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소양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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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秦)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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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秦)나라 29대 국군
제3대 왕
소양왕 | 昭壤王

생몰
기원전 325년 ~ 기원전 251년 (74세)
재위
기원전 306년 ~ 기원전 251년

영(嬴)

조(趙)

직(稷)[1] / 측(側)[2]
부모
부왕 혜문왕, 적모 혜문후
생모 선태후
형제
이복형 진 무왕
동생 고릉군 영불, 경양군 영회
이부동생 의거왕의 두 아들
왕후
엽양후
자녀
도태자, 진 효문왕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생애
2.2. 치세
2.4. 장평대전 이후
2.5. 천하를 복종시킴
3. 일화
3.1. 소양왕과 전국사군자의 악연
3.2. 범수 등용
4. 평가
5. 미디어 믹스
5.1.1. 대진제국지종횡
5.1.3. 대진부[3]



1. 개요[편집]


진나라의 제29대 군주이자, 제3대 왕. 휘는 직(稷) 혹은 측(側). 약칭 시호로는 '진 소왕'(秦 昭王)으로 부르기도 한다.[4] 비슷한 한자를 쓰는 연 소양왕도 있으나 보통 소양왕이라 하면 진 소양왕을 이른다. 혜문왕과 선태후의 아들로 훗날 전국시대에 종지부를 찍는 진시황증조부였다.[5]

효공혜문왕에 이어 진시황의 전국시대 통일의 기틀을 다진 명군이다. 재위 초기 진나라와 제나라의 양강 체제에서[6] 진나라 1강 체제를 확립한 왕으로 재위 기간이 길기 때문에 당시를 서술한 사마천의 《사기》에 여기저기 많이 등장한다. 소양왕이 50년 동안 재위했지만 그의 아들인 효문왕은 즉위한 지 3일 만에 죽었다.


2. 생애[편집]



2.1. 초기 생애[편집]


영직은 혜문왕의 팔자(八子)[7]선태후에게서 서자로 태어났다. 영직은 서자였고, 위에 적자인 이복 형 무왕(武王)도 있어서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지만, 무왕이 주나라(周)에 가서 힘 자랑을 한답시고 천하 제일의 제기인 무거운 구리솥 구정을 들다가 그만 어이 없게 정강이가 부러져서 재위 4년 만에 후사없이 사망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진나라의 왕위를 놓고 혜문왕의 자녀들 중 위나라 공주가 낳은 영장과 초나라 공주[8]가 낳은 영직 사이에서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당시 영직은 함양에서 먼 연나라에 볼모로 있었기 때문에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조나라 무령왕의 도움과, 당시 진나라의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소양왕의 외삼촌 위염(魏冉)[9]의 후원 덕분에 영직은 진나라의 새로운 왕이 될 수 있었다.


2.2. 치세[편집]


진 소양왕 원년(기원전 306년), 엄군(嚴君) 영질(嬴疾)이 승상이 되었고, 감무(甘茂)가 진나라를 떠나서 위나라로 갔다.

진 소양왕 2년(기원전 305년), 왕의 서형 영장이 반란을 일으켜 처형되고 관련자들의 일족이 몰살되었다. 이를 계군의 난이라고 한다. 이 반란의 여파로 혜문왕의 정비, 즉 혜문후도 제명에 죽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소양왕의 형수인 무왕의 왕비, 즉 무왕후도 위나라로 돌려보내졌다. 이로써 선태후를 견제할 수 있는 두 왕후가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진 소양왕 4년(기원전 303년), 위나라의 땅인 포판(蒲阪)을 빼앗았다. 그리고 하늘에 혜성이 나타났다.

진 소양왕 5년(기원전 302년), 위나라 왕이 응징(應亭)으로 조회를 하러 오자 포판을 돌려줬다.

진 소양왕 6년(기원전 301년), 촉후 휘(蜀侯 煇)가 반란을 일으키자 사마조(司馬錯)가 평정했다. 서장 환(奐)이 초나라를 정벌하고, 수급 2만 명을 베었다. 왕의 이부동생 경양군(涇陽君) 영회를 제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진 소양왕 7년(기원전 300년), 신성(新城)을 점령했다. 저리자(저리질, 즉 영질)가 죽었다.

진 소양왕 8년(기원전 299년), 왕의 외숙부인 장군 미융(羋戎)[10]을 보내 초나라를 공격하고 신시(新市)를 빼앗았다.

진 소양왕 9년(기원전 298년), 맹상군(孟嘗君)이 진나라로 오자, 소양왕이 맹상군을 승상으로 임명했다. 환이 초나라를 공격해 8개 성을 빼앗고, 초나라 장수 경쾌(景快)를 죽였다.

진 소양왕 10년(기원전 297년), 초 회왕(楚懷王)이 진나라로 와서 조회를 했지만, 진나라 조정은 회왕을 억류했다. 한편 뇌물을 받았다는 이유로 맹상군을 면직하고, 그 대신 누완(樓緩)이라는 자를 승상으로 임명했다.

진 소양왕 11년(기원전 296년), 제나라, 한나라, 위나라, 조나라, 송나라, 중산국 등이 연합하여 진나라를 공격하며 염지(鹽氏) 땅까지 진격해 왔으나, 어떤 이유로 인해서 연합군은 철수하였다. 한편 초 회왕이 진나라에서 도망쳐 조나라로 갔으나, 조나라에서 받아주지 않자, 진나라로 돌아갔고 얼마 되지 않아서 회왕이 사망했다.

진 소양왕 12년(기원전 295년), 누완이 면직되자, 왕의 외숙부인 양후 위염(魏冉)이 승상이 되었다. 그리고 쌀 5만석을 초나라에 보내주었다.

진 소양왕 13년(기원전 294년), 향수(向壽)가 한나라를 정벌해 무시(武始)를 빼앗았다. 백기가 신성을 공격했고, 그때 오대부(五大夫) 여례(呂禮)가 진나라에서 위나라로 도망첬다. 그리고 임비(任鄙)를 한중 태수로 임명했다.

