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승·오광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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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승·오광의 난
陳勝·吳廣之亂[1]

파일:진나라 지도.png[2]

시기
BC 209년 - BC 208년
장소
진(秦) 전역
원인
진(秦)의 시황제의 폭정과 그의 사후 조고의 가혹한 통치
교전세력
장초(張楚)
진(秦)
지휘관
진승
오광
장이
진여
채사
주문
무신
갈영[3]
소소
등종
주불
전장†
이귀†
장하
이세황제
조고
장한
사마흔
동예
섭간
왕리
소각
이유
병력
병력 규모 불명
병력 규모 불명
피해
반군 괴멸
피해 규모 불명
결과
장초(張楚) 멸망, 진(秦)의 쇠락
영향
항우의 등장, 진(秦)의 멸망

1. 개요
2. 발단
2.1. 진나라의 통일, 그리고 붕괴
3. 전개
3.1. 봉기
3.2. 세력 확대
3.3. 진승이 왕이 되다
3.4. 전 방향으로의 공세, 그리고 분열
3.4.1. 동쪽 방면
3.4.2. 형양성 방면
3.4.3. 위나라 방면
3.4.4. 조나라 방면
3.4.5. 진나라 방면
4. 진나라의 반격
4.1. 장한의 등장
4.2. 패망하는 장초
4.3. 진승 사후
5. 평가
6. 같이보기



1. 개요[편집]


중국 진(秦)나라 말기인 기원전 209년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일으킨 농민 반란으로 군웅의 할거를 이끌어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이었던 진(秦)나라의 멸망을 가져왔다.

비록 진승의 세력 자체는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진나라 군대에게 진압당했으나, 그 여파는 실로 어마어마하여 결국 거대한 진 제국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게 되었다.[4] 반란은 결국 실패했지만 통일왕조가 무너지고 난세로 들어가는 기폭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후한 말의 황건적의 난이나 원나라 말의 홍건적의 난, 신라 말의 원종·애노의 난과도 성격이 겹친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라는 캐치프레이즈로도 유명했으며 이 말은 오늘날까지 중국, 더 나아가 동아시아의 농민 봉기를 상징하는 외침이 되었다.

후대에도 평가가 좋았는데, 유교가 완전히 주류이념으로 자리잡은 동아시아에서. 법가에 심취해 유교에 적대적이었던 진 제국이 무너지는 단초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대 중국에서도 다른 의미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인민 봉기의 선구자라는 의미를 붙였기 때문이다. 이에 반란의 주도자인 진승에게 매년 제사를 지내주고 있다.[5]


2. 발단[편집]



2.1. 진나라의 통일, 그리고 붕괴[편집]


춘추시대전국시대의 대혼란을 겪은 중국은 마침내 진(秦)나라에 의해 하나로 통일되었다. 법가의 학문을 받아들이고, 원교근공의 외교정책을 받아들여 6국을 분열시킨 진나라는 백기, 왕전, 몽염 등의 장수를 앞세워 전쟁에서 압도적인 힘을 발휘했다. 기원전 230년에는 먼저 한(韓)나라를 멸망시켰고, 불과 10년밖에 안 되는 사이에 (趙)·(魏)·(楚)·(燕)·(齊)의 순으로 6국을 통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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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황제(始皇帝)
중국의 통일이라는 전대미문의 대업적을 이룬 진시황은 황제로 즉위하며 제국의 시대를 열었고,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여 전국을 36개 군으로 하고 각종 통제정치를 단행, 획일적인 문화를 창조하였다. 이른바 중앙집권적 전제군주제가 완성된 것이다.

시황제는 다시 몽염을 파견하여 북쪽의 흉노를 쫓아내어 만리장성을 구축하고, 남쪽은 임효와 조타를 보내 광동, 광서 지역을 정복하였다. 진나라의 위명은 해외에까지 뻗쳐, 중국의 다른 이름을 지나(支那) 혹은 진단(震旦) 등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이는 진(秦)이라는 음이 와전한 것이다.

그러나 진나라의 천하통일은 곧 진나라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진시황은 통일 중국을 완전히 자리잡게 하기 위해서, 멸망한 옛 6국의 잔재를 지우려고 노력했는데 문제는 너무 과격하고 급진적이어서 6국 유민들은 진시황과 진나라에 강한 원망을 품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시황제의 거대한 대외정책도 결국 국민의 부담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만년에 민심이 동요하자 진시황은 극단적인 탄압정책을 시작했다. 또한 전국 7웅 중 진을 제외한 다른 여섯 나라는 모두 멸망했지만, 망국(亡國)의 제후들은 눈을 시퍼렇게 뜨며 살아 있었고, 진나라는 그들을 보듬어줄 어떠한 정책도 펼치지 않았다.

