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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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토끼한수애
oksue

파일:옥토끼한수애 프로필 사진.jpg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1]
출생일
1991년 1월 13일 (33세)
활동 개시
2020년 12월 9일[2]
방송 장르
일상 및 낚시
방송 시간
랜덤
구독자 수
8.87만명[3]
링크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파일:네이버 카페 아이콘.svg
종교
개신교
신체
163cm
가족
남편[4], 딸
1. 개요
2. 생애
2.1. 유년기 시절
2.2. 캄보디아 북한식당으로 가다
2.3. 남편을 만나다
2.4. 탈북을 결심하다
2.5. 남편을 따라 대한민국으로 정착하다
3. 여담



1. 개요[편집]


평양시 만경대구역 출신 북한이탈주민, 방송인, 유튜버.

세계적으로 유명한 앙코르 와트 사원의 근처에 위치하고 있는 캄보디아 시엠레아프의 북한식당 평양랭면관[5]에서 근무하다가 그곳에서 손님으로 만난 남편과 사랑에 빠져 탈북한 현실판 사랑의 불시착을 찍은 장본인이다.[6] 그래서 유튜브를 검색하면 캄보디아 북한식당에 근무하던 당시의 앳된 한수애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아울러 그 당시 근무했던 북한식당의 분위기를 상세하게 전하는 에피소드가 유명하다.

2. 생애[편집]



2.1. 유년기 시절[편집]


1991년 평양시만경대구역 출신으로 군인 아버지와 교사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들만 있는 친가쪽에서 딸을 바라던 친할아버지의 귀여움과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다고 한다. 다만, 동생을 낳은 어머니가 동생을 키우느라 외가쪽 조부모들과 이모 밑에서 키워졌다고 한다. 이후 남녀공학이었던 학교에 입학하였고 군사동원부에 의해[7] 통일전선부 문화교류국 대남연락소[8] 서기를 맡았는데 필체가 좋아서 근무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만경대의 고위 간부들이 김정일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서 한수애의 남자 동기들이 북한군 1군단과 5군단으로 배치시키는 '집단 탄원'의 대상으로 징집되어 순식간에 남녀공학이던 학교가 얼떨결에 여학교로 탈바꿈이 되었다고 한다. 이 때, 한수애는 횃불행진과 같은 행사에 동원되어 훈련을 받았고 지금처럼 다부진 체격과 몸매를 갖게 되었다.[9] 이후 교사들에게 이끌려서 정치부 중대장으로 임명되었고, 2007년 노무현 대통령 방북 당시에도 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근무지였던 군사동원부에 방문한 시군사동원부 5과 과장의 눈에 띄면서 조선로동당 5과 준비생으로 뽑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불행 중 다행으로 탈락하면서 다시 원위치가 되었는데 상사였던 간부의 배려로 조선로동당 연락소로 발령받게 된다. 하지만, 방광염에 걸려서 소화기 내과로 입원한 와중에 김정일의 지시로 청년동맹편제 해체를 당하면서 졸지에 해고된 상태가 된다.


2.2. 캄보디아 북한식당으로 가다[편집]


결국 다시 집에 돌아온 한수애에게 아버지가 대외봉사원 양성소[10]를 권유했는데 완강히 반대하였으나 아버지의 간청과 어머니의 견책에 못 이겨서 가게 된다. 그 당시 한수애의 아버지는 딸이 선머슴같이 행동하는게 아쉬워서 좀더 여성스럽게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내비쳤고, 어머니는 팩트폭격으로 딸을 설득시켰다고 한다.

다만, 당시 동행을 했던 어머니에게는 그렇게 기대하지 말라고 반신반의하면서 심사를 받으러 들어갔고 내심 합격 못할것 같다 단언하고 귀가했는데 일주일 후 합격했다는 통보를 받게 되었다. 연락을 받은 어머니는 기뻐했던 반면, 한수애는 불합격을 바라던 와중에 합격을 '당하면서' 낙담(?)했다고 한다. 아마도 한수애가 불합격을 바랬던 이유는, 양성소에 모인 여성들의 미모와 재력이 있는 소위 '금수저' 집안의 딸들이다 보니 자격지심이 생긴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양성소에 있는 연습생들이 각지 파견될 나라의 '조' 파벌들끼리 모여다니는 살벌한 분위기 가운데 모 연습생을 통해서 '꿈의 조'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되었으나[11] 정작 한수애 본인은 큰 관심을 두지 않았었고 그런 가운데 자신의 특기인 베이스 기타를 배우게 된다.

이후 그 언급된 그 '꿈의 조'의 사장이 조 선발을 위해서 평양으로 들어왔고 (놀랍게도 사장이 여자였다고 한다.) 다음날 오디션을 보기 위해 모든 양성소 연습생들과 후보생들이 철저한 준비와 열정적인 모습으로 임했다고 한다. 그러나, 혹독한 평가가 내려진 상황 중에서 한수애가 뽑혀서 금방 외국으로 파견된 줄 알았으나, 2년 6개월 의무 연수 방침에 걸려서 다시 북한에 남아 연수원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개고생을 하는 우여곡절 끝에 캄보디아로 파견된다.