진 소양왕 14년(기원전 293년), 백기가 한위 연합군을 낙양 남쪽 이수 협곡에서 공격하여 24만명의 병사를 죽이고(이궐 전투), 5개의 성을 얻었다. 이후 한나라와 위나라의 군사력은 쉽게 회복되지 못했다.

진 소양왕 15년(기원전 292년), 백기가 위나라의 원(垣)땅을 빼앗았다가 다시 위나라에게 돌려주고 초나라를 침공하여 완(宛)을 빼앗았다.

진 소양왕 16년(기원전 291년), 사마조(사마착)가 지성(軹城)과 등성(鄧城)을 빼앗았다. 양후 위염이 승상에서 면직되었고, 고릉군 불(市)을 완 땅의 후로 봉했으며, 경양군 회(悝)를 등성의 후로 봉했다. 그리고 위염을 도(陶) 땅의 후로 봉했다.

진 소양왕 17년(기원전 290년), 성양군(城陽君)이 입조를 했고, 동주(東周)의 군주가 진나라로 와서 조회하였다. 소양왕은 의양(宜陽)에 행차했다.

진 소양왕 18년(기원전 289년), 사마조가 원(垣)과 하옹(河雍)을 공격하여 다리를 끊고 두 땅을 빼앗았다.

진 소양왕 19년(기원전 288년), 소양왕은 제나라의 민왕(湣王)에게 진왕이 서제(西帝)를 칭하고, 제왕이 동제(東帝)를 칭하는 것을 제의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칭제를 취소했다. 그리고 위나라로 도망갔던 여례가 투항하면서 돌아왔고, 한중 태수 임비가 죽었다.

진 소양왕 20년(기원전 287년), 소양왕은 한중에 행차했다가, 상군(上郡)과 북하(北河)로 행차했다.

진 소양왕 21년(기원전 286년), 사마조가 위나라의 하내(河內) 땅을 공격하자 위나라는 안읍을 바쳤다. 안읍에 살던 위나라 백성들을 내쫓고, 진나라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왕의 동생 경양군 회를 완 땅의 후로 봉했다.

진 소양왕 22년(기원전 285년), 몽무(蒙武)가 제나라를 정벌했다. 하동에 9개 현을 설치했다. 소양왕은 초나라의 경양왕과 완에서 회맹을 하였고, 중양(中陽)에서 조나라의 혜문왕과 회맹을 하였다.

진 소양왕 23년(기원전 284년), 소양왕은 선양(宣陽)에서 위나라의 소왕과 회맹하였고, 신성에서 한나라의 희왕과 회맹하였다.

진 소양왕 24년(기원전 283년), 소양왕은 언(鄢)과 양(穰)에서 초나라의 경양왕과 회맹하였다. 위나라의 안성(安城) 땅을 공격하여 위나라의 도읍인 대량에 이르자 연나라와 조나라가 위나라를 구원하러 왔고, 진군은 위나라 땅에서 철수하였다. 그리고 승상 위염이 면직되었다.

진 소양왕 25년(기원전 282년), 조나라를 공격하여 2개의 성을 차지하였다. 소양왕은 신성에서 한나라의 희왕과 회맹하였고, 신명(新明)에서 위나라의 소왕과 회맹하였다.

진 소양왕 26년(기원전 281년), 죄수들을 사면하고 양(穰) 땅으로 이주시켰다. 위염이 다시 승상에 임명되었다.

진 소양왕 27년(기원전 280년), 사마조가 초나라를 침공하였다. 백기가 조나라를 침공하여 대나라의 광랑성을 빼앗았다.

진 소양왕 28년(기원전 279년), 백기가 초나라의 땅인 언과 등을 빼앗았다.

진 소양왕 29년(기원전 278년), 백기가 초나라의 수도 영을 빼았고 남군을 만드니 초나라의 경양왕이 도망갔다.

진 소양왕 30년(기원전 277년), 촉군 군수 약(若)이 초나라를 공격하여 무군(巫郡)과 강남(江南) 땅을 차지하였다. 검중군(黔中郡)을 설치하였다.

진 소양왕 31년(기원전 276년), 백기가 위나라를 정벌해 성 2개를 빼앗았다.

진 소양왕 32년(기원전 275년), 위염이 위나라를 공격하고 대량(大梁)에 이르러 포연(暴鳶)을 쳐부수고 4만명을 죽였다. 포연이 달아나자 위나라는 3개 현을 바치면서 강화를 요청했다.

진 소양왕 33년(기원전 274년), 호양(胡陽)이 위나라의 권성(卷城), 채양(蔡陽), 장사(長社) 땅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화양(華陽)에서 망묘(芒卯)를 공격하여 14만명을 죽였다. 위나라는 남양 땅을 바치면서 강화를 요청했다.

진 소양왕 34년(기원전 273년), 진나라는 위나라와 한나라에게 상용(上庸) 땅을 주어서 군을 만들고, 남양에 살고 있는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진 소양왕 35년(기원전 272년), 위나라, 한나라, 초나라를 도와서 연나라를 공격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남양 땅에 남양군(南陽郡)을 설치했다.

진 소양왕 36년(기원전 271년), 조(竈)가 제나라의 강(剛), 수(壽) 땅을 빼앗았고, 그 땅을 위염에게 하사했다.

진 소양왕 38년(기원전 269년), 호양(胡陽)이 조나라의 땅 연여(閼與)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진 소양왕 40년(기원전 267년), 위나라에 인질로 있던 도태자(悼太子)[11]가 사망하였다. 시신을 수습하여 지양(芷陽) 땅에 장사를 지냈다.

진 소양왕 41년(기원전 266년), 여름에 위나라를 침공하여 형구(邢丘)와 회(懷) 땅을 빼앗았다.

진 소양왕 42년(기원전 265년), 안국군(安國君) 주(柱)가 태자가 되었다. 10월에는 선태후가 사망하여 장례를 치르고 여산(酈山) 땅에 묻었다.

