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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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철
Kim Man-chul | 金萬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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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철 일가가 대한민국에 입국할 당시(47세)[1]

파일:김만철(1940).jpg

2007년(67세)
이름
김만철(金萬鐵)
출생
1940년 8월 1일 (83세)[2]
함경남도 청진시
자녀
장남 김광규[3], 장녀 김광옥[4], 차남 김명일[5], 차녀 김광숙[6], 삼남 김광호[7]
1. 개요
3. 김만철은 말한다
4. 탈북 이후
5. 관련 자료
6.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청진시 출신의 탈북자다. 최불암과 동갑내기라서 현재는 83세의 엄청난 고령이다. 그의 자녀들도 47~58세의 중년이다. 2007년 기준으로 막내아들을 제외하면 모두 자녀를 얻었으며, 2014년 기준으로 막내아들도 자녀를 얻어 많은 손주를 가지고 있다.

김만철의 고향(본적지로 추정)은 옛 전라남도 광산군 비아면(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비아동) 이었고 8.15 해방 전, 먹고 살기 위해 북으로 갔다고 한다. 큰누님은 당시 시집을 갔기 때문에 남쪽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탈북 당시 이미 남한에 정착해 있던 큰누나를 포함해 3남 5녀 중 김만철은 여섯째였다. 그 가운데 김만철의 막내동생은 평양과 청진으로 떨어져 살았는데, 모르는 사이 막내동생이 소련으로 유학을 간다. 그런데 막내동생은 1975년에 소련에서 강제 소환되어 1개월도 못되어 총살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막내동생의 '죄'는 현지 동료들에게 북한의 실상을 불평하며 드러내놓고 비판한 죄였다. 소련과 동유럽권 국가들은 북한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였지만, 사회 분위기가 북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유로웠다. 특히, 학문의 영역에선 광범위한 자유가 법적으로 보장됐기 때문에,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도 가능하다. 하지만 북한은 주체사상이 사회에 확산하며 김정일 후계화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이나 동구권 유학 경력이 있는 이들에겐 지옥이나 다름이 없었다. 북한 내에서 유학생들의 부적응 사례는 지속적으로 있었으며, 극단적인 사례가 바로 프룬제 군사대학 쿠데타 모의 사건이다.

막내 동생의 죽음 이전 김만철 가족은 일제강점기때 아버지의 항일 공로를 인정받아 북한에선 좋은 출신 성분으로 인정받았다. 김만철의 아버지는 북한에서 평양의대 다음가는 청진의대의 교수였다. 막내동생이 소련으로 유학을 갈 수 있었던 이유도 이런 출신배경으로 보인다. 하지만 동생의 총살 직후 반동분자의 가족으로 몰려 아버지가 대학교수 자리에서 쫓겨나고 의사 직함도 빼앗겼다. 문제는 일반 의사의 경우 북한에서 높게 쳐주지 않으며, 의사 인력이 넘쳐나는데다 무상의료라는 특성상 봉급 수준이 높지 않았다는 것이다.[8] 김만철이 우대를 받았던 이유는 의사라서가 아니라 대학교 교수여서인데, 그런 높은 자리를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한순간에 파직됬으니 상당히 억울했을만하다.

결국 동생의 죽음과 연좌제의 부당함을 겪은 김만철은 이때부터 북한을 탈출하기로 마음먹었다.


2. 탈북[편집]


김만철은 12년간 북한을 탈출하기 위한 준비를 했는데, 해로를 사용하기로 결정한 뒤에는 선의에 지원하여 배를 모는 법에 대해 알아내고, 배(청진호)에 대한 정보를 얻는 등 직접 몸으로 능력을 기르며 계획을 구체화해 나갔다. 청진호의 경우 과거 공작선으로 사용되던 배로서 역할을 마쳤는데, 이 배를 이용하기 위해서 직접 수리 기술을 익히고 보수를 하는 등 하나부터 열까지 자급자족할 능력을 기르기 위해 노력했다. 대부분의 가족들에게 극비리에 계획을 진행했지만, 큰조카에게는 청진항에서 배를 타는 일을 하게 하기도 했다. 이 경험은 도주 시 침투 방지 구조물(그물)이 있는 해역을 알고 피해가는 도움이 되었다.