결국 이러한 온갖 부담 속에 백성들의 불만은 한계 수위까지 차오르고 있었으며, 7개 나라가 있었던 전국시대의 질서를 그리워하는 여론이 퍼졌다. 이런 불안한 정국은 시황제 본인의 강력한 카리스마 덕분에 간신히 유지되고 있었지만 결국 시황제가 죽고 그의 뒤를 이어 2세 황제로 즉위한 호해(胡亥)는 이런 난맥상을 해결할 능력이 전혀 없는 무능하고 타락한 막장 군주였다. 호해는 정치는 간신 조고(趙高)에게 맡겨둔 채 막장스런 생활만 즐겼는데, 그러는 사이에 제국은 착실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3. 전개[편집]



3.1. 봉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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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09년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진나라 외곽의 대규모 공사에 소집되어 가고 있었는데, 이 중 진승과 오광은 무리를 인솔하는 지위인 둔장(屯長)을 맡고 있었다. 가는 길에 장마가 내려 강이 불어나 기한을 맞출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진나라의 가혹한 법은 기한을 못 맞추는 정도만으로도 사형이었다. 사람들을 끌고 가고 있던 진나라 병사들은 차라리 이들을 죽이고 시간을 맞추지 못한 죄를 피하려 했고, 진승은 이를 알자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어차피 죽을 거, 한 번 왕이 되어보고 죽는게 낫지 아니한가'라고 외치며 진나라 병사들을 죽이고 같이 길을 가던 사람들을 모아서 관아들을 치며 무기와 군사를 모으기 시작했고 자신들을 장초군이라 부르며 세력을 불려나갔다.

진승과 오광은 거사를 시작하기 전에 점치는 사람에게 일의 성패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물어보았는데, 점쟁이는 "성공하면 큰 공을 세울 수 있지만, 성패는 귀신에게 물어보라."라고 답하였다. 이에 진승은 "이건 귀신의 위신을 빌려 사람들을 복종시키라는 뜻이다."라고 해석하여 흰 비단에 붉은 글씨로 '진승왕'(陳勝王)이라고 쓰고는 물고기를 잡아 그 배속에 넣어 두었다가 사람을 보내 사오게 하여 삶아먹도록 시켰다. 수졸들은 물고기 배속에서 '진승왕'이라고 쓴 백서(帛書)를 발견하고 매우 놀랐다.

여기에 더해, 밤에는 몰래 오광을 시켜 수졸들이 숙영하고 있는 부근의 황폐한 사당에 가서 한밤중에 장작불을 피워 놓고 여우 목소리를 흉내내어 외치도록 했다.

대흥초, 진승왕

大興楚, 陳勝王

"진승이 왕이 되어,

초나라는 크게 일어날 것이다."

이러한 소란에 수졸들은 크게 놀라워했고, 진승을 새삼 다시 주목하게 되었다.[6]

오광은 평소에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편이라 인기가 많았다. 이때, 수졸들을 이끄는 진나라의 장위(將尉)가 취한 모습을 본 오광은 일부러 수졸들에게 이 틈에 달아나자고 소리쳤고, 그 말을 듣고 화가 치민 장위는 오광을 흠씬 두들겨 팼다. 그리고 마침내 죽여버리려고 칼을 빼들었을 무렵, 수졸들이 달려들어 막았고 그틈에 오광은 그 칼을 빼았아 장위를 죽여버렸으며, 진승도 남은 한 명의 위(尉)를 살해해버린 다음 수졸들에게 역사에 길이 남을 명언을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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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부들을 선동하는 진승

公等遇雨,皆已失期,失期當斬。藉弟令毋斬,而戍死者固十六七。

너희들은 비를 만나 모두 기한을 어겼고 기한을 어겼으면 참수를 당할 것이다. 참수를 당하지 않더라도 (수자리) 지키는 사람 열 명 중 예닐곱 명은 죽을 것이다.

且壯士不死即已,死即舉大名耳,王侯將相寧有種乎

또 장사(壯士)란 죽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죽는다면 명성을 드러내야 할 뿐이다. 왕(王), 후(侯), 장(將), 상(相)씨가 어찌 따로 있단 말이냐!

사기(史記)·진섭세가(陳涉世家)』[7]

[8]


이에 모든 수졸들이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9] 이구동성으로 호응하였다.

"삼가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진승과 오광은 살해된 진나라 도위들의 목을 잘라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3.2. 세력 확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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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승과 오광은 백성들에게 인망이 있었으나 호해와 조고의 농간 때문에 죽게 된(사구정변) 진나라의 황자 부소(扶蘇)와 초나라 최후의 명장이었던 항연(項燕)을 사칭하면서 국호를 대초(大楚)로 정하고는, 진승 스스로는 장군이 되고 오광은 도위(都尉)가 되었다. 봉기군은 우선 대택향의 관아를 습격하여 무장을 갖추고, 병력을 모아 서쪽의 기현(蘄縣)을 공격해 함락했다.

이후 부리(符離) 사람 갈영(葛嬰)[10]에게 기현의 동쪽을 공략하게 하고, 본인은 계속 북서쪽으로 진군하면서 질(銍), 찬(酇), 고(苦), 자(柘), 초(譙) 등의 고을을 계속해서 점령하였다. 이 과정에서 병력이 크게 불어나 허난성 회양(淮陽)군[11]의 치소(군청 소재지)인 진성(陳城)에 이를 무렵에는 전차 600~700승(乘), 기병 1,000여 기(騎)에 보병 병졸은 수만 명에 달하는 엄청난 대군이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사소한 도적떼의 난립 정도로 볼 수 없어진 것이다.