진 소양왕 43년(기원전 264년), 백기가 한나라의 9개 성을 공격하여, 한군 5만명을 참수했다.

진 소양왕 44년(기원전 263년), 한나라의 남양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진 소양왕 45년(기원전 262년), 분(賁)이 한나라를 공격하여 10개 성을 빼앗았다. 섭양군(葉陽君) 괴(悝)가 분봉으로 받은 영지에 가다가 도착하지 못하고 죽었다.


2.3. 장평대전[편집]


이렇듯 주변에 있는 위나라, 한나라, 초나라를 적극적으로 공격하여 당시 진나라와 맞설 만한 나라는 제나라밖에 없었지만, 진 소양왕 23년(기원전 284년), 연나라의 장수 악의가 주도한 5국(진한위조연) 연합군이 제나라를 초토화시키면서 당대에 강국은 진나라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진 혜문왕때부터의 친분으로 큰 전쟁없이 지내던 조나라가 국력을 키워 삼진(三晉)[12] 동맹이 결속되면서 진나라와 조나라 사이의 전쟁이 피할 수 없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장평대전이었다.

진 소양왕 47년(기원전 260년), 소양왕은 원교근공 정책에 따라서 우선은 장수 백기, 몽오, 왕흘 등에게 명하여 인접한 한나라 땅인 상당(上黨)을 공격하였고, 한나라의 국토가 말 그대로 반동강이 나자, 조나라는 고립된 한나라의 상당 땅을 먹어버렸다. 진나라는 이 때문에 조나라로 발길을 돌렸고, 이는 전국시대의 판도를 바꾼 장평대전으로 이어졌다. 장평대전에서 승리한 백기는 조나라 군사 40만명을 생매장하여 조나라를 영원한 2등 국가로 만들어 버렸다. 은혜를 원수로.[13]자세한 사항은 해당 문서 참조. 그리고 장평대전 후에는 천하에 진나라와 상대할 수 있는 국가가 없게 되었다.


2.4. 장평대전 이후[편집]


진 소양왕 48년(기원전 259년) 정월에 진나라가 휴식을 위해 상당에서 군대를 집결시켰다. 10월, 한나라가 원옹(垣雍)을 바쳤다. 진나라는 군대를 3군(三軍)으로 나누어서 운영하기 시작했다. 왕흘(王齕)이 군대를 이끌고 조나라의 피뢰(皮牢)를 빼앗았다. 사마경(司馬梗)이 태원(太原)을 평정했고, 한나라의 상당을 전부 진나라가 차지했다. 능(陵)이 조나라의 한단을 공격했다.

진 소양왕 49년(기원전 258년) 정월, 소양왕은 원군을 보내어 한단을 공격하는 능을 돕게 하였다. 능이 한단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능을 해임하고 왕흘이 한단을 공격하게 하였다. 10월, 장당(張唐)이 위나라를 공격했고, 장수 채위(蔡尉)가 전장을 지키지 못하고 도망쳐서 돌아오자, 그를 처형하였다.

진 소양왕 50년(기원전 257년) 10월, 백기가 죄를 지어서 사병으로 강등시키고 음밀(陰密)이라는 땅으로 보냈다. 장당이 정(鄭)을 공격하였다. 12월, 원군을 보내어 분성(汾城) 부근에 주둔하게 하였다. 왕흘이 한단을 점령하지 못하자, 분성에 있는 군을 철수시켰다. 그리고 백기에게 죄를 물어서 죽였다.


2.5. 천하를 복종시킴[편집]


진 소양왕 51년(기원전 256년), 소양왕은 장군 (摎)에게 한나라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규는 한나라의 양성과 부서(負黍) 땅을 빼았고, 조나라를 공격하여 20개의 현을 빼앗았다. 한편, 서주 문공(西周 文公) 희구(姬咎)가 제후와 합종(合縱)하고, 주나라 천자인 난왕(赧王)을 필두로 하여 제후 연합군을 조직해 진나라를 침공했다. 진나라가 양성에서 쉽게 군을 움직을 수 없게 했지만, 소양왕은 장군 규를 시켜서 주나라를 공격했다. 이에 놀란 주 난왕이 진나라에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전하자, 서주 문공이 진나라로 직접 와서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를 하면서 36개의 성읍을 모두 바치면서 주나라는 멸망하였다. 서주 문공은 탄호 땅으로 쫓겨났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주 난왕이 사망했다.

진 소양왕 52년(기원전 255년), 주나라 백성들은 동주(東周)로 피난을 갔고, 주나라 수도인 낙양에 있는 구정(九鼎)을 진나라로 가져왔다.

진 소양왕 53년(기원전 254년), 주나라를 멸망시킨 것에 대해서 소양왕은 여러 나라에 사신을 보내 복종시켰다. 위나라의 안희왕이 가장 늦게 사신을 보내자 소양왕은 장군 규를 시켜서 위나라를 공격하여 오성(吳城) 땅을 빼앗았고, 그로 인해서 위나라는 진나라에 복종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나라의 환혜왕이 입조하였다.

진 소양왕 54년(기원전 253년), 소양왕은 옹성 남쪽에서 상제(上帝)에게 제사를 올렸다.

진 소양왕 56년(기원전 251년), 소양왕이 사망하자, 모든 나라의 승상들과 장군들이 상복을 입고서 진나라를 방문해 조문을 하였고, 한나라는 환혜왕이 소복을 입고서 진나라로 직접 와서 조문을 하였다.


3. 일화[편집]



3.1. 소양왕과 전국사군자의 악연[편집]


제나라의 맹상군을 흠모하던 소양왕은 그를 진나라로 불러와 승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양후 위염을 포함한 외척들과 맹상군 사이의 마찰로 맹상군은 몸을 피하려 했지만, 소양왕이 놓아주지 않는 바람에 억류되었고, 결국은 식객들의 도움으로 탈출했다.[14] 그 후 다시 제나라로 가서 연합군을 조직하여 진나라 승상으로 있을 때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진나라를 침공했다.