1987년 1월 15일 새벽 1시에 김만철은 청진항에서 50t급 청진호를 몰래 탈취한 뒤 일가족 11명을 태우고 동해 한복판까지 도주했다. 온가족이 함께 탈출하기 위해서 투병 중이던 가족을 요양원에서 빼내오기까지 했다. 초기 계획에서는 적국인 한국으로 갈 생각은 없었고, 필리핀으로 간 다음 적당한 섬에서 생존 및 물자확보 존버를 하다가 브루나이를 거쳐 브라질로 갈 장대한 계획이었다. 여러 번 언급되는 '따뜻한 남쪽 나라' 라는 표현은 단번에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고 제 3국을 전전하더라도 이상향을 찾아가겠다는 이러한 점진적 계획 덕이다.

그러나 태풍을 만나 길을 잃은데다 엔진이 고장나는 바람에 일본의 야마모토 근처에서 표류하다가 1월 20일, 일본 후쿠이 외항에 도착했다. 다음 날인 1월 21일, 일본 해상보안청은 김만철 일가가 승선한 청진호를 츠루가항으로 예인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김만철씨 일가의 탈북이 처음으로 공개되면서 전세계 언론에 보도된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통역으로 하필이면 조총련간첩인 '마츠야마'를 보냈고, 마츠야마는 한국 망명은 위험하다고 위협하였다.

1월 22일, 김만철은 공식적으로 망명을 요구하였다. 조총련 본부 간부들이 찾아와서 "한국에 가면 모두 죽게 된다." 라고 협박하였고, 이 때문에 김만철 일행은 망명지를 놓고 가족 간에 의견이 엇갈리기 시작했는데, 특히 큰처남인 최정섭(30)(1957년생, 현재 67세)도 한국행을 주저하였다.# 특히 처남은 그 때 배 안에서 단식투쟁까지 벌이면서 가족들과 험악해질 정도로 반대했다고 전해진다.

1월 23일, 해상보안청은 단순표류로 규정해서 식량 공급과 기관 수리 후 공해상으로 내보낸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실제로 기관수리 작업을 하지는 않았는데, 시간을 끌기 위한 발표였던걸로 보인다.

1월 24일, 북한 적십자사가 기관고장으로 단순표류한 자국민들이라면서 김만철 일가의 송환을 공식요구하였다.

1월 28일, 김창섭 나고야 총영사가 직접 선박에 탑승해서 김만철 일가를 만났다. 이때 김만철은 남도 북도 아닌 제3국행을 요구하면서 따뜻한 남쪽 나라에 가고 싶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런 와중에 물밑에서는 김만철 일가를 둘러싸고 대한민국-북한-일본의 치열한 외교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일본은 초기에는 북한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고, 김만철 일가도 처음부터 명확하게 대한민국행을 요구하고 있진 않았다. 단지 이대로 있다간 북한에 끌려가서 무슨 짓거리를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절대 북한만은 안 된다"는 일념으로 제3국 망명을 강력히 희망했다. 하지만, 정작 김만철 일가 내에서도 행선지가 합의되지 않았다. 북쪽에서 오래 살아서인지 처음 탈북 때부터 김만철은 남한은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남쪽 대표단의 설득으로 대한민국행을 결심하고, 이를 일가족에게 밀여붙였다. 이 당시 대표단에 김신조이웅평이 동행했다고 하는데, 서울을 찍은 온갖 사진과 필름을 보여주고, 이웅평은 자동차키 여러 개를 보여주면서 "나는 부모형제를 두고 홀로 내려와 이렇게 매일 눈물로 보내고 있는데, 댁들은 부모형제를 다 모시고 계시면서 왜 자유로운 남한으로 귀순하지 않으려고 하십니까. 저도 이만큼 잘 살고 있으니 꼭 대한민국으로 귀순을 하세요." 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특히 김신조는 김만철과 같은 동향인 청진 출신에다가 살던 동네까지 같았다고 하며, 김만철을 만나자 "만철이 형 아니오! 나 신조요. 정미소 집 아들." 이라면서 반가워했다고 한다. 반면에 조총련은 츠루가 해상보안청사에서 북송 촉구 시위를 전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대만 정부와의 협상을 계속한다. 중화민국 대사를 역임한 김신이 비밀리에 특사로 파견되었고, 당시 총통은 김신의 아버지와 각별했던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였다. 협상 끝에 2월 3일, 단기체류 형식으로 김만철 일가족이 대만으로 가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장징궈가 김신에게 약속한 건 최소한의 시간(24시간) 뿐이었으나, 그 뒤 대한민국 정부가 끈질기게 협상해서 48시간으로 늘렸다. 이에 따라 일본은 김만철과 그 가족들을 대만으로 추방했다. 2월 7일 새벽에 김만철 일가족은 오키나와를 거쳐 대만에 도착했다.

