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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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고영환(高英煥)
출생
1953년 7월 14일 (70세)
북한 자강도 강계시 서산리#
본관
제주 고씨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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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학력
평양외국어학원 불어과
평양외국어대학 불어과
직업
연구원, 전 외교관
소속
前 국가안보전략연구원
가족
아내 김재숙, 딸 1명[1], 아들 1명

1. 개요
2. 생애
2.1. 초창기
2.2. 아프리카 생활
2.3. 탈북 과정
2.4. 대한민국에서
3. 기타
4. 경력
5. 저서



1. 개요[편집]


북한의 전 외교관. 대한민국의 북한 전문가.

1953년 북한 자강도 강계시에서 태어나서 북한의 외교관으로 활동하다가 1991년에 홀로 대한민국으로 망명했다.

북한에 있었을 때는 정무원 외교부에서 과장을 역임하고 아프리카 지역의 외교관을 지냈다. 탈북한 이후에는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부원장을 지냈다. 원래 없던 직책이었는데, 2016년 직제 개편을 시행하면서 부원장직이 만들어져서 초대 부원장으로 취임했다. 정년퇴직 후 국가안보전략연구원(INSS)과 국방부 산하 한국군사문제연구원(KIMA) 객원 연구위원이며 한국관광대학교 겸임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은퇴 이후 연구원 현직일때 보다 활발하게 방송에 출연한다. 윤석열 정부에서는 통일부 장관 자문기구인 통일미래기획위원회에 초빙되었다.


2. 생애[편집]



2.1. 초창기[편집]


자강도 강계시(이북5도위원회의 행정구역상 평안북도 강계군 강계읍) 서산리에서 당의 간부급 직책을 맡고 있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휴전 직후 아버지의 인사 이동으로 개성시로 이사하여 주로 자란 곳은 개성이다.

인민학교(한국의 국민학교)[2] 졸업 즈음에 아버지의 권유로, 그리고 외교관이 되면 외국에 비행기를 타고 다니고 남들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외교관의 꿈을 꾸게 되었다. 그 후 당의 간부 자제들만 다닐 수 있는 평양외국어혁명학원(한국의 중고등학교를 합쳐놓은 외고와 비슷하다) 불어과에 전국에서 모인 4,000명 중 5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80명에 들어 합격했다. 당시나 현재나 평양외국어학원은 부상급(차관급) 이상 토대만 지원이 가능했는데 아버지가 차관급으로 대우 받는 개성시 인민위원회장[3]이어서 가능한 일이었다고 한다.

평양외국어 학원에 다니던 시절에 갑산파 숙청 사건이 벌어지는데, 고위급 자제들이 모여있던 학교였던만큼 자신의 같은 반 친구들이 정치범수용소로 끌려 가는 모습을 교실에서 직접 목격했다고 한다. 고급 소련제 승용차에 양복 입은 남자 둘이 학생을 한 명 씩 데려갔는데, 어디 온천이나 바다로 놀러갔나 했지만 보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아 그 때가 되어서야 숙청임을 알아차렸다고 한다. 그렇게 2년여 간 불어과 학급 12명 중 5명이 차례로 사라졌다고 한다. 쾌도난마에서 이 일화를 밝혔는데, 울지 않았냐는 박종진의 질문에 울게 되면 자신도 동조하는 것이므로 잔뜩 쫄아서 숨도 제대로 못 쉬었다고 회상했다.

졸업 후에 1972년 평양외국어대학 불어과에 진학한다.이제 만나러 갑니다의 게스트로 자주 등장하는 강명도 씨가 같은 과 6년 후배이며,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의 범인 김현희가 같은 대학 일본어과를 졸업했다. 평양외국어대학에서 괜찮은 성적으로 5년 과정을 마치고 1977년 졸업하였다.