조나라의 평원군도 부르려 했는데, 마침 주변에서 맹상군이 더욱 뛰어나다고 귀띔하자, 맹상군을 불렀다. 장평대전 이후 모수의 도움을 받아서 진나라의 침략을 막아냈다.

진나라가 위나라를 침략하자 신릉군이 10년 만에 귀국해서 진나라 장수 몽오의 군대를 격파해 함곡관까지 쫒아냈다.

진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하려 할 때 춘신군이 사자로 진나라에 보내져서 소양왕을 설득해 초나라와 진나라의 동맹을 결성했다. 후에 초 고열왕이 될 태자와 함께 진나라에 볼모로 보내지게 되었다. 고열왕의 아버지 초 경양왕이 병에 걸리자, 소양왕에게 귀국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춘신군은 고열왕을 마부로 위장시켜 초나라로 탈출시키고 자신은 소양왕에게 사실을 고했다. 분노한 소양왕은 춘신군을 죽이려 했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용서했다.

중원을 통일하려는 진 소양왕과 각국의 대신이었던 전국사군자와의 악연은 필연적이었다.


3.2. 범수 등용[편집]


재위 초창기에는 외숙부 위염을 포함한 외척들의 힘으로 왕이 되었기 때문에 위염과 선태후가 진나라 정사에 간섭했는데, 이 사실을 안 망명객 범수(范睢)가 소양왕에게 말했다.

한나라위나라, 이 두 나라를 거쳐 막강한 제나라를 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진나라의 병력을 아끼고, 한과 위 두 나라의 병력을 최대한 동원하시려는 것 같은데, 동맹국을 믿지 못하시면서 그 너머에 있는 제나라를 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난 날 제나라 민왕이 연나라악의에게 패한 것도 멀리 떨어진 초나라를 치다가 과중한 부담으로 동맹국이 떨어져 나갔기 때문입니다. 당시 한나라위나라만이 덕을 보게 되었으니, 이는 적에게 병력을 빌려주고 도둑에게 식량을 대준 셈입니다. 현 정세하에서는 먼 나라와는 친선을 맺고 가까운 나라부터 공략하는 원교근공책(遠交近攻策)을 써야 합니다.


소양왕은 범수의 책략을 받아들여 동쪽 끝의 제나라를 공격하는 계획을 포기했다.

선태후의 영향으로 차마 외숙부 위염을 축출할 수 없었던 소양왕은 계속 위염을 승상 자리에 앉혔다. 하지만 도태자가 위나라의 인질로 갔다가 사망하자 그 충격 때문인지 선태후도 얼마 후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다음해에 범수를 통해서 외숙부 위염을 축출하여 완전히 권력을 장악한 후 범수를 응 땅의 후로 삼고 진나라의 재상 직위를 부여해서 그의 원교근공책을 펼치게 하였다.

진 소양왕의 재위 기간은 56년에 달하지만, 범수의 도움을 얻어서 외숙부인 위염을 축출한 것은 진 소양왕 42년(기원전 265년)의 일이었다. 즉 실제로 소양왕이 외척 세력없이 권력을 휘두른 것은 10여 년에 불과했다는 말. 그 때문에 사마천은 <양후 열전> 마지막에 진나라가 땅을 넓히고 천하를 호령한 것은 모두 양후의 공적이다.라고까지 평가했다. 다만 소양왕은 이미 화씨지벽 일화나, 맹상군일화에서 볼 수 있듯이 자신의 권력을 충분히 휘둘렀다. 위염이 뛰어난 인물이었던 것도 맞지만 소양왕도 정복군주다운 정치력과 권력은 충분히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4. 평가[편집]


진나라와 대등한 대국인 초나라를 집요하게 압박하여 소양왕 사후에는 이미 초나라의 상당한 영토를 진나라가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위염, 범수, 백기, 사마착, 를 포함한 명신들과 명장들을 기용하여 진나라 주도의 통일을 바로 코 앞까지 이루어 놓은 명군으로 남았다.

젊은 시절에 조나라의 인상여에게만은 연거푸 당하기만 한 아픈 역사가 있다. 조나라 왕에게 화씨지벽의 진상을 요구했으나 인상여의 기지에 휘말려 체면을 구겼고, 조나라 왕과 가진 민지 회담에서는 인상여의 협박에 압도당해 톡톡히 망신을 당하고 말았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인상여 항목 참조.

진나라 역대 군주들 중 가장 긴 56년의 재위 기록을 가지고 있다.[15][16] 소양왕 시기에 진나라의 침략 행위가 활발했기에 나머지 6국의 조사, 염파, 악의, 전국사군자를 포함한 인물들 입장에서는 적국의 군주로 자주 나온다.

위에 서술한 대로 이미 소양왕이 천하를 복종시킨 상태라 진시황이 즉위할 무렵에는 진나라의 천하 통일이 수월해진 상태였다. 이를 두고 5대 조부, 고조부, 증조부가 차린 밥상에 수저를 올린 진 시황이란 평도 있다. 물론 진시황이 그렇다고 거저먹기만 한 건 아니고 진나라의 천하통일 과정을 보면 알겠지만 진나라가 꿀만 빨며 통일한 것만도 아니라서 1차 조나라 정복 시도부터 제나라 정복까지 15년, 한나라 정복 시기부터 세도 10년에 그 과정에 상당한 돈과 물자 등을 쏟아부었다. 여기에 조나라 정복 시도도 즉위 11년만에 시도되었다.
무엇보다도 영호해나 양제를 보면 수저 올리기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그리고 또 오랫동안 재위했음에도 불구하고 암군으로 타락하지 않은 점도 진나라에게는 축복이었다. 양 무제처럼 젊었을 적에는 명군이다가도 오랜 재위기간을 겪으며 암군으로 타락하는 왕이나 황제도 많은데 소양왕은 긴 기간동안 재위하며 암군으로 타락하지 않았다.


