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탈북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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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탈북의 어려움
2.1. 사방이 막힌 지리적 환경
2.2. 북한 붕괴를 원치 않는 중국러시아
2.3. 고도화된 정보 통제와 상호감시
2.4. 가혹한 처벌과 연좌제
3. 탈북 경로
3.1. 북한 내륙 통행과 도강
3.2.2. 태국 경유
3.2.3. 몽골 경유
3.2.4. 기타 동남아 국가
3.3. 해외 주재 중 탈북
3.4. 군사분계선(휴전선) 전면돌파
3.4.1. 관련 사례
3.5. 북방한계선(NLL) 해상 탈북
3.5.1. 관련 사례
3.6. 전투기
4. 대한민국 입국
5. 여담


1. 개요[편집]


구체적인 탈북 과정과 방법에 대해 서술하는 문서이다.


2. 탈북의 어려움[편집]


2023년까지 대한민국으로 입국한 누적 북한이탈주민은 34,078명이고 중국에 숨어있는 탈북민은 5천 명~25만 명으로 추산되며, 알려지지 않은 실패한 탈북까지 합하면 지금까지 시도된 탈북 횟수는 훨씬 더 많다. 따라서 이 문서의 서술이 수십 만건에 달하는 모든 탈북 과정과 경험을 대표하지 않는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그럼에도 확실한 것은 북한을 탈출하는 난이도는 세계에서 가장 어렵다는 것이다.

아래 하위 문단들은 북한 체제가 붕괴하지 않는 이유와도 어느정도 일맥상통한다.

2.1. 사방이 막힌 지리적 환경[편집]




험준한 산악지형으로 한정된 통행로
큰 강 두 개가 국경을 차단


수심은 낮지만 큰 조수간만으로 조류가 빠름
파일:북한전체_위성지도.png

수심이 깊고 풍랑이 심함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5px 6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000000; font-size: 1em;"
비무장지대
세계 최대의 지뢰 매설지대
남북 양측 수십 만 병력 밀집


한반도는 3면이 바다이고 북부는 험한 산악지형으로 이뤄져있어 지리적으로 수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외부 세력이 침략하기 힘든 천혜의 요새였다. 하지만 그 말을 반대로 적용하면 밖으로 빠져나가기도 힘든 감옥과 같은 환경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북한 체제가 쇄국정책을 안정적으로 고수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이 사방이 막힌 북한의 지리적 환경은 탈북은 생각조차 말라는 억까 수준의 폐쇄성을 자랑한다.


2.2. 북한 붕괴를 원치 않는 중국러시아[편집]


어떻게 해야 탈북이 수월해지고 북한 체제가 붕괴될 것인가? 가장 빠른 방법은 북한의 두 인접국인 중국러시아북한이탈주민난민으로 인정하고, 인도주의적 절차에 따라 대한민국이나 제3국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허가하는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로 탈북해도 북송되지 않는다면 당장 북중국경을 지키는 북한 국경경비대부터 총을 버리고 두만강을 건너 탈북할 것이며, 이 정보는 북한 내륙까지 빠르게 퍼져 수많은 북한 주민들이 더 나은 삶을 찾아 탈출해 북한 지역은 빠르게 공동화될 것이다. 더 이상 부릴 노예가 없어진 김씨 일가와 북한 체제는 붕괴할 것이 자명하다. 하지만 당연하지만 중국러시아는 기본적으로 북한의 붕괴로 인한 정세의 불안정을 원치 않으며, 한반도의 현상 유지를 지지하므로 이렇게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중국은 북한 붕괴로 인해 대규모 난민 사태가 촉발하여 동북 3성의 질서가 어지럽혀지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중국북한이탈주민을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고 '불법 입국자'라 정의하고 있다. 이들은 경제적 목적으로 중국으로 넘어온 것이므로 난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눈가리고 아웅'식의 논리를 적용해 중국 정부는 중국에 숨어있는 탈북민을 모두 체포해서 북송시키고 있으며 탈북 방지와 북한 체제 유지에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러시아의 경우, 북한과 맞닿아있는 극동지역은 애초에 탈북을 시도하기에는 지리적으로 불리한 지역이어서 러시아를 통한 탈북 시도는 비교적 많지 않다. 러시아 정부도 변두리 지역인 극동에서 일어나는 탈북은 관심 밖이었고 모스크바 주재 유엔난민기구(UNHCR)가 존재하고 있어 이 사무소를 통해 정식으로 난민 지위를 인정받아 절차를 거치고 안전하게 대한민국으로 입국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북러관계가 밀접해짐에 따라 북한의 요구에 맞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탈북하려던 북한 무역대표부의 모자가 러시아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북송되었으며 러시아에서 북한노동자를 돕던 한국인 선교사를 간첩 혐의로 체포하는 등 점차 탈북에 비우호적인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2.3. 고도화된 정보 통제와 상호감시[편집]


어려서부터 수령들에 대해 알아야 하였고 신격화된 수령에 대한 역사와 찬가를 부르며 자라났다. 우리는 이기는 것만 보아왔다. 6.25의 전쟁은 미국의 부추김을 받아 남조선 괴뢰들이 일으킨 침략전쟁이며 그 전쟁에서도 조선은 세계강대국이라고 하는 침략자 미제와 허울만 있는 유엔을 도용하여 참전한 제국주의 반동들을 이겼으며 모든 면에서 조선은 무조건 이긴다. 지는 것은 절대로 볼 수가 없었으며 있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세계의 어느 곳에서나 조선은 정의의 편이라고 하였다. 이로써 우리는 내가 사는 나라가 가장 정의로운 나라라고 믿고 있으며 자존감 또한 하늘을 찔렀다.

어떤 물건을 평가하려면 그와 유사한 물건이 있어야 올바른 결론을 내릴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하나의 물건만 보고는 결론을 내릴 수 없으며 그것이 제일인가 하는 그릇된 판단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올바른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철저히 통제되고 격패된 사회 속에서 과연 우리가 무엇을 놓고 평가할 수 있단 말인가?

구대명, <거품 2>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북한/인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아무리 탈북이 어렵더라도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라는 속담처럼 기회를 잘 잡으면 탈출할 방법은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북한 주민은 어릴 적부터 '세상에 부럼없어라' 같은 노래를 배우며 자신들의 나라가 지상락원이라고 세뇌 교육을 받는다. 또한 조선로동당은 주기적으로 북한 주민들에게 선전활동을 펼쳐 외부세계에 대해 나쁜 인식을 심어줌으로써 자기가 살고 있는 북한이 힘들지만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그나마 나은 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가스라이팅한다. 실제로 조선중앙텔레비죤국제소식 보도에는 항상 나쁘고 암울한 해외 뉴스만 짜집기해 보도한다. 교육 수준이 높은 엘리트 탈북민들도 어렴풋이 느끼기만 할뿐, 북한의 실상을 깨닫지 못하며 해외에 나와 자유로운 생활과 인터넷을 접하면서 진실을 알게 된다. 북한이 망하기 전까지 인터넷을 절대 허용하지 않을 이유이기도 하다. 북한 정권의 입장에서 북한 주민들의 탈북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예 처음부터 탈북이라는 선택지를 떠올릴 수 없게 하는 것이다.

