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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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천하의 가장 넓은 자리에 머무르고
천하의 가장 바른 자리에 서서
천하의 가장 위대한 도(道)를 실천할 줄 알아야 한다.
뜻을 얻으면 사람들과 함께하고
뜻을 얻지 못하면 혼자서라도 그 도[2]
를 행한다.그러므로
부귀도 그를 타락시킬 수 없고
빈천도 그를 비굴하게 할 수 없으며
어떤 폭력도 그를 굴복시킬 수 없다.
이것을 일컬어 대장부라 한다.
《맹자》 〈등문공 장구 하(下)〉 [3]
전국시대의 철학자, 정치사상가로 본명은 맹가(孟軻)이다. 맹자는 의(義)[5] 를 강조하여 인(仁)[6] 의 위치에 같이 놓아둠으로써 공자[7] 의 사상을 보충하고 발전시켰다. 우리는 사람답지 못한 행동을 봤을 때, 차마 저렇게까지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그것을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만약 권력자가 사람답지 못한 행동을 해서 백성들을 크게 괴롭한다면, 백성들은 그런 윗사람을 끌어 내려도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권력자는 백성들을 위해 정치해야 되고, 백성들은 부당한 권력을 휘두르는 권력자에게 저항한다'는 의로움(義)의 개념은, 사람다움(仁)을 지키기 위해 마땅히 가야할 길[8] 로 여겨져서 맹자를 대표하는 핵심 사상이 된다.하늘은 큰 일을 맡기고자 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먼저 그 사람의 마음과 의지를 고통스럽게 한다.
그의 몸을 수고롭게 하고
굶주림에 시달리게 하며
그의 처지를 궁핍하게 하니
하는 일마다 어긋나게 만든다.
이는 인내하는 성품으로 마음을 움직여서
그가 잘할 수 없었던 일에
보태어 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주자는 그를 진(秦)나라 이전 유학의 마지막 적통으로 평가했는데, 그 영향으로 인해 오늘날까지 흔히 공자와 묶여 공맹(孔孟)으로 언급되어 유교의 대표 인사로 꼽히고 있다. 때문에 그를 표현하는 호칭 역시 공자에 준하는 '아성(亞聖)'[9] 으로 불린다. 원 문종 3년(지순至順 원년, 1330년)에 추국아성공(鄒國亞聖公)[10] 으로 추봉(追封)되었고, 이것이 현재 성균관 대성전 등지의 공문 사당(孔門祠堂) 위패에 표기되는 공식 존호이다. 라틴어로는 멘치우스(Mencius).[11][12] 그의 대표적인 제자로는 만장과 공손추 등이 있다.
부당한 권력에 대한 백성의 저항을 옹호하고, "왕의 권력은 백성들이 부여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등 그가 살았던 시대에 비해 매우 진보적인 주장을 하였다. 맹자의 이러한 사상은 계몽주의 이후에 나타나는 사회계약론과 굉장히 닮아 있다.[13] 사실상 근대 서양에서 사회계약론이 태어나기 수천 년 전에 선행해서 등장한 민(民) 본위의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14]
공자가 사망하고 백여년 후 쯤 산둥성 쩌우청에서 맹가가 태어났다. 맹가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어서 편모가정에서 자랐다. 맹가의 어머니 장씨는 아들을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 이사를 세 번 했다는 바로 그 맹모삼천지교와 맹모단기지교로 유명한 현모였고 맹가는 이런 어머니에게 큰 영향을 받아 학교 수업을 마친 뒤 공자의 고향 노나라로 가서 공자의 손자 자사의 문인에게서 공자가 편찬한 육경을 배웠다. 편모가정임에도 자식 교육을 위해서 노력하는 훌륭한 어머니와 좋은 환경 덕분에 그의 재능이 썩지 않을 수 있었으니 축복받은 어린 시절이라고 할 수 있다.
장성한 맹가는 제자백가 시대에 돌입한 당대에 묵자와 양주의 사상과 경쟁하여 유가 사상을 확립했다. 40세 이후에 '인정'과 '왕도정치(王道政治)' 주창하며 천하를 유력했다. 법가나 종횡가가 득세하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은퇴했다.
맹가의 60세 이후의 삶은 알려지지 않았다.
2. 사상[편집]
2.1. 왕도 정치[편집]
"왕은 하필 이로움을 말하십니까? 다만 인의만이 있을 뿐입니다."는 수많은 유학자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킨 말이며, 후대의 모든 유학자들이 이 말을 달고 살았을 정도로 유명한 말이다. 만약 윗사람이 이로움만 쫓게 된다면 아랫사람도 자신의 이로움을 쫓게 될 텐데, 서로 이익을 얻고자 하면 나라의 기강이 무너져서 모두가 큰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는 것. 따라서 윗사람은 '친근함(仁)과 공정함(義)'[17] 으로 아랫사람에게 모범을 보여야 되지, 이익을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8]맹자가 양혜왕을 뵈었다. 왕이 말하였다.
"어르신께서 천리를 멀리 여기지 않고 오셨으니, 역시 내 나라에 이로움이 있겠습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왕은 하필 이로움(利)을 말하십니까? 다만 인의(仁義)만이 있을 뿐입니다.