이런 엄청난 대군의 기세에 진성의 회양군 태수는 진작에 달아나 버렸고, 태수 대신 군승(郡丞)[12]만이 홀로 용감하게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이기지 못하고 전사하고 말았다. 마침내 진승은 진성을 점령하였다.


3.3. 진승이 왕이 되다[편집]


진성에 입성한 진승은 며칠이 지나자 지역의 삼로(三老)와 호걸(豪傑)들을 불러 일을 논의하였다. 그들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진승에게 왕이 될 것을 요구하였는데 과거 위나라의 명사였던 장이(張耳)와 진여(陳餘)는 진승이 왕이 되려는 일이 현명하지 못하다고 반대하였다.

"원컨대 장군께서는 왕이 되는 일을 뒤로 미루시고 급히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격하십시오.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을 진나라에게 망한 여섯 나라에 보내 그들의 후예를 찾아 다시 세우도록 하십시오. 천하는 장군의 당이 되어 진나라에게 더욱 많은 적이 생기게 됩니다. 그 결과 진나라에 적이 많이 생기면 진나라의 힘은 분산되고, 당이 불어난 장군의 군사는 강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하면 들판에서는 장군과 교전할 병사들은 없게 되고 장군의 군대에 대항해서 성을 지키려는 현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 기회를 이용하여 포악한 진나라를 주멸하여 함양에 거하면서 제후들에게 영을 내리십시오. 망한 제후들을 다시 세우고 덕으로써 그들을 복종시킨다면 제업(帝業)은 자연히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조그만 진 땅을 근거로 홀로 왕이 되신다면 천하는 마음이 해이해져 흩어지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진승은 "왕이 되는 일을 미루고 진나라의 수도를 먼저 공격하라."는 장이와 진여의 제안을 거절한 후 마침내 스스로 군주가 되고 국호를 '장초'라고 하였으며, 이것이 바로 패망으로 가는 시작이 되었다.


3.4. 전 방향으로의 공세, 그리고 분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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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초군의 진격로

일단 진승이 왕이 되는 것을 막으려는 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진여는 또 다른 제안을 내놓았다. 진승은 서쪽으로 나아가 진나라를 멸망시키는 일에 전념하고, 대신 하북을 평정하는 일은 따로 별동대를 보내라는 것.

이 제안을 받아들인 진승은 무신(武臣)을 지휘관으로 삼고, 소소(邵騷)를 호군(護軍)으로 삼은 뒤, 장이와 진여를 좌우 교위(校尉)로 삼아 따로 3,000여 명의 북벌군을 편성하였다.

또한 친구이자 같이 봉기를 주도한 오광을 가왕(假王)으로 삼고, 따로 병력을 편성하여 형양(滎陽)을 공략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등종(鄧宗)에게는 구강군(九江郡)으로 나아가게 하고, 주불(周巿)[13]은 위나라 지역으로 나아가게 하였으며, 또한 과거 초나라 명장 항연의 밑에서 시일(視日)[14]의 직책에 있었고, 춘신군(春信君) 황헐(黃歇)의 밑에 있었다는 주문(周文)이라는 인물에게 부대를 맡겨 진나라의 수도 함양을 공략하게 하였다.

또한 채사(蔡賜)라는 인물을 상주국(上柱國)으로 임명하였다.


3.4.1. 동쪽 방면[편집]


진승이 서쪽으로 진군할 때 동쪽으로 나아가던 갈영은 현재의 안휘성 정원현(定遠縣) 지역인 동성(東城)까지 나아갔고, 거기서 갑자기 양강(襄强)이라는 인물을 초나라의 왕으로 세웠다. 그런데 진승이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는 이야기를 뒤늦게 듣자, 양강을 살해하고 본인은 돌아와서 이 일을 해명하려 했는데, 그럼에도 격노한 진승은 갈영을 죽여버렸다.


3.4.2. 형양성 방면[편집]


가왕으로 임명된 오광은 부대를 이끌고 형양성을 포위하고 공격했지만, 삼천군(三川郡)[15] 태수이자 승상 이사의 아들인 이유(李由)가 워낙 완강하게 수비하여 그다지 성과가 없었다.


3.4.3. 위나라 방면[편집]


위나라 땅을 거쳐 적(狄)[16] 땅까지 진군한 주불은 적현의 현령이 거세게 저항하고 있어 애를 먹고 있었는데, 마침 옛 제나라 규성 전씨 왕족 출신인 전담(田儋)이라는 인물이 사촌 동생 전영, 전횡 등과 함께 적현 현령을 살해하고 스스로 제나라 왕이 되어 주불을 격파했다.

주불은 군대가 뿔뿔이 흩어졌다가 옛 위나라 왕족 출신으로 지금은 진승의 옆에 있는 위구(魏咎)를 위나라 왕으로 옹립하였다.

"천하가 혼란하니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왕을 뵈러 달려오고 있습니다. 오늘 옛 위나라 땅에서 모두 반진의 깃발을 들고 일어선 뜻은 바로 위왕의 후손을 찾아 그 뒤를 잇게 하라는 뜻입니다."