5. 미디어 믹스[편집]



5.1. 대진제국 시리즈[편집]



5.1.1. 대진제국지종횡[편집]


구술 옥(玉)과 임금 왕(王)은 자형이 같지요.옥은 셋을 하나로 꿴 것인데 셋은 천, 지, 인을 뜻하며 천지인을 하나로 꿰는 자가 바로 임금 왕입니다.


작품 자체가 혜문왕이 중심인 작품이다 보니 소양왕의 어린 시절은 간략하게 나오고 있는다. 형인 무왕은 강건하고 마초적 성향을 지닌 인간으로 그려진 것 에 비해 소양왕은 4차원적이고 감수성 풍부한 소년으로 그려진다.

마지막회에선 무왕의 사후, 외숙인 위염의 도움을 받아 백기가 이끄는 진압군이 반역자인 계군 영장을 암살한 뒤에 왕위에 드디어 오르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5.1.2. 대진제국지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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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 덕으로 불가능하다면 무력을 쓰겠다.


소양왕을 연기하는 배우는 삼국에서 손권을 연기했던 장박

당연히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다.

진 효공과 상앙의 국가 발전을 중심으로 다룬 1편과 혜문왕과 장의의 외교전을 중심으로 다룬 2편과 다르게 3편에선 생전에 굴직굴직한 전쟁이 많았던 소양왕의 치세를 다루어 재미를 주고 있다.

본디 소양왕은 여린 소년이라 왕이 되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의 처한 상황과 소양왕의 어머니 미팔자의 강한 욕망 때문에 왕이 되었다. 하지만 소양왕은 형제의 피를 묻혀 가면서 왕이 됐다는 것에 죄의식을 느끼며 외척 세력을 증오하고 있지만, 외척 세력의 필요성 때문에 사태를 관망한다.

초나라와의 전쟁에 위염을 보내어 왕의 위엄을 과시하려 했지만 소양왕의 측근인 영질이 전쟁에 나가게 되고, 측근인 영질의 죽음으로 소양왕은 강한 군주가 되리라 다짐한다.

초나라의 왕에게 맹약을 맺는다는 구실로 불러내어 납치 한 뒤 초나라와 전쟁을 하려 했지만 초왕이 돌아가지 않고 진나라에 버티면서 배짱을 부리자 다시 태후와 위염에게 의지한다.

그러던 중 맹상군[17]의 명성을 듣고 맹상군을 불러 승상으로 삼으려 했지만, 위염을 승상으로 삼으려는 태후가 간계를 부려 맹상군은 도망 가버린다.

초왕이 진나라에서 죽으면 타국에게 공격할 구실을 주기 때문에 초나라로 쫒아 버릴려고 하지만 새롭게 즉위한 신초왕은 전초왕을 반기지 않아 전초왕을 여러 국가를 떠돌다 진나라로 돌아와 사망하게 된다.

전초왕이 진나라에서 납치 당해 죽을 것을 구실로 맹상군이 주도한 제, 위, 한 3군 연합이 함곡관으로 쳐들어와 함곡관이 함락 되게 된다. 함곡관의 함락을 계기로 소양왕은 자신의 부족함을 알게 되고 그동안 견제했던 태후와 위염에게 사죄한다. 그 직후 위염을 승상직에 맡기고 뒷수습을 부탁한다. 그 뒤론 위염과 태후를 의심 하지 않고 둘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3국 연합이 함곡관을 쳐들어 온 위기를 극복한다.

세월이 흘러 소양왕이 경륜을 쌓고 진나라도 안정화 될 무렵 소진의 계략으로 제나라를 침공할 6국 연합이 완성되어 진나라의 주도로 제나라를 침공한다. 그 와중에 위염이 송나라의 땅에 욕심을 내어 위나라와 밀약을 맺고 송나라 땅을 혼자 차지하려다가 백기를 위험에 빠트린다.

소양왕과 태후는 대노하여 위염을 승상에서 해임하고 소양왕이 직접 나서서 다른 나라 왕들에게 재치 있게 설명하고 백기를 위험에서 구해낸다.

백기가 위기에 처한 일로 위염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소양왕은 범수를 만나게 되고 범수에게 위염이 겸직하던 일을 나눠주어 조나라를 공격했지만 조사의 활약에 의해 패배하게 되고 위나라에 인질로 가 있던 태자까지 살해당하게 된다. 하지만 범수의 책략 실패가 아닌 자신의 인선 실수를 탓하며 위염의 승상 직위를 범수에게 위임 시킨다.

한편 범수를 중용하는 소양왕에 반발한 위염과 소양왕의 동생들은 반란하기 위해 태후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태후는 자신이 살아 있으면 소양왕에게 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소양왕을 위해 식음을 전폐하고 죽음을 선택한다. 태후의 죽음으로 소양왕은 위염 등의 외척 세력의 병권을 몰수하고 왕권을 공고히 한다.

몇 년 후 진나라는 식량 사정이 열악한 상태에서 장평대전을 치러 조나라 군대 20만 명을 포로로 잡게 된다. 소양왕은 6국이 연합하여 진나라를 침공할 것을 염려해 백기에게 백지 칙서를 전하고 백기는 소양왕의 마음을 헤아려 조나라 군대 20만을 몰살 시켜 6국의 분노가 진나라가 아닌 백기 한 사람에게 향하게 한다.

이렇게 백기가 승리하여 백기의 위세가 더욱 떨칠껄 두려워한 범수는 조나라를 멸망시키자는 백기의 권유를 묵살시키고 진나라 군대를 철수시킨다. 시간이 지나 조나라가 국력을 회복할때쯤 소양왕은 백기에 조나라 정벌을 명했지만 이미 조나라를 멸망 시킬수 있는 시기는 지났다고 출진을 거부한다. 범수는 백기가 출전하지 않는 것이 소양왕에 대한 불충이라 이간하여 백기를 죽이려 하지만 백기를 차마 죽일수는 없다고 생각한 소양왕은 백기를 유배보낸다. 하지만 범수는 조정의 대신들과 함께 소양왕을 설득하여 결국 백기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백기의 죽음으로 조정을 장악한 범수는 자신의 측근을 보내 조나라를 멸망 시키려 하지만 곧바로 항복해 진나라는 역습을 당하게 되고 다른 측근이 지키고 있는 성마저 함락되자 소양왕은 범수를 감옥에 가둬버린다.