북한에도 한국 드라마가 유행하며 북한 주민들도 북한 체제가 잘못됐다는 것을 안다고 증언하는 북한이탈주민이 많다. 북한 주민에게 한국 드라마는 재미있고 한국이 잘 산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게 해주지만 자신들이 살고 있는 북한 체제의 모순과 김씨 일가의 진실을 알려주지는 못한다. 한국 드라마는 재밌게 보면서도 당과 국가에 대한 기존의 충성심은 흔들리지 않는 이중적인 인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탈북민들의 주장은 '생존자 편향의 오류'일 수 있는데, 탈북민 둘중 1명은 함경북도 출신이고 이 지역은 중국과 인접해 무역과 밀수로 외부 문물을 접하기가 쉬운 곳이어서 북한 주민 전체를 대표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탈북민 자체가 북한 주민 2,500만 명 중 3만 명밖에 안될 정도로 희귀한 케이스이고, 탈북을 실행할 정도면 이미 북한에 있을 때부터 드라마를 즐겨보고 북한 체제에 반감을 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내륙쪽 깊숙히 박혀있는 산골 농촌에 사는 북한 인구의 상당수는 한국 드라마는 커녕 '한국'이 남조선인 것도 모를 정도이며 조선로동당의 선전을 그대로 믿고 있는 상황이다. 전기도 안 들어오는 농촌에서 유일한 정보 소스는 조선로동당의 선전 뿐이니 믿지 않을 수가 없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북한/인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북한 보위부 출신 탈북민 이철은의 증언에 따르면, 보위원 한 명이 주민 700~1,200명을 관할하고 있으며 휘하에 30~40명의 정보원을 둔다고 한다. 즉, 북한 주민 30명 중의 한 명은 보위부의 스파이라는 뜻이고 군대, 직장, 학교 가릴 것 없이 개인이 속해있는 모든 집단, 조직에는 동료들의 정황을 상시 보고하는 보위부 정보원이 존재한다. '주민 감시의 1선'이라고 불리는 인민반장 또한 20~40 세대로 이루어진 인민반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에 대해 담당 안전원에게 보고해야 한다. 인민반장은 각 세대의 경제상황, 방문하는 친척이나 손님, 심지어 숟가락 갯수까지 알 정도로 각 가정에 대해 상세히 파악하고 있다.

자신의 탈북 계획을 타인에게 함부로 알릴 수 없기 때문에 도움을 받거나 탈북에 필요한 정보를 찾기도 쉽지 않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는 상황에서 평범하게 생활하는 척하면서 혼자서 혹은 정말 믿을 만한 극소수의 인원들과 탈북을 준비해야 한다. 만약 가족 중에 탈북한 사람이 있다면 감시의 정도는 몇배 더 심해진다. 탈북을 계획대로 완벽히 실행해도 인민반장과 이웃들이 하루도 안되어 알아챌 것이기 떄문에 추적이 시작될 때까지의 시간도 오래 끌지 못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북한은 전력사정으로 인해 CCTV가 희귀하고 전산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지 않아 실시간으로 추적이 불가능하다 것이고, 사람이 감시하는 시스템이니 허점이 많다. 일단 한번 멀리 떠나면 어디로 갔는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2.4. 가혹한 처벌과 연좌제[편집]


파일:나무위키+넘겨주기.png   관련 문서: 로동교화소

생계형 탈북이 많았던 2000년대까지는 도강을 하다 적발되거나 중국에서 북송 당해도 사정을 참작하여 풀려나거나 가벼운 형만 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점차 한국행을 위한 탈북이 많아지면서 처벌 수위가 강해졌다. 함경도 지역에서 탈북이 많다보니 함경북도에 위치한 평범한 로동교화소였던 전거리교화소가 한국의 가족과 통화하던 주민과 그를 주선하던 브로커, 북송된 탈북민이 대거 수용되면서 수감생활이 가혹해졌고 그로 인한 악명이 자자하다. 교화형은 반쯤 사형선고나 다름없는데 전거리교화소 출신 탈북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수감자 넷 중 하나는 옥사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북송 시 한국행 시도나 기독교와의 접촉 사실이 명확해지면 정치범수용소행이 확정이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북한/인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한 사람이 탈북하면 북한에 남아있는 나머지 가족들은 '월남자 가족'이라는 가장 최하층 출신성분으로 강등되며, 이 이력은 대물림되어 대대손손 사회적인 불이익을 받고 살아야 한다. 직접적인 처벌을 받지는 않지만 대학 입학이나 입당은 평생 꿈도 꾸지 못하며 군대도 갈 수 없다.이건 이득 아닌가 인민반장과 보위지도원, 안전원, 이웃에게까지 항상 감시를 받으며 살아가며, 탈북한 가족과 연락할 수 있다는 이유로 북중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 산골로 불시에 추방되기도 한다.

해외에 나와있는 북한인들이 상대적으로 탈북하기 쉬움에도 탈북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해외로 파견된 북한인들은 평양 출신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이들이 탈북할 경우, 평양에 남아있는 가족들은 오지 추방이 확정적이며 평생을 평양에서 인프라를 누려온 이들에게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산골은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북한에서 해외로 나오려면 기본적으로 결혼을 해 가족이 있어야 한다. 외교관의 경우, 자식 한 명은 반드시 평양에 두고 나와야 하는데 인질로 삼아 탈북을 시도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태영호김정은의 변덕으로 두 아들 모두 영국으로 데리고 나올 수 있었는데, 아내인 오혜선이 다시는 없을 기회라고 설득하여 탈북한 경우이다.


3. 탈북 경로[편집]



3.1. 북한 내륙 통행과 도강[편집]


파일:나무위키+넘겨주기.png   관련 문서: 려행증

북한 주민들은 탈북은 커녕 다른 지방으로 이동하는 것도 어렵다. 평양 시민의 경우 평양시민증만 있으면 북한 내륙을 마음대로 이동할 수 있지만 북중국경 지역은 예외에 해당한다. 함경도쪽 북한 주민들은 중국을 통해 외부 문물을 접하기가 쉽고 두만강 바로 옆 마을은 밀수가 일상화되어 있으며 무산군, 혜산시, 회령시 같은이 바로 두만강 옆 지역의 경우 가족 중 탈북한 사람이 있는 집을 찾기 어렵지 않을 정도라고 한다. 함경도 주민들은 '탈북'이라는 행위가 벌어진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내륙 지방과 비교해 탈북에 거부감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이탈주민들은 북중국경 함경도 출신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함경도 출신 탈북민이 많으니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들을 위한 대북송금도 활발하고, 브로커업도 성행한다. 중국 휴대전화를 사용해 대북송금을 주선하는 브로커들은 밀수와도 관련이 있고 그 밀수 루트를 통해 도강도 일어난다.

애초에 브로커도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황해도강원도쪽 북한 주민들은 탈북에 필요한 정보가 매우 부족하다.

압록강과 두만강은 상류로 갈수록 수심이 얕고 폭이 좁아 의외로 도강하기 쉬운 구간이 매우 많다. 특히 두만강은 강이라기보다는 천(川)에 가까울 정도로 수심이 낮은 곳도 있으나 국경경비대도 당연히 이 사실을 알기에 경비가 집중되어 있다. 무작정 도강을 시도하면 총에 맞을 수 있지만, 브로커는 도강 예정 시간에 근무를 서는 국경경비대를 매수해 안전하게 도강을 한다. 그나마 두만강의 경우 강폭이 매우 좁은 지점도 있어서 겨울에는 강물이 얼면 뛰어서 건너가는 경우도 있다.

