맹자순경전(孟子荀卿傳)」
75권 「맹상군전(孟嘗君傳)」
76권 「평원군우경전(平原君虞卿傳)」
맹가 · 순경
전문
조승 · 우경
77권 「위공자전(魏公子傳)」
78권 「춘신군전(春申君傳)」
79권 「범수채택전(范睢蔡澤傳)」
위무기
황헐
범수 · 채택
80권 「악의전(樂毅傳)」
81권 「염파인상여전(廉頗藺相如傳)」
82권 「전단전(田單傳)」
악의
염파 · 인상여
전단
83권 「노중련추양전(魯仲連鄒陽傳)」
84권 「굴원가생전(屈原賈生傳)」
85권 「여불위전(呂不韋傳)」
노중련 · 추양
굴원 · 가의
여불위
86권 「자객전(刺客傳)」
87권 「이사전(李斯傳)」
88권 「몽염전(蒙恬傳)」
조말 · 전저 · 예양 · 섭정 · 형가
이사
몽염
89권 「장이진여전(張耳陳餘傳)」
90권 「위표팽월전(魏豹彭越傳)」
91권 「경포전(鯨布傳)」
장이 · 진여
위표 · 팽월
영포
92권 「회음후전(淮陰侯傳)」
93권 「한신노관전(韓信盧綰傳)」
94권 「전담전(田儋傳)」
한신
한신 · 노관 · 진희
전담
95권 「번역등관전(樊酈滕灌傳)」
번쾌 · 역상 · 하후영 · 관영
96권 「장승상전(張丞相傳)」
장창 · 주창 · 임오 · 왕릉 · 신도가 · 위현 · 병길 · 전문 · 황패 · 위현성 · 광형
97권 「역생육가전(酈生陸賈傳)」
98권 「부근굉사전(傅靳蒯成傳)」
99권 「유경숙손통전(劉敬叔孫通傳)」
역이기 · 육가 · 주건
부관 · 근흡 · 주설
유경 · 숙손통
100권 「계포난포전(季布欒布傳)」
101권 「원앙조조전(袁盎鼂錯傳)」
102권 「장석지풍당전(張釋之馮唐傳)」
계포 · 난포
원앙 · 조조
장석지 · 풍당
103권 「만석장숙전(萬石張叔傳)」
104권 「전숙전(田叔傳)」
105권 「편작창공전(扁鵲倉公傳)」
석분 · 장숙
전숙
진월인 · 순우의
106권 「오왕비전(吳王濞傳)」
107권 「위기무안후전(魏其武安侯傳)」
108권 「한장유전(韓長孺傳)」
유비(劉濞)
두영 · 전분
한안국
109권 「이장군전(李將軍傳)」
이광
110권 「흉노전(匈奴傳)」
흉노
111권 「위장군표기전(衛將軍驃騎傳)」
112권 「평진후주부전(平津侯主父傳)」
위청 · 곽거병
공손홍 · 주보언
113권 「남월전(南越傳)」
114권 「동월전(東越傳)」
115권 「조선전(朝鮮傳)」
조타
추무제 · 추요
위만
116권 「서남이전(西南夷傳)」
야랑 · 전국 · 공도 · 백마국
117권 「사마상여전(司馬相如傳)」
사마상여
118권 「회남형산전(淮南衡山傳)」
119권 「순리전(循吏傳)」
120권 「급정전(汲鄭傳)」
유장 · 유안 · 유사
손숙오 · 자산 · 공의휴 · 석사 · 이리
급암 · 정당시
121권 「유림전(儒林傳)」
신공 · 원고생 · 한생 · 복생 · 동중서 · 호무생
122권 「혹리전(酷吏傳)」
질도 · 후봉 · 영성 · 주양유 · 조우 · 장탕 · 의종 · 왕온서 · 윤제 · 양복 · 감선 · 두주
123권 「대완전(大宛傳)」
대완 · 강거 · 오손 · 엄채 · 대월씨 · 대하 · 조지 · 안식국
124권 「유협전(遊俠傳)」
125권 「영행전(佞幸傳)」
곽해 · 주가 · 극맹 · 전중
등통 · 한언 · 이연년
126권 「골계전(滑稽傳)」
순우곤 · 우맹 · 우전 · 동방삭 · 서문표 · 동곽선생 · 왕선생 · 곽사인
127권 「일자전(日者傳)」
128권 「귀책전(龜策傳)」
129권 「화식전(貨殖傳)」
사마계주
점복
범려 · 자공 · 백규 · 의돈 · 정정 · 도한
130권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
사마천



[1] 《漢書卷·九十九下》:九廟:一曰黃帝太初祖廟,二曰帝虞始祖昭廟,三曰陳胡王統祖穆廟,四曰齊敬王世祖昭廟,五曰濟北愍王王祖穆廟,凡五廟不墮云;六曰濟南伯王尊禰昭廟,七曰元城孺王尊禰穆廟,八曰陽平頃王戚禰昭廟,九曰新都顯王戚禰穆廟。[2] 염제 신농씨의 친모라고도 한다. 이 기록대로라면 황제 헌원씨와 염제 신농씨는 형제이다. 유교씨는 어느 날 큰 번개가 북두칠성의 천추성(天樞星)을 에워싸는 것을 보고 감응을 받아 임신하여 황제 헌원씨를 낳았다.[3] 후대에 황제 헌원씨 공손헌원의 아들 소호 금천씨 공손현효제곡 고신씨 공손준의 아들 제지 청양씨 공손지가 동일인으로 간주되었다.[4] 여기서 (氏)는 중국 상고시대 인물들에게 상투적으로 붙이는 호칭이다. 그래서 황제와 맞서 싸웠다는 치우를 '치우씨'(蚩尤氏)라고도 부른다.[5] 사실 사마천도 이 부분에서는 고민이 많았다. 《사기》는 본디 서주 시대부터 비로소 진정한 역사 시대로 간주하지만, 유교적인 정통성 계승의 관점에서 최소한 한 가지 구심점이 필요했고, 그런 이유로 오제는 예외적으로 <본기>를 서술, 역사 시대처럼 묘사했다.[6] 황제 공손헌원의 칼로 세계에서 가장 단단한 금속으로 만든 칼이라고 한다. 별거 아닐 수가 있으나, 그 당시에 강한 철이라는 것은 농업과 전쟁의 필수요인이었기에 황제의 검은 전쟁은 물론 농경에도 크나큰 영향력을 미쳤다라는 것을 암시하는 물건이다.