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신선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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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창덕궁 서북쪽에 있는 선원전이다. 선원전은 역대 왕들의 어진[2] 을 모시고 제사 지내던 진전(眞殿)이다. 쉽게 말해 종묘가 궁궐 밖에 있는,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사당이라면, 선원전은 궁궐 안에 있는 왕실의 사당이다.
이름 '선원(璿源)'은 '왕실의 유구한 뿌리'란 뜻으로 《구당서》의 〈열전 - 공의태자 소〉에서 유래했다. 글자 뜻을 그대로 풀면 '아름다운 옥(璿)의 뿌리(源)'로, 왕실을 옥에 비유하여 '구슬의 근원', 또는 '구슬같은 뿌리'란 의미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3][5]
일제강점기에 세운 것이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이 건물이 조선시대 창덕궁에서 쓰인 적은 없다.
현재는 비공개 구역이다.
2. 역사[편집]
원래의 창덕궁 선원전 역사에 대해서는 창덕궁 선원전 문서 참조.
덕수궁에 살던 고종이 승하한 이후 일제는 1920년에 덕수궁 선원전 부지를 민간에 매각했고, 1921년 3월에 선원전 건물을 창덕궁 서북쪽 옛 대보단과 옛 훈련도감의 북영 자리로 옮겨 지은 뒤 새로운 선원전으로 사용하게 했다.# 그래서 '새로운 선원전'이란 뜻의 '신선원전(新璿源殿)'으로 불렸다.
대보단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기 위한 차원에서 명나라 황제[6] 에게 제사를 지내려 만든 제단이다. 일제가 대보단을 허물고 굳이 선원전을 옮겨 지은 것은, 중국의 영향력을 제거함과 동시에 한국 황실을 능멸하고 일본의 종주권을 보다 확실하게 심는 효과를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건립 직후 옛 창덕궁 선원전에서 태조, 숙종, 영조, 정조, 순조, 문조, 헌종의, 영희전에서 세조, 원종의, 그리고 천한각에서 철종, 중화전에서 고종의 어진을 옮겨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나중에 순종의 초상화도 모셔 총 12점의 어진을 봉안했다. 신선원전에 있던 어진은 6.25 전쟁 때 화를 피해 부산으로 옮겨졌다가 안타깝게도 1954년 부산 용두산 대화재로 대부분 불타 없어졌다. 그 중에 영조의 초상화와 타고 남은 태조, 문조, 철종 초상화만이 전한다.#
3. 구조[편집]
- 장대석을 4단으로 쌓은 기단 앞에 삼태극 무늬의 소맷돌을 둔 3칸 반짜리 계단을 앞면에 3세트, 소맷돌 없는 3칸 반 짜리 계단을 양 측면에 하나씩 놓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기단 앞엔 박석을 깐 넓은 월대를 설치하여 위엄을 돋보이게 했다. 정면 14칸, 측면 4칸, 무려 총 56칸의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며,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 공포는 이익공 양식이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양성바름을 하고 취두와 용두, 5개의 잡상을 놓았다.
- 바깥 면의 경우, 동, 서 양 측면과 남쪽의 툇간 부분은 전부 창방 위에 교창을 두고 띠살문으로 마감했다. 남면은 툇간을 제외하고 전부 툇마루를 밖으로 통하게 두어 출입할 수 있게 했으며 툇마루 안쪽의 문 역시 띠살 무늬의 사분합문으로 되어있다. 또한 각 분합문 기둥 사이의 하단부에 흰 칠을 하고 파란 선을 그었다. 북면은 기단 부분을 제외하고 전부 전돌로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