코로나 사태가 터지면서 2020년대 호수와 군사시설이 없는 곳은 모조리 철조망이 쳐졌다. # 압록강 두만강, 백두산 기슭은 기본이고 기나긴 서해안, 동해안마저 모조리 철조망이 생긴 것이다. 2024년 현재 두만강을 통한 도강은 거의 불가능해진 상태이다.


3.2. 중국[편집]


파일:BBC 로고.svg


'공화국 역사상 초유의 일'... 죄수와 간수의 동반 탈북 사건
BBC News 코리아
(2020년 2월 21일)

북한이탈주민들은 탈북 과정에서 외부의 조력을 받을 수 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탈북 난이도가 달라진다. 먼저 탈북한 가족이 돈을 벌어 기반을 마련해 믿을 만한 브로커를 고용하거나 북한인권단체, 기독교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미리 마련된 은신처와 운송수단으로 강을 넘어오자마자 중국 대륙을 최대한 빨리 횡단하여 태국의 이민수용소까지 빠르면 2주 내에 도착할 수 있다.

반면에 아무 계획없이 무작정 북중국경을 넘다가 잠복하고 있던 총에 맞을 수도 있고 순찰하는 중국 공안에게 체포되어 그대로 북송될 수 있고 불안 속에 떨면서 중국에서 기약없는 체류를 하다가 극적으로 브로커와 연이 닿아 몇년 만에 한국으로 입국할 수 있다.

젊은 여성의 경우, 중국에서 인신매매를 당해 중국 노총각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그대로 중국에 정착해 사는 경우도 많다. 중국 공안에서도 아이를 낳고 정착하여 사는 여성은 중국 가족의 반발을 의식하여 신상만 파악하고 북송시키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이라도 중범죄를 저지르거나 한국행 시도 중 체포 시에는 가차없이 북송시킨다. 그러나 2020년대 이후에도 중범죄 또는 한국행 시도 여부와 상관없이 여전히 복불복이었다.

일반 북한 주민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가능성 높던 방법으로 압록강두만강을 야간에 넘어 중국으로 이동한 후 중국 본토 혹은 제3국을 거쳐 한국으로 입국하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은 두만강을 통해 탈북한다.

중국 정부는 탈북자 단속에 열을 올리는데, 이는 북한과 맺은 협정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를 방치하면 중공에는 도움이 될 것이 없기 때문에 단속을 하는 것이다. 즉 북한이탈주민에게 중화인민공화국 공안부 이민관리국 요원이나 중국인민무장경찰 요원의 단속을 피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편 중국으로 건너가는 것 자체는 그리 큰 처벌과 어려움이 없다는 주장도 있는데 그 이유는 중국과의 밀무역이다. 현재 북한의 장마당에는 상당량의 중국 물품이 들어와 있는데, 즉 중국과 북한 간의 밀무역이 활발하다는 증거이다.

단, 잡히는 위치가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동북 3성 지역이라면 상관없지만, 광둥성, 푸젠성, 저장성, 장쑤성 등 남부 지역이거나 신장 위구르 자치구 등의 서부 지역이면 그대로 끝이다. 여기까지 와서 밀무역을 한다는 핑계는 통하지 않는다고 한다.

여성들의 경우 조선족들에 의해 인신매매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중국의 시골 노총각들이 중국 여성과 결혼하기가 힘들어지면서, 돈 몇 푼 주고 북한 여성을 아내로 사오려고 하기 때문이다. 탈북자는 중국에서 불법체류자이기 때문에 정식 혼인신고도 불가능해서 신분을 보장받을 수가 없다. 그래서 결혼 뒤에도 이웃의 밀고나 중국 경찰의 검문으로 잡히면 언제든지 북한으로 추방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때문에 이들의 결혼생활은 불안의 연속이라고 한다. 게다가 중국의 낮은 인권의식과 '돈으로 사온 여자'라는 인식 때문에 온갖 가정폭력에 시달리기도 한다. 이러한 북한 여성들은 세가지 운명에 맞닥뜨리게 되는데, 첫 번째는 중국에서 불안에 떨며 지내다가 공안에 체포되어 북송당하는 것이고,[1] 두 번째는 자신을 사간 중국 남편이 괜찮은 인품을 가졌고, 어찌되었든 중국 시골의 생활수준이 북한보다는 훨씬 낫기에 현실에 수긍해 중국에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것이다. 만약 아기까지 낳게 된다면 전근대적 유교적 가치관을 지닌 북한 여성들은 중국 시골마을에 정착해 살아가는 것이다. 이들은 추후에 중국에서 살면서[2] 중국어를 익히고 스마트폰으로 한국의 실상을 알게 되고 다른 탈북 여성들과 연락망을 구축하면서 브로커를 구해 결국 한국에 입국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케이스의 탈북 여성들은 나중에 한국에 정착했어도 중국에 있는 남편, 자식과 주기적으로 연락을 하기도 한다. 세 번째는 브로커를 찾아 중국 대륙을 횡단해 탈북에 최종적으로 성공하는 것이다. 보통 먼저 탈북한 가족이 있고 이들이 준비한 브로커를 잘 만나면 몇주 만에 태국 난민 수용소까지 도착할 수 있다.

매매혼 말고도 유흥업소 등에 팔려 가서 감금 상태로 혹사당하기도 한다. 너무 늙지만 않으면 이런 식으로 인신매매를 당해서 온갖 고생을 다 겪다가 겨우 한국으로 탈출하는 여성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사연 때문인지 이러한 경로로 귀국한 북한이탈주민들은 중국에 대한 반감이 상당하다.

2020년에 본격적으로 터져나온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그 이전부터 삼엄해진 국경 감시 때문에 중국 루트가 거의 막혀 간다는 복수의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국경의 감시가 전자 장비까지 동원될 정도로 고도화되고, 북한도 탈북을 좌시하지 않으며,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을 차단하고자 중국 정부의 이동 통제가 심해졌다는 것이다.###

BBC 코리아, 자유아시아방송, VOA, 아시아프레스, 데일리NK, 동아일보의 주성하 기자까지 한 목소리로 탈북이 어려워졌다는 소식을 전한다. 그러나, 탈북 자체가 끊기긴 어려운 것이 북한의 근본적인 먹고사니즘이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워낙에 심각하고 북한 주민들의 입장에서 중국과 북한 정권은 고작 코로나 19 따위로 취급할 정도로 더더욱 악랄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고작 전염병 하나 때문에 탈북을 포기할 이유는 없다.

2022년 중국의 코로나 거리두기 정책이 극심했을 때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더욱 탈북이 어려워진 이유를 설명했는데, 안면인식으로 신원을 확인하고 현금 없이 위챗으로 결제를 해야 하기에 개인정보 및 백신패스 관련 정책들이 큰 난관이 된다고 한다. 탈북자들은 모두 신원 미상으로 표기되므로, 한 성에서 또다른 성으로 이동[3]을 하거나 교통수단을 이용하기도 상당히 어려워지게 된 것.