2.2. 아프리카 생활[편집]


1979년부터 북한 정무원 외교부 동아프리카 담당 보조 지도원으로 첫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 근무했을 때만 해도 김일성의 열렬한 전사가 되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남북통일은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러나 점차 외교관 생활을 하다 보니 북한 정권의 실상에 대해서도 깨닫게 되었고 그토록 미워했던 한국 외교관도 같은 동포로서 생각하며 적대감이 많이 누그러지고 남한의 경제 발전을 느끼게 되면서 고영환은 점차 가치관의 혼란을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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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을 접견한 고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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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북한 부르키나파소 대통령 블레즈 콩파오레를 수행중인 고영환

김일성과 김정일의 프랑스어 통역을 3년 8개월간 하면서 특별히 김일성에게 프랑스어 실력을 칭찬받고 표창을 받았다. 김일성의 포상이 나오자 당시 외무상이 김일성이 직접 하사한 인삼을[4] 외무성 직원들 앞에서 내려 표창했다고 한다. 이 의미는 북한에서 최고의 신분 보증이 되는 접견자가 되는 것이라 개인 인사 카드에 김일성의 칭찬과 포상 내용이 가장 첫 페이지에 '모셔' 지고 당연히 간부 사업(인사)에서 상급자의 고과 의견 따위는 물을 필요도 없이 요건만 되면 즉시 승진 시키는 신분이 된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나이에 비해서 승진이 굉장히 빨랐다. 특히나 해외 근무는 외무성에서도 상위 20%의 엘리트가 로동당 입당이 허가되고 상관의 추천과 함께 기혼자에게만 주어지는게 규정임에도 홀로 주 자이르(지금의 콩고민주공화국) 대사관 3등 서기관과 북한 정무원 외무성 아프리카 담당국 지도원 과장, 주 자이르 대사관 1등 서기관을 거쳐 주 콩고 대사관 참사관을 역임하는 등 승진은 다른 동기들보다 빨리 한 편. 그 과정에서 외교부장 김영남을 수행하며 아프리카 제 3세계권의 서울올림픽 보이콧 운동 등 여러 가지 일을 하였다. 하지만 북한 체제의 모순성을 계속해서 자각하다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과 자본주의 경제의 급성장을 보며 체제에 대한 극심한 회의감을 느끼게 되었다.

특히 북한 외교관들은 기껏해야 선물로 인삼주를 받는데에 비해 남한 외교관들은 포니 자동차를 선물받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남한 외교관들이 받는 대우에 더해 남한의 비약적인 공업 발전이 믿겨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권력의 곁을 수행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김정일과 그의 측근들이 저지르는 각종 부정축제를 직간접적으로 알게되었다. 특히 그를 충격에 빠지게 만들었던 사건은 피로회복관 화재 사고이다. 피로회복관은 겉으로는 '장군님의 피로를 풀어드리는 시설'이라는 명목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김정일의 온갖 유흥과 향락을 위한 시설이 준비된 퇴폐적인 건물이었다. 이 건물의 건설에 북한 외교관들도 동원되어서 해외에서 건설 자재들을 들여오곤 했는데, 완공 단 하루를 앞두고 인화성 물질로 가득찬 건물 안에 불이 나버려서 북한 외교관 100명 이상이 한꺼번에 사망하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고영환은 당시 해외 출장중이었기에 천만다행으로 참사를 피할 수 있었으며, 명색이 한 나라의 엘리트들이 단지 지도자의 수발을 들다가 목숨을 잃는 광경에 넋을 잃었다고 한다.[5]

남북한 아프리카 외교전을 직접 겪었다. 본인이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것이 북한과 친한 나라들은 대부분 가난한 나라이고 남한과 친한 나라들은 부유한 나라였다는 점이라고. 80년대 까지는 김일성의 교시로 아프리카와 제 3세계권 외교가 북한이 중점을 두었는데 유엔국가 과반수의 지지를 확보하여, 주한미군의 유엔군 감투를 벗겨버리면 주한미군 철수 명분을 쥐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구권이 무너지고 소련이 해체되면서 아프리카 외교는 본전도 못찾고 북한에서는 미국과의 직통 대화를 추구하는 대미 외교로 선회 하게 되었다.

이후 유투브와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밝힌 바로는 전두환 암살 작전에 주 자이르 북한 대사관이 거점 역할을 했고, 공작원들을 태우고 아프리카 각지를 이동하며 추적을 피하는 운송책 역할을 수행했다고 한다. 그 때 일본어를 쓰던 공작원 중 한명이 나중에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의 범인으로 미얀마 당국에 체포된 인물이라고 한다.