소양왕이 직접 전쟁에 나가 전황을 파악해 보니 백기의 부하였던 진나라 장수들의 사기 저하로 싸우려 하지 않는다는 걸 읽어 내고 하급 장교였던 규[18]를 장군에 임명하여 연합군이 있는 성을 포위 하게 한다.

6국의 왕들이 주나라에 모여 진나라를 처들어올 연합을 조직한다는 소식을 들은 소양왕은 주나라로 가서 6국의 왕들을 직접 만나 이번 전쟁에서 6국 연합이 패배하면 진나라를 천자로 받들고 진나라가 패배하면 진나라는 함곡관에 박혀서 다신 나오지 않을 것을 내기한다. 6국의 왕들이 내기에 찬성하자 소양왕은 바로 규에게 연합군이 있는 성을 함락하게 하고 주나라에서 천자에 등극하려고 한다.

6국의 왕들이 모여서 소양왕을 기다릴 때 소양왕은 팔에 새겼던 三자를 보게되고 한 줄을 더 그어 王자 바꾸고 천자의 이름은 허명이니 자신이 천자에 오르는 것은 부질없다고 깨달은 바를 말하고 6국의 왕들에게 진나라가 쳐들어가 천하를 통일할 테니 전쟁을 준비하라 말하고 대진제국지굴기는 끝을 맺는다.


5.1.3. 대진부[19][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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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부터 노년의 모습으로 나오는데, 이때문인지 배우가 전작의 소양왕을 맡은 장박이 아닌 왕경상으로 교체됐다.

극 초반 왕흘에게 지시해 조나라의 수도인 한단을 공격하게 하면서 영이인과 조희, 영이인의 아들 영정이 위기에 빠지는 원인을 제공한다. 덕분에 영이인은 여불위의 도움을 받아 겨우 한단을 탈출해 함양으로 돌아왔고, 조희와 영정은 조나라에 남아 고통을 받아야 했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70대에 꿈에서 자신의 증손자인 영정을 보게 되고,[20] 태복에 해몽을 요청하는데, 태복은 후손이 천하통일을 할 징조를 뜻한다며 백여년전 태사담이 남긴 예언이 이뤄질 징조이고 그 대업을 이룰 후손은 이미 태어난 상태인 것 같다고 알려주었고, 이에 소양왕은 크게 기뻐한다. 4회에서는 임종 전에 아들인 안국군과 손자 영이인에게 꿈 이야기를 해준 후 혹시 짐작가는 게 있는지 물어보자 영이인이 영정의 이야기를 했고, 이에 숨을 거두기 전 증손자를 반드시 귀국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5.2. 킹덤(만화)[편집]


킹덤에서는 매우 오래 살면서 수많은 전란을 헤쳐나온 괴수같은 군주로 '전신(戰神)'이라 불리며 경외와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나오며 약칭인 '소왕'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소년과 같은 순수한 꿈을 노년에도 간직하며 진심으로 추구하면서도 이지적이고 자상한 할아버지 같은 사람으로 나오며 유언도 야심 넘치지만 이면에는 온후함이 묻어나오는 등 부드러운 면도 있던 것으로 보인다. 증손자인 영정이 불우한 과거 때문에 날카로운 인상에다 성격도 까칠하고 냉혹, 격정을 동시에 가진 자로 나오는 것과 다른 모습.

소양왕에게 충성을 다했으며 전쟁에서 꿈을 쫓은 왕의의 발언으로 보아 소양왕 시절의 전쟁은 돈과 금품이 오가지 않는 건전한(?) 전쟁이었나보다. 성교의 반란 당시 왕의는 창문군에게 여불위가 진나라의 권력을 잡은 후 전쟁이 무서울 정도로 시시해졌고 여불위의 이익에 직결되는 일이 많아졌으며 돈과 금품이 오가는 불손한(...) 전쟁이 되어버렸는데 왕의 본인의 마음은 매우 섬세해서(?) 그런 불손한 전쟁에서는 피가 끓어오르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게 말한 왕의가 소양왕에게 충심을 바쳤으니 소양왕이 하는 전쟁은 시시하지 않고 뜨겁고 치열하며 돈과 금품이 오가지 않는 매우 건전한(...) 전쟁이었나보다.

3권 과거회상에서 무인들이 소양왕 사후 여씨와 갈씨로 인해 무인들이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언급된다. 창문군이 영정은 소양왕을 뛰어넘는다고 말해서 왕의가 그를 직접 확인하려는 계기가 된다.

왕의의 회상에서 가면을 쓴 노인으로 잠깐 등장, 평생 중화통일이라는 야망을 꿈꾸며 전장에서 싸워온 자로 자신의 천명이 다했음을 직감한 듯 왕의에게 자신이 죽더라도 자신의 꿈을 이을 왕이 나타날지도 모르니 실력을 갈고닦는 것을 잊지 말라고 충고해준다. 이때 자신이 20년만 더 살 수 있었다면 꿈을 이뤘을 것이라고 하는데, 당시 광경은 창문군도 지켜보고 있었다. 왕의의 회상으로는 중화에 대한 애정과 꿈을 향하는 소년과도 같은 불타는 눈을 가졌다고 한다. 반면 증손자인 정(시황제)의 눈은 중화통일로 가는 길을 명확하게 꿰뚫어보고 있다고 평가했다.[21]

7권 영정의 과거를 다루는 에피소드는 소양왕이 죽고 며칠 후에 벌어진 일로 당시 궁궐에서도 극히 일부만 알고 있는 일이지만 암상인 시카는 여불위도 인정하는 정보력으로 그의 사망과 후계자까지 알아낸 상태였다. 그 말을 들은 동료 암상인은 그 전신(戰神) 영감탱이 드디어 죽었냐면서 놀랐다.