2023년 7월 초에는 국가보위성[4]이 국경 지역 경비 근무를 담당하는 국경경비대에게 '주민들의 탈북을 막기 위해 두만강 강바닥을 사람 키보다도 깊게 파 사람들이 강에 들어설 수 없게 하라'고 지시했는데,[5] 강의 중간이나 중국 쪽 가까이의 강바닥을 파지 말고 우리(북한) 쪽만 파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국경경비대 군인들은 무더운 날씨에 기계도 아닌 손으로 물살을 이겨내며 헛고생을 해야 하니 "이렇게 이치에 맞지 않는 지시가 세상천지 어디에 있느냐"고 불평했고, 상급 군관들조차 "국가보위성 지시니 형식적으로나마 작업하면서 물장난이나 치며 시간을 보내고 혹여 위에서 내려와 얼마만큼 팠느냐고 물으면 팠는데 모래와 자갈이 고스란히 흘러 들어왔다고 보고하라"고 이들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

2023년 말 기준으로, 북중국경의 북한 쪽에는 이중 철책이 처져 있다. 초소가 저 두 개의 철책에 다 있는 상황이다. #


3.2.1. 대한민국 직행[편집]


2000년대 초반에는 중국에 들어온 탈북민이 주중 대한민국 대사관에 현지 경비를 뚫고 들어가 대사관에서 신변보장을 받는 방법을 썼었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 대사관 주변에 공안의 감시가 심해지자, 2002년 제3국 대사관으로 집단 돌진하는 방법이 유행했다. 3월에 베이징에 있는 스페인대사관에 탈북민 25명이 진입에 성공하면서 국제적인 이슈가 되자 중국 공안들이 모든 대사관 정문의 경비를 강화하면서 막무가내로 뚫고 들어가는 건 불가능해졌다. 담을 넘어서 들어가는 것도 전기 철조망이 담에 쳐져있어서 불가능하다. 중국 주재 일본 대사관은 아예 공안이 대사관 안으로 들어와 북한이탈주민 체포하는 것을 방기하다 걸려 국제적으로 욕을 바가지로 먹은 바가 있다.

중국 위조 신분증을 파는 브로커를 통해 위조 여권을 구하거나 사망했지만 사망 신고를 하지 않은 호적을 사서 위명여권을 발급받은 뒤 비행기를 타고 무비자로 입국 가능한 제주도로 와 제주국제공항 출입국사무소나 제주지방경찰청 등지에 자수하는 방식으로 입국하기도 한다. 혹은 브로커가 여객항의 직원을 매수한 뒤, 여객선을 타고 인천항으로 밀항하는 경우도 있다. 중국 대륙을 건너야 하는 다른 길에 비하면 거리가 짧고 일단 입국심사대를 통과해 비행기와 배가 출발하면 성공이지만, 출국심사나 공항 보안 검사 중에 걸리면 도망칠 길도 없이 바로 체포되어 북송이기 때문에 매우 위험성이 큰 루트다. 이 경우 한국행의 의도가 명백하므로 관리소행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위명 여권을 구입하고 출국할 때까지 긴장을 한다.[6] 그마저도 이 방법은 중국이 전산화가 되기 전인 2000년대까지의 이야기이고 신분증 전산화가 완료된 2010년대부터는 아예 불가능해진 방법이다.

중국 현지에서 어선을 빌린 뒤 서해상에서 한국 선박과 접선하여 탈북하는 경우도 있다.# 갈렙선교회의 김성은 목사가 최초로 시도하여 성공한 방법이다. 하지만 이후 이 방법을 사용한 다른 사례가 없는 걸 보면 불가능해진 듯 하다.

  • 관련 사례
    • 박충권 - 두만강을 넘은 지 3일 만에 브로커로부터 한국 여권을 받았는데, 위조도 하지 않은 한국 여성의 여권이었지만 브로커가 출입국을 검사하는 공안을 매수했는지 얼굴을 확인하지도 않고 통과시켜줬다고 한다. 이후 단둥에서 배를 타고 인천항을 통해 한국으로 입국했다.
    • 천국의 국경을 넘다 2 (2011)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 상술한 갈렙선교회가 촬영한 다큐멘터리이다.


3.2.2. 태국 경유[편집]



2019년 양강도 혜산시의 5인 가족이 중국동남아를 거쳐 탈북하는 영상
(비욘드 유토피아)
태국 루트는 대부분의 북한이탈주민들이 탈북하는 경로이다. 중국 대륙을 횡단하여 윈난성 쿤밍시에 도착하면 이제 직접 밀림을 헤쳐서 동남아쪽으로 가야 한다. 현지 브로커를 따라 10시간이 넘는 산행 동안 산 몇개를 넘는 고행을 각오해야 한다. 주로 메콩강을 따라 배 타고 내려와서 라오스, 미얀마, 태국 3국의 접경지인 골든 트라이앵글[7]에서 내린다.

이때 북한이탈주민들은 태국에 내렸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태국이 아니라 미얀마 땅이며, 여기서 폭 100m 정도의 얕은 강을 걸어 건너서 태국 땅에 가야 한다. 북한이탈주민들은 "굳이 강을 건너야 하게 만든다"며 불평하지만, 뱃사공 입장에선 태국 국경을 잘못 넘어서 밀입국하다 걸리면 벌금형이나 감옥살이를 해야 하므로 태국 땅에 안 들어가는 게 당연하다.

태국 경찰에 체포된 북한이탈주민들은 밀입국 벌금을 내야 하는데, 뭔지 몰라도 돈 내라니까 거부하다가 감옥살이를 하는 북한이탈주민들이 많다. 하지만 북한이탈주민들이 너무 많아져서, 예산이 부족한 경찰서에서 탈북자를 거부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8]

어쨌든 태국 경찰에 무사히 체포되면(...) 이후 방콕 이민수용소로 이송된다. 태국에 도착하면 한국을 포함한 원하는 나라로 추방될 수 있기 때문에, 탈북자들은 태국까지만 도착하면 매우 기뻐하며 안도의 한숨을 쉰다고 한다.[9]

참고로 일부 탈북자들의 경우 북한과 중국을 지나며 경찰에 대한 공포증에 걸려 태국 경찰서로 가라는 브로커의 말을 거부하고 한국 대사관으로 찾아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 관련 사례
    • 비욘드 유토피아 - 갈렙선교회가 5명의 일가족을 탈북시키는 모든 여정을 보여준다. 가족을 탈북시키다 보위부의 함정에 걸려 도강하다가 실패하는 경우도 그대로 나온다.
    • 윤설미
    • 정유나
    • 이외 대부분의 탈북 사례


3.2.3. 몽골 경유[편집]


몽골도 북한이탈주민들을 인도적으로 대우하는 민주주의 국가이므로 2000년대 초반부터 몽골 루트도 꾸준히 시도되고 있다. 하지만 내몽골부터가 또 다시 국경지역이기 때문에 뻥 뚫린 내몽골 사막에서 중국 국경경비대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중국 철조망에 다가가기도 쉽지 않다. 중국 철조망을 넘었더라도 탈북민 앞에 보이는 건 고비 사막으로, 매우 혹독하기 때문에 여기서 길을 잃어 변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태국 루트와는 다르게 여기는 길을 인도하는 브로커도 없고 무작정 사막을 넘으라고 내려두고 가는 식이다. 철조망을 여러개 넘고 사막을 횡단해 몽골 국경수비대에 무사히 체포당하면 탈북 성공이지만 광활한 사막에서 발견되는 것 자체가 생존의 문제다. 이때는 순찰로로 쓰이는 차도를 찾는게 핵심이라고 한다. 순찰로만 찾으면 언젠가 국경을 순찰하는 차량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막을 건너야 하는 몽골 루트의 위험성은 영화 크로싱경계에서 묘사된다. 무사히 주몽골 한국대사관으로 넘겨진 북한이탈주민들은 대한민국 정부의 보호 하에 울란바토르에서 한국행 비행기에 탑승한다.