2.3. 탈북 과정[편집]





이제 만나러 갑니다(이만갑) 574회에 '북한 외교관 1호 망명 사건'으로 그의 망명 스토리가 상세히 소개되었다.[6]

대사관에 있던 보위원이, 외화벌이에서 벌어들인 외화 일부를 빼돌리자고 제안하였으나 당시 대사관의 당세포 비서였던 고영환이 거절한 일로 앙심을 품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이 보위부 요원이 고영환을 험담하고 노리고 있다고 조심하라는 충고를 했지만 고영환은 자기가 그래도 김일성에게 특급 칭찬을 받아 '접견자' 신분인데다가, 김정일이 직접 지시한 전두환 암살 작전에도 참가했고, 친형도 조직 지도부에서 있고 하니 "고작 보위부 요원 주제에 자신을 뭐 어쩌겠나?"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동구권에서 김일성 독재를 따라 배운 차우셰스쿠의 처형 장면을 보며 "우리 조선에서도 저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되는데..." 라고 말을 하다가 평소 사이가 안 좋던 그 보위원이 "김일성도 저렇게 될 수 있다." 라는 말로 곡해하고 왜곡해서 평양에다 보고하였다.

결국, 보고를 받은 북한 당국이 고영환에게 소환 명령을 내린다. 명목상으로는 국제회의에 프랑스어를 잘하는 통역관이 필요하다는 이유였지만, 실제 공항에서는 보위원을 기술자로 속여 체포조로 보냈었다. 이에 고영환은 신변 위협을 느끼고 탈출을 결심하게 된다. 훗날 강적들에 나와서 언급하기로는 자신이 탈출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대사의 안색을 본 후였다고 회고했다. 당시 대사가 외국어에 서툴러 만약에 단순 통역같은 업무로 평양으로 파견을 간다고 하면 평양에 건의라도 해서 자기를 잡았을 사람인데 그런 일도 없었는데다가, 무전수가 고의인지 호의인지 입국자가 건설 인력이 아니라 보위부 사람이라 말을 했고, 대사가 고영환에게 북한에 들어가라는 말을 전하고 표를 세장 끊어 오라고 할 때 대사가 웃지도 않고 무표정하게 이야기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본래는 강에 뛰어들어 자살을 할 생각이었지만 막상 강을 내려다 보니 여기저기에 바위도 있고 물살이 세서 뛰어내리면 많이 아플까봐(...) 마음을 고쳐 먹고 강가에 옷가지를 벗어두어 자살로 위장하고 국경을 넘어 콩고 인접 국가로 간다. 그 나라는 본인이 외교분쟁의 소지가 있어서 어느 나라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 나라로 가서 아프리카의 유력한 정치인 친구에게 자신을 보호해달라고 요청하여 두 달 동안 은신하며 지내게 된다. 그 후 아프리카를 떠날 생각을 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대한민국으로의 망명을 생각지 않았으나 친한 성향의 아프리카 친구가 그에게 한국행을 권유하였다.

그 후 김포공항을 통해 대한민국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고영환이 탈출하자 북한에서는 고영환이 수백만 달러의 자금을 횡령하여 도주하였다고 발표했지만, 당시 자이르(콩고민주공화국) 주재 북한 대사관 1년 총 유지비가 2만달러에서 1만 5천달러로 삭감되어 북한 외교관 부인들은 생활비를 벌러 다른나라 외교공관에 파출부로 일할 정도였다. 고영환이 탈출할 때 수중엔 달랑 100달러만 있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으로 오게 된 날은 1991년 5월이지만 망명 기자 회견은 그 해 9월에 하였다. 처음에는 가족의 신변 때문에 언론에 발표하지 않고 조용히 살려고 했으나 안기부 요원이 언론에 발표하자고 설득해서 결국은 4개월 후에 망명을 대외적으로 발표하였다. 공개 활동을 하는 북한 출신 외교관으로는 고영환이 최초였다.

2.4. 대한민국에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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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한 직후 1991년 기자회견을 가지는 고영환. 이때는 상당히 날씬하고 마른 인상이었다.