주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주불을 위왕으로 여러 차례 옹립하여 했으나, 주불은 이를 모두 거절했고, 무려 다섯 번이나 위구가 위나라 왕이 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진승에게 요청하였다. 마침내 진승도 위구가 위나라 왕이 되는 것을 허락하여 위나라가 재건되었다. 주불은 위나라의 상방이 되었다.


3.4.4. 조나라 방면[편집]


조나라 지역으로 나아간 무신은 여러 호걸들에게 유세하여 수만 명의 군세를 얻어, 스스로 무신군(武信君)이라 일컫었다. 그리고 조나라의 10여 개 성을 무력으로 함락시키고, 마침 무신을 찾아온 변설가인 괴철(蒯徹)의 계략을 이용해 30여 개 성을 싸우지도 않고 함락시키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다.

일이 이쯤 되자 무신도 나름대로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고, 장이와 진여도 진승이 마음에 들지도 않는 데다 자신들의 계책을 무시했던 것도 괘씸하여 무신에게 독립을 권하게 되었다. 이에 무신은 장이를 우승상으로, 진여를 대장군으로, 소소는 좌승상으로 삼고 마침내 스스로 조왕(趙王)이 되어 장초로부터 독립하고 말았다.

당연히 진승은 분노해서 무신의 가족들을 잡아서 죽여버리려고 했는데, 채사는 "지금 가장 큰 적이 진나라인데, 무신도 적으로 만들어서 좋을 게 없습니다"라고 주장하자 그럴 듯 하다고 생각해 무신을 왕으로 인정해주며 진나라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무신이 이런 명령을 들을 이유도 없었고, 오히려 옛 연나라 지역으로 휘하 장수인 한광(韓廣)을 파견하여 세력 확대만을 노렸다. 그런데, 한광이 연나라 지역을 평정하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본인이 무신을 따라해서 스스로 연왕의 자리에 올랐다! 화가 치민 무신은 장이와 진여를 데리고 연나라를 치러 갔지만, 어처구니없게도 한밤중에 쏘다니다가 한광의 척후병에게 딱 걸려서 되려 포로가 되어 버렸다. 장이와 진여의 언변으로 풀려나긴 했지만 무신의 위세는 이미 단단히 꺾여버렸고, 이 틈을 노린 진나라 장수 장한은 무신의 부하들에게 무신을 죽이고 항복하면 용서해준다는 칙서를 위조해서 뿌렸다. 이에 넘어간 이량에게 무신이 살해되고 조나라 측 세력은 어린아이 손목 비틀듯 제압당해 버린다.


3.4.5. 진나라 방면[편집]


한편, 진나라 수도 함양을 향해 서쪽으로 진격하는 주문은 이동하는 중에도 지나가는 곳마다 진나라를 타도하자며 모병을 계속했고, 진나라 수도 함양으로 통하는 관문인 함곡관(函谷關) 근처에 이를 무렵에는 전차 1,000승, 병력 수십만명에 이를 정도로 불어났다. 이게 어느 정도의 규모냐면 춘추전국시대에 제후국은 '천승지국'으로 불렸는데, 천승지국의 천승이 바로 마차 1,000승의 그 천승이며 전국 7웅 최약체인 한나라는 30만 대군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즉 이 시점에서 장초군의 규모는 이미 숫자상으론 춘추전국시대의 제후국이나 전국 7웅의 한나라 수준쯤으로는 불어난 셈이다.

주문은 진나라의 수도인 함양에서 불과 50k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진을 쳤고, 바로 함양을 위협하는 형세를 만들었다. 이렇게 되자, 진나라는 각지에서 영향력을 모조리 상실하고, 수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에 수십만명의 반란군이 버티고 있는 최악의 상황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부터 반전이 시작되었다.


4. 진나라의 반격[편집]



4.1. 장한의 등장[편집]


당시 진나라의 황제였던 호해는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를 때까지 현실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동쪽에서 거대한 변란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누군가가 알리자, 호해는 오히려 "그게 말이 되냐!" 같은 식으로 현실을 부정하며 가두어버렸다. 이후 숙손통이 "이놈들은 그냥 사소한 도적떼인데, 이미 거진 다 때려잡았으니 폐하는 아무 걱정도 안 해도 됨."이라고 왜곡하여 이야기를 전달하자 크게 기뻐하였다.[17]

하지만 눈앞에 수십만 대군이 우글우글한 상황이 되자 어리석은 호해도 현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멘붕 직전의 호해가 많은 대신들을 불러 모아 어떻게 해야 하냐고 의견을 구하자, 소부(少府) 벼슬에 있던 장한이 입을 열었다.

"도적들이 이미 가까이 다가왔고 또한 그들의 수가 많으니 가까운 군현의 군사들을 징발하여 싸우기에는 이미 시간이 늦었습니다. 여산(酈山)에 옮겨 노역을 시키고 있는 죄수들의 숫자가 많사오니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군사로 삼아 도적들을 공격하여 물리치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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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章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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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에서 노역하던 인부들
당시 함곡관 바깥의 동쪽은 완전히 반란군의 소굴이 되어버렸고, 이런 상황에서는 병력을 징발하기도 힘들었으며, 무엇보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이에 장한은 임시방편으로 여산에서 일하던 인부들을 용서해 병력으로 쓰자고 건의한 것이었다. 당시 여산에는 진시황릉(秦始皇陵)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인부들이 고통스럽게 노역 중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진나라의 엄한 법률에 걸려들어 죄인이 되어 끌려온 사람들이었다.