3.2.4. 기타 동남아 국가[편집]


말레이시아[10],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 북송을 시키지 않는 국가에서는 현지 이민국에 불법입국으로 자수하는 방법을 택한다.

사회주의 국가인 라오스, 베트남이나 독재 국가로서 친중파가 많은 캄보디아, 미얀마는 탈북자 단속이 상당히 되는 편이다.

라오스는 한국 정부가 직접 손 걷어붙이고 나서자 갈등하다가 북송을 취소한 적이 있는데, 중국보다야 대화의 여지가 더 있다지만 이 정도의 외압이 없으면 라오스에서도 북송된다는 얘기다. 2013년 라오스 탈북 청소년 사건이 있었는데, 현지 한국대사관은 탈북자들의 신병이 억류되어 있던 18일 동안 단 한 차례도 영사면담을 하지 않았다. 결국 청소년 9명이 북쪽으로 압송되어, 이 루트는 현재 사실상 붕괴된 상태다.

베트남의 경우 베트남의 경제 대부분을 한국에 의존하다보니 옛날보다 한국에 훨씬 우호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2004년 베트남은 체류 중이던 468명을 이틀에 걸쳐 2차례 전세기편에 태워서 한국에 도착시킨 다음 정부가 베트남과 직접 교섭하여 대거 입국을 성사시킨 적이 있다. 당시 북한이탈주민 대부분 식량난, 생계 문제로 국경을 넘었는데, 여성 70%, 어린이 20%였다. 하지만 그 이후 베트남 지역을 경유하는 탈북 루트는 현재 사실상 봉쇄된 상태다.[11]


3.3. 해외 주재 중 탈북[편집]


본인의 결심만 있다면 탈북하기 가장 쉬운 루트에 속한다.[12] 주로 외교관, 북한식당 종업원, 노동자, 유학생들이 이 루트로 들어오며 대만, 싱가포르, 쿠웨이트, 이집트, 러시아, 잠비아, 홍콩, 영국, 오스트리아, 체코, 키프로스[13] 등 다양한 국가에서 이런 사례가 있다. 중국 - 러시아를 통해 다른 나라로 밀입국해서 하는 탈북과는 물리적 난이도가 다르다. 대신 가족들은 북한에 인질로 남아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함께 탈북하는 것이 어려우며, 해외 주재시 항상 북한 당국의 지속적인 감시가 존재한다.

  • 유럽
탈북하기 가장 쉽다. 그냥 택시를 타고 대한민국 대사관 앞에 내려서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북한의 자금사정상 유럽 모든 나라에 안전대표(보위원)를 파견할 수도 없기 때문에 한 명이 여러 유럽국가를 관할하여 유럽 유학생들은 감시에서도 자유롭다. 주재국의 정보기관이 주의깊게 들여다보고 있으므로 강제로 납치나 북송을 시도할 수도 없다. 외교관들도 그냥 기회를 봐서 대사관을 빠져나오면 되며 주재국 정부에 도움을 요청하면 탈북을 도와줄 수 있다.
  • 중동/아프리카
탈북 외교관 1호인 고영환 박사는 콩고에서 유럽을 거쳐 40일만에 한국으로 들어왔다.#

중국령이지만 1국가 2체제인 홍콩에서는 치안이 좋아서 홍콩 경찰을 뚫고 밀입국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1996년 이후 탈북이 거의 없으며, 2016년에 탈북 사태가 발생했다. 홍콩 소재의 홍콩과학기술대학교에서 열리는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 참석한 북한 고등학생이 한국 총영사관을 통해 탈북한 것이다.# 그러나 2019년 이후로 중국화가 강하게 진행 중 임으로 홍콩 탈북은 예전보단 난이도가 어려워진 편이다.[14]

대만이나 싱가포르 역시 중국 대륙과 떨어져 있고 치안이 좋아서 밀입국할 방법이 없다. 싱가포르는 중국과 멀리 떨어져있고, 대만타이완 해협을 기준으로 멀리 떨어져 있으며 마쭈진먼 역시 경비가 삼엄하다.

탈북작가 림일은 1997년 쿠웨이트로 해외 노동자로 파견되었다가, 그 곳에서 한국 대사관을 통해 귀순했다. 그리고 많은 국외 거주 북한 주민들이 외국에 소재하는 외교공관을 통해 한국으로 귀순하는 경우가 많다.

해외를 통한 탈북도 어느 정도 막기 위해, 북한에서는 11살 미만의 어린이를 제외하면 해외 출장 등이 있다 해도 가족 전원이 해외로 나갈 수 없도록 만들었다. 북한에 남은 가족을 인질로 삼아 탈북하면 수용소행 내지는 사형이라는 압박을 하는 것이며, 집단 탈북이 발생했을 시에는 그들의 가족을 매체에 출연시키며 "남한에서 이들을 납치했다"는 식의 여론전을 펼치는 경우도 많다.

드물게 납북되었다가 탈북한 경우도 있는데, 영화배우 최은희와 영화감독 신상옥 부부는 1978년 홍콩에서 납북되었다가 납북 8년만인 1986년에 오스트리아 에서 미국 대사관으로 도망쳐 탈출하는 데 성공한 바가 있다.

당시 최은희, 신상옥 부부는 때마침 알고 지내던 일본 교도통신 순회 특파원이 빈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연락을 취해 다음날 만나자는 약속을 받았다. 다음날 그가 숙소로 찾아오자 이들 부부는 식사하러 가는 척 하며 북한 감시원들을 따돌렸다.

호텔에서 택시를 잡은 후, 이들이 탄 택시가 숙소를 벗어나자 택시기사에게 차를 돌려 미국 대사관으로 가 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미국 대사관 앞에 이르렀을 때, 이들은 택시요금을 낼 겨를도 없이 곧장 택시에서 내려 황급히 미국 대사관으로 뛰어들어갔다.

김정은 집권 이후로 외교관 탈북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특히 UN의 대북제재가 시작되면서, 본국으로 송금해야 할 김씨 일가의 자금을 마련하지 못한 외교관들이 본국의 압력을 견디다 못해 탈북을 결심한다고 한다. 또한 친척 또는 동료가 숙청되면 연좌제로 연루되고 싶지 않아 탈북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만큼 일반인보다 고위층들은 가족들과 있으면 탈북이 더욱 쉬워진다. 다만 한국으로 가는 탈북은, 모든 가족을 탈북시키는데 성공하지 못하면 한국으로 갔다는 사실을 숨기거나 아예 외국으로 가기도 한다. 실제로 고위층이 한국을 많이 가는가는 알려진 바가 없다.