망명 초기에는 심적 고생이 대단히 많았다. 북한 특성상 망명한 외교관의 친족들은 당연히 수용소로 보내버렸으며 그에 대한 죄책감으로 매우 괴로운 나날을 보냈었다. 외교관이 됐을 때 가장 옆에서 기뻐해주었던 어머니는 수용소에 끌려간 후 사망했는데 이를 듣고 한참을 오열했다고 하며 지금도 어머니 생각이 나면 눈물이 난다고 한다. 현재에는 외신에 알려질 정도로 이름이 나는 탈북자 가족들은 오히려 안전하다고 한다. 대표적 케이스는 태영호 의원 가족들이 있다. 일반 탈북자와 달리 외교관들은 출신 성분이 좋아서 과거처럼 3대 육촌 혈연까지 연좌해서 죄다 수용소로 보내기엔 오히려 역효과가 크고[7], 이름이 알려진 탈북자의 가족은 유엔이나 기타 외국에서 관심을 가지기 때문에 수용소로는 보내지 못한다.

그래도 주위에서 국무총리를 역임한 박태준 회장 등의 응원을 받으면서 힘을 내고 1993년 2월 15일 7살 연하의 의상 디자이너 김재숙 씨와 결혼하면서 점차 한국 사회에 동화되어 갔다. 그 후 국가안보전략연구원(국정원 산하의 국책연구기관)의 연구원으로 임명되어 북한 전문가로 활동하다가 상임 연구원으로 승진되었고, 2016년 1월 1일자로 부원장직에 재직하다가 현재는 정년 퇴직하고 객원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현직에 있었을때 못한 방송 출연이나 유튜브 강연도 활발히 진행중이다.

TV조선이나 YTN의 시사 프로그램의 북한 전문 패널로 자주 출연한다. 과거 추적 60분에도 북한군 문서 관련으로 출연한 바 있다.

이제 만나러 갑니다(이만갑) 574회에 '북한 외교관 1호 망명 사건'으로 그의 망명 스토리가 상세히 소개되었다.

2023년 9월 6일, 통일부 장관 특별보좌역에 위촉되었다. 2023년 10월 31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본인의 대북관과 향후 정세를 예측하고는 역대 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한 평가를 남겼다. #

3. 기타[편집]


  • 북한에 있을 때 김일성이 그를 좋아했다고 하는데 국내에서 공부하였음에도 외국어를 참 잘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래서 김일성은 본인 명의로 홍삼 열뿌리를 선물해주기도 하였으며, 김영남 외교부장에게도 "국내에서 공부했는데도 이리 외국어를 잘하는데 뭣 때문에 자꾸 외교관들 유학 보내달라면서 달러를 달라고 하느냐?"면서 핀잔도 주었다고 한다. 본인은 이때 김영남한테 내리갈굼을 당할 줄 알았다고 했는데 의외로 별 탈 없이 넘어갔다고 하였다.
  • 1등 서기관 근무 중 소련의 개혁과 개방, 동유럽 공산권의 붕괴,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8]의 총살, 독일의 통일을 보며 많은 충격을 느끼고 가치관의 혼란이 온 것이 망명의 첫 번째 이유였다. 이 혼란 속에서 생각하고 있던 말들[9]이 무의식적으로 입 밖으로 나오자 국가안전보위부의 감시망에 들었다. 곧이어 보위부의 체포조가 자이르로 도착하기 1시간 전 제3국으로 도피하였고 그곳에서 대한민국으로 망명하였다.

  • 탈북 과정에서 고영환은 정보기관의 조사를 받았다. 그때까지 배우기로는 해외에 나와 있는 대한항공 직원들은 다 중앙정보부 특무인 줄로만 알았기에 눈만 마주쳐도 몸을 벌벌 떨면서 달아났고, 입국 직후에도 정보기관에서는 자신의 진술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고문부터 시작하리라 여겼다. 이한영의 경우에는 실제로 자기가 김정일 처조카라고 주장했다가 안기부에서 어디서 그런 황당한 소리를 하느냐고 한동안 고문을 당했다.[10]

  • 탈북 과정에서 북한 외무부와 대사관 외교 문서 원본을 들고 왔는데, 안기부에서 당시까지 김정일의 친필 사인을 확보하지 못했으나 고영환이 들고 온 문서에 암호와 친필이 들어 있어 상당액의 보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 둘 중의 하나만으로도 북한 대사는 정치범 수용소를 면치 못 했을 것이라고 한다.

