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제(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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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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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제8대 황제
효소황제 | 孝昭皇帝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24px-HanZhaoDiLiuFuling.jpg

출생
기원전 94년
전한 장안 미앙궁
(現 산시성 시안시)
즉위
기원전 87년 3월 30일
전한 장안 미앙궁
(現 산시성 시안시)
사망
기원전 74년 6월 5일 (향년 20세)
전한 장안 미앙궁
(現 산시성 시안시)
능묘
평릉(平陵)
재위기간
전한의 황태자
기원전 87년 3월 27일
~ 기원전 87년 3월 30일
전한의 황제
기원전 87년 3월 30일
~ 기원전 74년 6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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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유(劉)

불릉(弗陵)
부모
부황 세종
모후 효소태후
형제자매
6남 6녀 중 6남
배우자
효소황후
신장
189cm[1]
시호
효소황제(孝昭皇帝)
연호
시원(始元, 기원전 86년 ~ 기원전 80년)
원봉(元鳳, 기원전 80년 ~ 기원전 75년)[2]
원평(元平, 기원전 74년)


1. 소개
2. 생애
3. 기타



1. 소개[편집]


한나라의 8대 황제로 이름은 유불릉. 시호는 효소황제(孝昭皇帝). 즉위할 당시 어린 황제긴 했지만 어린 황제 + 비정통 황제라는 뜻의 정식 시호도 아닌 소제(少帝)들과 달리 밝을 소()를 사용한 정식 시호다.


2. 생애[편집]


한무제의 막내아들로 후궁 구익부인 조씨(鉤弋夫人 趙氏) 소생[1]. 하지만 무제의 장남 여태자 유거무고의 화로 죽고, 다른 아들인 창읍왕 유박이 잇따라 죽자 무제는 기원전 87년 2월 12일 조서를 내려 어린 유불릉을 태자로 삼고[2] 곽광을 대사마·대장군·영상서사에, 김일제를 거기장군에, 상관걸(上官傑)을 좌장군으로 삼아 어사대부 상홍양과 승상 전천추와 함께 어린 유불릉을 보필하도록 지시했고, 이틀 만인 14일에 한무제는 사망했고 결국 유불릉은 8살에 황제가 되었다. 구익부인이 무제한테 살해됐기에[3] 황제가 된 후 양육은 누나 개장공주(蓋長公主)[4]가 맡았다.

그러나 역사에서 자주 나타나듯이 이 섭정단은 곧 내분에 빠지게 된다. 일단 김일제는 다음해인 기원전 86년 9월 2일 곧바로 죽었고, 전천추는 무능한 데다 정쟁에 안 끼는 보신주의자라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곽광과 상관걸은 처음에는 상관걸의 아들 상관안을 곽광의 딸과 결혼시킬 정도로 친했다. 그러나 상관걸이 두 사람 사이에 낳은 딸을 소제의 황후로 집어넣기 위해 곽광에게 협조를 요청했고, 곽광은 외손녀가 어리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결국 상관걸의 손녀가 황후가 되긴 했지만, 이 사건은 결국 두 사람이 원수로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무제 시기는 조정 중 황제의 비서진으로 구성되는 '내조'(內朝)대통령 비서실가 기존 관료조직으로 신권을 대표하는 '외조'(外朝)내각를 찍어누르는 양상이었는데 곽광의 직위 중 영상서사가 바로 이 내조의 총책임자 상서를 대리하는 직임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외조의 총책임자인 승상이 내조에 맞서야 하겠으나 이미 무제는 재위 중 승상을 5명이나 자살시켜가며 승상을 자기 꼭두각시로 만들어놨었기에 승상의 실권은 없었다. 그래서 곽광이 없으면 정무를 대신 보는 2인자인 상관걸과 실질적으로 외조의 권력자인 상홍양(桑弘羊)이 서로 연합해 곽광에 맞서는 그림이 나오는 것이다.