호해는 즉시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장한으로 하여금 여산의 죄인들은 물론, 노비(家奴)들의 아이들까지 모조리 사면해서 징발하게 했다. 어차피 죄인의 신분이었던 여산의 인부들은 계속 일하다 죽느니, 병사로 싸우는 편이 더 나았던 상황이라 순순히 받아들였다. 만약 싸워서 이기면 이십등작을 받고 출세할 기회가 생기고, 만에 하나 죽는다 해도 적어도 진나라가 망하지만 않으면, 가족들이 어느 정도 대우를 받는다든가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장한은 끌어모을 수 있는 병력은 모조리 끌어모았다.

그리고, 대역전의 시간이 찾아왔다.


4.2. 패망하는 장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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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秦)군의 진격
장한은 죄수 군대를 이끌고 나섰고, 첫 싸움에서 주문의 부대를 여지없이 격파하였다. 자세한 전황에 대한 언급이 없어 당시 어떤 방식의 싸움이 벌어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차피 주문이 모아 온 대군도 진격하는 중에 모인 백성들로 인해 늘어난 숫자일 뿐이었다. 즉, 정예군하고는 거리가 먼 오합지졸에 가깝다는 이야기인데, 따라서 장한의 부대가 급하게 끌어모은 인부들이라고 해도 전투력으로 보자면 꿀릴 것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장비나 보급 등만 보면 더 나으면 나았지 모자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썩어도 경제력만큼은 천하 제일인 진나라였으니. 그리고, 오히려 한몫이나 챙겨보려고 주문을 따라온 병사들에 비하면 죄 짓고 노역을 하다가 희망을 얻은 병사들이 더 강력할 수도 있었다. 심지어 장초의 지휘관은 진승이었지만 진의 지휘관이 장한이라는 것도 크나큰 차이점이었다(...).[18]

진나라의 수도를 불과 50km 남겨두고 대패한 주문은 우선 조양(曹陽)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몇달 후 병사를 추스른 장한은 이곳까지 추격해서 또 다시 주문의 부대를 격파했고, 주문은 민지(澠池)까지 달아났지만 10일 정도 지나자 진나라군은 이곳까지 따라붙었다. 결국 민지에서도 무너진 주문은 절망하여 칼로 목을 찔러 자결해버리고 말았다. 총사령관이 전사했으니, 남은 부대들도 더이상 싸울 수가 없었다.

장한은 나라가 멸망 직전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오히려 토끼몰이를 하는 쪽으로 전세를 바꿔버렸다. 하지만 장한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갔다. 이제 멸망을 걱정해야 하는 것은 오히려 장초의 군단이 되었던 것이다.

이 무렵 형양을 공격하고 있었던 오광의 부대에도 주문의 대패 소식이 알려졌다. 이 부대에 속해 있던 전장(田臧)이라는 장수는 다른 생각이 들어 이귀(李歸) 등에게 이런 의견을 전했다.

"주문이 이끌던 부대는 이미 패해, 진나라 군사들은 아마도 조석지간에 이곳에 당도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형양성을 포위하고 있으면서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다면 진군이 당도하여 우리는 크게 패할 것이다. 차라리 형양성을 공격하기에 족한 소수의 군사만을 남겨 놓고 정예병을 모두 이끌고 나아가 진군을 맞이해 싸우는 것이 어떠한가? 더욱이 지금 오광은 교만하고 병사의 일에 무지하니 그와는 계책을 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를 죽이지 않는다면 일이 그르치게 되어 낭패를 당할 것이 분명하다.


즉 형양에서 소득도 없이 죽치고 있어봐야 장한에게 당할 테니, 총사령관인 오광을 그냥 죽여버리고 이쪽에서 먼저 장한을 공격해서 격파하자는 이야기였다. 다른 사람들도 동의했는지, 전장은 오광을 그대로 죽여버렸다. 그리고 그 머리를 오광의 친구이자 자신들의 군주였던 진승에게 보내서 뜻을 전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군주인 진승은 당연히 화를 내야 마땅하다. 하지만 진승은 그러지 않았고, 전장을 죽은 오광 대신 상장군에 임명했다. 이미 이 시점의 진승은 그들이 제 멋대로 행동해도 처벌할 수 있는 통제력이 없었던 것이다.

상장군이 된 전장은 형양의 포위를 이귀에게 맡겨두고, 본인은 정예병을 모조리 이끌며, 호기롭게 서쪽으로 나아가 오창(敖倉)에서 진군과 격돌하였다. 그러나 주문을 박살내고 온 장한은 전장 역시 어린아이 잡아 족치듯 간단하게 때려잡고, 전장을 죽여버린 후 그대로 형양까지 나아가 남은 이귀의 병력도 청소하듯이 쓸어버렸다. 이귀 역시 이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장한은 멈추지도 않고 등열(鄧說)의 부대를 격파하고, 오서(伍徐)의 부대도 아주 작살을 내었다. 두 명 모두 전투에서 패하고 간신히 도망쳤는데, 진승은 도망쳐서 온 등열을 죽여버렸다. 황제 호해는 장한이 연전연승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마흔(司馬欣)과 동예(董翳) 등의 장수를 보내 장한을 돕게 하였다. 장한은 오서를 추격해서 드디어 진승이 있는 진현까지 당도하였다.