3.3.1. 러시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충성의 외화벌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두만강을 넘어 러시아로 직접 탈출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북한과 러시아가 국경을 맞댄 곳은 라선시 하나뿐인데, 이곳은 경제특구 지역으로 북한 내에서도 접근이 곤란한데다 라선시 일대가 두만강 하류인지라 강폭이 워낙 크기 때문에 도강이 어렵다.

북한 사람들은 러시아에 외교관, 무역일꾼, 건설노동자, 벌목공으로 파견되었다. 2022년 기준 러시아에 파견된 북한노동자의 수는 수천~1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90년대부터 시베리아에 벌목공으로 나간 사람들은 엄청나게 고된 벌목장을 이탈하여 불법체류자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았다. 십여년 이상 러시아에서 살아 한국말을 잊어버린 채 한국으로 입국한 사례도 있었다. 이들이 그나마 북송되지 않고 불법체류자로 머물 수 있었던 이유는 러시아는 탈북자를 체포할 강력한 이유가 없었고 중국과 달리 인구가 희박한 극동지역에서 그에 필요한 행정력도 없기 때문이다.

건설노동자들은 노동력이 부족한 극동지역에서 러시아 건설회사에서 하청을 받아 건설작업을 한다. 하루 2~3시간만 자고 일하는 경우가 허다하며 러시아 원청에서 지급한 월급의 10% 정도만 지급된다. 현역 군인들이 러시아 노동자로 파견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군복무를 하는 군인 신분이기에 민간인처럼 월급을 주지 않아도 공짜 노동력으로 부려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정도 경험이 쌓인 건설노동자들은 '청부'일을 하기 시작하는데 따로 사회에서 일감을 구해 일정 부분을 바치고 자유롭게 일하는 것이다. 이때 북한 노동자들은 스마트폰을 구입하여 사용하기 시작한다. 스마트폰으로 인터넷과 유튜브를 접하게 되면서 북한의 실상을 알게 되고 탈북을 결심한다. 러시아에 나와있는 선교사들과 구출활동가들이 망명 신청을 돕는다. 러시아 북한노동자들에게 제일 가까운 한국 외교공관은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대한민국 총영사관이다. 하지만 북한도 바보는 아니므로 그만큼 더욱 경계를 철저히 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2023년에 탈북한 러시아 북한노동자의 증언에 따르면 블라디보스토크 한국 영사관은 북한측에서 상시 도청 중이기 때문에 탈북을 희망해 전화를 걸었던 여러 북한노동자들이 적발되었으며 절대 이곳에 전화를 걸어 탈북 의사를 밝히면 안된다고 한다.

러시아 극동지역은 지역정부 관리와 경찰이 북한 대사관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탈북민을 불법적으로 납치한 뒤 북한 당국에 넘기는 경우가 지속되고 있고, 납치된 탈북민은 블라디보스토크 북한 영사관 지하에 감금되어 한꺼번에 북송된다고 한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로는 한러관계가 나빠짐과 동시에 북한과 더욱 가까워지고 있는 상황이므로, 탈북민들이 러시아로 탈출하는 순간 북송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기존에는 공산권출신 국가 치고는 의외로 범죄 혐의 또는 북한의 송환 요청이 없는 한 탈북자 강제북송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다곤 하나, 2016년 러시아도 북한과 탈북자 강제송환에 대한 협약을 체결했고 이미 우크라이나전 발생 전에도 탈북자를 북송한 전적이 있었다.#

  • 관련 사례
    • 2016년 8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북한 무역대표부에서도 한 외교관이 탈북했다.#
    • 2023년 1월 25일, 러시아에서 일하던 북한 노동자 9명이 대한민국에 입국했다 소식이 보도됐다. 대북 소식통은 "이들이 현재 하나원에서 교육을 받고 있다"고 밝혔으며,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터지면서 동요가 일어 한국에 들어오려고 했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3.4. 군사분계선(휴전선) 전면돌파[편집]


군사분계선비무장지대를 뚫고 한국으로 귀순하는 경우이다.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도보로 탈북이 가능한 경로이지만, 3만 명의 북한이탈주민 중 휴전선을 통한 탈북자는 극소수이다. 군사분계선은 극도로 위험하고 접근 자체가 쉽지 않은 탈북 경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휴전선으로 탈북하는 사람들은 북한군 민경부대 출신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휴전선 인근에서 복무하면서 비무장지대의 지형 조건과 북한군과 한국군의 경계상황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휴전선 주변은 역사상 육군 밀집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다. 조선인민군 육군의 70% 가량이 250km밖에 안 되는 원산시 이남 및 휴전선 근처에 전진배치되어 있다. 최고 10,000V 전압의 전기 철조망 또한 탈북을 방해한다. 전기가 흐르지 않는 시간대를 파악해 건너거나 쇠막대기를 이용해 전기를 땅으로 흘려보낸 뒤 철조망 밑으로 구덩이를 파고 통과해야 한다. 수십m 이상의 폭을 자랑하는 지뢰밭도 큰 문제다.[16] 한반도의 휴전선은 전 세계에서 지뢰 밀집도가 높은 지역 중 하나다.

북한군의 감시를 피해 비무장지대에 들어서면 대한민국 측에도 민경부대가 기다리고 있다. 물론 한국군은 귀순하는 탈북자인 줄 알면 보호해주지만, 대한민국 민정경찰의 GPGOP, 잠복호 근무병들은 넘어오는게 무장공비인지 탈북자인지 모르기 때문에 무조건 사살 태세로 근무한다. GP나 GOP 쪽에 탈북자들을 안내하기 위해 푯말과 전화기를 두긴 했는데, 관리는 영 부실하다. 애초에 넘어오는 탈북자들은 그런게 있는 줄도 모르기 때문에 철책으로 가까이 다가와서 귀순한다.

예전에는 휴전선으로 통해 귀순한 탈북자에게 바로 식사를 줬다고 하는데, 갑자기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탈이 날 수도 있어 최근에는 일선 부대에서는 물 이외에는 제공하지 않고, 국가정보원에 인계한 후에야 건강검진 후에 식사를 제공한다. 한편 2000년대 중반 중부전선을 통해 발생한 귀순 사례에 따르면 그냥 교대근무자들이 먹는 밥을 퍼다 줬다는 얘기도 있다. 근무병력들이 먹기 싫은 밥을 대충 퍼먹고 잔반처리하는 것을 본 탈북병사의 한마디가 "인민이 용서치 않을 겁네다"였다고 한다.


3.4.1. 관련 사례[편집]


  • 1953년
7월 31일, 북한군 대위 안창식이 휴전 이후 최초로 귀순했다. '월남 귀순 용사'라고 불렸다.

  • 2002년

  • 2008년
    • 4월 27일, 보위부 중위 이철호가 경기 파주의 군사분계선을 넘어 귀순했다. 이 사건은 '노크 귀순'으로 유명해졌다.
    • 10월 26일, 부사관 1명이 강원도 철원군 철책을 통해 귀순했다.

  • 2010년
    • 3월 2일, 병사 1명이 강원도 동부전선에서 귀순했다.