거기에다 두 형 연왕(燕王) 유단(劉旦)과 광릉왕(廣陵王) 유서(劉胥)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버젓이 살아 있는 상태로, 소제는 만만찮은 반란에 시달렸는데 무제가 죽은 다음해인 기원전 86년부터 익주에서 원주민 반란이 벌어졌고, 바로 같은 해 연왕의 제위 찬탈 시도 사건이 벌어진다. 연왕[5] 유단은 한무제의 사망을 알린 새서를 받자 그 새서의 봉투가 작다는 핑계로 의심을 시작하더니, 소제가 13,000호의 식읍과 30만 전을 보내는 조서를 보내자 "나는 황제가 되어야 하는데, 무슨 하사인가?"라며 본색을 드려냈다. 그 뒤 종실 가운데 유장(劉長, 중산애왕의 아들)과 유택(劉澤, 제효왕의 손자)과 모의해서 유불릉이 무제의 아들이 아니라는 모함을 퍼트린다. 이후 유택은 청주에서 청주자사 준불의(雋不疑)를 죽이고 거병할 계획을 세웠는데, 이 계획을 병경후(缾敬侯) 유성(劉成)이 알고 준불의에게 고하였다. 준불의는 유택을 잡아 이 사실을 고하고 소제는 연나라에 대홍려(관직 이름)의 승을 파견해서 연왕 유단을 체포한다, 다만 연왕은 처벌을 면했고, 유택 등은 처형됐으며, 유성은 봉읍을 더 받았다.

그러다 무제 시절 실시했던 소금·철·술 전매제도의 폐지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곽광과 상관걸·상홍양은 크게 맞붙게 된다. 무제는 재위 중 수많은 원정을 행하며 국가 재정을 많이 동원했고 전매제도는 이런 확대재정에 도움이 되었으나, 막상 무제는 말년 이 원정의 부작용으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진 것을 반성해 '윤대의 조'를 발표하고 예전 고제~경제 시절의 기조인 '여민휴식'으로 회귀하고자 했다. 전매제도를 폐지하는 것은 무제의 전반적인 정치 기조를 이어가느냐, 아니면 윤대의 조의 뜻을 본받아 다시 문경지치를 추구하느냐의 논쟁이었으며, 동시에 전매제도의 총책임자가 어사대부 상홍양이므로 상관걸·상홍양파에 대한 곽광파의 정치적 공격이기도 했다. 곽광은 직접 이 논쟁에 나서지 않고 유교를 숭상하는 현량과 문학을 앞세웠는데, 현량과 문학은 전매제도의 전면 폐지를 주장했으나 이는 상홍양의 반대파인 곽광조차도 인정하기 어려운 지나치게 급진적인 견해였다. 엄청난 논쟁이 벌어진 끝에 염철회의는 술의 전매만 중단되는 것으로 마무리 됐다. 그러나 40년 가까이 유지됐던 굳건한 염철주 전매제도가 훼손됐다는 것은 곽광과 상관걸-상홍양 사이의 권력차가 커지고 있다는 반증이었으며, 소금과 철의 전매도 중단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이렇게 되자 상관걸-상홍양 진영은 불안에 떨게 된다.

기원전 81년, 염철회의가 결론이 나자 상관걸 측은 반격을 위한 행동에 돌입했다. 그들은 사전에 개장공주[6]와 앞서 제위 탈환을 시도했던 연왕 유단을 포섭하여 곽광을 참소하였다. 곽광이 황제 친위대인 우림군(羽林軍)을 검열하고 그 과정에서 교위를 하나 불러 새로운 직위를 준 것을 역모로 둔갑시킨 것. 그러나 소제는 연왕의 이름으로 올라온 상소를 보고, 10만 리나 떨어진 연경(지금의 북경)에서 장안에서 최근에 벌어진 일을 알고 상소할 수는 없다고 말하며 여전히 곽광을 신뢰하였다. 소제는 상소문을 올린 경위를 파악했고, 거짓 상소문을 올린 일당은 도주했다. 그 이후에도 상관걸, 상관안, 상홍양은 끊임없이 곽광을 참소했지만, 소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참소가 계속되자 불같이 화를 냈다. 소제는 "곽광은 내 어버이 같은 신하이므로 그를 참소하는 건 용서치 않겠다"고 선언했다.