이를 막기 위해 상주국 채사 등이 나섰지만 오히려 격파당해 전사했고, 진현의 서쪽에 부대를 주둔시켰던 장하(張賀)도 손도 써보지 못하고 진군에 무너져 내렸다. 결국 진현도 장한에게 함락당했고, 진승은 도망을 치다 수레를 몰던 장가(莊賈)라는 인물에게 살해당했다. 진승이 왕으로 즉위한 지 불과 6개월 만이었다.


4.3. 진승 사후[편집]


진승이 죽고 난 후, 그의 시종 출신이었던 여신(呂臣)이라는 인물이 신양(新陽)에서 병력을 다시 일으켜 진현을 함락하고 장가를 죽여 일단 원수를 갚았다. 그러나 곧이은 진군의 반격으로 다시 진현을 내주었는데, 물러난 여신은 이후 경포와 만나 다시 진현을 함락했고, 때마침 초회왕(楚懷王)을 옹립한 항량이 진현을 재건한 초나라의 수도로 삼았다.


5. 평가[편집]


"진섭(陳涉)의 지위는 제(齊), 초(楚), 연(燕), 조(趙), 한(韓), 위(魏), 송(宋), 위(衛), 중산국(中山國) 등의 군주들의 그것에 비해 보잘것없을 정도로 비천했으며, 그가 거사를 할 때 사용했던 호미와 곰방메 그리고 가시나무로 만든 창은 제후들의 군사들이 사용했던 극(戟)과 갈고리 창에 비해 날카롭지 않았다. 더욱이 유배되어 변경을 지키러 가던 군사들의 수는 구국(九國)의 군주들이 거느린 군사들의 숫자에 비해 턱없이 적었다. 또한 심모원려(深謀遠慮)에 의해 행군과 용병의 도리를 깨우친 사람도 예전의 모사(謀士)들에 비해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개 필부였던 진승(陳勝)이 한번 일어나자 (秦)의 칠묘(七廟)가 무너지고 진왕(秦王)의 목숨은 다른 사람의 수중에 떨어져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 것은 어떤 연유에서인가? 그것은 인의(仁義)를 베풀지 않고 공수(攻守)의 도리를 잘못 적용한 때문이었다."

저소손(褚少孫)[19]


진나라에게 멸망한 여섯 나라 가운데 특히 초나라의 원한이 가장 컸다. 진나라에 억류당해 그대로 죽은 회왕(懷王)의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남공(南公)은 "두고 보라. 초나라가 민가 세 채만 남을 정도로 쇠퇴하더라도 결국 진나라를 멸할 자는 초나라일 것이다." 하지 않았던가? 진승이 초나라에서 일어나자 많은 무리가 따랐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는가? (항량: 그 모두 진나라의 폭정에…) 아니다. 다들 진승이 초나라의 원한을 풀어줄 거라 '착각'했기 때문이다. 초나라 사람들은 진승이 회왕의 후손을 왕으로 세워 그 한을 풀어주리라 여겼다. 그런데 진승은 스스로 왕이 되었으니, 민심이 그에게 실망하는 건 당연하지 않겠는가?

범증

거의 성공 직전으로 보였던 진승의 난은, 장한의 대반격이 시작되면서 물거품으로 끝났다. 장초는 건국을 알린 지 1년도 되지 않아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이렇게 된 이유로는 애당초 진승에게 자체적인 역량이 없었던 점이 크다. 진승은 가난한 평민 출신으로 본인도 기반이 없었고, 처음 반란을 일으킨 당시의 상황도 상당히 즉흥적이었으며,[20][21] 이후 반란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최대 수십만에 달하던 장초의 거대한 병력은 본질적으로는 오갈 데 없는 유랑민들을 긁어모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은 그저 진나라의 폭정 때문에 합류했을 뿐이었고, 진승과 장초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 즉 갑작스럽게 세력을 불린 만큼, 무너지는 순간도 한순간이었다.[22]

물론 평민 출신으로 갑작스럽게 일어난 진승에게 자체적인 역량이 없었다는 점은 어쩔 수 없는 핸디캡이긴 하다. 그러나 이후 전개과정을 보면 진승은 좀 더 좋은 방향으로 상황을 이끌 기회가 몇 번 있었는데 이를 놓쳤고, 문제를 간파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상황을 너무 과대평가 해버렸다.