왕께서 '어떻게 하면 내 나라를 이롭게 하겠느냐'고 말하신다면,
대부(대신)들은 '어떻게 하면 내 집안에 이로울까'를 말하며,
선비나 백성들은 '어떻게 하면 내 몸에 이로울까'를 말합니다.
윗사람이나 아랫사람 모두가 서로의 이익만을 취하게 된다면 나라는 위태로워 질 것입니다.
만승[15]
의 나라에서 그 임금을 죽이는 자는 반드시 천승의 집안이며,천승의 나라에서 그 왕을 죽이는 자는 반드시 백승의 집안입니다.
만승이 천승을 갈취하고, 천승이 백승을 갈취함이 많지 않은 게 아니건만은,
진실로 의리를 뒤로 미루고 이익만을 앞세운다면 모든 것을 다 빼앗지 않고서는 만족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무릇 어질면서 부모님을 버린 사람은 없으며, 의로우면서 임금을 뒷전으로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왕께서는 오직 인의만을 말씀하실 것이지 하필이면 이로움을 말하십니까?"
《맹자》, <양혜왕 상(上)편> [16]
이는 맹자가 평소에 주장한 왕도정치를 뜻하기도 한다. 왕도정치란, 백성의 안정과 인간다운 삶을 최우선으로 하고, 그 목적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힘에 의한 강제적 해결이 아닌, 통치자의 인격과 덕의 감화에 의한 해결이어야 한다는 것.
2.1.1. 항산[편집]
물론 이러한 왕도정치는 마음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백성들의 생활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먼저 펼쳐야 됨을 말하고 있다. 먹고사는 문제가 일단 해결되어야 도덕(仁義)으로 인한 왕도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하자면, 도덕 정치 이전에 최소한의 먹고사는 문제[22] 와 복지가 선행되어야 함을, 맹자는 강조했던 것이다.맹자가 말하였다.
"꾸준한 생업(恒産)도 없이 꾸준한 마음(恒心)을 가지는 것은 오직 선비라야 가능합니다.
만약 백성들에게 꾸준한 생업이 없다면, 이로 인하여 꾸준한 마음도 없습니다.
진실로 꾸준한 마음이 없다면 방탕, 편벽, 사악, 사치하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죄에 빠지고 나서야 벌을 주게 된다면 이는 백성들을 죄로 유도한 것[19]
이니, 어찌 어진 사람이 그 자리에 있으면서 백성들을 죄로 유도할 수 있겠습니까?이 때문에 명군은 백성들의 생업을 만들어서
반드시 위로는 부모를 모시기에 충분하고 아래로는 처와 자식을 양육하기에 충분하여, 풍년에는 늘 배부르게 하고 흉년에는 죽음을 면하게 합니다. 그런 후에야 선(善)으로 몰고가니, 백성들이 따르는 것을 가벼이 여깁니다.
지금은, 백성들의 생업을 만들기가
위로는 부모를 모시기에 부족하고 아래로는 처와 자식을 양육하기에 부족해서, 풍년에도 늘 고생하고 흉년에는 죽음을 면치 못합니다. 이는 다만 죽음에서 구제하는데에도 넉넉치 못할까봐 두려운데, 어찌 예의로 다스릴 겨를이나 있겠습니까?
왕께서 그것을 행하고자 한다면, 왜 그 근본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입니까?
다섯 이랑[20]
의 집에서 뽕나무를 심는다면, 오십살 된 자가 비단옷을 입을 수 있을 것이고닭이나 개, 돼지와 같은 가축이 그 (번식하는) 때를 잃지 않는다면, 칠십살 된 자가 고기를 먹을 수 있을 것이며
백 이랑의 밭에서 그 (농사짓는) 시기를 뺏기지 않는다면, 여덟 식구의 가족이 굶주림을 면할 수 있을 것이고
학교의 가르침으로 삼가고 효제의 의로움을 펼친다면, 머리가 희끗한 노인이 길에서 짐을 이거나 지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노인이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젊은 백성들이 굶지 않고 춥지 않게 하고서도 왕 노릇 하지 못했던 사람은 아직껏 있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맹자》, <양혜왕 상(上)> [21]
2.2. 성선설[편집]
모든 사람은 '사람답지 못한 행동을 봤을 때,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 이 생기는데, 이러한 마음을 갈고 닦아야 된다는 것. 우리는 외부의 유혹에 의하여 악한 짓을 저지르는데, 이런 유혹이 있더라도 자신의 마음 속에서 '차마 저렇게는 못하겠다'는 마음을 키워간다면, 그 어떤 커다란 유혹이 내 앞에서 아른거려도 그 유혹을 쉽게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다. 선한 행위는 단순히 그 '선함'을 배운다고 되는 것은 아니며, 선한 행위는 사람의 감정[24] 에서 출발해야 보다 더 자발적이게 되고 그 동기는 더욱 강해진다는 것이 맹자의 성선설이다.[25] [26]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은 모두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之心)이 있다.
선왕(先王)께서는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이는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정치(政治)도 있다는 것이다.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으로써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정치를 행한다면, 천하를 다스림을 손바닥 위에서 움직이는 것 같이 할 수 있게 된다.