이 순간까지도 김만철 일가족 중에서 남한행에 반대하면서, 애초 목적대로 따뜻한 남쪽 나라 제3국으로 가자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김만철과 가족들이 대만에 머무는 시간은 오로지 김만철 일가를 한국으로 데려오고자 한국 정부가 설득한 시간이었고, 결국 이들이 한국행을 택하고 대만을 떠난 건 대만에 도착한 지 19시간만이었다. 다음 날인 2월 8일 오후 대한민국 정부는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비밀작전을 통해 김만철과 그 일가족들을 김포공항에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당시를 회고하는 기사 마지막까지도 최정섭씨 같은 경우엔 대한민국의 자유와 풍요를 진심으로는 믿지 않고 있었고, 어차피 다른데로는 못 갈 외통수인 상황이니 끌려갈 바에 맞부딪쳐보겠다는 심정이었다고 한다.

3. 김만철은 말한다[편집]


서울 정착 직후 <김만철은 말한다>라는 수기집을 발간하였다. 다음은 책의 머리말이다.

아, 따뜻한 남쪽나라

1987년 1월 14일 밤, 40여 년에 걸친 북반부 생활에 절망을 느끼고 10명의 가족과 함께 청진항을 떠난 저는, 따뜻한 남쪽나라에 가겠다는 일념으로 남쪽으로 항행하던 도중 뜻밖의 폭풍을 만나 일본 해안에 포착, 대만을 거쳐 대한민국으로 오기까지의 25일 동안 수없이 많은 번민을 거듭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이날 이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남조선은 병마의 소굴이고 거지가 득시글 거리는 생지옥이라고 들어온 저희들은 당초부터 남조선에 간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일본에서 한국소개 책자와 비디오를 보고 영사관 선생님들의 친절한 설명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한구석에는 어딘가 찜찜한 생각이 남아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더구나 저의 젊은 처남들은 얼마나 철저하게 세뇌교육을 받았던지 대만에서 한국으로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남조선으로 가는 것을 반대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아무리 남조선이 못 살더라도 북반부보다야 낫겠지’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남조선행을 결심한 저는 사실 무거운 마음으로 2월 8일 밤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쭈볏거리는 마음으로 첫나들이를 나선 이튿날, 저희들은 눈앞에 펼쳐져 가는 너무나도 놀라운 광경들에 넋을 잃고 말았습니다. 숲처럼 늘어서 있는 높은 빌딩, 쭉쭉 뻗은 도로와 자동차의 물결, 상점마다 쌓여 있는 화려한 상품들, 그림같이 아름다운 한강변의 아파트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활달하고 밝은 표정, 그 눈부신 의상들, 공원에서 만난 시민들의 자유스럽고 단란한 모습, 서울타워(남산)에서 내려다 본 영웅적인 도시, 수도 서울의 장엄하고 위대한 광경 - 그 어느 것 하나 저희들에게는 신기하고 경이롭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7개월, 저희들은 날마다 놀라움의 연속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그렇게도 완강히 남조선행을 반대했던 큰처남 정섭이는 마침내 이렇게 외치고 말았습니다.