캄보디아에서 일을 시작한 신참 시절에, 선배들이 사소한 것으로 트집을 잡아서 군기를 잡으려고 너무 괴롭히는 바람에 마음고생도 많이 했었고 가혹행위와 폭행까지 당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짐을 싸서 평양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던 때도 있었지만 달러를 벌어야한다는 생각에 힘들어도 참았다고 한다.#


2.3. 남편을 만나다[편집]




그리고, 여기서 손님으로 찾아온 대한민국 출신의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 남편의 과거 학창시절 이야기를 해줬는데 호기심이 들었고 대한민국에 가보고 싶다는 동경을 더욱 굳혀나갔다. 처음에는 남편의 외모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었지만[12] 상냥한 태도로 배려를 해주는 모습과 북한 사람들에게 들을 수 없는 간드러지고 부드러운 말투로 점점 마음이 흔들렸다고 한다.[13]

이 때 남편이 대놓고 대한민국의 좋은 점을 일장연설하며 자랑을 하는 태도였다면 별로 궁금하지 않았을지도 몰랐지만, 슬쩍슬쩍 재미있는 이야기를 조금씩 들려주는 태도라서 더더욱 솔깃하고 궁금했었다고 한다. 이 때 남편이 멋진 바다가 보이는 풍경의 사진을 스마트폰으로 직접 보여줬는데 농담조로 "어? 나중에 저기로 가야되는거 아냐?" 같은 생각까지 했었다. 그리고, 훗날 자신이 극적으로 탈북에 성공한 이후 남편과 신혼여행을 갔을 때 정말로 그 사진에서 봤던 바다를 같이 갔고 자유를 얻었다는 생각에 눈물도 흘렸다고 한다.

그렇게 남편이 북한식당으로 1년 내내 매일같이 찾아왔고, 남편을 만나서 서빙하는 시간은 사실상 연애하는 시간이나 다름없게 되었다.[14] 특히 남편의 누나, 현 시누이가 한수애에 대해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하는데 아예 첫만남부터 시누이로 여겼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시누이가 자신의 남동생과 그녀의 연애에 많은 응원을 해줬다. 시누이 역시 남편과 같이 식당에 오는 일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자신의 전담 봉사원으로 한수애를 선택했다고 한다. 심지어 매일같이 찾아오다가 어쩌다 식당에 안 오는 날이면 왜 안 오는지 기다리면서 혹시 다쳐서 못 오는게 아닐까 걱정까지 했을 정도로 보고 싶어서 초조한 마음까지 들었다고 한다.

며칠 뒤 남편이 북한식당을 찾아오자 왜 이제서야 왔냐고 화를 내면서 "왜 못 왔어요?" 라고 자신도 모르게 성질을 내기도 했는데[15] 어느덧 여자친구가 데이트 약속시간에 늦었다고 남자친구에게 타박하는 모습처럼 남편에게 점점 빠져들었던 것이다. 나중에는 감시카메라가 없는 곳에서 몰래 손을 잡거나 선물까지 건네주면서 금단의 연애를 즐겼다고 한다.[16] 사실, 남편이 보기와는 다르게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라 생각보다 얌전한 편인데다 말수도 적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소극적이었다고...

게다가, 북한식당에서는 보위부 요원의 눈치를 보기도 하고 생활총화를 하면서 서로에게 잘못한 것을 고발하고 감시를 하는지라 매사에 말 한마디도 조심해서 해야 되고 군대처럼 선후배 관계도 딱딱한 분위기였기 때문에 당연히 남자관계같은 비밀 이야기나 고충을 털어놓는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을 절대로 동료들과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남편에게는 일하면서 힘든 일이나 자신의 고민거리같은 비밀 이야기를 모두 들어줬고 매사에 답답한 마음의 스트레스를 모두 풀어낼 수가 있었다고 한다. 결국, 그렇게 관심이 없었던 남편이 어느샌가 자신의 마음 속으로 들어왔고 "아. 나 이 사람 좋아하는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한수애의 사수와 한수애를 감시하던 선배도 남편이 비밀 이야기를 잘 들어줬고 어려운 고민상담도 잘 해줘서 남편에게 호감을 갖고 좋아하고 있었다.

2.4. 탈북을 결심하다[편집]






북한 식당에 파견되는 사람이라면 그러하듯 한수애도 역시 남한[17]과 자본주의를 적대시하는 세뇌로 인해[18] 사상의 정신무장이 잘 되어있었고 김씨조선의 골수 충성파였던지라 소위 북한에서 말하는 '빨간 물' 이 잘 들어있었고 남한 사람들을 적대시하는 마음을 되새기고 다짐했다.