  • 2017년
    • 6월 13일, 2017년 GP 경계 실패 논란 - 저녁 7시 55분경 귀순자가 발생했다.
    • 6월 23일, 밤 9시 30분쯤 중부전선에서 북한 군인 1명이 또 귀순했다.
    • 11월 13일, 2017년 판문점 귀순 북한군 총격 사건 - 하전사 오청성이 차를 타고 돌진해 판문점을 넘어 귀순했다. 그 과정에서 총을 여러방 맞아 목숨이 위태로웠으나, 치료를 받고 다행히 살아났다. 유엔군사령부에서 해당 사건의 CCTV 영상을 공개하여 전 세계에서 화제가 되었다.
    • 12월 21일, 오전 8시 4분경 19세 초급 병사 노철민이 부대에 배치된 지 3개월 만에 총을 휴대한 채로 귀순했다. 탈북 이유는 누명을 쓰고 상관에게 심하게 폭행을 당한 것이 주요한 계기라고 밝혔다.[17]


  • 2019년
    • 7월 31일, 오후 11시 38분경, 에서 뛰어내려 임진강을 타고 내려온 북한군 1명이 중부전선 비무장지대 GP측에서 귀순했다. 해당 병사는 2022년 주성하 기자의 유튜브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인터뷰를 했다. #1#2#3#4



3.5. 북방한계선(NLL) 해상 탈북[편집]


파일:귀순표지판.jpg
백령도에 설치된 탈북 유도 표지판

대한민국은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아래에 있는 전화기의 신호 단추를 누르시면 안전지역으로 안내하겠습니다.

탈북 유도 표지판에 적힌 문구

전마선, 목선 등을 타고 서해 혹은 동해로 빠져나와 NLL을 넘어 대한민국 영해로 진입하는 경우이다. 1987년 '따뜻한 남쪽 나라'를 찾아간다며 일가족을 이끌고 귀순한 김만철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동해안으로 빠져나올 경우 해류에 따라 일본으로 표류하는 경우도 있다. 일본으로 떠내려갈 경우 해상보안청 경비함에게 걸려 구조된다. 일본 역시 탈북자가 원하면 대한민국으로 보내준다.

바다를 통해 한국에 귀순한 탈북자를 탈북자 사회에서는 '직통생'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해상을 통한 탈북이 늘자, 북한도 2007년부터 바다 출입증을 발급받기 어렵게 하거나 형제나 친척 등 가족이 한 배에 탈 수 없도록 하는 법, 그리고 자신의 거주지 이외의 지역에서 배를 탈 수 없다는 규정을 신설하는 등 바다를 통한 탈북을 막으려는 움직임을 본격화하고 있다.

배를 타지 않고 바다로 헤엄쳐 탈북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한국 땅이 시야에 들어오는 황해남도, 경기도 주민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동해쪽은 수심이 깊고 중간에 경유할 섬도 없어서 수영으로 탈출한다는 전제가 불가능하다. 동해에서 수영을 통한 탈북은 매우 위험하다. 일단 서해 바다쪽은 수심이 얕아 썰물 때를 노려 몇시간만 헤엄치면 황해남도에서는 탈북이 가능하고 탈북에 성공한 사례도 존재한다. 반면에 동해는 망망대해이다 보니 물살이 워낙 심해 수영하기가 힘들고 수온도 상당히 차기 때문에 바닷물에 몇시간만 들어가 있으면 저체온증에 걸리기 십상이다. 더군다나 수영장에서의 수영도 한 두시간만 해도 온 몸이 피로로 찌드는데, 해류와 해풍, 망망대해라는 심리적 영향이 있는 바다에서의 수영은 체력이 배로 소진된다.

돌파거리가 짧고 수심이 얕은 한강 하구의 경우 갯벌을 따라 내려오다가 헤엄쳐 탈북하는 사례도 있기는 하다. 단, 이 경우는 거리가 강폭 수준이라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3.5.1. 관련 사례[편집]


  • 1955년
    • 5월 17일, 북한 주민 유기방이 가족 8명을 데리고 강화도에서 귀순했다. 선박을 이용해 가족 단위로 탈북한 최초의 사례.

  • 1987년
    • 1월 15일, 새벽 1시 북한 주민 김만철이 일가족 11명을 데리고 청진을 떠나 탈북, 일본과 대만을 거쳐 2월 8일 대한민국으로 귀순했다.



  • 2003년 2차례

  • 2005년 3차례



  • 2008년 2차례


  • 2010년 4차례


  • 2012년
    • 9월 9일, 북측에서 나흘 전에 한강에 몸을 던져 교동도로 흘러내려온 28세 북한 주민이 검거되었다. 당시 태풍의 여파로 파손 및 돌덩어리로 임시보수된 철책을 넘어 밭 작물을 파먹으며 숨어있었다고 한다.

  • 2013년
    • 8월 24일, 40대 남성이 북한에서 교동도까지 헤엄쳐 민가의 문을 두드리고 귀순했다. 교동도 동남쪽이 주민 어업지대인 탓에 철책과 초소가 없었다고 한다.


  • 2016년
    • 7월 16일, 일본 야마구치현 나가토시에서 20대 남성이 발견되었는데, 목선을 타고 청진시에서 출항하여 15일 밤 일본해로 뛰어든 후 헤엄쳐 해안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후 9월 한국으로 이송되었다.#
    • 9월 18일, 황해남도 청단군 보위부 2과(정보과) 상위였던 이철은이 친구와 함께 20시간 동안 헤엄쳐 귀순했다.

  • 2017년
    • 6월 3일, 동해상에서 표류하다가 구조된 북한 선원 4명 중 50대 남성과 20대 아들이 귀순했다.
    • 6월 18일, 북한 주민 1명이 김포북단 한강하구 지역에서 귀순했다.
    • 7월 1일, 북한 주민 5명이 소형 선박을 타고 동해상에서 귀순했다.
    • 8월 11일, 오전 1시경 북한 20대 남성이 1명이 서해 교동도로 헤엄쳐와 귀순했다.#
    • 12월 20일, 북한 주민 2명이 어선으로 동해상에서 귀순했다.





3.6. 전투기[편집]


상당히 이례적인 사례들로 북한 공군 조종사들이 전투기를 몰고 그대로 귀순하는 경우다. 이 경우 거액의 보로금[18]이 지급된다.

  • 관련 사례
    • 노금석 상위(1953년, MiG-15)
    • 이운용 상위, 이인석 소위(1955년, Yak-18)
독특하게 2인용 훈련기를 2명이서 타고 귀순한 사례로 연락 임무를 받고 황해도 해주 앞 바다에서 임무 도중 남한에 일가친척이 있어서 귀순할 생각이 있던 이운용 상위가 기수를 남쪽으로 돌리고 권총으로 이인석 소위를 같이 귀순할지 협박했는데 알고 보니 이인석 소위도 일가친척들이 남쪽에 있어 귀순할 생각이 있는 걸 알아내고 우선 서로 권총 겨눈 거에 대해 사과()한 뒤 인천 상공을 지나 서울 여의도 공항에 내려 귀순했다.#1#2
가장 유명한 사례로 당시 경계경보가 울려서 당시 국민들이 혼란에 빠진 적이 있다.