앞서 말했듯이 평민 출신인 진승은 어떠한 배경도 없었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그저 진승이 가장 먼저 세력을 일으켰기에 진승을 따랐을 뿐이다. 진나라에게 멸망당한 여러 나라의 유신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목적은 진나라에게 멸망한 전국시대 여섯 나라를 부활시키는 데 있었다. 만약 이러한 상황에서 진승이 멸망한 나라들의 후예를 찾아 옹립하고 스스로 보좌하는 위치에 있었다면 여러 사람들을 이끌 수 있는 명분적 기반을 만들 수 있었겠지만, 진승은 스스로 왕위에 올라 버렸다. 이는 장초의 여러 장수들이 줄줄이 서로 독립을 꾀하는 막장스런 사태로 이어졌다. 장한의 군대가 진군할 때, 독립한 나라들 중 단 한 나라도 진승을 도우려 하지 않았다. 결국 진승 본인에게는 아무런 힘도, 권위도 없었다.[23][24]
파일:exhZWG5.jpg
드라마 초한전기의 장한

물론 장한의 대처도 빼 놓을 순 없다. 장한은 멸망 직전의 상황에서 연거푸 대승을 거두어 장초를 무너뜨리고 진승을 참살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이렇다 할 만한 패전조차 없었다. 과거 전국시대에 육국을 벌벌 떨게 하였던 진나라의 가공할 국력은 이 시점까지 희미하게나마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저소손의 말처럼, 과거 가공할 군세와 엄청난 영화를 자랑하던 전국시대의 육국들조차 여지없이 무너뜨리던 진나라는 그들과 비교도 되지 않을 진승과 당초 수백에 지나지 않던 진승과 오광의 무리에게 뒤흔들렸다. 이는 당시 진나라의 상황이 그만큼 막장이라는 점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이야기. 별다른 힘도 없었던 진승과 오광이 거병하자 천하가 호응하여 들고 일어났다는 점은, 진나라를 파국으로 이끌고 간 것은 결국 진승과 오광이 아니라 진나라 체제 자체의 모순이었다는 점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진승의 반란 자체는 허무하게 진압되었으나 그가 반란을 일으키고 스스로 왕이 된 것은 당대뿐 아니라 후대에도 크나큰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이후로도 왕조의 혼란과 교체기 때 다른 문화권들이 귀족 혈통의 후예 등을 내세우며 상속권을 주장하면서 들고 일어선 것과 달리, 중국 문명권은 그런 거 없이 신분이 어떻건 무리를 지을 힘이 있는 자들은 누구나 황제를 자처해서 들고 일어났으며, 진승보단 조금 나았지만 마찬가지로 평민 출신이면서 황제에 오른 한고조, 훗날의 명태조, 분열왕조까지 합치면 노예 출신 황제까지 등장하는 등 혼란기에는 힘을 가지고 있다면 누구나 제위를 주장할 수 있는 풍토가 만들어지게 된다.[25]

그리고, 진승, 오광이 뿌린 불씨는 거대한 태풍의 도래를 알리는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이 사건을 바탕으로 인터내셔널가 상고한어 버전이 나왔다. 중국의 사이트인 비리비리에 처음 업로드되었다. 스토리는 진나라의 폭정에 지친 백성들이 진승·오광의 봉기로 탄생한 장초(張楚)를 환영하는 모습이 담겨져 있다.

6. 같이보기[편집]