그러나, 캄보디아의 북한식당으로 파견되어 근무를 하면서 고객인 남한 손님들이 자신이나 동료들을 북한 사람이라고 무조건 적대시하거나 경계를 하지 않는데다 아무런 사심도 없고 꺼리낌없이 자유롭고 친근하게 잘 어울리거나 친절하게 잘 대해주는 모습을 바라보면서[19] "잠깐만? 저 사람들은 적이라면서? 그런데 우리한테 왜 저렇게 친절하지? 남한 사람들은 대부분 착하고 좋은 사람들인데 우리들이 왜 경계를 하고 적대시해야하는 것이지? 뭔가 이상한데?" 라면서 혼란스럽고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자신은 21년동안 살아오면서 남한 사람들을 적대시하면서 경계해야 한다고 사상교육을 강하게 받아왔기 때문에 "남한 사람들도 북한 사람들을 싫어하도록 사상교육을 받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20] 그리고, 윗선에서는 "남한 손님들은 돈줄이니까 친절하게 잘 대접해줘라." 라고는 말하지만 막상 일이 끝나고 뒤에 가서는 "왜 남한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냐?" 라면서 성질이나 내고 있으니 도대체 왜 저러는지 어리둥절하고 이해가 안 간다고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남한 손님들은 "우리들은 부자가 아니라 서민이다." 라고 이야기를 해줬지만 대부분 월급이 1만 달러가 (대략 1천3백만원 정도) 훨씬 넘는 직종에서 일하는 경우도 있었고[21] 아무렇지도 않게 고급 호텔의 비지니스석을 예약하고 비싼 음식들을 주문하고 먹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남조선 사람들은 못 산다고 배웠는데 서민들도 저렇게까지 사치를 부리면서 많은 돈을 쓰는데 정말로 남조선은 못 사는 나라가 맞는건가?" 같은 의심이 들었다고 한다. 본인의 입장에서는 남한 사람들이 고급 호텔 예약을 하고 비싼 음식을 먹는 모습이 그저 사치스럽기 짝이 없는 태도로 보인 것이다. 하지만, 몇 년 동안 일을 하고 손님들을 지켜보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아? 남조선에서는 서민들이라도 고급 호텔 정도는 그냥 예약할 수 있을 정도로 경제력도 좋고 잘 사는게 맞구나?" 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반대로, 자신은 열악한 저임금인 30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착취를 당하고 있는 중이라 "내가 3년 이상 일을 해도 1만 달러를 벌 수 있을까?"를 장담할 수는 없었지만 남한 사람들은 연봉이 아니라 월급으로 1만 달러 정도는 우습게 벌고 있으니 당연히 불공평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교민들이 자신에게 "너는 외국에서 일하고 있는데 월급은 1천만원 정도 받지 않니?" 라고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북한에서 자신을 부당하게 착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을 무려 1년 이상이나 지난 뒤 깨달았다고 한다. 남한 사람들은 북한식당 직원들이 돈을 많이 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전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한 손님들이 경제적으로 잘 사는 사람들이라서 사회에 전혀 불만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오늘 하루의 직장생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분이 어땠는지 자유롭게 대화도 하고 정치 이야기도 하면서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도 욕하고 자유롭게 불만을 토로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는데 "북한과 다르게 남한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자유가 있는 나라가 분명하다." 라고 생각했고 자신이 처한 상황과 뭔가 다른 분위기를 발견하면서 "미쳤다. 남한에서는 마음대로 대통령을 욕한다고?" 처럼 자유로운 태도를 발견하고 머리를 한 대 크게 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반대로 자신들은 항상 군대처럼 억압당하고 통제되는 분위기처럼 마음대로 외출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답답한 작업환경이었고 보위부 요원들의 눈치를 보면서 평소에 동료들과 말 한마디 자유롭게 하는 것도 조심스러웠고 답답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남한 사람들과 자신이 처해있는 작업환경에 심한 괴리감을 느꼈다.# 그래서 "남한 손님들은 매사에 항상 자유로운데 왜 우리들은 항상 통제당하고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하는 걸까?"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한수애의 입장에서는 남한 사람들의 모든 자유로운 일상이 기적처럼 보였다. 그래서 스스로 통제되고 억압당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실제로 캄보디아에 있던 4년이라는 기간동안 캄보디아의 유명한 관광지를 여행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보위부에서 북한식당 직원들을 24시간 감시를 하는 카메라의 갯수를 늘렸는데 "남한 사람들은 위험하고 너희들을 납치하는 것을 막으려고 보호하기 위해서 설치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지만 실상은 북한식당 직원들이 도망갈까봐 감시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우리를 이렇게 못 믿다니, 이게 무슨 치사한 짓인가?" 라고 어이가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부조리한 작업환경과 답답하고 통제된 북한 사회의 현실에 점점 불만이 쌓여갔다고 한다. 사실, 캄보디아에서 외출을 하면[22] 한국식당이나 백화점같은 다른 건물에서는 철조망이 하나도 없는데 북한식당에서만 마치 감옥처럼 철조망까지 쳐져있으니 안 그래도 답답한 환경이 더더욱 답답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감시카메라가 항상 자신들을 감시하고 지켜본다는 생각에 늘상 불만이 많았고 짜증이 났다고 한다.

그리고, 남한 사람들은 직장의 작업환경도 대부분 북한식당보다 훨씬 좋아서 따뜻한 물로 샤워도 하고 더울 때는 에어콘도 시원하게 쐬고 전기도 잘 들어오는 좋은 곳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반대로 북한식당 직원들은 전기도 잘 안 들어오고 정전도 쉽게 되고는 열악한 근무환경에서 더울 때는 에어콘도 한 번 제대로 못 쐬고 뜨거운 물로 샤워도 제대로 못하고 기본적인 일상도 누리지 못하는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어쩌다가 에어콘이라도 한 번 켜면 지배인이 잔소리를 하면서 성질까지 냈다. 캄보디아는 안 그래도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너무 추운 동네라서 그런지 더더욱 괴로웠다고 한다.