  • 의외의 정보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가 실제로 군을 통솔하는 조직이 아니라 총참모부의 일개 부서라는 것을 알려줬다. 이는 당시 정보 당국에서도 놀랄 정도였다. 당시까지 최고사령부가 어디 있는지 어떤 규모의 조직인지를 수십년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 이북에 있을 가족들의 신변 때문에 처음에는 언론공개를 꺼렸으나 안기부 요원의 설득으로 공개 활동에 나서게 됐다. 당시 북한에서는 큰 충격으로 와닿았는데, 김정일이 가장 총애했던 사람이 탈북했다는 소식을 듣고 굉장히 분노하여 고 씨의 가족과 친척을 모두 쓸어버리라는 명령을 하였다. 어느 날 어머니가 수용소에 붙잡혀 가던 중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밤새워 오열했다고 한다.
  • 북한에서 겪었던, 들었던 이야기와 외교관으로써의 술회 그리고 대한민국으로 탈북하기 까지의 과정을 담은 저서인 '평양25시'라는 책에서 자세히 볼 수 있다.
  • 같은 탈북 외교관인 태영호 공사와 자주 통화를 한다고 한다. 청와대 국민청원에서 태영호를 북한으로 돌려보내라는 청원과 태영호의 신변을 보호해달라는 청원이 같이 올라오는 것에 대해 태영호가 어리둥절해하자, 여러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 대한민국이라며 돌려보내기를 바라는 자가 있는가 하면 보호하려고 하는 자들도 그 이상으로 있으니까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라고 말했다 한다.
  • 1985년부터 1988년까지 김일성의 프랑스어 통역관을 지냈다. 어느 날 마침 담당 통역관이 독감에 걸리는 바람에 대타로 나섰다가 김일성에 눈에 띄었던 것. 그는 프랑스어권에서 유학하지 않았는데도 프랑스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국산이라고 더욱 칭찬받았다고 한다. 이 일로 외국어 인재들을 유학 보내던 김영남이 그 자리에서 한 소리 들었다고 한다. 또한 이 말은 김일성의 육성으로 이루어진 발언이었기에 김일성 교시로 취급되어, 고영환의 인사문건 맨 앞에 기록되었다고 한다. 고영환은 이때 "비동맹국 흡수와 관련한 정책 제의서"를 적었고 이를 대견하게 본 김정일에게 통역관으로 발탁되었다고 한다. 아프리카 지역에서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하면 프랑스어 통역을 맡으면서 같이 김일성의 지하 벙커에도 들어가보고 김일성의 비행기, 특급 열차, 요트 같은 것을 모두 타 보았다고 한다.
  • 외교관으로서 80여개 나라를 방문하였으나 북한만큼 폐쇄적인 나라는 없다고 평한 바 있다.
  • 자이르(콩고민주공화국)에서 활동할 당시 자이르의 외교관으로부터 "우리나라도 독재국가이지만 당신네 나라는 괴물이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당시 자이르의 대통령이던 모부투 세세 세코도 당대 아프리카 독재자들 중 유난히 악명이 높던 인물이었다. 특히 부패와 무능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라 도둑정치(kleptocracy)라는 신조어까지 나올 정도였다. 실제로 모부투가 얼마나 부패한 인물이었냐면 그가 해외에 은닉한 재산이 자이르 GDP와 맞먹는 수준이었던 데다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이 받던 총 원조액의 절반 가량을 자이르 혼자서 받을 정도였음에도 32년간 집권하면서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1.4%도 안 되었을 정도였다. 모부투는 대외적으로 반공을 내세웠음에도 1974년에 방북했을 때에 북한에 감명을 받아 TV 뉴스를 하늘에서 내려오는 자신의 모습으로 시작하게 하는 등의(...) 우상화 정책을 실시하기도 했다. 국민들은 그의 이름도 함부로 부르지 못하며 '모 아저씨'(Uncle Mo)라고 부를 정도였는데, 그런 독재자 치하에서 살아온 사람마저 '괴물'이라고 평했을 정도였으면 북한의 독재가 어느 정도로 심각한지 알 만하다.
  • 비슷한 일화도 함께 전했는데 한 번은 노로돔 시아누크 캄보디아 국왕이 방북했을 때의 일이다. 김정일은 시아누크를 환영하기 위해 온갖 외설적인 복장으로 치장한 기쁨조의 공연을 선보였다. 그러나 명색이 한 나라의 국왕인 시아누크 입장에선 이는 오히려 불경한 일로 보였고 자동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서 길길이 날뛰며 화를 냈다고 한다. 동승하던 북한 외교관들이 시아누크를 말리다가 결국 자동차의 천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자세를 취하자(‘당신은 도청당하고 있다.’) 그렇게 불같이 화내던 시아누크가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고 한다.