(내가) 사람들 모두가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고 말하는 까닭은,
지금 어떤 사람이 어린아이가 갑자기 우물로 들어가려는 것을 순간적으로 본다면, 모두 두려워 놀라고 안타까워(惻隱)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그 마음은) 어린아이의 부모를 내밀하게 사귀려는 까닭이 아니며, 고을 붕당과 친구들에게 칭찬이 필요한 까닭도 아니고, 그 소리가 나는 것을 싫어해서도 아니다. 이로 말미암아 살펴 보면,
측은해 하는 마음(惻隱之心: 측은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부끄러워 하거나 미워하는 마음(羞惡之心: 수오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물러나서 양보하는 마음(辭讓之心: 사양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음과 그름을 변별할 줄 아는 마음(是非之心: 시비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지심은 어짊(仁)의 실마리이고, 수오지심은 의로움(義)의 실마리이며,
사양지심은 예절(禮)의 실마리이며, 시비지심은 지혜(智)의 실마리이다.
사람이 이 네 가지 실마리(四端)가 있음은 사지(四肢)가 있음과 같다. 이 네 가지 실마리가 있는데도 스스로 잘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자신을 해치는 자이고, 그 군주는 잘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그 군주를 해치는 자이다."
《맹자》, <공손추 상(上)> [23]
당시 제후들은 맹자에게 '왕도정치는 도저히 내가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한 맹자의 대답은 단호하다. 당신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존재하는 착한 심성(사단)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잘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 입니다! 제후들의 어떤 변명도 맹자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맹자는 제후들의 핑계를 '성선설[27] 과 사단'이라는 논리를 통해 분쇄시켰던 것이다.
2.3. 호연지기[편집]
자신의 마음에 떳떳해서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의롭다고 생각되면 저절로 당당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 의로움의 옳고 그름이, 내 마음에 조금이라도 들지 않는다면 어찌 당당해질 수 있겠는가. 의로움은 '외부 환경'[32] 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33] 내가 행한 행동이 내 마음 '내부'에서 한점 부끄러움이 없을 때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의로운 행동과 마음을 쌓다보면(集義: 집의) 어떤 상황에 놓여 있어도 내자신 스스로가 부끄럽지 않기 때문에 떳떳하고도 넓은 마음을 지니게 되는데, 이 사람의 당당한 기운을 일러 '호연지기'[34] 라고 말한다. 부끄러울 것이 하나도 없는데 어찌 당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감히 묻건대 선생님께서는 어떤 장점이 있습니까?"
맹자가 말하기를, "나는 '말(言)'을 알며, 나는 나의 '호연지기'를 잘 기른다."
"감히 묻건대 '호연지기'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맹자가 말하였다.
"말하기 어렵구나. 그 기운됨은 지극히 크고 지극히 굳세니, 곧게 길러서 해로움이 없으면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차고,
그 기운됨은 '의로움(義)'과 '도(道)'에 짝이 되어, 이것이 없다면 위축된다.[28]
이는 의로움이 (안에서) 쌓여서 생기는 것이니, 의로움이 (밖에서) 스며들어와[29]
얻어지는 것은 아니라서,행동함이, (스스로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곧 위축될 것이다.
가 일찍이 의로움을 그 바깥에 두었기에 아직 알지 못한다고 말했던 것이다.《맹자》, <공손추 상(上)> [31]
2.4. 역성혁명론[편집]
맹자가 제나라의 선왕(宣王)에게 말하기를 이와같이 하였다.
"왕의 신하 가운데 그 처자식을 벗에게 맡기고 초(楚)나라로 유람을 간 자가 있었다 하지요. 그자가 돌아와 보니 처자식이 추위에 떨며 굶주리고 있었다고 한다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절교해야 겠지요."
맹자가 말했다. "사사(士師)[35]
가 사(士)[36] 를 다스리지 못한다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왕이 말했다. "파면시켜야 겠지요."
맹자가 말했다. "사방 국경의 안이 다스려지지 않는다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왕은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말을 돌렸다. [37]
《맹자》〈양혜왕장구 하(下)〉 [38]
유교적 민본주의(民本主義)를 설명할 때 가장 자주 인용되는 대목이다. 맹자는 왕 앞에서 대놓고 '잘못된 왕은 갈아 엎어야 한다', '백성을 착취하는 왕과 관료들은 도둑놈이다' 라는 말을 서슴없이한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모든 정치 권력과 종교 권력의 권위를 마냥 인정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면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였다.제나라의 선왕(宣王)이 맹자에게 물었다.
"과인이 듣기로는, '탕(湯)은 걸(桀)을 몰아내고, 무왕은 주(紂)를 쳐내었다'고 하던데,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맹자가 답했다.
"전해오는 기록에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왕이 말했다.
"신하 된 자로서 그 임금을 시해한 것이 옳은 것입니까?"
맹자가 말했다.