반대로, 남한 손님들은 북한식당 직원들보다 월급도 수십배는 더 많이 벌고 작업환경도 더 좋다는 이야기를 남편에게 듣자 대놓고 차별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너무나도 불공평하고 억울하다는 감정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탈북해서 남편의 집으로 찾아가면 하루종일 에어콘도 틀 수 있고 뜨거운 물로 샤워도 할 수 있을까?" 라는 의구심이 들었다고 한다. 물론, 탈북하고 대한민국으로 들어온 이후에는 에어콘도 매일 틀 수 있고 뜨거운 물로 샤워도 매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매일같이 자신을 찾아와서 남편이 갖다주는 선물들과 최고급 한우 소고기, 삼계탕, 참치회같은 북한에서 단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던 비싸고 맛있는 한국 요리의 별미를 즐기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자신이 살아왔던 북한의 사회와 사상교육으로 알고 있었던 대한민국 사회에 대한 잘못된 편견도 완전히 깨져버렸고 엄청난 현실의 괴리감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배워왔던 것과 전혀 다른 대한민국에서는 뭔가가 여유로워보이면서 풍요롭게 차고 넘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자유로운 삶' 에 대한 갈망으로 점점 머리가 깨어나기 시작했다.

참고로, 북한에서는 소고기를 먹으면 보위부에서 처벌을 받는다고 해서 일반 주민들은 절대로 먹을 수가 없다고 한다.[23] 그래서, 북한에서 단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한우 살치살을 처음 먹어보고 너무 맛이 있어서 한우가 비싼 가격인 것도 모르고 "한우 먹고 싶으니까 사줘요!!" 라고 철없이 조르기도 했었다. 그래서 탈북을 하고 대한민국에 정착한 지금도 한우를 3~4인분 정도는 그냥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좋아한다고 한다.

본인이 말하길, 이 때부터 소위 말하는 '공산주의 빨간 물' 세뇌가 완전히 빠져버리고 '달달한 대한민국 자본주의' 에다 맛이 들려버렸다고 이야기한다. 게다가, 남편은 자신을 너무 사랑해서 선물도 잘 챙겨주고 맛있는 한국 음식들을 챙겨준 가격을 계산해보면 우스갯소리로 "남편은 나한테 아파트 한 채 값 정도로 엄청나게 큰 돈을 썼을 것이 분명하다." 라고 개인 유투브 채널에서 이야기를 한 적도 있고, 남편이 자신 때문에 캄보디아에서 번 돈도 거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한다. 게다가, 한수애 본인은 아무것도 가진 것도 없이 탈북을 했으니 (한수애는 정말로 탈북을 할 때 수중에 땡전 한 푼도 없었다고 한다)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결국, 북한 김씨왕조에 대한 충성심과 세뇌가 완전히 풀리게 되었고 21년동안 살아오면서 배워왔던 '자유롭고 평등한 북한의 사회주의 세상' 은 모두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북한식당 직원들은 군대처럼 분위기가 항상 답답한데다 열악한 작업환경으로 인해서 항상 심리적으로 위축되어있는데 남한 사람들은 매사에 풍요로운 것처럼 보여도 끊임없이 만족을 하지 못한 채 진취적이고 향상심으로 발전하는 모습과 뭐든지 자연스럽게 불만을 토로하는 모습이 일상적이었고 매사에 자유로움을 느끼는 것을 부러워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의 여자 손님들이 머리 염색도 자유롭게 하고 예쁜 옷도 잘 입고 외모도 잘 꾸미면서 자유로운 일상을 즐기는 인생과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 부러웠다고 한다.

물론, 탈북을 하고 싶어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누가 뭐래도 사랑하는 남편의 옆에 있고 싶어서였고, "이렇게 나를 사랑해주고 필사적으로 노력해주는 남편을 따라서 대한민국으로 가더라도 내 인생이 망하지는 않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하루빨리 북한을 빠져나가야겠다고 결심한다.

북한식당에서 저임금으로 착취를 당하고 선배들로부터 괴롭힘까지 당하면서 힘들게 일을 하고 있던 당시, 현재의 남편이 "나랑 같이 한국으로 갈래?" 라고 탈북을 권유했지만 북한식당 직원들의 삼엄한 감시망에 겁이 나고 북한에 남은 가족들이 보위부에 끌려갈까봐 걱정되어서 거절을 했다고 한다. 남편이 몇 번의 설득에도 거절을 하자 결국 포기하였고 며칠 뒤에 "나는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 라면서 통보를 하였으며 정말로 며칠 뒤에 남편이 한국으로 귀국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남편이 한국으로 떠나면서 헤어지게 되자,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으로 일이 더 이상 손에 잡히지 않게 되는 상사병이 걸려버렸고 매일 눈물까지 흘리면서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물 한 모금도 제대로 못 마실 정도로 괴로운 마음의 병을 얻게 되었다. 다른 동료들이 말하길, "일주일 쯤 지나면 다 잊어버리고 괜찮아진다." 라고 했는데 자신은 일주일이 지나도 정신이 미쳐버리고 환각까지 봤을 정도로 죽을 것 같았다고 한다. 그 와중에 윗선에서는 "쟤가 지금 고향으로 가고 싶어서 저러는 것인가?" 처럼 향수병이 걸렸다고 생각해서 몸이 아파서 일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고 판단하자 다시 평양으로 귀국하는 것이 확정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북한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면, 다시는 북한을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와 영원히 이별하게 되어버리는데다, 미래에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결혼도 해야 하고 항상 굶주림을 걱정하면서 아이를 키워야 되고 장마당에 나가서 장사를 하며 고생하는 삶을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상태가 된다.