  • 여러모로 북한 세뇌교육의 산증인이기도 한데 본인은 김일성이 진짜 하느님인 줄 알았다고 한다. 자기가 처음에 김일성 곁에서 통역을 수행하러 주석궁에 갔을 때 심장이 너무 쿵쾅거리고 아무 소리도 안 들려서 통역을 못해서 죽을까 엄청 조마조마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김일성을 가까이서 보자 배도 나오고 걸음걸이도 이상하고 목 뒤에 있는 혹이 걸을 때마다 흔들리는 걸 봤는데 그게 좀 깼는지 그때부터 김일성도 인간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됐다고 밝혔다.
  • 처음에 한국에 올 때 한강의 기적을 보고 대단히 감동하면서도 자신이 북한 관련 발언을 하면 아직도 냉전시대 사고에 젖어 있다며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어서 이 부분은 실망했다고 한다.
  • 인생에서 죽을 뻔한 적이 총 3번 있었다. 첫번째, 김일성, 김정일 사진이 든 액자의 먼지를 청소하다가 실수로 액자를 떨어뜨렸는데 다행히 유리만 깨지고 사진 자체는 멀쩡해서 살아남았다. 두번째는 조선로동당 주관 정신교육시간때 있었다. 이 당시 "남조선에는 600만의 매춘부와 60만의 에이즈 환자가 존재한다."는 간부의 말에 한 동료가 "아니, 1,800만 여성 중에 600만이 매춘부이고 60만이 에이즈에 걸렸는데 어떻게 그런 곳이 아직까지 존속을 할 수 있나?"라고 의문을 제기했는데 고영환은 이 말을 듣고도 당에 보고하지 않아 수용소로 갈 뻔하다 15일 동안 온갖 반성문을 쓰면서 자아비판을 한 끝에 용서를 받았다. 이때 동료가 말한 것 중 김씨 부자에 관한 얘기가 없어서 망정이었지, 김씨 부자 얘기가 나왔었다면 그 자리에서 끝났을 거라고 한다. 3번째로 망명하면서 온갖 고생을 다해서 죽을 뻔했다.
  • 한국에도 이름이 낯익은 김영남, 강석주를 북한 외교부 근무 시절 상관으로 모신 얘기를 많이 한다. 훗날 외무부 제1부상 김계관은 아내가 김일성의 후처 김성애의 프랑스어 통역을 한 경력으로 찍혀 80년대 후반에도 자기 10년 선배이면서도 자기보다 지위가 낮았다고 한다.
  • 자이르(콩고민주공화국) 근무 당시 김정일의 지령으로 1982년 가봉에서 전두환 암살조에 안내조로 들어가 합류했다고 한다. 작전 개시 직전 김일성의 중지 지시로 무산되었는데 가봉이 친 북한국가인데다가 아프리카에서 테러를 하면 40여개 아프리카 국가들이 북한을 비난하게 되기 때문에 다음해 버마에서 테러를 했다고 한다. 당시 버마에서 공작원이 자기가 가봉에서 본 공작원과 같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일본 여권을 쓰고 장발을 하고 다녀서 한국어를 못 알아 듣는줄 알고 몇 주 동안 실컷 욕을 했다고 한다.
  • 영화 모가디슈(2021) 리뷰를 했다. 재밌고 감명 깊게 보았지만 영화와 실제는 조금 차이가 난다고 했다. 고영환은 소말리아 정부에게 서울 올림픽에 참가하지 말라고 선전하기 위해 이미 모가디슈를 방문한 적이 있다. 90년대는 이미 남북 국력 차이가 기울어져서 더 이상 외교전을 벌이던 시기가 아니고 90년대는 북한 외교의 중심이 아프리카 등 제 3세계에서 대미외교로 선회했기 때문이다. 치열한 3세계 외교전이 종식된 것은 의외로 박정희 시대로, 남북한 모두 유엔 총회에서 더 많은 지지표를 얻기 위한 똥꼬쇼에 매달렸는데 1974년에 남북한 지지결의안이 죄다 통과되면서 이를 병림픽이란 것을 깨닫고 돈낭비를 중단했다. 물론 현실적인 필요에 따른 견제는 어느 정도 했고 친북국가들과의 수교를 위한 투자외교는 이어졌으나 90년대 들어서는 순전히 북한 견제를 위해서 어거지로 설치했던 주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대사관을 철수하는 등 3세계에 대한 투자를 더 줄여버렸다.
  • 문재인 정부에 대하여 평가를 내렸다. 임기가 3달도 남지 않은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 잔소리를 많이 하고 싶지는 않지만, 대북 정책에 대해서 비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밝혔는데, 대북 관계를 지나치게 순진하게 접근했다는 것이 주요 비판 사안이다.