"인(仁)을 해치는 자를 '해롭다'라 말하고, 의(義)를 해치는 자를 '잔인하다'라 말하니, 잔인하고 해로운 사람은 '일개 보통사람(一夫)'에 불과합니다. '일개 보통사람에 불과한 주(紂)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시해하였다'는 말은 아직 들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39]
《맹자》 <양혜왕장구 하(下)> [40]
이것은 단순히 최대다수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공리주의가 아니라, 통치의 정당성은 어디까지나 백성의 복지에 있다는 말이다. 맹자가 굉장히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가 "좋은 것을 독점하지 말고 최대한 많은 백성들과 함께 하라"는 것이었다. 특히 천(天)을 백성과 동일시하여 천명(天命)의 개념을 인문주의적으로 뿌리박았고, 이 천명이 바뀌는(革) 기준을 민심으로 규정하여서 민본(民本)의 개념을 정치의 축으로 세웠다. 또한 이런 백성을 위한 정책도 말하였는데, 맹자는 정전제를 통하여 어떻게 민생을 구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지에 대한 계획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41]
그 시대에 맹자의 민본 사상이 중요한 까닭은, 민(民)과 천(天)을 동일시하면서 국가의 정통성에 있어서 "민심"을 중시하도록 만들어 놓은 데 있다. "민심을 따르지 않으면 권력자가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은 민주주의가 대세가 되기 이전에는 찾아보기가 어려운 사상이다. 이후 이러한 맹자의 민본주의는 동아시아 근현대 민주주의 발전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42] 리콴유와의 그 유명한 민주주의 논쟁에서, 김대중이 맹자의 민본주의를 바탕으로 아시아도 민주주의를 실현 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43]
3. 영향[편집]
3.1. 한국[편집]
한국에서는 특히 두드러지게 유교를 공맹의 가르침이라고 칭한다.
고려말 정치가 정도전이 《맹자》를 탐독하며 역성혁명의 꿈을 키웠고, 신진 무장 이성계와 손잡고 역성혁명을 일으켜 고려를 잇는 새 왕조 조선을 건국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정도전에게 《맹자》를 선물한 사람이 절친이면서 고려 최후의 보루였던 정몽주였다는 점이 역사의 얄궂음이라 하겠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을 지으면서 조선 체계 구성의 곳곳에 맹자의 사상을 배치하였다. 이는 실제적으로도 이후 강화된 언론기관과 함께 조선을 움직이는 이념으로 작동하였다. 특히 공부를 통해 맹자의 이념으로 무장한 사림 세력은 개국 공신인 훈구파들을 몰아내며 이 사상을 더욱더 강화하였으며, 특히 언론을 개방해 임금과 신하간의 소통을 원만하게 하기위해 설치한 사헌부, 홍문관, 사간원은 임금을 견제하는 기능을 발휘하여 신하들의 힘이 크게 되는데 일조하였다. 조선이 동시대의 명나라, 청나라와는 다르게 신하의 권력이 컸었던 것[44] 에는 정도전이 《맹자》의 역성혁명론[45] 을 충실히 조선건국에 반영했기 때문이다.[46] 조선이 유독 의로움을 강조했었던 것도 정도전의 영향이자 맹자의 공로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은 조선 후기와 근현대에 들어서도 계속된다. 일제강점기에는 맹자가 강조했던 "의로움(義)"을 내세워 '의병(義兵)'과 '의사(義士)'[47] 들이 곳곳에서 일어났으며, 동학농민운동과 삼일운동 역시 이러한 유교적 의로움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유독 잘못된 것을 도저히 참지 못하고 뒤엎어 버리는 혁명들이 많은데, 2.28 학생민주의거,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 6월 항쟁 등도 크게 보면 맹자의 뜻(義)을 그대로 실천하려고 했던 정도전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48]
3.2. 중국[편집]
기원전 2세기 한나라 때부터 《맹자》를 공부하는 박사 직위가 있었으므로 오래 전부터 가치는 인정받아 왔다고 할 수 있다. 한 무제 때 벌어진 소금과 철의 전매제도에 관한 논쟁을 묘사한 《염철론》에서도 맹자가 공자, 순자 등과 나란히 언급된다. 또 《한서》 <고금인표>에서 맹자는 자사, 순자, 양웅[49] 등과 함께 2등급인 상중으로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공자의 적통이자 유가 2인자로 확고하게 평가받는 수준은 아니었다. 오히려 순자가 이사, 한비자[50] , 부구백[51] 등 걸출한 제자를 배출하고 순유, 순욱 같은 빵빵한 자손을 남긴 데 비하여, 맹자는 뚜렷이 이름을 남긴 제자도 없었고 자손도 상대적으로 시원찮았으므로 영향력이 뒤떨어졌다고도 볼 수 있겠다. 이 당시만 해도 맹자는 결코 성역이 아니어서, 한 무제 때 유교의 국시화를 확정지은 동중서도 맹자 성선설 등에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한 바 있다. 또
양한(兩漢)과 위진남북조를 거쳐 유교가 지나치게 위선화하여[53] 지식인들의 자포자기를 낳고, 도교가 흥하고 불교가 들어오면서 한동안 맹자의 중요성도 잊혀져 있었다가, 당송팔대가의 필두인 당나라의 한유[54] 가 일종의 유교 근본주의 운동을 전개하여 외래 사상 불교를 배격하고 미신적, 보신주의적, 현실도피적 도교를 질타하며, 정치참여적 전통 사상인 유교를 재평가하면서 맹자를 공자 이래 유교의 적통으로 치켜세운[55] 이후, 서서히 다시 맹자가 재조명받기 시작했다.