결국, 한수애의 입장에서 다시 북한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자신이 북한식당에서 악랄한 착취를 당하면서 살았던 것처럼 평생동안 자신이 사랑하지도 않고 얼굴도 모르는 남편과 같이 살아야 하고 자식들에게 평생동안 희생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인데다 자신만의 주도적인 인생과 진로가 완전히 사라져버리면서 꿈을 실현할 수도 없고 자유를 박탈당하는 또 다른 지옥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미래의 삶이 너무나도 무섭고 싫어져서 더더욱 탈북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고 한다. 심지어 잠을 자다가도 악몽을 꾸고 깨어나 소리를 지르며 눈물을 흘리면서 괴로워했고 "내가 여기서 탈북을 시도하다가 잡혀서 죽더라도 무조건 여기를 빠져나가야 한다!" 처럼 자유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미쳐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날이 갈수록 상사병도 악화되었고 평양으로 다시 돌아갈 상황으로 되면서 점점 몸과 마음이 벼랑 끝으로 몰리는 상황이 되자 도저히 참지 못하고 아는 손님에게 핸드폰을 빌려서 남편이 알려준 전화번호를 눌러서 통화를 시도했는데 곧바로 남편이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남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고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요. 이제는 한국으로 같이 가고 싶어요." 라고 울면서 말을 하자 그 다음 날 곧바로 남편이 캄보디아로 자신을 만나기 위해서 찾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남편과 같이 캄보디아를 빠져나가기 위한 탈북을 계획하였는데 북한을 빠져나갈 기회가 오직 평생에 단 한번 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이 기회를 놓친다면 영원히 후회를 할 것 같았다고 한다. "여기서 북한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평생동안 다시는 탈북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절대로 없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고... 물론, 되돌아보면 점점 남북관계가 최악으로 악화되는 시점으로 변한데다 코로나 시국으로 인해 국경경비가 삼엄해지면서 탈북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정말로 다시는 없을 절호의 기회이긴 했다.

2.5. 남편을 따라 대한민국으로 정착하다[편집]


결국, 우여곡절 끝에 남편의 도움으로 캄보디아 현지 심부름센터의 사람들을 고용하여 납치를 빙자한 탈출극으로 무사히 북한식당을 빠져나오는데 성공한 뒤 밀입국으로 태국을 거쳐서 대한민국으로 귀순하는데 성공한다. 그 당시 캄보디아 국민들의 평균 일당이 5달러 정도면 되는데도 무려 100달러 이상을 보수로 줬다고 한다. 그리고, 탈북을 시도하다가 잡힌다면 죽을 각오는 이미 했었던 상태라 비상시에 자살할 수 있는 쥐약도 챙겼었다고...

다만, 첫번째 시도는 탈출할만한 타이밍이 맞지 않아서 실패했고, 두번째 시도에서 성공했다. 첫번째 탈북 시도에 실패한 이유는 류경식당 종업원 집단탈북 사건이 터져서 갑작스럽게 경비가 삼엄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쨌든 두번째 시도 끝에 캄보디아를 빠져나와 태국을 거쳐서 대한민국으로 정착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탈북의 계기를 만들어줬던 남편과 결혼도 했고 딸을 낳으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중이며 개인 유투브 채널도 만들었다.

탈북에 성공한 뒤에는 "왜 캄보디아에서 4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낸걸까? 더 일찍 나올걸..." 이라고 생각했고 무의미하게 20대의 젊음을 낭비했다면서 시간이 너무 아깝다고 후회했다고 한다. 그리고, 한수애의 탈북으로 인해 평양에서 특권층이었던 부모님이 (부친이 장성급 군인이다) 평양 밖으로 추방되어서 모진 고생을 하고 있다고 방송을 통해서 밝힌 바 있다.


3. 여담[편집]


  • 현재는 이제 만나러 갑니다 등에 출연 중이며, '옥토끼한수애'라는 유튜브도 운영하고 있다.[24] 옥토끼란 별명은 한수애가 학창시절 장기자랑 때 당시 북한에서 방영된 애니메이션 '토끼와 자라'의 주제가를 불렀는데 그 가사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한다.

  • 북한식당 직원으로서 공연을 한 경험이 있는 관계로 입담도 매우 좋은 편이고, 진행 능력도 뛰어나다. 특히 현 남편을 만나게 된 계기와 탈출을 하는 과정을 얘기하다가 절정에 이를 때 쯤에 끝맺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평양에서 살았을 때 '꽃보다 남자'를 몰래 보고 다니던 학교에 가서 급우들에게 얘기를 해줬다고 했을 만큼 실력이 좋다. 탈북민 선배인 신은하와 공동으로 방송하는 일도 있는데, 자신의 컨셉인 '허당' 기믹을 이용한 진행을 한다. 또한, 탈북민들로 이뤄진 공연 및 자선단체인 '통일코리아' 창립 멤버로 기타 연주 및 공연 활동도 하고 있다.