[7] 《사기》의 <은 본기>에서도 상 왕조의 태조 탕왕은 시조인 설의 14대손이고, 설의 아버지는 오제 중 제곡 고신씨, 제곡의 증조부가 황제 헌원씨로 기록되어 그 흔적을 읽을 수 있다.[8]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관우. 《삼국지》의 그 관우이다. 후에 신으로 봉해진 관우의 별칭은 관제, 관성대제 등으로 제의 호칭을 땄다. 왕족도 아닌데 제란 호칭이 붙을 수 있는 한 가지 사례이다.[9] 이 때문에, 황제는 중국의 발전에 큰 힘을 실은 인물로 평가되면서도, 중국인들은 그를 민족의 시조이자 최초의 황제로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10] 어떠한 문헌에서는 본래 황제가 천둥과 번개도 관장하고 있었으며, 물을 다스리는 신이었다고도 한다.[11] 이름 헌원(軒轅)의 한자에 '수레 거(車)'가 들어간 것이 이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12] 점성술에서 토성은 언제나 법률과 조문과 연관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춥고 느리고 분리적이고, 불행을 가져오는 것은 물론, 고립,두려움,회의론,구실을 가져온다고 한다. 거기에 토성의 수축과 결정화 자체는 세계에 견실함을 만드는 것은 물론, 물리적인 모든 것과 원칙에 지속가능한 형태를 부여하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고 한다. 거기에 고령의 죽음과 연관되어져있으며, 태양처럼 아버지를 의미하기도 하나, 토성에서 말하는 아버지의 의미는 그의 자식들을 그의 뜻대로 만들려 하고, 그의 기준에 따르는 삶을 강요하는, 독재적이고 군림하려 드는 아버지를 상징하며, 그렇기에 아이들은 종종 그러한 지배에 삼켜지게 된다고 한다. 거기에, 토성과 농경의 관계는 곧 시간의 본질을 암시하며, 은퇴와 고령의 황혼기도 다스리며, 제한과 구조를 상징하며, 완벽을 추구하고, 인간을 느리게 하고 무모한 결정을 하는 것을 제지하는 것은 물론, 인내와 자기훈련을 장려하는 것은 물론, 명확성과 구조를 제공하여 혼돈과 무질서에 대한 해독제와 같은 역할을 하고, 모든 일에서 절제를 보존하고 사용케 하는 것의 상징하고, 모든 종류의 낭비와 탐닉을 혐오하며, 모든 것을 제자리에 두고자 함을 상징한다고 한다.[13] 그렇기에 토성은 역경,제한,한정,무의식적 두려움,법과 질서,방어력,인내심,겸손,책임,심각성,엄격,지구력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가 있으며, 그 자체로 카르마와 정의의 집행자임을 상징하며, 자아와 자아를 형성하는 형태와 구조를 뜻하며, 그 자체로 인생의 교휸, 규율, 비판, 경계를 뜻하기도 한다.[14] 기원전 제4천년기가 되기도 한다.민족주의적 감성이 듬뿍 들어간 '단군기원'과 비슷한 양상이다. 애초에 한•중•일 삼국 중에선 그래도 가장 짧은 편인 일본의 진무 덴노 기원부터가 역사학자들에겐 그 진실성을 의심받는 판국이니 말 다했다.[15] 물론 애초에 헌원은 싸움 잘한 덕에 이긴 것이 아니며, 관우처럼 결과적으론 패배한 장군인데도 후대에 추앙받은 케이스가 있는걸 보면 딱히 과할 정도로 이상한 것은 아니다.그리스 신화에서 아레스도 트로이 전쟁에서 아테나에게 패배하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리스인들에게 잘만 섬겨졌다.[16] 사실 민족신화라는게 으레 실존과 허구 논란은 따라오기 마련이다. 당장 단군만 봐도 실존인물이라고 규정할만한 명확한 역사적 근거는 없음에도, 매체의 영향 등으로 실존인물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제법 있는 걸 보면..[17] 인간의 삶과 사람의 몸을 갈망하던 고대 푸른늑대의 후손으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의 중간단계인 늑대인간의 외형을 가졌다. 매우 영특하고 냉정하여 헌원을 강대한 군주로 가르쳤다.[18] 헌원의 스승이자 충신이며 친구인 반고는 정치적으론 헌원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될만한 측근이었다. 때문에 헌원은 반고가 가르쳐 준 대로 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것은 뿌리부터 뽑아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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