북송 때에 이르러서는 구양수, 사마광, 왕안석, 소식 등 명사들이 정치개혁을 두고 갑론을박하던 와중 맹자의 취급 문제가 정치적 이슈가 되며 관심도와 파급력이 더 높아지게 된다. 개혁파(신법당)였던 왕안석의 집권기에 맹자가 공묘(공자 사당)에 공식 배향되고 <<맹자>> 역시 과거 교재로 채택이 되게 되었는데, 보수파(구법당)의 사마광 등은 맹자 특유의 속이 뻥 뚫리는 사이다 발언들이 (구법당 기준으로) 앞뒤 생각 없이 무책임하게 막 지르고 보는 신법당 정책들의 명분이 될까봐 우려했던 것이다.[56] 또 당시는 형이상학적 색채가 강한 도교, 불교가 이미 깊이 침투하여 우주론과 인성론이 식자들의 주요 관심거리였기에 자연히 맹자 천명설, 성선설 등이 주목을 받게 된 경향도 있었다. 범구법당 인사들을 보자면 사마광(구법당 영수), 소식 등은 성선설을 포함하여 여러 부분에서 맹자를 비판했는데, 주돈이의 제자였던 정호, 정이 형제 등은 비록 왕안석과는 정치적으로 대립하였으나, 학문적으로는 성리학의 태동을 이끌며 맹자를 전방위적으로 옹호했다.
이후 이 성리학을 완성 수준에 이르게 한 인물이 남송의 주희이다. 주자(주희)는 사서(논어, 맹자, 대학, 중용)라는 개념을 만들어[57] , 여기에 주석을 달았는데, 이것이 《주자집주》이다. 이후 성리학을 공부했던 대부분의 유학자들이 주자의 관점으로 맹자를 바라보았기에, 책 《맹자》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주자의 영향력은 압도적이라고 할 수 있다.[58] 주자 생전에는 그 학문이 이단스럽다며 탄압받기도 했고, 상산 육구연 등 학문적 라이벌과의 마찰도 있었다. 그러나 육구연도 어쨌든 맹자의 추종자이고 해석을 달리하는 사람일 따름이었고, 성리학을 비롯한 맹자 계열의 의기 높고 정신수양적인 유교 성향은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등에 허구한 날 핍박받던 송나라 사람들을 독려할 시대정신으로 적합했기에 크게 확산되었다. 남송 말 문천상[59] 등 충신들은 공맹의 말을 나란히 금과옥조로 부르짖으며 장렬한 최후를 맞았으니 송나라 때야말로 중국의 맹자 숭배 절정기였으며, 맹자가 공자의 적통이요 유가의 2인자로 확정된 시기였다.
원나라 때에도 성리학이 권력 공고화에 유용하다는 판단하에 수용되었고 이에 따라 맹자도 계속 숭상되었으며, 추국아성공의 칭호가 이때 공식적으로 올려진다. 원나라에 유학하여 성리학을 배워 온 유학자들이 한국에도 본격적인 맹자 숭배 전통을 들여오게 된다.
명나라를 건국한 홍무제 주원장은 《맹자》이루장구 하편의 "군주가 신하를 자신의 수족처럼 여기면 신하도 군주를 가슴과 배처럼 여기고, 군주가 신하를 흙이나 쓰레기처럼 여기면 신하는 군주를 원수처럼 여긴다."[60] 는 구절을 보고 격노하여, 맹자를 문묘에서 들어내고 맹자의 서적을 모두 태워버리려고 했었다. 이에 신하 전당(錢唐)이 죽음을 무릅쓰고 그에게 두 번씩이나 간하면서 말하기를, "신(臣)이 맹자를 위해 죽는다면, 죽어서도 영예가 길이 빛날 것입니다."[61] 라고 맹자를 두둔한다. 주원장이 그 말을 듣고는 맹자의 서적을 모두 태워버리겠다는 자신의 주장에서 한 발 물러나, 맹자의 역성혁명에 관련된 구절만 삭제해서 책을 만들도록 하였는데, 이를 '맹자절문'이라고 한다.[62] 주원장 사후, 정난의 변으로 즉위한 영락제가 맹자절문을 폐기함으로써 명나라에서 맹자 탄압은 약 20년 만에 막을 내렸다. 그리고 전당은 이때의 일로 사후 맹자의 사당에 배향되는 영예를 얻었다나. 아무튼 이렇게 맹자는 복권되었고, 약 100년 뒤 주희에 버금가는 재해석자 왕양명도 얻게 된다.
청나라 때는 문자의 옥으로 인해 맹자적인 의기는 위축되었다. 얌전히 고문헌 연구하는 고증학이나 파게 되어 한비자, 순자 등의 재평가 등의 성과는 있었으나 맹자 인기는 전에 비해서는 시들해진 면이 있었다. 청 말~개화기가 되면 공자와 도매금으로 묶여서 수구의 상징이 되거나 혹은 혁명론 등에서 착안하여 혁신 정신의 상징이 되는 등 평가가 또 매우 복잡해졌다.