4. 대한민국 입국[편집]


대부분의 북한이탈주민들은 태국 루트를 거쳐오기 때문에 태국 이민수용소를 거쳐 대한민국으로 입국하게 되는데, 이때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타게 된다. 재미있는 점은 북한에 있을 때 TV에서 보던 비행기는 주기장에서 계단을 통해 탑승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공항에서 탑승교를 통해 비행기로 들어가다보니 이륙할 때까지 여기가 비행기 내부인 줄 몰랐다는 경험담이 상당히 많다. 태국에서 이륙한 비행기가 새벽 시간대에 대한민국 상공에 진입하는 경우, 탈북민들은 창밖으로 발전된 도심의 야경을 보며 깊은 감명을 받는다고 한다.

북한이탈주민들은 인천국제공항에 내려 미리 대기하고 있던 국가정보원 직원의 인솔을 받는다. 중국에서 바로 넘어온 '직통생' 탈북민들은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지어진 현대적 시설을 인천국제공항에서 처음 경험하게 된다. 버스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인천대교 위를 지나가는데 바다 한가운데를 수많은 차량과 함께 달리는 광경을 보며 발전된 한국의 개발상을 직접 보게 되고 한국 드라마 속의 붐비는 차량 행렬과 사람들의 옷차림이 촬영용으로 준비된 세트장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고 한다. 이후 단체로 적십자병원으로 이동해 건강검진을 받는다. 이때 인생 첫 건강검진을 받는 사람도 많고 피검사를 위해 채혈을 많이 하다보니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19] 건강검진에서 이상이 없으면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에 입소하게 된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여담[편집]


  • 탈북민 관련 기사에서 간혹 상세하게 탈북 루트등을 알려주면 '기자가 아니라 스파이', 김씨왕조에게 탈북 경로를 발설하는 거냐?' 라는 빈축을 사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탈북 루트는 모두 중국과 북한이 알고 있다. 다만 수천km에 달하는 국경지대와 중국 내륙 도로를 모두 감시할 수는 없기 때문에 탈북이 가능한 것이다.

  • 영화 《그물》의 내용과 마찬가지로 북한 해군의 장교 한 사람이 배고파서 고기를 잡으러 어선을 타고 먼 바다로 나갔다가 풍랑에 휩쓸려서 대한민국 해군에 구조된 경우가 있는데, 이 장교는 탈북할 의사가 없었기에 비무장지대를 통해 북한으로 돌아갔다. 조선인민군/열악한 현실/빈곤함 문서에도 나와있는 사례이다. 문서를 들어가 보면 알겠지만, 이쪽도 심히 비참하다.

  • '탈북'은 아니지만 가끔 사망한 북한군이나 북한 주민들의 시신이 바다나 강을 통해 한국으로 떠내려 오기도 하는데, 이 경우 남한에서 혐의점을 조사한 뒤에 북한 측에 시신을 인계했다. 혐의점을 조사하는 이유는, 간혹 간첩이 침투하다가 사고로 죽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수영으로 내려오다가 익사한 간첩의 시신이 떠내려와서 발견된 사례들이 있다. 만약 북측이 시신 인수 의사를 밝히지 않는 경우에는 무연고자로 처리해 화장하여 납골당에 안치하고, 추후 유골 인계를 요구할 경우에 대비해 유품을 보관한다.#

  • 이와 다른 케이스로, 중국의 탈북 브로커들이 "돈을 벌 수 있다"고 사람을 속여 강제로 한국으로 왔으며 송환을 촉구하는 김련희의 사례가 있다.# #

  • 종북주의자는 탈북을 변절, 탈북자를 변절자라고 한다. 또한 탈북을 두고 사기 혹은 강제로 이뤄진 것이 일반적이고, 이는 기획 탈북이라는 개소리를 늘어놓기도 한다. 설령 기획이라고 해도, 기획 탈북 자체가 남한의 언론에 탈북 과정 등을 노출시켜 후원금을 더 받으려고 하는 짓이기 때문에 오히려 강제성이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물론, 기획 탈북은 비난받는다. 다만 이는 탈북 루트 및 탈북 과정을 적나라하게 묘사해서 다른 탈북자의 루트를 막으니까 문제가 되는 것일 뿐이고 탈북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절대 아니다.

[1] 한국이나 미국 국적이 없기 때문에 중국 동북 3성 지역이 아니더라도 잡히면 거의 무조건 북송된다.[2] 대부분 동북 3성 지역에 산다.[3] 동북 3성 지역에서 중국 중부나 동부, 서부, 남부 등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때에 해당된다.[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에 직속된 조직으로, 단적으로 말하자면 사실상 김정은에 직속된 조직이다.[5] 링크에 건 적도 기니의 독재자 응게마도 국민들의 해외 도피를 막기 위해 황당한 지시를 내렸다는 것만큼은 김정은과 대동소이하지만, 강을 깊게 파내는 대신 나라에 있는 개인 소유 선박들을 모조리 불태우게 했다. 물론 이 상황 속에서도 강을 헤엄쳐 적도 기니를 탈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6] 대한항공 등의 한국 국적기를 탄 순간부터 대한민국 항공법이 적용되기 때문에 한국 국적기에 타기만 해도 탈북은 성공한 것이다. 설령 타 국적기를 탄다해도 현실적으로 고작 탈북자 한 명 잡겠다고 이미 이륙한 비행기를 다시 회항시켜서 체포하는건 사실상 불가능하다.[7] 주변부가 마약 온상지. 90년대 마약 세력이 저물며 주로 녹차를 재배했다가, 근래에 다시 마약 재배가 증가하는 추세.#[8] 실제로 한 탈북민 유튜버는 경찰서에서 잡아주지 않아, 경찰서 앞에 뻐기거나 태국 여행을 하는 등 3주 정도를 경찰서를 거점으로 죽치고 앉아있었다고 한다.[9] 무엇이든 물어보살에서 태국을 통해 한국으로 넘어온 탈북 여성의 경험담이 방송된 적이 있다.#[10] 특히 말레이시아는 김정은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화학무기로 자신의 이복형을 죽인 사건 이후로 북한과의 관계가 매우 안 좋다. 최근에는 북한과 단교했으며, 아예 탈북자에 대해 관대해졌다는 의견이 대다수이다.[11] 이때 이만갑 출연진 중 한 명인 유현주 씨가 탈북했다. 입국일이 7월 27일이었는데, 같이 온 사람들과 함께 "탈북의 7.27~"이라고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12] 물론 여기서 중국은 해당되지 않는다.[13] 대개는 북키프로스에서 탈북한 경우가 많았다.[14] 탈북민 출신이 홍콩 경유해서 해외 가는 것도 안전하진 않다.[15] 탈북 후 이정호로 개명[16] 가장 위험한 요소로 1953년 정전 이후 비무장지대의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지형상의 변화 등의 이유로 지뢰가 어디로 쓸려내려갔는지 한국 측도 북한 측도 아무도 모른다.[17] 귀순을 유도한 분대장은 30박 31일 휴가를 받았다고 한다.[18] 군함·전투폭격기: 5억원 이하[19] 북한 주민들은 헌혈이라는 개념이 희박하고 피를 잃으면 건강에 나쁘다는 인식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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