당대의 전설적인 무장 집단인 육대장군을 두고 있었으며[22] 조나라의 삼대천, 위나라의 화룡칠장[23]과 함께 한 시대를 대표하면서 중화에 맹위를 떨쳤다. 육대장군과는 다들 친했고 자신이 죽을 당시 살아있던 육대장군은 왕의밖에 없어서 왕의에게 많은 것들을 이야기해준 것으로 보인다. 이들 이외에 같은 세대 출신이면서 자질이 동등하다고 평해지는 표공의 회상에 따르면 그는 늘 변방에서만 싸워서 중앙에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재능을 알아본 자였다고 한다. 그 때문에 중앙에 부르려고 했지만 표공은 육대장군들은 다 전장에 야망을 가지고 싸우던 자들이지만 자신에게 있어 전장은 야망과는 상관없이 그저 삶 자체일 뿐이었기에 거절했다고 한다.

16권에서 서녀 규와 관련된 회상에 나오는데 가면을 쓰지 않았으며 군장에다 왼쪽 눈에 베인 것마냥 흉터가 있는 백발 노인으로 등장한다. [24] 소양왕은 늘 밖으로 나가다 보니 후궁은 완전 무법지대였다고 한 걸 볼 때 그런 쪽의 관리는 안 한 것 같지만, 후궁은 태후를 중심으로 한 여자들의 영역권이라 별개의 세력이라는 걸 생각한다면 마냥 그의 책임은 아니다. 규의 어머니는 한미한 무가 출신이었지만 한때 총애했던 아름다운 여인으로 아이가 태어나자 지킬 수 없다 판단해 규를 몰래 왕의의 집안에다 반출하고 얼마 후 증거인멸을 저질러서 죽었다. 이 사건을 소양왕도 규 본인도 전혀 몰랐고 왕의만 알고 있었다 창문군에게 몰래 귀뜸했다.

어느 성의 공방전에서 젊은 시절의 왕의가 승리하자 왕의를 치하할 당시 여병사 규를 만나보고 싶다고 해서 대면했을 때 무언가를 느끼고 나이를 물어본 뒤(당시 16살) 정체를 짐작하고 왕의를 추궁해서 진상을 알아낸다. 하지만 규를 인정하는 것은 불가능했기에[25] 간접적으로 지원해줬다고. 여담으로 처음 규와 만났을 때 이미 백발에 50대~60대 모습이었던 걸 볼 때 규가 생겼을 때 나이가 제법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규는 아버지를 닮아서 매우 천재적이었는데 그 때문에 왕의는 왕께 많은 자식이 있지만 가장 전신(戰神)의 피를 많이 물려받았다고 평했다.

소양왕은 유언으로 왕의에게 군주가 중화를 통일했을 때 해야 할 여러 당부를 전하고 왕의가 인정하는 군주에게만 전하라고 말했다. 설령 그것이 자신의 후손이 아닌 다른 누구라도 상관없었다는 모양. 왕의는 영정을 인정한 뒤 함께 중화통일을 하자며 유언을 전했고, 창문군에게 슬슬 소양왕의 육대장군이었던 시절의 자신과 작별하고 새로운 길을 나아가려고 했지만 이목에 의해 실패한다. 그래도 모든 것과 타협하고 웃으며 떠났고, 왕의의 죽음에 자신들과 그 시대를 더럽히는 거라며 왕의에게 분노를 느꼈던 염파도 이신을 통해 왕의의 마지막을 알자 허무해하면서 납득한다.

킹덤에서는 제나라 이후 본래 소양왕 시절에 있었던 진나라를 대상으로 한 합종군 전이 없었고 이목에 의해 본편에서 처음 된 것으로 나온다.[26][27]다만 제를 상대로 한 당시 시점에서 40년~50년 전 최초의 합종군전에서는 본인도 그 일원으로서 싸웠다고 한다.

최 공방전 당시 영정이 최 주민들의 전의를 고양시킬 때 창문군은 영정에 대해 전신(戰神) 소양왕을 뛰어넘는다고 평하며 이신에게 그 정도의 활약은 소양왕조차 불가능한 것으로 보통 군주가 아니라고 말했다.

소양왕을 두 번 엿먹인 인상여는 그와 두 번 만난 적이 있으며 어린아이와 같은 눈동자를 가진 순수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왕이 그리 순수해서 그런지 부하들도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순수한 자들이라고. 강한 건 맞지만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만으로 비원에 닿을 수 없다고 한다. 인상여가 왕의에게 한 말에 왕의가 한 반응을 보면 왕의도 자신들보다 더 이후의 시대에 가능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의미없는 짓을 하는 건 아니고, 사람은 마음을 이어나가면서 그 기반을 다지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5.3. 달인전 ~ 9만리를 바람에 타고 ~[편집]