현대 중국에서는 다시 맹자는 높이 평가되고 있다. 마오쩌둥은 맹자를 숭배했고, 자신의 혁명론에 맹자를 인용하기도 했다. #
3.3. 일본[편집]
일본에서는 학문적으로나 명시적으로 다뤄질 뿐 현대까지도 묻히는 감이 크다. 그 이유로는 우선 한국에서도 여말선초에나 맹자가 본격 수용된 만큼 그보다 더 더디게 수용되어 뿌리박히지 못한 탓이 있을 것이며, 다음으로는 일본이 전통적으로 맹자 혁명론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천황제와 이에 따른 피라미드식 신분제 사회라는 데서 기인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63]
후자 관련하여 일단 한중일 모두 해당되는 사항으로서, 군주 앞에서 '너 정치 똑바로 못하면 바로 갈린다.'고 말한 맹자의 철학이 당대의 군주들에게 위험해보였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에도 시대의 소설가 우에다 아키나리가 쓴 <우게쓰 이야기>에는 헤이안 시대의 승려 사이교(西行, 1118~1190)의 입을 빌어, 서적을 취급하는 일본 상인들이 중국에 방문했을 때 다른 경전은 사 가더라도 도통 《맹자》만은 사지 않아서 중국 공급상이 그 이유를 물으니, "《맹자》를 싣고 돌아가려 했던 배는 모두 가라앉았다는 소문이 팽배합니다."라고 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싣고 있다. 누가 퍼뜨렸는지는 알 만한데 사이교 본인도 작중 이를 인정하면서 "후세에 무식한 아랫것들이 감히 맹자를 팔아 상전을 아무렇지도 않게 능멸하고 끌어내리기까지 하는 무엄한 짓거리를 하지 못하게" 하려는 뜻이었다고 언급한다. 사이교가 당시 대화하던 상대가 스토쿠 덴노의 원령이었으므로 하필 내란으로 강제로 폐위되다시피 해서 쫓겨나고 죽어 원령이 된 덴노(천황) 앞에서 맹자(=역성혁명론)를 대놓고 좋게만 이야기하기란 사이교로서도 껄끄러웠을 것이다.
또한 일본의 특수한 현실과 맹자 혁명론 자체의 부조화에서 비롯된 난점도 있었다. 맹자의 혁명론은 우선 주지육림과 포락지형 수준의 타락과 잔학함을 보인 걸, 주 같은 임금이 있고, 민심이 그 교체를 바라면 천명이 간접적으로 드러난 것으로 해석되어 새 임금이 정당화되는 식이다. 즉 1. 군주의 과도한 폭정, 2. 백성을 통해 간접 표출되는 하늘의 뜻, 이 두 가지 조건이 성립이 잘 안 되면 맹자 혁명론을 통한 혁명 정당화는 어려워진다. 그런데 일본의 천황은 역사는 오래 됐어도 실권 없는 명분 시다바리 노릇 한 세월이 대부분이라 과도한 폭정을 저지른 것으로 볼 수 있는 경우가 마땅히 없었고(특히 <<맹자>>의 본격적 수입 이후 시기에는 더더욱), 천황 본인이 천손이랍시고 내려와 있는 것이므로 하늘의 뜻은 백성 통할 것도 없이 직접 표출이 되고 있는 셈이다. 즉 천황 상대로 누가 혁명을 하려 한다면 천황은 '나 폭정
아무튼 그럼에도 후지와라 세이카와 그 제자 하야시 라잔이 퇴계학파의 강항에게서 성리학의 대략을 전수받은 이래 토쿠가와 막부의 지원하, 그리고 학자들의 연구하에서 맹자는 일본에서도 점점 영향력을 행사해 갔다. 맹자의 영향을 받으며 백가쟁명한 대표적인 인물들로는 양명학파의 나카에 토쥬, 주자학파의 야마자키 안사이, 미토학파의 조상 토쿠가와 미츠쿠니, 고학파의 이토 진사이, 소라이학을 일으킨 오규 소라이, 일본 국학의 모토오리 노리나가 등이 있었다.
야마자키 안사이는 특히 주자와 퇴계의 학문에 감명하여 강직한 성리학 원리주의를 고수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원리주의를 너무 잘 지키다가 다음과 같은 기똥찬 생각도 하게 된다: "만약 공자와 맹자가 일본으로 처들어온다면 마땅히 공맹을 사로잡아 충군애국하는 것이 바로 공맹의 도리이다!" 그리고 충군애국의 대상을 천명 받으신 천황님과 천명의 나라 일본으로 대입하여 신토를 일본적 유교가 지켜야 할 도리로 해석하게 된다. 동시대 <<대일본사>>를 지은 토쿠가와 미츠쿠니의 미토학파 전통이 안사이학파의 이런 경향 및 국학파의 국뽕(...)과 훗날 대융합하여 우리가 아는 무시무시한 천황주의를 낳게 된다.