  • 탈북을 하고 대한민국에 정착한 지금도 간혹 직업병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한번은 남편과 같이 식당에 가서 식사 중에 식당 사장이 만들어져 나온 음식을 서빙중인 알바에게 갖고 내가라고 외치니 그 자리에서 "네!" 하고 일어서서 남편이 빵터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 국정원에서 처음 조사를 받았을 때, 국정원 조사요원이 북한에서 쉽게 먹어볼 수 없는 김밥을 건네주면서 먹으라고 했는데 "저걸 먹으면 독 같은게 들어있어서 최면술에 걸리고 뭐든지 다 말하고 죽는거 아냐?" 라는 의심이 들고 겁이 나서 절대로 먹지 않겠다고 경계했는데, 그러자 국정원 조사요원은 "에이, 이걸 왜 안 먹어요?" 라고 웃으면서 김밥 꼬다리 한 개를 집어먹으면서 "이제는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생각하세요." 라고 대답하자 안심하고 김밥을 먹었다고 한다. 그 김밥은 참기름도 듬뿍 발라져있었고 계란 지단, 우엉, 야채, 고기도 가득 들어있어서 보기만 해도 침이 꼴깍 넘어갈 정도로 너무나도 맛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우엉도 북한에서는 단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어서 구경도 못했었고 대한민국에서 처음 먹어봤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 참고로, 자신이 살던 당시의 북한에서 한국산 김은 장마당에서도 밀수로 들어오는 경우가 거의 없을만큼 엄청나게 귀하고 비싼 음식이었다고 한다.[25] 심지어, 한수애의 집안은 나름대로 평양에서 살았던 특권층이었는데도 김을 먹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누구나 쉽게 먹을 수 있는 저렴한 서민들의 국민음식이 김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크게 놀랐다고 한다.

  • 국정원 조사요원이 "이제는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생각하세요." 라고 말하자 질문에 "왜요?" 라고 놀라면서 물어봤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헌법에 의거하여, 북한에 거주하는 주민 여러분들도 모두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단지 여러분들은 불법 무장조직에 억류되어있었을 뿐입니다." 대답을 들었을 때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 그리고, 그동안 평양에 남아있는 가족들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것이 너무나도 억울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 대한민국에 입국하여 국정원에서 조사받는 동안에 군인 장성 집안이었던 부모님에게 피해가 갈까봐 조사를 협조해야 되는지 말지 갈등을 하고 있을 때 국정원 조사요원이 지금의 남편과 통화를 허락하는 조건을 내걸자 '순순히' 협조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남편의 전화를 받자마자 너무 보고싶은 마음에 엉엉 울면서 대화를 했는데 이 때 남편이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 하나원을 졸업한 뒤 정착금을 통장으로 받았을 때, 통장으로 을 보관해주는 은행이라는 개념을 처음 알았는데 굉장히 낯설고 신기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고난의 행군 시기 이후부터 북한의 화폐개혁이 워낙에 개판인지라 은행이라는 것을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데다 북한 돈은 안 쓰고 미국 달러를 쓰기 때문이다. 그렇게 평생동안을 장마당에서 현금거래만 하면서 살다보니 "어떻게 저런 종이수첩 같은 것에 (통장 안에) 돈이 들어있다고?" 라고 생각해서 뭔가 어색하고 믿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남편이 은행이 하는 일에 대한 개념과 돈을 조심해서 써야한다는 것을 자세히 설명해줬고,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용거래의 중요성으로 살아간다" 라는 것에 대한 책임감을 배웠다고 한다.

  • 처음 대한민국으로 왔을 때는 대한민국 사회에 적응하는 것도 쉽지 않았었고 운전면허를 땄을 때도 좌우 구별을 힘들어 했었는데 남편에게 운전실습을 받을 때도 좌우를 잘 몰라서 고생하고 애를 먹기도 했다. 그래서, 의외로 '허당'끼가 많다고 한다.

  • 본인이 말하길, "북한 사람들이 김씨왕조에 쉽게 저항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대한민국 사회의 풍요로움과 자유로운 삶을 직접 겪어보지 못했고 눈으로 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라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래서, 북한 사람들이 대한민국 사회로 찾아가 직접 자유로운 삶을 체험하고 만끽해야만 점점 세뇌에서 풀리면서 김씨왕조에 저항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결국, 눈으로 직접 대한민국을 바라보고 몸으로 체험해보면서 겪어보지 못하면 절대로 북한의 부조리함을 모른다고 한다.

  • 사실, 위의 서술은 다른 탈북자들도 공통적으로 증언하는 내용이다. 실제로, 탈북자 중에서도 교사, 언론인, 대학교수, 정치지도원, 과학자, 고위급 관료, 군인, 당 비서처럼 이른바 골수 김씨왕조 충성파 엘리트층도 풍요로운 한국 사회를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한 뒤 충격을 받는 경우가 많고[26] 하루 아침에 "김씨왕조는 인민들을 굶겨죽이는 인간 쓰레기다." 같은 허무함과 배신감을 크게 느낀다고 한다. 소위 말하는 '김씨왕조에 충성하는 빨갱이 분자'들도 '공산주의 빨간 물'이 얼마 못 가서 완전히 다 빠져버릴 정도로 북한 정권을 극도로 혐오하게 된다고 한다.[27]

  • 같은 식당에서 같은 조로 사수, 부사수로 함께 일을 하던 봉사원 후배 김서아[28] 역시 한수애처럼 직원과 손님으로 알게 된 남한 남성을 만나서 같이 북한을 탈출했고[29] 한국으로 정착하여 결혼도 했고 자식도 낳아서 키우는 중이라고 한다. 그리고, 김서아는 한수애가 탈북을 한 이후부터 북한식당에서는 어떤 상황이 되었는지도 직접 이야기를 해주기도 했다.[30]