“아, 따뜻한 남쪽나라! 매부, 여기가 바로 매부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따뜻한 남쪽나라군요.”

저는 그 말을 듣고 목이 메었습니다. 정섭이를 그토록 감동시킨 것은 결코 제가 아닙니다. 저희들을 따뜻하게 안아준 우리 조국 대한민국이었습니다.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 주신 국민 여러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책을 쓰시고 발간해 주신 여러 선생님들께도 가족을 대표하여 진심으로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

1987년 8월 14일

김 만 철


4. 탈북 이후[편집]


김만철과 그의 일가족들은 탈북한 이후 대한민국에서 주는 정착금을 받고, 그의 아들 김광규는 대학입학시험을 치르고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 진학했다. 북한에서는 출신성분이 낮아서 입학할 수가 없었던 대학교에 진학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김만철이 바라던 따뜻한 남쪽 나라였다.

그러나 김만철은 북한에서 취득한 의사 자격이 인정되지 않아 남한에서는 다른 직업을 구해야 했고,[9] 그의 가족들은 대한민국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물정을 모르는 상태에서 사기를 여러번 당하게 된다. 초기에는 강연을 다니면서 돈을 벌었고 이후에는 종교생활을 시작했는데, 경상남도남해군에 세운 기도원은 담당하던 목사가 돈 빌려서 해외로 도주하면서 결국 기도원을 매각해서 빚을 갚았다. 이후에도 제주도 기획부동산에 속거나, 서울에서 교회를 다니다가 교회에서 만난 사람에게 속아서 사기 혐의로 고소당하는 등 20년간 10억원을 사기당했다. 저 종교생활 중에 일부는 영생교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2007년에 이르러 컨테이너에서 거주하면서 일용직으로 겨우 숙식을 해결할 만큼 매우 어려운 고난을 겪었지만, 모 종교단체의 도움으로 재기하여 2010년부터 경기도광주시에서 소규모의 양계장을 운영하면서 장뇌삼도 재배하고 있다. 김씨와 함께 귀순한 대가족의 식구들 가운데 68세에 귀순한 최연장자로서 김씨의 장모였던 허문하씨는 2011년에 향년 92세로 눈을 감았다.

하지만 적응에 어려워했던 친부모 세대와 달리 탈북하던 시기에 10대였던[10] 자녀들은 잘 적응했다. 김만철씨의 첫째이자 장남 김광규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대한주택공사에 입사했다. 둘째이자 장녀 김광옥은 시내버스 운전기사로 일하다 화물자동차 운전기사를 만나 결혼했다. 셋째이자 차남 김명일은 신학대를 졸업하고 의자를 제작하는 중소기업중역이 되었다. 넷째이자 차녀 김광숙은 전업주부로 같은 탈북자(군인) 출신인 한용수와 결혼했으니, 최초의 탈북자 부부로서 유명해졌다. 차녀의 남편이자 둘째 사위인 한용수는 서울교통공사에서 근무하며 역무원을 거쳐 차장이 되었다. 막내이자 삼남 김광호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미국 유학을 떠나 UCLA 우주공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대학교 대학원천체물리학 전공으로 석사학위박사학위를 모두 취득했다. 그는 일본인 여성과 혼인한 뒤에 영어 회화수학을 함께 가르치는 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초등학생 시절 당시의 남한 아이들과의 일상 및 과거 북한에 있었을 때의 기억을 일기로 엮은 '광호의 일기'라는 책을 냈다. 기실 김만철씨 역시 사기만 안 당했더라면 백만장자로서 크게 성공한 탈북민이었을 것이다. 자식 세대는 모두 재정착에 성공하여 사기 피해를 덮을 수 있었던 것이 천만다행이다.

