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수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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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창덕궁 수정전
昌德宮 壽靜殿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2-71번지)
건축시기
1623년 이전 (창건 추정)
1654년 (개수)
1881년 (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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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궐도〉에서 묘사한 수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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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전 현판[1]
1. 개요
2. 역사
3. 구조
4. 여담




1. 개요[편집]


창덕궁의 대비전(大妃殿) 중 하나로, 경훈각의 서북쪽에 있었다. 처음 이름은 수정당(壽靜堂)이었다. 현재는 없다.


2. 역사[편집]


창건 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궁궐지》에 ‘인조반정으로 궁궐 안이 모두 탔으나 수정당만 남게 되었다’는 내용이 있는 것을 보아 적어도 광해군 때에는 지은 듯 하다.

효종이 1654년(효종 5년)에 창경궁 통명전에 머물던 자의대비 조씨(장렬왕후)[2]가 아프자 창덕궁에 모시려고 기존의 있던 건물을 수리, 증축하여 고쳐지었다. 정언[3] 이상진의 상소문을 볼 때 원래는 가볍게 놀던 공간이었던 듯 하다.#

그러나 병이 잘 낫지 않자 자의대비는 옛 총부로 거처를 옮겼다. 하지만 그 곳이 살기 불편하여 곧 수정당으로 돌아왔고, 이에 효종은 불과 1년 뒤인(...) 1655년(효종 6년)에 '수정당이 산을 등져있어 비좁다'면서# 만수전이란 대비전을 따로 지었다. 만수전 완공 후 자의대비는 그 곳에서 머물렀다.#

정조 시기에는 정조의 법적 할머니[4] 예순대비(정순왕후)가 사용했으며 1794년(정조 18년) 12월에는 예순대비와 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에게 책보와 책인을 이 곳에서 올리면서 이름 역시 ‘당(堂)’보다 더 위계가 높은 ‘전(殿)’을 붙여 수정전(壽靜殿)으로 고쳤다.

1813년(순조 13년)에는 수정전의 행각이 불탔으나 수정전 본채는 무사했다. 1881년(고종 18년)에는 수정전 영역을 정비했고#, 같은 해 이름을 함녕전[5]으로 바꿨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재로 불 타 사라졌다.# 직후 바로 복구 공사에 들어갔지만 1882년 고종이 중단시켰고# 조선 멸망 때까지 끝내 재건하지 않았다. [6][7]

1891년(고종 28년) 함녕전의 별당들을 경복궁으로 옮겨 지었다. 그 중 하나가 현재 경복궁 건청궁의 서쪽에 있는 중국풍 건물 집옥재이다.


3. 구조[편집]


  • 동궐도》를 보면, 지붕은 팔작지붕에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양성바름을 하고 취두와 용두를 올린 모습이다. 정면 앞의 1열은 하단에 기둥을 놓아 누각처럼 보이게 했으며 정면 출입 칸에 월대를 4단으로 쌓았고 월대에서 건물로 올라가는 부분엔 작은 사다리를 2개 놓았다.

  • 정면 6칸, 측면 3칸으로 정면 기준 가운데 2칸은 대청이고 대청 앞엔 툇마루를 밖으로 두어 건물 내부로 출입할 수 있게 했다. 대청의 좌우로는 2칸씩 온돌방을 두었다. 동, 서 양 옆에 익각[8]을 두었고 익각은 행각과 붙어있어, 건물과 행각이 하나되는 ‘ㅁ’자 구조를 형성했다. 동쪽 온돌방과 동익각 외곽에는 가퇴를 두고 그 밑을 긴 나무 기둥으로 받치게 했다.

  • 수정전 주변에는 많은 들이 있는데, 수정전 영역으로 들어가는 정문은 영훈문(迎薰門)이다. 단, 영훈문으로 들어와서 수정전이 바로 보이는 것이 아니고, 중간에 널빤지로 된 담장과 그 담장 가운데에 있는 2칸짜리 솟을 문을 지나야 비로소 수정전이 보인다. 이렇게 동선이 복잡한 것은 아마 왕실 여성의 공간이라, 외부에서 쉽게 들여다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인 듯하다. 수정전 동북쪽 행각의 툇마루는 특이하게도 건물 밖으로 이어져있는데 툇마루 북쪽 끝으로 읍청문(浥淸門)과 연결된다.#


4. 여담[편집]


  • 1800년(정조 24년) 6월에 정조가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수정전'이었다.# 당시 수정전에 거처했던 예순대비(정순왕후)를 찾은 것. 부른 이유는 알려져있지 않지만 정황 상 뒷일을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기려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
[1]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2] 인조계비. 효종계모이다.[3] 임금에게 목숨 걸고 간언하는 사간원(司諫院)의 정6품 관원.[4] 할아버지 영조계비이니 할머니가 맞긴 한데 정조보다 불과 7살 위이다.(...)[5] 덕수궁의 침전 함녕전과는 이름만 같다.[6] 다만 국권피탈까지 재건되지 않았다는 이 부분은 좀 의아하고 더 명확히 확인해봐야하는데, 1891년 7월 8일의 실록과 승정원일기 기사에서 함녕전의 상량문 제술(대들보를 올릴 때 쓰는 축문같은 것)과 옮겨짓는 길일을 고르는 기사가 확인된다. ### 함녕전의 부속건물을 옮길 때는 따로이 '함녕전의 제전각, 부속건물(별당)'로 구분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부속건물을 따로 함녕전으로 통칭하진 않았을 것이고, 옮겨짓는다는 것을 보면 1891년 당시 창덕궁의 건물들을 경복궁으로 옮기는 공사가 있었으니 함녕전을 재건해서 경복궁으로 옮겼을 것이라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함녕전이 경복궁으로 옮겨졌다면 일제강점기 때 또 헐려나갔을 것이다.[7] 그런데 9년간 중지한 공사를 재개한 것에 대한 서술은 없이 갑자기 1891년의 서술이 나타나는 것이 좀 의뭉스럽긴 하다.[8] 가장 메인이 되는 집채의 좌, 우편에 날개(翼)처럼 딸려 있는 전각(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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