  • 탈북을 결심하게 된 동기가 현재의 남편과 같이 살고 싶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더욱 확고하게 결정을 하게 된 계기는 대북제재였다고 증언했다. (이는 남편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사실이라고 한다.) 북한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상당히 많은 실적을 쌓았고 전기밥솥과 같은 상품을 북한으로 보내는 와중에 대북제재의 대상이 되면서 중국 세관에 의해 반입이 금지되었고 이로 인해 "난 왜 이렇게 약한 나라에서 태어난걸까?" 처럼 북한 정권에 대한 좌절감과 실망감을 뼈저리게 체감하게 된다. 여기에 목함지뢰 사건으로 인해 촉발된 긴장상태에서 미군이 B-1(죽음의 백조)을 급파하자 이를 식당에 단골로 오는 한인 고객에게 자세히 알게 된 종업원들이 고객들을 붙잡고 "저 비행기 띄우게 하지 말라", "우리 부모님들 살려달라" 라고 애원하는 모습에 "나도 강한 나라에서 살고 싶다." 같은 생각에 탈북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 2023년 2월 20일, 캄보디아 북한식당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이야기이자 본인의 자서전인 '壽愛(수애) 목숨 건 사랑' 을 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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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법으로는 북한 태생은 태어날 때부터 한국 국적을 가진 것으로 간주된다. # 한수애 본인 뿐만 아니라 다른 탈북민에게도 큰 지지를 받는 판결의 태도다.[2] 유튜브 첫영상 기준[3] 2023년 8월 24일 기준[4] 한수애 본인은 남편이 '반달곰같은 이미지' 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의 주인공에서 이름을 따온 '곰현빈' 이라는 애칭이 있다.[5] 200~300석 규모로 캄보디아 내 최대 규모의 북한식당이었으며, 근처에 이보다 규모가 작은 북한식당 평양친선관과 경쟁관계에 있었다. 2019년 12월 UN의 대북경제제재로 인해 캄보디아 내 북한식당 다른 5곳과 함께 모두 문을 닫았다. 본인의 증언에 의하면 근무했던 북한식당은 주 고객이 현지 한인들과 대한민국 관광객들이었다. 그래서, '꿈의 직장'과 같았다고 한다. 지배인이 평양에 와서 직원들을 선발한다고 하면 평양의 여성들은 물론이고, 이미 타 지역으로 배정받은 직원들 조차 이곳으로 재배치를 받고 싶어서 경쟁률이 엄청나게 치열했다고 전했다.[6] '옥토끼 한수애' 유튜브 채널에서 상세한 내용을 볼 수 있다.[7] 대한민국의 병무청에 해당된다.[8] 평양에 위치한 123연락소로 위장 명칭은 조선인민군 1010부대이다.[9] 같은 이만갑 출연자인 신은하의 증언에 의하면 상당히 균형적인 몸매를 소유하고 있다고 증언했다.[10] 한수애의 증언에 따르면, 한국의 연예 기획사와 흡사한 분위기였다고 한다.[11] 나중에 알게되지만 이들이 소위 '대한민국 고객'이 찾는 북한식당에서 근무하는 봉사원들이었다. 많은 북한식당 가운데 특히 대한민국 손님을 주로 하는 북한식당은 선호도는 물론 경쟁률도 치열하다고 한다.[12] 마치 반달곰같은 이미지였다고 한다. 그래서 한수애의 남편의 애칭이 사랑의 불시착 주인공의 이름을 따온 '곰현빈' 이다. [13] 사실, 경기 방언이 쓰이는 개성 근처 출신이 아닌, 평양이 속한 평안도 지방이나 함경도 쪽의 고향 사투리는 구수하거나 억센 편이라서 서울말로 대변되는 한국 남자들의 말투가 부드럽다고 이야기를 많이 한다. 더군다나 북한에서 한국 드라마가 알게 모르게 유행해서 그런지, "한국 남자들은 말을 할 때 부드럽고 달달하게 들린다" 같은 태도라서 금방 친근감을 느낀다고 하는데 한수애의 남편도 그랬던 모양이다.[14] 한수애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식당내에서 종업원들과 남한 고객, 특히 남성 고객간의 연애는 은밀하게 암암리에 이뤄진다고 한다. 타향에서 일하는데다 같은 한국말을 하는 같은 한민족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겨나게 된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진짜 사귄다'고 공인(?)받는 커플들도 있다고 할 정도. 여기에 남북관계의 특성상 '금단의 사랑'이나 마찬가지라 비극적인 요소까지 더해져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상황도 일어난다고 한다고 한다.[15] 남편이 못 온 이유는 욕조에 물을 받고 들어가 있다가 너무 피곤해서 잠이 들어버려서 결국 감기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남편은 못 와서 미안하다고 직접 사과도 했다. 실제로 목욕탕에서 "목욕탕 안에서 잠들지 마세요" 라는 경고 문구를 써놓는 이유도 입욕수면이 매우 위험하기 때문이다.