5. 관련 자료[편집]


  • 도서
    • 따뜻한 남쪽나라로: 김만철씨 일가 북한 탈출기 - 김정우/정옥화 저. 성지. 1987.
    • 남·북실상 비교 증언집: 북괴탈출, 김만철가족 11명 - 북한연구소. 1987.
    • 아! 대한민국: 김만철 김광호 일가 북한 탈출기 - 김정우 저. 성지. 1987.
    • 아, 따뜻한 남쪽나라: 김만철 일가 북한탈출 비화 - 문용수 저. 지문사. 1987.
    • 김만철 선생 탈북스토리: 따뜻한 남쪽나라를 찾아서(구술) - 박준구 그림 / 해인 편집부 정리. 해인. 2016.

  • 연재물
    • "고생 수태 했슴메" - 김만철 씨가 말하는 북한생활 40년 (1987.04.15 ~ 1987.04.20. 동아일보)
    • 추웠던 북녘 (1987.04.15 ~ 1987.04.21. 경향신문)
    • 사선을 넘어서: 청진서 서울까지 동토탈출기[11] (1987.04.15 ~ 1987.04.17. 중앙일보)
    • 잃어버린 40년: 김만철 씨가 말하는 북한생활[12] (1987.04.16 ~ 1987.04.19. 조선일보)

  • KBS 뉴스 9 홈페이지의 다시보기와 MBC 20년 뉴스 보기에서 관련 기사를 볼 수 있다. 80년대 군사정권시기 탈북 사례 중 유일하게 업로드되어 있는 방송 기사라[13]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6. 대중매체에서[편집]


  • 따뜻한 남쪽나라(KBS1): 1988년 2월 10~11일에 방송된 반공특집드라마로, 극본은 윤혁민, 연출은 전세권 PD가 각각 맡았으며, 김만철 역은 외모가 비슷한 연극배우 윤주상이 맡았으며, 부인 역은 김성주, 장모 역은 유명순, 처제 역은 김동녀, 매형 역은 최금규, 맏딸은 강미숙, 막내아들은 정명현 등이 각각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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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운데에 꽃다발 목걸이를 한 사람이 김만철씨다.[2] 주민등록번호 기준이지만 1940.8.1으로 나왔다.#[3] 1966년생.[4] 1970년생.[5] 1973년생.[6] 1975년생.[7] 1977년생.[8] 공산권 국가 및 국가주도 무상의료를 하는 국가에서 이러한 경향이 있는데, 공무원이다보니 사실상 봉급쟁이이고, 타공무직에 비해 실적 쌓기도 힘들다보니 공부잘한 중급 공무원 대접이상 받기 힘들다고 한다. 특히 공산권의 경우에는 의료인력도 많았으니... 이때문에 소련에서는 의사와 병원청소부의 월급이 비슷했다는 이야기가 있다.[9] 자유직업인(의사, 약사, 간호사, 변호사, 회계사, 속기사) 자격증은 A국에서 땄으면 A국에서만 유효하고, B국에서 땄으면 B국에서만 유효하다. 그러나 학력(초중고등학교 졸업 및 대학교의 학석박사 졸업)은 얘기가 다른데, 선진국에서 졸업하면 후진국에서도 유효하지만, 후진국에서 졸업하면 선진국에서는 초중고등학교 졸업에 대하여 모두 인정하거나 조건부(중졸초졸, 고졸중졸)로 인정하고, 학석박사 졸업에 대하여 아예 인정하지 않거나 조건부로(학사학위 졸업 → 전문대학 졸업) 인정하기 마련이다. 실제로 아디스아바바 대학교에서 학사학위와 석사학위를 모두 받은 에티오피아계 유대인 남성이 이스라엘국에 귀순했는데, 이스라엘 학계에서는 석사학위 졸업을 학사학위 졸업으로 재평가했으니,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에서 석박사 통합과정으로 공부하면서 박사학위수여받은 다음에 텔아비브 대학교부교수되었다고 카더라(...) [10] 자녀 중에서 첫째 아들만 당시 만 21세의 유일한 성인이었다.[11] 김창욱&이덕령 기자 글.[12] 김효재 기자 글.[13] 그 전의 탈북 사례는 방송사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지 않고 대한뉴스 자료로 공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