창천항로의 작가 킹곤타가 그린 달인전에서는 진나라가 적대 포지션으로 나오다 보니 킹덤과는 딴판으로 전체적으로 최종보스 포스를 내뿜는다. 사람 얼굴이라기보다는 이빨도 날카롭고 손톱도 길어서 다소 요괴 같은 인상으로 나오는 편. 그러나 인생의 굴욕이라 할만한 인상여에게 데꿀멍하는 장면도 묘사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엄청난 포스를 보이며 자신의 대에서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려고 백기의 활용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주인공인 장단 일행도 소양왕을 만나고 엄청난 위압감을 느꼈고 인간같지 않다는 평가도 내린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정사에 나서고도 조를 함락 시키지 못하며 20년 이상의 시간이 흐르자 점점 초조해한다. 장평대전의 책임을 물어 해임한 백기를 불러야한다는 신하들의 청에 천하는 자신이 아닌 백기를 두려워하고 있다며 분노하고 결국 자신대에서 통일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손바닥에서 천하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고는 급격히 힘을 잃기 시작한다. 재상 범저는 패기가 사라져가고 있다고 느꼈고, 이후 계속 업무는 진행하여 진의 힘을 키우지만 결국 나이가 차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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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기색은》(史記索隱)에 기록된 이름.[2] 《세본》(世本)에 기록된 이름.[3] 원제는 대진제국지천하였으나 도중에 제목이 교체되었다.[4] 진 소왕을 쳐도 여기로 연결된다.[5] 증조부라고 해서 엄청 멀게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소양왕이 오래 살아서 태자 안국군은 5일 만에 사망했고, 영정의 아버지 자초도 즉위 3년 만에 사망했기 때문에 소양왕이 사망하고 5년 뒤에 진시황 영정이 13살의 나이로 즉위했다. 소양왕은 진시황이 9살일 때까지 살아있었다.[6] 소양왕 재위 초기 제 민왕에게 '동제'(東帝)와 '서제'(西帝)를 나눠 쓰자고 권유할 정도로 제나라의 힘이 막강했다.[7] 진나라의 비빈 계급[8] 후일의 선태후[9] 소양왕의 어머니 선태후의 이부동생이다. 그 외에도 선태후에게는 같은 아버지를 둔 미융이란 동생도 있었다.[10] 양후 위염과 선태후의 동생[11] 시호가 '도'(悼)이고, 이름은 실전되었다.[12] 과거 진(晉)나라에서 분리된 조나라, 위나라, 한나라.[13] 당시 소양왕의 즉위를 도운 조 무령왕은 이미 사구정변에서 살해당한 뒤였고, 대학살은 백기가 알아서 저지른 거라 소양왕과는 크게 상관없기는 했다.[14] 식객들 중 닭이 우는 소리를 잘 내는 사람과 개 짖는 소리를 잘 내는 사람이 있었고, 그들이 특기를 발휘해서 진나라의 검문을 피해 도망칠 수 있었다. 이후 아무리 하찮은 재주라도 다 쓸모가 있다는 뜻의 계명구도라는 사자성어가 생기게 되었다.[15] 이 기록은 2,000년 동안 동주 난왕에 이어 2위의 기록이었다. 그리고 약 2,000년이 지나서야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그의 손자에 의해서 4위로 밀려나게 됐다.[16] 이 소양왕 재위 시기 초나라는 회왕부터 고열왕까지 3명, 제나라는 선왕 혹은 민왕부터 제왕 건까지 4~5명, 연나라는 소양왕부터 연왕 희까지 5명, 조나라는 무령왕부터 효성왕까지 3명, 위나라는 양왕부터 경민왕까지 3명, 한나라는 양왕부터 환혜왕까지 3명의 왕이 재위했다. 남들은 두 번 이상 왕이 바뀌었는데 소양왕은 그 기간 동안 자기가 재위했다.[17] 작중에선 설공이라는 칭호를 자주 쓴다. 실제로 설 땅의 지배자였기 때문에 생전에 설공이라는 칭호가 자주 쓰였던 걸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배우는 삼국(드라마)에서 노숙초한전기에서 장량을 연기한 곽청.[18] 본인 말로는 자신의 아버지와 형이 싸우다가죽고 집안에 남자가 자신만 남았다고 한다. 원래 병졸이었는데 이런 가족들의 희생과 자신과 가족들의 헌신을 인정받아 하급 지휘관 정도로 승진한 듯하다.[19] 원제는 대진제국지천하였으나 도중에 제목이 교체되었다.[20] 증조할아버지에게 자신은 그보다 더 큰 왕관을 쓸거라고 이야기하는데, 이것이 진시황의 등극을 암시하는 장면이다.[21] 그런데 2권 초반 왕제의 반란 당시 왕의와 창문군의 대화에서 소왕을 정(진시황)의 고조부로 잘못 적어놨다. 아마도 오역의 문제일 듯...[22] 10권에서는 자신과 뜻이 같고 매우 강하면서도 모반의 염려가 없을 정도의 사람들인 육대장군이 수십만의 병사들을 자율적으로 부리는 것을 특별히 허락해 미쳐날뛰는 용들을 풀어놓은 것처럼 진나라가 중화에 맹위를 떨쳤다고 나온다. 하지만 여불위의 말을 볼 때 몇몇 그렇지 않은 자들은 자신의 카리스마로 수작질을 부리지 못하게 통솔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나라의 삼대천과 위나라의 화룡칠장이라는 비슷한 제도가 있었다는 게 밝혀진다. 하지만 뉘앙스를 볼 때 소양왕이 시초고 조나라 삼대천과 위나라의 화룡칠장은 육대장군 제도를 따라해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23] 다만 화룡칠장은 창설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내란으로 셋이 죽어버리고 셋은 감옥살이를 하게 되면서 그때 내란에 관여하지 않았던 오경 한 명만 이름이 남게 되고 싸웠던 자들이나 극히 일부의 무가(武家)만 기억하는 신세가 되었다.[24] 규를 육대장군으로 임명할 때는 군주로서의 관복이었다.[25] 원래 후궁에 아이를 무단으로 내보내는 건 금지기 때문에 알려지면 관계자 전원을 처벌해야 한다. 그래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고, 규는 이때부터 가면을 쓰면서 외모와 성별을 비롯한 모든 것을 불미에 부쳤다. 그 때문에 진의 고위층도 규의 본모습을 알지 못했으며 지나칠 정도로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아서 후대 왕이었던 영정도 의아하다고 여겼을 정도.[26] 소양왕 시절에는 조 삼대천이나 위 화룡칠장, 연 악의와 극신 등 걸출한 무장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나오던 시대라서 서로 나라간의 균형이 유지되었기 때문에 합종군까지는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으로 나온다.[27] 실제로는 합종군과의 전투와, 위,조 연합군, 한,위 연합군과의 전투가 모두 있었다. 진시황 즉위 직전에는 신릉군이 이끄는 합종군이 몽오의 진나라군을 박살내는 바람에, 진군이 함곡관까지 밀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