[16] 한수애의 증언에 의하면 대한민국 남성 손님과 북한식당 봉사원간의 연애가 암암리에 이뤄진다고 한다. 같은 민족이어서 말이 통하는데다 금단의 연애(?)라는 점 때문에 더 애틋하다고 한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자신의 눈으로 봤을때 '저 둘은 진짜로 사귀고 있다' 라는 커플만 해도 무려 6명이나 되었다고 한다.[17] 엄밀히 따지면, 대한민국이라는 정치 체제를 말한다. 남한도 같은 민족의 땅이라는 교육은 한국보다 훨씬 철저하며 역사나 지리에서 검열은 하지만 남한에 대해서 꽤 상세히 가르치는 편이다. 그래서 외국에 나간 남한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라는 식으로 교육을 했을 터인데 듣는 사람 입장에서 정치적으로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그냥 남한 사람을 싫어하라는 교육을 받았다고도 해석할 수도 있겠다.[18] 북한 전체로 치면 나이 (어릴수록 세뇌를 잘 안 따른다), 사는 지역, 정치적 신분에 따라서 차이가 꽤 크다.[19] 어느 정도인가 하면, 캄보디아 거주 교민들이 남한식 치킨이나 짜장면이나 한국 라면 등을 직접 사다주기도 하고 아이스크림도 사주는 등 잘해주었다고 한다.[20] 사실 대한민국에서는 김씨왕조같은 북한의 수뇌부들을 싫어하는 것이고 일반 주민들은 (일부 극단적인 종북주의자, 극우파, 북한에서 보낸 간첩이라는 사실히 밝혀지지 않는 이상) 적대시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탈북자들도 대한민국 헌법에 의거하여 모두 대한민국 국민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21] 사실 이정도 월급을 받으려면 삼성, 현대, LG, GS 등 대기업의 간부쯤 되어야 한다.물가가 높은 일본의 임직원도 이정도는 못받으며 물가가 비싼 스위스 정도 되어야 한다. 실제로 스위스는 물가가 세계에서 탑급으로 비싼 나라여서 월급이 평균 500만원(4천프랑,4460 미국 달러)정도를 받는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아르바이트 는 근무시간에 따라 다르겠지만 1000-1500미국 달러 쯤 된다.[22] 일정한 주기로 밖으로 나가서 음식재료, 생필품, 화장품같은 것을 사오는 목적이다.[23] 예능 프로그램 한식대첩에서도 북한 출신 참가자가 같은 증언을 하기도 했는데, 새터민 출신 요리사 안영자 씨도 "소(牛) 하면 쓰라린 생각과 한(恨)이 있다. 소고기는 북한에서 일반인은 못 먹는 음식인데 남한에서는 흔하게 먹을 수 있지 않느냐?" 라고 발언한 바 있다. 다만, 이렇게 고기가 극히 귀했을 때는 고난의 행군이 있었던 1990년대의 일이었다. 그래서, 2000년대부터 2010년대에 걸쳐 부업으로 돼지 사육 두수가 크게 늘어났기 때문에 돼지값이 중류층 정도 된다면 특식으로 돼지고기를 먹는 경우는 많았다. 그러나 2010년대 말에 돼지열병이 북한에도 번지는 바람에 돼지들이 많이 죽어나가서 돼지고기가 다시 크게 귀해졌다.[24] 팬들을 부르는 애칭은 '햇님들'.[25] 2010년대 후반 기준으로는 북한 주민도 자본주의를 더욱 추구하여 그들 스스로 좋은 운송수단을 도입하는 등 상황이 많이 바뀌었는지 개마고원의 국경도시인 혜산시의 시장에서도 김밥을 파는 모습도 보인다. 김밥 문서 참조.[26] 이들이 대한민국 국민들의 생활수준을 보고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조선노동당 간부들도 이런 수준으론 못산다." 이다.[27] 노동신문 기자 출신의 김길선이 대표적인데 북한 정권에서 기자까지 했던 인텔리였으나 탈북 후 전향하여 그 어느 누구보다 북한 정권을 신랄하게 비난하고 비판하는데 앞장서고 있다.[28] 2018년 탈출, 2020년 입국. 현재 유튜버로 활동 중이다. 김서아가 북한 식당에 근무하게 된 동기는 '북한 김태희'로 유명했던 백광숙의 부친이 김서아의 부친과 친한 사이라서 해외 식당 근무를 권유했기 때문이라고 한다.[29] 그래서 한수애는 농담조로 "사수한테 좋은 것을 배워야지, 못된 것(?)만 배웠다" 라고 웃으면서 타박했다고 한다. 물론, 자신의 후배를 영원히 죽을 때까지 못 만날 줄 알았는데 다시 만나게 되어서 너무 기뻐하고 반가웠다고 한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한층 더 경비가 삼엄해지는 것을 뚫고 북한을 빠져나왔으니 그럴만도 하다.[30] 참고로 김서아가 전한 백광숙의 후일담에 의하면 북한 당국이 백광숙을 다시 파견하기로 정하고 집으로 찾아갔는데 만나자마자 경악했다고 한다. 이유인즉, 그 잘나가던 미모가 실종(?)되었다는 것. 이른바 '북한 김태희'로 불리던 그 미모는 온데간데 없고 '괴악한' (북한식 표현이다) 모습으로 있는 그녀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백광숙이 "보내주시면 잘하겠습니다"라고 하자 "얜 반드시 탈북할 아이다" 라고 느껴서 단념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