이토 진사이와 오규 소라이는 특히 선진시대 공자, 맹자, 순자 등에 집중한 인물들이다. 진사이는 주자학과 양명학 등의 형이상학적 해석을 배격하고 공맹의 간단명쾌소박진실한 도리로 돌아가자고 주장하여 고학파라고 불렸다. 그는 특히 주자의 이기론을 싫어하여, 사단(측은, 수오, 사양, 시비의 마음)은 성(性), 이(理)에 속하는 사덕(인의예지)의 표출이라는 주자학적 해석을 전복시키는 일종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시도해, 그딴 신비하고 기묘한 이론은 허황된 것이고 오히려 우리는 단지 사단을 타고날 뿐이며 사덕은 노력 여하에 따라 얻게 되는 이름이라고 주장하였다. 소라이는 진사이의 과감한 주자 비판에서 힌트를 얻어 '그렇다면 맹자도 순자도 공자에 대한 상대적인 해석자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고 생각하여, 진사이보다도 더 나아가 주자는 물론이요 맹자도 그렇게 숭배할 것 없고, 후대에 덧붙여진 부분이 많은 수양론이나 도덕론 보다는 공자와 공자 학문의 근본인 시서예악춘추와 옛 성왕들의 정치적 가르침에 집중하자고 설파하기에 이른다.[65] 이렇게 되니 국학파의 모토오리 노리나가도 여기서 힌트를 얻은 바가 있는데, '그렇다면 굳이 공자가 절대적인 이유 또한 어딨겠나. 일본에도 일본만의 도리가 있다!'는 식의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메이지 유신기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식자들은 대충 이러한 흐름들이 복잡하게 얽히는 와중에서 자기 사상을 정립해 갔다고 보면 된다. 물론 막부는 관학으로서 가장 보수적인 주자학을 고수했기에 급진 양명학자 오시오 헤이하치로 등등과 삐걱대는 것은 당연했다. 메이지 유신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정한론을 주장한 요시다 쇼인의 저서 《강맹차기(講孟箚記)》는 맹자를 실천적으로 해석하여 널리 알려졌다. 1859년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쇼인은 '초망굴기(草莽崛起, 민초들이여 일어나라)라고 썼는데, 이는 맹자에서 영향을 받아 일반 대중들이 들고 일어나서 막부를 타도하자는 혁명 사상이다. 이것을 실행에 옮긴 수제자가 타카스기 신사쿠로, 일반 민중으로 구성한 민병대인 기병대(奇兵隊)를 창설한다. 이외에도 시부사와 에이이치를 비롯하여 다수의 지사들이 《맹자》의 혁명론에 영감을 받아 막부 타도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66]
이후 서구화와 근대화의 강풍이 불며 '봉건 잔재'인 유교를 카토 히로유키[67] , 후쿠자와 유키치 등이 극렬 공격하며 맹자의 지위도 다시 주춤하지만, 한편으로는 니시 아마네 등이 유교 경전의 어휘를 빌려 서양어의 한자어 번역을 보급하고, 나츠메 소세키 등 한학에 일가견 있는 문인들도 지나친 서구 풍조에 대항하여 맹자 등 고전의 내용을 재생산하는 등등, 근대 일본에서 맹자의 지위는 왔다 갔다 했다.
현대기에 접어들어서는 마루야마 마사오 등이 일본 정치사상사를 회고하면서 유교에 관한 담론이 더욱 학술적이게 되었다.
4. 맹자의 후손[편집]
공자의 후손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쪽도 관직을 배출한 인물들이 있다. 맹자의 직계 후손 중에는 후한에서 태위를 지낸 14대손 맹욱, 삼국시대 때 촉나라에서 문관을 지낸 16대손 맹광과 오나라 사람인 18대손 맹종이 있으며[68] , 55대손 맹희문(孟希文)이 명나라 경태 3년(1452) 한림원 오경박사(翰林院五經博士)의 직위를 받은 이래 후손들이 직위를 세습했다. 청나라에서도 이어진 한림원 오경박사 직위는 73대손 맹경환(孟慶桓)까지 직계로 세습되었으며, 그가 광서 20년(1894)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동생인 맹경당(孟慶棠)이 뒤를 이었다.
이후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수립되면서 직위명이 아성봉사관(亞聖奉祀官)으로 개칭되어 세습이 이어졌고, 2009년 대만 정부가 아성봉사관 직위를 무급제로 바꾸었다. 2014년 3대 아성봉사관이었던 75대손 맹상협(孟祥協)이 세상을 떠난 후 맹상협의 조카인 76대손 맹영계(孟令繼)가 4대 아성봉사관으로 뒤를 잇고 있다.
청백리 맹사성이 맹자의 방계 후손이다.(신창 맹씨가 맹자에 연원을 두는 성씨이다.)
5. 맹자가 지은 책, 《맹자》[편집]
자세한 내용은 맹자(경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여담[편집]
- 맹자는 묵적[69] 의 겸애설과 양주[70] 의 위아설을 극렬히 비판하였다. 《맹자》 등문공 하편에서 "성왕이 나오지 아니하여 제후들이 빙자하고, 초야에 있는 선비들이 멋대로 의논하여, 양주와 묵적의 학설이 천하에 가득해서, 천하의 학설이 양주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묵적에게 돌아갔네, 양씨는 자신의 지조만 위하는 위아설을 주장하였으니 이는 임금을 무시하는 것이요, 묵씨는 똑같이 사랑하는 겸애설을 주장하였으니 이는 아버지를 무시하는 것일세, 아버지를 무시하고 임금을 무시하는 것은 바로 금수이다."라고 하였다.