상관걸 일당은 소제가 있는 한 곽광을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정변을 결심했다. 곽광을 죽인 후 소제를 폐위시키고 자기들과 한패인 연왕을 황제로 올린다는 내용이었다. 기원전 80년 상관걸 등은 개장공주 집에서 연회를 연 뒤 곽광을 초대하고 미리 배치한 자객들로 하여금 곽광을 죽인다는 작전을 실행하였으나, 내부고발로 누설이 되고 말았다. 대로한 소제는 승상 전천추에게 명해 곽광 암살을 기도한 무리를 모두 잡아들이고 삼족을 멸하도록 했다. 이로써 상관걸, 상관안, 상홍양 모두 처형당해 기시(棄市, 시체를 저잣거리에 버리는 형벌)됐고, 연왕과 개장공주는 각각 자결했으며 연나라는 폐지됐다. 상관씨와 상씨 집안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곽광의 외손녀인 효소황후 뿐이었다. 이로서 대장군 곽광은 유일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으며, 상홍양이 그토록 애썼던 염철주 전매는 모두 폐지된다.

곽광은 막강한 권세를 누리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재능과 학식이 부족한 편이었다. 그러나 공평무사하고 항상 몸을 삼가는 자세를 취하였으므로 소제의 치세동안 나라는 안정되었다. 그러나 그의 막강한 권세는 뒷날 곽씨 일가의 전횡으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기원전 74년 소제는 21살의 나이로 요절한다. 그의 뒤는 소제의 조카이자 유박의 아들인 창읍왕 유하가 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정권을 장악하려는 행각으로 인해 얼마되지 않아 곽광에게 폐위되었다. 이후 여태자의 손자 유순이 뒤를 이어 황제가 되니 그가 한나라 선제(宣帝)다.


3. 기타[편집]


역대제왕도권에 첫 번째로 나오는 황제다.

[1] 따라서 몇몇 사서에선 조씨아(趙氏兒)로 통칭하기도 했다.#[2] 무제는 유불릉을 태자로 삼은 후에 어린 황제에게 젊은 어머니가 있으면 외척의 발호가 생길 거라고 생각해 역모의 누명을 씌워 구익부인을 자결하게 했고, 그녀가 죽은 뒤에 복권시켜줬다. 유불릉은 황제가 된 후에 어머니를 효소태후로 추존한다.[3] 전술하였듯, '어린 황제에게 젊은 어머니가 있으면 외척이 발호할 것'이라는 이유로 역모의 누명을 쓰고 죽었다. 실제로는 무고하고 죄가 없었기에, 구익부인이 사사되자 대신들은 경악했다고. 훗날 북위에서는 아예 자귀모사(子貴母死)라 하여 태자의 어머니를 사사하는 것이 공식적으로 제도화가 되는데 그 시초가 된 것이 바로 이 일이다. 그러나 황후나 귀비가 죽었다 하여도 그 형제자매나 부모님이 남아 잘만 외척이 되었기에 의미 없는 짓이었고, 8대 선무제가 폐지하며 사라졌다. 폐지 하자마자 귀신같이 영태후가 실정을 벌여 나라가 망해버린다. 조선에서는 태종이 외척을 막는다는 미명하에 처가와 며느리의 집안을 박살낸 일이 있다.[4] 악읍개장공주(鄂邑蓋長公主). 소제의 누나, 연왕의 누나라는 기록만 있고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기록이 없다. 연왕보다도 나이가 많으니 구익부인의 딸일 리는 없고 따라서 연왕의 동복 누나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칭호인 장공주가 어머니의 성이 인 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그렇다면 연왕과도 이복 남매다. 이런 작명 방식은 문제와 효문황후의 장녀인 태주에서도 볼 수 있다. 칭호인 개장공주는 또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어서 개장공주의 어머니가 개씨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바로 위에서 나온 두태주의 다른 이름은 당읍장공주로 그의 남편이 당읍이후 진오인 데서 유래한다. 따라서 개장공주 역시 개후의 남편이라서 개장공주일 수 있다. 만약 蓋가 어머니의 성씨라면 후한의 중흥공신 갑연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성으로 쓰이는 蓋는 '갑'이라 읽어야 하기 때문에 갑장공주라 읽어야 옳다.[5] 훗날 날(剌)이라는 시호를 받아 연날왕(燕剌王)이라고도 많이 부른다.[6] 곽광에게 자신의 애인인 정외인(丁外人)을 제후로 삼아 달라고 했다가 거절돼서 곽광에게 원한을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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