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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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연성공(衍聖公)은 중국에서 공자의 적통에게 수여한 작위이다. 유교가 중국 왕조의 가장 중요한 학문 체계로 자리잡으면서 공자 가문도 매우 중하게 대우하였다. 따라서 공자 가문의 적손들에게는 조정에서 작위를 하사하였다.
공자의 후손은 송공또는 은후로 불리기도 하였는데, 이는 공자가 상나라 왕족이 세웟던 송나라(宋) 직계 왕족인 조상이 노나라로 도망치며 공씨로 바꾼거고 송나라가 강왕의 실정으로 멸족되며 가까운 친척인 공자에게 그 것이 이어졌기 때문.
2. 역사[편집]
공자의 후손에 대한 봉작은 진나라의 시황제가 공자의 9세손인 공부(孔鮒)를 노국문통군(魯國文通君)에 봉하면서 시작하였고, 진나라 멸망 이후 한나라의 초대 황제 고제는 공부의 동생 공등(孔騰)을 봉사군(奉祀君)으로 삼았다.
이후 유교가 한나라의 국학이 되면서 유교를 널리 장려하고 퍼뜨리고자 원제가 공자의 13세손 공패(孔覇)에게 관내후(關內侯)의 작위와 포성군(褒成君)의 칭호를 주었고, 애제는 14세손 공길(孔吉)을 은소가후(殷紹嘉侯)에 봉했다. 평제는 16세손 공균(孔均)을 포성후(褒成侯)에 봉하여 이를 세습하게 하였다. 이후 후한의 명제가 공자의 18세손 공손(孔損)을 포정후(褒亭侯)에 봉하고, 안제가 19세손 공요(孔曜)를 봉성정후(奉聖亭侯)로 봉한 것을 제외하면 한나라에서는 모두 포성후라는 작위가 공자의 후손들에게 이어졌다.
그 후 위진남북조 시대에 접어들어 위가 종성후(宗聖侯)로 이름을 고쳤고, 서진과 남조에서는 봉성정후(奉聖亭侯)라 하였다. 한편 북조에서는 북위가 숭성후(崇聖侯), 북제는 공성후(恭聖侯)라 하였다. 북주 대에 추국공(鄒國公)으로 봉호가 격상되고 수나라의 문제까지 이어졌으나 양제가 다시 소성후(紹聖侯)로 격하하였다.
당나라 초기에는 포성후(褒聖侯)로 봉하였으나 현종 대에 공자가 문선왕(文宣王)에 추증되면서 포성후도 다시 공으로 격상되어 문선공(文宣公)이라 불리게 되었고, 45세손 공종원(孔宗願)부터 북송의 인종이 1055년에 문선공을 연성공(衍聖公)으로 고쳐 청나라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정강의 변으로 인해 북송이 멸망하자 공자의 종가 중 3대 연성공 공단우(孔端友, 공종원의 장손) 일가는 임안으로 후퇴한 남송 조정과 함께 절강성 구주로 이주해 구주에 임시 공묘를 세웠고, 공단우의 동생인 공단조(孔端操)는 곡부에 남아서 공묘를 지키다가 금나라 조정에게 연성공 작위를 새로 받았다. 이 공단우 일가를 남종(南宗), 공단조 일가를 북종(北宗)이라 부른다. 남종과 북종의 대립은 원나라가 남송을 멸망시킨 후 쿠빌라이 칸이 남종을 곡부로 소환해 제사를 이어가라고 명했으나 남종의 종손인 공수(孔洙)가 이를 사양하자, 쿠빌라이가 북종의 종손인 공치(孔治)를 연성공으로 임명하면서 끝이 나고 이후 북종 쪽에서 연성공 작위가 이어진다.
마지막 연성공은 공자의 77세손인 쿵더청(孔德成)으로 32대 연성공이었다. 쿵더청이 연성공 자리를 계승했을 때는 공화국인 중화민국이 수립된 뒤였으나, 북양정부는 쿵더청의 연성공 작위 세습을 용인하였다. 국민혁명으로 북양정부에 비해 더 혁명적인 국민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연성공 작위는 잠시 용인되다가 1935년, 대성지성선사봉사관(大成至聖先師奉祀官)이라는 관직으로 바뀌었다. 쿵더청이 이 초대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을 맡았다. 물론 귀족 작위에서 공직으로 형식이 바뀌었을 뿐 봉사관 자리를 공자의 종손이 대대로 세습한다는 원칙은 그대로 유지했으며 대우 역시 장관급인 특임관에 준하는 지위로 인정받았다. 이후 국부천대 당시 장제스가 쿵더청 일가를 대만으로 데리고 가면서 공자의 종가와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의 역사는 대만에서 이어가게 되었다. 2008년 쿵더청이 사망하면서 현재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은 쿵더청의 장손인 쿵추이창(孔垂長)이 맡고 있다.
한편 중국공산당이 장악한 중국 대륙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이나 그에 준하는 직책을 따로 임명하지 않으면서 그대로 끝이 났다. 공산당 치세에서 공자와 그들의 후손들은 한동안 격하되었으나 중국의 경제가 성장하면서 소프트파워의 중요성이 대두된 이후 공산당에서는 공자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공자의 후손을 이용하려고 하지만, 문제는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이 곡부에 있는 공묘를 공격해 공자 가문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모욕하였다는 것. 이에 쿵더청이 격분하였고 공부가주조차 인정하지 않을 정도로 반감이 심하다. 쿵더청 일가는 국민정부를 따라 대만으로 이주했지만 쿵더청의 누나인 쿵더마오(孔德懋) 일가와 먼 친척인 남종계 후손들은 대륙에 남았기 때문에 대륙에서도 공자의 핏줄이 아예 끊긴건 아니다.
유교의 시조 공자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현대의 공화국인 중화민국(대만)에서 세습 관직을 계속 부여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도 일부에서 있지만, 현실적으로 대만이 가진 정통성을 증명하는 수단이 되는 등 정치/문화적 효용성이 높다 보니 유지되고 있다. 어차피 현재는 무보수 명예직이 되어 부와 특권을 누리는 것도 아닌 상황이다.
3. 역대 연성공[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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