- 맹자가 연나라를 쳤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근데 맹자는 연나라를 치라고 한 것이 아니라 '어떤 나라의 권력승계가 불합리하다면 그것을 고치는 것이 마땅할 것'이라는 당연한 말을 했을 뿐, 연나라를 적극적으로 공격해서 전쟁을 해야 된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원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제나라 사람들이 연나라를 쳤다. 이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제나라에 권해서 연나라를 쳤다는데, 그런 일이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맹자께서 대답하셨다. "아니요. 심동이 연나라를 쳐도 좋겠느냐고 묻기에, 나는 ‘좋겠지요’하고 대답하였는데, 그가 옳다고 생각하고서 친 것입니다. 그가 만일 말하기를, ‘누가 칠 수 있을까요?’하고 묻는다면, ‘하늘이 보낸 일꾼이라면 칠 수 있겠지요’라고 대답하였을 뿐입니다. 이제 살인자가 여기 있다고 합시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그 놈을 죽여도 괜찮겠지요?’한다면, ‘좋겠지요’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만일 말하기를, ‘누가 죽일 수 있을까요?’하고 묻는다면, ‘옥관(獄官)이라면 죽일 수 있겠지요’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지금 연나라로써 연나라를 친 것이니[71] , 무엇 때문에 치라고 권하겠습니까?"」[72] 연나라의 문제는 백성들이 들고 일어난 것도 아니고 권력상 문제가 잘못되었던 것인데 (물론 백성들이 고통받긴 했다.), 이를 핑계로 제나라가 연나라를 친 것이니, 맹자가 볼 때 이것은 민심을 대변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후 연나라 사람들이 제나라에 반기를 들었는데, 이는 연나라 백성들이 다른 나라로 하여금 연나라를 엎으라고 하는 민심이 아니었던 것이며,[73] 권력 문제를 핑계로 제나라가 연나라를 억지 공격한 것임을 증명한 셈이 되었다. 제나라의 통치에 만족했으면 연나라 사람들이 반기를 들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나라왕은 자신의 신하에게 '맹자한테 부끄럽구나.'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 다음 편에서 맹자는 제나라를 떠난다.
- 수능 모의고사 문제로 자주 출제된다.
와 묵적(墨翟)[75] 의 사상에 경도되어 유학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있다고 판단한 맹자는 유학의 수호자를 자임하면서 공자의 사상을 계승하는 한편, 다른 학파의 사상적 도전에 맞서 유학 사상의 이론화 작업을 전개하였다. 그는 공자의 춘추시대(春秋時代)에 비해 사회 혼란[76] 이 가중되는 시대적 환경 속에서 사회 안정을 위해 특히 '의(義)'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맹자가 강조한 '의'는 공자가 제시한 '의'에 대한 견해를 강화한 것이었다. 공자는 사회 혼란을 치유하는 방법을 '인(仁)'의 실천에서 찾고, 인의 실현에 필요한 규범으로서의 '의'를 제시하였다.
맹자는 공자와 마찬가지로 혈연관계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도덕 감정인 '인'의 확산이 필요함을 강조하면서도, '의'의 의미를 확장하여 '의'를 '인'과 대등한 지위로 격상하였다. 그는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인'이고, 형을 공경하는 것은 '의'라고 하여 '의'를 가족 구성원간에도 지켜야 할 규범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나의 형을 공경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남의 어른을 공경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유비적 확장을 통해 '의'를 사회 일반의 행위 규범으로 정립하였다. 나아가 그는 '의'를 개인의 완성 및 개인과 사회의 조화를 위해 필수적인 규범으로 설정하였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개인은 '의'를 실천하여 사회 질서 수립과 안정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맹자는 '의'가 이익[77]
의 추구와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는 사적인 욕망으로부터 비롯된 이익의 추구는 개인적으로는 '의'의 실천을 가로막고, 사회적으로는 혼란을 야기한다고 보았다. 특히 작은 이익이건 천하의 큰 이익이건 '의'에 앞서 이익을 내세우면 천하에는[78] 필연적으로 상하 질서의 문란이 초래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그래서 그는 사회 안정을 위해 사적인 욕망과 결부된 이익 추구는 '의'에서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맹자는 '의'의 실현을 위해 인간에게 도덕적 행위를 할 수 있는 근거와 능력이 있음을 밝히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도덕 행위를 할 수 있는 선한 마음이 선천적으로 내면에 갖춰져 있다는 일종의 도덕 내재주의를 주장하였다. 그는, 인간은 자기의 행동이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남이 착하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을 본래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마음이 의롭지 못한 행위를 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동기로 작용한다고 보았다. 아울러 그는 어떤 것이 옳고 그른 것인지 판단할 수 있는 능력도 모든 인간의 마음에 갖춰져 있다고 하여 '의'를 실천할 수 있는 도덕적 역량이 내재화되어 있음을 제시하였다.
맹자는 '의'의 실천을 위한 근거와 능력이 인간에게 갖추어져 있음을 제시한 바탕 위에서, 이 도덕적 마음을 현실에서 실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본래 갖추고 있는 선한 마음의 확충과 더불어 욕망의 절제가 필요하다고 보았으며, 특히 생활에서 마주하는 사소한 일에서도 '의'를 실천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나아가 그는 목숨과 '의'를 함께 얻을 수 없다면 "목숨을 버리고 의를 취한다."라고 주장하여 '의'를 목숨을 버리더라도 실천해야 할 가치로 부각하였다.
- 2014년 9월 대수능 모의고사 비문학 지문 (17번 ~ 21번)
- 그는 사상 전반에 걸쳐 '의로움'을 종지로 삼았고, 폭력과 불의에 굴하지 않는 인간의 올곧은 마음을 주장하였다. 그의 사상은 후대에 세상을 바로 잡으려던 개혁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조선시대의 이름난 의학자인 동무 이제마의 사상의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7. 관련 고사성어[편집]
- 군자삼락(君子三樂)
- 농단(壟斷)
- 대장부(大丈夫)
- 무항산무항심(無恒産無恒心)
- 알묘조장(揠苗助長)
- 연목구어(緣木求魚)
-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
- 자포자기(自暴自棄)
- 중과부적(衆寡不敵)
- 초개(草芥)
- 필부지용(匹夫之勇)
- 호연지기(浩然之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