  •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
  • 이세황제
  • 시황제
  • 법가 - 봉기의 발단이 된 사건에 대해서 반박이 있다.[26]
[1]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명칭은 진승·오광의 난이지만, 기본적으로 핵심은 진승이 중점이기 때문에 '진승의 난'이라는 표현도 사용된다. 또한 처음 봉기를 일으킨 곳에서 이름을 따 '대택향기의'(大澤鄉起義)로 부르기도 한다. 영어 위키백과 해당 항목의 제목인 Daze Village Uprising 역시 이를 번역한 표현.[2] 오류가 있는데 요동쪽이 색칠되어 있지 않은 지도다. 전국시대 연나라가 고조선에게 요동을 뺏은 이후 진나라가 이어서 통치했는데 이것이 표기되지 않은 것이다.[3] 제갈량의 조상이다.[4] 중국 최초의 민중 봉기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서주 말기, 여왕(厲王)의 치세에 일어난 국인(國人)들의 난이 최초이다.[5] 비슷한 이유로 황건적의 난이나, 명말의 이자성이나 청말의 홍수전도 현 중국에선 평가가 좋다.[6] 참고로 이 말은 2200여년 뒤 시위에서 다시 등장하는데 대신에 이 때는 대흥초를 대초흥으로 바꾸었다. 다만 이 때의 구호는 백지시위와는 제로 코로나 반대 시위라는 것만 빼면 관련없고(몇달 일찍 나왔다.) 베이징 대학교 학생들의 시위였다고 한다.[7] 권중달 《자치통감》 1권. pp403[8]왕후장상 영유종호라는 문장은 일반 민중에게, 특히 반란을 일으키는 민중에겐 하나의 캐치프레이즈로 작용했다. 고려 무신정권 때의 만적의 난에서도 이 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 한반도로도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9] 원문은 단우(袒右). 고대 중국인들이 뜻을 같이 한다는 표시로 행하는 의식으로 국인이나 중인의 경우는 왼쪽 어깨를, 죄인이나 하층민이 할 때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냈다.[10] 제갈량의 조상이다.[11] 현재 허난성 저우커우 시 소재[12] 사람 이름이 아니라 직책이다.[13] 주시가 아니라 주불이 맞다.[14] 전문적으로 천상(天象)을 관찰해서 점을 쳐 전투나 행사에 대한 길흉을 점치던 사람.[15] 황하(黃河), 락수(洛水), 이수(伊水) 등 세 강 사이에 있는 땅이라 해서 삼천(三川)이라 이름 붙여진 곳. 지금의 황하 이남, 하남성 영보(靈寶) 이동, 중모(中牟) 이서를 관할한 지역이다.[16] 진나라가 설치한 현 이름으로 지금의 산동성 고청현(高靑縣) 동남.[17] 어전을 나온 직후 진나라의 다른 우국지사들에게 '나라가 위험한데 그따위로 아부를 떠냐'고 힐난받자 '내가 그렇게 말해서 우리 모두 호랑이 아가리를 나온 것이다'라고 대답한 여담이 있다. 그리고 숙손통은 초한쟁패기 때 항우의 진영에 있다가 유방에게로 전향했고, 한나라 성립 이후에는 고제의 윤허를 받아 유교적 궁중예법을 도입했다. 어찌보면 중국 황실과 귀족의례의 골격을 세운 인물. 그냥 지나가는 엑스트라 아첨꾼 A가 아니다[18] 몇 번 전투를 치러봤다지만 어차피 무지렁이 출신인 진승과 그래도 글을 읽을 줄 알고 병법이나 기타 행정에 대해 해박한 장한인 만큼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소부라는 관직이 우습게 볼 자리가 아닌 것이 삼공 다음으로 높은 구경에 해당하는 관직 중 하나로 위치상 조선으로 치면 삼공은 삼정승에 빗댈 수 있고 구경은 판서에 비유할 수 있다. 실제로 조선시대에 6조판서와 좌우참찬 그리고 한성판윤까지 이 아홉 관직을 묶어 구경이라 하기도 하였으니. 그리고 이런 자리에 오를 정도면 이미 진시황 시기에 뭔가 활약을 해서 승진을 해서 올랐다는 얘기다.[19] 전한 선제 시대의 학자다. 당시 많은 부분이 소실된 《사마천의 사기》 소실 부분을 보완했다.[20] 애초에 진승의 행보는 오락가락하는데 처음에는 대흥초 진승왕이라는 구호로 자신이 왕이 될 것으로 프로파간다를 퍼뜨리고 봉기를 일으키면서는 왕후장상 영유종호라 하더니 나중에는 자신이 부소라고 사칭하였으며 그 다음에는 다시 자신이 왕이 된다. 그나마 초나라 복국과 자신이 왕이 되려는 마음만은 진짜였던 것 같긴 하지만 그럼 부소 사칭은 왜 했는가 의문이다.[21] 사실 의문이고 자시고 할 것 없이 그냥 프로파간다라고 보면 된다. 어차피 무지렁이인 진승이 왕이 되려면 당시 유명한 이름을 갖다붙일 수밖에 없었던 것. 부소를 사칭한 것도 사람을 모으는데 쓸모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게 뻔하다. 초나라 복국도 마찬가지로 진승 본인이 초나라 출신이라 그런 것도 있겠지만 당시 가장 마지막까지 진에 저항한 나라가 초나라인 만큼 그 이름을 쓰는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마디로 어차피 진승이나 그 휘하 사람들이나 원래는 무지렁이 농민 출신이었으므로 무슨 깊은 사상 정치에 대한 이해같은 건 없었다. 그런 만큼 적당히 진승 자신에게 도움이 되고 유랑민들이 적당히 혹할 만한 소스가 있다면 딱히 가리지 않고 썼다고 봐야 할 듯하다.[22] 사실 아무리 가혹한 폭정으로 다스린다고 해도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농민반란이 성공한 예는 세계사를 통틀어 거의 없다.[23] 만약 진승 본인에게 실력이 있었거나 혹은 진나라를 쳐서 무너뜨렸다면 그 권위에 힘입어 제위에 오를 수 있었겠지만 진승은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공동의 적인 진나라를 아직 처리하지도 못했으면서 바로 왕위에 오르는 악수를 두었다. 괜히 장이가 진승에게 먼저 진을 쳐 무너뜨리라고 말한 게 아니다.[24] 진승이 왕위에 오르면 그를 따르던 무리들에게 보답을 해줘야 하는데 그러면 결국 무리는 나눠지게 되고 땅도 나눠줘야 하므로 힘 자체가 분산된다. 하지만 진승에게 권위는 없으므로 이후 진승이 위험하더라도 떨어져 나간 이들을 부릴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그러니 왕위에 오르기보다는 모처럼 모인 수십만 대군으로 진을 쳐서 멸망시킨다면 반대로 그 실적으로 인해 권위가 생기고 그러면 왕이 아니라 황제 자리에 오를 수도 있는 것이다.[25] 전근대 이전까지 평민이 바로 제국의 황제가 될 수 있던 지역은 중원왕조 국가들과 군인 황제 시대 이후의 로마 정도로 매우 희소한 편이다.[26] 사실 법가는 진나라가 강대국이 되는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사상으로 원래 법가는 처벌은 화끈하지만 그만큼 포상도 화끈했다. 그런데 진나라가 전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처벌만 더 화끈해진 반면 포상은 크게 줄어들었고 이로 인해 사람들의 불만이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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