4. 경력[편집]


1979년 6월
정무원 외교부 동아프리카 담당 보조 지도원
1980년 2월
자이르 주재 대사관 3등 서기관
1985년 2월
정무원 외교부 동아프리카 담당 지도원
1987년 1월
정무원 외교부 중부아프리카 담당 과장
1988년 11월
자이르 주재 대사관 참사관
1989년 11월
콩고 주재 대사관 참사관

5. 저서[편집]


  • 평양 25시(서울: 고려원, 1992). 이후 平壌25時 - 金王朝の内幕라는 제목으로 일본에 정발.
  • 亡命高官の見た金正日(망명고관이 본 김정일)(東京: 徳間書店, 1995). 고영환의 책 중 유일하게 일본에서만 출간되었다. 신동아 등에서 서지사항을 밝히지 않고 마치 한국에서 출판된 책인 것처럼 인용했지만 한국어판은 없으므로 낚이지 않게 주의.
  • 김일성의 꿈, 서울에서 이루어지다(서울: 조선일보사, 2000). 이후 ソウル暮らし平壌暮らし라는 제목으로 일본에 정발. 조선일보사에서 나오다보니 당시 김대중 용공론을 한창 내세우던 조선일보 논조를 따라서 김대중이 김일성 간첩인것처럼 욕하는 책이 아닐까 오해할 수 있는데 단순히 고영환의 서울살이를 다룬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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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딸은 서울 모 대학의 영어영문학과에 재학 중이며, 아버지를 이어 외교관이 되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2] 현재는 남한은 초등학교, 북한은 소학교로 각각 명칭이 바뀌었다.[3] 남한으로 치면 지방자치 시대 이전 관선 시장과 유사하나 북한 체제는 로동당 우위의 지배체제이므로 시당 책임비서 보다 낮고, 실질적으로는 당책임비서 밑급인 조직담당 부국장이나 선전부국장 보다 떨어진다. 내각의 상(장관)도 로동당 부장보다 낮으며, 부부장급 대우이다.[4] 김일성이 고영환이 너무 말랐다고 몸 보신 하라고 내렸다고 한다.[5] 이후 그 잔해는 김정일의 명령으로 철거되었으며 대신 그 자리에 평양제일중학교가 들어섰다.[6] 방송에서 간략하게 나온 이야기나 생략된 일화나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유투브에서 밝힌 바가 있다.[7] 태영호 의원만 해도 처가 쪽이 김일성과 함께 빨치산 활동을 했던 북한 내에서 핵심 중에 핵심이라고 한다. 그래서 본인이 귀순했을 때도 감시만 붙이는 선에서 끝났다고.[8] 김일성을 매우 존경한 인물이었다.[9] 이들 중에는 "우리 나라에서도 저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라는 말도 있었는데, 공관에 나와 있던 국가보위부 파견관이 "김일성 주석님도 차우셰스쿠처럼 처형될 수 있다"로 곡해해서 평양 본부에 전달했다고 한다.[10] 국내 정보기관에선 오래전부터 신원이 불분명한 탈북자는 일단 간첩으로 간주하고 무조건 고문으로 조사를 시작하는 관행이 있었다. 이런 악습은 1998년 김대중 집권과 함께 사라졌다. 고영환은 이미 외교관으로 대한민국 정부도 신원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문을 피한 것이며, 이한영은 그 이전에는 전혀 드러나지 않던 인물이라 당시 관행상 고문을 당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